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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승] ‘신파’와 ‘건조한 정서’, 그 경계를 넘어

<조선마술사> 김대승 감독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조선마술사>(2015)의 두 배우, 유승호와 고아라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김대승 감독은 미당 서정주의 시 <봄>을 적은 편지를 그들에게 건넸다고 한다. 첫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설렘과 아픔의 이중적인 감정을 두 배우가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번지점프를 하다>(2000)와 <가을로>(2006), <후궁: 제왕의 첩>(2012)처럼 김대승 감독이 연출한 멜로영화들은 대개 이미 상실되었거나 멈춰버린 관계에서부터 진한 드라마를 길어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마술사>는 관계의 시작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또는 이제 막 성장통을 경험하기 시작한 나이의 청춘남녀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 김대승 감독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언론 시사회 직후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첨예하게 나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선마술사>를 통해 김대승 감독이 꾀하고자 한 일련의 변화와 시도에 대해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조선마술사>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평은 챙겨보나.

=살펴보고 있다. 뭐랄까, 이제 평론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연출의 어떤 부분이 후지더라, 왜 이렇게밖에 연출을 못했나, 배우의 감정선을 제대로 못 잡은 거 아니냐, 그랬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관객과 영화를 만든 사람 사이에서 평론가가 할 일이니까. 그런데 어떤 인신공격성 발언은 참기가 힘들더라. 배우가 낀 서클렌즈가 역겹다거나 기존의 다른 한국영화와 <조선마술사>를 비교하면서 배우들을 비방하는 토막글을 SNS에 올리는 것 말이다. 주관적인 감상과 욕을 쓰는 건 네티즌의 몫이지 평론의 영역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반응에 마음이 많이 할퀴어진다.

-영화를 보니 김탁환, 이원태 작가의 원작 소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더라.

=<후궁: 제왕의 첩> 편집을 할 때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소설을 하나 보낼 테니 읽어보라고 하더라. 당시 내가 읽었던 <조선마술사>는 단편소설이었다. 정조에게 알려지지 않은 딸이 하나 있었다는 걸 전제로 하는 이야기였고, 중요한 국사(國事)를 마술 대결로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내가 좋아하고 해보고 싶었던 영화를 이 작품을 통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할리우드영화의 낭만적인 시대들, 이를테면 캐리 그랜트 같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던 시절의 영화 말이다. 그 시절 영화의 낭만적인 장면들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대단히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로 풀면 어떻겠냐고 내가 오히려 최재원 대표에게 역제안을 했고 최재원 대표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시작된 영화다. 그러니까 사실은 원작에서 마술사라는 직업과 제목, 인물의 이름을 제외하면 별로 가져온 게 없는 셈이 되어버린 거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왕과 궁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소설에서는 왕의 행동과 생각이 서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영화 <조선마술사>에서 왕은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영화는 청명(고아라)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었던 궁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궁궐이라는 곳에 갇혀 있으면 시대가 분명해지고, 왕이 누구인지가 나와야 한다. 그러다보면 특정 시대의 이야기로 한정될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궁궐의 담을 넘어선 공간에서 시작함으로써 이야기의 보편성을 얻으려 한 거다. <혈의 누>(2005)의 외딴 섬마을 동화도처럼 <조선마술사>의 의주라는 공간 또한 현대사회의 축소판으로 구현되었으면 했다. 겉모양은 아주 치렁치렁하고 훌륭한 것 같지만 성 밖을 조금만 벗어나면 거지들이 득실득실하고 “은이 닷냥이면 공주가 아니라 공주 할머니라도 죽여줄걸?” 이런 대사가 가능한 공간 말이다. 결국 <조선마술사>는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공주 하나를 대국에 시집보내 안녕을 꾀하려 하는 못난 정권과, 계층에 따라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천한 생각들. 언제까지 그래야 하느냐는 거다. 물론 굉장히 로맨틱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사랑 타령, 흥 타령만 하기에는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엄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버릴 수가 없더라.

-환희(유승호)와 청명은 당신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어린 주인공이다.

=최재원 대표, 시나리오를 쓴 조정화 작가와 회의하면서 늘 했던 얘기가, 무조건 어린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슴 떨리고, 서툴고, 실수투성이인 사랑 놀음은 원숙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환희를 연기할 남자배우들을 물색하다가 제대를 앞둔 유승호씨를 마지막 휴가 때 만났다. 짓궂은 면과 남성다움, 앳된 면과 여성다움이 공존하는 어린 배우들을 원했고 승호씨와 아라씨가 우리의 선택이었다. 나이가 많은 배우였다면 내가 미당(서정주)의 시 <봄>을 선물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서정주의 <봄>을 배우들에게 선물했나.

=고아라씨와 유승호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시를 편지처럼 써서 준 적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런 거다.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는 시기의 아이들과 닮은 시라고 생각했다. 첫사랑이 막 시작되는 순간의 간질간질한 감정에 대해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영화에서 청명이 거울을 보면서 맵시를 다듬다가 ‘마마’라는 말을 들은 뒤 바로 정좌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축에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어른을 ‘꾸며야’ 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또 한편에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고 싶은 스무살 계집아이의 감성이 있어야 한다고 아라씨에게 말했다. 승호씨도 마찬가지다. 비천한 신분 때문에 늘 손가락질받고 굴욕을 견뎌내야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스무살다운 반짝반짝한 재능과 우정과 연대감과 책임감이 공존하는 캐릭터였으면 했다. 그렇게 낭만성과 비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갔으면 한다는 생각에 황지우의 시 <뼈아픈 후회>,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배우들에게 선물하고 그랬다.

-영화의 결은 많이 다르지만, 어른이 되기 전 10대 소년 소녀들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당신이 조감독을 맡았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1999)이 떠올랐을 법도 하다.

=특별히 그 영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늘 생각이 많이 난다. 이번에도 <조선마술사>를 만들며 단순하게 가자고 시작했던 이야기가 점점 복잡해지고 영화의 말미까지 숨겨놓고자 했던 ‘송곳’을 감추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 감독님 같으면 굉장히 선명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아주 깊은 향을 내실 텐데. 내가 정말 부족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을 하며 다시 수업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건 진심이다.

-공간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환희가 환술을 펼치는 장소인 ‘물랑루’가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물랑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계급에 따라 관람하는 구역이 나뉘어 있다. 하층계급은 아래쪽에, 높은 계급은 위쪽에서 공연을 본다. 물랑루의 주인인 김갑서와 왕실의 무관인 안동휘 같은 사람들은 별실에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공연자들이 그러한 계급을 인식하지 않고 한판 잘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거다. 처음에는 사면이 다 트인, 마당 같은 공연장도 생각해봤지만 마술을 이런 곳에서 하면 거짓말인 게 다 드러나지 않겠나. 그래서 관극자와 공연자를 가르는 서양식 무대의 구조를 취하되 중앙에 마당 같은 공간을 만들고 사물놀이패를 둬 관객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캐릭터적으로는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조화성 미술감독과 얘기를 나눴다. 환희와 청명에게는 사랑이 시작되는 공간이자 귀몰(곽도원)에게는 과거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는 공간이 바로 물랑루다. 이처럼 등장인물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지닌 공간으로 보여졌으면 했다.

-원작 <조선마술사>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봤는지. 조선시대의 마술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열하일기>를 보긴 했지만 어떤 내용인지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사실은 이런 종류의 마술이 있었다’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환술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중국쪽 자료들을 보긴 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상상이었다. 어차피 상상해서 만들 거라면 마술에 제한을 두지 말자, 세상의 모든 마술을 다 보고, 거기서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걸 찾자고 영화에 도움을 준 마술사분들(102쪽 박종국 마술감독 인터뷰 참조)과 이야기를 나눴다.

-절벽 아래로 몸을 반쯤 기울인 환희의 마술이 묘하다. 곧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멋지게 보였으면 하는 환희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태롭게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환희는 늘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알 수 없는 아이니까. 발에 장치를 하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건 실제로 마술사들이 많이 하는 퍼포먼스라고 한다.

-청명과 환희가 밧줄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마술은 이 영화의 가장 로맨틱한 순간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수직의 운동 이미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인물과 장치의 움직임이 잦다.

=수직의 움직임에 대한 특별한 함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는 순간의 반동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면 했다. 그래서 우리 영화를 유심히 보면, 마술을 하거나 물랑루를 조명하는 장면에서 화면비가 2.35:1에서 1.85:1로 바뀐다. 환희와 청명이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장면은 두 사람의 가장 로맨틱한 순간으로 비쳐졌으면 했다. <조선마술사>를 구상하며 최재원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이 <슈퍼맨>(1978)에서 로이스 레인의 집 발코니로 찾아온 슈퍼맨이 그녀와 함께 밤하늘을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그처럼 굉장히 로맨틱한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모호한 장면들이 <조선마술사>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건 ‘김대승 영화’의 인장 같은 장면이기도 하다. 판타지의 영화적 기능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예전에 정성일 선생이 ‘시네마틱한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이 얘기했던 것처럼 시공간을 창작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화적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내 영화는 ‘어떤 것이 영화적인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의 산물이다. 내 영화에서 현실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고, 굉장히 리얼한 장면과 판타지적인 순간이 공존하는 건 그러한 고민에 따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연상케 하는 후반부 장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거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유사한 설정과 장면이 등장하는 건 의도적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은 더 긴 호흡으로 촬영했는데, 너무 길어져서 중간에 들어가는 장면을 편집하고 지금의 버전이 된 거다. 하지만 절벽 위에 둘을 세워놓고 보니 숏이 <번지점프를 하다>와 좀 비슷한 부분이 없지는 않더라. (웃음) 내가 그런 식으로 연출된 장면을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조선마술사>는 <번지점프를 하다> <가을로> <후궁: 제왕의 첩> 등 당신이 연출한 멜로영화를 통틀어 가장 밝고 유쾌한 이야기로 기억될 듯하다. 개인적인 상처와 상실감을 지닌 인물들이 자아내던 치열함과 씁쓸함이 이번 영화에서는 덜하다는 생각이 든다.

=멜로적인 요소가 조금 더 나아가면 신파가 되고, 덜 가면 건조한 정서의 영화가 된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놔버렸다. 우린 아름답고 재미있고 유쾌한 사랑 이야기를 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고, 방준석 음악감독에게도 최대한 역동적이고 동화적인 음악을 주문했다. 젊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데 뭘 그렇게 가리고, 벼랑 끝에 세워서 줄타기를 하나 싶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처음부터 내가 한 생각이었다.

-영화의 개봉을 앞둔 지금, 그 ‘내려놓음’을 선택한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나.

=시간이 좀 많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돌아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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