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X소비자,Y모델
2001-03-15

여장남자 내세운 도도 빨간통 패니아 광고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도도화장품

제품명 빨간통 패니아

대행사 대홍기획

제작사 유레카(김규환 감독)

처음엔 미처 몰랐다. 세련된 영상, 야릇한 표정의 모델, 낯익은 음악 등이 남다른 첫인상을 주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느릿하게 속삭이는 듯한 도입부의 배경음악이 귓전을 자극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라는 제목 미상의 끝말 이어가기 구전 노래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재미삼아 입에 담아봤음직한 이 익숙한 노래가 무슨 ‘은밀한 유혹’처럼 묘한 자극을 야기하고 있었다.

‘뜨고 지는 숱한 광고들 가운데 하나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여운은 마지막 대목에서 전해져왔다. 패션지의 스틸 사진을 촬영하듯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한 긴머리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웃는 여인의 모습 위로 알쏭달쏭한 글귀가 떠오른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새빨간 거짓말’이란 것일까?

15초란 짧디짧은 시간에 쉽고 간결한 메시지를 풀어내는 게 광고의 기본 속성임에도 어떤 광고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일이 언제나 만만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논리와 구체적 설명을 거부한 채 감성으로만 소통하는 모호한 광고가 더 환영을 받는 게 요즘의 한 추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도도화장품의 빨간통 패니아 광고의 그 ‘새빨간 거짓말’이란 키워드는 단지 빨간통이라는 브랜드에서 비롯했다고 해석하기엔 부족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몇 차례 이 CF를 반복 학습한 다음에야 거짓말의 정체를 눈치챘다. 놓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웃는 여인의 얼굴 부위를 클로즈업한 장면에서 예상하지 못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목젖’. 침을 삼키는 듯 ‘꼴까닥’ 소리를 내는 아주 짧은 장면에서 그 여인의 목은 분명 도드라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짓궂게도 ‘속았지?’라는 뜻을 포함한 셈이었다. 그리고 새빨간 거짓말이란 결국 모델의 성별에 대한 시청자의 오해를 겨냥한 말이었다.

요즘엔 광고주 대부분이 방송에 광고를 노출하는 일과 별도로 광고의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퍼블리시티라는 언론 홍보활동 등 다각적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도도쪽은 현재 모델의 비밀에 대해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함구하고 있으며 PR활동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단 이번 광고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생각이다. 궁금증의 강도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논란을 통한 관심끌기, 이른바 스캔들 전략을 구사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후속탄을 통해 점진적으로 모델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예정이며 ‘새빨간 거짓말’ 캠페인의 충격효과를 극대화할 작정이다. 광고의 방송횟수가 빈번하지 않아 아직 본격적인 화제의 선상에 올라 있진 않지만 앞으로 이 광고가 얼마만큼 반향을 낳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빨간통 패니아 CF는 여장남자, 즉 트랜스젠더 모델을 기용한 국내 첫 사례에 해당한다. 동성애가 보편적 발상의 범주에 들어가기 힘든 금기사항이란 사실을 고려하면 이 광고의 성역 파괴는 일종의 모험이고 파격이랄 수 있다.

잠시 삼천포로 빠져 동성애를 그린 한 해외광고를 소개한다. 한 유부녀가 남자친구를 옆자리에 태운 채 신나는 불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다. 이때 맞은편에서 남편이 운전하는 차가 다가온다. 아뿔싸! 여자는 애인을 신속하게 의자 사이로 숨게 한 다음 능청을 떨며 남편과 반갑게 인사한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부인의 불륜현장을 눈치채지 못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끝일까? 천만의 말씀. 부인의 차가 유유히 사라진 뒤 남편의 차 옆자리에서 묘령의 인물이 나타난다. 부부는 닮는다고 남편 역시 누군가와 맞바람을 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동성애를 반전의 수단으로 활용해 유머를 일군 대범한 착상이 돋보인다. 우리라면 감히 엄두내지 못할 아이디어를 웃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네들 분위기가 일견 부럽기도 하다.

빨간통 패니아 광고가 트랜스젠더 모델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한 배경은 무슨 심도깊은 고려에서 비롯하진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출발했다. 도도쪽은 일반 화장품 광고가 선호하는 미녀스타 기용은 ‘억, 억’ 거리는 돈소리에 질려 포기했고 신선한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염색체가 다른 모델에 눈을 돌렸다.

이 CF가 관심을 돋우는 이유는 단순히 선정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이 모델을 기용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란 모티브와 ‘이단 모델’을 결합해 고정관념을 향한 은근한 조소를 뿜어내고 있는 발칙함이 ‘자꾸만 당신의 향기가 좋아진다’는 커피 CF 속 심은하의 얘기처럼 자꾸만 구미를 당긴다.

기능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차피 화장품 광고는 이미지의 미세한 차별화에 승부수가 달려 있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빨갛다는 선동적인 어휘를 잊을 수 없게 만든 빨간통 패니아 광고는 독자적인 제품 이미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적인 첫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