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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연상호의 직설 - 연상호 감독의 세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서울역>
송경원 2016-08-15

<서울역>

“시리즈를 좋아한다.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해서 재생산하는 느낌들이 <부산행>과 <서울역>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연상호 감독의 기획 의도는 분명하다. 세계관을 공유하며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거다. <서울역>은 앞서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첫 번째 실사영화 <부산행>의 프리퀄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프리퀄이라고 보긴 어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차라리 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에피소드, 혹은 옴니버스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영화 속 시간상으로는 <부산행>의 KTX 기차가 출발하기 전날 밤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부산행>이 먼저 공개된 후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제작 시기는 <서울역> <부산행> 순서다. 개봉 순서를 제외한 모든 시간상으로 앞선다는 의미에서 <부산행> ‘앞에 있는’ 영화라 불러도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부산행>의 프리퀄? 한국식 좀비 아포칼립토의 본편

<부산행>과 <서울역>은 엄연히 다르다. 의문의 바이러스가 창궐한 한국, 서울역 인근과 부산행 KTX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두편의 영화 <서울역>과 <부산행>은 사실상 별개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연한 차이가 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라는 점 외에도 시선과 색감, 상황을 풀어나가는 방향, 작품의 정서까지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부산행>과 <서울역>의 연결고리들을 연상할 때 한층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있는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사실 두 영화 사이의 연결고리는 생각보다 헐겁다. <서울역>의 가출소녀 혜선(심은경)과 <부산행>에서 KTX 열차에 뛰어드는 감염자(심은경)가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목소리 연기를 맡은 배우 심은경이 두 영화에 모두 나온다는 점, 서울역과 부산행 KTX로 이어지는 공간의 통일성,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로 추정되는(심지어 <서울역>에서는 그 설명의 단서조차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의 습격, 통칭 좀비 장르물과의 결합이 두 영화 사이 강력한 유대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행간을 채워넣고 싶어지는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는 영리한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영리한 영화들은 제목으로 완성된다. <부산행>도 그랬고, <서울역>도 그렇다. 아니 연상호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다. <부산행>이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면, <서울역>은 정체불명의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속출할 때 서울역 인근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다룬다. 요컨대 <부산행>은 ‘부산행’이라는 사건이 중심이 되는 영화이고, <서울역>은 ‘서울역’이라는 공간이 주가 되는 영화다. “<서울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스케치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느끼고 있는 사회적 공기 같은 것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은 이 점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울역이란 공간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압축하고 있는, 실로 ‘연상호스러운’ 영화다.

상황은 단순하다. 서울역에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나타난다. 괴물에게 물린 사람들이 다시 괴물이 되자 서울역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가출소녀 혜선은 자신에게 원조교제를 종용하며 방세를 마련하는 남자친구 기웅(이준)과 싸운 후 서울역 근처를 배회한다. 한편 혜선의 원조교제 광고 게시물을 본 석규(류승룡)는 기웅에게 연락을 해 자신이 혜선의 아버지라고 밝힌 후 혜선을 찾아내라고 협박한다. 영화는 괴물에게 쫓겨 도심을 헤매는 가출소녀와 그녀를 찾는 두 남자의 하룻밤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아 난장판이 된 서울역 주변 곳곳을 비춘다. 말하자면 <서울역>의 주인공은 혜선과 기웅, 석규의 드라마가 아니라 재난이 밀어닥친 서울역이라는 공간이다.

<서울역>은 좀비영화의 클리세를 빌려왔지만 여느 좀비영화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부산행>이 좀더 세련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장르를 적극 활용했다면, <서울역>은 어느 모로 보나 감독 연상호의 이전 애니메이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 일례로 관객이 <서울역>에 닥친 재난을 ‘좀비’라고 받아들이는 건 그간 좀비영화들에서 봐왔던 좀비의 외견과 동작에서 유사점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어디에서도 좀비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서울역>이 제시하는 건 차라리 통제 불능의 재난에 가깝지만 재난 상황의 관리가 인력으로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할 것 같은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여느 재난영화와 결을 달리한다. 불가항력의 재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는 주인공들의 드라마를 그리는 대신 극단적인 상황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공권력의 무능, 사회라는 이름의 폭력과 위선, 바스라지기 쉬운 이성의 껍질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것이다. 좀비, 재난 등 소재는 이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서울역 앞의 화려함보다는 뒷골목의 모습들, 쓰레기,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잘 드러나길 바랐다. 색감 역시 기존 작품들보다 더 어두운 방식으로 묘사했다”는 감독은 사실적인 작화 위에 본인이 한국 사회에 대해 느낀 단상들을 결합시켰다. 공권력에 의해 감염 의심자들이 격리된 상황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내가 너희 같은 쓰레기와 함께 죽을 수 없다”며 절규하는 남성의 모습은 우리가 뉴스 화면을 통해 익히 보아온 풍경이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어둠을 스케치한 연상호의 탁본은 온전히 한국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들을 장르 안에서 소화시킨다. 이 작품을 ‘한국형 좀비 아포칼립토’라고 불러 마땅한 이유다.

<서울역>

심리보다 상황에 방점을 찍은 연상호

<지옥>(2002)을 비롯한 몇편의 단편들과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두편의 장편애니메이션까지, 그간 연상호 감독이 쌓아온 흔적들을 겹쳐보면 분명 ‘연상호스럽다’고 인식될 공통점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여전히 영화 앞에 ‘연상호’라는 이름 세 글자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일 것이다. 앞선 두 장편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하면 <서울역>은 인물의 심리보다는 서울역이라는 상징적인 공간과 장르적인 상황에 좀더 집중한다. 혜선, 기웅, 석규 세 인물 모두 전작에서처럼 심리적인 변화를 보여줄 여지가 거의 없다. 애니메이팅 자체는 그간 연상호의 작품 중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과 동화를 보여주지만 반대로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평면적이고 단순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정적으로 느껴진다. 직진하는 서사를 택한 연상호는 인물의 깊이를 탐구하는 대신 인물이 스쳐지나갈 공간을 스케치한다. 공간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모순과 부끄러운 민낯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연상호의 세 번째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직설적이고 직진하는 이야기로 완성됐다. 서사의 구멍이 있어도 뭉개고 나갈 수 있는 힘과 뻔뻔함을 갖췄다는 점에서 장르적이고 대중적인 색채도 진해졌다.

물론 한국 사회와 일대일로 조응하는 상황들이 얼핏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연상호는 항상 그래왔다. 서사, 연출, 작화 등 형식을 통해 문제를 돌려서 표출하는 것보다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택해온 과감함이야말로 어쩌면 소위 말하는 ‘연상호스러움’인지도 모르겠다. 그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직설의 에너지가 장르와 결합하는 순간 그야말로 한국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아니 연상호만 만들 수 있는 ‘감독의 영화’로 거듭난다. <서울역>은 <부산행>보다 덜 장르적이고 덜 친절할진 모르지만, 훨씬 진하고 어둡고 선명한 애니메이션이다. 연상호는 좀더 연상호다워졌고 동시에 좀더 영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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