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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꼴통`, 괴력의 장르영화
2002-03-21

캐릭터의 힘으로 액션영화의 관습을 걸출하게 변주하다

● <공공의 적>은 장르영화다. 그것도 정통 액션장르와의 혈연을 과시하는 장르영화다. 컴퓨터그래픽의 마술이나 위압적 스펙터클에 기대지 않고 부딪히는 육체의 동선과 그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을 드라마의 주요 계기로 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고보니 <피도 눈물도 없이>도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를 최근까지 만들어온 사람은 한국에선 <무사>의 김성수 감독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충무로의 중심부에서 이런 영화들이 전혀 다른 두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진귀하고 흥미롭다.

두 영화는 물론 순수 액션영화가 아니다. 둘은 동시대의 관객과 만나기 위해 혹은 감독의 취향에 따라 장르 혼용과 장르 변주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서로 다르다.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두 영화는 자신의 먼 고향을 되돌아본다. 되돌아보면서 관객에게 자신의 뿌리를 환기시킨다. 원조의 제스처만 모방했다면 <첩혈쌍웅>을 흉내낸 처럼 혹은 <미션 임파서블2>처럼(새삼스런 얘기지만 이 영화는 오우삼이 자신의 전작들을 자신이 모방한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들도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는 순수 액션장르의 정취와 숨결을 잊지 않는다. 장르영화에, 특히 액션장르에 깊이 빠졌던 사람이라면 이런 영화를 싫어하기 힘들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면, 두 영화는 같은 핏줄인지 알아채기 쉽지 않을 만큼 전혀 다른 길을 간다. 두길 모두 험난해서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데, <피도 눈물도 없이>는 위태롭게 보이더니 결국 넘어져 몇 군데 상처를 입고서야 목적지에 이르고, <공공의 적>은 비틀거리는 듯하다가 멋지게 고지에 오른다. 너무 큰 상업적 성공으로 그 진가가 가려질 수도 있는 <공공의 적>이 이룬 성취는 되새길 가치가 있다.

액션영웅 모두가 존 웨인의 후예들

걸음을 옮기기 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편의상 액션장르란 용어를 썼지만 이건 영화 사전에 잘 안 나오는 단어다. 또한 순수 혹은 정통액션이란 용어를 썼지만 여기에 해당되는 영화는 없다. 그래도 액션영화는 무수히 많고, 그 중독자들에겐 액션영화 하면 떠오르는 어떤 이념형이 있다. 그 이념형의 윤곽과 계보를 대강이라도 그려두는 게 필요할 것 같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한국영화의 무대에 등장한 액션장르엔 수많은 선조들이 있었다. 홍콩의 무협과 권격, 일본의 참바라와 야쿠자, 한국의 다찌마와 리, 홍콩 누아르 등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혈연으로 얽혀 있는 하위장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더 깊이 캐다보면 누아르, 갱스터를 거쳐 결국 할리우드 서부극에 이른다.단순화하면, 모든 액션영화의 영웅은 존 웨인에게서 그 절정의 현신을 얻은 서부사나이의 후예들이다. 황야에서 돌아와 공동체의 곤경을 해결하고 다시 황야로 떠나는 서부사나이(혹은 무법자)의 체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액션영웅은 극히 드물다. 무대가 도시로 바뀌면 난폭한 범죄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갱스터의 제임스 캐그니) 음모와 배신의 세계를 홀로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고립을 면치 못하는 탐정(누아르의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그들의 피엔 황야를 떠도는 서부사나이의 야성이 울혈처럼 남아 있다.

고전기 장르가 해체된 60년대 이후에도 고전적 액션영웅은 갖가지 하위장르에서 혈맥을 이어갔는데, 적자의 칭호를 부여한다면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형사액션의 몫이다. 7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형사 <더티 해리>의 해리 캘러핸은 자신의 형사 배지를 강물에 집어던지며 걸작 서부극 <하이 눈>에 오마주를 표했고, 80년대 할리우드의 최고 형사 <다이 하드>의 존 매클레인은 서부극 스타 로이 로저스를 흉내내며 최후의 악당을 처단했다. 오우삼의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은 킬러와 형사에게 형제의 영혼을 나눠주면서 액션장르의 혈통을 상기시킨다. 김영빈의 <테러리스트>에선 아예 주인공 한 사람이 형사와 고독한 킬러의 길을 차례로 걷는다.

통용되는 의미에서 액션장르는 고립된 남성(적) 영웅이라는 캐릭터, 그들의 육체적 투쟁이라는 모멘트, 그리고 그들의 곤경과 영적 구원 혹은 세속적 승리의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그가 액션영웅이라면 보안관- 무법자, 형사- 킬러의 경계는 사라진다. 킬러인데도 존 웨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레옹과, <하이 눈>의 정오의 결투를 재현하는 고스트 독을 떠올려보라. 직업에 관계없이 그들의 영혼은 문명(제도)에도 황야(뒷골목)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운명처럼 주어진 공동선의 목적을 무법자의 방식으로 해치운 뒤, 다시 홀로 세상에 남는 것. 이게 우리가 떠올리는 액션영화의 이념형이다.

강철중, 놀라운 즉물적 생동감

<공공의 적>은 강우석 감독의 12번째 작품이다. 강우석 감독은 15년 동안 두터운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면서도 감독으로서 진지한 조명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그는 2류 감독이었고, 이건 얼마간 그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강 감독은 재미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확고한 신념의 신봉자였고, 신념에 따라 <투캅스>처럼 끊임없이 재미를 추구한 작품들로 돈을 벌어왔다. 실패한 축에 끼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래 4년 만에 신작을 만든다고 했을 때, 작품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오랜 신념을 부인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재미있다. 전국 300만명에 이르는 관객이 봤으니 그 재미는 보편성이 있다. 그런데, 강 감독은 자신에게 아주 혹독해보이는 길을 경유해 재미를 추구한다. 이건 예전의 강우석 방식이 아니다. 그의 히트작 <투캅스1, 2>와 <마누라 죽이기>를 박중훈의 개인기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강 감독은 머뭇거리지 않고 스타의 개인기와 TV식 개그와 객담을 끌어들이는 쉬운 길을 택했다. <공공의 적>은 그에 비하면 아찔한 고난도 등반이다.

주인공 강철중에게서 <투캅스>의 타락한 형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가만보면 이 사내는 뭔가 다르다. <투캅스>의 주인공에겐 없던 심리적 균열이 강철중에겐 있다. 이 사내는 내면이 망가진 인간 말종이다. 기초적인 설정만 빌려왔을 뿐 강철중은 투캅스의 후예가 아니다. 같은 조였던 선배 형사가 음모에 말려 자살한 현장에서 그는 울부짖는다. “야이 시발새끼야, 이 시발놈아. 죽긴 왜 죽어.” 묘하게 <박하사탕>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 직후에 강철중은 압수한 마약을 갖고 튄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는 마약을 팔러 다니다가 실패하고 목욕탕에서 온몸이 도화지인 깡패를 굴복시키는데 이 장면은 정말 웃긴다. 불과 10분 안팎이지만, 강철중은 <박하사탕>의 김영호의 처절함에서부터 <투캅스>의 박중훈의 경쾌함까지 한 호흡으로 펼쳐놓는데, 놀랍게도 이 인물에겐 작위성이 아니라 즉물적 생동감이 넘친다. 설경구가 없었다면 강철중도 없었겠지만, 설경구는 <단적비연수>의 나무토막 같은 ‘적’이 된 적도 있다. 따뜻한 눈물과 정겨운 웃음이 있는 인간 말종. 작위성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이런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 연출의 힘이다.

이 인물의 뿌리는 투캅스가 아니라 해리 캘러핸이나 존 매클레인쪽으로 뻗어 있다. 서양 선배들처럼 강철중도 저 홀로 세상을 만나 결국 작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강철중은 해리 캘러핸과 달리 너무 속물적이고 매클레인보다 훨씬 야수적이다. 캘러핸은 세상의 타락을 폭력으로 정화하려는 종교적 욕망과 파시스트적 충동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매클레인은 매사 관심이 없는 냉소주의자지만 가족에 대해선 아련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강철중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영웅상으로부터 훨씬 먼 곳에서 출발한다. 무능하고 무식하고 반사회적이지만 자신의 생존법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공공의 적>은 형사 액션물의 캐릭터 폭을 훌쩍 넓혀놓으며 투캅스의 평면적 캐릭터와 일찌감치 절연한다. 이 인물이 선사하는 웃음은 개인기도 슬랩스틱도 아닌 캐릭터 자체다.

<공공의 적>은 풍자코미디가 아니다. 감찰반의 젊은 형사와 거만한 검사가 경찰, 검찰조직의 무능과 부패를 슬쩍 일러주지만 그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강철중이 사는 법을 충실히 쫓을 뿐이다. <공공의 적>이 코미디라면 캐릭터 코미디다. 문제는 이 이상한 새 영웅 캐릭터가 상대해야 할 적이 부모살해를 감행하는 자신보다 더한 인간 말종이다. 여기서 강 감독은 또 한번 위험한 밧줄타기를 감행한다. 인간 말종을 분노케 할 만한 인간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나빠야 할까.

놀랍게도 강 감독은 여기서 호러장르의 관습을 끌어들인다. 이성재에게 액션장르의 악당이 아니라 호러의 연쇄살인마의 톤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가 부모를 찔러죽이는 장면은 액션장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음향과 앵글로 인간 아닌 악마를 전시한다. 그의 악마성엔 어떤 내면적 동요도 없어 증오심 아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코미디와 액션이 섞인 영화의 톤을 금가게 할 시도인데도, 희한하게 극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자기 리듬을 찾아간다. 미끄러졌다면 유머와 공포 양쪽이 다 시시해졌을 협곡을 <공공의 적>은 절묘하게 통과한다.

관객과 달리 범행 자체를 목격하진 못한 인간 말종 강철중이 천인공노할 범죄사실만으로 대오각성하여 정의의 화신이 됐다면 신파로 주저앉았겠지만, <공공의 적>은 이 대목에서도 치밀하다. 강철중에게 이성재는 무엇보다 손에 똥 묻히게 한 자이자, 자기 얼굴에 기스 가게 만든 자다. 이건 천하의 강철중이 참을 수 없는 만행이다. 그가 이 사건을 자임한 동기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범죄사실 자체엔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의 동기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결정적으로는 이성재가 수사방향이 엇나가도록 또다른 살인을 저질렀을 때(그는 여기서 자신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공공의 적>은 세련되게 강철중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클로즈업에서 컷해버린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인간적 분노가 그의 목을 타고 얼굴로 전해진다.

강우석 감독, 생애 최고의 성취

검사가 상류계급 살인마를 비호하고, 그리고 강철중의 무지가 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지 못해 쩔쩔매는 지점에 이르면 관객은 어느새 이 추하고 속물적인 사내의 포로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가 후배 형사를 앉혀놓고 “인간이 아무런 이유없이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윤리 교과서의 말투로 설교하는 장면에 이르면 그의 각성은 말할 수 없는 감동마저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바로 최후의 결투로 달려갈 법한데 감독은 그를 교통경찰로 좌천시키면서 한 템포 더 눌러버린다. 강철중보다 관객의 속이 더 끓어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주인공에게 증거포착의 계기가 선사된다. 증거포착 과정은 누가 봐도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이 지점에서 그걸 문제삼고 싶진 않게 된다.

강철중도 관객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젠 주어진 운명대로 그는 공공의 적을 처단해야 한다. 최후의 결투를 비장한 대결 아닌 어지러운 난투극으로 그린 것, 그리고 이 최후의 결투 대신 거리로 돌아와 양심을 반쯤만 회복한 채 전기톱을 휘두르며 난동을 벌이는 강철중의 코믹한 정지동작으로 라스트신을 삼은 건, 모두 이 새로운 영웅 캐릭터의 결을 고스란히 살린, 최상의 선택이다. 그는 형사배지를 던져버린 해리 캘러핸처럼 쿨한 제스처로 탈속(脫俗)을 예감케 하지도 않고, 존 매클레인처럼 가족을 부둥켜안으며 소시민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말종은 겨우 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야수성이 그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 것이며, 여전히 홀로 서울의 뒷골목을 이죽거리며 돌아다닐 것이다.

<공공의 적>엔 풍자도 있고 윤리도 있다. 하지만 그건 캐릭터의 힘 앞엔 왜소하다. 정통 형사액션에 젖줄을 대고 있지만, 캐릭터 드라마로도 손색없는 한국식 형사액션의 한 정점을 <공공의 적>은 보여준다. 누군가 <공공의 적>을 <투캅스> 이후 강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했지만(사실은 <씨네21>의 남동철이 그랬다) 동의하기 힘들다. 이건 강우석의 생애 최고작이며, <조용한 가족>의 성과를 능가할 만한 걸출한 장르영화다. 허문영 moon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