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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2002-03-02

칸에 도전장, 결과는 하향 평준화

“영화제의 막판에 번개가 치다.”

베를린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의 반응처럼, 지난 2월17일, 12일간의 일정을 마감한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금곰상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두 작품에 돌아갔다. 아무리 영화제의 수상결과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게 마련이라지만,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영국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가 베를리날레 최고의 영예를 거머쥘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애니메이션인 <센과 치히로…>가 금곰의 새 주인이 된 것은 가히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를린을 포함해 칸, 베니스 등 3대 메이저 세계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이 최고상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수상결과에 대해 “애니메이션에 상을 주기로 한 것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는 칭찬도 있었지만, “무한히 성장해나갈 아시아영화에 대한 배려”라는 ‘정치적’ 해석도 존재했다. 한편 “외국의 영화상이 일본의 영화상보다 중요하지도 않은데 60대인 내가 상을 받았다고 좋아해서야 되겠나”라며 베를린영화제에 아예 참가하지도 않았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뒤늦게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수상을 자축하기도 했다.

반면 결과론이긴 하지만 <블러디 선데이>의 수상에 대해서는 “경천동지할 일은 아니다”란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깃발 아래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한 이번 영화제의 성격에 가장 걸맞을 법한 모양새를 고르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인도의 미라 네어 감독은 “비범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번 수상결과에 대해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예년과 다름없이 눈에 띄는 수작이 별로 없었고, 2년 전 <매그놀리아> 같은 마이스터의 작품이라 꼽을 것도 없었다”는 점을 들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지만, 라이벌 신문인 <타게스슈피겔>의 논조는 매우 시니컬하다. “미라 네어 심사위원장은… 상영 뒤 곧바로 영화제 관계자들이나 관객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두 작품을 금곰상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거의 별볼일 없던 경쟁작이 지겨워서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반발의사를 표시한 것인가.”

어찌됐건 이번 수상결과가 특출난 작품이 없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다. 대중적인 분위기가 너무 짙었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이나 ‘베니스의 인사’로 분류되는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의 <월요일 아침>, 큰 상을 주기에는 규모면에서 빈약해 보이는 아네트 K. 올센 감독의 <사소한 사고>, 골든글로브 등을 통해 이미 인정받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 극단적으로 평이 엇갈렸던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모두 금곰상을 받기에는 결격사유가 너무 뚜렷했다.

정치적일 것, 디지털일 것

한편 400여편의 다종다양한 영화가 선보였던 이번 영화제와 관련해 “정치적일 것, (화면이) 흔들릴 것, 그리고 독일적일 것”이라는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의 헤드라인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보여준다. 정치영화, 디지털영화, 독일영화는 베를린영화제를 지탱한 굵은 기둥들이었다. 특히 정치적인 소재 또는 주제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작품들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강조해온 베를린영화제의 전통을 되살려냈다. <블러디 선데이>를 비롯해 나치와 교황청의 밀월관계를 폭로하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아멘>, 김대중 납치사건을 영상으로 옮긴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KT>, 독일 적군파의 초상을 그린 <바아더> 등이 이같은 경향을 반영했다.

2차대전과 나치시대를 돌아보는 영화가 여러 편 선정돼, 가해자인 독일의 통일 수도에서 상영됐다는 점도 눈에 띄는 점이었다. <아멘>이나 나치 치하 프랑스영화계를 묘사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통행증>, ‘위대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뱅글러와 나치 정권의 관계를 돌아보는 이스트반 자보 감독의 <편 택하기>, 그리고 폐막작이기도 했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의 영상, 음향 업그레이드 버전) 등이 많은 관심 속에서 상영됐다. 또 중년층 이상의 상당한 호응 속에서 진행됐던 ‘60년대 유럽영화 특별전’도 이같은 정치성의 강조와 무관치 않아 보였다.

베를린에 출품된 디지털영화들은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선 더이상 큰 화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정감을 보여줬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선 대상에 가까이 밀착해 즉각적이고 진폭이 큰 감정을 뽑아낼 수 있는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 드라마 작품들이 두드러졌다. <사소한 사고>는 디지털영화인데도 따뜻하면서 오밀조밀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헝가리 졸탄 카몬디 감독의 <유혹>은 디지털영상을 부분적으로 사용해 신선한 효과를 거뒀다. 호주 감독 이반 센의 <구름 아래서>는 필름으로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영화를 연상케 하는 역동적인 앵글과 촬영이 돋보였다. 물론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마음의 지도> 등의 디지털영상은 스크린을 쳐다보는 것을 포기하게 할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었다.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독일 감독 오스카 뢸러는 “툭하면 이유없이 흔들리는 화면들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오래되어도 낡지 않는 주제, 가족

독일영화에 대한 강조는 신임 디이터 코슬릭 위원장의 야심이 표출된 결과였다. 독일영화산업과 베를린영화제를 연관시키려 했던 그는 경쟁부문에 4편의 독일영화를 출품시켰고, ‘독일영화의 조망’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도 했다. 독일의 영화업체 라피드 아이 무비즈(REM)의 슈테판 홀은 “독일영화는 10년 전만 해도 유행을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제작됐지만, 최근에는 도그마 성향의 영화에서부터 스케일이 큰 작품까지 다양해졌다. 이번 영화제에 독일영화가 여러 편 출품된 것은 이같은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며 코슬릭의 노선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영화가 강조됐다 해도 베를린에서 가장 밀도있는 작품성을 보여준 작품들은 대개 오래된 주제인 가족문제를 건드리는 영화였다. 안드레아스 드레센 감독의 독일영화 <계단의 한가운데>는 중년 부부의 위기를 낙천적으로 조명해 관객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사소한 사고>와 마크 포스터 감독의 <몬스터스 볼> 또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로얄 테넌바움>은 현대 가족을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그렸지만, 폭발적인 전개가 뛰어난 후반부에선 상처난 가족관계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유혹>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시 집단과 파괴 직전인 현대 가족을 대비시키며, 가족의 새로운 형태를 고민케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또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쉬핑뉴스>는 가족의 역사와 단절을 꾀함으로써 영혼의 상처를 치유받는 한 남성의 이야기였다.

‘아시아영화의 창’으로 기능해왔던 그동안의 전통에 비해 올 베를린은 23편 중 3편만을 경쟁부문에 받아들여 노선의 변화를 의심케 했다. 하지만 경쟁부문의 ‘푸대접’은 다른 부문에서 어느 정도 ‘보상’되는 분위기였다. 일본 감독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고!>,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어두컴컴한 물 밑에서>, 중국 장이모 감독의 <행복한 날들>, 펑샤오강 감독의 <다이완> 등 화제작은 대중적인 환호성을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을 거뒀다. 또 장밍 감독의 <주말음모> 등 10명의 젊은 중국 감독들이 만든 작품을 소개한 포럼부문의 중국 특별전도 큰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일본 세이지 모토하시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렉세이와 봄>도 영화제 초반의 화제작이었다.

<나쁜 남자>를 비롯한 한국영화도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한·일합작영화 <KT>는 한국의 현직 대통령의 이야기를 내세워 독일 관객의 흥미를 자아냈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아멘>처럼 기꺼이 침묵하고자 하는 시대사의 한장을 들춰내고 그 그늘을 치워낸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이 작품은, 그러나 “정치스릴러이긴 하지만 아주 밋밋한 종류의 그것”이라는 뜨뜻미지근한 평단의 반응을 얻었다. 주연 김창운 역을 맡았던 김갑수는 “이번에 출품된 작품은 일본 상영용 버전이며, 3월에 완성될 한국 상영 버전을 기대해달라”고 소개했다. 포럼부문의 <고양이를 부탁해>도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시작돼 로테르담영화제를 통해 증폭된 기대를 반영하듯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 15일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도 예년보다 훨씬 많은 세계 각국 관계자가 찾아와 한국영화에 거는 기대를 방증했다.

한편 이번 출품작들 중에는 유난히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아, “새 밀레니엄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분열과 해체를 넘어선 통합과 화해인가”라는 물음을 낳기도 했다. 이같은 경향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급작스런 해피엔딩을 보여준 톰 티크베어 감독의 개막작 <헤븐>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모스 콜렉 감독 역시 <브리지트>에서 수난을 거듭 겪던 여주인공을 막판엔 평온한 휴양지로 보내 평안을 취할 수 있게 했다. 뉴펀들랜드에서 마침내 영혼을 달래게 된 <쉬핑뉴스>의 주인공 코일이나 서로 얽히고 설키는 만남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자신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된 <피에드라스>의 여인 5명, 그리고 <사소한 사고> <몬스터스 볼> <계단의 한가운데>의 주인공들도 모두 행복하게 영화를 마무리짓고 은막 뒤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해피엔딩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이 주인공 각각의 복잡다난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었다.

베를린 영화제, 점점 흥행화되는가

전반적으로 볼 때 이번 베를린영화제는 신임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의 첫 작품치곤 무난하게 치러졌다. 특히 그동안 서로 험악하게 으르렁거리던 경쟁과 포럼부문의 대립을 해소해 모든 프로그램 사이의 효율적인 배분을 기했다는 점이나, 할리우드 메이저영화를 유치해 스타를 불러들인다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 등은 그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또 유럽의 신예 유망배우를 선발해 세계시장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인 ‘유러피안 슈팅스타’나, 내년부터 본격화되는 1천명의 신예 영화인들과 기성 영화감독, 촬영감독, 시나리오 작가, 의상 디자이너들 사이의 만남의 장 ‘베를리날레 탤런트 캠퍼스’, 로테르담영화제의 프리마켓인 시네마트 선정작 중 6편을 초대하는 ‘로테르담-베를린 익스프레스’ 프로그램 등은 베를린영화제가 유럽의 영화산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같은 혁신적 요소를 여럿 도입했음에도 코슬릭의 어깨가 쉬이 가벼워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문제작보다는 두루뭉수리한 화제작에 치중하는 ‘전통’만큼은 아직 깨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포럼과 경쟁부문의 ‘화해’가 두 부문의 하향평준화를 이끌었다는 비판도 의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타게스슈피겔>의 다음과 같은 비아냥거림도 그가 넘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영화제여, 계속 그 식으로 나아가기를. 더 많은 영화를 보여주고 더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고, 더 많은 기자증을 발급할 지어다…. 계속 독일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더 나은 미국영화들을 출품시켜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된 배우들도 더 많이 초대할 일이다.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스타들이 아니던가….”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현지진행 진화영 통신원▶ 제52회 베를린영화제 수상결과

▶ 제52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 베를린에서도 재연된 <나쁜 남자> 논쟁

▶ <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 5편

▶ 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