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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2)
2002-03-22

빚 안 지고 영화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

“인간관계로 땜빵”하기

고영민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와 끙끙 앓았다. 어렵게 마련한 제작비의 태반을 날린 데다 스탭들 고생은 고생대로 시켰다는 자책이 컸던 것. 수중에 남은 돈도 별로 없어 모든 걸 포기하려는데, 주변의 누군가가 그랬다. “훔쳐서라도 찍으라”고.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 작품이 평생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홧병날 거라고. 그래서 1200만원의 빚을 내고 팀을 거의 새로 짜다시피하여 떠난 것이 2001년 4월의 재촬영이다.

그러나 두번째 로케이션에서도 뜻대로 다 찍지 못했고, 빠듯한 예산으로 후반작업할 것을 뻔히 앞둔 마음은 착잡했다. 물질적으로 더이상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없던 이때, 그에게 희망이 되어준 것은 ‘사람’의 힘이다. 배우나 스탭들도 개런티 없이 뭉쳐 고생한 사람들이지만, 영화아카데미 후배·동기들에게 부탁해 학교 편집실을 이용하거나 작업비용을 깎는 식으로 다시 한번 도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돈이 비는 구멍을 인간관계로 땜빵했던 것. 부산영화제 상영날 아침에나마 프린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욕하면서도 결국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단편인데 대충 하지?"

고영민 감독은 ‘독립영화감독’으로 불리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영화가 독립영화 고유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제작과정에서 규모가 커지며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진짜 혼자서 ‘독립’적으로 찍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스템 밖에서 찍으려다보니 더욱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리고 자신은 운이 좋아 도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넉넉지 않은 지원금의 기회가 박하게 주어지는 현실은 단편영화 감독들에게 아직도 팍팍하다고 본다.

를 찍으면서 고영민 감독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단편인데 대충 하라”는 것. 두번이나 해외촬영을 나가는 그에게 영화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영화를 갖고 돈만 쓴다”며, 그리고 독립영화 찍는 사람들은 “독립영화계 분위기를 흐려놓는다”며 혀를 찼다. 사실 일리있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욕먹어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을 만큼 이 영화에 대한 그의 애착은 강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도 한몫 했다.

“코미디니까, 적당히 높은 산에서 얼렁뚱땅 찍어서 대강 웃길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단편이기 때문에 더 치밀하고 세심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금만 더 애쓰면 이런저런 그림들 만들어낼 수 있는데, 싶어서 포기할 수 없었죠.”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을 영화로 비틀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그 역시 대단한 욕심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다음 영화도 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

“한 영화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를 100이라 하면 그중 7∼80은 돈 모으는 데 바친 것 같다”는 고영민 감독의 이번 영화결산은 ‘소모전’이라는 것. 백방으로 아득바득 뛰었지만, 제작비 유치의 성과보다는 에너지 소모만 커서 결국 영화 전체에는 해가 되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촬영이 지연되고 한번 실패를 겪는 바람에 스탭을 해산시켰다가 다시 모은 일도 안타까운 점이었다.

사실 감독이 프로듀서 역할까지 함께한 것도 힘을 모으기로 했던 프로듀서가 촬영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중간에 이탈했기 때문. 제작비 준비 등 프로듀서 노릇으로 진이 빠지고, 정작 촬영현장에서 감독으로 뛰어야할 때 힘을 쏟을 수 없었던, 비뚤어진 1인2역이었다. 단편영화 작업을 다시 한다면 충무로 시스템 안에서 영화사 소속으로 작품을 찍거나, 아예 제작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소품을 선택하겠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돈만큼이나 큰 힘이 되었던 인적 리소스의 재충전도 중요한 문제. “사람들한테 너무 잘못한 게 많아서 두번 다시는 안 도와줄 것 같아요. 앞으로는 갚아야지.”

1200만원 빚은 독립단편영화제에서 받은 1000만원 상금으로 거의 청산한 상태다. “이런 궁상스럽고 암울한 얘기 그만했으면 좋겠네요. 그냥 바람은 젊은 사람들이 빚 안 지고 영화 찍을 수 있었으면, 하는 거예요.” 고영민 감독에게 지난 영화만들기가 힘든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1년반 동안 흡사 무전여행을 한 것처럼, 넉넉하고 안락한 여행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쉬어갈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곳은 그 ‘사람들’ 사이라고 그는 말한다.

고영민 감독은 해외 영화제 등을 겨냥해 5월까지 사운드와 자막을 재작업할 계획을 갖고 있다.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사람들처럼, 그는 또 묵묵히 영화를 만들 것이다. 앞으로는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나갈 힘을, 그는 또 어디서 얻을까.

글 황선우 jiver@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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