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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대로> <이중 배상> 감독 빌리 와일더 사망
2002-04-03

장인, 떠나다

막강한 할리우드 제작자이고 MGM 총수였던 루이스 B. 메이어는 1950년 어느 날 한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는 지금의 널 만들어주고 먹여살려준 산업을 욕되게 했어!” 메이어를 분노케 건 <선셋 대로>라는 영화와 그 감독이었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폭로할 뿐 아니라 할리우드 내부 문제를 다뤄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건드렸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르고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도 그리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랜 파트너였던 프로듀서 찰스 브랙켓마저 신랄하고 오만한 와일더에게 넌더리를 내며 떠나버렸지만, 그는 마지막 영화를 만드는 순간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면 관객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집 세던 남자가, 이미 오래 전 세상에서 사라졌을 거라는 사람들의 편견을 배반하며, 바로 며칠 전인 27일 9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몇달 동안이나 폐렴에 시달린 끝이었다.

빌리 와일더는 1942년 첫 단독연출 작품 <다수와 소수>(The Major and the Minor)부터 1981년 마지막 영화 <버디 버디>(Buddy Buddy)까지 40년 동안, 수많은 장르를 종횡했다. 그는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처럼 적당한 파격과 동정 섞인 유머가 있는 코미디 영화의 장인이었고 <선셋 대로>처럼 신랄한 드라마로 할리우드의 위선과 타락을 공격하기도 했다. <잃어버린 주말>(The Lost Weekend)은 알코올 중독자의 며칠을 깊이있게 탐색하는 영화였고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은 유명한 범죄소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원작을 쓴 걸작 필름누아르였다.

와일더는 스스로 히치콕 같은 장르의 대가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히치콕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이중배상>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좀 지루한 것 같았다. 그래서 또 다른 장르에 손을 댔다”는 것이었다. 와일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장인이었다. 그는 많은 졸작과 범작을 만들었지만 대중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성취의 정점에 이르렀다.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 <선셋대로>는 그가 하워드 혹스에 버금가는 걸출한 장인이었음을 입증한다.

와일더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갈리시아의 한 마을에서, 사무엘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유럽 중산층으로는 보기 드물게 미국에 흠뻑 빠져 있어서 아들을 ‘빌리’라는 영어식 애칭으로 불렀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외가가 경영하는 휴양지 호텔에 드나드는 상류층 사람들을 보며 일찌감치 불신을 배운 되바라진 소년은 석달 만에 대학을 때려치웠다.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일하고, 바이마르 시대 자유로운 독일의 공기에 취해 지골로가 되고,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써대던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팝송제목밖에 아는 영어가 없는데도” 미국으로 떠났다.

그와 그의 동생 윌리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유럽에 남아 있던 그의 유태인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을 뿐이다. 루즈벨트는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생전에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 미국은 내가 죽을 곳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침묵했던 미국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브리나> <선셋 대로> 등에서 그와 함께 일한 배우 윌리엄 홀덴은 “와일더의 마음속엔 칼날이 가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쾌한 코미디와 칼날 품은 영화를 번갈아 만들던 와일더는 64년 <키스해 줘요, 바보>(Kiss Me, Stupid)를 만들면서 갑작스런 몰락을 맞았다. 그의 전기 <와일더 타임즈 : 빌리 와일더의 삶>을 쓴 케빈 롤리는 “영화 속에서 욕설을 내뱉을 수 있게 되면서 와일더의 영화는 긴장을 잃었다”고 몰락의 원인을 평가했다. “당신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초콜릿으로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와일더는 새로운 시대의 거침없는 표현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섯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모두 주더라도 영화 만들 기회를 얻고 싶다고 했고, <쉰들러 리스트>를 감독하지 못했던 사실을 한스러워했던 빌리 와일더. 그는 81년 이후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이십년 동안 모든 종류의 평생 공로상을 받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김현정 para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