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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퀴즈프로그램 <도전! 골든벨>
2002-04-24

범생 장원보다 친구의 응원을

<도전! 골든벨> KBS1 일 저녁 7시 10분

386세대들에게 사춘기 10대의 학창시절을 상징하는 문화코드를 TV에서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젊음의 행진, 영11, 사랑이 꽃피는 나무, 고교생 일기, 우리들의 세계,….’

하지만 만약 나에게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이 이름들 맨 앞에 <장학퀴즈>를 놓고 싶다. 10대 때 ‘범생’이었다는 티를 내려고 이 프로그램을 고른 것은 아니다. <장학퀴즈>는 외형으로는 너무나 단순한 형식의 퀴즈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곰곰히 돌이켜 보면 그 속에는 교복과 대학입시로 대표되는 7, 80년대 고교 문화의 다양한 단면들이 담겨져 있었다.

빳빳한 컬러의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 4명이 나란히 앉아 상식을 겨루는 모습은 마치 사원의 신성한 종교의식처럼 경건했고, 문제 푸는 중간 간간히 긴장을 풀기 위해 미래의 꿈과 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흠잡을 데 없이 진지하고 절도가 있었다. 군국주의 문화가 배어 있는 교복의 분위기만큼이나 경직된 모습이었지만, 방송을 보는 부모들에게는 마음속으로 그리던 똑똑하고 단정한 모범생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MBC의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장학퀴즈>는 발랄한 개성보다 일사불란한 통일을, 개인의 성취보다 학교와 지역의 명예를, 그리고 현실에 대한 질문과 도전보다는 무조건적인 순종과 존경을 원했던 기성세대의 소망이 투영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장학퀴즈>의 전성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80년대 중반 이후 획일화된 검은 교복이 사라지면서 사라졌다. 10대들의 문화가 주류 문화로 힘을 갖게 된 90년대에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획일적인 진지함과 인위적인 아카데미즘으로 묶기에 10대들의 욕구는 너무나 다양해진 것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 KBS1TV에서 방송되는 <도전 골든벨>은 얼핏 과거의 <장학퀴즈>가 다시 부활한 듯한 인상을 준다. 고등학생들이 학교의 명예를 걸고 퀴즈에 나서는 것이나, 장학금이 우승의 상품으로 제공되는 구성도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색상과 모양이 조금 다양해지기는 했지만, 사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나서는 것도 익숙한 모습이다. 외양의 특징만 보면 <도전 골든벨>은 ‘포장만 조금 다른 장학퀴즈의 아류’로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70년대 <장학퀴즈>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장학퀴즈>에 나온 학생들이 학교를 위해 선발된 대표라는 ‘엘리트’의 성격이 강한 반면, <도전 골든벨>에 나오는 학생들에게서는 그런 강요된 선민의식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4명 대 100명이라는 숫자적인 차이도 있지만,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70년대의 고등학생들에 비해, 2002년의 학생들은 같은 교복이라도 너무나 자유롭다.

삐딱하게 쓴 모자, 끝까지 살아남으라며 옷과 모자에 잔뜩 붙여준 친구들의 이름표는 이제 <도전 골든벨>에서만 접할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됐다. 정답을 적는 화이트보드에 가득 적힌 친구들의 격문과 스스로를 격려하는 낙서들 역시 주눅들지 않는 학생들의 밝은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70년대 386세대들이 주장원, 월장원, 기장원 등에 대한 부담을 가졌다면, 2002년의 <도전 골든벨>의 학생들에게서는 방송에 나온다는 설레임과 부담없는 도전의 욕구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서는 승부의 비정함보다는 떠들썩한 학생들의 축제 같은 분위기다. 제작진도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프로그램 곳곳에 선배격인 <장학퀴즈>에서 갖고 있던 경쟁의 무게를 덜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문제 탈락자를 구제하기 위해 농구 자유투 경기를 한다든지, 선생님들이 참여해 함께 문제를 푸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제작진들은 다양한 상식에 도통한 ‘애늙은이 만물박사’의 탄생보다는 탈락의 고비에 직면한 학생과 이를 지켜보는 친구들간에 오가는 무언의 교감을 보여주는 데 더 공을 들인다. 문제를 2∼3개 남겨놓고 답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화이트보드에 “얘들아 미안해”라고 적은 채 일어나는 학생과 그를 살짝 물기가 고인 눈으로 바라보며 “괜찮아”를 연호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욕심과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그들만의 생기와 진지함이 있어 좋다. 오히려 50문제를 다 맞히고 골든 벨을 울리는 ‘승자’보다 도중에 좌절한 ‘패자’를 더욱 아름답게 다루는 것이 바로 2002년에 방송되는 고교생 퀴즈프로그램의 모습이다.

앞으로 20년 뒤, <도전 골든벨>에 출연했던 학생들이 필자와 비슷한 나이가 됐을 때 그들은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생각할까? 적어도 386세대의 아저씨가 <장학퀴즈>를 돌이켜보며 느꼈던 씁쓸했던 입맛과는 다른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