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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코미디로, 아주 끝까지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5-08-05

<쓰리 썸머 나잇> 김상진 감독

김상진 영화의 서사적 원형에는 꼰대들에 대한 반항이자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정치성’이 자리잡고 있다.”(영화평론가 변성찬, <씨네21> 472호) “<주유소 습격사건>(1999)의 주인공들이 주유소를 터는 이유, ‘그냥’이라는 태도는 그 이후 한국 갱스터 코미디물들에 반영되어 있다.”(영화평론가 달시 파켓, <씨네21> 688호) 자신만의 스타일로 한국형 코미디의 한 전형을 만들어낸 김상진 감독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교 동창생인 세 남자가 30대 초반이 돼 벌이는 3일간의 일탈기, <쓰리 썸머 나잇>(2015)이다. 기존 체제를 비틀어 코믹하게 풀어내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훨씬 가벼워진 설정으로 편안한 웃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장르영화 시장이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영화계에서 코미디물로 한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복귀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그가 대표로 있으면서 <광복절특사>(2002)부터 <쓰리 썸머 나잇>까지 제작한 영화사 ‘감독의 집’을 찾았다. 벌써부터 다음 작품을 준비하며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그에게 김상진표 코미디의 어떤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투혼>(2011) 이후 오랜만의 신작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계속 작품을 준비했다. 그러다 몇번 엎어지기도 했고. 나와 딱 맞는 영화를 만난다는 게 쉽지 않더라. 또 내가 각본을 쓰고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마누라 죽이기>(1994)를 중국에서 리메이크하기로 했다. 연출까지 할 생각이 있느냐고 해서 수락한 상태다. 감독의 집에서 데뷔를 준비하는 후배들 작품도 봐주고 있다.

-개봉(7월15일) 1주차다. 현재의 스코어(전국 누적 관객 6만8803명)에 만족하나.

=요즘은 개봉 일주일 안에 승부가 나잖나. 안 되는 거지.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감독이 잘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나. 빨리 정리하고 다음 작품을 해야지.

-<쓰리 썸머 나잇>은 인물 관계가 역전되거나 사회에 대한 비꼬기로 웃음을 유발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야기의 설정이 단순하고 캐릭터도 가벼워졌다.

=제작사 더 램프의 박은경 대표가 한번 읽어보라며 건네줬다. 요즘 한국영화는 메시지의 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나마 나오는 코미디물도 보면 시원하게 달려가다가 꼭 결말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신파나 교훈을 집어넣는다. <투혼>에서 나도 그랬는데, (웃음) 해보니까 그렇게 갈 필요가 없더라. <주유소 습격사건> <광복절특사>를 찍으면서 강박관념처럼 영화 안에 사회적인 메시지나 풍자를 넣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영화도 억지스러워지고 만드는 사람도 흥이 안 났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그런 부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했다. 누구는 ‘영화를 봤는데 남는 게 없다’라고 말한다. 아니, 2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 뭐가 남길 기대하나. 그냥 웃고 극장을 나가면 된다. 물론 그래서 영화의 평가에 있어서 욕을 먹을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나도 잘 모르는 사회 비판을 영화에서 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편안한 영화를 찍자, 그래야 찍는 나도 편하게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사회성과 풍자성이 짙은 게 김상진표 코미디의 특색이었다. 그게 되레 부담스러웠다는 말인가.

=왜 부담이 없겠나. 자꾸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피곤해진다. 의식적으로 그런 내용을 영화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아주 힘들어졌다. <주유소 습격사건>만 봐도 되게 노골적이잖나. 당분간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영화도 한번쯤 만들어 봐야지 않겠나. 물론 기존의 내가 보여준 코미디를 좋아해준 분들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번 영화는 시작부터 그렇게 가지 않기로 하고 만들었다. 어차피 큰 드라마가 있는 영화가 아니니 주인공 위주로, 에피소드 중심으로 갔다. 그래서 드라마틱하지 않다, 이음새가 어색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렇게 가기로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관객이 쉽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쓰리 썸머 나잇>의 세 주인공 명석(김동욱), 달수(임원희), 해구(손호준)는 인생이 뜻대로 안 풀린다. 직장 업무와 취직의 압박, 여자친구와의 갈등 등 크고 작은 시련과 실패가 이어지니 참다못해 해운대로 떠나버린다.

=그렇다고 이들이 실패자는 아니잖나. 인생에서 패배하지도 않았다. 잘 살고 있고, 앞으로 성공할 친구들이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마음 같지 않을 뿐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한 생활을 하다 보면 30대 초반의 나이에 이 정도의 아픔은 늘 있기 마련이다. 또 이들은 아직 젊고 3일간의 해프닝으로 인생이 확 바뀌거나 엄청난 교훈을 얻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겠지. 20대는 사고를 칠 수 있는 나이고, 30대 초반은 사고를 칠 수 있는 마지막 나이 같다. 아직 미혼이고 사회생활도 이제 막 시작해서 스트레스도 좀 받게 되는 그런 나이. 그래서 마지막을 불태운다는 느낌으로 갔다. 캐릭터가 약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 코미디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리얼리티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캐릭터는 세상에 별로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속 무대포(유오성), 뻬인트(유지태) 같은 캐릭터를 만드는 게 오히려 쉽다. 인간으로서 아무 생각이 없는 애들이니까. 오히려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인물을 통해 코미디를 그린다는 게 훨씬 어렵다. 그래도, 아쉬운 건 있다. 지금보다 좀더 세게, 원 없이 사고를 쳐보는 쪽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되네. 하하.

-주인공들이 해운대에서 벌이는 사건, 사고는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만나는 혹은 만나고 싶은 여성들을 쫓다가 벌어진다.

=낯선 공간으로 떠난 그들이 꿈꾸는 일탈이라는 게 모르는 여성과의 묘한 하룻밤이다.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남자 셋이 모이면 짐승이 된다. (웃음) 남자 한명은 용기가 없지만 셋만 모이며 어디서 그렇게 용기가 생기는지. 그렇게 이야기를 푸는 게 그리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차승원, 유해진, 강성진, 박상면 등 한번 작업한 배우들과 몇편씩 같이 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김동욱, 임원희, 손호준 등 당신 영화에 처음 등장한 얼굴들이 많다.

=코미디영화가 주특기라는 놈이 코미디물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들로만 계속 가면 그게 코미디영화인가. 배우들의 개인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거다.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았다. 세 배우 모두 처음 작업해봤다.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원희야 워낙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지만 나랑은 한번도 같이 작업해본 적이 없었다. 동욱이와 호준이는 아직 본인만의 확실한 캐릭터를 입지 않은 배우들이다. 그런 경우, 감독으로서는 배우에게 색을 입히고 만들어나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고교생이던 주인공들에게 덜미가 잡혀 감옥에 들어가고, 이후 마약 밀매 조직의 보스가 된 마기동 역으로 윤제문이 나온다. 무게감 있는 웃음에 어딘가 고독해 보이기까지 한 마기동에 퍽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이미지 캐스팅으로 보면 제일 잘 맞았다. 제문이는 <귀신이 산다>(2004) 때 단역인 경찰 역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상처를 많이 줬다. 당시 제문이가 의욕이 넘쳐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내가 거기에다 대고 “정극할 거냐, 너 혼자만 살려고 하느냐, 원 톤으로 대사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때 스트레스를 좀 받았을 거다. (웃음)

-명석의 잘나가는 여자친구 지영은 강단 있는 모습으로 남자들의 소동극에 제동을 건다. 지영을 연기한 류현경 배우의 힘이 큰 것 같다.

=현경이와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선후배 사이다. 예전부터 ‘연기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자전>(2010) 이후 영화 선택에 있어서 다소 움츠러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지고지순한 여성의 역할 위주로 가는 것 같아서 이번에 센 역할을 맡겨보자 싶었다. 처음에는 또 비련의 여주인공의 분위기로 가려고 해서 내가 뭐라고 했다. 하하.

-후반, 세 주인공과 지영을 인질로 붙잡아온 마기동이 허름한 레슬링장에서 맞대결하는 장면이 있다. 주요 인물을 한데 몰아두고 제대로 한판 붙게 만들었는데.

=쫓고 쫓다 끝나는 뻔한 결말이 싫어서 레슬링을 넣었다. 마기동이 어릴 때 레슬링 유망주였다는 설정도 있고 그의 악당 캐릭터도 재밌게 보일 것 같았다. 또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지영의 코믹한 대사도 살릴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술자리에서 남자들과 심각하게 싸우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여자 애가 “야, 니들 되게 유치하거든” 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얘기가 너무 웃겼다. 그래서 지영의 대사에 그대로 넣었다. 남자들의 유치한 힘자랑에 한마디를 딱 찌르는 거지.

-<깡패수업>(1996)부터 호흡을 맞춘 손무현 음악감독과 이번에는 같이 작업하지 않았다. 대신 최승현 음악감독이 합류했고 작곡가 신사동 호랭이의 곡도 받았다.

=무현이가 자기를 버리고 갔다고 투덜거리는데 미안해 죽겠다. 무현이는 나를 정말 잘 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른 친구와도 작업해볼 때가 된 것 같더라. 익숙해진다는 게 무서운 거잖나. 새로운 스탭들, 새로운 배우들로 새롭게 가길 바랐다. 결과가 별로 안 좋아서 열 받아 죽겠지만. (웃음)

-이번에도 어김없이 단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초반, 경찰서에 있는 취객으로 등장해 마기동에게 훈수를 둔다.

=내가 연출한 모든 영화에 다 출연했다. 주•조연은 캐스팅이 쉬운데 비중이 거의 없는 단역은 섭외가 어렵다. <돈을 갖고 튀어라>(1995) 때 단역이 너무 연기를 못해서 속이 터지더라. 그래서 그냥 내가 했다. <깡패수업>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다음부터는 아예 조감독들이 내 역할이라며 자리를 비워두더라. <광복절특사> 때 상인회 회장으로 등장해 야유회 가서 무석(차승원)에게 노래를 시키는 연기를 했는데 그게 그나마 제일 잘한 연기 같다.

-코미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코미디를 포함한 장르영화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답답함이 크겠다.

=한국영화가 발전하고, 할리우드영화에 대적할 수 있었던 건 장르영화의 힘이 컸다. 장르영화가 탄탄하게 받쳐주면서 현재의 멀티 캐스팅 중심의 대작영화들도 나오고 성공할 수 있었던 거다. 장르영화 자체가 죽다보니 이제는 투자사, 감독들, 배우들, 스탭들 모두 장르영화를 안 하려고 한다. 로맨틱코미디, 순수 멜로물이 거의 없지 않나. 그래서 허진호, 장윤현 감독처럼 장르영화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분들이 중국으로 많이 진출한다.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이 100억원씩 들여가며 천만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중 성공하는 건 서너편뿐이고 나머지는 다 망가진다. 대박영화도 있어야겠지만 장르영화, 300만~500만 관객이 드는 영화도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요즘은 배급사들이 얼마나 빨리 천만을 돌파했느냐는 기록 세우기에 바쁘다. 내가 시네마서비스에 있을 때 투자한 <왕의 남자>(2005)는 천만 관객이 드는 데 45일이 걸렸다. 천만이 들 영화라고 판단되면 몇개 관에서 길게 상영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영화들도 상영해 관객이 다양한 영화를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코미디영화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지금도 또 코미디를 준비한다. 아주 끝까지 해보려고 한다. 나라도 해야지 안 하면 누가 하겠나. 칸국제영화제도 코미디로 기어코 가볼 생각이다. 올해 49살이니까 60살 정도 되면 가지 않겠나. (웃음) 태생적으로 코미디가 좋기도 하고. 사실 멜로는 속 터져서 못 찍겠다. 카메라를 천천히 밀고 들어가는 게, 어휴, 답답해. 내 영화 보며 관객이 울거나 공포에 질리기보다는 웃었으면 좋겠고, 찍는 나도 즐겁고. 보통 사람들 사는 얘기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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