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다괴물이다.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는 최강의 생물체이다. 영화 <리바이어던> 중반 대목에 이 괴물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주인공 콜랴가 극단적 절망 상태에 빠져 가게 앞에서 방금 산 술병을 선 채 들이마시고 있을 때 동네 신부가 가게 문을 나온다. 콜랴는 시비 걸듯 묻는다. “자비롭고 전능한 신은 어디 있습니까?” 설전이 오가는 사이에 신부가 리바이어던을 거론한다. “낚시로 리바이어던을 잡겠느냐? 그 혀를 끈으로 묶을 수 있겠느냐? 그것이 네게 계속 간청하고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그에 비할 존재가 없으니 교만한 자에게 군림하는 왕이다.” 왜 선문답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콜랴에게 신부는 욥기 스토리를 들려준다. “욥의 얘기를 아시오? ‘왜 하필 접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를 불쌍히 여긴 신이 폭풍의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나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주셨소.”
모두를 향한 불안과 고통
자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불행한 운명 앞에서 개인들은 납득할 수 없다. 신이 도모하는 더 큰 그림이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만 그 불행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콜랴는 그걸 납득하지 못한다. 앞선 대화를 나눈 후 콜랴는 신부의 짐을 대신 들어준다. 신부의 집 앞에 그가 짐을 놓고 떠날 때 신부의 집 가정부가 나와 빵을 들고 돼지우리로 간다. 그녀는 돼지우리 난간 바구니에 빵을 놓고 돼지를 키우는 또 다른 여인에게 말한다. “율리아, 빵 가져가. 신의 은총이니 많이 먹어.” 율리아라 불린 그 여인은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카메라가 돼지들에게 다가가면 돼지들은 방금 그 여인이 뿌려준 먹이를 쩝쩝거리며 먹고 있다. 장면이 바뀌면 콜랴의 친구 파샤가 앞 장면의 돼지처럼 우적우적 빵을 씹으며 수프를 마신다. 파샤의 아내 안젤라는 그런 파샤를 향해 콜랴에게 닥친 불행, 콜랴의 아내 릴랴가 해변에서 사체로 발견된 사건을 두고 혹 콜랴가 그녀를 죽인 게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말을 던진다. 두 사람은 부부싸움을 한다.
<리바이어던>의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는 이 영화에서 종종 이런 식으로 장면전환 시 잔인한 감정을 실어나른다. 신의 섭리는 빵으로, 돼지들이 먹는 사료로, 돼지와 등치되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인간들끼리 서로 갈고리를 걸며 더 불행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치닫는다. 콜랴에게 닥친 불행은 그 스스로 중얼거리듯이 그 자신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다. 콜랴는 자신이 살던 집을 헐값에 팔게 된 채 쫓겨날 운명에 있었다. 그의 집은 시장이 추진하는 개발계획 부지로 포함돼 강제로 철거당해야 한다. 콜랴는 반항하지만 법원도, 검찰도, 경찰도 그의 편이 아니다. 그의 친구인 변호사 드미트리가 도와줘도 소용없다. 법원 판결에선 항소를 기각당하고 드미트리가 작성한 고소장을 믿고 콜랴가 경찰서를 찾아갔을 땐 이유 불문하고 유치장에 구금당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설정은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집필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괴물을 국가권력에 비유한 <리바이어던>처럼 시작됐다. 콜랴는 부패한 시장 바딤의 희생양이며 바딤의 뒤에는 종교 사제가 후견자로 버티고 있다. 콜랴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부패한 현실정치의 희생양으로서의 주인공을 다루는 사회비판 드라마가 성립하는 지점에서 <리바이어던>은 좀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맨 앞에 거론한 신의 섭리와 연결되는 지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영화는 대다수 인물을 불안과 공포,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병자들로 그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그걸 견디지 못하며 끝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성서적 모티브를 끌어들여와 모든 것을 모호하게, 그러나 심원하게 인물의 불안과 연결짓는 이 영화의 이미지 조탁 구성 방법이 흥미로웠다.
교과서적인 인용이지만, 홉스는 인간들을 자연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면 자신의 이익과 생존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런 혼란 상태를 피하기 위해 그는 사회계약에 따라 승인된 막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바이어던>은 근대적 사회 시스템을 표방하는 현대 러시아의 부패한 정치 행정 시스템이 리바이어던 못지않은 괴물이 되어 인물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광경을 묘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통받는 인간들 가운데 권력자인 시장 바딤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는 첫 등장 장면부터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쉼 없이 술을 마시고 있다. 선거가 1년이나 남았는데 그는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불안해한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곧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지역의 동방정교회 주교는 주께서 당신을 돌볼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요컨대 바딤은 자신의 권력이 신의 가호를 받는 것임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한다.
물론 신이 답을 줄 리 만무하다. 영화의 오프닝 화면들은 폭풍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주인공들이 사는 마을 바닷가, 삭막한 바위들이 늘어선 바닷가에 파도는 계속 치고, 사납게 들이쳤다 사라지는 그 파도의 다양한 형상들은 형체를 잡을 수 없는 신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한적한 마을에서 카메라가 주로 보여주는 것들은 고래의 뼈를 비롯해 여러 배들의 망가진 잔해들뿐이며 우리에게 남는 인상은 폐허의 황폐함이다. 누구보다 신의 편에 가까이 있다고 믿는 사제들을 빼면 부패한 정치권력이 강제하는 불행의 연쇄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린다. 앞서 언급한 대로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바딤조차도 지속적으로 점점 늘어나는 불안에 시달린다. 드미트리가 콜랴를 도와주면서 자신의 부패가 발각될까 두려운 바딤은 다시 주교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데 그는 신의 은총의 증거를 원하지만 주교는 그에게 그가 가진 현실적 힘을 이용하라고 다그친다. “권력은 신에게서 나오고 권력이 있는 곳에 힘이 있소.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시오. 외부에 기대 해결하면 적은 당신을 얕잡아볼 거요. 정말 당신답지 않군요.” 그래도 바딤은 신의 은총을 원한다. 주교가 신을 대리해 그를 안심시키고 바딤이 방을 나가면 앞으로 나아간 카메라는 그들에게는 관심 없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둔 예수 흉상을 잡는다. 마치 그게 신의 진정한 답변인 듯이.
남는 것은 황폐한 풍경들뿐
바딤은 그의 권력이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믿으려 하지만 영화 속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다. 그들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욕망이다. 릴랴는 콜랴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콜랴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 때문에 버거워한다. 전처의 아들 로마는 릴랴를 아예 엄마로 인정하지 않는다. 친구처럼 지내는 콜랴와 로마의 관계 바깥에서 릴랴는 이들 가족의 일원인지 아닌지 혼란스럽고 불편하다. 릴랴는 자연스레 드미트리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 같다. 콜랴가 유치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충동적으로 호텔에서 정사를 나눈다. 콜랴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릴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화면에는 예기치 않게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릴랴의 하반신 누드가 보인다. 그녀의 첫 등장 장면부터 범상치 않게 풍겼던 그녀의 성적 매력은 이 장면에서 강렬하게 그녀의 욕망을 표상하는데 그녀의 욕망은 상대 드미트리와 완전히 통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연약하다. 릴랴는 누워 있는 드미트리의 손을 잡지만 드미트리는 그녀의 손을 자연스레 뿌리친다.
릴랴의 마음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 중반, 소풍을 가는 장면에서 뒷좌석에 앉은 릴랴와 로마는 서로 어깨를 기대며 졸고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가족의 일원처럼 보였던 이 장면의 감흥은 곧 이어지는 본격적인 소풍 장면에서 릴랴와 드미트리가 정사를 나누는 것이 아이들에게 발각되면서 산산조각난다. 이때 남자들은 가져간 총으로 사격을 즐기고 있었고 구소비에트연방 시절 지도자들의 초상 사진을 걸고 막 즐기려는 참이었다. 부패한 권력을 풍자하는 대목쯤으로 읽힐 장면에서 앞 장면들에 이어 난데없이 벌어지는 이 치정 사건의 종말은 영화의 흐름을 콜랴와 바딤 시장의 대결 구도에서 릴랴의 방황으로 인한 콜랴 가족의 위기로 옮긴다. 얼굴이 엉망이 된 채 드미트리가 묵는 호텔로 돌아온 드미트리와 릴랴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채 불안한 대화를 나눈다. “다 내 잘못이야”라고 사과하는 릴랴에게 드미트리는 “아니야. 각자 잘못이야. 죄를 자백한다고 그게 유죄의 증거로 인정되진 않아. 하지만 누가 뭘 입증하지? 뭘 위해서? 신을 믿어? 난 사실을 믿어, 변호사잖아”라고 냉랭하게 말한다.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릴랴에게 드미트리는 자신도 자신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시스템의 타락한 권력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내면의 영역도 이해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온 릴랴가 배신감에 사로잡힌 콜랴에게 하는 첫말은 사과가 아니다. 릴랴는 콜랴에게 아기를 갖고 싶냐고 묻는다.
릴랴가 원한 것은 가정의 안정감일지도 모른다. 불륜을 들킨 다음날 릴랴가 공장으로 출근할 때 그녀는 샤워를 하고 망가진 얼굴을 대충 매만지며 길을 나선다. 그녀가 탄 출근버스 안에서 카메라는 버려진 건물의 황폐한 외관을 보여준 후 패닝한다. 버스에 타고 있는, 건물의 폐허 못지않게 황망함을 주는 릴랴를 비롯한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풍경에서 인물로 옮겨가며 외형에서 인물의 내면까지 긁어내려는 느낌을 주는 이 장면에서 릴랴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신의 실존적 조건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 같다. 며칠 후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콜랴가 충동적으로 릴랴를 범할 때 릴랴가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은, 콜랴의 그 행위가 아기를 갖고 싶지 않냐고 물었던 자신의 말에 대한 뒤늦은 답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그 정사로 인해 다시 한번 절망하는데 그들의 정사를 목격한 아들 로마가 릴랴에게 지워지지 않는 저주의 말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한 권력의 압제만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사라지고 마모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내면의 욕망과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없는 조건들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나둘씩 화면에서 사라진다.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릴랴는 자살한다. 남는 것은 황폐한 풍경들뿐이다. 영화는 수시로 리바이어던의 현현을 암시한다. 대단원에서 포클레인이 콜랴의 집을 부술 때 그것은 마침내 현대적인 모습으로 도래한 거대한 괴물처럼 보인다. 괴물의 손짓 하나에 집 건물은 속절없이 장엄하게 무너져내린다. 앙상하게 부서져버린 콜랴의 집도 괴물의 형상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고요한 바닷가 풍경들은 여전히 폐허의 잔해들뿐이다. 부서진 배들, 철골들, 고래 뼈,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눈 쌓인 얼어붙은 바닷가가 보이며 바다에는 소용돌이 파도가 친다. 이게 폭풍의 형상을 한 신의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괴물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바닥까지 간 절망만이 남는다. 잡히지 않는 말씀에 대한 예술적 답변으로 이 영화는 구체적인, 플롯의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그 이미지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인하다.
이야기가 진전돼야 할 대목에서 자꾸 지연되는 대목들, 풍경의 인서트와 오고 가는 일상적 행위들을 집요하게 보여준 이 영화의 연출법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