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언제 밥 한번 먹자
권혁웅(시인) 2015-02-13

[ 언제 밥 한번 먹자ː ]

겉뜻 다음에 길게 만나거나 아예 만나지 말자는 제안 속뜻 삶을 연장하겠다는 의지

주석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가장 자주 하는 인사가 이 말일 것이다. 비슷한 말로 “언제 술 한잔하자” 등이 있으나, 활용 빈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음주나 게임을 매일 하지는 않으며, (설혹 매일 한다고 해도) 하루 세번씩 하지는 않는다.

밥 먹자는 제안을 이토록 자주 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을 유지할 만큼 중요해서(우리는 “먹고사니즘”을 얘기하지 “살고머기즘”을 얘기하지 않는다)만은 아니다. 밥 먹는 일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다. 식구(食口)란 ‘밥 먹는 입’이란 뜻이다. 이정록 시인이 <식구>라는 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들이 있다/ (…)/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1연이다. 개고기 뜯어먹는 입들의 탐욕에 대한 얘기다. 시인은 3연에서 이 글자의 뜻을 이렇게 바꾼다.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방싯방싯 우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이번에는 개를 포함해서 한 식구다. 이렇게 보면 같이 밥 먹자는 말은 식구처럼 친밀해지자는 따스한 제안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게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라는 데 있다. 한 대기업 사보에서 자사 직원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조사대상의 70%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로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화 <마음의 소리>에서 작가 조석은 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여주고는, 이 장면의 속뜻을 이렇게 푼다. “우리가 언제 목성에 갈 수 있을까?”(언제 밥 한번 먹자고 먼저 말을 건넨 사람) “이건 왼손이야.”(그러자고 손을 들어 응답한 사람) 거기에 아무 진심도 담겨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해서 그 말을 나누는 진심마저 부정할 수 있을까? 저 말을 나눌 때, 우리는 정말로 밥 한번 먹자고 제안하는 것 아닌가? 다만 “언제”를 특별히 지칭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 먹나? 답은 이렇다. 언젠가는. 단, 지금은 아니고. ‘지금’을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은 안 먹어’란 뜻이지만, ‘언젠가’를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 밥 먹을 때까지 우리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란 뜻이 된다. 이것은 실행을 자꾸 연기함으로써 우리의 삶(곧 너와 한 식구가 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친밀한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내기를 걸겠는가?

용례 결혼식 주례사에 꼭 들어가는 말이 있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얼핏 들으면 신성한 계약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저주의 말 같다. 어차피 같이 살아봐야 죽을 땐 따로따로야.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죽음마저도 둘의 결합을 막을 수 없다는 거다. 저 말에서 죽음은 하나의 문턱에 불과하다. 자기야,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밥 한번 먹자”의 ‘언제’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의 ‘죽음’은 특정하지 않은 시기[未定]로 영원을 담보하는 용어라는 점에서 쌍둥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