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범>의 염정아를 보면서, <장화, 홍련>(2003)이 떠올랐다. 자매의 죽음을 둘러싼 새엄마와의 충돌을 그린 서늘한 공포를 통해, 우리는 그간 적어도 ‘연기적’으로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염정아라는 배우를 얻었다. <장산범>은 14년 만에 다시 공포 스릴러물에 도전한 염정아가 본격적으로 끌어가는 영화다. 목소리를 흉내내 사람들을 꾀어내는 ‘장산범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염정아는 도시를 떠나 장산으로 이사 온 주부 희연을 연기한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녀는, 7살 난 아들이 실종된 아픔을 삭이며 살고 있다. 숲을 헤매던 미스터리한 소녀(신린아)와의 만남, 평화를 위협하는 거센 바람 소리. 염정아가 가진 여전히 날선 이미지들로 포문을 연 영화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아픈 내면으로 나아가며 한층 성숙한 배우의 면모를 보여준다. <장산범>으로 또 다른 시도를 한 배우 염정아를 만났다.
-<장산범>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제작사 김미희 대표님(스튜디오 드림캡쳐)을 통해 시나리오를 받았다.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책(시나리오-편집자)부터 받은 거다. 책이 정말 너무 재밌더라. 소리를 통한 공포라는 컨셉이 일단 기존에 못 보던 전개였다.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말이 되는가였다. 그런데 <장산범>은 그 판단이 서더라. 사람을 그냥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스토리와 같이 간다는 게 좋았다. 허정 감독의 전작 <숨바꼭질>(2013)도 김미희 대표님이 초대해주셔서 VIP 시사 때 봤다. 그 작품을 생각하면, 이 감독은 어느 정도 작품을 만들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공포와 모성애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은 작품, 내가 책을 읽을 때 느낀 게 그대로 보여진 것 같다.
-한국영화사에서 손에 꼽는 공포영화로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빼놓을 수 없다. 자매들을 억압하는 새엄마 은주 역으로 ‘호러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작품이다. 공포같은 장르의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을 텐데, 이후 선택은 오히려 벗어나 있었다.
=당시에 공포 장르의 시나리오가 진짜 많이 들어왔다. 사실 일부러 같은 장르니까 하지 말아야지 한 건 아닌데,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장산범>에서 맡은 희연 캐릭터가 장르를 떠나 평범한 여성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그간 제안이 들어온 역할들은 대부분 섬뜩한, 반전이 있는 악역이었다. 그런 역할들이 들어오면 좀 전형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피하다보니 공포 장르에서는 오히려 멀어진 것 같다.
-장산범이란 괴담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희연의 불안한 내면이 일으키는 심리 스릴러적인 면이 더 크게 다가오더라.
=그래서 연기하기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어떤 전개냐를 떠나서 일단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를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이미 너무 힘들었다. 기자시사 때 영화를 처음 봤는데 혼자 또 너무 울었다. 잠깐잠깐 영화를 보는데도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
-희연은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응어리로 남아 있고, 그 사이에서 앞장서지 않는 남편에 대한 미움도 가지고 있다. 자신을 향한 죄책감 역시 표현하지 못하며 병들어가는 캐릭터다.
=원래 책에는 영화보다 더 자세한 설정이 있었다. 희연은 애 둘을 키우면서 치매 걸린 시어머니까지 모시느라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마트에서 장 다 보고 나왔는데, 그제야 ‘아, 남편이 그거 사오라고 했지’ 하는 생각이 나서 빨리 다녀오려고 시어머니한테 아이를 맡기고 갔다가 아이를 잃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다 좋게 살지만 안으로는 곪아 있는 가족의 이야기다.
-희연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 소녀가 깨진 유리 조각을 들고 희연을 위협하는 장면이 그런 희연의 심리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아줌마는 믿어도 된다’며 오열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정서적인 톤이 가장 고조된 장면이자 아이를 잃은 희연의 상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희연은 그 소녀를 통해서 잃어버린 자기의 아들을 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희연의 선택이라면 선택인데, 그 장면을 관객이 ‘그럴 수 있어’ 하고 받아들이려면, 앞에서 내가 그걸 계산해서 가져가야 했다. 그 신이 풀려야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끌어갈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다. 허정 감독님과도 이 장면부터 희연의 감정이 드러난다는 걸 상정하고 많이 의논하면서 이후 촬영을 전개해갔다.
-장산범의 소리가 후반작업으로 입혀진다. 비주얼 CG가 많은 영화를 촬영할 때 아무것도 없는 블루스크린 앞에서 비주얼을 상상하고 연기하는 것처럼, 이번엔 소리를 상상하고 감정을 표출해야 했다.
=보통 영화 후시녹음은 한두번이면 끝나는데 이번에 나는 세번 정도 했다. 나보다 아이들(신린아, 방유설)은 훨씬 많이 했다. 현장에서 촬영 때도 힘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상상하고 반응해야 했다. 스탭들이 ‘딱’ 소리를 같은 신호를 주면 그 소리에 대한 리액션의 크기나 강도를 나 혼자 생각하고 계산해서 반응해야 한다. 영화가 완성되기 전까지 정말 어떻게 나올지 감이 안 온다는 말이 이번엔 맞더라.
-가장 많은 신을 함께한 상대역의 신린아 배우와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신린아는 믿음이 가는 순진함과 의심이 배가되는 미스터리가 얼굴에 다 있더라. 합을 맞추는 과정은 어땠나.
=린아는 정말 신기한 배우였다. 성인 연기자와 달리 어린 배우들은 좀 기다려준다거나 설명을 많이 해줘야 한다. 그래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아 다른 방법으로 감정을 끌어내려고도 하고. 그런데 린아는 어른들과 똑같더라. 감독님이 조곤조곤 설명해주면 그걸 듣고 바로 연기를 한다. 린아를 배려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같이 연기한 거다. 7살이라 우리 아들하고 나이도 같고, 많이 예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럽더라. (웃음) 지금 저 정도 연기를 하는데, 이대로 크면 엄청난 연기자가 되겠구나 싶더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개인적인 감정선이 캐릭터 해석에 어떻게 작용하나. 드라마 <로열 패밀리>(2011) 때 인숙이 “과거의 살인사건 때문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게 납득이 안 되더라”며 감독님과 여러 차례 납득할 만한 지점을 토론했다고 말했었다(<씨네21> 804호 커버 스토리). 반면 <장산범>의 희연에게서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감정에 크게 동화된다.
=옛날에는 그런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 개인적인 감정들을 총동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생각부터 ‘내가 힘든 일이 있었지’ 같은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거다. 그런데 그걸로는 안 된다. 결국은 캐릭터에 몰입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배역에 내 사생활이나 개인적 감정을 끌어들이지 않게 되더라. 정말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오랜 연기생활의 끝에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장화, 홍련> 때부터 그걸 느꼈는데, 그 방법을 알고 연기를 하니까 연기가 너무 재밌더라. 그전에는 염정아라는 사람과 영화 속 인물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장화, 홍련>의 은주를 연기하면서 ‘아,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감이 오더라. 내가 만들었다기보다 운좋게 하게 됐고 감독님이 이끌어준 거였다.
-<장화, 홍련>은 ‘배우’ 염정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해준 작품이다. 이후 <범죄의 재구성>(2004)에서 보여준 범죄, 스릴러 장르의 센 팜므파탈의 모습을, 곧장 <여선생 VS 여제자>(2004) 코믹장르에서 ‘허술한’ 이미지로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오래된 정원>(2007)처럼 시대를 반영한 드라마에서 강단 있는 여성의 역할을 소화하기도 했고. 작품 선택이 다양하고 과감하게 이어지던 때였다.
=자신감이 생기는 거다. <장화, 홍련>이 주목받고, 연기가 평가를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기더라.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가 제일 활동을 많이 했을 때다. <범죄의 재구성>의 서인경을 하면서는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보기와 달리 소심한 성격인데 그때 한창 자신감이 붙더라. 연기가 너무 재밌어, 그럴 때였으니까. 그러면서 결혼하기 전까지가 책도 많이 들어왔고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넓었다. 지금하고는 다르게.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던 시기였다. 내가 즐길 수 있는 때였지. (웃음)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잠정적 휴지기를 가졌다. 개인적 선택이었겠지만, 배우의 커리어로 볼 때는 필모그래피의 단절이다. 복귀하기까지 작품을 쉬면서 초조함이나 허무함 같은 감정도 들었을 것 같다.
=허무함이라는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되고.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이렇게 청춘을 빨리 지나는구나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가장 후회한 건, 그때 더 할걸이라는 후회였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몰랐다. 매일 그 상태일 줄 알았고, 이후에는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는 걸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후배들을 보면 하는 말이 딱 한 가지다. 많이 하라고, 많이 경험하라고. 지나면 그 역할들을 못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이의 연기자에게 낙담만 있는 건 아니다. 이 나이에, 조금은 나이가 든 내 모습으로 할 수 있는 역할도 언제든 하고 싶다.
-결혼 이후 영화보다 드라마 활동이 더 활발하다가 <카트>(2014)가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부당한 사측에 맞서는 마트 직원 선희의 역할이 기존 염정아의 이미지에서는 가장 낯선 선택이었다. 작품 수용의 폭이 확장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한테 그 시나리오를 주셔서 내가 오히려 놀랐던 경우다. (웃음) 나는 “저도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를 돌이켜봤을 때 어떻게 이 시나리오를 나한테 줬지 싶었다. 한마디로 ‘아니, 이분들이 날 아나?’ (웃음) 하고 흠칫 놀랐다. 사실 내 선택을 돌아보면 계획되고 의도된 게 전혀 없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서 연기할 뿐이다. <카트>도 그런 내가 욕심이 나서 스스로를 설득한 작품이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너무 어렵더라. 처음으로 생활에 발붙인 연기를 한거였고 그걸 찾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대에 따라 대중이 선호하는 마스크도 바뀐다. 그런 면에서 차갑고 도회적인 이미지가 활동의 기간과 폭을 연장해주는 무기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데뷔 초에는 오히려 내 차가운 외모가 주는 한계가 있었다.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스크가 각광받을 때였고, 나는 아니었거든. 드라마에서도 부잣집 딸 역같은 전형적인 역할만 들어오더라.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부러워한다거나, 그걸 좀 벗어나봐야지 이런 생각보다는 불만만 많았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지점은 내가 다작을 했다는 거다. 가능한 한 경험을 많이 쌓았다. 작품들을 돌아보면 <오래된 정원>이나 <카트>처럼 만족할 만한 흥행을 거두지 못한 작품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작품들이 좋고 자랑스럽다. 그 작품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그간의 영화계 변화는 어떻게 체감하나. 활동을 활발히 하던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한국영화계. 특히 여배우로서 체감하는 지점이 다를 것 같다.
=그 차이를 남자배우들은 못 느낄 것 같다. 그들에겐 평생 차기작들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배우들은 그룹으로 나오지 않나. 한꺼번에. 그런 작품들이나 시도를 할 수 있는 걸 보면 부럽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배우들이. 여자 캐릭터를 하나도 끼워주지 않더라.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뭘 할 수 있는 영화가 거의 없다. 여배우들을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할 작품이 너무 없다는 거다. 나 역시 일단 들어오는 시나리오 편수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너무 좁아졌다. 나도 그렇고 배우들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도 출연을 많이 한다. 드라마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캐릭터 표현이 좋아진 측면도 있지만, 영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는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차기작 선택이 더 주목된다.
=역시 계산은 없다. 귀가 얇아서 누가 이야기하면 다 솔깃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을 하게 될 거다. 그 마음이 하루에 몇번씩 왔다갔다하는 게 문제지만. (웃음) 올해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젊은 감독들의 작품을 보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좋은 작품이 이렇게 많은데, 나도 꾸준히 새로운 작품들에서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많이 해야 많이 노출되고, 그래야 배우 염정아를 기억해줄 거고, 나 역시 연기자로서 또 발전해나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