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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
2002-03-02

“열린 텍스트로 만들려 했다”

금곰상 수상작품 감독 인터뷰 1

1972년의 어느날 북아일랜드 데리라는 지방에서 일어난 시민권 요구 시위는 진압에 나선 잉글랜드군의 무차별 발포로 14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다수의 희생을 낳았다. 이 사건은 북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부당한 정치·사회·종교적 탄압을 고발했을뿐더러 수많은 북아일랜드 청년을 IRA에 가입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블러디 선데이>는 시위 전날과 당일의 풍경을 각기 다른 입장의 4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묘사한다. <CNN> 뉴스 보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생생한 표현을 한 것에 대해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이 영화를 열린 텍스트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배우들도 긴장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가능하면 실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비전문 배우를 대거 기용했다. 진압군 역할로 실제 공수부대원 출신 병사를, 마을 주민 역할도 실제 주민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다큐멘터리적 화면이 돋보이는데, 실제 다큐멘터리 필름을 사용했나.

다큐멘터리 필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사건의 스틸사진은 참고했다. 그 사진들을 확대해서 사람들의 모습이나 사용했던 무기들을 철저히 고증했다.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에 입각한 영화를 구상하면서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민족해방을 위해 절규하는 알제리 민중의 입장에서 전적으로 서지만 <블러디 선데이>는 한 장소에 맞닥뜨린 양편의 이야기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적 차원인가.

당시 당국의 사건조사는 희생자들에게 무기와 폭탄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사건 이후 데리 주민들을 비롯한 당사자들은 진실을 알려나갔다. 무고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행동을 기리기 위해 30년 동안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결국 이들은 정의를 얻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딛게 한 중요한 일이었다.

이 영화는 사건의 배후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이 사건의 어두운 부분이나 근본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때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당사자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음모이론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음모이론은 개인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인 군인들의 증언까지 들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대립했던 양쪽을 모두 담으려 한 것이다. 당시 우발적으로 발포하게 된 군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점도 궁금했다.▶ 제52회 베를린영화제 수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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