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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자본주의가 어쨌다구?
김혜리 2016-02-04

<빅 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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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트레이더가 영화 해설 패널로 초청된 시사회에서 <빅 쇼트>를 보았다. 마침 장소가 여의도여서인지, 금융업 종사자들이 단체관람을 와서인지 극장 분위기가 색달랐다. 앞뒤에서 “선배님, 저는 코스피는 손대지 않은 지 오래돼서 호흡을 잊어버렸습니다”라든가 “그래서 변동성이 약화되면 그 영향은…” 하는 점잖은 대화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양도성 예금증서 약자가 뭔지 매번 새로 찾아봐야 하고, 오랫동안 선물 시장이 아트박스와 관련된 무엇인 줄 알았던 나로서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빅 쇼트>는 적당히 친절했고, 금융 용어가 어려운 것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애초에 고안된 말들이므로 당연하다는 대사로, 나의 열등감까지 다독여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보통 사람의 이해를 차단하는 알파벳 퍼즐 같은 경제 용어가 만드는 문턱은, 바로 <빅 쇼트>가 묘사하고 있는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의 원흉이기도 하다. “24시간 뉴스 채널까지 존재하는 사회에서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상황을 지적하지 않았는가?” <빅 쇼트>의 애덤 매케이 감독이 인터뷰에서 남긴 의문이다.

주택 담보대출 채권을 묶어 판매하는 파생 금융상품 CDO(부채담보부증권,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의 붕괴를 남보다 먼저 예측한 투자 전문가 여섯명이 <빅 쇼트>의 주인공들이다. 이중 크리스천 베일, 스티브 카렐, 라이언 고슬링,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네명은 베테랑이고 나머지 둘은 월 스트리트에 막 입성한 콜로라도 출신의 신참이다. 성격도 배경도 다르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근원적 모순을 지적하는 투사들도 아니며 반대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흥청망청한 사기꾼도 아니다. 일찌감치 은퇴해 유기농 텃밭을 가꾸고 있는 트레이더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 경우 반골에 가까워 보이긴 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환멸을 느낀 대상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프로그램과 실체 사이에 놓인 간극이었다. 요컨대 여섯 플레이어는 본인과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펀드를 굴리는 진성 자본주의자다. 그런데 오직 돈을 벌고자 데이터와 시장 흐름을 분석한 대로 합리적으로 베팅해놓고 보니 경제지표와 정책이 현실과 연동해서 돌아가질 않는다. 금융 전문가와 정책 입안자, 즉 내부자들끼리의 무책임한 탐욕 게임이 회로를 고장낸 것이다. 우리가 틀린 것인가? 소규모 투자사를 이끄는 깐깐한 프로페셔널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은 응당 전문가가 취해야 할 과정을 밟아 동료들과 함께 마이애미 주택 시장 실사에 나서고, 그 과정에 마주치는 경제 주체들의 근시안적 어리석음에 경악한다. 조사 과정에서 스티브 카렐이 난센스를 맞닥뜨릴 때마다 턱을 빠뜨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순간은 <빅 쇼트>에서 가장 큰 폭소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웃음은 이내 분노로, 다시 비탄으로 진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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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쇼트>는 애덤 매케이 감독(<앵커맨> <앵커맨2>)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코미디다. 단, 유능한 전문가들의 각개전투를 숨차게 웃으며 따라가다 보면 문득 거대한 비극적 결론에 도착한다. 떠오르는 다른 장르는 범죄영화다. 누가 뭘 훔치지도 않는데 어째서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빅 쇼트>의 펀드 매니저들은 어떤 면에서 탐정의 역할을 수행한다. 굉장한 범죄가 저질러졌고 피해자는 미국 및 세계 경제와 서민이며 유력한 혐의는 대형 은행과 투자사, 관료 집단에 있다. <빅 쇼트>의 주인공들은 현장을 답사하고 증거를 조합해 도출한 자신의 추리를 확신하지만, 세상은 범죄가 이뤄졌다는 사실조차 모를뿐더러 범행을 알고 있는 자들은 탐정들의 고발을 일축한다. <빅 쇼트>의 수사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강 하류에 시신이 떠올라 추론이 입증되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오, 그리고 돈이 걸려 있다. 시장 붕괴쪽에 베팅한 투자금을 거둬들이지 못하면 세상이 망하기 전에 그들과 가족이 망할 터다. 결과는 절반 미만의 승리다. 죄상은 만천하에 알려지고 주인공들은 큰돈을 번다. 하지만 죗값은 누가 치렀는가? 피해는 누가 짊어졌고 재발은 방지되었는가? 온전한 승자는 없고 근심은 뿌리 뽑히지 않는다.

속이 풀리지 않은 애덤 매케이 감독은 한탄하고 고발하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엔딩에 배치해 프로파간다가 되는 위험까지 감수한다. 애초에 <빅 쇼트>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같은 예술적 야망을 품지 않고 픽션화된 르포로서의 정보전달과 재미에 집중하는 영화다. 이 목표에 봉사한다면 어떤 테크닉도 사양하지 않는다. 연대를 표시하는 몽타주, 보이스 오버, 정지화면, 포커스 이동이 동원되고 배우들은 종종 제4의 벽을 무너뜨리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수줍음 따위 모르는 애덤 매케이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 유명 인사들을 초빙한 경제 용어 해설 각주를 넣었다. 배우 마고 로비, 셀레나 고메즈, 스타 요리사 앤서니 보뎅 등이 등장해 서사와 완전히 무관한 ‘여기서 잠깐’ 코너를 진행한다. 영화가 설명을 시도하는 장면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빅 쇼트>가 취한 접근법을 받아들인 관객에게 이 주석은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실은 감독의 변이 더 흥미롭다. “오늘날 미디어들은 셀러브리티들에게 방대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현실적으로 정말 중요한 이슈들은 절대 건드려지지 않는다. 상상해봤다. 만약 레드카펫에 스타들이 등장해 카메라와 마이크 세례를 받을 때마다 지구온난화 데이터를 언급하면 어떨까? 풍자로서 웃기고 폭발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의도는 대체로 성공적이다. 오히려 잉여분으로 보이는 대목은, 스위스 은행 투자팀 직원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 수행하는 MC 역할이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안내하고 개인적 회상을 곁들인다. 그러나 다혈질 인물 마크 바움이 충분히 일반 관객을 대변해 위기를 목격하고 분노하는 가운데 자레드의 가이드는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라이언 고슬링이 경쾌한 스텝으로 연기한 자레드는 플레이어로서 필드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매우 재미있는 인물이다. <빅 쇼트>의 설명과 유희성은 자레드가 굳이 중계석에 앉지 않아도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나는 <빅 쇼트>의 주인공 각자의 궤적을 담은 네편의 2시간짜리 영화를 볼 용의가 있다. 그만큼 이들은 개성적인 미덕과 결함으로 무장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영화 초반의 예상과 달리 여섯 주요 인물 전부가 어떤 시점에 한자리에 모이지 않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빅 쇼트>의 궁극적 주인공은 사건이다. 애덤 매케이 감독의 결정적인 성취는, 극중에서 한번도 옷깃을 스치지 않는 펀드 매니저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와 마크 바움을 양대 축으로 삼아 무리 없이 영화의 주제를 구현해낸 데에 있다. 마이클과 마크는 아웃사이더들로 가득한 영화 가운데에서도 제일 비사교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크리스천 베일과 스티브 카렐은, 라이언 고슬링과 브래드 피트와 견주어 빅 액팅을 구사한다. 전자는 영화 내내 독방에서 맨발로 명인기를 펼치고, 후자의 연기는 그를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조연들의 리액션으로 완결된다. 특히 장애를 가진 외골수 천재를 작심하고 만들어낸 베일은 무시무시하다. 못할까봐가 아니라 너무 잘할까봐 불안하고 불안은 사실로 판명된다. 마이클 버리가 신입사원을 면접하는 초반 시퀀스는 두고두고 인용될 클립이다. 이 희대의 메소드 배우에게 유리 의안 같은 소품을 주다니! 차라리 방화광에게 휘발유 통을 안겨주어라.

<자객 섭은낭>

자객 은낭(서기)은, 어린 시절 반려로 믿고 사랑했던 전계안(장첸)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아 귀향한다. 그녀가 임무와 애정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건 아니다. 둘의 사랑은 끝난 일이다. 다만 속세에서 살아온 계안이 옛사랑에 가진 거리감과, 이별 이후 감정의 역사가 멈춘 은낭의 그것은 다르다. 내실에 잠입한 은낭은, 현재 사랑하는 여인 호희에게 자신과의 애달픈 옛 사연을 회고하는 계안을 엿듣고 엿본다. 마치 은낭의 마음을 염려하듯, 바람에 흔들린 얇은 비단 휘장이 시야에 밀려들었다 물러나길 거듭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은낭의 사실적 시점숏일까? <자객 섭은낭>의 많은 장면이 그렇듯, 실제 카메라의 위치에 있다면 모습이 드러나야 마땅한 은낭을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심경의 시점숏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서 있는 자리의 조망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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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백화점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하다가 한 우아한 부인에게 매혹된 체험을 토대로 <캐롤>의 원작 소설을 썼다. 하이스미스는 문제의 여성과 직접 재회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조사하고 한동안 뒤를 밟았다고 한다. 스토킹은 범죄소설가 하이스미스의 단골 모티브이기도 하다. <캐롤>보다 10년 늦게 출간된 <올빼미의 울음>도 ‘무해한’ 스토킹으로 출발한다. 이혼 후 먼 도시로 이사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로버트는, 우연히 제니라는 여성이 카펫을 터는 모습에 매료돼 몰래 지켜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이스미스가 묘사하는 로버트의 엿보기는, 누드에 집착하고 성적 판타지를 투사하는 보통의 관음과 좀 다르다. 로버트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으며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에 반한다. 그녀를 지켜보는 일은 이 남자에게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찾는 행위와 비슷하다. 정작 제니와 직접 대면했을 때 로버트의 심리는 실망에 가깝다. “가까이에서 봐도 창문 너머로 바라봤을 때보다 더 기쁘거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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