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를 연기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실제 내 성격과 미자가 비슷하다. 나도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한다.” 4살에 연기를 시작해 연기 경력 10년을 넘긴 배우 안서현은 일찍이 연기에 꽂혔다. <하녀>(2010), <바보엄마>(2012), <몬스터>(2014), <신의 한 수>(2014)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사회생활’도 일찌감치 경험했다. 2년 동안 <옥자>의 미자로 살면서도 너끈히 제 몫을 다했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로 성인배우들 그것도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홀, 폴 다노, 변희봉 같은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학교에선 평범한 중학생일 뿐”이라고 했지만, 범상치 않게 성숙한 안서현은 보통의 14살이 아니었다.
-<옥자>로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및 해외 프로모션 행사에 두루 참석했다.
=칸영화제에 처음 갔을 땐 내 일 같지 않았다. 그러다가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드카펫에 발 딛는 순간부터 엄청난 플래시가 터져나왔다. 걸어도 걸어도 레드카펫은 끝이 없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았는데, 봉준호 감독님이랑 틸다 스윈튼이 내 손을 양옆에서 잡고 있더라. 확실히 그 손이 많은 위로가 된 것 같다.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2015)을 끝내고 쉬려던 때 <옥자>의 캐스팅 공고를 보고 봉준호 감독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고.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을 끝으로 연기를 좀 쉬려고 했는데, 아빠가 어차피 쉴 거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면 좋지 않겠냐고 해서 이메일을 썼다. 그런데 한참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두달쯤 뒤에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봉준호 감독님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것만으로도 목표는 이뤘다고 생각했다. 제작사에 갔더니 이미 옥자 모형과 사진들로 사무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10개월간 작품 얘기는 꺼내지도 않으셨다. 의문이었다. 난 분명 <옥자> 때문에 여기 온 걸 텐데 왜 <옥자> 얘기는 안 하실까. 다음엔 영화 얘기 하시겠지 하고 만나면 또 ‘여기가 마카롱 맛집인데 가보자’, ‘오늘은 에그 타르트 맛집에 가볼까’ 그러시고. (웃음) 그렇게 10개월이 흐르고서야 <옥자>의 시나리오를 주셨다.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다. 하루에 한장을 읽어도 좋으니까 천천히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미자에 대해 얘기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천천히 읽으려고 했는데 정말 책이 후딱후딱 넘어가지더라. 하루만에 다 읽고, 한달 동안 스무번을 넘게 읽었다.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시나리오 속 미자는 어떤 아이였나.
=미자가 왜 이토록 옥자를 지키려고 하지? 미자는 왜 목숨까지 걸고서 옥자를 지키려고 하는 걸까? 깊게 생각해봤는데 소중한 존재, 소중한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모성애 같았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미자는 옥자의 엄마’라는 거였다.
-모성애라는 감정이 쉽게 이해되던가.
=따로 모성애를 표현하려 했던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온 그 감정이 모성애였다고 생각한다.
-혹시 반려동물을 키우나.
=랑이라는 이름의 잭 러셀 테리어를 키운다. 드라마 <일편단심 민들레>(2014)를 찍을 때였는데, 드라마에 강아지가 나왔다. 강아지 섭외 담당하는 스탭들이랑 친해지면서 ‘서현이가 강아지를 정말 예뻐하는 것 같은데 한 마리 입양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때 랑을 가족으로 데려왔다. 미자를 연기하면서 도움받은 감정은 내가 강아지를 사랑하는 감정이랑 오빠를 사랑하는 감정, 이 두 가지였다. 6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자라면서 오빠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미자가 옥자 배 위에서 뒹굴며 자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어릴 때 오빠 등에 올라타고 배 위에서 뒹굴며 노는 게 일상이었다.
-미란도 코리아 복도 장면에서 유리문에 몸을 던지는 등 소화하기 벅찬 액션 신들이 있는데, 대역을 쓴 건가.
=그렇다. 내가 직접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역배우의 안전을 철저히 챙기는 현장이었다. 미국은 아역배우의 촬영시간을 엄격하게 지킨다. 잠잘 시간엔 자야 하고, 쉴 때는 쉬어야 한다. 또 해외 촬영 때문에 학교 수업을 못 받으니까 선생님도 따로 붙여줬다.
-옥자와 감정을 나누는 장면이 많다. 그런데 옥자 캐릭터는 CG작업으로 완성된 거라 현장에선 미완의 모형과 연기를 해야 했다.
=‘인사해, 촬영 같이할 옥자야’ 했을 때 옥자의 신체 부위별로 제작된 스펀지 모형이 있었다. 가장 자주 연기한 건 머리 부분 모형이었는데, 그 머리 모형을 컨트롤하는 스탭이 있었다. 스티브라고 외국 분이었다. 스티브와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스티브가 옥자라 생각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다.
-옥자에게 귓속말을 하는 장면이 두번 나오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떤 내용이었고 어떤 디렉팅이 있었나. 봉준호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구체적인 내용 없이 아무 말이나 하라고 했고 안서현 배우가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일단 아이돌 노래는 아니다. (웃음) 대신 일본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첫 번째 귓속말을 할 땐 당시 한창 좋아하던 J팝을 읊조렸다. 콘티에는 ‘귓속말을 한다’고만 적혀 있었고 나도 감독님께 딱히 어떤 내용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하면 돼요?’ 하고 물었더니 감독님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셔서 마후마후의 <경화수월>을 찬찬히 읊었다. 하늘은 파랗고 숲속 풍경은 예쁘고 옥자의 머리에 손을 올리니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나 흥얼거려야겠다 싶었다.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홀, 폴 다노 등과 연기했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틸다 스윈튼은 강원도 산골짜기 미자의 집에서 처음 본 것 같다. 그때 틸다가 벙거지 모자를 쓰고 왔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이 쓰는 베이지색 모자와 색이 비슷했는데, 거기에 한글로 ‘옥자’가 쓰여 있고 핑크색 옥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모자였다. 내가 쓰면 참 웃긴 모자였는데 틸다가 쓰니 정말 잘 어울리더라. (웃음) 카메라 안에서건 밖에서건 정말 멋지고 배려심 넘치는 배우였다. 밴쿠버에서인가 미국에서인가 틸다의 가족과 함께 <도리를 찾아서>(2016)를 보러 가기도 했다.
-다음 작품 계획은.
=정해진 건 없다.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 <옥자>를 하면서 2년 동안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돌아다녔다. 조금 지친 것도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다. 그동안 방학 때마다 촬영하느라 쉬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 여름방학만큼은 완벽하게 쉬어보려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