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인 작품,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리얼한 작품이다.” 안카 다미안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더 아일랜드>에 대해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해체, 재해석한 뮤지컬 애니메이션 <더 아일랜드>는 얼핏 실험적인 작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전작 <환상의 마로나>에서 개의 일생을 우주적 관점으로 풀어냈던 안카 다미안 감독은 이번엔 인종차별, 난민, 환경오염 등 첨예한 사회문제들을 상징적인 이미지와 아름다운 노래로 담아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표현방식이다.
감히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채로운 형식들을 사용하고 이를 과감하게 충돌시키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상징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이런 은유와 상징들을 하나도 몰라도 상관없다. 관객이 느끼는대로, 보고자 하는 대로 본다 해도 길은 열린다.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는 관객들이 만들어나간다고 해도 좋겠다. 자전적 이야기와 실험적 형식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였던 두 번째 장편 <나의 저승길 이야기>(2011)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모은 안카 다미안 감독이 부산을 찾았다. 데뷔작 <크로싱 데이트>(2008)부터 근작 <환상의 마로나>(2019)까지 안카 다미안 감독은 늘 작은 우주를 창조해왔다. 혁신적인 시각형식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한편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안카 다미안의 목소리를 전한다.
-코로나19로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부산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첫 장편 <크로싱 데이트>(2008)부터 전작들이 꾸준히 초대 받았다. 무엇보다 <환상의 마로나>(2019)를 사랑해주신 한국관객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아직 영화제 일정 외 부산을 제대로 즐기지 못해 아쉽다. 그럼에도 영화의전당에 몰린 관객들을 보니 왠지 나도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대단하다.
-<더 아일랜드>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재해석한 뮤지컬 형식의 작품이다.
=루마니아 뮤지컬 중 <젤루나움>이라는 작품이 있다.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작품인데 원작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홀로 외톨이가 된 이야기를 다룬다면 <젤루나움>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서 영감을 받아서 로빈슨 크루소를 이렇게 재해석 해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거기에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5) 식의 풍자적인 코미디를 더하고, 정서적으로는 외계 행성에 떨어진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다양한 요소들 섞은 포스트모던적인 접근이라고 보면 된다.
-미처 다 읽어내기도 어려울 만큼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물이 금으로 바뀌고, 로빈슨 크루소가 날아다니는 등 환상적인 상상력이 더해졌다.
=맞다. 전체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과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나 사건으로 그걸 전달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다양하게 가져가보려고 했다. 현대미술적인 요소, 비주얼 아트,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등 재료도 달리해보면 더 풍성한 충돌이 가능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떨어진 섬은 격리된 섬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고 공감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연결되어 있다는 기쁨, 교감하는 기적들은 물질 만능주의의 바쁜 세상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점차 쓰레기처럼 내버려진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순간들을 다시 되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더 아일랜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상의 여행을 한번 따라가 보는 작업이었다.
-서로 다른 질감의 형식들을 뒤섞는 등 비주얼 아트적인 요소가 특히 강하다.
=<환상의 마로나>와는 다른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환상의 마로나>가 어디까지나 작화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톤을 다채롭게 써보는 거였다면 <더 아일랜드>는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아예 다른 형식들로 확장해보았다. <더 아일랜드>의 세계를 바탕으로 보드게임, 북 클립을 제작했고 VR 포맷으로도 제작하려고 해봤다. 궁극적으로는 <더 아일랜드>라는 증강현실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봐도 좋겠다. 여기에 비주얼 아트냐 애니메이션이냐는 이름표를 붙이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본다. 경계를 넘나들 때 폭발하는 것들이 있다. <더 아일랜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걸 굳이 말로 정리하자면 삶의 아름다움, 그리고 즐거움에 대한 공감이다. 예를 들면 찰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한 가지 재료를 가지고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어린 아이가 된 기분으로 만들었다. 그 시절에 허락됐던,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특별해질 수 있는 재미들을 함께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한편으론 인종차별, 난민문제, 환경오염 등 범지구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다.
=모티브를 얻은 <젤루나움>과 가장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와 같은 사회적인 주제들이 녹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이건 메시지를 위한 작품이 아니다. 굳이 메세지를 하나로 좁혀본다면 이런 문제들을 다 뛰어 넘은, 소통에 대한 필요성일 것이다. 2년 전 선댄스 영화제에서 소수자에 대한 영화를 봤는데 그 때 반응을 접하며 식민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유럽이 이민자를 대하는 방식도 모순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명제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계급이 부여되고 있다. 유럽으로 건너오는 보트피플을 찍는 사진작가가 있는데, 작품 속 로빈손 크루소의 디자인은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로빈슨 크루소가 사는 섬과 사이즈만 다를 뿐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게 있다면 혹은 작품이 꼭 말해야 하는 게 있다면 오직 하나,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물의 이미지, 연금술, 새와 기하학적 무늬 심지어 아이패드와 하와이안 셔츠까지 상징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숨은그림찾기라고 느껴준다면 좋겠다. 중요한 건 놀이다. 창작자 입장에서 많은 의미와 상징들을 해체하기도 하고 녹여내기도 했지만 그걸 꼭 찾아낼 필요는 없다. 가령 내가 익숙한 문화적 코드를 삽입했는데 그걸 지금 젊은 관객들이 얼마나 읽어내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말하자면 내가 압축하기 버튼을 누르긴 했지만 여러 분이 굳이 압축풀기 버튼까지 누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 해석을 하고 싶다면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시냐고 묻고 싶다. 그럼 된다. 아니라면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저 휴양지 선배드에 누운 것처럼 긴장을 풀고 보셨으면 좋겠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무언가 느껴지신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건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상상이다. 만약 꼭 질문과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면 여러분 각자의 천국은 어떤 모습일지 한번 상상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