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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권해효, 김새벽, 조윤희 - 순간과 마음을 오롯이 담다
정지혜 사진 오계옥 2017-07-05

김새벽, 권해효, 조윤희(왼쪽부터)

과거, 현재, 미래는 어떤 기준으로 나뉘어진 것인가. 연속된 시간의 임의적 분절이 가능한 것이라면 반대로 분절된 시간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다시 여기로도 옮겨볼 수 있지 않겠나. 시간은, 시제는 충분히 뒤섞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의 마법, 꿈과 같은 시간의 세밀한 조탁자다. 그의 21번째 장편 <그 후>(개봉 7월 6일) 역시도 그러하다. 영화에는 누군가의 아주 긴 하루와 그 하루에 불쑥 들어선 과거의 날들(그 안에도 시간은 순차적이지 않다)이 이어붙여져 있다. 임의적 시 제에 익숙한 관객에겐 당혹스러운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 긴 하루는 이런 날이었다. 문학평론가인 봉완(권해효)이 사장으로 있는 출판사에 아름(김민희)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그날, 봉완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봉완의 아내 해주(조윤희)가 출판사로 찾아오고 그 상대 여성이 아름이라고 확신(오해)한다. 아름은 몹쓸 봉변을 당한다. 그사이, 관객은 봉완과 그의 실제 연인 창숙(김새벽)이 함께한 과거의 한때를 보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 속 과거에만 살던 창숙이 영화 속 현재 시간 안으로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의 기이한 만남. 그 후, 누군가에게는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에 봉완과 아름은 재회한다.

시간의 뒤섞임에 관해서라면 뒤섞인 편지지를 넘길 때마다 시간이 섞였던 <자유의 언덕>(2014)이나 소제목과 크레딧으로 편(篇)을 떼어놓았던 <옥희의 영화>(2010)도 있다. <그 후>는 감독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현재와 과거의 시제가 빠르게 붙어나가며 빚어낸 기묘함 때문인지 불명확한 시간의 미로에 갇혀버린 듯한 <북촌방향>(2011)에 보다 가까워도 보인다. <북촌방향>의 영어 제목은 <The Day He Arrives>, <그 후>의 영어 제목은 <The Day After>. 전자가 그가 도착한 바로 ‘그날’의 무엇이었다면, 후자는 계속되는 그 후‘들’의 열린 시간이다. <그 후>는 <오! 수정> <북촌방향>에 이은 감독의 세 번째 흑백영화이자 역시나 ‘겨울영화’다(올해 1월 4일 크랭크인해 2주 만에 9회차로 마쳤다). <그 후>의 권해효, 김새벽, 조윤희 세 배우에게 만남을 청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구조는 배우들 각자가 갖고 있는 생동하는 것들에 기댄다. 배우들 역시 그 현장이 새로운 자각의 시간이었다는 얘기를 무수히 전해왔다. 권해효는 <다른 나라에서>(2011),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 이어 홍상수 감독과의 네 번째 작업이다. 김새벽과 조윤희는 홍상수 세계의 초행자들이다.

조윤희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 배우는 그 자체로 육화된 영화의 시제, 언어, 구조 같다. 배우 본연의 기운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방식이라 누구와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방향도, 결과도 달라지는 듯하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신뢰하는 주변인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나 배우의 작업이 아닌, 인상에서 출발해 만남을 청하는 걸로 안다.

=권해효_ 나와 (문)소리가 출연한 연극 <광부화가들>(2010)을 본 홍상수 감독이 소리를 통해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근데 홍상수 감독은 배우의 출연작을 보고 연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누구한테 얘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야? 궁금해”라고 하지. (김새벽을 보며)그래, 새벽, 어떻게 하게 된 거야? 감독님이 네 영화를 봤을 리는 없고. 우리(권해효와 조윤희는 실제 부부다.-편집자)야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를 봤지만. 물론 새벽은 작품마다 느낌이 정말 달라서 <그 후> 촬영 중간에야 그 새벽이 이 새벽이라는 걸 알았다. (일동 웃음)

=김새벽_ <초행>(2017) 촬영을 마치고 3일 정도 지났을 때다.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감독님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는 전화를 받았다. 감독님께서 제작팀에 같이 할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내 사진 한장을 보신 거더라. 만나뵌 날 나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감독님께서 “같이 합시다”라고 하셨다.

권해효_ 대체로 홍상수 감독은 촬영할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캐스팅을 한다. 보통은 “언제 찍을 건데 시간 있니?”라고 했는데 지난해 12월께 홍상수 감독이 “너하고 작품을 하고 싶어”라고 하더라. 표현이 달라졌다는 건 역할이 클 거라는 뜻이었다. 그다음에 만났을 땐 밑도 끝도 없이 “누구랑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거다. 아니, 무슨 이야기인지, 어떤 역할인지, 뭘 하는 인물인지도 모르는데 누구랑 같이 하고 싶냐니! 허허. 근데, 그게 진심이다. ‘나한테 제안을 한번 해줘. 추천을 해 준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야기를 상상해볼게’라는 의미인거다. 아내에 대해서는 “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인 것 같다”며 보고 싶다, 출연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조윤희_ 오랜만에 연기를 하게 됐다.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활동을 못했다. (이명세 감독의 1993년작 <첫사랑> 이후 영화 출연이 처음이다.-편집자) 감독님의 제안을 받았을 땐 선뜻 ‘좋아요’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근데 해보고 싶더라. ‘아빠’(권해효)가 테스트 촬영을 하러가는 날 같이 가겠다고 해 감독님을 처음 뵀다. “저 마음에 안 들면 안 쓰셔도 돼요” 그랬더니 “아니에요” 그러시더라. 부부 연기? 결혼생활을 23년 넘게 하면 낯간지러운 것도 다 지나간다. 부부로 나온 건 처음이지만 20대 초반부터 한양대 연극영화과 선후배로 같이 연기를 해왔고 연인 역으로 무대에도 올라 괜찮다.

-배우의 평소 습(習)이나 특성이 그대로 영화에 반영된 게 있을까.

조윤희_ 내가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아들 이름을 붙여 유진이 아빠라고 하다가, 아빠로. 그게 영화 초반에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로 들어갔다. (영화에 시계가 딱 두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 시계에 ‘YuJin’ 이라 적혀 있다) 유진? 공교롭게 그렇게 된 것 같다.

권해효_ 아름이 봉완에게 “목주름이 없네요” 하고 말할 때 봉완이 유전이라고 말한다. 진짜 내 얘기다. 평소에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고! 하하하.

김새벽_ 처음 감독님 만났을 때 감독님께서 “아무거나 질문 하나 해 봐”라고 하셨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든 시기라 “왜 사는 걸까요?”라고 했다. 아름이 ‘왜 사세요?’라고 말하지 않나. 물론 내 질문을 넣으셨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런 게 나와서 놀랐다. 감독님의 답변? 아주 긴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섣불리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지금에 집중하고 지금을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감독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을 봤을 때의 기운을 영화 속으로 많이 가져간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창숙을 보면 ‘아, 감독님이 생각한 내 모습이 이런걸까?’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 (웃음)

권해효

-홍상수 감독은 촬영 당일 그날의 촬영분의 대본을 전달한다. 여타의 작업 현장과는 완전히 다른 긴장과 집중을 요한다. 배우로서는 이러한 방식이 어떤 새로움과 어려움을 주는지 듣고 싶다.

김새벽_ <그 후>를 촬영하던 시기가 내겐 중요한 때였다. 지난 연말,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어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 그전부터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를 정말 좋아해 꼭 작업해보고 싶었지만 연락을 받았을 땐 쉬고 싶기도 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락을 받은 건 다 이유가 있을 것 같더라. 그때 나는 ‘용감하게 겁먹지 말고 피하지 말고 살자’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던 때였다. 감독님의 작업도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대사도 길고, 어떤 역할, 어떤 대사를 할지도 모르고 나를 내던져야 하는 작업이니까. 그런 게 딱 맞아떨어졌다.

권해효_ 그런 작업 과정을 재밌게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대사의 통제권을 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데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선 이런 생각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데서 부대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때 그러했고 뒤의 두편을 하면서는 좀더 편안해졌다. 말의 리듬이나 말투를 내 식으로 고치거나 좀더 편하게 말하려고 할 때마다 홍상수 감독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같았다. “낡았어, 지루해, 재미없어.” 홍상수 감독에겐 생경한 말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봤죠, 맞아, 봤어요, 우리”를 “우리 어디서 봤죠?”라고 하면 제지를 받는다. 단어의 순서, 세밀한 말의 리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흡 곳곳에 어마어마한 감독의 디테일이 숨어 있다. 사적인 인간들간의 대화의 영화인데 그 어떤 사건보다도 이들 말에 집중하게 되는 거다. 그 힘이 대단한 거다.

조윤희_ 대개는 배우가 전체 시나리오를 받고 사전 준비를 하는데 이 영화는 참여하는 그 누구든, 심지어 감독님조차도 어떤 대본이 나올지 전혀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배역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그 장면에 대한 대본만 보고 연기를 해야 한다. 대단한 집중력이 생긴다. 상대 배우의 말도 더 잘 들어야 하고. 내가 계획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들로 급하니까 원래 내 것을 가져다 쓴다. 감독님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배우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 했는데 그렇게 되더라.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 한번에 쭉 촬영을 하니 내가 해온 연극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

권해효_ ‘본인의 것을 쓴다’는 게 다른 현장과 미묘하게 다르다. 홍상수 감독처럼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감독도 없다. 그 출발이 시나리오에 있다. 배우에게 촬영 1시간여 전에 주는 A4용지 5장 분량의 대본. 롱테이크로 찍어야 하는 상황이 주는 긴장감. 홍상수 감독의 대본에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호흡부터 말의 리듬, 배우와 배우 사이의 눈빛의 교환조차도 굉장히 통제돼 있다. ‘내가 연기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기도 하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그 배우가 갖고 있는 색깔에 의해 영화가 엄청나게 바뀌었음을 본다. 배우가 의도적으로 자기 안의 것을 꺼내 쓴 게 아니다. 홍상수 감독이 그 배우 안에 있는 걸 갖다가 쓰는 거다. 생각해보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선 한번도 배우의 연기를 갖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평소에 그 배우가 연기를 잘했든 못했든 상관없다. 굉장한 특별함이다.

김새벽_ 창숙이 봉완과 마주보며 서럽게 울 때가 있다. 이 비겁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울분이 막 터지는 거다. 근데 창숙의 앞뒤 상황을 모르고 오직 그 대사, 그 상황에만 집중해야 한다. “거기선 힘들었잖아요”라고 하는데 나중에야 ‘거기’가 영국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몰라도 되는 상황을 괜히 대본을 통해 알게 됐을 때 집중이 깨지기도 한다. 봉완이 아름한테 잘해주는 듯한 내용이었는데 그 후 봉완, 창숙, 아름 셋이 만났을 때 괜히 두 사람을 의심하게 되더라. ‘아, 이래서 감독님이 다른 대본을 안 보여주시는구나’ 싶었다.

권해효_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정)재영, (송)선미, (김)민희 등과 다 같이 둘러앉아 술집에서 술 먹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재영의 역이 내 역인 줄 알고 대사도 외우고 심지어 키스 신 때문에 양치질도 했다. 리허설을 하는데 재영이가 내 대사를 하는 거다. ‘이게 뭐지? 내가 그 이름이 아니구나!’ (일동 폭소) 지금껏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또 그 영화가 너무 빨리 촬영이 끝나서 영화가 될까 싶었다. 우연히 평론가 달시 파켓을 만났는데 영화의 번역을 하고 있다는 거다. “영화 너무 짧지 않아?” 그랬더니 “1시간30분도 넘어요. 독일에서 찍은 게 있잖아요” 그러는 거다. 재영, 선미 모두 독일 분량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찍었다. 네 번째(<그 후>)가 돼서야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 본 거다. (웃음) (오랜 친구인) 김의성씨와 홍상수 감독 사무실에 놀러 가서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저 책상 어딘가에 분명히 전체 계획표가 있을 거야! 어딘가에 숨겨두고 혼자서 보는 게 분명해!”

-현재, 과거, 대과거, 다시 이 모든 걸 과거가 되게 하는 또 다른 현재의 시간까지. <그 후>는 시제의 변화가 상당한 영화다.

권해효_ 그 모든 게 순서대로 촬영됐다. 한순간도 편집으로 순서를 뒤바꾼 게 없다.

조윤희_ 감독님 머릿속에 그 모든 게 다 있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영화의 첫 시퀀스, 식탁에서 봉완과 해주가 마주보고 나누는 대화는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의 대화 같으면서도 표정, 호흡, 웃음 등에서 부부일까 확신을 흔들게 해 이상했다. 흑백영상은 시간대 역시 새벽인지 오후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권해효_ 원래는 그 식탁 장면 말고 앞 장면이 있었다. 두 사람이 아침 시간을 보내는 꽤 설명적인 내용이었는데 리허설을 몇번 하다가 홍상수 감독이 “없어도 되겠다”고 하더라. 그러곤 즉석에서 두 장면의 대사를 섞어서 지금의 식탁 장면 하나로 만들었다.

조윤희_ ‘저 남자가 진짜 바람을 피우는 걸까?’ ‘저 여자가 과하게 의심하는 걸까?’ 어쩌면 시기적으로는 그 여자(창숙)와의 관계는 다 끝난 시점일 텐데. 감독님께서 영화의 시작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것을 탁 던져주고 싶어 하신 것 같다.

김새벽

-봉완과 아름이 중국집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세상과 실체적 진실에 대한 감독의 오랜 질문과 답변, 태도가 고스란히 담겼다. 겨울 햇살과 배우들의 프로파일(이 영화는 유독 마주본 인물들의 ‘옆얼굴’이 많다)이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다.

권해효_ 어렵지 않게, 재밌게 찍었다. 겨울의 오후 4시경이라 테이크를 여러 번 못 갔다. 12분여 되는 롱테이크 상황에 몰리니 집중하게 되더라. 그들이 나누는 말이 되게 재밌다. 그런 대사를 할 때 기분 좋다. 연기할 때 정말 ‘개소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대사를 해야 할 때가 훨씬 많다. 자괴감을 느낀다. 근데 홍상수 감독 영화에선 특히 그런 대사는 하는 내내 기분이 좋다.

조윤희_ 김민희씨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힘이 좋음을 느낀다. 굉장히 여릴 것 같은데 아주 파워풀하다. 날로 연기가 좋아진다.

권해효_ 민희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그 긴 하루가 지난 후 시간이 흐르고 봉완과 재회한 아름은 ‘그 사람’(창숙)만을 궁금해한다.

권해효_ 맞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크게 느껴지는 단적인 예다. 여성의 안부를 물어주는 여성, <밤의 해변에서 혼자> 때의 영희(김민희)와 준희(송선미)가 그랬듯이. 언제부터인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가슴을 움직이는 영화로 가고 있다. 단순히 그의 삶의 변화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작품으로서 그렇게 변화해오고 있는 것 같다. 좋다.

조윤희_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며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가 굉장히 부드럽고 친절해졌음을 느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영화가 있나.

권해효_ 감독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넌 내 영화 몇편이나 봤니?” “다.” “어느 인물이 제일 좋아?” “형 영화 속 남자 캐릭터? 한명도 좋아하는 사람 없어. 나하고는 너무 다른 인간이야. 나는 형 영화에 나오는 주로 혀를 끌끌 차는 인물 입장이야.” (일동 폭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최근 4편을 꼽아본다. 젊은 관객 중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한번도 본 적 없는 경우도 많더라. 그의 영화 세계를 알고 싶다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함께 근작들부터 역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조윤희_ 나 역시도 데뷔작과 근작들. 볼수록 중독된다. 감독의 시각을 쭉 밀고나가며 작업하는 분들이 많지 않잖나.

김새벽_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와 <하하하>(2009)는 기운이 좋아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는 영화 속 내용처럼 솔직한게 당장은 나빠 보여도 나중에는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내 살고 싶은 마음으로.

-홍상수 감독과의 또 다른 작업을 기대해보나.

권해효_ 아직도 기억한다. <다른 나라에서>의 쫑파티 때였다. 변산반도에서 보름간 전투 같은 촬영을 끝내고 이자벨 위페르에게 물었다. 홍상수 감독과 다시 영화를 찍겠느냐고. “당연하지! 이렇게 환상적인 경험은 처음 해본다.” 그 후 <클레어의 카메라>(2017)로 만난 게 아닌가. 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야. 내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기대도 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가는 경우가 의외로 드무니까. 대개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해치우지, 이런 마음이지. 근데 홍상수 감독 현장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간다. 그 즐거움을 놓치기 아깝지.

조윤희_ 소풍 가는 마음으로 갔다. 감독님이 또 같이 하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언제 부르실지. 그거야, 감독님도 모르실 거다. (웃음)

김새벽_ 현장에서 감독님이 직접 조명도 옮기시고 스탭들 한명 한명 다 챙기시고. 그러면서도 조그마한 모니터를 보며 기분이 정말 좋다는듯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감독님은 진심으로 좋아서 영화를 찍는 분이라는 걸 느꼈다.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웃음)

후기

“저 책 좀 챙겨갈게요. 그래도 되죠?” 아름은 출근 첫날 봉변당한 것도 모자라 출판사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다. 아름은 출판사에서 낸 책들을 챙겨가겠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 가방 한가득 책이다. 권해효의 말에 따르면, 지문에 “대략 스물한권을 가져갔다”고 돼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 뒤, 봉완은 아름에게 나쓰메 소세키의 새로운 번역본이라며 책 한권을 건넨다. <그 후>인 걸로 짐작된다(촬영날, 홍상수 감독은 원래 <마음>을 찾았다고 한다). 아름에게 온 대략적으로 22번째인 그 책, 그곳에서 받은 마지막 책. ‘그 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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