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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LA 촬영현장을 가다
2002-03-15

김득구의 마지막 싸움, 20년 만에 LA에 재현되다

‘떨어져 죽느냐, 날아오르느냐. 스스로 벼랑에 선 김득구.’

1982년 11월12일. 국내의 한 신문은 이틀 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질 WBA 라이트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앞두고 그렇게 썼다. 챔피언 맨시니에 비해 펀치력, 테크닉 등 모든 면에서 뒤지는 상황에서, 도전자 김득구에게 승산이 있다면 그것은 의외의 상황이 가져다줄 미지의 결과일 뿐. 그저 “잡초같이 살아온 스물셋 청춘”에게 가능한 ‘기쁨’이 있다면, 머나먼 타지의 링에 오르는 것만으로 1500만원의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끝맺었다.

그리고 한국시각으로 11월14일 오전 7시45분. 비유는 현실이 됐다. KO로 패한 직후, 김득구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됐고, 2시간30분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다. 그로부터 나흘 뒤. 어머니 양선녀씨의 동의하에 그의 힘없는 맥동을 지탱해 주던 산소호흡기를 제거함으로써 오직 두 주먹만으로 세상을 버텨내던 강원도 청년은 불귀의 객이 됐다. 누구나 예상한 패배였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

#S1 “하늘에 계신 득구 행님이 도왔지”

“경기 자체가 너무 인상적이더라고. 부산고등학교 1학년 땐데 친구집에 가서 친구 아부지랑 그 집 식구들이 다 모여서 그 경기를 보는데, 다들 권투를 너무 좋아하는 기라. 3분의 1은 같이 뛰면서 봤지요. 어린 가슴에 예민한 사춘기였고, 마, 김득구가 머리를 땅 하고 부딪히는데 저러다 다 죽게 됐다 싶더라고…. 거기에다 나중에 임신한 약혼녀가 나오는데 어린 내 보기에도 딱 새 출발했으면 좋겠드만, 아이를 놓겠다고 그라드라고…. 그래서 지금 <챔피언> 내 하는 거 보면 하늘에 계신 득구 행님이 <친구> 흥행시켜준 것 아닌가 싶네요…. 나라고 이 영화 찍으면서 안 고통스러우면 사디스트거나 마조히스트겠지.”

<챔피언> 촬영장은 LA 다운타운 근교의 세플베다 댐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날 촬영장면은 라커룸에서 김득구(유오성)가 걸어나와 링 위에 오르는, 영화 속 오프닝에 해당하는 부분. 어제 면도를 안 했는지 턱이 새까만 곽경택 감독은 스탠드가 교차하는 곳에 모니터와 현장편집기가 나란히 놓인 야전사령부를 차려놓았지만, ‘슛’을 부르고 ‘컷’을 외치는 그 사이, 1분이 채 걸리지 않는 그동안에만 그곳에 머무를 뿐, ‘김득구, 김득구’를 연호하는 현지 엑스트라들의 연기 지도까지 결국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나선다. 그래야 성이 풀리는 듯, 잠시라도 가만있질 않는다는 것이 스탭들의 말이다.

“김득구의 친한 친구였던 이상봉씨를 만난 것도 영락없이 딱 인연이라고. 취재 과정에서 주변분들이 그분에 대해 어떤 말도 안 해주는기라. 뭣보다 자존심이 강한 양반인데다 더구나 변변하게 살 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지요. 그런데 연출부 중에 누구 하나가 이상봉씨를 아는 체육관장 이름을 기억해 갖고서는 인명 전화번호부에서 찾은 이름으로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상봉씨가 호주에 가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시나리오 4고 쓰러 들어가기 전날이었다 아입니까. 거기에다 그분이 이상봉씨랑 절친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케이 받고 그길로 바로 호주 가서 스토리를 들었습니다.”

촬영현장에서 곽경택 감독은 불같다. 영화는, 현장에서의 감독의 식지 않는 기운에 전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펄펄 끓는 국밥 같다. 여기에 어떤 양념을 쳐대도, 결국엔 그가 좋아하는 꼬리곰탕처럼, 그의 영화에서는 진한 사람냄새가 우러난다. 따지고 보면 <억수탕>은 정(情)이었고, <친구>는 의리였고,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챔피언>은 ‘한’(恨)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메가폰을 쥘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연’(緣)이었다. #S2 골반이 뒤틀리는 풋워크

곽경택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이어지는 군중 숏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그동안 김득구, 아니 유오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앉아서 쉬고 있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그 어디에도 없다. 한참을 둘러보니 잠깐 시간을 번 유오성이 눈에 들어온다. 말없이 스탠드 뒤편에서 선 채로 담배 한대를 물고 있다. 습한 기운이 없다지만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살에 더울 법도 한데, ‘동아체육관’이라는 글씨를 새긴 자주색 가운을 입은 상태다. 그러고보니 이날 현장에서 그는 전혀 말이 없다. 관중은 ‘에브리 바디 액션’이라는 현지 스탭의 신호에 맞춰 “박수를 쉬지 말고 계속 쳐달라”는 요구가 주어졌지만, 대부분 유오성 아니 김득구의 등장에 눈을 맞춰 행동을 개시했다. 몇 차례 타이밍이 맞지 않아 NG가 여러 번 이어졌는데도, 유오성은 묵묵히 라커룸 입구와 링 위를 오가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는 주문을 외고 있는 걸까.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너무 흥행을 의식한 흔적이 엿보였다. 처음에 내가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김득구 하겠다고 했지만, 난 곽 감독님이 한명의 작가이길 바랐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 스스로 <친구> 끝내고 너무 편하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고쳐 받아든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다. 권투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나름의 구체화된 방법론을 갖고 있는 이상 그걸 볼 필요는 없었다.”

링 위에 오른 유오성이 왼손을 치켜들더니, 그 자리에서 가볍게 풋워크를 시도한다. 멀리서 보는 장면이긴 하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다. 지난 8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5시간 이상 개인훈련을 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알려진 건 개인 트레이너의 지도 아래 러닝과 팔굽혀펴기와 줄넘기와 윗몸일으키기 등의 기본 훈련 프로그램이 빚어낸 상체와 하체의 빛나는 조화였지만, 정작 그를 빛나게 하는 건 오른손잡이인 그가 왼손잡이 파이터였던 생전의 김득구로 변신하기 위해 골반이 뒤틀릴 정도로 오른발을 내미는 풋워크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득구의 생전 친우였던 상봉의 역할을 맡으면서 무술감독으로 구체적인 액션 합을 연출하고 있는 정두홍 감독은 유오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집중력이 굉장히 강하다. 인천체대 시절 나도 권투를 잠깐 했고, <태양은 없다>에서 액션을 연출하면서 몸을 풀었지만, 나보다 나아보인다. 기초 체력 훈련을 병행하면서 줄넘기, 스트레칭, 샌드백, 섀도 복싱을 반복했는데, 그 지겨운 걸 1월1일에도 나와서 혼자 하더라. 치고 빠지는 연습보다 맞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터라 고생도 컸다. 두려움을 없애려고 그런 건데. 실제로 화면에서도 잘 치는 것만큼 잘 맞아야 액션이 산다. 일종의 실전 연습이었다. 사실 맞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하는데, 오성이는 너무 많이 맞아서 쌓인 스트레스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S3 ‘한편의 쇼’를 만들어라

<챔피언>의 현장에는 ‘아티스트’라 불리는 이가 한명 있다. 새카만 얼굴의 깡마른 홍경표 촬영감독. 정두홍 감독이 ‘링’ 위에서의 액션연출에 일가를 이뤘다면, 그는 ‘링’을 앵글로 잡는 데 도사다. 곽경택 감독은 핸드헬드에서만큼은 그를 따라잡을 이가 없다고 단언한다. ‘작두탄 무당’의 비기에 버금간다는 상찬도 아끼지 않는다. 물론 그에게는 쉬운 장면이 하나도 없다. 특히 시저스팰리스 경기장 재현장면의 경우는 야외 링이다. 뚫린 공간에서 관중을 꽉 차 보이게 하는 것도 쉽게 주워 올릴 만큼 간단하지 않다. 스탠드의 관중을 비춘 뒤, 부감으로 김득구의 어깨에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정지시키고, 그 긴장을 인물의 동선을 따라 링 위에 고스란히 올려놓는 것은 그저 카메라로 단번에 훑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링에서의 싸움이지만, <반칙왕> 때와 똑같지 않다. 레슬링은 링 자체를 이용해서 뛰어나오기도 하고, 타넘어들어가기도 한다. 집어넘기기도 하고 로프를 최대한 활용할 수도 있다. 권투에서의 사각 링은 그렇지 않다. 들어섰으면 벗어나지 못하는 그 링 안에서 게임은 누구 하나가 져야만 끝나는 그런 게임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런 장면이 무려 15장면이나 되는데, 그렇다고 똑같은 호흡과 리듬과 색감으로 잡아낼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번 작품, 특히 국내에서 찍었던 부분의 경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다 쏟아부어 찍었다.”

링 안의 인물과 인물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는 그의 카메라는 <챔피언>에서 좀더 디테일한 작업을 요한다. 처음 오프닝은 최대한 시선을 끌어야 한다. 스케일로 정면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 하나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미장센과 리듬과 음악까지를 모두 고려해야 가능한 작업이다. 곽 감독의 요구대로 넋을 뺄 만큼의 ‘한편의 쇼’를 완성해야 한다. 국내 타이틀을 획득하는 김광민 선수와의 대결은 드라마가 중반을 넘는 시점이다. 이건 고속촬영기법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즉 슬로모션 효과를 통해 관객이 드라마에 푹 빠져들게끔 만들어야 했다. 또 김득구에게 충고 대신 스파링을 요구하는 친구와의 대결장면은 감정선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시점숏을 이용해서 관객이 진짜 때리고 맞는 것처럼 느끼게 해야 했다. 그리고 시저스팰리스의 타이틀전. 전체적인 조망은 의미없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혼자 외롭게 싸우는 사람을 부각시켜야 한다. 수천명의 시신경이 이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느낌을 줘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장 진행이 더뎌보이진 않는다. 사전에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앵글의 크기와 각도에 대해 정밀하게 따져본 뒤 콘티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이전 작업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칙왕>에서도 학교운동장에서 레슬링을 배울 때와 조금은 업그레이드 된 게임을 보여줄 때와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쇼맨십을 발휘해야 하는 지점으로 나누어 카메라를 운용했던 경험이 이번 작품에서도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S4 7천명의 사람 심기

이날 촬영장의 외관은 기형적이었다. 스탠드로 2면을, 그린매트로 2면을 채웠다. 더 이상한 것은 하나의 스탠드만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공중화장실 앞에 놓여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CG 작업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썰렁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버려진 듯했던 스탠드는 소스 촬영을 위한 것. 여기에 관중을 불러놓고 찍은 장면을 뒤에 그린매트에 합성하는 것이다. 사실 CG를 쓰지 않고 8천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려면, 애초 계획했던 촬영일정에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들어가는 돈이 56억원(현지 엑스트라의 1일 보수는 80달러다), <챔피언>의 순제작비 60억원에 버금가는 액수다. 1천명의 엑스트라를 최대한 활용하되,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통해 사람을 심는(?) 작업은 제작진한테 당연한 선택이었다. CG를 맡고 있는 강종익 실장이 바빠진 것도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이후부터다. 일단 그린매트의 크기와 스탠드의 규모를 놓고서도 현지 스탭들과 의견충돌이 벌어졌기 때문. 그쪽의 주장은 실외 촬영장면의 경우 안전을 위해 절대로 7m 이상을 쌓지 못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강종익 실장 또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소스촬영한 인물이 블루스크린을 넘어가면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 즉 바꾸어 이야기하면 촬영시에도 앙각 앵글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현지의 반발은 완강했고, 강 실장은 대신 현지 스탭들에게 스탠드의 크기를 시저스팰리스의 것과 동일하게, 그리고 그것을 움직여 찍을 경우 소스촬영의 번거로움이 예상돼서 수량을 늘려달라고 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기브 앤 테이크였다. 하나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또 다른 하나를 어떻게든 달라고 우겼다. 강 실장, 그리고 현지 프로듀서인 스티븐과 함께 촬영장의 그린매트와 스탠드를 두고서 승강이를 벌였던 조원장 프로듀서는 미국 현지촬영에서의 얻은 바를 이렇게 말한다.

“그린매트가 강풍으로 인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긴 했다. 다행히 촬영중이 아니라서 다친 사람은 없었고, 공정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누구 탓이라고 하기도 뭐했다. 하지만 다시 복구하느라 12시간 꼬박 밤샘작업을 하느라 고생했다. 스탭들의 요구사항이 한국과 다른 것도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매트 색깔을 정하는 것부터 소품의 경우 운동화 색깔까지 일일이 지정해주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려는 것처럼 보여 얄밉기도 했는데, 대신 정확한 사전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곳 시스템의 장점이었다.”

김득구가 생을 등진 지 꼭 20년이 됐다. 하지만 누구도 사각(死角)의 링이라 불렸던, 시저스팰리스에 대해 말하지 않다. 그런 시대에 곽경택 감독은 무관의 제왕에 그친 비운의 복서에게 보내는 연서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열일곱에 마주쳤던 강렬한 이미지의 14라운드의 혈전. <챔피언>은 “모든 것을 주먹에 걸고 링에 섰던” 한 젊은이의 극적인 생을 스크린에 투영하면서 무엇을 관객에게 건네려는 것일까. LA로의 짧은 여정을 앞두고서 가졌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서는 영화가 개봉하는 작열하는 유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 <챔피언> LA 촬영현장을 가다

▶ LA에서 촬영중인 곽경택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