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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이 던지는 질문을 숙고함- 오늘날 영화의 형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 <버닝>은 일종의 성장영화다. 한마디로 실패한 성장담. 그것이 영화 엔딩에서 종수(유아인)가 벤(스티브 연)을 아버지의 칼로 찔러 불태우는 장면에 대한 내 입장이다. 오해는 말라. 나는 <버닝>을 실패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은 오히려 그 반대쪽이다.

부서지는 아름다움

해미(전종서)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당장의 카드값도 해결할 수 없으면서 몇달을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는 해미의 행동이 철없는 짓으로 느껴졌다면, 그것은 당신도 리틀 헝거라는 이야기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삶은 리틀 헝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버닝>의 리틀 헝거들을 보라. 동생의 안부를 묻기 전에 카드값 얘기를 먼저 꺼내는 해미의 언니, 오랜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빚 얘기를 꺼내며 카톡에 열을 올리는 어머니, 그들에게는 경비원에게 시골은 잘 다녀왔냐고 안부를 묻는 벤만큼의 여유가 없다. 삶의 문제에 찌든 그들에게 그레이트 헝거의 꿈은 사치다.

동생의 말을 믿지 말라고 하던 해미 언니의 충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리틀 헝거에 불과한 자가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말할 때, 그것은 그저 허언증 환자의 나불거림에 불과하지 않을까. 해미는 현실과 조화될 수 없다. 그렇기에 <버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해미가 새가 되어 춤을 추는 장면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현실을 잊고 춤을 추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우리는 이창동이 도덕주의자로 불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공리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에 곧잘 끌리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해미의 춤은 ‘미적 무관심성’(칸트)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의 모든 것이라 불러도 무방하다(이창동 영화의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내가 <>에 관해 쓴 <영화의 힘, 기적의 체험>을 보라).

하지만 우리가 해미의 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작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녀가 춤추던 시간만큼은 세상은 그녀의 것이었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의 춤을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춤은, 그 아름다움은 이내 현실의 의해 부서지고 만다. 그녀의 춤을 위해 들려오던 음악(벤의 차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이 현실의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의해 밀려날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던 그녀는 좌절의 눈물을 흘린다. 자연에서 비롯되는 그 무심한 소리들이 이토록 야속하게, 잔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 현실의 해미는 아무 데서나 옷을 벗는 창녀 취급을 받아야 한다. 무산계급에게 그레이트 헝거를 위한 나라는 없다.

팬터마임에서 벗어나기

해미가 팬터마임을 하며 ‘없다는 것을 잊으면 된다’라고 했던 말은 그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메타포처럼 들린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기 위해 결핍된 현실을 잊는다. 집에 문제가 생겨 파주로 내려간다는 종수에게 문제는 늘 있는 거라며 친구의 문제 따위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버닝>을 두고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닌 청년 세대에 대한 영화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버닝>이 그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버닝>은 (특정 세대와 무관하게) 오히려 결핍된 현실을 망각하며 살아가려는 자들, 자신들의 삶이 팬터마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해버린 자들, 그래야만 수수께끼 같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자들, 그렇기에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력해진 자들에 대한 영화다. 그것은 특정 세대를 넘어선 지금의 삶의 태도다.

종수의 자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수는 ‘자폐적 쾌락’으로 현실에서 퇴각하려 한다. 이창동은 자위하는 종수의 모습을 ‘사각의 프레임’에 갇힌 것처럼 재현한다. 그것은 그가 소설을 쓰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해미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벌이던 종수의 두 번째 자위가 해미의 전화로 중단되었음을, 그렇게 종수가 현실로 소환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미의 전화 한통과 함께 종수는 폐쇄적 삶에서 끌려나와 미스터리한 세상과 접속한다. 벤의 유혹. 벤은 첫 만남에서부터 종수에게 소설가라니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나는 영화 후반부 종수가 벤을 추적하는 일련의 장면을 보면서 벤이 종수의 미행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헬스장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벤의 시선은 종수를 향했던 것이 아닌가? 종수는 벤을 몰래 뒤쫓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벤이 그것을 허락했기에(또는 유혹하기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기 위한 게임의 제물. 종수는 그렇게 벤이 제안한 게임의 일부가 되고, 더이상 해미가 사라지고 없음을 잊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대마초 장면 이후 종수는 행동하는 인물이 되어 팬터마임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팬터마임에서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라는 문제다.

벤이라는 원인

<버닝>은 종수의 현실 체험기이자 성장담이고, 또한 작가 입문기이다. 그렇다면 <버닝>의 엔딩은 종수가 경험한 미스터리한 현실에 대한 제 나름의 응답이라 말할 수 있다. 종수는 벤을 죽인 뒤 자신의 옷과 함께 불태운다. 그리고 알몸이 되어 어디론가 향하는 이 엔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버닝>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설명적이어서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 하나를 먼저 경유해야만 한다. 종수가 면접장에서 뛰쳐나오는 장면. 우리는 이 장면 이전에 대마초를 나눠 피우는 그날 밤에 종수가 꾼 꿈 장면을, 그리고 그 이후에 비닐하우스를 조사하는 종수의 행동을 본다. 종수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꿈꾼다. 벤의 욕망이 종수의 욕망에 녹아들며 변형된 꿈. 하지만 이어지는 면접장에서 종수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는 것은 불태우는 재미가 아니라 ‘쓸모없고 불필요해진 비닐하우스’임을 깨닫는다. 종수는 그 사실을 참기 버겁다. 그 직후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조사하고 자신과 벤을 대립적 관계로 위치시킨다. 종수의 행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선망 이후에 찾아온 시기와 질투, 무력감과 박탈감,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의 원인 자리 가까이로 벤을 끌어당기기. 해미의 실종과 관련된 사건들은 종수가 벤과 자신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행동한 이후에 찾아온다.

종수가 경험하는 세계는 해미의 고양이 보일과 유사하다. 실체는 모습을 감추고 그 흔적만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흔적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벤은 판단하지 않는 자연을 말했지만, 종수는 끊임없이 판단하기를 종용받는다. 우리는 종수가 해미의 실종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행위와 관련지을 때, 단서(시계, 고양이, 메타포로서의 비닐하우스 등)와 해석간의 괴리를 기억해야 한다. 실체와 단서, 실재하는 것과 실재한다고 믿는 것 사이의 분열(어쩌면 메타포는 이 분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단순히 종수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서와 해석 사이의 좁혀지지 않은 간극에도 불구하고, 이창동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종수가 극단적 행위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이 엔딩은 당혹스럽다. 이는 그 행위가 현실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어 발생한 당혹감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창동은 서사적 결함처럼 비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간극을 메울 의사가 없다. 왜냐하면 이창동이 원하는 것은, 이 좁혀지지 않은 ‘간극에도 불구하고’ 종수가 극단적인 행위를 벌이는 과정을 관객이 지켜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수가 벤을 죽이고 불태우는 행위는 어떤 분노의 표출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결단은 해미의 실종에 대해 그 책임을 벤에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벤에게 그 책임을 씌우는 것은 분노의 폭발을 합리화하기 위한, 또는 그 행위에 심리적 동력을 얻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종수는 우물에 갇혀서 떨고 있을 해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벤을 향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무력감과 박탈감 속에서 해미의 실종과 관련된 단서들을 해석한다. 그 감정의 그물망에 걸린 벤은 해미의 실종이라는 사건의 ‘원인’ 자리에 앉게 된다. 그 이후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어떤 소설을 쓸 수 없다던 종수는 벤이라는 답을, 또는 벤이라는 원인으로 풀어낸 서사를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단서에 비해 과도한 해석의 결과로서 벤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영화 속 미스터리한 세계 앞에서, 종수가 구성한 서사와 <버닝>의 서사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우리는 종수가 벤이라는 원인을 통해 구성한 인과율적 서사의 끝에서 그 속에 내재한 ‘맹목성’을 마주하게 된다. 종수의 극단적 행위에서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맹목성 때문이다. 종수가 이 맹목성에 눈을 감는 반면, <버닝>은 그것을 돌출시킨다. 결국 종수가 벤을 중심으로 인과율적 서사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버닝>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서사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의 허상일 수 있다면 종수의 소설은, 또는 그의 성장은 과연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서사의 역사는 모호한 세계에서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인과율적 서사로 그 모호성을 가리는 것임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이창동은 그 오랜 관습이 ‘지금의 미스터리한 현실’을 재현하는 데 과연 유효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버닝>은 이창동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를 차용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던 시네마로 도약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인과율적 투명성에 대한 의심의 결과가 아닐까? 또는 용산참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정겹게 가족 모임을 하는 벤의 가족처럼, 사회적 모순의 비판적 재현물마저 문화적으로 소비되며 그 의미마저 쉽게 휘발되는 시대에 영화의 형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결과이지 않을까?

스스로를 불태우기

종수가 벤을 원인의 자리에 앉혀 불태우는 장면에는 <버닝>이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스스로 절멸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즉, 종수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 자체를 불태운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해미는 자신의 구원자를, 아버지는 자신의 분노를 실현해줄 아들을 얻는다. 흥미로운 것은 벤이다. 벤은 죽음의 순간에서야 ‘내면을 가진 인간’ 같은 얼굴을 갖는다. 신의 위치에 서서 제물의 희생을 즐기던 벤은 정작 자신이 제물이 되어 불태워짐으로써 그가 (말)했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 종수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등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종수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세상의 모든 짐을 불태우고 알몸이 된다. 어머니의 빚을 대신 갚아주듯, 그는 벤이라는 원인을 제물 삼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짐을 불태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던져졌던 세계와 절연한다. 그렇다면 이제 종수의 어깨는 좀 가벼워졌을까?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창동의 인터뷰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낮과 밤, 남과 북, 실재와 믿음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수는 모든 것을 불사르고 그 경계에 선다. 그는 또다시 미스터리한 세계를 마주할 것이다. 그 세계를 겪은 뒤 그는 어떤 글을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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