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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앉아서,누워서
2001-03-23

게임과 자세

게임은 놀이다. 일이나 공부와는 달리 좋아서 하는 일이고,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세가 편안해야

한다. 나처럼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사람은 특히 그렇다.

하지만 모든 게임을 누워서 할 수는 없다. <철권> 같은 대전 액션 게임은 앉아서 해야 한다. 실제 얻어맞는 것도 아니면서 하다 보면 열이

오르고, 치열한 심리전에 골치도 아프다. 느긋하게 누워서 할 게재가 아니다. 미국 오락실에서는 서서 하게 되어 있지만 대전 액션 게임은

역시 한국 오락실처럼 앉아서 하는 게 좋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 역시 누워서 못한다.

건슈팅 게임이라면 서서 해야 한다. 앉아서 하면 뭔가 어색하다. 저격수처럼 바닥에 배깔고 누워서 쏘기까지야 못하지만, 의자에 뻘쭘히 앉아서

총을 쏘는 것보다는 두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버티고 서서 건맨이라도 된 것처럼 폼을 잡아보는 게 제맛이다. 뒤통수에 꽂히는 구경꾼들의 시선도

앉아있을 때보다 덜 부담스럽다.

누워서 하기 제일 좋은 건 역시 롤 플레잉 게임이다. 롤 플레잉 게임의 플레이 시간은 짧으면 3, 40 시간, 길면 한 100여 시간까지

된다. 비장하게 마음 먹고 꼿꼿하게 앉아서 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느긋하게 누워서 하는 게 더 좋다. 물론 PC게임이라면 울며 겨자먹기로

앉아서 해야한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누워서 게임을 하려면 우선 환경이 정비되야 한다. 제일 좋은 건 아예 침대 발치에 TV를 세팅하는 것이다. 비디오나 TV 드라마를 볼 때도

이 세팅이 가장 이상적이다. 혼자 쓰는 TV가 아닌 경우는 이 방법이 불가능하다. 이 때는 염치불구하고 게임할 때마다 이부자리를 들고 나가

TV 앞에 까는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필요한 건 두툼한 베개다. 없으면 보통 베개를 두개 준비한다. 일단 한번 누우면 꼼짝하기 싫어지기 때문에 그밖에도 필요한 건 미리

다 챙겨둬야 한다. 우선 식량이 필요하다. 과자나 빵, 오징어나 강냉이 등 입맛에 맞게 알아서 준비한다. 이온 음료나 쥬스, 아니면 생수

등 마실 것도 필요하다. 게임 공략집도 고개를 베개에서 떼지 않고도 손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챙겨둔다. 다 준비되면 눕는다.

일단 누우면 자연스럽게 자세가 나온다. 게임 패드를 양손으로 쥐고 배의 가장 두터운 부분에 기대듯이 올려놓는다. 배의 주름 부위를 잘 맞추면

꽤나 안정적으로 자리잡는다. 그냥 패드가 아니라 ‘그립 콘트롤러’라면 더 좋다. 한 손으로 플레이할 수 있어서 공략집을 보거나 군것질 거리를

집을 때 흐름이 끊길 필요가 없다. 이쯤 되면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좋은 게 누워서 게임하기다.

누워서 게임하기의 단점이라면 부모님이나 배우자, 애인한테서 구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정도야 마음만 모질게 먹으면 극복해낼 수

있지만, 하다가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다. 전투가 조금만 늘어져도, 시나리오가 조금만 구태의연해도 곧장 꿈나라로 가버린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면 된다. 게임은 하루에도 몇 편씩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다른 모든 엔터테인먼트와 마찬가지로 이중 8, 90%는 쓰레기일

뿐이다. 이런 게임에 일일이 시간을 낭비하다가는 정작 좋은 게임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 게임하다 졸리면 잠을 쫓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한숨 자고 일어나 다른 게임을 시작한다. 자려는 의지를 이겨내지 못하는 게임이라면 어차피 별볼일 없기 때문이다.

박상우 /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