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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럼 다가온 영화의 계절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4월30일부터 5월9일까지, <씨네21> 추천작 22편 등 주목해야 할 상영작

Jeonju in Spring.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이다. 도약하는 전주, 봄날의 전주를 뜻하는 슬로건처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도약을 위한 크고 작은 변화를 꾀했다. 프로그램 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메인 상영관이 CGV전주효자로 바뀌었고, 전주종합경기장에서 대규모 야외상영이 이뤄진다. 47개국에서 온 200편의 영화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영화제 개막에 앞서 <씨네21> 기자들은 안구건조증에 시달려가며 개막작 <소년 파르티잔>을 포함한 22편의 추천작을 선별했다. ‘전주 프로젝트: 삼인삼색 2015’에서 소개되는 세편의 영화 <엘 모비미엔토> <설행_눈길을 걷다> <삼례>도 미리 보았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앞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성들과 그리스 뉴웨이브 특별전 상영작들에 관한 글을 보내주었고, 왕빙의 영화 세계를 흠모해온 우혜경 평론가는 스페셜 포커스 섹션에서 상영되는 왕빙의 다큐멘터리와 사진 작업을 해설해주었다. 4월30일부터 5월9일까지 10일간 전주에서 펼쳐지는 영화 축제에서 나만의 영화를 발견해보시길.

왜 저는 사람을 죽여야 하나요

<소년 파르티잔> Partisan

아리엘 클레이만 / 오스트레일리아 / 2015년 / 98분 / 개막작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은 아리엘 클레이만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년 파르티잔>이다. 영화는 11살 소년 알렉산더(제레미 가브리엘)가 철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면서 시작된다. 알렉산더는 지하 터널을 통과해 문 하나를 열어젖힌다. 그곳에는 알렉산더의 아버지 그레고리(뱅상 카셀)와 어머니, 다수의 성인 여성들과 아이들이 유사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무슨 관계로 이렇게 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곳의 유일한 성인 남성인 그레고리가 공동체의 교육과 규율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그의 말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은 물감이 든 장난감 총으로 사람을 쏘는 놀이를 하고, 심지어 알렉산더는 진짜 총을 들고 철문 밖 세계로 나가 누군가를 죽이고 돌아온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처럼 끔찍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윽고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한 소년 리오 때문에 그레고리는 폭발하고 만다. 이를 지켜보던 알렉산더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의문과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고립된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집단적 이상(異常)행동과 그 균열을 그린 작품이다. 비틀린 지도자의 욕망을 포착해낸 뱅상 카셀과 아역 제레미 가브리엘의 투명한 응시가 인상적이다. 그에 비해 소년 유격대원을 길러내는 그레고리의 세계와 외부 세상의 존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건 아쉽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장편 시나리오 워크숍에서 개발된 작품이다.

리얼리티의 여운

<울보> Stay with Me

이진우 / 한국 / 2015년 / 98분 / 한국경쟁

전학생 이섭은 울보다. 아버지의 엄한 교육을 받으며 방과 후엔 피아노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을 다닌다. 이섭의 짝꿍 하윤은 공부엔 관심 없는 날라리다. 아픈 엄마는 병원에 있으며, 방과 후엔 주로 길수를 중심으로 한 동네의 불량친구들과 어울린다. 겁 많고 소심한 이섭은 짝사랑하는 하윤과 어울리다 길수 무리와도 자연스레 섞이게 된다. <울보>가 그리는 청소녀들의 세계는 순수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를 판박이해놓은 듯하다. “상동 애들은 중동 애들이랑 안 놀아” 같은 무심한 대사들이 꽤나 아프게 가슴에 박힌다. 이진우 감독은 화려한 연출적 장치들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착실히 쌓은 리얼리티가 꽤 긴 여운을 남긴다.

나를 유혹해봐!

<미스 줄리> Miss Julie

리브 울만 / 노르웨이, 영국, 캐나다, 미국, 프랑스, 아일랜드 / 2014년 / 129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미스 줄리>는 1890년 여름날 아일랜드의 귀족 가문에서 벌어지는 광기어린 러브 스토리다. 줄리(제시카 채스테인)는 아버지의 하인 존(콜린 파렐)에게 자신을 유혹해보라며 부추긴다. 그녀의 도도한 눈빛에는 귀족의 오만함이,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이완돼 있는 동공에선 불안감이 엿보인다. 그런 그녀 앞에서 존은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 두 사람은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빠져든다.

여러 차례 영화화된 19세기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단막극이 원작이다. 시대극 속에서 배우들의 극화된 감정 연기와 긴 호흡의 대사가 연극적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도 줄리, 존, 존의 약혼녀 캐서린이 전부다. 공간 역시 대저택의 극히 한정된 부분만 사용됐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탐하고 모욕하고 상처준다. 좌절된 욕망 앞에서 몸부림치는 제시카 채스테인의 처절한 육신과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뮤즈이자 배우 겸 감독인 리브 울만의 연출작이다.

침대 밑의 그녀

<하녀 린> The Chambermaid Lynn

잉고 하에프 / 독일 / 2014년 / 90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호텔 청소부 린(비키 크리엡스)은 한 투숙객의 속옷을 몰래 입어본 후로 투숙객들을 관음한다. 매주 화요일 밤 침대 밑에서 투숙객들을 훔쳐보던 린은 어느 날 콜걸 치아라(레나 라우제미스)의 SM플레이를 지켜본다. 치아라의 명함을 챙긴 린은 집으로 그녀를 부른다. 이후 그녀들 사이에는 사무적인 태도와 친밀한 스킨십이 공존하는 묘한 관계가 시작된다. <하녀 린>은 카메라앵글의 변화가 흥미로운 영화다. 침대 밑의 린의 세계에서는 남자 투숙객의 맨발과 치아라의 킬힐만이 보인다. 그러나 린이 치아라를 호출한 후, 치아라는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린을 거꾸로 내려다본다. 치아라가 떠나고 난 방에는 침대 밑의 린과, 위의 투숙객이 한 앵글에 잡힌다. 세계를 여러 층위로 분할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기지 넘치는 작품.

비밀의 문을 열다

<지하실에서> In the Basement

울리히 자이델 / 오스트리아 / 2014년 / 85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사격장에서 성악을 연습하는 남자, 쥐를 잡아먹는 구렁이를 유리장 너머에서 지켜보는 남자, 동물 머리를 벽면 한가득 박제해놓은 남자, 실물 같은 아기 인형을 키우는 여자, 히틀러 초상화와 나치 군복 입은 마네킹을 집안 곳곳에 세워둔 나치 숭배자, 주인과 노예놀이를 즐기는 커플, SM을 즐기는 사람들…. 다큐멘터리 <지하실에서>가 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화는 별다른 주석 없이 비밀스럽다 못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취미를 가진 이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고정된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도착증 환자처럼 보이는 이들은 성심껏 취미 활동을 즐긴다. 처음엔 호기심이 일고 중간쯤엔 역겹고 나중엔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발걸음을 옮겼던 울리히 자이델이 오랜만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어떤 동거

<춘희막이> With or Without You

박혁지 / 한국 / 2015년 / 92분 / 한국경쟁

최막이 할머니와 김춘희 할머니는 40년째 한 지붕 아래 산다. 벽 한쪽에는 두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다정히 손잡고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상대가 뭘 하고 있는지 눈으로 좇으며 서로를 지켜본다. 살가운 자매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두 여인의 삶은 기구하다. 최막이 할머니는 사라호 태풍으로 첫째 아들을, 홍역으로 둘째 아들을 잃었다. 집안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춘희 할머니를 남편의 두 번째 아내로 받아들인다. 그 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두 할머니는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춘희막이>는 이 두 여인의 동거를 지켜본다. 춘희 할머니는 머리 감는 막이 할머니를 위해 미지근한 물을 준비하는가 하면 막이 할머니는 눈병난 춘희 할머니에게 안약을 넣어준다. 그 뒤 이들은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다. 이것이 노구가 된 두 사람의 현재다. 영화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통받았을 두 사람에게 일부러 과거를 캐묻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사는 법을 담담히 담을 뿐이다. 마을의 풍경, 바람과 새소리가 부족한 설명을 채운다.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 JIPP다큐멘터리 피칭 최우수상 수상작으로 감독의 첫 번째 장편다큐멘터리다.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와일드 라이프> Wild Life

세드릭 칸 / 프랑스 / 2014년 / 106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파코(마티외 카소비츠)와 노라(셀린느 살레테)는 제도권과 소비사회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자연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커플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노라는 “평범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에 파코가 없는 틈을 타 세 아들을 데리고 도망친다. 파코는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씨름하지만 양육권은 어머니인 노라에게 있다. 아이들 역시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 삶의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결국 파코는 사회와 맞서기로 하고, 자신의 뜻에 동의한 두 아들 챠리와 오키에사를 데리고 도망자 신세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들 부자의 반유목 생활은 10여년간 지속된다. <와일드 라이프>는 인간이 제도권 바깥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긴머리를 휘날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연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터전인 ‘캠프’ 바깥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청년이 된다. 또 한때는 위대하고 거대한 남자였던 아버지가 다 큰 아이들의 눈에 초라하고 고집스런 남자로 비친다. <권태>(1998), <로베르토 수코>(2001), <레드 라이트>(2004) 등을 만든 세드릭 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법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Earnestland

안국진 / 한국 / 2014년 / 87분 / 한국경쟁

수남(이정현)의 성실함에는 이의를 달 여지가 없지만 그녀의 삶이 왜 이리도 기구해졌는지에 대해선 의문부호만 남는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던 수남은 보청기가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이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 식물인간이 되자 수남은 그 모든 불행을 제 탓으로 돌리며 각종 육체노동을 전전한다. 그러다 어렵게 산 집이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다. 큰돈을 손에 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웃 주민들의 재개발 반대로 수남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치던 죄 없는 여인이 의도치 않게 비극의 주인공에서 살인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촘촘한 이야기, 독특한 캐릭터들이 인상적이며, 수남을 연기한 이정현의 연기도 돋보인다.

진실 대신 꽃

<플라워> Flowers

욘 가라뇨, 호세 마리 고에나가 / 스페인 / 2014년 / 99분 / 시네마페스트

공사현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네(나고레 아란부루)에게는 발신인 불명의 꽃다발이 매일 도착한다. 그러던 중 현장의 인부 베나트가 차 사고로 사망하고, 꽃을 보낸 이의 정체가 베나트였음을 알게 된 아네은 베나트의 사고현장에 매일 꽃을 둔다. 한편 베나트의 아내 로우르데르는 죽은 베나트의 주위를 맴도는 아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접근하고, 베나트의 어머니 테레는 그런 아네가 로우르데르보다 고맙다.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세 여자의 관계와 심리를 심도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는 베나트의 죽음 전후로 아네와 로우르데르의 시점에서 교차하여 극을 전개하며, 각자가 믿고 싶은 것과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충돌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진실엔 관심이 없다. 그것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만이 있을 뿐이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죽은 자에게 있다면, 그것은 믿음만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은 자들은 살아간다.

미친 사랑의 아름다움

<아무르 포> Amour Fou

예시카 하우스너 /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독일 / 2014년 / 96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2014년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아무르 포>는 국내 개봉작인 <루르드>(2009)를 연출한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의 신작이다.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의 뜻처럼 고독한 두 남녀가 만나 절망에 다다르게 되는 가슴 쓰라린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활동 중인 하인리히(크리스천 프레델)가 지인들과 교양을 주고받는 살롱 모임에서 자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유부녀 헨리에트(버트 슈노잉크)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이후 종종 마주치게 되는데 하인리히가 헨리에트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가 평생을 지켜온 상식에 따르면 하인리히의 고백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이다. 심지어 헨리에트는 고백의 여파인지 원인 모를 열병을 앓고 쓰러진다. 최면 치료까지 해보지만 도무지 병명을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끝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다. 이에 하인리히는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구애를 시도하다 못해 급기야 동반자살을 제안한다. 요동치는 두 남녀의 관계를 담아내는 카메라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정교하게 디자인된 미장센 안에서 둘의 관계는 폭발하듯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소용돌이를 고요하게 담아낸 영화다.

소년과 개, 잔혹한 동화

<시바스> Sivas

칸 뮈제시 / 터키, 독일 / 2014년 / 97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체구가 작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없는 소년 아슬란은 자기보다 잘살면서 인기도 많은 급우 오스만을 질투한다. 어느 날 투견대회에 빠져사는 동네 어른들을 따라 투견장을 찾은 아슬란은 경기에서 패배해 버려진 ‘시바스’를 집으로 데려온다. 한번 패배한 경험이 있었던 시바스는 다시 기력을 회복한 다음, 투견 대회를 제패하고 만다. 그러자 아슬란은 온통 동족의 피를 뒤집어쓴 시바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시바스>는 어린 소년과 그의 반려견이 함께 등장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영화 가운데 가장 잔혹한 영화다. 프랑스 알프스의 소년과 반려견의 이야기인 <벨과 세바스찬>(2013)과는 정반대의 황량한 풍광을 배경으로 아슬란과 시바스가 뛰어노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흡사 동물학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사실적이면서 폭력적인 투견대회 장면과 더불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슬란 역의 아역배우 도건 이즈치의 연기는 놀랍다.

노인과 나

<0.5mm> 0.5mm

안도 모모코 / 일본 / 2014년 / 196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거주간호인 사와(안도 사쿠라)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딸(이자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하룻밤을 같이 자달라는 것. 결국 사와는 고용주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하고 만다. 당일 밤, 할아버지의 이상행동으로 집에 불이 나고 쫓기듯 방에서 나온 그녀는 고용주의 자살을 목격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사와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설상가상 지하철에 전 재산을 놓고 내린다. 하염없이 거리를 걷던 사와는 24시간 노래방을 숙박업소로 착각하는 노인을 만나면서 인생에 변화를 맞는다. 천연덕스럽게 노인과 생활하는 주인공과 주인공을 아이처럼 대하는 노인의 시간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사회적 무관심의 대상인 노인들의 삶은 한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아 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일본의 국민배우 오쿠다 에이지의 딸인 안도 모모코의 두 번째 연출작.

사랑의 본질

<러브 이즈 스트레인지> Love is Strange

아이라 잭스 / 미국, 프랑스, 브라질, 그리스 / 94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무려 39년을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동성 커플 벤(존 리스고)과 조지(앨프리드 몰리나)가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뉴욕에서 지인들과 함께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신혼의 낭만을 즐길 새도 없이 일상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가톨릭 음악학교 교사인 벤이 동성 결혼을 빌미로 10여년 넘게 다니던 학교에서 해고를 당한 것이다. 벤의 월급이 없으면 뉴욕 한복판에서 이들이 집을 마련할 방법은 없다. 당분간 각자의 친지와 친구 집으로 흩어져 머무는 사이에도 벤과 조지가 헤쳐나가야 할 난관은 더욱 늘어난다. 그 과정에서 <러브 이즈 스트레인지>는 젠더의 구분 너머 사랑의 본질을 고민하게 만들고, 그 사랑이야말로 인류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라고 나직하게 외친다.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 때

<하루> Today

레자 미르카리미 / 이란 / 2014년 / 87분 / 시네마페스트

나이 든 택시기사 유네스는 점심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그가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려던 찰나, 안색이 안 좋은 젊은 여성이 불현듯 탑승한다. 그녀는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 말한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병원에서 알게 된 유네스는 그녀의 입원 절차를 돕는다. 하지만 병원에선 유네스를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남자로 오해하고, 사람들은 유네스를 비난한다. 레자 미르카리미는 종교와 사회문제를 다룬 <언더 더 문라이트>(2001)를 통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대상을 받은, 이란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 레자 미르카리미는 이번 영화를 통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는 주인공을 그려낸다. 감독은 그러한 주인공을 통해 비난만 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를 비판한다.

히잡과 스케이트보드의 믹스&매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A Girl Walks Home Alone at Night

에나 릴리 아미푸르 / 프랑스 / 2014년 / 99분 / 미드나잇 인 시네마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유령도시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뱀파이어 소녀(세일라 밴드)가 있다. 살풍경한 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검은 히잡을 둘러쓴 채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자못 살벌하다. 마약에 중독되고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들을 응징하는 모습은 하드코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히잡을 벗으면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라이오넬 리치의 노래를 듣는 소녀인 그녀는, 유일하게 타락하지 않은 한 남자(아라쉬 마란디)와 사랑에 빠진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여러 장르가 혼합된 스타일리시한 영화다. 흑백 화면의 묵직한 음영, 느리지만 강렬한 카메라 트래킹은 독일 표현주의의 미장센을 떠올리게 하고 음울하고 하드보일드한 무드는 필름누아르의 그것이다. 한편 트렌디한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유려하고 감각적인 연출은 동시대를 사는 젊은 감독의 작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히잡과 스케이트보드로 대변되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믹스 앤드 매치는 독특한 키치의 맛을 낸다. 클래식하지만 현대적이고 무겁지만 장난스러운, 기묘한 작품. 다소 관습적인 서사는 아쉽지만 스타일로 압도한다. 2014년 시체스영화제에서 특별언급상과 주목받는 감독상을 수상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초상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From Caligari to Hitler

뤼디거 슈흐란트 / 독일 / 2014년 / 118분 / 시네마톨로지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는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독일영화의 초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이 수립되기 직전인 1933년까지의 독일 공화국을 칭한다. 1920년대 독일은 “젊고 현대적”이었다. 독일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독일영화는 “매직”과 “미스터리”를 스크린에 붙잡아두는 데 집중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태동한 시기가 이때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전위적 이미지로 표현했던 프리츠 랑, 로베르트 비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등이 대표적인 표현주의 사조를 이끈 감독들. 영화는 프리츠 랑의 <M>,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무르나우의 <파우스트> 등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흐름이 어떻게 나치 선전영화로까지 이어지게 됐는지 흥미롭게 분석한다.

영웅에게 영광을

<마이단> Maidan

세르게이 로니차 / 우크라이나 / 2014년 / 134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작업을 부지런히 병행하는 우크라이나의 시네이스트 세르게이 로니차가 이번에는 민중의 얼굴과 목소리를 붙들었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럽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의 요구로 시작된 대규모 시위 유로마이단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당시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정면으로 대항해 2013년 11월부터 4개월간 진행된 시위를 구석구석 시간순으로 담았다. 상황을 설명하는 내레이션, 감정을 증폭하는 음악은 없다. 초반은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목소리를 더해 노래를 부르는 평화로운 사람들을 소상히 비추지만, 시위가 계속돼 양상이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점차 어둠이 짙게 드리운다. 씩씩한 노랫소리가 울리던 거리에는 폭음이 쉴 새 없이 터지고, 사람들의 얼굴은 화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불빛을 밝혀 어둠을 지우고 시위 중 희생된 이들을 기리며 “Glory to the Heroes!”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잊기 어렵다.

여전히 아름답다

<호스 머니> Horse Money

페드로 코스타 / 포르투갈 / 2014년 / 104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마스터즈

페드로 코스타가 <행진하는 청춘> 이후 8년 만에 발표한 극영화이자, 음악다큐멘터리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행진하는 청춘>의 주인공이었던 감독의 오랜 지기 벤투라가 다시 전면에 나선다. 페드로 코스타는 벤투라가 유령처럼 그를 지배하는 과거의 기억을 떨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호스 머니>를 찍었다고 한다. 병동인지 감옥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떠돌며 진행되는 영화는, 1974년 4월 포르투갈의 살리자르 정권을 무너뜨렸던 무혈 쿠데타 카네이션 혁명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 카보베르데의 이주민인 벤투라가 경험했던 순간이 아내와 친척 등 여러 인물들의 말을 통해 서술된다. 역사적인 사진들을 거쳐 그림으로, 그림에서 실물로 처음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벤투라처럼, <호스 머니>는 과거와 현재가 불균질하게 맴돈다. 영화의 리듬은 전작에 비해 속도가 붙었고,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폰타이냐스 주민들의 모습과 공간을 하나씩 늘어놓는 장면에선 카보베르데 밴드 투바로이스의 노래 가 쓰였다. 정교하게 계산된 빛과 구도는 여전히 아름답다. 2014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불길한 농담

<리얼리티> Reality

캉탱 뒤피에 / 프랑스 / 2014년 / 83분 / 미드나잇 인 시네마

캉탱 뒤피에의 영화는 뚱딴지같다. 타이어가 사람을 죽이며 돌아다니고, 실종된 반려견을 찾는 남자가 온갖 기괴한 일을 겪는데도 늘 그 바탕을 ‘이유 없음’으로 일관한다. <리얼리티> 역시 마찬가지. 유혈이 낭자하는 SF영화를 계획하는 영화감독 제이슨은 막무가내의 제작자에게서 영화 역사상 최고의 비명 소리를 찾아오라는 조건을 듣고, 그의 일상에 사냥한 멧돼지가 삼킨 비디오테이프를 보려는 소녀, 여장에 집착하는 교사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마구 뒤섞인다. 비명을 녹음하는 과정 같은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가 산재해 있지만, <리얼리티> 속 캉탱 뒤피에의 농담은 어딘가 불길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줄기차게 울리는 필립 글라스의 음악 <Music with Changing Parts>는 그 불안을 한껏 부풀린다.

거두절미, 무조건 추적

<더 로버> The Rover

데이비드 미코드 / 호주, 미국 / 2014년 / 103분 / 미드나잇 인 시네마

세계경제가 무너지고 자원마저 고갈되자 지구는 사막처럼 황폐화된다. 가진 거라곤 차 한대뿐인 에릭(가이 피어스)은 어딘가로 황급히 도주하던 헨리(스쿳 맥네리) 일당에게 차를 도난당한다. 에릭은 추격 끝에 헨리의 동생 레이(로버트 패틴슨)를 붙잡아 끌고 다니면서 헨리 일당을 추적한다. 보고 나면 입 안이 서걱거릴 정도로 황량한 풍광이 배경인 범죄 드라마다. 영화는 별다른 배경이나 캐릭터의 설명 없이 오직 추격전의 비정한 정서를 전달하는 데 공을 들인다. <더 로버>는 데뷔작 <애니멀 킹덤>(2010)으로 그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거두절미하고 간략한 설정만 두고 인물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고는 그 결과 속에 주제를 담아내는 감독의 집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고독과 기쁨 사이에서 일군 감정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 Little Forest: Winter/Spring

모리 준이치 / 일본 / 2015년 / 122분 / 시네마페스트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의 만화를 영화화한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은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의 속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계절별로 이야기를 묶었고 엔딩 크레딧도 두번 나오는 독특한 구성이다. 영화는 시골 마을에 사는 이치코(하시모토 아이)가 혼자 농사를 짓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특별한 사건이나 드라마가 있는 건 아니다. 간혹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이치코의 회상 등이 전해지지만 그것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거나 예쁘게 음식을 만드는 데 주력하는 영화도 아니다. 그저 씨를 뿌리고 밭을 일궈 수확에 이르는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일상을 따라간다. 무상한 계절의 변화 속에서 이치코가 느끼는 고독과 기쁨의 감정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서 발견된다. 일상에서 문득 느끼는 허전함을 별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기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닌 법이니까.

프랑스 이민자의 초상

<불안> Insecure

마리안느 타르디외 / 프랑스 / 2014년 / 83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이민자 청년 세리프(레다 카텝)는 파리 교외에서 상점 안전요원으로 일한다. 세리프는 하루빨리 간호사 시험을 통과해 상점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어느 날 그는 봉사활동을 하며 친해졌던 아이들을 만나게 되고, 아이들을 통솔하는 선생님인 제니(아델 엑사르코풀로스)와 데이트를 한다. 그러던 중 합격소식이 들려온다. 인터뷰를 앞둔 그의 삶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자친구와 놀러 간 클럽에서 시비를 걸던 동네 소년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소년 중 한명이 총에 맞는 사고가 벌어진다. 마리안느 타르디외의 장편 데뷔작 <불안>은 개인의 불안과 함께 사회적 불안을 야심적으로 함께 다룬다. 프랑스 이민자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감독의 회의적인 시각도 잘 드러난다. <히포크라테스>의 레다 카텝,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의 열연도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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