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클로스에 비하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스카 수난사’는 과대평가됐다. <길버트 그레이프>(1993)로 연기상 후보에 처음 올랐던 디카프리오는 네번 고배를 마시고 다섯 번째 도전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글렌 클로스는 <가프>(1982) 이래 여섯번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되고도 한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데보라 커, 델마 리터와 동률 기록이며, 글렌 클로스는 현재 살아 있는 배우 중 오스카를 받지 못한 최다 후보 지명 배우다. 2018년까지 그가 받은 2개의 골든글로브, 3개의 에미상, 3개의 토니상은 모두 TV나 무대와 관련된 트로피이며, 미국배우조합상에서도 호명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디카프리오처럼 오스카 후보에 오를 때마다 전세계 네티즌이 ‘인터넷 밈’을 만들며 놀고 매체에서 그의 수상 여부를 점치느라 호들갑을 떠는 일도 없었다.
여성들이 요구받은 조력자로서의 인생에 대하여
2월 27일 국내 개봉 예정인 <더 와이프>는 글렌 클로스가 일곱 번째 오스카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글렌 클로스는 생애 첫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미국배우조합상 여우주연상 등을 받았고 이번 오스카에서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더 와이프>는 여성의 글은 아무도 안 읽는다는 60년대 문학계의 분위기와 타협하고, 자신보다 재능없는 남편 조셉 캐슬먼(조너선 프라이스)의 뒤에서 조용히 조력자로 살아온 조안 캐슬먼의 삶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보여준다. 조안은 명백한 문학계 성차별의 희생자지만 극중 부부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기자에게 한 말처럼, “그냥 피해자라기보다 훨씬 흥미로운 인물”이다. 남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을 때 그의 눈에는 성취감과 공허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극 말미에 그가 보여준 선택은 어느 쪽에서 봐도 다면적이다.
영화 속 캐릭터에서 글렌 클로스가 배우로서 과소평가된 역사를 읽으려는 시도는 새삼스럽지 않다. 글렌 클로스의 골든글로브 수상이 영화 속 상황과도 닮았다는 <데드라인> 기자의 말에 배우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나쁜 비유가 아니다”라고 반응한 바 있다. 글렌 클로스가 유독 상복이 없던 이유를 정교하게 증명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의 캐릭터들이 전통적인 여성상과 거리가 멀었던 것은 분명하다. <뉴욕타임스>의 알레산드라 스탠리는 “도널드 플레젠스보다 섬뜩한 나치 장교, 앤서니 홉킨스의 한니발 렉터보다 더 무서운 살인마는 없다. 하지만 웃는 글렌 클로스보다 무섭게 죽은 배우는 없었다”고 글렌 클로스의 이미지를 요약했다. <위험한 정사>(1987)는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일 때문에 알게 된 여자 알렉스 포레스트(글렌 클로스)와 잠깐 섹스를 즐겼다가 지독한 스토킹을 당하는 변호사 댄 갤러거(마이클 더글러스) 시점의 ‘공포’영화다. “우린 지난 파티에서 서로 끌렸다”든지 “우린 곧 죄를 지을 수도 있다”며 먼저 적극적으로 나선 알렉스는 댄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점점 정신병리적 집착증을 보인다. 댄의 가족이 기르던 토끼를 죽이고 끓는 물에 삶는 장면은 ‘bunny boiler’(토끼를 끓이는 사람, 한번 섹스한 남자에게 끈질기게 집착하는 여자를 일컫는 속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위험한 관계>(1988)에서 글렌 클로스는 바람둥이 비콩트(존 말코비치)가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투르벧 부인(미셸 파이퍼)이나 숫처녀 세실(우마 서먼)과 대비되는, 15살부터 사교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메르퇴이유 부인이었다. “남자를 지배하고, 여자에게 복수하는” 그는 반드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다. 알렉스 포레스트와 메르퇴이유는 오스카 후보에 올랐지만, 남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영화 말미에 응징되는 악녀들은 시상식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심지어 글렌 클로스는 가족영화 <101 달마시안>(1995)에서도 달마시안의 가죽을 벗겨 코트를 만들려는 탐욕스러운 크루엘라였고, TV영화 <두 여자의 사랑>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뜨게 된 레즈비언 간호 장교 마가렛 캐머마이어, <데미지> 시리즈의 당당한 변호사 패티 휴즈 역시 고분고분한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글렌 클로스는 “남성적인 자아가 성공적이고 인정받는 파트너를 갖는 데 꼭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힘들 수 있다는 걸 나도 받아들인다. 하버드 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남녀 모두 전통적인 여성상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더라”(<가디언>)고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봤다. 여기에 상복 없는 이미지로 인터넷에서 화제몰이를 하는 것도 디카프리오 같은 남성 스타가 독식했다.
<위험한 정사>의 알렉스를 다시 돌아보며
하지만 ‘이제 글렌 클로스도 상을 받을 때가 됐다’는 식으로 이번 오스카를 전망하는 것은 <더 와이프>에서 그가 보여준 호연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그의 일곱 번째 오스카 도전이라는 사실을 지워도, 글렌 클로스의 과소평가된 역사와 극중 캐릭터가 어쩔 수 없이 겹친다는 점을 배제해도, <더 와이프>는 마땅히 아카데미 수상에 걸맞은 작품이다. “경쟁자들에 비해 덜 과시적인 역할을 연기했고, 이는 시상식에서 보통 불이익을 받는다. 그에게는 화려한 명연기를 펼칠 신도 히스테리도 없지만, 영화 연기에 대한 레슨을 제공한다”는 <버라이어티>의 평가는 일리가 있다. 평생 순종적으로 살았지만 결혼 생활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고 끝까지 남편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져가는 조앤은 평면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더 넓은 범주의 여성들의 삶, 그리고 욕망과 조우하는 글렌 클로스의 입체적인 연기는 연기와 현실을 완벽히 분리하기 어려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는 배우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부모님은 18살 때 결혼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훌륭한 의사가 됐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승화시켰다.”(<뉴욕타임스>) 또한 “난 내가 연기한 흥미로운 여성들이 매우 자랑스럽다. 오스카를 받지 못한 것이 내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면, 나는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기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접점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든다. 그렇게 서로의 영혼이 이어지는 것을 보는 일이 짜릿하다”(<데드라인>)는 글렌 클로스의 태도는 상복 없는 배우를 향한 세간의 동정 어린 시선도 뛰어넘는다.
그리고 하나 더, <더 와이프>로 재조명된 글렌 클로스의 궤적은 미투(#MeToo)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입는다. 글렌 클로스는 최근 <버라이어티>의 팟캐스트 방송 <스테이지크래프트>에서 “<위험한 정사>의 알렉스 포레스트는 지금 시대에 보면 보다 희생자로 여겨질 거라 본다”고 언급했다. 당시 이 영화는 헌신적인 엄마가 싱글 여성을 죽이는 데 성공, 악을 처단한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로 명백히 80년대 미국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반영하지만, 그가 성적 학대를 받은 과거에 집중하면 다른 텍스트가 읽힌다는 것이다. 동시에 글렌 클로스는 최근 <더 와이프>의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한 제인 앤더슨이 각본을 쓴 연극 <소녀의 엄마>에서 잔 다르크의 엄마를 연기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뮤지컬 <선셋 대로>의 영화 버전을 만드는 것을 꿈꾸는”(<데드라인>) 등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여성 서사 구현에 힘쓰는 대표적인 배우다. <더 와이프>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글렌 클로스가 남긴 소감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자매애를 발휘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여성들은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요구당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성취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꿈을 좇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