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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비트 주세요
윤덕원(가수) 2022-01-27

일러스트레이션 EEWHA.

2022년을 맞아 새로운 앨범 구상을 위해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책상에 앉아 있는다. 예전에 써뒀던 내용들을 들여다보며 고치기도 하면서 기타도 좀 치고… 를 반복하다 보면 밤도 금방 깊어지는 일상이다. 오랫동안 반복해온 일이지만 여전히 과정은 평탄하지만은 않다.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바로 도착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참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과정은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어릴 적 시장에 심부름하러 갔다가 무엇인가에 홀려(장난감이나 게임기였겠지?) 해가 다 지고서야 돌아왔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아도 작업을 하기 위해 준비한 이 방과 책상에는 주의력을 빼앗아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무엇인가에 주의를 빼앗기기를 반복하는 것이 작업자의 숙명이겠거니 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혹시나 인터넷에는 그런 방법이 있을까? 프리랜서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한 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사실 그런 것을 찾아보는 것 자체가 이미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은 동영상이나 SNS 창이 컴퓨터의 메모리에 올라와 있는 것부터가 문제다. 그러나… 그러나 뭔가 고립되고 나면 그 뒤에는 문득 외로움만 찾아오고 원래 생각했던 집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새벽을 향해가는 늦은 밤, 창작의 기운이 뭔가 몽글몽글 모이는 것 같으면서도 건져지지 않을 때, 스스로 자처한 고립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운지…. 라디오도 켜보고 팟캐스트도 켜보고 클럽하우스 같은 오디오 SNS도 켜보지만 왠지 산삼을 캐기 전에 주막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면 부정 탈 것 같은 심리인지 잠시 기웃거리다가 나오고 만다. 게다가 음악 작업을 할 때는 뭔가 소리가 나는 것을 틀어놓기도 어렵다(소리를 잘 못 듣거나 데모를 녹음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번 심야 라디오를 진행하는데, 작업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는 분이 있으면 반갑고 또 부럽기도 하다. 나도 밤새울 때 라디오 들으면서 일하고 싶은데….

고독함과 적막함을 조금은 덜어내고 음악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수단은 과연 없는 걸까 하고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정착한 것은 ‘드럼머신’을 틀어놓는 것이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 때 사용하는 DAW(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 프로그램에도 자동으로 드럼 트랙을 생성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충동적으로 꽤 많은 돈을 들여서 구입한 컨트롤러 일체형 그루브 머신도 있지만(불빛이 예쁘고 기능이 많은데 거의 써보지 못했다) 이렇게 드럼 트랙을 틀어놓게 된 데에는 얼마 전 구입한 저렴한 드럼머신의 역할이 컸다.

박자를 쪼개어 놓은 버튼 사이로 빨간 LED의 불빛이 한칸씩 움직이며 정해진 박자를 연주한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연주를 시작하고 한번 더 누르면 멈춘다. 아주 예전에 나왔던 기종을 복각한 것이라 기능은 많지 않지만(작은 LCD 화면조차 없다) 왠지 이 기계가 연주하는 박자를 들으면 힙합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박자를 정해서 비트를 깔고 기타를 쳐본다. 약간 힙합이나 R&B 느낌이 나는 게 익숙한 그루브는 아니지만 뭔가 좀 떠오르나 싶은 기분은 훨씬 더 드는 것 같고 힙한 느낌도 물씬 난다. 이 정도면 2022년의 창작 현장도 나쁘지 않군 하고 생각해본다.

처음 곡을 만들고 데모를 만들던 시절에도 드럼머신이 함께했다. 만든 데모들은 4트랙 카세트리코더에 녹음되었다. 드럼 한 트랙, 기타 한 트랙, 베이스 한 트랙에 보컬까지. 그때 녹음된 테이프도 카세트리코더도 아직 가지고 있는데 비트와 이펙트를 함께 제공했던 드럼머신은 지금은 없다. 기능이나 소리가 아쉽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악기를 사기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악기를 팔아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랬겠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웬만한 악기는 구할 수 있는 지금, 악기의 기능을 200% 이상으로 끌어내서 만들었던 그때의 데모만큼 발랄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단종되었고(후속 시리즈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당시에는 정보도 구하기 어려웠던 나의 첫 드럼머신 일렉트라이브가 사실은 꽤나 많은 뮤지션들이 사용했던 악기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뮤지션을 보게 되었는데, 페퍼톤스의 신재평씨가 유튜브에 올린 라이브에서 바로 그 일렉트라이브를 사용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손을 감싸주던 패드 버튼과 박자에 맞추어 빛나던 불빛까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왠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뷰를 보면 악기나 물건을 잘 안 버리고 쓴다던데, 아직도 갖고 있다니 부럽다. 한때의 생활고(와 새로운 악기에 대한 욕심으)로 팔아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상을 오랜만에 찾아보니 이미 꽤 오래전이다. 그래도 다음에 혹 만나게 되면 잊지 않고 일렉트라이브가 잘 작동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곡은 영상에서 재평씨가 연주하던 <Fake Traveler>이다. 긴 재생시간과 나긋한 듯하면서도 비트감 있는 연주가 야간 작업의 동반자로 적합하니 원곡과 커버 모두 새벽을 함께 달리고 있는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다. 물론 곡 쓸 때는 못 듣겠지만.

<Fake Traveler> _페퍼톤스

어두운 거리를 달려가고 있어 서로의 그림자를 쫓아

점멸하는 붉은별의 도시 아- 타오르는 밤

끝없이 스쳐가는 불빛이 우리를 인도하네

차가운 어둠에 휩싸인 거리엔 음울한 노래 소리만이

아른거리듯 흔들리고 있어 음검게 물든 밤 숨죽인 은빛의 별들만이 나의 앞을 비추네

헤아리기 힘든 이 먼 길의 끝에 어떤 예감도 없이

마치 거짓말처럼 서로를 마주할 어떤 계절의 어떤 새벽을 찾아

깊고 고요한 밤의 안쪽에 서로의 꿈을 꾸는 여행자

소리없이 푸른 달빛 아래 그리움만은 잠들지 않고

가로등의 은하수 가운데 서로를 꿈꾸는 fake travelers

흔들리는 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검은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