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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의 권>
2002-02-28

파워에 대한 유혹

500원짜리 손바닥만한 해적판으로 일본만화를 보던 시절, <북두의 권>(혹은 <북두신권>)은 꽤 인상적인 만화였다. 하도 인기있다 보니 판본도 여러 가지여서 800원짜리, 1500원짜리로도 나왔고, 특히 1500원짜리는 오히려 판형이 지금 나오는 정식 라이선스본보다도 컸다. 1500원짜리 <북두의 권> 표지에 크게 “도쿄대 학생들이 뽑은 최고 인기만화”라는 쓰여져 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중국에서 전해진 비전의 암살권 `북두신권`을 이어받은 주인공 켄이 핵전쟁 뒤 피폐해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 무정부 세계를 지배하는 건 폭력과 힘뿐이다. 약한 사람은 폭력배 무리 앞에 굴복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북두신권의 계승자 켄과 같은 사문의 사형제들에게는 상당히 편리한 세상인 셈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정의를 위해, 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해 세우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여기저기 유랑하는 켄의 눈을 통해 그려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만화의 재미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폭력 자체에 있다. 북두신권은 에너지를 모아 상대의 비공에 찔러넣는 무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상처도 남지 않는다. 적은 이미 당한 줄 모르고 거들먹거린다. “네까짓 놈 주먹은 모기가 문 것보다도 못하군.” 여기에 던져지는 불멸의 명대사 “너는 이미 죽어 있다”, “뭐라고!” 녀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부터 온몸이 터져 죽어버린다. 연약한 노인을 재미삼아 베어버리고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머리를 눌러 터트리는 잔혹무도한 악당과 혈혈단신으로 싸우는 켄의 모습은 정말 근사하다. 그 역시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들지 않았다.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나온 게임 <북두의 권>은 명작을 졸작으로 바꾸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는 것으로 이름 높은 `반다이` 작품답지 않게 원작을 꽤 잘 살렸다. 그래픽은 지저분한 편이지만 켄과 악당들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만화의 스토리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적들과 격투를 벌인다. 특히 보스와 싸울 때 정해진 시간 안에 커맨드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직접 북두신권을 쓸 수 있다. 원작의 팬이라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게임을 할 가치가 있다.게임은 내내 피범벅이다. 쉴새없이 머리가 터지고 목에서 뿜어져나오는 피로 화면이 뿌옇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폭력보다는 그 대상이 악당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죄값에 대한 정당한 응징처럼 느껴진다. 폭력성은 씻겨나가고 남는 건 통쾌함뿐이다.현실에서도 북두신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밀치고 뛰어들어오는 지하철의 아귀들, 맹도견 태우기를 거부하는 버스 운전사, 금쪽 같은 자기 아이와 장애인을 같은 학교에서 공부시킬 수 없다는 부모들, 어린 여자아이를 돌아가며 데리고 논 동네 유지들, 침묵하는 다수는 자기 편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인들. 내가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어진다. 손가락으로 비공을 찌르고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다. 그러다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다. 내 안에 그런 어두운 욕망이 있었다는 데서 자기혐오에 빠진다.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는 현명하고 강인한 갈라드리엘마저 시험에 들게 한다. 그 유혹에 넘어갔다면 갈라드리엘은 골룸이 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나야 말할 것도 없다.박상우/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