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한국영화사의 전통과 단절한 ‘하드보일드’의 매력
2002-04-17

신이 주재한 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 “신은 체스 두는 사람을 움직이고, 체스 두는 사람은 말을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게임을 시작한 뒤의 신은 누구인가?”-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당신은 왜 폭력과 비극만 되풀이하는가?”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다. 한 감독은 평생 한 가지의 이야기를 수만 가지로 변주해 들려준다. 어떤 때는 잘되고, 어떤 때는 망치고…. 단지 멈추지 않을 뿐이다.”아벨 페라라

영화가 시작되면 한 방송사 아나운서의 입과 마이크가 클로즈업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문득 드는 생각. 그러니까 이건 소리에 관한 영화겠군. 소리가 증폭되고 귀를 두드리는 그런 영화 말이야. 그런데 들어보니 엽서 속의 사연이 좀 이상하다. 누나와의 눈물나는 약속- 신장이 망가진 누나가 죽으면 시냇가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유언, 그 유언을 지키려는 동생은 청각장애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벌써부터 자못 진지한 태도로 눈물나는 사연의 누나와 동생을 비추어주지만 동시에 거대한 농담을 던지기 시작한다. 세상에 자신의 사연을 듣지도 못하는 자가 자신의 사연을 온 세상에 내보내기를 욕망하다니, 류는 이상한 헛짓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가 행하는 헛짓. 또한 많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헛짓.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나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구라를 믿지 말자. 영화평론가 출신으로 자기 영화를 평론가보다 더 멋지게 쓸 수 있는 사람의 영화 앞에서 주눅들지 않으려면 이 방법뿐이 없는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갈수록 이 영화 흉포해진다. 김지운 감독과의 대담에서 자기가 영화를 관념적 리얼리즘에다 미니멀하게 가려고 했다고 주장한 이 남자, 볼수록 수상해진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불협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을 본다는 것은 관객 된 입장에서 보자면 눈을 가린 뒤 옆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들려주는 유령의 성에 갇힌 것과 비슷한 경험일지 모른다. 화면이 미니멀한 시각적 이미지로 텅 비어 있을 때도, 영화는 끊임없는 도시의 소음과 일상의 소음으로 청각적 클로즈업 상태이고, 특히 류가 일하는 공장의 소음은 가히 살인적인 수위에 가깝다. 듣지 못하는 류에게 가해지는 외부인들의 목소리 역시 듣지 못하는 류 때문에 한껏 목청을 돋우고,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이 목소리 역시 폭력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갑자기 류의 시점숏이 들어서면 스토리도 소리도 뚝 끊기며 관객의 신경을 1cm쯤 더 늘여놓는다.

이전의 영화 <삼인조>에서 김민종이 카페에서 총을 난사하는 장면에 <아침이슬>과 <ich liebe Dich>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게 했던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는 아예 청각적 이미지가 시각적 이미지를 배반하도록 교묘히 그물을 쳐놓았다. 예를 들면 누나의 돌무덤을 만드는 등 뒤로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 장면도 그렇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유선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린다. “오빠! 오빠!”(유선이 죽어가며 류를 부르는 소리) 그러나 카메라는 유선을 후경으로 류를 전경으로 잡는다. “오빠! 오빠!”라는 유선의 비명은 일종의 청각적 클로즈업 상태인데, 이는 유선을 롱숏으로 잡은 카메라의 거리와는 매치되지 않는다. 또한 류의 시점에서 이 비명소리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불가능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면 이번에는 아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물 속에서 죽어버린 아이의 시신이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꽉 채우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던 화면은 묵음으로 변한다. 아이의 죽음-침묵의 의미는 류의 귀를 두드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산다는 것과 죽어버렸다는 것의 차이가 종이 한장이라는 것을 이토록 소름끼치게 느끼게 해놓고 감독은 또 자기 영화를 미니멀리즘이라고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니 박찬욱의 구라를 믿지 말자는 거자. “니가 무슨 A야 A. 니 혈액형은 B야 B”라던 의사의 구라도 믿지 말자는 거다.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은 어디로 보아서도 B급영화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톱스타 세명을 데리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제작비를 써서 CJ라는 1급 배급사의 줄을 타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을 B형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진짜 B급영화들은 C형 혹은 D형이란 말인가? 박찬욱, 그는 여전히 야심만만한, 충분히 자신의 스타일을 시험하는 A급 감독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는 오히려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한 박 감독의 위장전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연민 대신 이상한 유머

동진은 딸의 부검시에는 피눈물을 흘리다 류의 누나를 부검하는 자리에서는 하품을 하고 이미 전에 노동자를 해고한 적이 있는 우리 같은 인간이다. 사막처럼 메말라가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연민과 동정 대신 오히려 이상한 유머를 툭툭 던져놓는다. 신장의 고통으로 방바닥을 뒹구는 누나를 등 뒤에 두고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는 태연히 라면을 먹고, 그 신음소리를 착각한 옆방의 총각들은 자위를 한다. 이 장면은 피가 흘러서 잔인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태연히 팬하는 카메라가 지독히도 잔인하다. 박찬욱의 영화는 첫 영화부터 늘 관객을 웃기려 들었지만, 이번에는 지연과 배반의 전략을 써서 아예 웃는 낯으로 관객의 마음을 그어버린 것이다. 그 웃음은 류가 충혈된 눈으로 간이 야구장에서 배트 중심에 야구공을 맞출 때, 나중에 가면 야구장의 배트는 자신의 신장을 빼앗았던 삼인조 일당들에 복수하기 위한 무기로 변해버리고, 류의 야구연습은 실은 살인연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새어나오는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부조리의 늪이다. 게다가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아이스크림 통, 베스킨라빈스 통에 아이스크림 대신 신장이 담겨져 있고, 다시 이 속에 담긴 신장을 먹는 류라니. 눈에는 눈. 신장에는 신장. 역시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통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로 지독한 유머를 구사하는 감독 앞에서라면 ‘이 정도의 유머쯤이야’라고 관객도 쓰윽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마치 남들에게는 코미디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하는 내 자신은 아주 재수없던 어떤 날, 신이 선사했던 불운 앞에서 그냥 픽픽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던 날과 마찬가지 이치는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의 부조리한 웃음은 평범해보이는 주변의 이미지들을 한없이 낯선 삼천포의 맥락으로 빠지게 하고 마침내, 이렇게 변화한 독한 이미지가 다시 현실에 대한 전복력을 선동하는 내밀한 점성을 갖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에는 자꾸 음험한 선동의 냄새가 난다.

이미지의 이전, 확장, 그리고 대통합

아주 독한 이미지로 변모하는 운명을 위해 <복수는 나의 것>은 간단한 하나의 기관으로부터 시작했다. 신장. 누구의 몸에서나 노폐물을 거르는 장소로 존재하는 신장. 하지만 류의 누나 신장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불능의 장기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는 게 바로 결핍감이다. 박찬욱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있는 게 상실되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없는 게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인공들은 이혼을 하고, 애가 있다가 사라지고, 몸에는 없던 흉터가 생겨난다. 이전의 주인공들도 그랬었다. 그들이 지극히 단순한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저질렀던 인간적인 행동은 점입가경으로 운명의 춤을 추며 악마의 그것으로 변모하는데, 박찬욱 감독은 그것을 자주 ‘죄가 죄의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죄를 낳는 경지’라고 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고 싶은 이병헌의 소원은 결국 자살로 끝을 맺고, 누나의 맨몸을 닦아주는 류의 손은 누나의 시신을 묻기 위한 돌무덤을 파게 되는 경지. 결핍으로써의 신장이, 류의 몸에 틈을 만들게 되고, 이 틈 사이로 단무지 위에 오줌은 흐르고 결국 빈 페트병의 넘치는 잉여물로 무단 방류되는 경지. 결국 류는 당연히도 범인들의 신장을 먹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신장을 앗아간 이들과 합일에 이른다.

여기에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관통하는 자상의 이미지로 가로 금을 긋는다. 팽기사의 자해로 시작하여, 그의 흰 러닝 위에서 서서히 스며들던 붉은 피는 부검한 유선과 누나 시체 위의 메스가 전해주는 차가운 금속성의 검정 물로 바뀌게 되고 이윽고 동진의 양손에 류의 발목에 자상을 내면서 생을 마감케 하는 액체로 전이된다. 감독의 내공에 힘을 더하는 이러한 이미지의 변신과 대통합은 이 사회의 단단해보이는 외관에 메스를 가하는 차가운 금속성으로써의 비정함, 그리고 오줌으로 변화한 체액, 노폐물로써의 순정적 휴머니즘에 다름 아니다. 무심하게 흐르는 오줌과 피, 그 속에 흐르는 것은 누구의 신장도 거부하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냉기가 뿜어내는 독한 기운. 사실 이 사회는 화장실이 무용지물인 곳 아니던가.

그리하여 마침내 이러한 두 중심의 이미지를 십자가 삼아 <복수는 나의 것>은 짓다만 빌딩, 귀신같이 버티고 서 있는 마약쟁이 의사, 하체를 드러낸 노인, 꼬질꼬질 때낀 소파 속의 꽃들, ‘가시오’가 아닌 ‘멈추시오’로써의 불길한 녹색들, 방 안에 장식된 교통경찰 인형 등으로 스스로를 장식한 채, 그 즐비한 부정교합의 이미지들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복수는 나의 것> 속에 부딪히는 대한민국의 이미지들은 동냥질하는 가족을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 마냥 낯설고 기괴하다.

모두가 죽는다

결국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는다. 유선은 물에 빠져 죽고, 류의 누나는 자살해 죽고, 류는 베여 죽고, 동진은 찔려 죽고, 해고노동자 팽씨 가족은 음독으로 죽고, 무정부주의자였던 영미는 감전되어 죽고, 신장을 착취했던 못된 인간들은 맞아서 죽는다. 각자는 죽음에 다가감에 있어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 다르게 죽는다. 또한 그들은 이 사회 안에서의 위치가 어떻든 모두 죽는 시점에서 파닥거린다. 심지어 동진의 죽어가는 숨소리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 엔딩크레디트를 덮는데, 감전으로 몸을 떠는 영미의 파닥거림, 아랫도리를 벗고 덜덜 떠는 악당의 파닥거림은 흡사 실험시간에 개구리를 핀으로 꼽아서 눌렀을 때의 헐떡거림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죽어갈 때조차 생명의 마지막 뿌리까지라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그악스런 짐승성 말이다.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착각이 든다. 신이 죄를 만들었고 오히려 인간은 그가 만든 죄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들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유괴당하는 자와 유괴하는 자로 나누어져서 불협화음을 내지만, 이윽고 시스템 바깥을 벗어나면 신의 차원에서 똑같은 인간으로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스스로 붕괴되어가는 것이다. 영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지전능한 신의 시점숏, 즉 신의 손길 혹은 눈길을 은밀히 주인공들의 시점 안에서 박아넣지만, 그들은 그러한 시선이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으로서의 죄의식이 아니라 죄에 관한 의식으로서의 죄의식만을 가진 채,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믿지만 그 모두는 처절히 배반당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죽어가는 순간까지 왜 죽는지 모르며,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려 하다 고개를 빼어 물며 죽는다.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은 시체를 싼 쓰레기봉투의 클로즈업이다. 인간의 가장 관념적인 감각인 소리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물화된 쓸모없는 살, 시체 덩어리로 끝이 난다. 이로써 나는 명백히 깨닫게 된다. 빌어먹을, 이 죽음에 구원은 없구나. 부감도 하늘로 올라가는 크레인도 숏도 없고 그저 클로즈업된 쓰레기더미로서의 육신, 정말 신장은 신장이구나. 이 지독한 유물론적 냉소주의 앞에서 박찬욱은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구원도 순정도 깡그리 없애고 유유히 사라진다. 잔인한 신처럼. 인생은 싸구려고 신장은 비싸다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한국영화로부터 처절한 단절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이 별 다섯개와 별 하나를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평가의 문제를 넘어서 태도의 문제를 요구한다는 어떤 혐의를 벗기 힘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별이 은하수만큼 많든 적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수는 나의 것>이 과거 한국영화의 어떤 전통과도 스스로를 단절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박찬욱 감독이 이전 영화에서도 늘 소망했던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처럼 완전범죄를 남긴 예도 드문 것 같다. 이건 진짜 팬시한 연애담도 통쾌한 복수담도 눈물나는 멜로도 시원한 조폭영화도 아니다. 지나치게 생소해서 오히려 시대를 앞서버린 느낌마저 주는 영화는 감독 본인이 표방한 ‘하드보일드’답게 대한민국의 영화역사에서 가장 차가운 건조함을 성취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