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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 컬트 <플란다스의 개>
2002-03-27

그 뚱녀는, 신선하고 통쾌하였다!

지난해 ‘씨네21이 틀렸다’라는 창간특집을 읽고 난 다음 <플란다스의 개>를 봤다. 실은 봐야지, 봐야지 노래만 하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야 봤다. 그냥 봤다고 하면 될 걸 자랑도 아닌 나의 게으름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2000년 초 개봉 때 봤다면 무심코 지나갔을지 모를 반가운 얼굴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현남이의 친구를 연기한 고수희씨의 열렬한 팬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1년 뒤쯤 이 배우의 팬이 됐으니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나중에 비디오로 보는 게 훨씬 좋았던 셈이다.

고수희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그녀에게 반한 건 그녀의 고향이면서 주무대인 대학로가 아니라 시트콤 <세친구>에서였다. 고수희는 <세친구>에 조역으로 여러 번 등장했다. 그중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들자면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한 고수희가 윤다훈에게 끈끈한 눈길을 보내자 이를 포착한 안연홍과의 한판 대결이었다. 알겠지만 안연홍이 연적들과 싸우는 장면은 대체로 ‘노려본다’→‘함께 화장실 간다’→‘상대방의 처참한 몰골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그런데 고수희의 건장한 체격에 주눅든 안연홍이 이번에는 읍소작전으로 나갔다. “흑, 전 이미 윤 실장님에게 순결을 바쳤어요.” 심드렁한 표정의 고수희는 가느다란 담배를 피워 물며 ‘쿨’하게 응답한다. “어쩌라고∼.”

이 장면에서 나는 그녀에게 뿅 갔다. 대본작가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고수희에게는 여느 뚱녀 코믹 캐릭터들과 달리 기품이 있어보였고, 귀여운 섹시함도 살짝 느껴졌다. 그녀라면 밥을 솥째 들고 먹거나, 남자한테 눈길 한번 받는 것만으로도 턱이 땅 끝까지 떨어지는, 식상한 뚱녀 캐릭터 따위는 도도하게 거절할 것이라 믿어졌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속 고정관념의 허를 찔렀다는 면에서 그녀의 등장은 신선하고 통쾌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현남 친구 뚱녀를 연기한 고수희는 배우 이름순으로는 이성재, 배두나, 변희봉, 김호정에 이어 다섯번째로 등장하는 주요 배역이었다. 이모가 운영하는 작은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신문의 낱말맞추기와 간간이 즐기는 ‘옥상담배’맛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이다. 뚱녀는 퍼즐 정답 ‘결초보은’을 ‘결초보훈’이라고 생각하는 현남에게 “야, 이 무식한 년아”라는 욕을 서슴지 않지만 먹은 걸 다 토하고 자신에게 기대 잠든 현남의 머리카락을 얌전한 손길로 추스려주는 아이다.

둘은 동네 통닭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장난삼아 주차된 차의 옆거울을 떼어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그 좁은 문방구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기도 한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럽고, 쓸쓸하다. 특히 둘이 작은 배낭을 메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훔친 옆거울을 꺼내 보며 손거울인 양 얼굴 매무새를 고치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을 비추는 가을볕처럼 너무나 허허롭고도 아름다워서 그대로 포스터에 담아 벽에 걸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러한 현남과 뚱녀의 장면들만 떼어놓는다면 <플란다스의 개>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사촌언니뻘쯤 되는 스무살 여자애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주변의 스무살 가운데는 팔등신의 지영이나 혜주보다 건장한 뚱녀를 만나기가 더 쉽다는 점에서 <플란더스의 개>는 <고양이…>보다 사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남자배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여자배우들의 외모에는 엄격하고 연기에는 관대한 충무로에서 내가 본 고수희씨가 살과 완전히 무관한 역할을 맡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살보다는 눈빛과 표정이 도드라지는 그런 연기를 하는 그녀를 어서 만나고 싶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이상 지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