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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감독의 <비브르 사 비>
2002-04-11

여인이 영혼을 잃을 때

Vivre Sa Vie 1962년, 감독 장 뤽 고다르 출연 안나 카리나 <EBS> 4월13일(토) 밤 10시

“고다르와 화가 베르메르는 일상적 대상을 찬미한다. 그들에게 하찮은 것들은 극단적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평론가 리처드 라우드의 말이다. 영화는 여주인공 나나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다른 방향에서 그녀의 정면과 옆얼굴을 차례로 비춘다. 영화는 열두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은 “나나는… 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짧은 부제가 붙는다. 이렇듯 산만한 구성의 <비브르 사 비>는 역설적으로, 배우의 정물에 근접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다. 당시 고다르의 아내이자 영화 속 히로인인 안나 카리나의 자태가 그렇다. 영화는, 그녀에게 봉헌된 심미적인 연서다.

남자와 헤어진 나나는 형편이 어렵다. 집세를 내지 못한 나나는 자신이 기거하는 방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남은 선택이라곤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매춘이다. 라울이라는 포주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 나나는 물건 취급당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매춘생활의 모든 노하우를 알려준 뒤 라울은 그녀를 다른 갱단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불행이 나나의 앞길에 도사리고 있다.

1960년대 고다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서성였다. 기실 <비브르 사 비>는 흔해 빠진 이야기다. 한 여성이 서서히 전락하고, 결국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채 슬픈 최후를 맞는다는 것. 고전 비극에서 익히 볼 수 있던 상투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는 이 서사를 냉담하고 무미건조하게 풀어낸다. 카메라는 배우 정면보다 옆면이나 뒷모습을 선호하고, 때로 파리의 시내 정경을 무심하게 훑는다.

<비브르 사 비>의 결말에선 픽션과 다큐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위트있는 픽션이 완성된다. 영화에서 나나는 어느 남성이 들려주는 포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아내의 초상화를 완성하자 그녀가 곧 죽어버리는 예술가의 이야기다. 이후 영화 속 나나는 거리에서 어이없이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다시 말해 <비브르 사 비>는 고다르 감독이 현실로서의 안나 카리나를, 비극적인 여신의 경지까지 올려놓을 것을 꿈꾸었던 흔적이다. 따라서 영화는 거창한 서사를 품고 있다기보다 감독 자신의 사적 ‘에세이’에 가깝다.

“한 여자가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죽음이 있다” 동료 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비브르 사 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나나라는 여성이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정신이 황폐해지며 마지막으로 영혼을 말끔히 잃는 과정을 담는다. 열두개의 에피소드는 그녀가 걸친 모든 것이 하나씩 제거되고, 먼지처럼 청소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형식적인 엄격함과 풍부한 인용, 그리고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견지에서, <비브르 사 비>가 간직한 균형미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