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의 <여인의 초상>. 피렌체 인근의 파르네제 궁전.
“긴 여름 오후의 부드러움과 감미로움, 이것이 이탈리아의 색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 테다. 그의 수많은 ‘연애소설’들이 사랑의 탄생과 성숙, 배반 같은 표면의 이야기보다는 그 표면 아래 마음의 ‘심연’에 집중하고 있어서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물들의 길고 긴 독백, 특히 ‘가리고 싶은’ 독백의 기록이 제임스의 소설인데, 이걸 이미지로 표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작업이다. 제임스의 소설들은 20세기 초 ‘의식의 흐름’ 수법을 도입한 제임스 조이스 등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심리의 풍경화’에 다름 아니다. 재능 있는 몇몇 감독들이 이런 ‘어리석은’ 일에 도전했다. 이들 가운데 제인 캠피온의 <여인의 초상>(1996)은 헨리 제임스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 중 최고로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로마 통신원을 꿈꾼 헨리 제임스
헨리 제임스의 소설 가운데 영화로 가장 많이 각색된 작품은 <나사의 회전>(1898)이다. 고딕(Gothic) 문학의 영향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어린이-악마’ 모티브의 단편소설이다. 순진무구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이가 누군가에겐 악마일 수 있다는 환상이 순식간에 영국의 평화로운 전원 마을을 지옥으로 만드는 공포의 드라마다. 영화와 소설에서 반복되는 어린이 주인공의 ‘악령’ 이야기는 <나사의 회전>의 영향 아래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만큼 발표 당시에도 충격이었고, 지금도 그 충격은 여전하다. 소설 내용대로 각색한 <나사의 회전>(감독 벤 볼트, 1999)부터 ‘어린이 모티브’를 이용한 <디 아더스>(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1), 프리퀄 형식의 <악몽의 별장>(감독 마이클 위너, 1971) 등 여러 버전이 소개됐다.
소설 <나사의 회전>은 제임스의 후반기 작품이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작가 특유의 멜로드라마이기보다는 그의 경력 초반부에 주로 이용했던 고딕소설에 가깝다. 가장 각색이 많이 된 작품이지만, <나사의 회전>을 읽거나 그와 관련된 영화를 보고 헨리 제임스의 예술 세계에 입문하는 것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지금도 헨리 제임스가 문학사의 거장으로 평가된다면, 그건 오노레 드 발자크를 잇는 멜로드라마 전통의 소설가여서일 것이다(<멜로드라마적 상상력>, 피터 브룩스 지음). 헨리 제임스의 특기는 멜로드라마이고, 그가 펼친 형식은 의식의 독백이다. 그래서 제임스의 작품 ‘읽기’는 현대 독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기도 한다. 간혹 나른한 만연체에 흐름을 놓치기도 할 것 같다. 만약 그런 나른함의 환상 속을 여행하며 ‘느린’ 쾌락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제임스의 독자가 된 셈이다.
헨리 제임스는 미국 뉴욕의 전형적인 지식인 중산층 아들이다. 부친은 철학자였고, 제임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며 구대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특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이 컸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선 평생 그곳에 거주하며 통신원으로 살 것을 고민했고, 파리에선 발자크의 소설에 매혹돼 프랑스 말을 맹렬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삶의 후반부는 런던의 첼시에서 보냈다(그는 영국인으로 귀화했다). 신대륙 미국의 지식인이 매너와 전통으로 구축된 구대륙의 억압적인 관습에서 느끼고 경험한 문화적 충돌이, 혹은 그 차이의 충돌이 빚은 트라우마가 그의 멜로드라마의 텃밭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많이 각색됐지만, <나사의 회전>과 관련된 영화 가운데 제임스의 매력을 온전히 전달한 작품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헨리 제임스에게 ‘성공’이라는 큰 행운을 안겨준 첫 장편소설이 <여인의 초상>(1881)이다. 이 소설을 각색한 제인 캠피온의 영화 <여인의 초상>은 헨리 제임스에게 ‘영화적 명예’까지 선사했다. 남성 작가에 의해 세밀하게 서술된 여성의 정체성 찾기란 시도 자체가 신선했는데, 그 작품을 대표적인 여성감독이 각색했으니, 영화계가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여인의 초상>을 통해 발자크의 후계자로서의 제임스의 위상은 더욱 확산됐다. <여인의 초상>은 제인 캠피온이 창작의 절정에 있을 때 발표됐다. 그는 바로 전 작품인 <피아노>(1993)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성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기록은 아직도 유효하여, 캠피온은 황금종려상을 받은 유일한 여성감독으로 남아 있다.
<여인의 초상>, 피렌체와 로마의 대비
<여인의 초상>은 세 도시에서 전개된다. 먼저 미국인 처녀 이사벨 아처(니콜 키드먼)가 런던 근교의 가든코트(허구의 지명)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고,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미래의 남편 길버트 오스먼드(존 말코비치)를 만나고, 이후 남편과 로마에서 함께 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곧 런던(근교)-피렌체-로마의 공간 이동인 셈이다. 런던은 유럽에서 발견한 고향 같은 곳이며, 피렌체는 사랑의 낙원으로, 로마는 멜로드라마의 냉혹한 ‘현실원칙’이 전개되는 배경이다. 로마에서 이사벨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사회적 명령’의 위세 앞에 여성의 무력감을 통감한다.
영화에서 가장 밝고 흥분되는 부분은 역시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피렌체다. 헨리 제임스의 멜로드라마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악역인 음모가로 멀 부인(바버라 허시)이 소개되는데, 그의 계략에 따라 이사벨은 피렌체에 살고 있는 미국인 길버트를 만난다. 멀 부인과 길버트는 이사벨의 돈이 필요하다(이것도 제임스 드라마의 공식). 미국을 상징하는 이사벨은 활기차고 진취적이고 정직한데, 유럽, 특히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길버트는 느리고 무관심하고 음모적인 인물로 그려진다(존 말코비치의 못된 모습을 상상하시라). 혹은 다른 잣대를 적용하여, 이사벨은 단순하고 길버트는 복잡한 인물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길버트에겐 지적 세련미가 있고, 특히 아름다움을 보는 감식안이 있다. 헨리 제임스의 악인이 주로 그렇듯 길버트는 보통 사람들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졌다. 바로 이 점이 지적 호기심이 넘치는 이사벨의 마음을 움직인다.
특히 길버트의 집에 갔을 때 이사벨은 그의 품격 있는 취향에 반하고 만다. 방 안의 의자, 책상, 양탄자, 그릇 등 그가 소유한 사물들은 그 자체로 예술품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건 피렌체라는 도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길버트가 피렌체인 셈이다. 피렌체의 길버트 집은 실제로는 피렌체 옆의 루카(Lucca)에 있는 유명한 건축물인 ‘판네르 궁전’(Palazzo Pfanner)에서 찍었다. 바로크 시절의 건물로, 화려한 외양뿐 아니라 정원의 아름다움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벨에겐 사랑의 낙원처럼 보일지 모를 이 정원이 다른 사람에겐 억압의 상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원은 주로 프랑스식에 따라 나무와 꽃들이 수학적 구획에 맞춰 바둑판처럼 장식돼 있다.
길버트의 집만큼 강조된 곳이 피렌체 남단에 위치한 카프라롤라(Caprarola)에 있는 ‘파르네제 궁전’(Palazzo Farnese)이다. 아마 제인 캠피온이 가장 정성을 들인 시퀀스일 것이다. 길버트는 이사벨의 잃어버린 양산을 손에 들고, 터널처럼 어두운 궁전의 긴 회랑에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양산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회랑이 묘한 긴장감을 몰고 오는 순간이다. 회랑에서의 만남은 이사벨에 대한 길버트의 육체적 욕망을 비유한다. 길버트는 여기서 그녀의 마음을 뺏는다. “이탈리아의 긴 여름 오후가 우리를 기다려요. 온통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 이것이 이탈리아의 색깔이오.” 이것은 길버트의 색깔이기도 한데, 이사벨은 바로 이 색깔에 반하고 만다.
피렌체에 비해 후반부의 로마는 폐쇄적으로 표현된다. 주로 이들이 사는 집의 실내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사벨의 결혼 생활이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기 때문일 테다. 이들이 사는 집은 로마 시내에 있는 ‘타베르나 궁전’(Palazzo Taverna)이다. 실내의 방들이 아주 크고 벽은 대부분 벽화로 장식돼 있어, ‘장식 과잉’으로도 보이는 곳이다. 어쩌면 이사벨의 결혼 생활 자체가 장식 과잉이다. 결혼은 어느덧 이탈리아 상층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연극이 됐기 때문이다. 그 연극이 중단되면, 진취적인 미국인 여성에게 쏟아질 사회적 비난에 대해 이사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영화 <여인의 초상>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처럼, 캐릭터들 사이의 심리 싸움에 주목한다. 행위, 사건보다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제스처, 침묵 등을 더욱 강조한다. 말하자면 여느 멜로드라마처럼 수사법이 화려한 대사로 감정이 폭발하는 일이 별로 없다. 이사벨이 길버트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지만, 그런 사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다. 로마의 오래된 조각 앞에 서면 영원 같은 침묵의 운명을 본능적으로 느낀다는 이사벨의 독백처럼, 캐릭터들의 마음은 베일에 가려진 채 표현된다. 이런 점이 <여인의 초상>의 매력이자 대중적이지 않은 표현법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데이지 밀러>. 로마가 배경이다. 오른쪽은 데이지 역의 시빌 셰퍼드.
<데이지 밀러>, 로마의 태양 아래 멜로드라마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는 극중 작가의 분신이 종종 등장한다. <여인의 초상>에선 이사벨의 친구인 여기자 헨리에타가 작가의 분신이다. 글 쓰는 사람이고, 제임스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름마저 헨리(Henry)의 여성형인 헨리에타(Henrietta)이다. 소설에선 총기 있는 기자로 그려져 있는데, 영화에선 너무 평범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의 청년 시절을 상상하기 좋은 작품은 그의 첫 출세작인 단편 <데이지 밀러>(1878)이다. 데이지 밀러(시빌 셰퍼드)라는 미국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의 파트너이자 관찰자로 나오는 인물 프레더릭 윈터본(배리 브라운)은 헨리 제임스의 분신으로 해석된다. 작가처럼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더 오래 살아 두 문화를 잘 알고 있는데, 동시에 양쪽 어디에도 선뜻 끼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의 주 무대는 로마다.
<데이지 밀러>는 ‘뉴 할리우드’ 세대의 작가이자 세련된 뉴요커를 대표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에 의해 영화로 발표됐다(1974년). 세르비아계 미국인인 그는 마틴 스코시즈, 브라이언 드 팔마, 마이클 치미노 등 뉴욕에서 성장한 영화인들과 교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독립영화계의 전설’ 로저 코먼에게 발탁되어 감독으로 데뷔했다. <데이지 밀러>는 그의 첫 시대극이다. 역시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 사이의 충돌의 드라마다. 특히 유럽화된 상층부 미국인들로부터 차별받는 신흥계급 미국인의 갈등이 강조돼 있다. 헨리 제임스가 1877년 로마에 거주할 때, 관광객 신분으로 이탈리아에 온 미국의 신흥 부르주아들이 유럽에서 사실상 귀족처럼 살고 있던 정착 미국인들에게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광경을 보고 창작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다.
미국인 처녀 데이지 밀러는 이사벨처럼 활기차고, 진취적이며, 무엇보다 눈에 띄게 미인이다. 데이지의 미모에 반한 프레더릭이 접근하는데, 미국인 특유의 자유분방한 태도가 처음엔 매력이었지만 점점 부담으로 느껴지며 갈등이 잉태된다. 급기야 프레더릭의 귀족 같은 친척, 지인들은 데이지와의 만남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말하고, 다른 남자들과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는 데이지는 이들에겐 낯선 존재다. 로마의 명소인 ‘빌라 보르게제’(Villa Borghese) 공원처럼 공개된 장소나 다름 없는 곳에서도 데이지는 여러 남자들과 번갈아 가며 산책을 즐긴다. 심지어 늦은 밤에 단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콜로세움을 다른 남자와 함께 방문하기도 한다. 그 시각에 콜로세움 근처를 돌아다니는 여성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데이지는 달빛 아래의 콜로세움을 보기 위해선 그런 시선쯤은 무시해야 한다고 여긴다. 바로 이런 독립적인 태도가 데이지를 궁지 속으로 밀어넣었고, 우유부단한 프레더릭은 통념의 금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데이지 밀러>를 찍을 때 주연인 시빌 셰퍼드는 보그다노비치의 연인이었다. 로마의 활기찬 거리, 태양, 공원의 푸른 숲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태도에서 더욱 빛이 나는데, 두 사람의 행복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영원한 도시’ 로마는 데이지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밝고 빛나게 그려져, 역설적으로 천진난만한 여성의 불행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로마의 풍경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러브 템테이션>. 로마 근교의 고성이 무대다. 오른쪽은 우마 서먼.
헨리 제임스의 ‘3대 걸작’과 이탈리아
헨리 제임스는 이탈리아를 평생 14번 방문했고, 로마에서는 간헐적이지만 제법 길게 거주했다. 그의 이탈리아 여정에서 가장 강조된 세 도시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다. 단 하나의 도시만 강조하자면 역시 로마인데, <데이지 밀러> <여인의 초상> 그리고 말기의 ‘3대 걸작’ 가운데 하나인 <황금주발>(The Golden Bowl, 1904)이 로마 배경의 작품이다. ‘3대 걸작’은 순서대로 <비둘기의 날개>(1902), <대사들>(1903), <황금주발>을 말한다. <황금주발>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러브 템테이션>(2000)이다. 로마 인근의 고성(古城)들이 주요 배경이다. 런던에 살고 있는 미국인 재벌의 상속녀는 순결하고 품위 있으며, 그의 이탈리아 연인인 귀족은 고성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데, 그에겐 이미 오래된 연인이 있다. 제임스 특유의 ‘상투적’인 삼각관계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에서 런던은 이성의 공간으로, 로마의 고성은 감성의 공간으로 대비된다. 런던의 공간은 주로 반듯하고 밝은데, 로마의 고성은 그림자가 깊고 숨겨진 방도 많다. 영화의 이탈리아 시퀀스는 로마에서 약 60km 떨어진 아르솔리(Arsoli)의 ‘마시모 성’(Castello Massimo)에서 주로 찍었다. 중세 특유의 언덕 위에 있는 소박한 성으로,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이 마치 정원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다. <러브 템테이션>은 제임스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식 결말을 제시한다. 여기서 악역은 우마 서먼이 연기한 귀족의 정부인데, 그는 단지 남자 곁에 머물기 위해 상속녀의 나이 든 부친과 결혼까지 한다. 가족관계로 보면 연인의 장모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음모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3대 걸작’ 가운데 영화로서 가장 호평을 받은 작품은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를 각색한 이언 소프틀리 감독의 <도브>(1997)이다. 역시 계략을 꾸미는 악역이 극을 주도하는데, 헬레나 본햄 카터가 그 역을 맡았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은 런던과 베네치아다. 역시 런던은 현실, 베네치아는 환상으로 대비된다. 런던에선 핏기 없는 사람들이 베네치아에선 삶의 열기를 되찾기도 한다. 대운하, 곤돌라, 교회들, 가면들, 생선가게들처럼 베네치아의 알려진 특징들이 여기서도 소개되는데, 눈에 띄게 다른점이라면 그런 풍경이 주로 밤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밤에 등장하는 곤돌라, 조명에 비친 아름다운 건물들. 그런 야경 속에 들뜬 사람들의 흥분이 강조돼 있다.
제임스 특유의 악역은 결국 믿음을 저버리는 배신자다. ‘유다 콤플렉스’(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제임스의 악역에 붙인 명칭)가 제임스 악역의 특징이다. 계산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결국 신의를 저버리는 인물이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맡은 역이다. 반대로 주역은 그 배신마저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자로 설정돼 있다. 제임스 자신은 이런 미덕을 타자에 대한 ‘친절’이라고 정의했는데, <도브>의 주인공 여성(앨리슨 엘리엇)이 그런 미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헨리 제임스는 작가로서의 삶을 대부분 런던에서 보냈다. 하지만 청년 시절 로마에서 보낸 경험 때문인지 거의 정기적으로 이탈리아를 재방문했다. 그 경험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남아 있다. 내 생각에 이탈리아에 대한 제임스의 최고의 해석은 <여인의 초상>의 길버트 오스먼드 캐릭터 같다. 이탈리아의 긴 여름 오후의 나른한 매력을 알아보는 남자 말이다. 존 말코비치의 발군의 연기 때문인지 그의 심심하고 냉소적인 표정만 보면 이탈리아가, 특히 피렌체가 생각난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 속 이탈리아는 길버트처럼 귀족적이고 미학적이지만 노회하다.
다음엔 로마 근교의 유적지로 가겠다. <황금주발>에서 조금 소개된 곳이다. ‘제국의 수도’ 로마 근교엔 귀족들의 웅장한 성들이 지금도 숱하게 남아 있다. 화려하게, 또 폐허처럼 말이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들이 좋은 안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