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놈이다, 이런 괴상한 영화를 주저없이 택하다니!”
감독의 고민과 미학적 의도가 중심이 되는 영화 제작기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박찬욱 감독이 여기 쓴 <복수는 나의 것> 제작기에 통쾌하게 한방 먹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교과서적 문구를 뒤로 젖혀놓고 그는 영화 촬영현장의 진정한 마술이 어디 있는지 보여준다. 처음 감독을 만나 출연 약속을 하는 순간 두나의 어머니가 느꼈을 감상에서, 얻어터지는 연기를 하면서 이를 악무는 배우의 독기에서, 오랫동안 집을 비운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딸의 마음에서, 감독이 되겠노라 온갖 불합리한 요구를 묵묵히 참아야 하는 연출부 막내의 성실성에서, 엉성한 현장 분위기를 잡아보겠다며 연기지도를 하는 류승완 감독의 자세에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마니또를 제안하는 애정에서, 기계장치에 불과한 카메라는, 셀룰로이드에 불과한 필름은 사람의 말을 배우고 혼을 얻고 육신의 몸짓을 따라한다.
영화가 마술인 것은 그래서인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오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이 에피소드들은 이제 술자리의 안주가 되고 사부의 전설이 되고 자신의 명함이 될 것이다. 슬쩍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영화 촬영현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2001년 1 ~ 7월
1월25일
영화 <파괴된 사나이> 일로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두나와 감독의 첫만남. 사진에서보다 키도 작고 배도 많이 나왔다. 퍽 맘이 놓인다. 딸래미 옆에 앉혀놓고,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무슨 체위를 취하느니 어느 부위를 노출하네 마네 따위의 얘기를 주고받으려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어쩌랴,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인걸. -김화영(배두나 엄마)
1월28일
하균이가 <파괴된 사나이>를 받자마자 바로 읽고 바로 연락했다고 한다. 하겠다고. 대단한 놈이다, 그런 괴상한 영화를 주저없이 택하다니! 어쨌든 이로써 난 빠져도 되게 생겼다. 살았다. -송강호(배우)
5월11일
이제 다 이루었다! 송강호로부터 오케이 사인이 온 것이다. 나흘 전, 그에게 각본을 또 보냈다고 털어놓았을 때 감독이 너는 자존심도 없냐고 지랄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송강호가 수정된 각본을 읽고 갑자기 맘이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대꾸했었지. 그런데 지금 결과를 봐라, 찬욱이 걔는 인생을 모른다. -이재순(프로듀서)
6월4일
영화의 주무대인 류의 고향이 전라도 순창으로 정해지다. 최근 몇달 동안 제작부와 연출부가 강원팀과 전라/경상팀으로 양분되어 전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결실이다. 처음엔 강원팀의 우세가 점쳐지더니 전라/경상팀이 역전승을 거두고야 말았다. 감독님이, 기막힌 절경보다는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쪽의 손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이연욱(제작부장)
6월21일
박찬욱의 새 각본을 함께 손봤다. 말로는 미니멀한 영화를 지향한다면서 설명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 한 스무신쯤 없애줬더니 안 된다며 막 발버둥을 친다. 내 작품 쓸 땐 가차없이 칼질을 해대던 그가,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 그냥 두면 나중에 저 혼자 도로 살려놓을까봐 아예 과감하게 블록 설정해서 몽땅 딜리트시켜버렸다.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이무영(공동각본)
7월15일
00아파트 섭외 실패. 처음엔 호의적으로 나오던 자치회에서, <정사>의 티비 방영 이후 180도 입장을 바꿔버렸다. 자기네 아파트가 너무 가난하게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 방송 직후 당시 촬영 허가를 내줬던 자치회장이 잘렸다고 한다. 천상 새로 헌팅해야 할 것 같다. 감독님 좌절할 텐데 어쩌나…. -손세훈(제작실장)
8월
8월13일
첫촬영부터 장난이 아니다. 버티고개역, 그 긴 에스컬레이터 측벽의 형광등 60개를 다 갈아끼웠다. 역무원들이 나한테만 난간 무너진다고 내려오라고 난리다. 이 컷, 편집에서 잘리기만 해봐라. -권명환(조명부)
8월14일
첫촬영 분량 데일리를 확인했는데, 에스컬레이터의 롱숏은 아무래도 괜히 찍은 것 같다. 조명부가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지, 뭐. -박찬욱(감독)
8월17일
드디어 사고가 터지기 시작하는구나. 촬영 때 가장 두려운 게 인명사고인데, 세상에, 달리는 차의 보닛이 열리다니,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병원에 달려가 봤더니 다행히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조감독의 한마디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버린다. “사장님… 우리 촬영 시작했어요?” “뭐어?!!” 옆에서 연출부가 염장을 지른다. “아유, 말도 마세요. 아까는 남편한테 연락했다고 하니까 자기가 시집을 갔느냐고 그러던 걸요, 뭐….” 교통사고 환자에게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세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떠드는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여, 이재순 피디, 오재원 미술감독, 안성현 미술부, 그리고 특히 이소영 조감독을 굽어살피소서. -임진규(제작자)
8월17일
이 피디 차가 뙤약볕 아래 주차돼 있기에 너무 더울 것 같아서 이 부장 차로 바꿔 탔더니 그쪽 차만 사고를 당했다. 기억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소영이를 보며 내심,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생각했다. -박찬욱(감독)
8월18일
소영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간호사한테 저 처음 보는 아저씨 좀 내보내달라고 안 그런다. -유흥삼(조감독의 남편)
8월19일
공무원 아파트의 발코니 장면을 찍는데 감독이 이랬단다. 배경으로 저 아래 멀리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 흙먼지 일으키면서 축구하는 사람들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연출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가서, 완전히 개처럼 뛰어다녔다. 매니저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올라오는데 지나가는 촬영부 지들끼리 하는 말, “그거, 하나두 안 보이는데 왜 시켰나 몰라…?” -김양래(신하균 매니저)
8월20일
보배가 카에서 크라잉하는 신을 찍었다. 제대로 안 운다고 그 에잇 이어즈 올드밖에 안 된 애를 어시스턴트 디렉터가 얼마나 구박하던지, 할리우드에서 일을 배운 나로서는 정말이지 임배리싱했다. 큰소리 질러서 겁주고, 프레임 바깥에서 막 꼬집고, 똑바로 못하면 파이어시켜버린다고 블랙메일하고…. 할리우드에서 저렇게 했으면 촤일드 어뷰즈로 당장 쑤우 당했을 거다. 코리안 크루들은 정말 다 미친놈들 같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보배였다. 촬영이 끝나고 내가 미안하다고 대신 어폴로자이즈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저 울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알아요.” 이러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김병일(촬영감독)
8월22일
현장에 병헌 오빠가 놀러왔다. 감독님이, 현정이 너 때문에 불렀다며 놀렸지만 난 마냥 좋기만 했다. 평소 남자 스탭들로부터 뻔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내가 왜 오빠 앞에만 서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지…. 아, <공동경비구역 JSA>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는 매일 오빠 얼굴을 만질 수 있었는데…. -김현정(분장팀)
8월25일
편집실 조수로 컴컴한 방에 종일 틀어박혀 일하다가 현장에 나오니 정말 신난다, 고 생각했는데…. 금호역 출구장면을 나름대로 편집을 해서 보여드렸다. 끼니도 건너뛰고 열심히 했다. 감독이 제대로 못 찍은 것도 교묘한 편집으로 표 안 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 나, 정말 칭찬 한마디 들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감독님, 스윽 한번 들여다보더니 돌아서 가며 하는 말, “넌 왜 내 생각하고 거꾸로만 붙이는지 모르겠다…. 콘티 안 보니?” -곽정아(현장편집)
9월
9월2일
부검실 앞 잔디밭으로 설정된 보라매 공원 촬영. 조용한 분위기에서 송강호가 흐느끼고 최 반장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장면인데, 막상 현장에 가봤더니 한쪽에선 경로잔치, 반대쪽에선 판촉행사, 멀리 힙합댄싱팀의 연습장까지, 완전히 소음의 아수라장이었다.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승철(프로덕션 사운드 믹서)
9월3일
부검실을 찍다가 한바탕 중단 소동이 벌어졌다. 갑자기 감독님이, 강호 오빠가 입은 잠바의 상표를 떼어버리라는 거다. 전에 미리 허락받지 않았냐고 항변했지만 자기가 언제 그랬느냐며 오리발을 내밀고 막무가내였다. 스탭들은 다 나만 쳐다보지,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상표를 떼고 그 자리를 표 안 나게 처리하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감독님은 왜 나만 미워하는 걸까? -신승희(의상팀)
9월9일
장기밀매조직 사무실 촬영. 마취된 채 강간위기에 놓인 아가씨 역을 하는 아가씨가 에로비디오 찍으러 가버리는 바람에 촬영이 중단되었다. 한숨만 쉬고 있는데 감독님이 찾으신다는 말이 들렸다. 예감이 안 좋았다. 역시 그랬다. 시트로 몸을 가리고 맨 팔다리만 내놓고 있으면 벌거벗고 누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근데 그 대역은 누가 하죠?” 대답은 안 하고 빤히 내 얼굴만 바라보던 감독님의 그 느끼한 표정. 결국 민소매 상의 입고 반바지 입고 시트 뒤집어쓰고 누웠다. 모처럼 푹 잤다. -김나성(스크립터)
9월13일
박 감독님 현장에 놀러갔다. 배두나가 신하균을 두들겨패는 장면을 찍는데, 감독이나 배우들이나 어찌나 버벅대던지. 보다보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좀 해보면 안 되겠냐고 그랬다. 허락을 받아서 약간의 동작을 지도해 보였다. 일동 기립박수를 기대하며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스탭들 모두 팔짱끼고 묵묵히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저건 좀 아니잖아?” 하고 동료에게 속삭이는 연출부도 있었다. 아, 명랑액션의 길은 이토록 멀고도 험하단 말인가. 그래도 박 감독님은 나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다. 아마 직접 연출하기가 귀찮기 때문이리라. 듣기로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복잡한 카메라워크와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액션신이라는데 저런 자세로 어떻게 찍으려는 건지….걱정된다. -류승완(우정출연, 영화감독)
9월15일
배두나 방 조명을 미리 다 세팅해놓고 나와서 놀았다. 남자 스탭들은 현장에 못 있게 하니까 하루종일 밖에 나가 족구만 했다. 만날 정사신만 찍으면 좋겠다. -문형준(조명부)
9월18일
두나 전기고문하는 장면을 찍다. 전기 잘 통하라고 귀에 침을 살짝 묻히는 장면을 찍는데 두나가 아주 몸부림을 치고 온통 난리를 부렸다. 어떤 테이크 때는 진짜 못 참겠는지,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잠깐만!” 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하도 치를 떨며 말을 해서 그런지 발음까지 분명치 않았다. 당연히 감독님은 거기서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고, 아마도 그 테이크를 편집에 사용할 것이다. 실감나니까. 그렇지만 나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두나는, 제 귀에 내 혀가 닿는 게 그렇게도 싫었을까?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그거…. -송강호(배우)
9월19일
그에게 점점 다가가는 자신을 느끼기 시작한다. -배두나(배우)
9월19일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전기충격으로 기절한 내가 강호 형한테 무방비로 구타당하는 장면. 무식하게 풀숏/롱테이크로 콘티를 짜놓은 감독님이나 진짜로 사정없이 때릴 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강호 형이나, 정말이지 남 생각 진짜 안 해주는 인간들이다. 무슨 애도 아니고, 나도 액션장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냥 가만 누운 채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어야 한다는 상황은 좀 다르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건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작 맞을 때보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기다리는 그 침묵과 암흑의 순간이야말로 진짜로 무서운 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그 송강호라는 명배우는 리허설 때 다르고 실제 촬영 때 다르고, 촬영 때도 테이크마다 다르게 연기하기로 유명하신 바로 그분 아닌가, 이건 예상도 안 되고…. 미치겠다. -신하균(배우)
9월20일
티저 포스터 촬영 빵꾸나다. 스튜디오에 나타난 하균씨 얼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온통 멍들고 군데군데 찢어지고 이건 아주 난리가 아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랬더니 어제 촬영하다가 강호씨한테 맞아가지고 그랬다고 한다. 영화도 좋지만 어떻게 애를 그렇게 만드나…. -이재용(포스터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