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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의 주말연속극 <내 사랑 누굴까>
2002-04-04

한국 최고의 수다쟁이들

김수현은 지난 2월23일 <여우와 솜사탕>(MBC 토·일 저녁 7시55분)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여우와 솜사탕>이 자신이 집필한 <사랑이 뭐길래>(1992)와 상황뿐 아니라 대사가 발췌한 것같이 똑같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다. 3월7일 2차 심리에서 재판부는 판결이 종영 이후로 미뤄질 것을 감안해 김수현쪽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안했으며 3차 심리 직후 김수현쪽은 이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3월2일 김수현의 새로운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가 방송을 시작하였다.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지. 내 눈을 내가 쑤셔놓고. 미쳤지 미쳤어. 하기는 안양 일대가 날더러 미쳤다구 했지. 여부잣집 막내딸이 미쳐서 아무것도 아무것두 없이 방울 두개만 달그락거리는 사람한테 간다구….”(<사랑이 뭐길래>) “휴우 일러 뭐해, 말해 뭘해? 내 눈알 내가 쑤셔놓고. 부잣집 어말숙이 미쳐서 달랑 두쪽뿐인 인간한테 간다구 온 춘천이 다 뒤집어졌었는데.”(<여우와 솜사탕>)

<여우와 솜사탕>의 방영 초반 상황설정이 비슷하다는 말들이 오고가긴 했지만, 10년 시간을 넘어 누가 드라마 대사를 꼭 집어 기억했으랴. 재판정에 출두한 테이프와 대본은 위와 같이 쌍생을 증거한다. MBC 법무저작권부에서는 “드라마는 2차 저작물이므로 방송작가가 표절을 시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사랑이 뭐길래>가 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참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로 변호를 하기도 한다. ‘고전이 된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반격에서 반(半)은 옳다. <사랑이 뭐길래>가 한국 드라마 지형도에서 고전으로 자리잡을 만큼 독보적이라는 반, 그래서 도덕성이 함몰된 지형도에서는 더욱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반. 그렇다면 틀린 반은?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법에 명시한다면 예외적 조례사항을 두어야 할 첫번째 작가가 바로 김수현이라는 사실이다.

TV드라마 김수현 이전과 이후

따뜻하기보다는 전투적인 김수현 드라마는 특징 그대로 한국 드라마의 전방을 개척한 전위부대였다. 1972년 <무지개>가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첫 저작이므로 올해로 딱 30년의 세월, 대한민국 국민은 김수현 드라마에 길들여졌다. 시청률 기록을 세우는 드라마의 분석은 방송사의 몫이고 이는 ‘김수현 드라마’의 전술이 ‘드라마’의 전략이 되도록 하였다.

김수현 이후 드라마에서 김수현 드라마의 흔적은 질기다. <사랑이 뭐길래> 이후 남자 집안의 보수성과 여자 집안의 진보성을 대립시키는 설정, 아울러 세트의 한옥/양옥 설정은 가정극의 정석이 되었다. 남녀 결혼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마련인 가정극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설정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일극 <사랑은 이런거야>(KBS)는 이 설정 그대로이며, 여고동창생의 반목과 그 자식들의 사랑이야기가 변형되어 일일극 <매일 그대와>(MBC)에서 재생된다.

김수현의 <사랑과 진실>(1984) 이후 탄생의 비밀은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비밀> <저 햇살이 나에게> 등의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쓰였고, 같이 자란 이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비밀을 품고 대기업의 집안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지금 <유리구두>(SBS)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김수현이 구현한 각각의 캐릭터는 연기자의 대표 성격이 되기도 했다. 김혜자의 ‘가부장제에 주눅 든 어머니’, 윤여정의 ‘자기 주장이 강한 어머니’, 한진희의 유능한 대기업 사원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양희경은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아이를 못 낳는 역을 맡은 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도 비슷한 역을 부여받았다. 김수현은 듣도 보도 못한 상류층의 생활을 처음으로 안방에 가져왔다. 탕비실이라는 말을 김수현 드라마 이전 누가 알았을까. 상류층의 생활을 묘사하는 관습적인 표현들- 잠을 자다가 늦게 들어온 이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한마디 툭 던지며 가운을 여미는- 은 김수현이 본격적으로 다룬 ‘사실 확인이 안 되는 리얼리티’의 일종이다.

무엇보다 이름을 가리고도 표식을 드러내는 드라마는 김수현이 독보적이다. 그 표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마디도 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화려한 언어다. <내 사랑 누굴까> 역시 김수현 표식을 달고 있다.

대사는 점점 쫄깃해지고, 맥락은 점점 더 깊어지고

<내 사랑 누굴까>는 해피하우스라는 건물에 사는 3대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 결혼 적령기를 넘긴 처녀 두명이 이사를 온다. 1대는 80이 넘은 할아버지(이순재), 할머니(여운계), 2대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이정길), 3대는 그의 세 아들 윤식(윤다훈), 현식(류진), 상식(김정현). 두층에 걸쳐서 사는 이 집이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사온 지연(이승연), 하나(이태란)의 집, 그리고 할아버지의 여동생(정혜선)과 그의 결혼하지 않은 과년한 두딸 경화(박정수), 경주(견미리)가 사는 집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녀 집의 대결구도와 함께, 짚신이 짝이 있고 젓가락도 짝이 있는데 내 짝은 어디 있을까라는 결혼문제로 뛰어드는 구도가 명확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김수현 드라마의 두 극점, 가정극과 멜로가 한데 섞인다.

이 두 극점의 화합은 작가가 그간의 드라마를 총결산하는 의도로 집필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컨대 “내 드라마는 무엇일까”라는 총정리. 거기다 과거 김수현 드라마의 후기쯤에 해당할 듯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시작됨과 동시에 여러 군데서 ‘재회’가 이루어졌다. 현식은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미국으로 결혼해서 가는 것으로 자신을 배신한 고은(명세빈)을 만나고, 사랑을 잊지 못해 아직 결혼하지 못한 경화 앞에는 그 옛날 자신을 버린 남자 차명환(한진희)이 등장한다. 야망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인물은 김수현 멜로극의 단골소재였다. <청춘의 덫>의 동우가 대표적인 예. 그러니 이 드라마는 사랑했음에도 (캐릭터의 혹은 작가의) ‘젊은 날의 혈기로’ 헤어졌던 모든 커플에 용서를 구하는 작가의 심중을 담은 것이 아닐까.

대사는 ‘독하다’고 방영 때마다 몇번씩 도마에 오르곤 하는데 이번 <내 사랑 누굴까>에서 맨 처음 매를 맞은 것은 1회 딸과 어머니 사이의 대사였다. “엄마한테서 냄새 나. 늙은 사람 냄샌가”, “엄마가 나보다 오래 살 거야”는 “아무리 딸과 어머니 사이라지만”이라는 반응을 끌어냈다. 딸들이 나와서 살기 위한 험한 공방전이었는데, 이외에도 1회를 보면서는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니 드라마 보느라고 편히 기댄 자리가 미안해지고 골이 얼얼해졌다. 지연이 맞선 자리에서 “이제 재혼 자리 알아볼 나이 아니에요”라는 독한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없이 쏘아대는 대사가 완성되는 것은 맥락과 상황 속에서이니 1회에서 시청자는 배우는 드라마에 적응하지 못했다.

맥락 없이라도 대사는 빛난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도록 말이 많지만 그 말들은 다음 말을 듣는 것을 놓칠 정도로 꼬이는 적은 없다. 한마디가 오면 한마디가 간다. 말에 쫄깃한 리듬이 느껴진다. “뜸들이다가 밥 태워 먹을 놈이네” 등 ‘김수현 사전’을 펴내고 싶을 정도로 풍부한 비유법과 “소싯적 얌체가 평생 얌체야”, “독 안에 들었어도 팔자 도망 못 간대” 같은 어른 말씀 하나도 그릇된 것 없는 통찰력도 역시 반짝거린다.

그 맥락과 상황은 드라마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깊어진다. 무엇보다 이는 작가의 귀가 얇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드라마 작가에게 단점이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연기자 윤여정은 “어떤 배우가 안 되는 발음이 있으면 그걸 피하면서 대사를 쓴다”(<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니 김수현 드라마에서 배우는 자신의 스타일에 가장 맞는 옷을 맞춤하게 된다. 대사뿐 아니라 설정도 마찬가지다. 훤칠하게 잘생긴 현식(류진)을 두고는 외모 칭찬을 아끼지 않고, 윤식(윤다훈)을 ‘닭눈’이라고 부르는 등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연기자와 배역이 점점 맞춰간다.

작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일까

<내 사랑 누굴까>의 주제는 ‘사랑과 결혼’이다. 연속극치고 이거 아닌 게 있을까마는 <내 사랑 누굴까>는 정면돌파다. 적나라하다. 그리고 ‘강한’ 여성이 ‘사랑과 결혼’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약한 모습의 여자보다 더 반동적일 수 있다.

박사과정에 있는 지연에게 왜 결혼은 중대사일까. 혼자 살기가 충분해보이는데 남자가, 결혼이 필요한 이유는 무얼까(젓가락도 짝이 있고 신발도 짝이 있지만 짝없는 물건은 얼마나 부지기수인데). 그건 가부장적 통념에서 나왔다. 남들이 보기에 과히 안 좋다는 것. 치과의사인 경화는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사별한 부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하는데다 “당신이 질투하는 건 죽은 여자라는 걸 아시오”라는 말까지 하는데도 남자에게 끌린다. 남자가 재미볼 것 다 보는 세월 동안 허벅지나 찔렀던 그 세월이 불쌍해서라도 자신을 구제하겠다는 남자의 오만함을 분질러버려야 한다. 그 세월 동안 행복했다면 ‘그 나이니 재취 자리에나 앉으라’고 제안하는 남자와 결혼할 이유도 없다. 80 먹은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모든 이가 다 아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속고 살아온 세월이 대략 50년, 남북이 헤어진 세월만큼이다.

무엇보다 정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신흥 부르주아지의 으리으리함. 아무리 대사에 혼을 빼앗겨도 억을 날려먹고 왔는데 그걸 눈감아주고, 어머니하고 살기 싫다고 억대 오피스텔을 금세 얻어나오는 순간을 맞으면 드라마에 빠져들기 어렵다. 치과의사, 수의사, 회사 사장, 전문 경영인, 모델, 중소기업보다 낫다는 디자이너, 레스토랑 경영인, 건축설계사, 커피숍 주인, ‘점빵’이라 칭해지는 대형 상점 주인 등이 진열된 쇼윈도는 눈이 부시다. 결국 해피하우스의 해피한 결혼소동은 한명의 진짜 ‘점빵’의 딸을 신데렐라로 만들면서 노동자 계급한테 안위와 위안을 줄 예정인 것 같다.

덧붙이는 의문 하나. 장르를 개척했고 드라마의 아우라를 완성했던 대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 작가의 최근 행보는 안주(安住)였다. <청춘의 덫>은 리메이크였고 <불꽃>은 그와 비슷한 멜로였으며, <내 사랑 누굴까>는 가족극과 멜로의 종합이다. 개척자 작가의 혁신은 종종 드라마 자체를 개혁해왔다. 많은 이들은 그가 여전히 전선에 있기를 기대한다. 구둘래 kuskus@dreamx.net<내 사랑 누굴까> KBS2TV 토·일 저녁 7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