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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의 사실적 스펙터클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2-04-24

TV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상은 죽이기

Band Of Brothers HBO 매주 토요일 밤9시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순위: 3. 군대이야기 2. 축구이야기 1.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고생 공감대 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 된다. 여자들의 화장품 사용기나 주부들의 육아일기만큼이나, 군대이야기는 경험자와 무경험자의 격차는 크고 공감대 파워는 크다. 숫자만 많을 뿐 컬트적인 집약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밴드 오브 브라더스. 동지애, 혹은 전우애. 좀 닭살 돋는 단어이긴 하지만 군인들에게는 동지애와 결속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특히나 실전에 나갔을 때는 그 절박한 순간을 같이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엮이게 된다. ‘전방에 나갔는데 이랬더라’라고 하면 ‘수색을 나갔는데 저랬더라’ 하고 밑도 끝도 없이 얽히는 이야기의 향연을 듣다보면 한국 남자들에게 군대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옛 애인급’이 맞는 것 같다.

2차대전. 미국 군대는 공수부대를 결성한다. 초강력 훈련을 시켜서 직접 적진에 정예부대를 투하하는 것이다.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해서 올망졸망 모인 군인들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임무에 투입된다. 이지 중대 대원들은 성질 더러운 상사부터 시작해서 뭐든지 최전방에 배치되는 등 모든 고생을 바가지로 한다. 그러나 단지 고생이라 하기엔,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피말리는 순간들이다. 이들의 심성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정신적 파탄을 막아주는 것은 오직 하나, 옆의 전우들이다. 이지 중대의 대원들은 전투를 거듭하며 친구를 잃고, 후배를 잃고, 상사를 잃어가면서 오로지 전쟁의 끝을 보기 위해 싸워나간다. 시청자는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이들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지 중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오마하 부대를 지원한다는 대목에 오면 머릿속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난다. 아항. <라이언 일병 구하기>. 게다가 제작자 이름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나오면 더더욱 이 심증은 굳어진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물결을 타고 또 한건 해보자는 거구나. 이것은 반 정도는 사실이다. 10부작 총 제작비가 1억2천만달러. 편당 1천2백만달러가 된다. 미국에서도 영화 몇편 만들 수 있는 돈을 TV시리즈 하나에 들인 것이다. 머리가 멍해질 만큼의 초대형 제작비를 들인 드라마답게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화면 곳곳에 돈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냥 돈이 아니다. 진짜로 보이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들고 나서 이 스펙터클을 TV에서도 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정적인 와중에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촬영감독 레미 아데파라진(영화 <엘리자베스>)과 TV 사이즈 내에서 최대한의 거대 규모를 표현할 줄 아는 조엘 랜섬(<엑스 파일> 시즌 4, 5), 두 촬영팀이 번갈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화면의 박진감은 ‘진짜 전쟁’이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의 진실- 아무리 돈 들이고 애썼다고 하더라도 잘못하다가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좋게 말해 붕어빵 혹은 나쁘게 말해 짝퉁이 될 수도 있었다. 거칠은 초록색 묻은 푸르스름한 화면발과 직접 전장에 들어간 듯한 카메라워크, 전쟁 자체의 스펙터클, 한순간 조용해지는 유럽 전선의 대자연이 보여주는 0.1초 사이의 서정성, <스타워즈>의 제국군마냥 멀리서 죽어가는 독일 병사들- 그 모든 것이 ‘포스트-라이언 일병 구하기 현상’이다.

곳곳에서 묻어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붕어빵이 아님을 보여준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수많은 전선에서 실제로 벌어진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원작자 스티븐 앰브로즈가 몸으로 뛰어다니며 수집한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 실제 상황, 실제 처지, 실제 심정에 집중한다. 거창한 대의명분을 강조하기보다는 대의명분에 끌려다닌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력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사뭇 ‘감동 안 해줄 거야?’의 자세를 지닌 데 비해,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지…’ 하는 자세를 고수한다. 머리 모양도 비슷비슷하고 얼굴도 똑같이 시커멓게 칠한 공수부대원들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세세하게 이야기해준다. 그 현장감이야말로 스티븐 앰브로즈가 전해주는 핵심인 것은 틀림없다. 남들이 가길래 가야 할 거 같아서 군대 갔다, 언제 죽을지 몰라 새파란 신참을 챙겨줄 수는 있어도 예뻐해주지는 못했다, 졸다가 아군을 적으로 알고 찔러버렸다, 독일군과 잤다는 이유로 머리 깎이고 린치당한 여자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는데 기분이 묘했다 등등.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기에는 아릿할 정도의 사실감으로 차 있다. 그 사실감이 경험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군대라는 동질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진짜 ‘결속’이다. 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