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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 컬트 <총알탄 사나이>
2002-05-08

웃다, 그리고 웃는 나를 내가 비웃다

낯선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요즘엔 영화만큼 일반적인 관심사도 없으니까. 그러다 코미디영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상대방이 채플린을 좋아한다고 하면 방긋 웃으며 “저두요” 대답한다. 그순간 내 옆에는 점선으로 된 말풍선이 생긴다. ‘그래 잘났다. 이거지 흥, 나는 ‘못말리는’ 시리즈나 좋아한다. 어쩔래, 아예 버스터 키튼을 좋아한다 그러지, 쏴버리게.’ 자격지심이다.

나, 채플린 좋아한다. 정말(정말이라고 우기는 걸 보니 거짓말이군). 그러나 비디오가게에 가면 언제나 채플린이 꽂혀 있는 ‘고전’, ‘특선’ 코너에서 시작해 <아메리칸 파이3> 따위를 집는 것으로 끝난다. 바보! <아메리칸 파이3>는 아직 제작도 안 됐잖아. 물밀 듯 밀려올 후회가 빤히 보이지 않니? 그래도 집는다. 나는 왜 코미디영화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도 ‘(그)혈관에는 언제나 페이소스가 흐른다’는 위대한 코미디가 아니라 허접한 농담범벅인 코미디를. 아마도 위대한 철학자일 베르그송이 연민이나 감동이 배제된 희극성은 순수한 지성에 호소한다고 했으니 나는 대단히 지성적인 사람이군. 음하하하, 하, 하.… 정말 구차하다. 쩝.

아무리 단순무식한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해도 <못말리는 드라큐라>나 (스탠리 큐브릭의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아시겠지), <롱플리 어큐즈드> 같은 영화를 보는 건 좀 괴롭다. 람보가 신은 토끼모양 털신에 헤헤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이것들이 관객을 저능아로 아나?’라는 불쾌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말 분노가 치미는 건 “<총알탄 사나이>나 ‘못말리는’ 시리즈 수준의”라고 ‘없어 보이는’ 코미디 일반을 싸잡아 욕하는 코멘트를 발견할 때다. <총알탄 사나이>는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코미디영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유치하다. 주변을 봐도 옛날 애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드레빈 경사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여자 가슴(꼭지도 선명한) 모양의 기름탱크 두개가 화면을 스쳐가고, 안전한 섹스가 최고라며 거대한 콘돔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부둥켜 안는 남녀 커플을 보는 건, 그리고 그런 장면을 보고 실실 웃는 나를 보는 건 정말 ‘멍청하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실컷 웃고 나서 웃는 너 자신을 향해 (비)웃는다”고 말했다지.

창피한 줄 모르고 주저없이 갈 데까지 가는 영화를 보는 건 자이로드롭을 타거나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비슷한 쾌감을 주는 것 같다. 죽음이건 대책없는 무례함이건 현실에서 용납되지 않는 욕망이긴 마찬가지니까. 내 경우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내부 검열을 한 다음 대사를 읊어야 하는 일종의 직업적 강박이(취재원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고 “정신나가셨군요”라거나 “놀구 있네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렇게 멍청하고 무례한, 그러나 즉흥적인 욕망에 충실한 코미디에 대한 집착을 키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총알탄 사나이> 이후의 이른바 패러디영화들이 대체로 시시껄렁했던 건 자극의 실무율 법칙에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의 프랭크 드레빈(레슬리 닐슨)처럼 나를 대신해 마음껏 무례하게 굴어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별로 없었기 때문 아닐까.

넘어지고 자빠지는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이제 슬랩스틱의 내면화도 진행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친구와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때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친구를 보면 그 친구가 다섯 걸음 앞의 기둥에서 그 자세 그대로 부딪혀 기절하는 장면이 필름 돌아가듯 떠오른다. 그리고는 혼자 좋아서 실실 웃는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친구가 뇌진탕이라도 걸리길 바라다니, 내가 무섭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