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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코미디는 관객의 예상을 비껴나가야 한다, <보스> 라희찬 감독

올해 추석 시장에서 여유롭게 완승을 거둔 <보스>는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수 200만명을 돌파하며 극장가를 채웠다. 보스 임대수(이성민)의 죽음으로 차기 보스를 뽑아야 하는 조직 식구파. 하지만 그 전개가 수월하지만은 않다. 가장 유력한 후보 순태(조우진)는 중식당 미미루를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싶어 하고, 원로 위원들의 신임을 받는 강표(정경호)는 어느새 탱고에 매료되어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와중에 모두가 떠름해하는 판호(박지환)는 판도를 바꾸어 보스의 자리를 노린다. 과거의 명성과 명예로부터 멀어진 허름한 조직폭력배의 모습은 새로운 갈래의 코미디를 완성하기 충분하고, 각 인물의 개성과 취향에 맞춰 뒤늦게 진로를 모색하는 모습은 무척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보스가 되길 거부하는 조직원들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라희찬 감독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유독 길었던 추석 연휴 동안 의미 있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열흘 만에 누적 관객수 200만명을 기록했다. 시작이 괜찮아서 다행이다. 영화 성적은 계속 지켜보려 한다. 연휴에는 계속해서 무대인사를 돌았다.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코미디를 보며 웃는 경험이 드물어져서인지 이런 시간이 좋다는 관객들의 감사 인사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뭉클하다. - <보스>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결국 ‘차기 보스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갖고 싶어 하는 조직폭력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컨셉을 어떻게 구상하고 발전시켰나. 영화의 첫 컨셉은 김원국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님의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조직원들이 보스를 서로 안 하려고 싸우면 어떨까? 그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렇게 정형성을 비틀어나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에서도 보스가 되는 게 낭만이고 꿈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요 컨셉은 보스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거로부터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의 바람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인물마다 상황과 생각이 달라야 차이가 커진다고 판단했고 그게 꿈이었다. 순태는 어릴 적부터 가업으로 내려온 중국집을 확장하고 싶어 하고, 강표는 원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설정이었다. 그러다 배우 캐스팅 단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정경호 배우가 섭외되었는데 그의 성향과 장기를 조명하고 액션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춤으로 변동했다. - 영화는 주인공 순태의 비중과 의존도가 크다. 순태 역할에 조우진 배우를 점찍은 계기가 궁금하다. 조우진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할 때 코미디 장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편은 아니고, 또 그동안 조연의 자리에서 활약을 펼쳤기에 이 시도가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조우진 배우가 지금까지는 묵직하고 진중한 작품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코미디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외계+인>에서 활약하기도 했고. 하지만 필모그래피보다 그의 역량에 대한 믿음이 컸다. 나는 정극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배우들이 희극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순태는 자신이 스스로 만든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심각하게 분투하면서도 그 진지한 무게에서 경쾌한 웃음이 빚어진다. 그런 지점을 조우진 배우가 잘 녹여내리라 생각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드렸을 때가 <하얼빈>촬영 직전이었는데 무척 좋아해주셨다. 아무래도 그때 힘들었나보다. (웃음) - 보스 자리를 둘러싼 혈투가 예상되는 만큼 액션도 중요한 요소다. 특히 캐릭터의 성격에 맞춘 액션들이 눈에 띈다. 커튼을 활용하거나 무대에서 뻗어나오는 방식의 순태의 액션이 있다면 허술한 언더커버 태규(이규형)는 난장을 만드는 식이다. 액션에도 코미디적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순태, 강표, 판호는 한때 한식구였기 때문에 더더욱 각기 다른 면모가 부각되길 바랐다. 그래서 아이템을 하나씩 쥐어줬다. 순태는 원초적으로 싸우지만 요리하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을 씌우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판호에게는 가스를 줬다. 강표는 춤선을 위해 목검을 주었고. <보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확한 합만큼이나 약간의 ‘삑사리’다. 정돈되고 멋진 것보다는 엉성한 빈틈을 주는 게 웃음을 만들기 좋았다. 그런 식의 유연한 유머를 심고 싶었다. 실제로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줘서 현장에서 접목하기도 했다. 순태의 커튼 장면이나 책으로 다리를 찍는 액션은 모두 조우진 배우가 현장의 미술 소품을 보고 의견을 내준 것이다. - 모든 인물이 집결하여 단체 싸움을 벌이는 공간은 조직이 시작된 곳, 낙원호텔이다. 처음과 끝이 이곳에서 소생한다. 원래는 낙원호텔 대신 바닷가로 설정돼 있었다. 그런데 태규가 마지막에 힘 있게 휘저어주기를 바라서 공간을 실내로 변경했다.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의 꿈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선 다른 곳이 아닌 낙원호텔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식구파와 낙원호텔을 위해 몸담고 있지만 모두 무능하다. 임대수도 따뜻하지만 시대를 못 읽어 무능했기에 회사가 무너졌고, 인술(오달수) 또한 마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무능하다. 사람들은 낙원호텔에서 식구파 조직원들이 모두 잘 먹고 잘 사는 파라다이스를 꿈꿨겠지만 결국 각자의 꿈으로 돌아서는 현실적인 방법만이 이들을 일깨운다. -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대로 짜장면이 먹고 싶어진다. (웃음) 그걸 바랐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음식으로 약간의 여운이 남길 바랐다. 처음에는 조폭 이야기니까 고깃집을 하자, 칼국수를 하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나는 짜장면을 원했다. 순태처럼 인간적이고 친근한 음식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한다. 영화에서도 짬짜면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보스>는 결국 선택에 관한 영화다. 이 딜레마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음식을 통해 살짝 묻어나길 바랐다. - 코미디 장르에 자기만의 규칙이나 기준이 생긴 게 있다면. 이 작품을 하면서 코미디가 더욱 어려워졌다. 웃긴다는 것은 결국 놀라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음 장면이 예측되는 순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웃음 또한 그렇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다만 인물들이 억지로 웃기려 과장해서는 안된다. 순태와 강표의 경우도 조폭이 다른 직업을 가지려 하는 설정 자체가 웃긴 것이지, 이들은 모두 자신의 문제에 진지하고 진중하다. 결국 이야기와 인물은 절박해야 한다.

[연속기획 3] 부산영상위원회 아카이브 총서 <부산의 장면들> #2, ‘부산,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 제작기

고등학교 국어 교사 하경(이나영)은 주말마다 집을 나선다. 반복된 일상에 갇힌 그가 추구하는 건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그곳이 어디든 “걷고 먹고 멍때릴 수 있다면” 잠시 길을 잃어도 좋다. 그렇게 쓰인 여덟편의 유랑기가 2023년 5월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를 구성한다. 부산은 하경이 세 번째로 몸을 맡기는 지역이다. 옛 제자나 동료 교사, 오랜 친구와 조우하는 여타 에피소드들과 달리 3화에서 하경이 맞닥뜨리는 이는 낯선 남자 창진(구교환). 각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두 사람의 동선은 자꾸만 겹친다. 같은 밀면집에서 식사하고,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마주친 뒤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에서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연달은 우연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 하경과 창진은 나란히 발을 맞춘다. 복천동고분군의 야외극장, 남포동건어물도매시장에서 그들만의 <비포 선라이즈>를 찍는다. 확실한 다음을 기약하기보다 또 한번 인연을 믿어보기로 한다. 3화의 제목이기도 한 ‘메타 멜로’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박하경 여행기>를 함께한 이종필 감독, 조영천 촬영감독, 김보미 미술감독은 그 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처음 만난 연인이 충분히 설렐 수 있도록 부산의 빛과 색을 매만진 그들에게 촬영 후일담을 들었다. 밀면은 물? 비빔? 부산에는 수많은 밀면집이 있다. 그중 박하경이라는 인물이 들를 법한 곳은 어딜까? “프랜차이즈 식당처럼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를 갖춘 곳은 가지 않았을 것 같다. 노포 분위기가 나는, 맛으로 승부하는 밀면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조영천 촬영감독은 제작팀이 물색한 로케이션 중 대성밀냉면을 고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경에 이어 창진도 그곳을 찾는데, 두 사람은 시간차를 두고 같은 고민을 한다. 물과 비빔 중 무엇을 시킬 것인가! 이종필 감독이 구교환 배우의 재치로 탄생한 장면의 비화를 전했다. “촬영 중 컷을 외치지 않고 밀면집에 들어온 창진 역의 구교환 배우를 좀더 지켜보았더니 그가 ‘뭐가 더 맛있어요?’라고 종업원에게 물었고, 실제로 그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저는 물 밀면을 추천합니다’라고 즉흥적으로 답했다. 그러자 구교환 배우가 ‘그럼, 비빔으로 주세요’라고 받아쳤다.” 책이 쌓이듯 감정이 쌓이게 김보미 미술감독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밀도 높은 공간”이라 칭했다. 책들이 촘촘히 쌓여 있어 미술팀이 하나씩 옮겨가며 세팅을 바꿔야 했고, 곳곳에 붙은 광고물들을 가리되 장소의 분위기에 맞게 색감을 디자인해야 했기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날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작진이 택한 반석서점 내부로는 빛이 잘 들어와 다행이었지만 조명팀을 비롯한 기술팀들의 고생도 상당했다고. “이명세 감독의 굉장한 팬이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는 장면이 많은 그의 영화에서처럼 자연의 변화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영화 <러브레터>를 오마주한 이 장면에서는 밖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빛으로 인해 인물의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빛이 아른거리듯 감정도 아른거릴 수 있도록.”(조영천 촬영감독) 사람을 보듬는 극장에서 이종필 감독은 <박하경 여행기>의 부산을 ‘영화제 공간’과 ‘여행자 공간’으로 나눠서 접근했다. 그는 야외 상영장 로케이션으로 영화의전당도 고려했지만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부산을 여행한다는 컨셉”을 살리고 싶어 고민하던 중 영화제의 주요 행사인 동네방네비프(BIFF)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어온 복천동고분군 노천극장에 반했다고 한다. 조영천 촬영감독도 “공간이 사람들을 보듬고 있는 원형, 스크린이 산동네쪽을 비추고 있는 형태”가 마음에 들었다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고, 결국 하경과 창진은 이곳에서 단편영화 <달세계여행>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다른 관객들과 달리 엔딩크레딧이 끝나기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말이다. 김보미 미술감독에 따르면 그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복천동고분군 야외 상영 회차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만의 정서가 <박하경 여행 기>와 잘 어울렸기에 과거 영화제 사진들을 찾아보며 당시 행사와 똑같이 현장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이때 창진과 하경 뒤로 붙은 <달세계여행>포스터를 비롯해 3화 곳곳에서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팸플릿, 배너 등을 볼 수 있다. 미술팀이 영화제로부터 그래픽 파일들을 넘겨받아 활용한 결과다. 보름달 아래 보랏빛 밤 <박하경 여행기> 3화의 한 장면은 <헤어질 결심>덕분에 가능했다. 조영천 촬영감독이 기억하기로 <박하경 여행기>제작팀에 <헤어질 결심>에 참여했던 스태프가 있었는데, 그가 <헤어질 결심>에 등장한 부산 야경이 잘 보이는 일동빌라를 소개해준 덕분에 하경과 창진이 야경을 바라보는 신을 그곳에서 찍을 수 있었다. 김보미 미술감독은 그날 부산항대교를 보랏빛으로 물들여준 조대연 조명감독과 부산시에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매회 캐릭터들에게 컬러를 부여해 조합하는 식으로 영상미를 만들었다. 3화에서는 하경에게 블루, 창진에게 레드를 부여해 드라마 중간 지점에서 이 두색이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로케이션 촬영 중에는 이를 구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조명감독님이 부산시와 협력해 만들어준 보랏빛에 정말 감동받았다.” 비 온 뒤 공기까지 자연스럽게 “대한슈퍼를 세팅하는 동안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모두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다가 밤늦게 남포동건어물도매시장 골목 신을 촬영했다. 걱정이 많았는데 비로 인해 촉촉해진 땅이 그 장면의 분위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더라. 비가 왔는데 오히려 좋은 케이스, 그것마저 부산의 매력으로 느껴졌다.” 김보미 미술감독이 회고하듯 자연스러움을 살려 얻은 아름다움이 <박하경 여행기>에 묻어 있다. 조영천 촬영감독도 덧붙였다. “무서울 수 있는 뒷골목에 엠버와 그린 톤 조명을 같이 써서 빛이 많아 보이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나 인공적인 월광이나 인위적으로 강한 조명은 피하고자 했다. 하경과 창진이 빛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대한슈퍼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산의 정서가 살도록 “부산이 가진 특유의 정서가 있다. 미술감독으로서 그것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미술팀이 준비한 소품들이 실제 공간에 이질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게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세팅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대한슈퍼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자는 미술팀이 뭘 했는지 눈치채기 어려울 거다. 내부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외부의 과일 좌판만 생활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가다듬었다.”(김보미 미술감독)

[특집] 미쟝센은 언제나 넥스트 제너레이션을 향해, 우문기 감독이 들려주는 개막 특별 영상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제작기

어느 아침 아직 꿈속을 헤매는 딸(우주우)에게 아빠(우문기)가 낭보를 전한다. “미쟝센이 부활했대!” 미쟝센인지 미센쟝인지 알 바 아니고 오늘 유치원을 갈지 말지가 훨씬 중요한 딸은 어느새 등원은 잊고 미쟝센영화제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아빠의 인형극에 빠져든다. <족구왕>의 우문기 감독이 제21회 미쟝센영화제의 개막 특별 영상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를 연출했다. 우문기 감독 또한 동세대 감독들처럼 미쟝센영화제와 남다른 인연을 자랑하는 미쟝센 키드다. 그 자신이 단편 <이공계 소년><서울유람>의 연출로 두 차례 미쟝센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한 데 이어 제18회, 제19회 미쟝센영화제의 집행위원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처음 미쟝센에 갔을 때만 해도 전국에서 영화 잘 만드는 사람 다 모이는 곳에 지방 출신인 내가 가면 촌놈 소리 들을까봐 주눅 들었다. 그런데 딱 ‘고시엔’ 나간 기분이더라.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영화 친구들을 사귀며 개안을 했거든.” 그래서 제목이 지칭하는 ‘뉴 제네레이션 키드’의 범위는 무척 자유롭다. 미쟝센영화제의 수혜를 입은 우문기 감독과 올해의 집행위원 7인일 수도, 영화제의 문을 연 이현승, 김성수 감독일 수도, 장차 영화와 영화제를 사랑하게 될 작품 속 딸일 수도 있다. 영화 앞에선 누구나 신세대고, 영화제에 가면 누구나 마음만은 어린아이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문기 감독이 모처럼 <씨네21>을 찾아 올해 영화제 개막 특별 영상의 제작기를 전했다.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의 제목은 페퍼톤스의 히트곡 에서 본떴다(우문기 감독과 페퍼톤스의 인연 또한 미쟝센영화제와의 그것만큼 깊다. <씨네21>1505호 참고). ‘인생은 길고 날씨 참 좋구나’라는 가사가 페퍼톤스 팬들 사이에서 마치 인생의 슬로건처럼 사용되는 곡이다. 이 가사를 미쟝센영화제에도 주문을 걸듯 적용해보자. 다시 돌아온 미쟝센영화제의 역사 또한 길게 우리와 함께하기를, 날씨 참 좋은 가을, 많은 관객이 다시 돌아온 영화제를 찾기를. 미쟝센영화제의 새로운 시작 그간 시나리오 집필에 몰두하던 우문기 감독은 이상근 미쟝센영화제 집행위원으로부터 개막 특별 영상 연출 제의를 받고 모처럼 디렉터스 체어에 앉았다. 리더필름 정도의 러닝타임을 생각했던 우문기 감독은 집행부와의 몇 차례 미팅을 통해 이번 개막 특별 영상의 주제가 ‘회고와 제언’에 있음을 알았다. “그간 영화제가 남긴 푸티지를 활용하려 했는데 제10회와 제20회에 기념 영상을 만든 이상근 감독에게 그건 자기가 다 했으니 미쟝센영화제의 ‘새로운 시작’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해 들었다.” <뉴 제네 레이션 미쟝센 키드>는 그렇게 미쟝센영화제의 역사와 의미는 물론 앞으로 나아갈 길 모두를 짚는 영상을 만들라는 특명 아래 탄생했다. 파스텔 톤의 색감과 대칭구도, 어린이 주인공과 팝업북 형태의 인형극.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 자동 연상되는 이름은 웨스 앤더슨이다. 대학생 시절 이원석 감독이 진행하는 ‘영상과 산업’ 강의에서 웨스 앤더슨을 처음 알게 된 우문기 감독은 비슷한 취향을 가진 감독에게 빠져들었고, 작품을 만들 때마다 좋아하는 선배 감독의 미학이 자연스럽게 녹아난다고 말한다. “이번 작품의 컬러 팔레트를 구성하는 커튼은 실제 우리 집 인테리어 소품이다. 반달과 보름달이 섞인 디자인인데 녹색 버전과 노란색 버전이 있어 분기마다 갈아 끼운다. 이번 작품을 찍을 때 노란 커튼을 달고 있었다. 그래서 작품 전체의 톤이 연노랑으로 맞춰졌다. 만약 녹색 커튼이었으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신인배우 우주우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에서 관객의 시선을 훔치는 ‘키드’는 단연 배우 우주우(7)다. “으이구, 감독들이 뭘 알겠어. 영화 찍는 것만 알지”라며 혀를 차다가도 “그런데 ‘미쟝센’이 정확히 무슨 뜻이야?”라며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어린이다. 그는 누구도 몰랐겠지만 이 작품으로 데뷔했고, 누구나 짐작했겠지만 우문기 감독의 딸이다. “낯가림 없이 지나치게 밝은 딸을 보며 언제든 함께 어떤 프로젝트든 해보고 싶었다. 영화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변수가 배우 캐스팅과 로케이션 섭외 아닌가. 자연스럽게 딸과 우리 집이 떠올랐다. 미쟝센영화제에 대해 정보가 없는 딸이 영화제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 이에 답을 하며 영화제의 이모저모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겠더라.” 우문기 감독은 실제 딸과 보내는 유치원 등원 풍경을 이야기 뼈대로 삼았고, 이를 위해 일상에서 수차례 리허설을 가졌다. “등원을 위해 주우의 옷을 갈아입힐 때 대사를 맞춰봤다. 아침에 아직 잠에서 덜 깬 딸을 깨우며 무작정 대사를 시켜보기도 했다. (웃음)” 우주우 배우가 자기에게 주어진 수많은 대사를 소화할 수 있었던 때엔 그의 영화제 경험도 한몫한다. 7살 인생 동안 우주우 배우는 부모를 따라 수많은 영화제를 다녔고, 그중 부산국제영화제가 그의 ‘최애 영화제’라고 한다. “주우는 영화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있는 배우다. 대사도 제대로 알고 뱉은 듯하다. “네이버와 오리온이 후원하는 영화제야”라는 대사를 연습한 이후 집에서 오리온에서 출시한 과자와 네이버 로고를 볼 때마다 ‘아빠 저거 미쟝센 아니야?’라고 되물을 정도다. (웃음)” 한편 독립영화 현장을 제대로 체험한 우주우 배우는 데뷔작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에게 은퇴 이유를 물었다. “연기가 재미없다.”(우주우) 든든한 지원군 우문기 감독은 공식 크레딧은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에서 연출, 각본, 연기, 미술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그외에도 장소 협찬(본인의 집이다). 어린이 배우 현장 코디네이터(본인의 딸이다) 등을 비공식적으로 도맡으며 몸이 족히 7개는 필요했다. 이때 우문기 감독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작품의 촬영감독이자 <다섯 번째 흉추>를 만든 박세영 감독이다. 우문기 감독이 전고운, 임대형 감독과 함께 연기를 선보인 <다섯 번째 흉추>의 인연 이전에, 두 사람은 제18회 미쟝센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캐쉬백>이라는 작품이 ‘희극지왕’ 섹션에 올라 모두가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이 영화와 박세영이라는 감독에 대해 이야기했고 결국 박세영 감독은 미쟝센 편집상을 거머쥐었다.” 이듬해 미쟝센영화제의 트레일러를 연출하기도 한 박세영 감독은 미쟝센영화제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든다. 우문기 감독의 지원 요청을 받았을 때도 “돈 걱정 말고 부족한 인력은 내가 다 채우겠다”고 외치며 자신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동료들을 대동해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를 찍었다는 후문. 박세영 감독은 올해 영화제에도 ‘기담’ 섹션에 <괴인의 정체>를 출품했다. 우리 모두 ‘미쟝센 키드’다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엔 다양한 세대의 영화인이 등장한다. 미쟝센영화제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이현승, 김성수 감독이 행차하고 미쟝센영화제를 통해 꿈을 실현한 엄태화, 윤가은, 이옥섭, 장재현 감독이 목소리를 더한다. 만약 될성부른 시네필의 떡잎을 보이는 우주우 배우까지 포함한다면 이 작품엔 총 3세대의 영화인이 등장하는 셈이다. “이상근 감독이 제20회 미쟝센영화제 개막작 <미쟝센 웨이브>를 만들었을 때 러닝타임을 30분00초에 맞췄다. 30회까지 이 영화제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하더라. 그 의의를 이번 개막 특별 영상이 잇길 바란다.” 우문기 감독과 올해 집행위원으로 합류한 7인의 감독은 그야말로 ‘미쟝센 키드’다. “영화제 부활 소식을 듣고 이경미, 임필성 감독님이 ‘이제는 너희가 영화제를 꾸려가야지’라며 내 또래 감독들을 응원해주셨다. 우리는 미쟝센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단편영화를 찍던 세대니까. 미쟝센영화제에 작품이 진출하길 한없이 바라던 세대가 이제 영화제를 이끄는 중추가 된 것이다. 그런 우리가 주우 같은 또 다른 미쟝센 키드를 키울 수 있다.” 혹시 여러 이유로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인터뷰이들의 ‘B컷’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문기 감독은 김성수 감독의 일화를 전했다. “영화제 초창기에 김성수 감독님이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재능이 보이는 학생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미쟝센영화제에 도전해볼 것을 권유하셨다고 하더라. 그리고 자기 학생들이 경쟁부문에 진출해 영화제 뒤풀이에 오면 영화제에서만큼은 그들을 학생이 아닌 한명의 감독으로 깍듯이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개막식을 찾아야 하는 이유 제21회 미쟝센영화제의 개막식은 10월16일, CGV용산아이파크몰 SCREENX관에서 열린다. 달리 말해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또한 개막식 당일 SCREENX를 통해 중앙 스크린은 물론 양쪽 벽면까지 총 3면에 영사된다.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는 SCREENX의 특성을 십분 반영해 만들어진 영상이다. “이를테면 ‘네이버’가 영화제를 후원했다는 사실이 뜨면 벽면 전체에 네이버를 상징하는 초록색 장막이 드리운다. 또 집행위원들이 양쪽 벽면에서 박수를 유도하는 구간이 있다. 칸이나 베니스 같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프리미어 상영할 때마다 기립박수에 관련한 시간 기록이 보도되지 않나. 기립박수까진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모든 관객이 함께 박수를 치며 미쟝센영화제의 부활을 축하해준다면 좋겠다. 극장만이 공유할 수 있는, 함께 영화를 보며 연대한다는 감각을 고양할 수 있는 일종의 의식이다. 개막식에 오는 분들과 다 같이 <러브 액츄얼리>(2003)를 찍는 거다. (웃음)” <뉴 제네레이션 미쟝센 키드>의 하이라이트인 역대 영화제 사진의 몽타주 또한 3면 가득 펼쳐질 예정이다. “액션영화도 아닌데 3면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런데 스크린과 양쪽 벽 가득 아카이빙 이미지가 걸리는 순간 미술관에 온 것처럼 지난 20년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아직 극장 시사를 못해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동시 생중계에선 이같은 즐거움을 누리기 어려우니 시간이 된다면 개막식을 찾아달라.”

[Masters’ Talk] 계속 관객이 의심하고 질문하게 하고 싶었어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X <아가씨> 김태리 배우 ➀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만이다. 박찬욱 감독과 김태리 배우는 연출자와 배우로 만나 2015년 <아가씨>크랭크인에 들어갔고, 영화가 완성된 뒤에는 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동행하며 전세계 관객을 만났다. 이후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박찬욱 감독은 안개 같은 사랑을 그린 <헤어질 결심>을 거쳐, 해고로 인한 수난과 범죄가 뒤섞인 블랙코미디 <어쩔수가없다>를 안고 베니스국제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김태리 배우는 “먼 항구에 가서 반짝이는 것을 입고 이름 모르는 것을 먹고”라고 다짐했던 숙희(김태리)처럼 영화 속에서 민주화운동 시기로, 시골로, 또 우주로 나아갔다. 바빠서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가 있다면, 두 영화인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김태리 배우는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든 생각과 의문을 잔뜩 메모해와 숙희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박찬욱 감독을 바라보며 또랑또랑하게 질문했고, 순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 감독은 허허 웃다가도 예리한 물음에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은 디테일과 구상을 자세히 풀어놓았다. 그 현장을 지면에 세밀히 옮긴다. 말과 말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두 영화인 사이의 신뢰까지도 자연스레 전해질 것이다. 박찬욱 안녕하세요, 박찬욱입니다. 김태리 안녕하세요, <아가씨>에서 숙희 역할을 했던 김태리입니다. 감독님 촬영 현장에 놀러 갔다가 제목이 <어쩔수가없다>라는 걸 처음 듣고 “제목이 이거예요?”라고 여쭤봤던 기억이 나요. 그전까진 <도끼>라는 원제로만 알고 있었어요. 박찬욱 그때 내가 확정이라고 말했나? 김태리 그건 아니었어요. 박찬욱 대부분 <어쩔수가없다><도끼>둘 다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쩔수 가없다>로 정했다고 말했을 때 다들 정했다니 어쩔 수가 없는데, 좋다는 말은 안 나오는 표정이었죠. 김태리 저는 제목이 되게 좋았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실생활에서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내뱉는지 계속 인지됐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 나 지금 합리화 중인가!’ (웃음) 싶었죠. 그런 생각 하나가 제 머릿속에 끼어든 게 재밌었어요. 박찬욱 맞아요, 맞아요. 그게 의도예요. 김태리 <아가씨>촬영 때 인상이 강렬했던 게, 감독님, 리허설을 엄청 엄숙하게 하는 거 아세요? 예를 들어 오늘 아침 7시까지 현장으로 모이라는 전체 연락이 돌면, 7시에 온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 실제 촬영처럼 스토리보드에 있는 그대로를 리허설해보는 거예요. 본촬영 전에 연습하는 기분이니까 저는 너무 좋아서 신나게 참여했는데 분위기가 되게 조용하고 엄숙하고 스태프들이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거든요.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 너무 좋았지만요. 다른 촬영 현장 가봤더니 리허설이 그렇게 엄숙하지는 않더라고요, 리허설이! (웃음) 박찬욱 스태프들이 리허설을 통해 동선이나 클로즈업 등의 얘기를 듣고 준비하죠. 김태리 <어쩔수가없다>에 그런 식으로 공들여서 리허설을 많이 했던 장면이 있어요? 박찬욱 그거죠. ‘고추잠자리 신.’ 만수(이병헌),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 3명이 얽혀서 좁은 방에서 리허설했고, 스토리보드를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만들었죠. 김태리 그 장면은 음악 없이 찍었을 거 아니에요. 박찬욱 없었죠. (웃음) 음악은 없는데 소리는 질러야 하니까 배우들이 힘들었죠. 그러다가 중간에 없던 아이디어도 나왔어요. 권총이 캐비닛 아래로 들어가버리면 어떨까? 캐릭터들이 총을 찾아 더듬더듬하는 아이디어를 이병헌씨가 냈어요. 이병헌씨가 어디 가서 반드시 자기 아이디어라고 얘기하라고 그랬어요. 그런 얘기를 우리끼리 재미있게 말하다가 ‘Why not?’이란 마음으로 바꾸자 했죠. 누가 건드려서 총이 발사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나와서 그렇게 갔죠. 계획을 많이 세웠지만 즉흥적으로 한 것도 있어요. 김태리 총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총알에 안 맞아서 놀랐어요. 당연히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맞았기에 반전이었어요. 대담에 앞서 감독님의 해외와 국내 인터뷰를 많이 봤어요. 근데 의상 얘기가 없어요. 감독님이 만수 집이라든가 범모 집이라든가 반장 선출(박희순)의 집이라든가, 집을 공들여 찍으셨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 집에 사람이 너무 잘 묻게끔 의상을 디자인했던 걸까 생각되더라고요. 의상과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못한 게 있으신가요? 박찬욱 고추잠자리 신에서 입은 아라의 붉은 브이넥 스웨터는 몸싸움할 때 만수가 잡아당기면 어깨가 다 드러나잖아요. 그렇게 되라고 브이넥 스웨터를 골랐죠. 그래서 범모는 자기가 지금 총 맞은 상황보다 그게 더 못 견디겠는 거죠. 그때 가장 크게 비명 지르죠. 아라 옷을 장면에 맞춰서 설정했고, 미리(손예진)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요. 색깔만 파랑이에요. 김태리 제가 아라와 범모의 젊은 시절 장면을 찍을 때 혜란 언니를 응원하러 현장에 갔는데, 제가 언니를 보고 놀라서 ‘무슨 신 찍는 거예요?’ 그랬더니 언니가 엄청나게 쑥스러워했어요. 박찬욱 그때도 염혜란, 이성민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있게 만들어 달라고 그랬죠. 심혈을 기울였죠. 혜란 언니하고의 인연도 좀 얘기해줘요. 김태리 학교 선배님이 혜란 언니랑 친구였어요. 학교 선배님이 소속된 대학로 극단에서 오퍼레이터가 필요한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함께하겠냐고 제안하셨어요. 돈이 무슨 상관이에요? 대학로를 갈 수 있는데! (웃음) 그 극단에서 혜란 언니를 처음 만났어요. 그렇게 작업하면서 그 극단이 좋아진 거예요. 선배님들도 너무 좋고 연출님도 좋고. 박찬욱 그럼 연기자가 아니었다고 그때는? 김태리 네, 첫 만남은요. 박찬욱 아 진짜? 그건 몰랐네. 김태리 극단이 신입 단원을 안 뽑은 지가 굉장히 오래됐었어요. 저 때만 해도 대대적으로 신입 단원을 뽑는다거나 하는 그런 시기는 지나갔던 것 같아요. 어떻게 이 극단에 들어갈지 고민했는데, 오퍼레이터는 계속 필요하잖아요. 조연출도 필요할 거고요. 그래서 저를 노동력으로 쓰시라고 하고 눈치껏 붙어 있었던 거죠. 그랬더니 어느 날 다른 사람들에게 단원이라고 소개를 해주시더라고요. 박찬욱 오, 극단 대표님이? 김태리 네! 그렇게 단원이 됐죠. 이후 언니가 유명해지고, 시상식 같은 곳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언니는 제 시작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 특별한 관계입니다. 언니가 감독님을 표현하기를 “감각과 사고를 예민하게 깨워주는 좋은 창작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언니에게 물어봤어요. “언니, 권총을 아이패드에서 찾는 장면에서 언니가 ‘요거’라고 하잖아요. 그거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하니까 언니가 “너 되게 예리하다”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원래 ‘이거’로 쓰여 있었다고 언니는 기억하던데, ‘이거’를 ‘요거’로만 바꾼 건데 사람이 달라 보이잖아요. 아라를 아라처럼 보이게끔 하면서도, 아라가 묘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요. 박찬욱 맞아요, 그게 포인트예요. 김태리 그 대사에 분명히 미세한 조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도 말맛이 참 좋았고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박찬욱 범모와 산길을 걸을 때 아라가 “당신도 나처럼 해봐. 햇빛을 바람에 쌈 싸먹어. 단풍에 푹 찍어서”라고 하죠. 입을 벌린 채 대사를 하니까 알아듣기가 어렵죠. 근데 이런 대사를 쓰면서도 배우가 이상한 대사라고, 이런 걸 어떻게 하냐고 못하겠다고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김태리 배우는 너무 좋아하죠! 박찬욱 배우가 재밌어 해줘서 고마웠어요. 김태리 영화 보면서 제일 놀라웠던 게 피크닉 장면이에요. 돗자리 깐 곳이 바위 옆이잖아요. 범모랑 아라가 앉아 있고 뒤에서 만수가 훔쳐보는 구도가 <아가씨>속 장면 같은 거예요. 어머, 오마주네! 기분 좋았어요. 히데코(김민희)와 백작(하정우)이 피크닉 가면, 그 모습을 숙희가 훔쳐보잖아요. 그때도 바위 위로 피크닉을 가고요. 박찬욱 맞아요. 나도 비슷하게 보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태리 다들 알아볼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싶었어요. (웃음) 혹시 다른 오마주도 있어요? 박찬욱 만수의 치통은 유현목 감독님의 <오발탄>. 영화 <오발탄>에서 철호(김진규)가 계속 치통에 시달려요. 세번의 범죄, 세명의 분신 김태리 이성민 선배님이 인터뷰에서 “범모는 만수처럼 복잡한 캐릭터는 아니잖아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제 눈에 범모는 만수와 동일 인물 같았어요. 물론 대사나 행동의 유사성을 바느질하듯 이어간 것도 있지만 정말 유사해 보였거든요. 배우들에게 서로 이어져 보이도록 유사성을 찾아보라고 주문했는지, 아니면 배우 각자가 연기한 걸 그대로 썼을 뿐인데 유사성이 드러난 건지 궁금해요. 박찬욱 각본에 이미 써놓은 것이 있고 스토리보드를 통해서 한 것도 있어요. 배우들한테는 리딩 때 두 사람 사이의 연결점이 있어서 대사도 이렇게 쓴 거라고 설명을 다 해줬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도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라는 요구는 안 했어요. 김태리 한 리뷰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을 봤어요. 만수가 죽이는 세명이 다 만수래요. 범모는 만수 그 자체고, 선출은 만수가 원한 미래의 모습, 시조(차승원)는 살인 행각을 벌이지 않았던 만수의 과거. 만수가 자신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죽여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해석이었어요. 전 이 해석이 재밌고 맞는 말 같더라고요. 박찬욱 그럴듯하네요. 만수가 찾아가는 세명이 정말 다 그의 분신이죠.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고요. 그래서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사실 자기파괴적인 행동이죠. 애초에 그렇게 설계됐어요. 김태리 제가 영화를 두번 봤는데 처음 볼 때 정말 빵 터져서 웃었던 장면은 부부 싸움 신이에요. 만수가 “넌 예쁘잖아!” 하니까 미리가 “너도 잘생겼잖아!”라고 해요. 그 톤이 너무 웃겨요. 박찬욱 나도 좋아하는 대사예요. 그런데 “너도 잘생겼잖아”라는 대사는 제일 나중에 쓰였어요. “어떻게 나를 의심해?”라고 미리가 말하면 만수가 “그럴 수 있지. 넌 예쁘니까. 넌 너무 예쁘잖아”까지는 내가 썼는데, 초고를 같이 쓴 이경미 감독이 우리 사무실에서 자기 시나리오를 쓰다가 잠깐 등판해서 “제가 한줄만 더해도 될까요?”라더니 썼어요. “너도 잘생겼잖아”라고. (웃음) 너무 이경미스럽지 않아요? 그 대사를 받는 이병헌의 얼굴이 나는 정말 웃겨요. “너도 잘생겼잖아”에 대해 ‘그건 그렇지’ 하는 그 표정! 그래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거야. 할 말이 없어요. 이어지는 말도 내가 좋아하고, 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대사예요. 만수는 할 말도 없고 말싸움에 졌는데 어떻게 해보겠답시고 무게 잡고 있다가 고개를 들면서 “나 지금 전쟁 중이잖아. 가족을 위해서”라고 해요. “신의, 신뢰” 이런 같잖은 소리를 하죠. 앉아서 서 있는 미리는 올려다보면서요. 남자라고 이겨보려는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 그 연기를 <공동경비구역 JSA>시절의 젊은 이병헌이었다면 제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였어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아요. 김태리 그 장면에서 편집과 병헌 선배 연기의 의외성이 빛났어요. 만수가 말하려고 일어났는데 불이 탁 켜지니까 짧은 순간에 살짝 말을 절잖아요. 박찬욱 그렇지. 병헌 배우가 그런 걸 잘해요. 믹싱할 때 그 장면에서 이병헌 배우의 대사 볼륨을 조금 낮췄어요. 미리가 불을 탁 켜자 만수가 말을 절고, “나 지금 전쟁 중이잖아” 할 때부터 볼륨을 살짝 줄였어요. 기어들어가듯 자신 없어하는 상황을 더 살렸죠. 이병헌씨가 이런 걸 알아야 하는데…. 내가 이런 건 다 얘기 안 해주죠. 김태리 배우가 실제로 연기로 보여주지 않았을 때는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 아니에요? 박찬욱 사실 병헌씨가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게 본인이 그렇게 연기를 했고 그걸 도와주는 거죠. 병헌 배우가 그렇게 안 했으면 나도 생각을 못했겠죠. 김태리 이경미 감독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화 끝나고 각본을 누가 썼는지 나오는데 4명이더라고요. 각색 과정이 얼마나 첨예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찬욱 처음 내가 무슨 배짱이었는지 몰라도 원작 판권을 확보도 하기도 전에 각색을 시작했더라고요. 이경미 감독의 메모에 적혀 있어요. 2010년 판권을 확보했고, 미국영화지만 일단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하워드, 알리시아 이렇게 이름을 만들어서 미국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때의 대부분이 지금 영화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다음 원어민 작가가 필요해서 돈 매켈러라는 감독 겸 배우 겸 작가 겸 캐나다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배우와 일했죠. 샌드라 오가 첫 주연한 영화가 <라스트 나잇>이라고 돈 매켈러가 감독 데뷔한 작품이에요. 돈 매켈러가 샌드라 오와 완전 ‘베프’예요. 김태리 진짜요? 신기해! 박찬욱 돈 매켈러하고 영어 대사를 잘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죽이 잘 맞아서 대사 윤색 이상의 작업까지 하게 됐어요. 무도회 장면을 그 친구가 많이 기여했죠. 원래는 그 무도회가 미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무도회였어요. 링컨처럼, 조지 워싱턴처럼 꾸민 사람도 있는데, 미리는 포카혼타스처럼 입는다고 구상했죠. 이후 미국영화를 포기하고 한국영화로 만들기로 하면서 이자혜 작가도 각색에 참여했어요. 김태리 배우도 이자혜 작가를 알잖아요. <아가씨>때 연출부 막내. 이자혜씨가 우리 기획실에서 계속 근무했는데, 범모가 약속이 취소돼서 일찍 귀가할 때 아내 아라가 젊은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걸 만수가 알고 어떻게든지 범모가 집에 오는 걸 막으려는 시퀀스가 이자혜 작가와 함께 일하며 만들어졌어요. 이자혜 작가가 이성민 배우의 팬이어서 성민씨를 위해서 뭔가를 더 만들어야겠다고 자꾸 주장해서 그렇게 됐어요. 김태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색에 참여하면 너 한번 나 한번 시나리오를 주고받으면서 메일을 쓰는 건가요? 어떻게 작업하는 거예요? 박찬욱 돈 매켈러와는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데 정서경, 이경미, 이자혜 같은 한국인 작가들과는 다 같이 써요.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고 모니터하고 키보드를 각자 한벌씩 가지고 써요. “너도 잘생겼잖아”라는 대사를 누가 치면 상대방이 느낌표를 하나 더 붙인다든가, 재미없는 대사는 지워버린다거나 해요. 김태리 지워버린다고요? 감독님만 지우는 거죠? 박찬욱 아니에요. 다들 지워요. 김태리 감독님 대사 중에 삭제된 게 있어요? 박찬욱 그럼요. 많죠. 작가들이 “감독님 이게 진짜 너무 오글거려요”라면서 딱 지워버려요. 그런 일을 많이 당하죠. 그렇게 쓰면 재밌어요. 혼자 있으면 자꾸 눕고 싶고 자꾸 인터넷 보고…. 공동 작업이 다 끝나고 제일 마지막에 일주일 정도만 혼자 작업하고 나머지는 혼자 일하기 싫어해요. 김태리 <아가씨>는 결말을 원작 <핑거스미스>와 완전히 다르게 갔잖아요. 이번에도 결말 부분이라든가, 혹시 구조적으로 위치가 바뀐 부분이 있나요? 박찬욱 원작은 1인칭으로 만수 머릿속 생각을 따라갈 수 있어요. 프랑스에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서도 주인공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쩔수가없다>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관객이 만수에게 동일시되지 않게 하고 싶었거든요. 김태리 보이스오버는 없지만 오버랩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화면전환으로 이 사람의 심리가 계속 스쳐 지나가는 걸 보여주면서요. 박찬욱 맞아요, 긴 디졸브를 많이 썼죠. 옛날 영화는 굉장히 길게 디졸브를 썼어요. 아주 효과적으로 숏들이 잘 붙기만 한다면 긴 디졸브도 참 멋있어요.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범죄를 눈치챘다는 것도 원작엔 없어요. 그러니까 결말의 느낌이 통째로 달라지죠. 결말의 AI 얘기도 당연히 90년대에 쓰인 원작 소설에는 없었어요. 김태리 원작은 어떻게 끝났어요? 박찬욱 경찰이 방문하고 주인공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해요. 그리고 재취업에 성공해 첫 출근해요. 주인공 입장에서 봤을 땐 해피 엔딩이에요. 김태리 원작은 영화보다 조금 더 앞부분에서 끝나네요. 박찬욱 주인공이 잡힐 줄 알았는데 완전범죄로 끝나니까 독자는 오히려 뒤통수 맞는 기분이죠. 김태리 저는 <어쩔수가없다>보면서도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박찬욱 원작은 더하죠. 가족도 모르고 형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니까.

[인터뷰] 다음 세대 영화인들과산업의 접점을 확장한다, 장영엽 미쟝센단편영화제 운영위원장

지난해 가을 미쟝센영화제의 부활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영엽 운영위원장(현 <씨네21>대표이사)은 가슴이 뛰었다. 미쟝센 키즈들의 성장을 기록한 <씨네21>기자였고 단편영화를 향한 애정을 미쟝센에서 길러온 관객이었기에 “이 영화제를 살리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한다”라는 사명감이 솟았다. - 4년 만에 문을 열 준비를 하며 운영위원장으로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과제는 무엇이었나. 기존 사무국이 해체된 상황이었기에 체계를 재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A부터 Z까지 영화제에 필요한 업무를 전담해줄 용감한 동료들을 찾는 일에 공을 제일 많이 들였다. 영화제가 1회가 아닌 21회로 시작하는 만큼 과거와의 연결성을 만들어줄 적임자 역시 절실했다. 전 미쟝센 운영팀이었던 권빛나 사무처장과 이현승 전 집행위원장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미쟝센의 정체성을 품은 사무국을 다시 꾸릴 수 있었다. - CGV용산아이파크몰이 메인 상영관이 됐다. 각 영화제를 상징하는 사이트가 있지 않나. 미쟝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지역은 용산이다. 가장 오랫동안 미쟝센영화제를 개최해온 곳에서 새출발하고 싶다는 집행부의 바람이 컸다. 상영 조건이 가장 좋은 환경에서 단편영화를 상영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 네이버가 새로운 메인 후원사로 합류했다. 극장 상영과 동시에 네이버의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김고은, 구교환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제 트레일러도 네이버TV를 통해 선공개했다. 개·폐막식은 네이버의 스트리밍서비스인 ‘치지직’에서 생중계될 예정이다. - 운영적인 측면에서 앞으로 어떤 장기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있나. 올해 영화제 재개를 준비하며 신진 창작자와 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에 대한 열망이 창작자와 산업간에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체감했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을 주도하는 감독, 배우들이 직접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심사하고 그들과 함께 모여 앉아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은 미쟝센이 유일하다고 자부한다. 영화제에서 수상해도 다음 기회를 잡기 어려운 것이 현재 신인감독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투자, 제작, 연출, 매니지먼트 등 다양한 산업 관계자들이 직접 참여해 신진 창작자들을 후원하는 행사를 올해부터 시작한다. 이처럼 다음 세대 영화인들과 현 산업의 실질적인 접점을 확장해나가는 플랫폼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관객들이 즐길 만한 이벤트를 소개해준다면. “10월13일 네이버TV에 초청작 감독들의 무빙 셀프 포트레이트 영상이 독점 공개된다. 미쟝센의 오랜 전통으로, 기발한 30초 자기소개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이 감독이 만든 영화가 궁금해진다. ‘베스트 무빙 셀프 포트레이트상’을 뽑는 투표도 10월13일부터 진행하니 꼭 참여해 주시면 좋겠다. 영화제가 끝난 뒤에는 네이버와 메가박스에서 온오프라인 기획전이 열릴 예정이다.”

[커버] 고양이를 부탁해 –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지금 이 시대의 삶과 현실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단편영화들을 조명하는 섹션이다. 젠더, 노동, 환경, 주거, 복지, 차별과 혐오, 연결과 단절 등 현재를 관통하는 사회적 이슈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동시대의 질문을 영화적 언어로 풀어낸다. 단편영화만의 자유로운 실험성과 표현을 통해 지금, 여기의 삶을 다층적으로 성찰하며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영화를 소개한다. Q. 1. 영화를 연출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Q. 2. 좋아하는 영화 혹은 만들고자 하는 영화는 어떤 결입니까. <살처분> Forced Silence 서예인 SEO Ye In | 2025 | Fiction | Color | 23min | 15 10/17(금) 14: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엄마에게서 어떻게든 독립하고자 돈이 필요한 주희는 서울에 혼자 살며 여러 일들을 전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일당을 받고 가게 된 일터가 조류들을 살처분하는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예인 감독 1. 살처분 현장 관련 기사를 읽다가, 군홧발로 닭을 짓밟아 죽여 매장했다는 문장을 접했습니다. 순간, 언젠가 망월동 묘역에서 보았던 벽화가 떠올랐습니다.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구덩이에 던지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었지요. 평소에는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았던 두 사건이, 이상하게도 한 맥락 속에서 서로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폭력을 관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맺는 폭력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며 ‘언제까지 5·18이고 세월호야’라는 한탄 섞인 목소리에 저만의 방식으로 대답해보고 싶었습니다. 2. 좋아하는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입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영화 스타일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 영향으로 저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 같지만 감독님의 방식-시선만큼은 참 독보적이라 따라해보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만의 시선을 찾고 있는데, 요즘은 절망이란 주제에 크게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절망과 살아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조금 긴 독백> A Long Goodbye 양희웅 YANG Hee Ung | 2025 | Fiction | Color | 24min World Premiere | 12 10/17(금) 14: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3년간 연기를 공부했던 규호는 꿈이었던 배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그동안 자신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었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소박하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나씩 전한다. 양희웅 감독 1. IMF를 겪은 세대였기에, 집안의 기대 속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훌륭한 직장을 얻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자랐습니다. 아마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스무살이 돼서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됐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 무작정 걷던 어느 날, 우연히 극장 앞에서 발길이 멈췄고 극장 직원에게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영화’ 표를 부탁해 한 영화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두 시간 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에는 상쾌함을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그날, 영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게 저는 영화에 빠지게 됐습니다. 2. 죽어 있는 영화가 아닌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명력을 가진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영화의 결입니다. 흐르는 것을 막지 않고, 순간의 발견들을 영화 속에 담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상호작용하는 영화. 이번 <조금 긴 독백>은 그 여정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떠나는 사람은 꽃을 산다> Those who leave buy flowers 남소현 NAM So Hyeon | 2025 | Fiction | Color | 29min(KE, KN) | 12 10/17(금) 14: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베를린에 사는 은하는 7년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준비 중이다. 23kg의 짐을 싸며 은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지 선택한다. 남소현 감독 1.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저에게는 왠지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젊었고 엄마, 아빠는 어렸고 비밀은 내게 닿지 않을 만큼 멀어서, 여느 때처럼 파란 없는 삶을 살던 저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영화를 만들게 된 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상하게도 기어이 일어나버린 일입니다. 2. 다음에는 사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항상 심각한 얼굴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든 영화들은 꽤 진지한 편인데, 평소의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언젠가는 꼭! 웃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선행학습> A Seat at the Table 손솔 SON Sol | 2024 | Fiction | Color | 16min | World Premiere | 12 10/18(토) 13: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5:4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중학교 첫 수학여행을 위해 4명씩 조를 이뤄 적어내는 날, 유진은 같이 다니는 4명의 친구들이 자신을 빼고 적어낼까 두렵다. 그리고 그날 반에서 예은의 에어팟이 없어진다. 손솔 감독 1.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오래 고민하던 중 우연히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영이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매일 반복해서 보다 보니 영화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가서는 뭐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만 앞섰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졸업도 무기한 유예했는데 이제야 첫 작품의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2. <로제타><올리브 키터리지><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같은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분명히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 혹은 어렴풋하게만 느껴왔던 감정들을 영화 속에서 과장 없이 정면으로 마주할 때의 쾌감을 좋아합니다. 진짜인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들을 좋아하며, 저 역시 그런 영화를 꼭 만들고 싶습니다. <잠들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 Passage 전예은 JEON Ye Eun | 2025 | Fiction | Color | 23min(E) World Premiere | 15 10/18(토) 13: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5:4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5년 전 옥상에서 모였지만 차마 뛰어내리지 못했던 주영과 지수.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과거 그날처럼 남은 하루를 함께 보낸다. 전예은 감독 1. 영화를 보다보면 가끔 스토리의 맥락과 관계없이, 문득 자기 내면의 처리할 수 없었던 비밀이나 미해결된 과거의 문제들이 뒤늦게 이해될 때가 있다. 작은 점 하나로 등장했던 어떤 영화의 요소 하나가 갑자기 눈앞의 커다란 창으로 열리며 나 자신과 깊이 링크되는 순간 운명적인 감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계의 일부를 흡수한 것이지만 세계 그 자체는 아닌 것, 그래서 자유로운 영화라는 것이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고 내가 실제로 살아온 체험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건 영화가 가져다주는 매우 독자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만화, 소설, 시 모두 한번쯤 나를 눈물 짓게 했지만 특히 영화를 보는 시간을 통해 축적된 수많은 감정의 탐험들이 나에게 영화를 대체 불가한 무엇으로 자리 잡게 한 것 같다. 항상 나로 하여금 비슷한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한다. 2. 그 어떤 영화들보다 살아 있고 간단하고 진실함으로 가득한 영화. 스스로 낙천가로 살면서도, 나에겐 영적인 위기에 대해서 언제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 욕구가 솔직하게 담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오른쪽 구석 위> Top Right Corner 이찬열 LEE Chan Yeol | 2025 | Fiction, Documentary | Color+B&W 28min(E) | All 10/18(토) 13: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5:4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바다 앞에 선 사람들. 이찬열 감독 1. 계기를 말한다는 건 언제나 소급적인 활동인 것 같아요. 시작할 때의 상상과 끝났을 때의 평가는 늘 다르니까요.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 변하고 배우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영화를 하게 만들었다고 콕 집어 말할 만한 계기는 정직하게 시간이 흐른 뒤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 뜨뜻미지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라는 것도 러닝타임을 오롯이 지나봐야 알게 되는 매체잖아요. 설령 먼 미래에 뇌에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120분짜리 영화에는 여전히 120분을 지나야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영화가 어쩔 수 없이 미괄식이라는 게 저는 좋아요. 2. 언젠가 멋진 SF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한태정 HAN Tae Jung | 2025 | Fiction | Color | 14min World Premiere | 12 10/17(금) 17: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2: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GV In winter, Bum, the tiger in Korea, Heads south for warmth. 한태정 감독 1. <크라잉 게임>은 디자이너였던 제게 전환점이 된 영화입니다. 파격적인 정체가 드러나는 그 순간, 그리고 다시 무너지는 캐릭터. 찰나의 순간임에도 애처로운 애정으로 반전되는 감정의 흐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한 연출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그 경험은 영화를 하고 싶다는 제 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2. 홍상수 감독의 사실감 최고봉 <강원도의 힘>과 웨스 앤더슨 감독의 독창적 미술이 담긴 <로얄 테넌바움>을 좋아합니다. 현실의 진솔함과 기발한 상상력이라는 서로 다른 미학은 제게 강렬한 자극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은 이미지는 예쁘지 않더라도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저는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특히 시각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데 자신이 있습니다. 주관적 표현이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늘 고민합니다. 관객의 시선에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릴리스> Lilies 박민해 PARK Min Hae | 2025 | Fiction | Color | 24min World Premiere | 12 10/17(금) 17: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2: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GV 아버지를 도와 근조 화환을 배달하는 세진과 남들 몰래 코스프레를 하는 릴리가 우연히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 버려진 자전거 보관소를 아지트 삼아 방과 후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박민해 감독 1. 보는 것’을 좋아해왔습니다. 무엇에든지 시선을 두고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보는 것은 나와 남을 갈라놓습니다. 그 구분은 곧 경계가 되고, 경계는 대상을 하나의 의미로 굳혀버립니다. 의미가 고정되어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오히려 눈이 멀기란 쉽습니다. 진정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물이 차오르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흐려진 세계에서는 나와 당신의 구분이 잠시 희미해지고, 어쩌면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일 수 있다는 착각이 생깁니다. 영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점을 사랑합니다. 2. 한순간 삼촌에게 들었다가 잊히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영화란 건 없어. 그냥 그게 너의 트라우마를 건드렸을 뿐이야.” 인정하기 싫지만 하루에 한번씩 떠올리게 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수많은 것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엉망이 흐른다> A Messy Day 강은정 KANG Eun Jung | 2024 | Fiction | Color | 23min | 12 10/17(금) 17: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2: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GV 생일 파티에 초대된 지우는 활동 지원사가 갑자기 못 온다는 얘기를 듣고 우연히 만난 아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휠체어를 타는 지우는 이동하는 곳까지 지원이 필요한 상황. 둘은 과연 제시간에 파티에 도착할 수 있을까? 강은정 감독 1. 시각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았고 처음 마음이 이끌렸던 매체는 미술쪽이었습니다. 미술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쪽으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으로 도망다니곤 했는데 문득 꿈을 꾸면서 꿈과 가장 닮아 있는 예술이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밤마다 극장을 가고, 자기만의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 영화를 본 사람들의 가슴이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웃거나 혹은 멍해지거나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이 신체적으로 통증이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인상 깊은 영화를 보고 나서 그렇게 느낍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한번도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순간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꽃놀이 간다> Toe-Tapping Tunes 이정현 LEE Jung Hyun | 2025 | Fiction | Color | 27min(E) | 12 10/17(금) 17: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10/19(일) 12:5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GV 지병이 있는 수미는 죽음을 앞둔 엄마의 병원비가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병원의 ‘중간 정산’ 때문에 더 이상 입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조금만 더 기도하면 엄마가 살아날 거라는 믿음을 확신하며 병원에서 난동을 피우고 강제 퇴원을 시켜 집으로 데려온다. 모든 게 뜻대로 풀리지 않지만 다음주 시작되는 꽃놀이 관광에 엄마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이정현 감독 1. 15살에 영화 <꽃잎>의 오디션에 붙은 후 영화 공부를 위해 하굣길에 항상 충무로와 종로극장에 들러 영화를 감상하는 게 저의 행복이었습니다. 학교 쉬는 시간마다 다이어리 앞에 자리한 반이 뜯겨나간 영화 티켓을 꺼내보며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 너무나 두근거리고 설레하며 영화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영화의 매력에 빠져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학부 때 영화과 연출전공을 선택하였고 이후 중앙대학교 영상대학원에 진학하여 첫 영화 <꽃놀이 간다>를 만들었습니다. 20대 때 한창 가수로 활동할 때 한 인터뷰를 보면 40대에 꼭 영화감독에 도전하고 싶다는 인터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덧 제가 40대가 되어 결혼과 출산을 하고 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전보다는 넓어진 것 같아, 용기내어 영화감독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2. 평소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다큐멘터리도 좋아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날것의 영화를 좋아하고, 차분하면서도 잔인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도 좋아합니다. 두 거장의 작품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식사> Eat With 박선영 PARK Seon Yeong | 2024 | Animation | Color | 10min(E) | All 10/17(금)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1 0/19(일) 15: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독거노인의 집에 홀로 낙오된 어린 바퀴벌레. 고군분투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다. 그런 어느 날, 바퀴벌레는 노인이 가진 외로움이 자신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존재조차 들켜서는 안되지만 바퀴벌레는 노인과 밥을 함께 먹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박선영 감독 1. 강렬하게 남았던 풍경들을 이미지로 기억하곤 했어요. 특별히 아름다웠던 순간들이라든지 슬펐던 모습들이라든지, 그런 것이 늘 하나의 그림으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이제 그 시간으로 돌아가진 못해도,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그때랑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저는 굉장히 좋았어요.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는데, 이때부터 내가 기억했던 풍경들이 내 안에서만 존재해서, 내가 사라지면 어디에도 없던 것들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이 그림들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 관객에게 한순간 지나가는 풍경처럼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깊게 곱씹으면서 이런저런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 이미지 자체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함께하고 떠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라요. 그 순간만큼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잠수금지> No Diving 장현빈 JANG Hyun Been | 2024 | Fiction | Color | 16min(E) | 12 10/17(금)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9(일) 15: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수한은 목욕탕 폐업을 앞두고 마지막 목욕을 한다. 장현빈 감독 1. 평일 오전, 출장지에서 짬을 내 목욕탕에 들렀다. 평소엔 퇴근 후나 주말에만 가던 터라 한낮의 목욕탕이 이렇게 생경할 줄은 몰랐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자욱한 증기 속에서 백발의 노인들이 죽은 듯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선 어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영화의 꿈을 접고 회사 출장지에서 목욕탕에 들르는 걸 낙으로 삼던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목욕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2. 좋은 영화를 보면 화면 너머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가 아침마다 씻고 나오실 때 풍기던 비누 향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욕실의 공기. <잠수금지>를 만들면서 그런 감각을 스크린 위로 불러오고 싶었다. 비록 영화가 허상이라 해도, 가끔은 그것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찰나를 믿는다. 관객이 마치 오감으로 체험한 것처럼 감각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당신이 상상한 것 그 이상으로> More than you can imagine 권지용 KWON Ji Yong | 2024 | Fiction | Color | 22min(KN, E) | 12 10/17(금)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9(일) 15: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한인 후손 4세인 기암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달 토끼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달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그는 한국항공우주국의 우주비행사 선발 1차 서류 전형에 합격한다. 가족들은 그의 한국행을 걱정하고, 기암은 가족들과의 작별을 준비한다. 권지용 감독 1. <당신이 상상한 것 그 이상으로>는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꿈을 위해 버티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어 만든 작품입니다. 영화 공부를 위해 쿠바로 떠난 저와 쿠바에서 우주여행을 꿈꾸는 기암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쿠바국제영화학교(EICTV)의 첫 한국인 학생으로 쿠바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켜온 한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 싶었습니다. 2.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연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당신이 상상한 것 그 이상으로>를 상영 후 한 쿠바 관객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던 제 추억이, 한국 할머니의 달 토끼 이야기가 쿠바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게 좋았습니다. 저는 SF나 판타지 장르를 좋아합니다. SF나 판타지 배경에 가족, 사랑, 학업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비유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세계관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넣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엄마수업> motherhood 곽재민 KWAK Jae Min | 2024 | Fiction | Color | 24min World Premiere | 15 10/17(금)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9(일) 15:3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정희는 엄마가 되고 싶다. 곽재민 감독 1. 좋은 이야기가 나를 구원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어린 시절,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모아두고 교실에서 썰을 푸는 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아마 변사가 아직 있었다면 진로가 달라졌을지도… 농담이다. 영화는 이야기가 담기는 가장 아름다운 틀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작가로 4년째 일하고 있지만 왜인지 아직도 작가라고 소개하는 것도 부끄럽고, 영화를 합니다, 라는 말도 부끄럽다. 그래도 왜 하냐고 묻는다면… 강백호처럼 답하고 싶다. 영화, 좋아합니다! 이번엔 진짜라고요. 2. 취향만 놓고 보자면 플롯이 주인공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은 또 만들어질 수만 있다면 다 훌륭한 영화로 느껴져서 고민이다. 다만 영화가 그저 그런 이야기에서 좋은 이야기로 발돋움하는 순간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런 순간은 영화를 툭 하고 꺾어버린다. 그러면 나는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어떤 장르든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다. 그런 한끗 차이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어느새 부는 바람> The Consolation of the Wind 박지윤 PARK Ji Yoon | 2024 | Fiction | Color | 15min | 12 10/18(토) 17:4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작가 지망생 정효는 저렴한 월세방을 찾다가 어느 방을 보게 된다. 박지윤 감독 1. 처음으로 영화를 ‘봐야겠다’가 아니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는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였습니다. 인간의 심연과 삶의 아이러니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강렬함에 충격을 받았고, 영화라는 언어가 가진 표현 방식에 매료되어 ‘영화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뒤흔들 수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습니다. 이후 단편영화를 만들어보면서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이상하게도 행복했고 그때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겠다’라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2.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쉽게 닿지 않는 곳을 비추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과 순간의 한 조각을 꺼내어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창동 감독님의 <박하사탕><밀양>과 봉준호 감독님의 <마더>를 좋아합니다. 인간을 깊이 바라보기에 잔인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인물이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 단 하나의 감정보다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 안에서 나름의 선택을 해나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삶의 결이고, 만들고 싶은 영화의 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Burden 유희련 YOU Hee Ryun | 2025 | Fiction | Color | 18min(E) World Premiere | 15 10/18(토) 17:4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20대 청년 성준은 허름한 단칸집에서 90살이 된 고령의 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한때 불같고 거침없던 성격 그대로, 할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거뜬한 몸과 강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어느 날, 사소한 돈 문제로 시작된 두 사람의 말다툼이 점점 격해지고, 성준은 눌러왔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분을 터뜨린다. 유희련 감독 1. 2020년, 저는 현대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타국에서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며 한 외곽 마을에 고립되었습니다. 외출이 금지된 상황에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을 고민하다가 비디오아트라는 명목하에 플랫메이트를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경험은 ‘영화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저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듬해 귀국 직후 합격 소식을 받았으나, 이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있었기에 현대미술과 영화라는 두 갈림길에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 각본으로 실제 배우들과 영화를 먼저 찍어보자 다짐했고, 첫 단편을 연출한 이후 비로소 영화 연출에 진지하게 매진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2. 저는 장르에 상관없이 무드가 어두운 영화를 지향하며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를 좋아합니다. 최근 작품은 드라마를 시도했지만, 본래는 시공간의 이동이나 미지의 영역, 타임루프 같은 소재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 <버섯이 피어날 때> when mushroom blooms 이종서 LEE Jong Seo | 2024 | Fiction | Color | 22min | 12 10/18(토) 17:4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9살 현서는 항상 같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던 옆집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낯선 아저씨가 아파트 정원에 무언가를 파묻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무도 그 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아파트 정원에서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종서 감독 1. 솔직히 고백하겠다. 이 영화는 온전히 나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공간을 영화로 담아내고자 하는 열망은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렇다. 내 생에 가장 섬세하며 민감했던 시절을 그때의 공간에서 담아내고 싶었다. 혹은 잊힌 줄 알았던 무언가를 떠올려내 오늘 여기로 불러내고 싶었다. 그게 나에겐 영화를 만들고 싶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기억을 현재로 데려오는 것, 잊지 않았음을 표명하는 것, 그럼으로써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내보는 것. 2. 누군가의 삶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영화들에 언제나 마음을 빼앗긴다. 스크린을 통해 잠시라도 다른 생을 살아내게 하는 영화들. 아주 개인적인(그래서 보편적인) 삶을 아름답게 관조하거나, 고통스럽게 후벼파거나,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거나 하는 그런 영화들. 나란 사람의 작디작은 세계는 그런 영화들을 통해 아주 조금씩 넓혀진다는 생각도 이따금 하게 된다.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싶고, 만들고 싶다. <안경> The Glasses 심규원 SHIM Gyu Won | 2024 | Fiction | Color | 24min(E) | 12 10/18(토) 17:4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초등학생 하늘이의 엄마는 방과 후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어 매일 저녁 근처 중학생들이 하늘이네 집에서 공부를 한다. 어느 날, 하늘이는 새로 맞춘 안경을 집에서 잃어버린다. 없어진 안경을 찾던 중에 하늘이는 담배를 피우는 예준과 건우를 발견하고 그들을 의심하게 된다. 심규원 감독 1,2. 중학생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틀어주셨어요. 당연히 반 친구들 모두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고 지루한 내용에 실망하며 엎드려 잤지만, 저 혼자 그 영화에 빠져들어 끝까지 봤던 기억이 나요. 전혀 다른 상황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영화 속에서 제 자신과 제 삶을 만나고 위로받았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영화를 ‘영화적’으로 접하게 된 것 같아요. 이후 몇년이 흘러 20대 초반,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자꾸만 말이 입 안으로 삼켜지면서 점점 나의 언어를 잃어가고, 내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때 그냥 영화제작 수업을 듣게 됐어요. 처음엔 정말 그냥이었는데, 지루한 시나리오를 쓰고 구린 영상을 만들다보니 내 안에서 뭉친 실타래의 시작점이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두번의 계기로 영화와 많이 가까워졌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영화들을 가장 좋아합니다.

[인터뷰] 달려라,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하니> 원작자 이진주 작가

마른 체구와 작은 키에도 남들에게 쉽게 지지 않는 악다구니를 쓰는 아이. 그러나 마음 한켠엔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짙은 외로움을 품은 아이. 하니가 품은 서사와 설정은 이 작은 소녀를 끌어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985년 <보물섬>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달려라 하니>는 3년 뒤 여름, KBS2에서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직 달리는 것 외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여자아이는 스승 홍두깨를 만나, 자신을 지지하는 창수를 만나 비로소 외연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제 하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다.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을 통해 창작 IP로서 <달려라 하니>의 가능성은 입증되기에 충분하다. 새 관객을 만날 채비를 마친 하니를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 그를 사랑으로 낳고 기른 원작자 이진주 작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 <달려라 하니>40주년을 맞이하여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극장판이 탄생했다. 처음 이 제안을 받았을 때를 기억하나. <달려라 하니>가 잡지 연재를 거쳐 TV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고, 이제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나오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마지막 꿈이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하니와 함께 애리가 공동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내게 신선한 도전이자 충격으로 다가왔다. 원래 <달려라 하니>는 ‘새벽을 달리는 나애리’로 구상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하니 캐릭터가 인기를 얻으면서 출판사의 요구대로 중학생 하니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 바람에 조연으로 밀려난 애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이제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어 행복하다. - 원작자로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시나리오에 의견을 보태기도 했나.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의 스토리 구성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달려라 하니>속 원작 캐릭터의 성격과 개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오직 감수만 했다. - 2025년의 하니와 애리는 Z세대로 발돋움해 있다. 버즈를 끼고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애리,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하니 등 다음 세대로 전환된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한창 자라는 10대 청소년이 배우는 우정, 사랑, 인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엔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감추었던 감정을 이 시대 어린 세대가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면 좋겠다. - 반면 <달려라 하니>원작에도 당대성이 포함돼 있다. 혼자 사는 하니는 지금이었다면 청소년 복지를 통해 쉼터 지원이나 보급품을 받았을 테고, 일정 거리가 생겨난 요즘과 달리 따뜻하게 연결된 사제지간도 당대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작가로서 그 당시 나의 바람은 아무런 계산 없이 아껴주는 사랑이야말로 성장기를 거치는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현시대를 살아보니 더더욱 절감한다. 오직 과거의 감정에 의지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친구와 동료, 선생님과 제자 등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가는 성숙한 수용이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 한편의 작품은 다음 세대에게 계속 곱씹어지고 이야기되면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듯하다. <나쁜 계집애: 달려라 하니>로 <달려라 하니>를 처음 접할 어린 세대에게 하니와 애리가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나.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는 진정한 용기와 따뜻한 우정, 조건 없는 사랑의 무게는 언제든 한결같다고 생각한다. 하니와 애리를 처음 접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지점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 메시지가 가닿길 바란다. - 이번 영화에서 창수가 너무 잘생기고 멋있어졌다. (웃음) 완벽해진 창수를 어떻게 바라보았나. 코흘리개 찡찡이가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다니. (웃음) 이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기뻤다. 사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는 열정과 그 사람을 위하는 순수한 사랑이 창수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가슴 뭉클했다. 나도 그런 창수를 제일 좋아한다. - 개인적으로 <달려라 하니>만큼 <천방지축 하니>도 좋아했다. 왼발 깽깽 오른발 깽깽, 우리의 <천방지축 하니>는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을까. <달려라 하니>나 <천방지축 하니>모두 나의 분신이자 내 딸들이다. 이렇게 돈이 부족한 아빠를 만나 미안한 마음뿐이다. 돈을 많이 들여 꾸미고 치장해서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고 싶은 마음만은 정말이지 굴뚝같다. - <달려라 하니>TVA가 방영되던 당시, 하니의 인기를 실감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달려라 하니>이전에도 청소년 대상으로 ‘하니 시리즈’를 여러 편 발간했는데 그럴 때면 팬레터가 매일 라면 박스로 한 박스씩 배달됐다. 우체부 아저씨께 정말 죄송했다. (웃음) - 올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연이어 개봉했다. <퇴마록>부터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까지, 작가가 생각할 때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 산업이 주축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달려라 하니>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그동안 다른 집 자식들은 수백억원씩 공들여 세계를 넘나드는 축제를 벌이는데, 우리 하니는 그 예산의 몇십분의 일도 안되는 비용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빚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 제작진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품는다면 출판과 잡지가 다시 부흥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깊이 있는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끈기 있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제대로 된 연출과 튼튼한 기본기를 지닌 다음 세대의 작가들을 만나길 기도한다. - 마지막으로 이진주 작가의 서정적이고 용기를 잃지 않는 인물들을 사랑하는 오랜 독자들에게 한마디를 남긴다면. 잊지 마세요.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용기와 서로를 감싸는 참된 우정, 세상을 아우르는 진정한 사랑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습니다.

[인터뷰] 세계가 나를 부정할 때, <디어 스트레인저>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

뉴욕에 사는 아시안 부부 겐지(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제인(계륜미)은 <디어 스트레인저>의 두 기둥이다. 부부가 겪는 일상의 균열과 정념의 대치가 영화가 직조한 ‘폐허’의 세계를 완성한다.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보여주는 서늘한 분노의 얼굴은 그 어떤 외적 폭력보다도 강한 긴장을 부른다.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그의 과정을 부산에서 목격했다. - ‘세계에는 갑자기 불합리할 정도로 일상을 무너뜨리는 사태’가 일어나며, 이에 대해 겐지가 보이는 반응을 집중해서 탐구했다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측면에서 겐지는 본인이 <드라이브 마이 카>속의 인물 가후쿠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긴 하지만 유사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가후쿠는 질문에서 언급한 그런 사태들에 대해 눈을 감고 전부 묻어둔 채 조용히 살아가려는 인물이었다. 반면에 겐지는 더 충동적이고 이런 사태들을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그런 노력이 결국 상황을 악화시키며 점차 파멸에 들어서는 사람이다. 두 캐릭터간의 차이는 아마 두 감독이 지닌 본질적인 재질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 그렇다. 마리코 데쓰야 감독이 그간 보여준 충동의 정념, 폭발적인 감정이 <디어 스트레인저>에도 녹아 있다. 그래서 처음 <디어 스트레인저>의 각본을 봤을 때 <디스트럭션 베이비>처럼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싸우는 장면들이 많겠군…’이라고 생각했세계가 나를 부정할 때다. 그런데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할 일이 많진 않더라. (웃음) 마리코 감독님이 기본적인 태도는 유지하되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육체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이 세계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토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생각이었다. - 대사의 90% 이상이 영어다. 낯선 타지에서 영어 연기에 도전하는 일은 어땠나. 어느 정도 우려했으나 결과적으론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웃음) 우선 제작진의 도움이 컸다. 이번 현장은 적은 규모의 제작진으로 꾸려졌다. 특히 상대역인 계륜미 배우의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연기 덕에 겐지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다시금 계륜미 배우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언어의 힘은 무척이나 강하고 다양하다. 가능하다면 영어뿐 아니라 한국, 대만, 유럽 등 다른 언어권의 작품에도 도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연기하는 동안 난 무모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새로운 도전에 임해왔다. 스스로 내 커리어를 붕괴시킬 만한 도전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지금의 시스템에 안주하지 않는 쪽에 더 마음이 간다. - 계륜미 배우와의 협업에 대해 더 듣고 싶다. 겐지와 제인은 카이의 실종 전에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일상 속 표정에도 항시 긴장감을 유지하자고 협의했는지. 중요하게 논의했던 지점이다. 대본을 함께 봤을 때부터 긴장감이 높은 사이로 그려져 있었으나 우리 둘은 ‘그래도 둘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석하고자 했다. 일상을 보내며 여러 문제를 겪고 압박에 시달린다 해도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며, 관계를 유지하려는 바람을 지니고 있단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에게도 둘의 애틋함을 살릴 장면을 꼭 찍고 싶다고 제안했고 촬영하게 됐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그 장면은 편집됐더라. (웃음)

[인터뷰] 헛수고하는 인간들을 위한 가을 소나타,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작품의 결말 내용까지 포함한 스포일러 인터뷰입니다. 띄어쓰기 없는 제목부터가 함정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 25년 직장 생활 끝에 해고된 만수(이병헌)에게는 분명 다른 길들이 있었다. 집을 팔 수도, 아내의 경력을 되살리는 데 힘써볼 수도, 조금 비굴해지긴 해도 장인, 장모의 도움을 받아볼 수도 있었겠으나 남자는 모든 가능성을 외면한 채 오직 하나의 길만을 선택했다. 경쟁자들을 죽여서라도 예전의 자기를 되찾는 것이다. 해고와 함께 해체된 정체성은 달리 말해 가장, 남편, 아버지라는 진부한 이름이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안 삼은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약 20년 전에 낙점해, <스토커>(2013) 이전부터 <도끼>라는 제목의 영어영화로 시나리오를 기획한 바 있다. 먼저 영화화를 시도한 덕분에 판권을 보유하고 있던 코스타 가브라스 부부가 이 과정에 기꺼이 협업했고 박찬욱 감독은 크레딧의 말미에서 그 수고로움을 향한 헌사를 남겼다. 여기에 김우형 촬영감독, 배우 이병헌, 이경미 감독과 시리즈 <동조자>를 함께한 작가 돈 매켈러 등이 합류했으니 박찬욱 감독 필생의 작업이라 할 만하다. 시간의 포화를 견디는 동안 <어쩔수가없다>가 원작 소설의 우울하고 건조한 묘사에 블랙코미디를 채색한 것만큼 새로운 자태가 더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적 몰락의 희로애락을 연주하는 박찬욱의 사계다. 그의 한국은 언제나 일견 가상의 영화적 장소에 가까웠고 <어쩔수가없다>의 교외엔 환상처럼 흘러가는 계절이 배경막으로 더해졌다. 나루세 미키오를 부르는 가을의 부운 위로 묵직한 채도를 더한 이번 신작은 북한식 권총, 엉뚱한 2인조 형사,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최고급 종이와 LP와 위스키 애호가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기어코 방백하는 골계미 넘치는 인물들을 흐트러진 낙엽들처럼 수놓는다. 그 가운데 익히 사랑받는 대담한 매치컷과 사물의 시점은 더욱 과감해졌고, 감정적 이입과 관찰자적 중립을 하나의 보폭 안에서 성큼 내딛는 역동적 카메라워크가 어지러운 황홀경도 안긴다. 감독의 작업을 종합하건대 <어쩔수가없다>는 한층 직접적으로 세태를 불러내고 정념을 걷어낸 영화처럼 보이는 한편, 숏의 언어는 더욱 완숙해져 비범한 형상의 악보를 이룬다. 3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개막작으로 참석한 박찬욱 감독과 해운대 인근에서 영화제 공식 일간지 제작을 겸해 두 차례의 인터뷰를 가졌다. 가을의 당도를 체감하며 나눈 두 번의 대화를 종합하여 전한다. - 행복한 중산층 가족의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합니다. 사이 좋은 부부와 적당한 터울을 이루는 두 자녀, 리트리버 두 마리까지 이른바 이상적인 정상성을 구현한 오프닝 시퀀스가 박찬욱 영화의 도입부라는 점을 낯설게 느끼는 관객들도 있겠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가족의 초상을 담은 단편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따로 떼놓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완결된 시퀀스를 만들자는 거였는데, 여기서 필요한 단편의 삽화다움이란 작지만 불길한 암시를 심는 것이죠. 정상 가족의 풍경화 속에 만수(이병헌)의 알코올 문제가 불쑥 힌트로 주어지는 겁니다. 영화의 끝에서 두 번째 신에서 다시 집 마당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오프닝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분위기 속에서 대구를 이루게 하고 싶었어요. 결국 첫 마당 신에서 마지막 마당 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영화인 거죠. - 물질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는 근간이 되면서 경제적 부침을 마주한 개인이 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세태가 <어쩔수가없다>의 배경입니다. 절대적 가난을 제재 삼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가 보기엔 인물들이 너무 좋은 집에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집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선 고심이 많았던 게 사실이예요. 만수의 집은 지방 타운하우스 동네에서도 외곽에 자리한 오래된 주택으로 설정했어요. 중심에서 적당히 밀려나길 선택하면서 얻어낸 집이고 유년의 집을 되찾았다는 개인적인 의미도 있을테니 이것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고집을 부릴 법하겠다고 봤어요. 온 재산을 쏟아부어 집 사고 리모델링까지 했을 테니 은행 빚도 많은 것일테고. 범모(이성민)는 장인 집이라는 설정이기도 하죠. 한국인들은 이런 부동산적 가치의 뉘앙스를 나름대로 셈할 텐데 외국인들이 보기엔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엄청난 부자들 아니냐고 더 오해하면 안될 텐데. - 문 제지의 선출(박희순) 역시 섬 속 산장에서 중년의 ‘로망’같은 것을 실현하는 바람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한명도 없는 영화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사실은 초기 각본 단계에서 한명이 더 있었어요. 원래는 죽는 사람이 4명이었고 한 사람이 아파트에 산다는 설정이었죠. 새벽마다 조깅을 하는 남자예요. 만수가 그걸 지켜보다가 총을 들고 으슥한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남자가 만수를 먼저 알아봐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라 옛날에 만수가 ‘올해의 펄프맨 ’상 받을 때의 얼굴을 기억하는 거죠. 얼떨결에 대화를 나누고보니 글쎄 남자가 최근에 취직을 했다는 거예요. 안 죽여도 되겠다 싶으니 안도한 만수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까지 꿇고 축하한다고 펑펑 울어요. 그런데 남자가 이어서 말하기를, 지금 회사는 너무 작고 후져서 오래 있을 데가 못 되고 이직 자리를 알아본다고 덧붙이는 그런…. 실제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하나 보여주고 싶어서 넣은 캐릭터인데 영화의 전체 구조상 만수가 계획하고, 죽이고, 처리하는 과정을 4명까지 이어가면 리듬이 쳐질 것 같아 지금 버전으로 다듬었을 뿐이에요. - <3인조>와 <복수는 나의 것>의 노동자, 자본가 인물들을 생각하면 <어쩔수가없다>까지 묶어 자본주의 부조리극 연작으로 지도화해 볼 수도 않을까요? 다만 만수가 (자신이 블루칼라라 주장하는) 중간관리자라, 중산층 개인의 절망을 바라보는 영화의 조도가 한층 희극적으로 뒤틀려보입니다.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당장 밥 못 먹을 처지의 사람이 아니죠. 제가 전세계 보편의 중산층적 모순을 말할 처지는 아닌데,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비교되는 시대에 갈수록 중산층의 욕망이란 것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전락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내 자녀의 교육이라든가, 내 보금자리가 목숨처럼 소중한 이유야 각자에게 있겠지만, 그걸 빌미로 연쇄 살인까지 정당화하는 캐릭터를 통해서 달리 보이는 것도 있기를 바랐습니다. - 제조업이 몰락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미국 소설과 비교해 <어쩔수가없다>에 한국 사회의 풍속도로서 새롭게 반영된 것이 있다면요. 집에 대한 집착은 원작에는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남편은, 아빠는 이래야한다’는 상자 안에 갇힌 만수에게 짙게 깔린 가부장적 정서야말로 한국적인 지점인데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병헌 배우가 미묘한 지점까지 잘 표현해줬어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요소가 스스로를 ‘가장’이라고 일컫는 남성성에서 나와요. 우리말로는 가장이란 단어가 명확하게 있지만 해외 상영 시 영자막에선 ‘헤드 오브 패밀리’라고 풀어써야만 하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절절하니 불쌍한 면도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하게 굴 때는 우스워지는 그런 거지요. - 그런가하면 <어쩔수가없다>의 제지업 종사자들은 직업적 자아에 자신의 온 정체성을 일치시켜온 초상들이라 연민이 갑니다. 아날로그적, 탐미적 취향의 소유자들이기도 하고요. 좀더 점잖고 우아한 버전으로는 <헤어질 결심>의 장해준 형사(박해일)도 떠오르는데요. 어느 시대든, 어느 직업이든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죠. 저도 남 얘기 같지 않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안 해요. 자기 직업이 곧 삶 그 자체인 사람은 가여운 데가 있죠. 실직하고 나면 껍데기가 되는 남자들에게 현명한 아내들이 삶의 여러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권하고 격려도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현실성도 부족하고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는 남편들이 제 발로 비극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인 거예요. - 만수가 잠재적 살해 대상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왜 중요했을까요. 다 비슷한 남자들이죠. 직업인으로서 선출은 조금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만수처럼 살인의 비전문가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선 관찰을 하고 꼼꼼히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살인이 어려워진다는 역설을 주고 싶었죠. <어쩔수가없다>에서 매끄러운 살인을 보여줄 필요는 없죠. 오히려 돌발 상황들, 그로부터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고요. 준비를 하면 할수록 일이 쉬워져야 하는데 이 경우엔 반대라는 점이 관객의 마음에 남기는 작용도 중요했어요.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본능적으로 ‘아, 저기서 좀 잘해야 할텐데’ 하면서 살인을 응원하는 셈이 될 때의 딜레마에 총력을 기울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아가씨> <헤어질 결심> <어쩔수가없다>에서 공통되게 비추는 여성 인물들의 미덕으로는 비극에 대처하는 적응력과 강건함이 있습니다. 남편을 향해 총을 겨눈 일촉즉발의 순간에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네 태도가 문제라고!” 하고 외치는 아라(염혜란)의 대사가 절창이었어요. 아, 저도 그런 게 좋아요. (웃음) 현실이라면 짧고 단순한 말을 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인데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서 여유 있게 대화할 때나 할 법한 말들을 한다는 게. 만수가 범모에게 총을 겨누고서 “너는 와이프의 현명한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잖아. 음악카페가 뭐 어때서!” 라고 어이없이 다그치는 순간도 비슷하죠. 사랑하는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더 거칠게 말하면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사내구실을 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남성성이 곧 사랑하는 가정을 붕괴시키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원작에는 없지만 주인공의 살인을 아내, 그리고 가족이 알게 된다는 설정을 넣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죠. 어쩌면 이 대목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결정적 요인일 겁니다. - 고추잠자리 신에서 범모에게 하는 말로 볼 때 만수는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자기 것은 잘 못 보는 인간인가요,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모순을 다 아는 인간인가요. 후자죠. 다 알고 있어야 하죠. 경쟁자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이것저것 저울질하며 합리화하긴 했지만 할 수만 있으면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다고 믿는 거예요. 그런데 덫에 걸렸죠. 한번 범죄에 뛰어든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됐고, 선출 앞에서 읊조리듯이 이미 두 명이나 죽은 뒤부턴 이제와 포기하면 앞선 이들의 죽음이 헛된 개죽음이 되는 셈이니까. 스스로 자처한 진퇴양난의 상황인 거지요. - 구제역 때문에 키우던 돼지들을 모조리 산 채로 묻어야 했던 만수 아버지에 관해선 혹시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었을까요. 거의 대부분 찍은 대로 쓰긴 했는데, 아버지의 총이 북한제 권총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형사 코미디 분량이 좀 더 있었죠. 두 형사가 점입가경의 오답으로 향하는 시퀀스인데, 조폐 공사의 비리에 북한의 개입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국정원까지 나서는 거예요. 용의자의 동태를 살피는 모습은 퍽 예리한가 싶은데 만수 입장에서 보기엔 형사가 내는 결론이 황당하게 흐르는 거지요. 뜻밖에 완전 범죄가 되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국정원까지 개입하면 결국 탄로 날까 혼란스럽기도 한 상황을 그렸어요. 다 찍어두었고 배우들이 연기도 잘했지만 부조리한 코미디가 지나치게 극대화되면 그동안 쌓아올린 최소한의 개연성마저 무너질 수 있겠다 싶어서 없앴지요. 그냥 둘 걸, 싶기도 하고. (웃음) - 표피에선 신자유주의적 인간 소외나 AI의 출현과 같은 동시대적 주제가 돋보이지만, 가족 구조 내 남성성의 분투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분히 고전적인 뼈대를 품은 이야기인 것도 같습니다. 원작 소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와 별개로 감독님의 이목을 끈 또다른 작품은 없었는지요. 부끄럽게도 이 작품을 하겠다고 한참 각색을 하고 있는 도중에야 로버트 헤이머 감독의 영화 <킹 하츠 앤드 코로넷>(1949)을 알게 되긴 했죠, 주인공이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예요. 제가 한참 각색에 몰두하던 중에 주위의 누군가가 이 작품도 아냐고 추천을 해준 겁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납치범 백 선생(최민식)을 유족들이 한 명씩 응징하는 장면을 쓸 때 제게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물론 그땐 저조차도 <오리엔트 특급살인>과의 유사성을 애초에 의식하며 쓴 거지만. 가족의 집에 내려앉은 잔영이란 - 감독님의 영화에선 매치컷이 갖는 위상이 있습니다. 유려한 전환의 기능 이상으로 강렬한 미쟝센으로 각인된다고 할까요. 이번엔 특히 제지 공장과 연결되는 숏이 독특한데요. 가족의 한때를 보여주는 신에서 해가 서서히 저무는 이미지부터 시작하지요. 근경에서 원경까지 단계별로 인공조명을 여럿 설치한 다음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어두워지게 설계했습니다. 현실이라면 우리 눈엔 해가 단숨에 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요. 비현실적인 꿈결의 느낌을 주고자 한 거죠. 그다음 이미지가 서서히 일그러지면서 제지 공장 수조 위의 스크루 속에 휘말리는 느낌으로 연결됩니다. 공장 답사 중 착안했어요. 거대한 수조에 물이 쏟아지고 스크루가 돌아가면 그 위로 펄프 덩어리들이 떨어지고 분쇄되는 광경이었죠. - 문 제지의 면접을 권유받은 만수가 마트의 중간 관리자에게 작업복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장면 말인데요. 신발과 장갑까지 벗고 사라진 남자의 자취가 한 번의 죽음을 알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자 직원들 소리가 들리니 상황 상 만수는 빨리 도망가려고 그랬겠지만 비유적으로는 실로 그렇죠. 이미지로서 인물들에게 들이닥친 가혹한 운명의 힘 같은 것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미리가 은행에서 온 체납 경고장을 읽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휘어지면서 강한 역광이 치고 들어오지요. 만수가 면접을 볼 때 집요하게 햇볕이 따라오는 장면은 사과나무를 심을 때 아들이 햇볕을 가려주는 장면과 쌍을 이루게 하고 싶었고요. 기본적으로 김우형 촬영감독이 카메라로 새로운 테크닉을 시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주저도 없고 대담하기도 한 촬영감독이라 그래요. 사람 본연의 기질은 조용하고 재미도 없지만. (웃음) 디지털 후반작업에서의 숏 사이즈 조절이나 흔들림 효과 같은 것은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 미술의 양식성은 감독님의 전작들보다 한결 순한 인상이지만, 최근의 한국영화 스크린에서 보기 힘든 강한 색감과 대비감을 낯설게 느끼는 관객도 있지 않을까요. 1970년대 미국 영화에 자리잡은 테크니컬러의 느낌을 원했어요. 사실은 오랫동안 필름 촬영을 고려했던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즈음에 국내 필름 현상소 하나가 다시 열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닫은 걸로 알고 있는데 하여간 그때 테스트를 많이 했어요. 우리가 막연하게 감으로 생각했던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필름이 만드는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죠. 똑같은 조명, 똑같은 피사체를 디지털로도 찍고 필름으로 찍어서 비교해가면서요. 물론 저는 언제나 필름 룩을 원해왔습니다. 이번엔 보다 정확한 데이터와 테스트를 통해 그 당위를 얻고자 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디지털 촬영을 택했지만 이전 작품들보다 컬러와 콘트라스트를 확실히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들 품위 있는 화면을 만든다고 할 때 채도가 높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자유롭게 접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디지털영화에 필름 룩을 입히는 그레인 레이어 기술도 한층 진화했더군요. 이를테면 1960년대에 출시된 특정 감도와 특정 밀리미터, 특정 브랜드의 그레인을 탁 짚어 구현해주는 정도니까. 배경과 피사체를 세밀히 구분해서 적용할 수도 있고요. 김우형 촬영감독, 컬러리스트와 함께 아주 면밀히 디지털 후반 작업에 공들였습니다. - 색은 계절 변화에서도 두드러져요. 감독님의 영화 중 이토록 초록의 영화, 그리고 사계절의 영화가 있었던가요. 이번 작품에서는 자연 환경이 많이 등장하고 식물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이 그의 범죄 행위와 잠자코 대비를 이뤘으면 했어요. 꽃과 풀이 절정을 이룬 완연한 여름으로 시작해서 현란한 색채를 입은 단풍이 첫 번째 살인의 배경이 되고, 낙엽을 거쳐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이는 겨울의 초입까지 식생의 변화를 담았습니다. “와라 가을아!”가 만수의 첫 대사지요. 이때 만수의 바람은 늦여름 더위가 가시고 식물이 열매를 맺는 결실의 계절로 가고 싶다는 것일 텐데 실제로 닥쳐오는 가을은 상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인 거예요. - 사체 훼손의 현장으로 유리 온실을 택하는 남자라는 점이 만수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실은 곧 만수의 내면인 셈인데 그곳까지 시체를 끌고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면 다분히 무언가에 잠식된 상태인 거겠죠. 온실 미술도 집만큼 어려웠어요. 현실적으로 적당해 보였으면 했는데, 대단히 특별한 취향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애착을 갖고 직접 아늑하게 가꾼 온실인 거예요. 특히 그가 몰두하는 분재라는 행위는 좀 양면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할지, 인위적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구부리는 점이 폭력적인 한편 지극한 정성을 쏟아 자연 상태보다 훨씬 오래 살게 만드는 애호의 행위이기도 해요. - 앞서 공개된 연여인 작가 포스터와 공명하는 초현실적인 신도 온실에서 두드러집니다. 만수의 분재 안에 아들의 미니어처가 보인다든가 하는. 꿈이니까 거의 자유 연상처럼 썼어요. 이번 시나리오를 쓸 때 특히나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마치 방금 꾼 꿈을 받아적듯이 쓴 신입니다. 왜 그런 이미지가 필요했느냐를 설명하는 건 좀 사후적인 일이 되겠는데 아들과 아버지로 맺어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죠. 만수가 멋진 아빠 놀이에 스스로 심취하는 구간이 있는데, 친구와 핸드폰 도난 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경찰서 앞 계단에서 붙잡아 위증하라고 주입하잖아요. 팔려고 내놓은 집에 눈독 들이는 동네 친구한테 엄포를 놓는 식으로 제압도 하고. 딴에는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건데, 왜냐하면 앞서 완수한 두 차례의 살인으로 얻은 자기 효능감이 무너졌던 가장, 아버지로서의 자신감도 일으켜 세운 것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그래서 아들의 담배를 발견한 뒤에 사과나무를 심는 장면에서도 “엄마 몰래 네가 직접 버려라” 하고 제법 쿨한 태도죠. 만수의 모든 행동이 결국 제 무덤을 파는 셈이 되는, 서사적 경로를 엮고 싶었습니다. 아들이 그 담배를 피우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온실 천장을 통해 아버지의 범죄를 목격하게 되는 것처럼. - 가족들이 만수의 살인을 눈치 챈 이후의 집안 곳곳을 잇는 교차편집은 그중 누군가의 꿈처럼 몽환적으로 연결됩니다. 악몽을 꾸는 아들의 모습과 함께 전기톱 소리를 넣었습니다. 만수가 실제로는 전기톱을 써서 고시조를 처리한 게 아니지만 아들에게는 깊이 자리 잡은 거예요. 시원(김우승)의 꿈과 트라우마에 방점을 두면 이 가정은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결말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겠지요. 낙관적으로 전망한다고 해도, 적어도 시원이만큼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되겠죠. 가족구성원 각자가 저마다 데미지를 입은 상태로 아주 어려운 투쟁을 겪어나가야 할 거예요. - 부부가 아들이 훔친 핸드폰을 함께 마당에 묻는 장면은, 후에 두 사람이 더 큰 범죄의 증거를 은닉하는 상황의 축소판 같아요. 무언으로 방조에 동참하되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게 된 미리(손예진)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가족의 미래를 놓고 관객이 몇 갈래의 상상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상상을 돕는 재료들은 영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죠. 미리가 마지막에 사과나무까지 심었는데 어떻게 집을 파냐고 남편에게 말하는 장면은 우리가 합심하여 이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혹시 새 집주인이 와서 땅을 파다가 실체가 드러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책일 수도 있겠죠. - 사과나무라는 품종은 감독님 선택인가요? 빨갛고 탐스러운 선악과인데 숲속 뱀의 이미지하고도 연결되니까. 전 신앙도 없는데다가 이제는 기독교적 의미를 넘어 보편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감도 있으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만수가 도시를 드나들 때 그가 사는 구종시로의 진입로 표지판에도 지역 특산품으로 사과가 등장하지요. - 겨울비와 함께 영화 말미에 리원(최소율)의 첼로곡이 처음으로 오롯이 연주되는 까닭을 곱씹게 됩니다. 리원의 연주는 돌아온 개들을 위한 환영 콘서트죠. 자기 부모나 오빠에게 들려주려는 게 아니라.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볼 때 굳이 멈추거나 안 된다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환영하는 뉘앙스도 아니에요. 묘사하자면 그것은 겨우 용인한다 정도의 표정일 뿐인거죠. 부모가 재능을 의삼할 만큼 언제나 지루한 파편의 반복밖에는 들려주지 않던 아이가 문득 성숙한 연주를 들려줄 때, 과연 이 친구가 가정의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질문할 수도 있겠지요. 의미 없어 보였던 스케치북의 추상화가 알고 보니 정교한 악보였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그림 악보는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정현 첼리스트의 사례를 반영한 겁니다. 한편 리원이는 종종 주변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식으로 뜻 모를 말을 하는데 예언하는 어린 샤먼처럼 보였으면 했달까요. 가장 어리고 약한 인물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초월적 존재로도 보였으면 했어요. 마지막에 출근하는 만수에게 리원이 사과나무에 벌레가 끓어서 다 죽어간다고 하지요. 아내와 아들이 돼지 바비큐에 왜 그리 질색하는지, 개들이 사과나무 근처에서 노는 것에는 또 왜 이렇게 펄쩍 뛰는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던 만수가 리원의 말까지 듣고는 차에 타서 갸웃거리며 곱씹는 거죠. 이전과는 결코 같은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려주는 잔여물들이 남는 겁니다. - 그러고 보니 어른을 따라하는 리원의 말투가 신이 씐 어린 무당의 목소리 같기도 하네요. 연기 디렉션은 어떻게 한 건가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어른 배우도 머리 아파하는 상황인데 제가 원하는 만큼 보통 사람과 다른 독특한 어조를 어린이 배우가 현장에서 완벽히 해내긴 어려웠어요. 우선 평범하게 말하듯 연기하고 나중에 후시녹음(ADR) 작업을 했지요. 그런데 아주 잘했어요. 유튜브에서 많은 영상을 찾아보면서 엄청나게 연습을 해왔고 거기에 어조를 다양하게 바꿔보는 디렉션을 더해가면서 같이 만들었죠. - AI 기술로 고도화된 공장에 혼자 남은 만수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인간으로서 어떤 측은지심이 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무가 잘려나가는 숲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요. 인간 중심적인 자본주의 풍자극이 간과한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훅 던져지는 것 같습니다. 선출이 유튜브에 출연해서 제지 회사가 숲을 없애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잖아요. 종이를 만드는 목적으로 숲을 조성하고 돌보기에 재생의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말하자면 그 입장과 대치되는 장면일 텐데 제가 제지업을 비난하려는 입장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순수한 이미지의 표면으로요. 기계가 나무를 자르고, 움켜쥐고, 끌고 가고, 나무의 속살이 가루가 되어 날리는 난폭하고 폭력적인 움직임을 보자는 거죠. 와이드 숏에서는 거대한 나무가 휘청거리며 쓰러지고요.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는 중장비 운전자들이 실제로는 운전석에 선명히 비치는 푸티지였는데, VFX 단계에서 다 깨끗이 지워서 더욱 로봇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 마지막 VFX 단계까지 고민하다가 반영하게 된 아이디어가 있다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언급하신 바 있는데, 이 지점일까요. 아, 그건 다른 부분이에요. 마지막 장면에서 공장에 출근한 만수가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면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길 잃은 사람처럼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는데, 멀리서부터 머리 위의 불이 차례로 소등돼요. 편집과 VFX까지 다 끝난 상태에서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서 이게 가능하냐고, 꼭 해야 한다고 부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베니스 심사용 패키지에는 못 들어갔죠. AI의 노동에는 전등이 필요 없습니다. 깜깜한 공장에 만수가 혼자 들어와서 처음 하는 일이 인위적으로 불을 켜는 것이에요. 인간이 왔다는 신호 같은 것이지요. 면접장에서 공장장이 불필요하다고 일러두었고 자기도 알아들은 척해놓고서 굳이 종이도 때려보잖아요. 고집을 못 버리는 거죠. 그의 머리 위로는 기계가 이미 똑같은 일을 하고 있고. 그러고는 AI가 만수를 쫓아내듯이 먼 곳에서부터 전등이 꺼집니다. 공간의 덮치는 어둠이 곧 하나의 힘인 겁니다. 만수가 등 떠밀리듯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면 이어서 나무들이 무자비하게 잘려나가는 숲으로 이동하고요. 생태적 관점일 수도 있고 혹은 나무에게 다시 인간을 대입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사람 ‘모가지’를 댕강 자르는 해고하고 비슷하다고. 가족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심한 남자의 선택이 가정을 더 위기에 빠트리는 허무, 살인까지 동반했던 인간끼리의 안간힘이 AI의 등장으로 무의미해진 허무를 보고 싶었어요. <어쩔수가없다>는 이 두 가지 차원의 허무를 통과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인터뷰] 간절하게 절실하게 처절하게, <어쩔수가없다> 배우 이병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 이병헌은 <공동경비구역 JSA> <쓰리, 몬스터>에 속한 단편 <컷> 이후 20여년 만에 박찬욱 월드로 회귀했다. 그가 <어쩔수가없다>에서 받아든 배역 유만수는 어쩐지 “오늘만 대충 수습”하기로 했던 <올드보이>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졌다. 각본도 그 말장난의 충동을 참지 않는다. 기어코 만수와 오랜 라이벌 관계에 놓인 동네 친구의 입을 빌려 “유지 보수만 수차례”라는 농담을 한다. 그 말이 웃기지만은 않은 까닭은 유만수라는 남자가 과연 인생의 유지 보수를 필요로 하는 계절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가장이 직업을 잃었다. 25년을 바쳐가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키운 회사에서 쫓겨났다. 가족에게 나눠줄 장어를 바싹 구워 먹으며 정력을 발휘해보려 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형편없어졌다.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등에 업고, 경쟁자들을 살해해서라도 경력직으로 재취업하고 싶어질 정도다. 배우 이병헌에게도 만수의 계획은 황당하게 들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납득해야 하는지, 납득시켜야 하는지 헷갈렸다. <악마를 보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심지어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서도 이런 식의 살인자를 연기해본 적은 없었다.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기까지,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에 가담하기까지 어떤 비극을 통과했는지 표현해내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만수에게는 ‘당위’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병헌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은 영화적 설정이자 은유적 선택이라고. 그러자 <어쩔수가없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핵심 정서가 살아 숨 쉬기 시작했다. 만수가 잘려야만 했던 이유가 없는데 만수가 죽여서는 안될 이유란 또 뭐란 말인가. 그 치가 떨리는 뻔뻔함으로, 이병헌은 자주 우스꽝스러워지되 가끔 불쌍해져가며 의문을 도끼질한다. 영화 속 실직자의 아내도 말하지 않았나. “실직이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문제다.” 이병헌은 이제 관객에게 그 도끼를 건넨다.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독해하느냐가 문제로 남았다. - 박찬욱 감독의 숙원 프로젝트였던 만큼 주연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어쩔수가없다>에 관한 비전을 들었을 테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때를 기억하나. 10년도 더 된 과거에 감독님과 미국에서 차 한잔하다가 짧게 전해 들었다. <도끼>(국내에서는 원제 를 음차한 <액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편집자)라는 소설이 있는데,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 거라고. 그때는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고, 어떤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흘러 감독님이 이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 계획이니 시나리오를 한번 읽어봐달라고 요청하셨다. - 그게 언제쯤인가. 크랭크인 3개월 전쯤이었다.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대를 안고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가 당황했다. 내가 처음 읽은 것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문 시나리오를 한글로 번역한 버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딘지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전체적인 정서를 파악하기에도 어려웠다. 한국화된 시나리오가 완성되기까지 기다렸고, 그걸 읽은 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 바뀐 시나리오에서 체감한 변화는 무엇이었나. 문화적인 변화가 컸다. 덕분에 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 글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각색 과정에서 지금 대두되는 사회적 쟁점들도 첨가돼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문제들이 더 잘 드러나는 각본이 되었다. 많은 관객이 좋아할 수 있는 블랙코미디가 될 것 같았다. - 새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블랙코미디의 매력도 더 크게 다가왔나 보다. 내가 작가의 의도대로 읽은 게 맞나 싶어 감독님에게 물었다. 웃기는 부분이 많던데, 그게 다 의도된 지점이었냐고. 그랬더니 감독님도 의도한 게 맞는 거라고, 웃겨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촬영하면서도 많이 웃었다. 감독님과 나는 작품을 함께하지 않는 동안에도 친구 사이로 지내왔기에 서로 유머 쿵짝이 잘 맞았다. 대놓고 웃을 수만은 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만 우스꽝스럽지 당사자로서는 웃긴 장면 하나 없는 아이러니를 이 영화만의 묘한 정서로 이해했다. 사실 만수가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은 무(無)의 상태는 아니지 않나. 중산층 가장으로서 지키고 싶은 것들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으니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때의 처절함, 비참함, 연민이 블랙코미디로 느껴지게끔 표현하고 싶었다. - 배우로서 그 “최악의 선택”에 얼마큼의 현실감을 부여할 것인지가 관건이었을 텐데. 가장 큰 딜레마였다. 만수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독님과도 이게 괜찮은 건지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결국에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영화적 설정이라고. 만수가 살인을 결심하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10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만수의 감정으로부터 너무 튕겨져 나오지는 않게 하고 싶은 마음에 디테일을 잡아갔다. 만수의 절실함을 더 보여줬으면 해서 여러 아이디어도 냈고. - 예를 든다면. 딸 리원(최소율)이 강아지 집에 들어가 강아지들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며 울지 않나. 그때 만수의 표정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잃은 표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잃기 전에 커다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는 마음이 그 표정에서 읽혀야 했다. 그래서 그 장면에서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탁 들면서, 평범한 사람이 아픈 와중에도 내릴 수 있는 독한 결심이 읽히게끔 연기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신이 끝나더라. (웃음) 감독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그다음 장면인 화장실 신에서도 만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연결감을 주고 싶으셨다고 한다. 아무튼 관객이 조금이나마 주인공 편에서 영화를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노력들을 했지만, 영화적 설정 자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웃음) - <어쩔수가없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런 영화적 설정을 선전포고한다. 꽃잎이 미친 듯이 흩날리는 가운데 만수네 가족이 ‘행복’이라는 악보를 불협화음으로 연주하는 듯하달까. 그 끝에 “와라, 가을아!”라는 만수의 한마디가 꽂히는데, 대사 톤을 잡아가기까지 어떤 논의가 있었나. 거기서부터 어떤 암시를 줘야 한다는 감독님의 요청은 없었다. ‘나 이제 좀 살만 한 것 같다’라는, 행복에 겨운 가장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투 정도만 염두에 뒀다. 그 안에 슬쩍, 만수 자신도 잘 모르는 그만의 마초적인 느낌이 났으면 했다. - 그 마초 냄새가 만수의 콧수염에도 배어 있다. 그게 만수만의 멋과 여유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액세서리나 말총머리 같은 헤어스타일이 그러하듯 만수는 자기가 좀 살만 해졌을 때 콧수염을 길러보고 싶었을 거다. 수염과 머리 분장도 두 가지 버전으로 테스트했다. 레퍼런스 중에 배우 스티브 매퀸의 사진이 있었고, 결국 그의 곱슬곱슬한 헤어스타일에 콧수염이 추가된 버전이 채택되었다.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오프닝 시퀀스의 복장인 하와이안 셔츠 같은 것을 입고 카메라 테스트를 했는데, 감독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내 눈에는 약간 라틴 아메리카 범죄 조직원처럼 보였지만. (웃음) 그 분장이 해외 평론가들에게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기도 한 모양이더라. 후반부 공장 신을 <모던 타임즈>와 엮어 이 영화가 슬랩스틱코미디 같다고 평한 이들이 있었다. - 만수가 노리는 세명의 타깃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범모(이성민), 시조(차승원), 선출(박희순)은 언뜻 만수의 분신처럼도 보이는데, 만수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다르다. 범모에게는 연민을, 시조에게는 위화감을, 선출에게는 부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는데 배우로서는 어떻게 접근했나. 만수는 세 사람에게서 자신을 볼 수밖에 없다. 감독님이 그런 장치를 처음부터 심어두었고, 특히 선출은 캐스팅에서부터 그 점을 고려했다고 들었다. 박찬욱 감독님이 이전부터 이병헌과 박희순의 마스크가 닮았다고 생각해 선출 역으로 박희순 배우를 떠올렸다고 한다. 만수 입장에서는 자기가 더 잘 풀렸더라면 선출처럼 됐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범모를 보면서는 인간적인 갈등을 느꼈을 거다. 그의 아내인 아라(염혜란)가 젊은 남자와 바람피우는 모습을 보며 범모를 동정하고, 자기 와이프 미리(손예진)까지 의심하지 않나. 자기가 죽일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는 셈이다. 한편 시조와 만수는 딸에 대한 부성애로 통한다. 만수는 리원이 남들이 하는 말을 반복할 뿐이라는 걱정을 시조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다가도 동요하는 것이다. 부산에서 만난 한 관객도 만수가 타깃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갈 때마다 그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더라. 옳은 해석이라고 본다. - <어쩔수가없다>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만수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시원(김우승)이 절도 혐의로 경찰서에 갈 때 만수가 시원을 붙잡고 하는 이야기는 그가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도 들린다. 감독님이 제일 좋아한 신 중 하나다. 내게 직접 칭찬하지는 않으셨는데, 백지선 모호필름 대표에게 “어제 경찰서 신에서 병헌이가 너무 잘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잘했지 그럼! (웃음) 나와 감독님은 그 장면을 보며 많이 웃었는데, 확실히 관객과는 웃음 포인트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 관객 입장에서는 착잡한 순간이었다. (웃음) 우리끼리는 웃었다. 그러니까 그때 만수가 아들에게 하는 대사는 사실상 자기 얘기다. “혼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 따귀를 살짝 때리고, 서로 머리를 콩콩 부딪치고, 아이는 아파하고. 그 상황 자체가 웃길 수밖에. - 그런 웃음을 공유할 수 있는 박찬욱 세계에 다시 다녀온 소감은. 감독님과의 작업이 매우 오랜만이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현장에서의 감각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이틀 만에 ‘맞아, 박 감독님 스타일이 이랬지!’라고 했다. 벽지 색깔부터 의상 패턴, 조명 위치까지 디테일하게 주문하는 감독님과 있으니 나 또한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느 영화건 ‘여기가 가장 관건이다’ 싶은 대목이 있기 마련인데, <어쩔수가없다> 시나리오에는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가끔은 끔찍하기까지 했다. (웃음) 새삼 내가 진짜 ‘영화’를 찍고 있구나 싶었다. 빛을 피해 저글링하기 범모, 아라와의 <고추잠자리> 소동, 선출과의 마지막 대면 등 관객이 반한 베스트 신도 만만치 않게 까다로웠지만 배우 이병헌이 가장 고생스럽게 촬영한 것으로 꼽은 건 만수의 첫 면접 신이다. 건물 건너편에서 비추는 햇빛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와중에도 만수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장면 말이다. “만수가 빛을 피해 조금씩 그늘쪽으로 움직이는데, 긴장한 상태로 다리를 계속 떨고, 그러다 그 떨림을 의식해 한손으로 다리를 누른다. 치통이 밀려와 평상시처럼 손을 턱으로 올리다가도 면접 자리라는 걸 떠올리고는 손을 내린다…. 대사를 치면서 해야 하는 모든 행동이 지문에 적혀 있었다. 외발자전거를 타면서 저글링하는 기분이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조명을 쐬면서 연기해야 했기에 얼굴이 심하게 뜨거워지기까지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