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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05-23

어두운 미래, 혹은 잔인한 현재

리들리 스콧, 폴 버호벤, 스티븐 스필버그, 크리스천 더과이, 게리 플레더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블레이드 러너>,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옮긴 <토탈 리콜>, <세컨드 버라이어티>를 영화화한 <스크리머스> 그리고 <임포스터>에 이어 올 여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개봉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이 담긴 필립 K. 딕의 중단편 선집이 갑자기 나온 이유의 하나는, 아마도 스필버그일 것이다. 요즘의 복고 붐도 있지만, 스필버그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필립 K. 딕의 소설을 국내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각각 <마이너리티 리포트> <죽은 자가 무슨 말을> <사기꾼 로봇>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3권의 중단편 선집은 그래서 반갑다. 1930년에 태어난 필립 K. 딕은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광장공포증, 심박급속증, 신경쇠약, 편집증 등에 시달리며 한때 CIA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캐나다로 도피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63년 국내에도 번역된 <높은 성의 사나이>로 휴고상을 받았고, 82년에 사망했다. 영화 같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스위블> <물거미> <완벽한 대통령> 등 8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의 <블레이드 러너>와 <토탈 리콜>의 문제의식을 여전히 엿볼 수 있는 작품은 <우리라구요!>다. <우리라구요!>는 화성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복제인간이 자꾸만 지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지구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죽이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복제인간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화성에서 귀환한 영웅인 자신들을 죽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 ‘필립 K. 딕만큼 인간의 자아정체성을 집요하게 탐구한 작가도 없다’는 말처럼, 그의 소설은 늘 인간의 자리와 정신의 너머까지 파고든다. <퍼키 팻의 전성시대>에서 종말 이후 폐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퍼키 팻’이라는 인형게임에 열중한다. 가상의 현실에 빠져, 현실을 잊어버리려 한다. 냉소적이고 암울한 이 작품들에 비해 <그래, 블로벨이 되는 거야!>는 희극적이다. 적군인 블로벨 진영에 침투하기 위해 원생동물로 변신했던 조지는 전쟁 이후에도 블로벨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자 절망한다. 인간이 되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조지는 그러나,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공장을 블로벨의 행성에 짓기 위해 영원히 원생동물의 모습을 택한다.

필립 K. 딕의 소설은,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자신의 생각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안도감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시게 됩니다’라고 눙을 치는 <스위블>이나 기계의 대역으로 만족하던 인간들이 반항을 꿈꾸는 <완벽한 대통령>을 읽으면,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가장 흥미롭게 던진 SF문학의 거장’이라는 평가에 공감하게 된다. 개인적인 추천작은 폴 앤더슨, 반 보그트 등 SF작가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며, 미래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물거미>.(집사재 펴냄)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