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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이경미, 박찬욱 감독 대담으로 <비밀은 없다>가 남긴 것들을 되짚어보다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6-08-01

이경미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비밀은 없다>는 6월23일 개봉해 2주 만에 IPTV와 VOD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면서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기준 전국 관객 23만명을 넘기는 데 그쳤다. 관객의 외면에 따른 저조한 흥행 성적표는 <비밀은 없다>가 맞닥뜨린 현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한축에서는 근래 보기 드물게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영화로 <비밀은 없다>를 읽어보려는 비평의 시도가 이어졌다. <씨네21> 1063호 기획 ‘이대로 보낼 순 없다, <비밀은 없다>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그중 하나다. <비밀은 없다>는 분명 불균질한 요소들의 충돌로 가득한 영화다. 그것은 단지 편집과 사운드와 미장센의 예측 불가한 전개에서 오는 낯섦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국회 입성을 노리는 신예 정치인과 그의 아내, 선거를 보름 앞둔 어느 날 그들의 딸이 실종된다’는 로그 라인을 뒤로한 채 전혀 다른 길로 뻗어나가는 서사의 기(氣)에 대한 말이라 보는 게 더 맞다. 그 지점에서 <비밀은 없다>는 충분히 새로운 작품이다. 영화는 비록 극장을 떠났지만 영화의 알 수 없는 기운과 만듦새는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경미 감독에게 만남을 청한 이유다. 그 자리에 영화의 공동 각본가인 박찬욱 감독도 함께했다. ‘<비밀은 없다>는 박찬욱의 아류’라는 영화에 대한 불호의 이유가 나온 데 대한 솔직한 심정과 최근 페미니즘 이슈를 둘러싼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두 감독과 나눈 꽤 긴 이야기에서 영화의 생명력, 생명이 연장되는 영화의 가능성을 탐문해볼 수 있길 바란다.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2015)의 극장 종영 이후 외려 두 감독님께 인터뷰 요청이 많았던 걸로 안다. 영화가 개봉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이 오갔을 것 같다.

=이경미_ 개봉 전부터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했다. 개봉 전날 예매율을 보면서 제작사 대표님께 “이 정도면 예상 관객수가 어떻게 되는 건가” 여쭤보니 50만명이라고 하시더라. 결과적으로는 그보다도 덜 들었다. 개봉한 다음 주 수요일에 처음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그때 이미 투자사에서 그 주 주말부터 영화가 IPTV에 풀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IPTV 서비스를 시작한 다음 주부터 인터뷰하자는 전화를 많이 받아서 무슨 일인가 싶더라.(웃음) 정신건강에 좋지 않으니 인터넷으로 영화와 관련된 검색을 자제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이것저것 찾아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이 뜨겁게 대립하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이건 단순히 영화가 빚어낸 현상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박찬욱_ 난 <비밀은 없다>를 다들 좋아할 줄 알았다. 재밌는 탐정 드라마이고 모성이 갖는 호소력이라는 건 무시무시한 거니까. 아무도 거부하지 못할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엄마 연홍(손예진)과 딸 민진(신지훈)의 친구인 미옥(김소희)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는 리뷰어들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옥은 연홍에게 민진이가 “엄마는 멍청하다고, 그래서 자기가 지켜줘야 한다고 그랬다”고 전한다. 그건 이제 미옥이 연홍을 지켜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연홍은 미옥을 딸로 생각하게 된 것이고. 관계가 새로이 형성된 결말인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경미 감독은 ‘이건 이래서 이렇다’라고 떠먹여주듯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푼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건 마지막 장면에서 페이드아웃되자마자 곧바로 목소리가 나오는데, 그 소리가 5초만 늦게 시작됐으면 어땠을까. 좀더 감동을 음미할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경미 그러고 보니 그렇다. 다 만들고 나서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이렇게 생각이 나니. (웃음) 영화를 찍을 때부터 민진과 미옥의 멜로와 연홍과 미옥이 마지막에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살리고 싶었다. 미옥의 마지막 대사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달려갔다. 실제로 영화를 좋아해주신 관객 중에는 그 부분에 감동을 받았다는 분들이 꽤 계셨다.

<비밀은 없다>

<여교사>에서 출발해 <비밀은 없다>로

-<비밀은 없다>의 모체는 이경미 감독이 쓴 시나리오 <여교사>다. 박찬욱 감독이 미국에서 <스토커>(2013)를 연출하던 당시 이감독에게 전화해 <여교사> 전체가 아닌 그 안의 서브플롯을 영화로 발전시켜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서 <비밀은 없다>의 가닥이 잡혀나간 걸로 안다. 유독 <비밀은 없다>의 이야기가 영화 서사로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이유가 궁금하다. 더불어 이경미, 박찬욱 감독을 포함해 5명의 시나리오작가(이경미, 박찬욱, 정서경, 김다영, 정소영)가 공동으로 각본 작업을 했다. 어떤 식으로 살을 붙이고 정리해나갔는지도 듣고 싶다.

=이경미 <여교사>는 사이코패스인 노인이 한 정치인의 아이를 납치한다는 얘기다. 그 노인을 찾으려 서로 쫓고 쫓기는 액션스릴러물이다. 박 감독님께서 “내용이 재밌다. 근데 투자가 될 지는 걱정이다”라고 하셨다.

=박찬욱 <비밀은 없다>로 이야기된 것 이외의 부분은 내겐 잘 와닿지 않았다. 투자나 캐스팅이 되는 각본이 나와야 할 텐데 <여교사>만 놓고 보면 그 길이 참 멀어 보였다. 장르적 성격을 갖추려면 지금의 이야기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육지책은 아니었다. <비밀은 없다>는 굉장히 재밌고 어디서도 보지 못한 유의 잠재력 있는 이야기였다. 미스터리로만 놓고 봐도 새로웠다. 아버지가 딸을 죽인 범인이지만 알고 보면 아버지조차 자신이 딸을 죽인 걸 몰랐으니까. 어머니는 딸을 죽인 범인의 실체를 알려고 여러 정황을 쫓지만 막상 맞닥뜨린 진실이란 차라리 몰랐으면 할 정도의 것이었다. 가족, 정치판 등 지금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다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여교사> 말이다. 이야기가 재밌는 건 재밌는 건데 생각해보면 매우 불쾌하다. (일동 웃음) 변태적인 아저씨가 나오는 순간을 생각해보라. 너무 비호감 아닌가.

=이경미 하하. 내가 생각한 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같은….

=박찬욱 토미 리 존스가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고? 허허.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비밀은 없다>의 이야기는 미국을 배경으로 리메이크를 해봐도 좋겠다 싶을 만큼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경미 <여교사> 때부터 최종 버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퇴고를 거쳤고 그 모든 과정 끝에 현재의 <비밀은 없다>가 나왔다. 그점에서 특별히 5명의 작가들 중 누가 뭘 썼다고 할 수 없을만큼 공동 작업으로서의 의미가 중요했다. 근데 박 감독님께서 이걸 영화로 만드신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박찬욱 시나리오를 고치는 과정에서 나는 민진의 아빠 종찬(김주혁)이 국회에 입성하려고 뛰어든 선거 이야기를 좀더 많이 넣었으면 했다. 그나마 많아진 게 지금 이 정도다.

=이경미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투자받고 나서도 많은 분이 종찬의 선거, 정치와 관련된 부분을 늘렸으면 했다. 난 그 부분이 재미없어 줄여야 할 땐 그 부분부터 뺐다. 근데 예고편만 봐도 ‘정치 유세 기간 15일간 벌어지는 딸의 실종’이라고 나온다. 당연히 관객은 선거나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을 텐데 그 부분이 초반에만 잠깐 나오다 마니까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박찬욱 남자들의 개싸움으로서의 선거 모습이 영화의 배경으로 딱 자리를 잡아주면 소녀들의 이야기가 더 극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연홍은 그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보니 육체적으로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 남편의 선거운동도 함께 해야지 딸아이 사건 수사도 해야지.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싶다는 연홍의 정체성에도 혼란이 더 크게 생겼을 거고 드라마틱한 대비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게 그게 아니니까 정치 이야기를 늘리는 데서 오는 충격이 더 컸을 수도 있겠다. <씨네21> 1062호에 실린 영화평론가 듀나의 <비밀은 없다> 비평에서 한 가지 동의가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문학을 보면, 정치적으로 거창한 음모와 배신이 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작은 가정사에서 비롯된 살인인 이야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의 전통에서 벗어난 결말이라서 관객이 싫어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한국 관객에게 하드보일드 장르가 익숙하지도 않고, 한국영화에서 장르 전통이 확고한 편이라고 볼 수도 없다.

<비밀은 없다>

'멍청한' 여성 캐릭터를 향한 애정과 연민

-극의 중심에서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가는 연홍의 캐릭터를 말해보자. 엄마로서 연홍은 모성애가 강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상(象)에 반한다. 아이가 실종됐을 때 주저앉아 울기보다는 탐정의 면모를 발휘하는가 하면 민진이 투사된 듯 ‘민진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경미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엄마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만약 엄마가 된다면 우리 엄마가 내게 준 애정만큼 나도 아이에게 애정을 줄 수 있을까 질문해봤다. 엄마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어머니상과 나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내게 모성애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도 있었다. 모성애라는 게 엄마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듬직하지 않은 부족한 엄마, 사회적으로 지탄받기 딱 좋은 엄마가 오히려 나중에 (그 나름의) 엄마가 된다는 데서 오는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홍이 마지막에 엄마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게 내게는 얼마간의 희망이 돼줬다.

=박찬욱 민진의 메일에 접속하려고 민진의 비밀번호를 알아낼 때 연홍이 마치 자신이 민진인 양 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에 연홍은 민진이 된 거다. 되게 웃기면서 슬프더라. 미숙한 엄마인데 연홍의 그 노력은 엄마가 아니면 할 수 없으니까. 참 좋은 장면이다.

-이경미 감독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의 지영(최희진)과 <미쓰 홍당무>(2008)의 미숙(공효진)에 이어 <비밀은 없다>의 연홍까지 하나같이 ‘멍청하다’는 말을 쓴다. 이때 그 말을 쓴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은 다른 사람(특히 여성)과 달리 멍청하지 않다고 항변한다. 또 하나, 주인공 여성은 자신에게 질투심과 열패감을 불러일으키는 상대 여성과 갈등하다 결국 상대에게 묘한 애정과 연민을 느끼곤 한다.

=이경미 의도적으로 강조하려 한 건 아닌데 듣고 보니 그렇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은 멍청해 보이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사는 날 선 캐릭터다. 양미숙, 김연홍의 경우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계속 허점을 보인다. 강하고 독한 여자인데 사실은 허점이 참 많은, 그래서 결국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이 그 여자를 안쓰럽게 느끼길 바랐다. ‘멍청하다’는 말은 그런 내 목적을 위해 전략적으로 넣은 말 같다. 사람들 마음에 연홍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면 했다. 여러 감정 중 안쓰러움이나 연민이야말로 편안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남는 질긴 감정이 아닐까.

=박찬욱 미옥의 마지막 대사는 내가 제안했던 것 같다. ‘바보 같다’가 아니라 ‘멍청하다’가 어떻겠느냐고.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를 놓고 보면 여성 캐릭터들이 맹목적이고 시야가 좁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처지에 놓인 인물. 그런 사람들이 안달복달하며 뭔가를 하려 하지만 결국 그 노력이 바보짓이었다는 게 밝혀질 때, 그런 사람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는 말이 ‘멍청하다’다. 에너지 소모는 많은데 소득은 없고 결과 역시 좋지 않은 거다. 안타까운 거지. 약간은 이경미 감독 본인과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이 감독이 한 인터뷰를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몇개 찾아보면 내 차기작 <도끼>의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고 언급하더라. <미쓰 홍당무> 이후 차기작을 내기까지인 지난 8년간 본인이 놀지 않았다라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보려 한 건데. 그렇게 말하면 좀 나을까. 달랑 한편. (일동 웃음)

=이경미 나머지는 증명할 길도 없고. (웃음) 질투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질투라는 감정을 그리는 게 재밌다. 엄마가 딸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질투를 느낄 때가 있다는 걸 실제로 경험했다. 죽은 딸 민진에게 사랑하는 미옥이라는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연홍이 느끼는 질투라니. 되게 비극적이다. 그러고 보니 박 감독님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질투심으로 뭔가를 하진 않는 것 같다.

=박찬욱 내 스스로 검열하는 부분이다. 남자 감독이라서 여성을 저렇게 묘사했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만약 <비밀은 없다>를 남성 감독이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또 비판이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여자주인공이 논리가 없는 캐릭터라든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봤다거나 하면서 여성을 그런 틀로 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라는 비판 말이다.

-<아가씨>(2016)는 물론이고 <비밀은 없다>를 통해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와 여성들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영화비평이 다양하게 나오게 됐다.

=이경미 여성주의적 가치관을 영화에 집어넣으려 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살며 느낀 여러 감성을 자연스레 담았다. 그게 어떤 해석들로 나온 것 같다. 심지어 내가 여성감독이어서 극장 시장에서 불이익을 당한 게 아니냐고 말씀하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웃음)

=박찬욱 <아가씨>는 애초부터 누가 봐도 페미니즘적 해석이 가능한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male gaze’(남성적 시선)라는 얘길 들으면 섭섭한데 딱 그 정도다. 정작 문제라면 앞서 말한 창작자의 자기 검열에 있다. 엄격한 페미니즘의 시선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기 검열의 단계는 꼭 필요하다. 특히 요즘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다. 누군가는 이런 논쟁이 너무 피곤한 일 아니냐고 하는데 당연히 필요한 논쟁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건 창작자에게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고 조심하려는 자세가 있느냐 없느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 검열 끝에 그럼에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그땐 그렇게 하면 된다. 사실 이경미 감독, 정서경 작가 등과 같이 시나리오를 쓸 때면 외려 내가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이렇게 쓰면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지 않을까 싶은 걸 말하곤 하더라. 허허.

<비밀은 없다>

'박찬욱은 아류다' 라는 말

-민진과 미옥은 또래들에게 따돌림당하며 자신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사이 어른들은 아이들의 아픔을 모르거나 알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모르는 척 은폐하기도 한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키려고 한쪽은 아이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복수심이 아버지 종찬에게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묻고 싶다.

=이경미 민진에게 아픔을 줘 미안하다. 민진은 아빠에 대한 배신감도 컸지만 그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는 게 너무 싫었을 거다. 엄마는 이 가정이 완벽한 가정으로서 모두가 계속 행복하길 바란 사람이니까. 민진은 문제를 더 일으키지 말고 진실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진이 취한 행동이 불쌍하고 멍청한 엄마를 기쁘게 하는 거였다. 이는 동시에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시험지를 빼돌린 것도 그중 하나다.

=박찬욱 나의 강조점은 좀 다르다. 민진이는 아빠를 악마라고 여겼겠지만 엄마도 잘한 건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엄마도 속물에 너무 멍청하다, 그래서 자신은 이 집에서 탈출할 거다!’성적을 올린 것도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겠지만 본인이 자유를 얻으려고 한 것도 있다. 간섭을 덜 받고 자기 살길을 찾겠다는 거지.

=이경미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과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게 별개는 아니었다. 예컨대 성적이 오른 성적표를 엄마에게 줬을 때 엄마가 너무 좋아하니까 민진이도 같이 막 운다. 아이의 마음에 두 가지가 다 있었던 거다. 또 하나,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분향소에 갔을 때 여러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걸 봤는데, 그중 ‘내가 복수해줄게, 파이팅!’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인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이었다. 연홍이가 민진이 즐겨 듣던 존 페이의 <와일드 로즈 힐>의 CD를 여는 장면에 나오는 민진의 메모에는 원래 ‘내가 복수해줄게, 파이팅!’이라 적혀 있는 거였다. 또 시나리오상의 엔딩에는 미옥이 종찬을 차로 깔아뭉개는 것도 있었다. 연홍이가 미옥을 안으면서 “우리 딸, 추웠지?”라고 말하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썼고. 미옥이가 대통령에게 보내려 한 유서도 그렇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아이가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그렇게 썼을 거다. 당시 내가 느낀 상당한 무력감들이 시나리오에 들어 있다.

=박찬욱 그 엔딩을 나는 반대했다. 연홍의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을 무의미하게 만드니까. 종찬과 손소라 선생(최유화)의 섹스 동영상을 연홍이 종찬의 경쟁자인 정치인 노재순(김의성)의 홈페이지에 업로드할 때 그 순간이 너무도 통쾌하고 좋았다. 그 뒤로 붙는 건 사족 같았다.

=이경미 인물마다 다 센 드라마가 있는데 어쩌면 종찬의 드라마가 제일 비극적이다. 자기 자식인 줄 모르고 자식을 죽였으니. 진실을 모르는 것보다 알게 될 때 더 비극이지 않나. 그 모든걸 알면서도 또 살아가야 하니까.

=박찬욱 배우 김주혁의 연기가 무척 좋았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TV 앵커 출신으로서 정치가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야심가 종찬의 모습이었다. 믿음이 갔다. 사람들이 김주혁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주면 좋겠다. 연홍 역의 손예진도 훌륭했다. 배우들은 영리하니까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감독 흉내를 내기도 한다. 예컨대 연홍이 경찰 앞에서 딸아이 친구 자혜를 설명하는 장면만 봐도 이경미의 빙의다. (웃음)

=이경미 지인들이 극 초반 연홍이 김밥을 싸면서 민진에게 “자혜 전화번호 적어놔~”라고 할 때의 목소리 톤을 듣고는 딱 나라더라. 특별히 어떤 디렉션을 준 건 아니었는데.

=박찬욱 <올드보이>(2003)의 유지태가 그랬다. 내가 자꾸 이렇게 억양을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하니 그가 단박에 눈치채더라. ‘가만, 이거 자기 말투잖아?’ (일동 웃음) 그래도 괜찮다. 배우가 다르니까.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에게도 이경미가 빙의돼 있는 면이 있지만 두 배우는 다르고, 그 연기도 달랐다.

-두분의 인연이 상당히 오래됐다. 이경미 감독이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제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을 때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이었다. 이후 <친절한 금자씨>(2005)에 이경미 감독이 스크립터로 참여했고, 이 감독의 첫 장편 <미쓰 홍당무>를 박찬욱 감독이 제작했다. <비밀은 없다>의 각본도 함께 썼다. 그래서일까. <비밀은 없다>를 두고 ‘박찬욱스럽다’, ‘박찬욱의 아류다’ 하는 등의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박찬욱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밉다. 그렇게 말하니 <비밀은 없다>를 옹호하는 관객은 ‘뭐가 비슷하냐’고 한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이어서 ‘이경미가 박찬욱보다 훨씬 낫다, 진보했다’고 하더라. (일동 웃음) 괜히 내가 소환돼 의문의 1패를 당한 거다. 졸지에 한계가 많은 꼰대가 돼버렸다. 허허, 참.

=이경미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이 내가 깜냥도 안되는데 박 감독님을 따라 했다고 하더라. 박 감독님께서는 이미 많은 걸 이룬 분이니까 아마도 그래서 그런 얘기가 나오지 싶다. <비밀은 없다>와 <친절한 금자씨>를 많이 비교하더라. 차이가 있다. 금자는 자기가 예쁜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연홍은 그렇진 않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줄도 모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뭘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박찬욱 <씨네21> 1063호의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비평에서 <친절한 금자씨>를 모성 복수극의 하나로 분류해 논했다. 금자는 모성도 있고 복수도 하지만 모성 복수를 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복수는 자신의 딸을 잃어서 생기는 복수가 아니다. 물론 연홍과 금자가 남자를 묶어놓고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그 정도는 비슷할 수 있다. 더 본질적인 부분에서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이경미 내 영화의 인물들은 감정적이고 그 감정 역시 고조된 상태인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를 고칠 때도 박 감독님께서 ‘이해하기 힘드니 너무 복잡하게 이야기를 꼬지 마라’, ‘인물들이 과장돼 있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다.

=박찬욱 성격 차이겠지. 난 좀 차가운 걸 좋아하니까.

<비밀은 없다>

관객 유치용 제목에 대한 아쉬움

-<비밀은 없다>는 감독의 색깔이 너무도 또렷한, 보기 드문 문법의 강렬한 에너지의 영화다. 근래 한국 상업영화가 안정적인 스코어 확보를 위해 지나치게 뻔한 길만 가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보자면 상당히 예외적이다. 반대로 현재의 영화산업 안에서 어떻게 이 영화가 개봉까지 하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이경미 투자사도 기존과 다른 새로운 걸 만들어보고 싶어 하며 희망적으로 투자를 결정했다. 상업적으로 대단히 흥행할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기대였을 거다. 순수제작비 10억원의 <미쓰 홍당무>와 달리 <비밀은 없다>는 순수제작비 42억원이 들어갔다. 나로서도 투자사와 많은 설득과 협의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투자사를 설득할 기회가 많았다. 물론 그 설득을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만약 내가 흥행 전력이 있었다면 그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때 중요한 건 감독을 지지해주는 제작사의 역할이다. 또 현장에서 찍을 것만 딱 찍고 더 안 찍었다. 그래서 후반 편집 때 영화가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박찬욱 투자가 난항 끝에 결정된 것도 아니었고 굉장히 재밌는 미스터리 스릴러 상업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스타배우들이 출연을 결정한 게 아니겠나. 되는 영화가 있으면 안 되는 영화도 있는 거다. 대형 스튜디오에서 ‘공장식’으로 만드는 영화도 안 되는 건 또 안 된다. <비밀은 없다>도 이런 저런 영화들이 겪는 일 중 한 가지 일을 겪은 것뿐이다. 영화의 흥행 실패를 대형 스튜디오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스튜디오가 대담한 선택을 하지 않거나 강력한 여성주인공의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게 됐을 때 그건 다 이경미 감독 때문이고, 이 작품의 투자를 결정한 투자사의 몇몇 책임자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이경미 그래도 조금만 더 잘됐으면 좋았을 텐데.

=박찬욱 제목만이라도 잘 지었어도.

=이경미 처음엔 민진과 미옥이 만든 밴드의 이름처럼 <진이와 옥이> 였다가 박 감독님이 지어주신 <불량소녀>에서 <행복이 가득한 집>을 거쳐 지금의 제목이 됐다. 제목 짓는 건 홍보와 관련된 일이라 내가 더 어쩔 수 없었다. 영화가 익숙한 스릴러물이 아니다 보니까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만들어진 제목 같다.

-더 많은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게 다음 행보의 자기 검열이 될 수도 있을까.

=이경미 (한참 생각하다) 조금 더 고민하게 될 거다. 영화 종영 이후에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스코어가 바뀌진 않는다. 중요한 문제다. 다음 작품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새삼 박 감독님께서도 <아가씨>를 만들며 흥행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다.

=박찬욱 아무래도 예산이 많았으니까.

-두분은 이미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인 영어 영화 <도끼>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다.

=박찬욱 내 첫 영어 영화로 기획했다가 내가 원하는 액수만큼 투자가 안 돼 미뤘던 작품이다. 시나리오는 <스토커> 전에 썼다. 원작 소설과 큰 틀은 비슷하나 디테일과 결말이 다르다. 아내 역의 여성 캐릭터가 이경미 감독 영화의 여성처럼 강박적인 면이 있다. 곧 뉴욕주로 헌팅을 갈 예정이다.

=이경미 <도끼>가 빨리 진행되지 않았을 땐 ‘내가 껴서 안 되나’ 싶어 괴로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웃음) 내 작품? 아직 시나리오는 쓰지 않았지만 다음 작품은 좀더 빨리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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