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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커버] 기담 –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초자연적 현상과 환상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공포, 판타지 단편영화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다. 전통적인 괴담의 정서부터 현대적 해석이 더해진 심리 공포, 미스터리, 다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적 결을 가진 작품들이 펼쳐진다. 단순한 공포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 설명되지 않는 불안,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서와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시각적 상상력과 스타일로, 때로는 서늘한 분위기와 서사적 장치로 우리 내면의 그림자를 건드리며 관객을 낯선 감정의 영역으로 이끈다. Q1. 영화를 연출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Q2. 좋아하는 영화 혹은 만들고자 하는 영화는 어떤 결입니까. <체화> Chaehwa 홍승기 HONG Seung Gi | 2024 | Fiction | Color | 21min | 12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10/19(일) 18: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수수께끼의 전학생 ‘다빈’이 초등학교에 전학 온다. 여름인데 일광욕을 즐기고, 밥은 물만 마시며, 몸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다빈이 산에서 내려온 이후, 세상의 모든 꽃들이 만개한다. 홍승기 감독 1. 유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색칠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제가 흰 쌀밥을 하얗게 두지 않고 분홍색으로 색칠한 것을 보고는 “이 분홍색 쌀밥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난 마음에 제 마음속 정원에서만 자라는 딸기 맛 쌀이라고 답했죠. 어머니는 제가 보는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제 눈높이에 맞춰, 분홍색 쌀이 자라나는 제 마음속 정원을 함께 들여다봤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 이 정원을 스크린으로 옮겨와 관객들과 함께 꽃구경을 하고 싶었습니다. 2.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상식이 승리하는 서사들이 넘쳐나지만 우리의 삶은 엉망이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 그 자체이지 않나요. 서로 다른 장르 사이, 이미지 사이, 세계 사이에서 하나의 언어로 호명될 수 없는 존재들을 위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나가고자 합니다. <엔터티> Entity 정휘빈 CHUNG Hui Bin | 2024 | Animation | Color | 17min(E) | 12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10/19(일) 18: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이웃집 살인마와 눈이 마주친 주인공 김영이 살아남기 위해 사회의 금기를 건드린다. 정휘빈 감독 1.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후 프리랜서로 지내다가 6년 전부터 다시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작품 제작 과정 전반과 스토리텔링을 기초부터 다시 배운다는 생각에서 시작해 몇편의 작품을 거치며 뚜렷한 내러티브의 장르물이 제가 감독으로서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에 기반해 처음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봐줄 만한 장르적 구조를 갖춰 완성한 작품이 <엔터티>입니다. 독립애니메이션을 하는 입장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장르물에 도전하는 것이 모험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모험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저 스스로의 한계나 모순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돕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2. <괴물>(감독 존 카펜터, 1982) <에이리언><사바하>등 오컬트, 호러, 미스터리에 기반한 장르물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합니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데에는 <모노노케 히메><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작품의 영향이 컸고요. 결국은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처럼 강한 장르적 개성을 바탕으로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갈비뼈> The Rib 임하연 LIM Ha Yeon | 2024 | Fiction | Color | 24min | 15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10/19(일) 18: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여러 애인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사는 이봄의 갈비뼈에서 인간이 나온다. 갈비뼈는 이봄의 공간들을 부수기 시작하고, 이봄은 갈비뼈를 외면하지만 그럴수록 공허해지고 성욕과 식욕이 강해진다. 임하연 감독 1. 영화를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서 계속 영화를 하고 있습니다. 2. 주인공을 끝까지 책임지는 영화, 희망이 있는 영화, 소소한 기적이 있는 영화,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해피 엔딩. 해피 엔딩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리아> Planet Spoilia 이세형 LEE Se Hyung | 2025 | Fiction, Animation | Color | 28min | 12 10/18(토) 11: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10/19(일) 18:0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해답을 찾기 위해 500년간 우주를 떠돌던 김과 박은 이상한 행성 스포일리아에 불시착한다. 실사 인물과 클레이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영화로, 감독의 자취방에서 2년3개월간 제작된 우주적 대작. 이세형 감독 1.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들에게 무서운 장난을 당한 적 있습니다. 집합시켜 잔뜩 겁을 준 뒤, 마지막에는 “장난이야~” 하고 끝내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기합은 아니지만 기강 잡는 효과를 누리는 엄청난 전술에 ‘당해버렸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게 밝혀져도, 그동안 영화 속에서 느낀 감정들은 전부 진짜입니다. 그게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장난은 정중히 사양하지만 영화로 하는 장난은 환영입니다. 2. 닫힌 기승전결의 세계와 열린 부조리의 세계, 그 중간 지대를 찾아서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우디 앨런, 테리 길리엄, 코언 형제 영화를 좋아합니다. <미트> meat 정성락 JEONG Sung Rak | 2024 | Experimental | B&W | 10min(N) | 15 10/17(금) 19:3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강가의 나무 아래, 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포대를 무자비하게 두들긴다. 검은 액체, 타오르는 불, 탐욕스러운 식사. 씻기지 않는 흔적과 함께 되살아나는 죄의 기억. 남자는 자신이 만든 지옥을 마주한다. 정성락 감독 1. 중학생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을 보고 나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시작이었다. 당시 3D 맥스, 프리미어, 포토숍 등 컴퓨터프로그램을 가지고 놀던 때라 그런 허무맹랑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영생을 위해 친구들의 심장을 염력으로 꺼내 먹는다는, CG가 들어간 첫 호러영화를 만들었다. 이번 단편영화 <미트>는 광주에 있는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하면서 인간의 폭력과 욕심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약육강식의 정도가 도를 넘어 균형이 깨진 지구, 권력자들의 횡포, 적당히를 모르는 인간의 자연 파괴와 탐식. 제발 균형을 가지고 살자는 메시지를 인간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2.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과 앤드루 니콜 감독의 <가타카>사이 어는 지점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미스터리한 공상을 통해 현실을 마주하는 영화. 예술과 기술의 접점에서 꽃을 피우는 영화는 장르적일 때 가장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핑크몽키> Pink Monkey 우종빈 WOO Jong Bin | 2024 | Animation | Color+B&W | 12min(KE) | 15 10/17(금) 19:3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캐릭터 ‘핑크 몽키’. 온 세상이 핑크 몽키로 가득하다. 그리고 핑크 몽키를 만든 아티스트 세바스찬. 어느 날 세바스찬은 핑크 몽키에게 살해당하는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세바스찬은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핑크 몽키를 제거해야 한다. 창조와 파괴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세바스찬의 이야기. 우종빈 감독 1. 영화를 음식으로 비유해보겠습니다. 저에게 있어 영화는 ‘과자’의 느낌이었습니다. 그저 ‘맛있다’, ‘달다’, ‘짜다’가 전부였죠. 모든 음식은 다 과자 같은 줄만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된장찌개’를 먹게 된 저는 단순히 ‘맛있다’라는 생각을 넘어 ‘어떻게 이런 맛을 냈을까?’, ‘어떤 재료를 사용한 거지?’, ‘이 된장찌개를 끓인 건 대체 누구야?’라는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재료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된 저는 된장찌개의 맛을 더 깊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모두 과자 같은 줄만 알았는데 된장찌개 같은 영화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도 된장찌개를 끓여보고 싶어졌습니다. 깊이 있고, 오래 기억되고, 다시 찾고 싶게 되는 그런 된장찌개를 말입니다. 물론 맛없는 된장찌개보다 과자가 나을 때도 있죠. 저는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소림축구> <뿌리가 자란다> Roots are growing 김상구 KIM Sang Gu | 2025 | Fiction | Color | 19min | 12 10/17(금) 19:3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공사가 잠시 중지된 구역을 감시하는 보안업체 직원 정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입 직원 규민은 그곳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린다고 주장하고, 두 사람은 함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김상구 감독 1. 또래들과 달리 한글을 떼지 못했던 어린 시절,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빨간 자동차가 대형 트럭에 쫓기는 영화를 보았다. 완전히 매료되었고, 당장 한번 더 보고 싶었지만 영화의 제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영화를 찾기 위해 매일 영화 채널을 돌렸다. 찾는 데 실패하자, 영화의 장면들을 혼자 상상하고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10년 넘게 지나서야 인터넷에서 그 영화와 다시 만났다. 제목은 <대결>. 스필버그의 장편 데뷔작이었다.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머릿속에서 맞춰진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미화된 기억과 실제 영화의 차이를 비교해 감상하면서 더욱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찍은 건 나중의 일이지만 이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주었다. 2. 미국영화를 특히 좋아한다. 농담 삼아 미국의 국기는 야구가 아니라 영화라고 주장하곤 했다. 넘치는 문화적 배경이 영화의 요소들과 충돌, 상호작용하는 걸 지켜보는 게 즐겁다. 한국을 배경으로도 이러한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확장기> Time To Dilate 김나영 KIM Na Young | 2024 | Fiction | Color | 21min | 15 10/17(금) 19:3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두 연인, 명기와 도는 명기가 숨기고 있던 비밀 때문에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비밀은 점점 더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데. 김나영 감독 1. 어릴 때, 감정이 수도꼭지처럼 잠그고 싶을 때 잠글 수 있으면 좋겠다며 울던 친구에게 “감정이 왜 안 잠겨? 난 수도꼭지랑 똑같은 거 같은데?”라고 말하며 상처를 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건 제가 감정을 제대로 다룰 능력도, 망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던 그 순간 저 자신에게 느낀 답답함을 잊지 못해서 결국 영화를 만들게 된 것 같습니다. 2. 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성장 서사를 좋아하는데, 그런 주제를 공포 장르로 표현한 영화를 특히 좋아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주로 기억과 관계에 관한 것들이고 공포 장르가 이를 담기에 적합하다고 느껴 앞으로도 그 장르로 작업할 것 같습니다. <확장기>를 만든 후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 미련과 후회의 마음이 남아 새로운 장편영화를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보디 호러 장르 속에서 모녀 관계를 다룬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제 속이 시원해지는 영화인데요, 매번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일종의 살풀이처럼 느껴집니다. <유니폼> Uniform 강다연 KANG Da Yeon | 2025 | Fiction | Color | 26min(E) | 12 10/17(금) 19:30 CGV용산아이파크몰 7관 10/18(토) 13: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GV 과학기술연구소 유니트의 청소노동자 가은. 괴담이 도는 D구역을 담당하던 동료 청소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퇴사한 뒤, 가은이 D구역을 새롭게 배정받게 된다. 강다연 감독 1. 갱지로 만화책을 만들던 초등학생 때의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팀 버튼 영화들을 보면서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는 기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처럼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2. <렛미인><스토커><그녀><컨택트><경계선>. 외로운 인물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 발짝 내딛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겟 아웃><유전>처럼 엔터테이닝한 장르영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탈피각> Molted Shell 정길우 JEONG Gil Woo | 2024 | Fiction | Color+B&W | 16min World Premiere | 15 10/18(토) 15:1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2: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청계천이 복개될 때 도망쳐 나온 연준은 사실은 인간으로 변태한 가재다. 연준은 자신의 딸을 닮은 단골 손님 이주를 만나게 되고 가까워진다. 이주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주를 위해 자신의 영생을 포기할지 고민한다. 정길우 감독 1. 처음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고등학생 때, 몰래 학교에서 그래피티로 낙서를 하고 다니는 학생 이야기였다. 팬데믹 시기에 준비했던 작업들이 중단되고 앞으로의 계획들이 막막할 때 만났던 친구와 지금까지 무모하게 이어오는 작업이 있다. 독립 장편영화 작업인데, ‘우리도 한번 영화 찍어보는 거야’라며 두 사람이 무작정 시작했던 작업 덕분에 지금까지 영화할 힘을 얻었다. 영화를 함께 찍자고 제안해주고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작업을 이어오는 윤승비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2. 좋아하는 영화는 시기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시기에 많이 보게 되는 영화도 있고. <탈피각>을 작업하던 시기에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단편들을 많이 봤는데 <목령>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무가 된 남자가 나오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기억에 선명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작품은 장르이되 더 리얼한 것을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 때, 영화의 판타지성을 유지한 채 과연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담아낼지가 요즘 최대 고민이다. <폐쇄 회로 텔레비전(CCTV)> Closed-circuit Television(CCTV) 이재혁 LEE Jae Hyeok | 2024 | Animation | Color | 6min(N) | 12 10/18(토) 15:1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2: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코인 노래방 안, 나는 TV 화면 속 어떤 존재와 마주했다. 나는 화면 속 존재를 선망하다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 존재는 무엇일까? 이재혁 감독 1. 2022년 여름, 저는 정다희 감독님의 <의자 위의 남자>라는 작품을 비메오(vimeo)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저의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고민과 공명하였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미지적인 연출과 전개 방식이 그 작품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선은 자연스레 다른 작품들로 이어졌고, 각 작품들이 가지는 독창적인 스타일에 맞는 스토리나 전개방식,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움직임을 다루는 연출들이 나만의 작품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2. 작품을 기획하기 위해 깊이 빠져들다 보면 언제나 비슷한 곳에 도달합니다. 제가 처음 빠져들었던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있는 곳입니다. 좋아하는 작품과 만들고 싶은 작품은 언제나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곳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합니다. 때로는 그런 혼란과 무질서가 제가 이해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을 정리해보려 시도하는 것이 작품을 만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그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작품에 담고 싶습니다. <괴인의 정체> The Masked Monster 박세영 PARK Sye Young | 2024 | Fiction, Experimental | B&W 14min(K, E) | 12 10/18(토) 15:1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2: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배가 너무 고픈 누나는 쌀 몇톨과 동생을 바꾼다. 쌀로 배를 채우니 이성이 돌아오지만 이미 늦은 걸 어쩌겠는가? 박세영 감독 1,2. 지난 3년 동안 편집실에서 <지느러미>라는 장편영화의 후반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 찍고 몇주면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적은 예산과 제가 가진 그릇보다 더 큰 야심을 품고 시작해서 그런지 번아웃이 찾아온 이후에도 후반작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작업을 끝내지 못함에 대한 답답함과 초조함이 계속 쌓여만 가서 <괴인의 정체>라는 영화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과정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각본 없이 카메라를 들고 숲속에 들어가서 순서대로 촬영하고 당일에 집에 돌아와서 편집하고 하루 안에 음악을 녹음하고 색보정도 하루 안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긴 작업 과정에 대한 해소를 휴가나 쉼을 통해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의 즉흥적이고 휘발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그리고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어디서부터고 언제 끝나는 건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듯이 영화를 찍는 방식 또한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소용돌이> Vortex 장재우 JANG Jae Woo | 2024 | Fiction | Color | 19min | 15 10/18(토) 15:1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2: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바다 일을 하러 떠난 아빠를 대신해 병에 걸린 엄마를 돌보는 윤석. 엄마와 아빠에 대한 최악의 상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워하던 중 바닷가에서 돌을 끄는 소녀를 보게 되고,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장재우 감독 1. 여러 영상 분야 중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좋은 장면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장면이란 회화적인 요소를 잘 활용하여 시각적인 인상을 남길 뿐 아니라 그 안에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좋은 장면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숏과 숏의 연결이나 충돌을 통해 이야기를 확장하고 그 안에서 감정을 만들어내며, 카메라가 비추는 한 인물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것은 영화만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소용돌이> 촬영감독 이상현) 2. 현실의 억압을 깨고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순간을 담은 영화를 좋아합니다. <8과 1/2>에서 귀로 안셀미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고 결국 하나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모습, <버팔로 66>에서 빌리 브라운이 빨간 부츠를 벗는 섬세한 과정처럼 낯설고 실험적인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장면들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소용돌이>에서는 윤석의 곰팡이집과 수인의 소용돌이집처럼 인물의 내면을 공간으로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감각적 몰입을 경험했습니다. 앞으로도 자유와 해방의 진동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소용돌이> 미술감독 김현아) <엔진의 심폐소생> Reviving The Engine 정혜인 JUNG Hye In | 2025 | Fiction | Color | 25min | 12 1 0/18(토) 15:10 CGV용산아이파크몰 5관 GV 10/19(일) 12:00 CGV용산아이파크몰 6관 중고차 상사 사무직 직원인 28살 진희. 어느 날 진희 주변의 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진희의 몸이 녹슬기 시작한다. 진희는 세상이 미친 건지, 자신이 미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혜인 감독 1. 내 머릿속 이야기들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해 극도로 우울해진 순간이 있었는데, 그 순간 영화를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2. 기이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끊임없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나가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 끝없이 질주하는 영화, 에너지가 폭발하는 영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

BIFF #8호 [스페셜] 60년의 여정, 끊임없이 새로운 ① -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 마스터 클래스와 인터뷰

1965년 26세의 피렌체 출신 젊은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을 거부당했다. 가족 제도부터 사회 규범까지 모든 것에 반기를 들었던 이 문제작은 공개 직후 이탈리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르코 벨로키오는 여전히 역사와 개인의 경계에 선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 여정을 ‘지그재그’와 같다고 설명했던 그의 말처럼 이 문제적인 거장의 영화 세계를 한 단어로 일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르코 벨로키오라는 이름은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허공으로의 도약>(1980)부터 <달콤한 꿈>(2016)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란 칼날 위에 서 있는 인간을 해부했던 빼어난 정신분석가이자, <내 어머니의 미소>(2002)와 <잠자는 미녀>(2012)를 통해 종교나 존엄성의 딜레마를 탐구하고자 했던 사색가이며, <중국은 가깝다>(1967)로부터 <익스테리어, 나잇>(2022)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정치와 역사를 관찰한 정치학자기도 할 것이다. 하나 명확한 점은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와 개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결코 안과 밖의 대립처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장편 데뷔 60주년을 맞아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구성된 특별기획 프로그램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호주머니 속의 주먹>부터 HBO와 함께 제작한 시리즈 <뽀르또벨로>(2025)에 이르기까지 8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씨네21>이 특별전을 위해 부산을 찾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과 만났다.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투과되는 그의 영화 철학을 전해 들을 수 있던 귀중한 인터뷰였다. 동시에 9월 21일 14시부터 15시 30분까지 진행되었던 마스터 클래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에서 그의 연출론을 살펴볼 수 있는 대담의 일부를 세 가지 키워드로 기록하여 옮겼다. - 부산국제영화제의 인연은 2004년 상영된 <굿모닝, 나잇>까지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까지 총 10편에 달하는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해 온 부산에서 60년 간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본 이번 회고전을 향한 소회가 남다를 것만 같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영화들이 자주 상영되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회고전을 갖는 것은 내게도 매우 의미가 크다. 단 며칠 만에 한국 사회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 새로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간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의 걸작들은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화의 한 갈래로 다가왔다. - 이번 특별 프로그램의 제목은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다. 첫 장편인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 비롯된 이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주먹을 들어 올린다는 건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주먹을 주머니에서 꺼낸 상태다. 지금 내 나이가 되면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곱씹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는 방식의 변화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중국은 가깝다>를 찍었던 6, 70년대 당시 마오이즘 신화가 이탈리아와 유럽 청년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가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그 문구는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웃음) - 이탈리아의 근현대 역사와 시대를 꾸준히 소환했던 감독님의 영화에는 개인과 역사 사이의 역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미시사가 역사의 거시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역의 명제도 성립하고 있다. 개인에게 역사란, 역사에게 개인이란 어떤 관계인가. 역사와 개인 그 두 조합이 나를 매료시킨다. 역사의 거시사를 인물을 통해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려 한다. 단순히 한 개인만 아니라 그 주변의 관계마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익스테리어, 나잇>에서는 앤도 모로(파브리지오 기푸니)가 가족과 함께한 모습과 납치에 얽힌 다른 인물들의 사적인 모습을 통해 이들 모두가 납치와 암살이라는 국가적인 정치 사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결합 혹은 관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공식이다. 물론 역사에 충실해야 하지만 내 상상력은 역사에 대해 불충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것이 스타일의 일부다. 가능할 수 있다면 인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역사책에 묘사되지 않은 공백을 채우고 싶다. - 한편, 시대의 초상 아래에서 감독님의 인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육체의 악마>의 자살 시도하는 광인, <종교의 시간>의 정신병자 형, <보모>(1999)의 산후우울증에 걸린 아내, <달콤한 꿈>의 마시모(발레리오 마스텐드리아)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광인이야말로 진리를 통달한 자라는 낭만적인 관점이 하나의 신화처럼 존재해 왔다. 가령 예술사에서도 반 고흐와 같은 예시가 있다. 그는 천재지만 정신병으로 인해 자살을 택하지 않았나. 그러나 내게 광기란 곧 불행이며, 고통받는 존재이고, 현실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자다. 나는 내 사적인 삶과 가족의 경험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이들을 마주해왔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비유적인 의미로서 ‘간질’을 인물에 부여했다. 그러므로 내가 정신 질환을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그 병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 마시모 파지올리의 세미나를 통해 나는 정신질환의 파괴성을 극복하려는 작업을 모색했다.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작업이 내게는 중요하다. - 고통과 광기의 인물만큼이나 그들이 처한 상태에도 눈이 간다. 3번이나 다룬 알도 모로 총리의 납치 사건(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협치를 주도하던 전 총리를 붉은 여단이 납치한 사건 – 편집자)을 비롯해, 감독님의 인물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감금, 납치, 혼수 상태 등 한정된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움직임이다. 인물들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움직임을 발견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이 인물들은 집 안에 칩거하거나, 감옥에 투옥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 속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닫힘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외부를 향한 움직임을 그리고자 한다. <굿모닝, 나잇>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꿈속에 납치된 알도 모로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마치 닫힌 공간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나에게 있어 이런 운동은 단순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억압과 감금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 나가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움직임은 내 작업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 올해는 HBO와 손을 잡고 시리즈 <뽀르또벨로>를 공개했다. 3년 전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를 통해 제작한 <익스테리어, 나잇>에 이어 세계적인 OTT 플랫폼과 함께 협업에 나서게 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영화 산업 환경에 발맞춰 창작을 이어 나간 동력이 궁금하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 내 정신이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다. <뽀르또벨로>는 HBO라는 국제적인 플랫폼에서 먼저 프로젝트에 대해 훌륭한 제작 제안을 건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이야기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법 제도,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다루는 이야기지만,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Rai를 통해 HBO 콘텐츠로 방영될 예정이다. 내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던 만큼 <뽀르또벨로>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또 다른 응답 - 21세기 영화의 감각 불가능성

21세기가 되었을 때 영화는 몸을 감각하며 20세기 영화의 질문을 연장했다. 20세기에 영화는 기억을 생산하고,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크린 위로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이 투사되었고, 스크린의 얼굴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았던 얼굴,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의 예술. 21세기를 여는 영화가 기억을 잃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가 여전히 기억의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자동차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여성이 있다. 여성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성은 낯선 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이름을 묻는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때 여성은 집 안 욕실 벽에 붙은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 <길다>(1946) 포스터에서 리타라는 이름을 훔친다. <길다>는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 리타 헤이워스의 이름, 매혹하는 여성의 이미지, 정체성과 속임수, 죽은 자의 회귀라는 모티브를 빌려준다. 이처럼 21세기의 영화는 20세기 영화의 줄을 붙잡고 망각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하룬 파로키는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 <손의 표현>과 같은 자신의 일련의 아카이브 영화 작업에 ‘이미지 어휘집’(Bilderschatz)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파로키의 ‘Bilderschatz’를 ‘이미지 어휘집’(Cinematic thesaurus)으로 번역하는 대신 보물창고(schat, 寶庫)라는 뜻을 살려 이미지 보고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이미지 안에 쌓아온 고통과 비애의 형식의 원천에 ‘고통의 보고’(Leidschatz)라는 이름을 붙였던 미술 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생각을 빌리고자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이안/리타는 영화라는 이미지 보고에서 이름을 훔쳤고, 환상을 훔쳤다. 그러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세기를 새롭게 연장하는 21세기의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킹 비더, 빌리 와일더, 앨프리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등 20세기 고전 할리우드영화와 유럽 모던 시네마의 탁월한 거장들이 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 위태로운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21세기의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위태로운 정체성에 대해 부재와 불가능성의 스크린으로 응답했던 모던 시네마와 다른 응답을 모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부부가 참여한 한밤의 파티와 산책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 끝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던한 <밤>의 방식으로 부부의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는 얼굴의 위기, 얼굴과 몸의 위기를 통해 정체성과 관계의 위기를 보여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는 <로스트 하이웨이>와 <트윈 픽스> 등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자주 스테디캠을 사용해 정지화면을 찍었는데 특히 이 방법으로 부서지듯 제자리에 있고, 몸과 분리된 채 몸 위에 있는 얼굴의 악몽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미지의 세계는 데이비드 린치가 악몽으로 표현했던 사태, 곧 얼굴과 몸의 분리가 일상화된 세계가 되었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얼굴 이미지의 수정, 조작, 생성, 공유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얼굴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안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얼굴은 나의 통제 아래 내 몸에 붙어 나를 드러내는 대신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나의 몸을 벗어난다. 이에 얼굴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얼굴의 가시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이 생겨난다. 카메라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서 카메라가 가득한 매체 환경에서 ‘안 보이게 되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시대(히토 슈타이얼)에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감각의 세계를 확장했던 영화는 이제 어떻게 얼굴의 가시성을 다루어야 할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2000년대를 열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영화,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은 인물을 다루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가 떠오른다. 특히 주인공이 병원에서 얼굴에 감고 있던 백색 붕대. 한 남성이 기차를 타고 핀란드 남부 항만도시인 헬싱키에 도착한다. 불량배들이 그를 두들겨 패고,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 유일한 기억, 유일한 과거를 파괴한다. 의식불명 상태로 사망을 선고받았다가 갑자기 부활하는 주인공은 얼굴과 온몸에 백색 붕대를 감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리타의 기억상실은 정체성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계기다. 리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쫓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누구에게 쫓기는지,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알지 못한 채로 리타는 변장을 시도한다. 이런 리타와 비교하자면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의 완전한 삭제와 갱신을 뜻하는 백색 붕대, 사망 선고, 부활을 경험하고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없는 이 남자는 권력, 제도, 시장에 신원 정보를 제출할 수 없다. 도시의 주변인인 룸펜들이 이 남자에게 빼앗은 것, 이 남자가 잃어버린 것은 인구학적 통제 수단인 신원 정보다. 반면 이 남자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동하는 신체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용접공으로 일했던 그는 기꺼이 낡은 레퍼토리를 가진 악단에 음악적 취향을 조언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직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용접 능력을 발휘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가 영화에 기댈 때, <과거가 없는 남자>는 (육체)노동에 기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서류, 일련번호, 통계자료로 개인을 환원하는 권력에 노동을 대조한다. 얼굴을 가시화하는 대신 노동을 가시화하기. 그런데 영화 초반부 주인공을 공격했던 불량배 중 하나는 주인공 가방에서 꺼낸 용접공 보호구를 얼굴에 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보호구를 뒤집어쓴 불량배는 예수를 끌고 가던 로마 병사나 <스타워즈>의 어둠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 중요성을 부여하자면 주인공을 예수적 형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딥페이크 시대 이전의 영화인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영화는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낙관에 기댄다. 지난 세기에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빅토르 에리세는 ‘이미지의 시세가 하락한’ 21세기에 새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를 만들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영화와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를 연결한다.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동차 주행이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파노라마가 매우 영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사고를 겪지 않는 자동차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자동차는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고를 겪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은 모두 사고를 겪었다. 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에게 실종을 둘러싼 사고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고를 겪었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이름뿐 아니라 신체의 기억도 잃은 것 같다. 요양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는 예술에 대한 취향이나 예술에 대한 직업적 능력, 죄의식과 불안조차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20세기 영화의 필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인물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준비한 상영에 소환된다. 영화는 일상의 아무 곳에서나 우리를 불러 세우지 않고, 우리를 응시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불안과 사랑을 알려주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가 이제 일상적인 세상을 보는 우리의 두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보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영화와 얼굴의 잔상, 한스 벨팅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신체 이미지라고 부른 이미지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2>(2024)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머리 없는 여인>(2008)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런데 카메라가 도처에 있는 시대에 만들어진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가정된다. 운전자가 모두 악천후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디지털매체 환경 시대의 사용자들이 대체로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이들도 산만한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편의 영화는 편재하는 카메라 시대, 감각과 시선 사이의 분리가 문제시되는 시대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비가시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교통사고를 다룬 20세기의 고전 중 하나를 떠올려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텔레비전용 장편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다. 샤브롤의 영화는 아들의 뺑소니범을 뒤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국영화와 넷플릭스 드라마 복수극에서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피해자의 전형과 유사하다. 그는 자식을 잃은 피해자지만 복수를 시행하기 위한 치밀함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정신을 잃은 듯 절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착오 없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스토리를 꾸민다. 피해자는 관객의 주목을 이끌어내면서 가학적이고 즉흥적이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범인에게 접근한다. 물론 샤브롤은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샤브롤이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아이의 얼굴과 함께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아이가 멀찍이 해안가에서부터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이 사이 한적한 마을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 숏이 끼어든다.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소리와 카 오디오의 클래식음악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전환된 화면에서 카메라는 마을 성당 앞 삼거리로 걸어오는 아이를 천천히 줌인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심지어 우리가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에 만족하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막 확인했을 때 자동차가 아이를 들이받는 걸 보여준다. 자동차 앞좌석의 승객이 비명을 지른다. 운전자는 그대로 차량을 몬다. 자동차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카메라 크레인은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비춘다. <배심원 #2>과 <머리 없는 여인>의 운전자들은 차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 운전자 모두 모종의 충돌을 감각했음을 인정한다. 사태는 이 감각에서부터 역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감각의 자극과 고양이 감각의 분별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는 기억의 주관성이나 관점의 주관성이 아니라 감각의 무분별함이다. 감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 진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머리 없는 여인>은 이와 함께 ‘보지 못함’의 근원에 있는 계급적이고 인종적 배경을 지적하는 영화다. 치과의사인 주인공이 모는 차가 저소득층 유색 선주민 거주 지역의 외딴 도로에서 무엇인가를 친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자신이 사람을 친 것인지, 산짐승을 친 것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로 현장을 벗어난다. 영화는 도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주인공과 다수의 선주민 가정부, 정원사 등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면서 식민주의는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결정하는 권력이고, 식민주의의 유산이 우리의 감각의 무능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문을 연 영화들은 몸과 감각을 통해 영화와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의 영화가 근심하는 것은 아마도 굴과 몸, 시선과 감각, 감각과 영화의 공존 불가능성일 것이다.

동화, 구호보다 힘센

애니메이션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가끔 범하는 오류가 있다. 만화나 동화가 원작인 작품을 소개할 때 원작자를 감독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쉽게 말하면 <아마겟돈>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원작자인 이현세와 김수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대개 캐릭터 설정이나 각색, 제작, 또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이런 혼동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 담당 초창기 때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극장판과 TV 시리즈의 시나리오, 캐릭터 디자인, 제작, 감수 등 각종 분야에 마쓰모토 레이지를 극장판 감독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단단히 훈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은 린 타로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자주 소개되는 <스노우 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 같은 애니메이션도 혼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가 원작인데, 종종 애니메이션 감독도 레이몬드 브릭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레이몬드 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에 관여했지만,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Jimmy Teru Murakami)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을 꽤 안다고 자부하는 팬들에게도 조금 낯선 이름인 지미 데루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호세 태생이니까 이제 우리 나이로 67살인 노장 작가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젊은 시절 UPA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즈니의 안온한 가족주의와 틀에 박힌 그림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나와 결성한 ‘UPA’의 모토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였다. 사회적인 풍자나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유머도 담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UPA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그런 반골정신이 배어 있다.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건너간 많은 B급 영화감독과도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한명이 로저 코먼이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로저 코먼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영화에서 공중촬영감독으로 활약했던 무라카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67년 <속삭임>으로 앙시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72년부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무라카미 필름’을 세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노우 맨>을 비롯해 몇편 되지 않는데, 최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이 불 때>(When the Wind Blows)가 영국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스노우 맨>과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내용은 앞선 두편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편이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꿈을 귀엽고 친근감 넘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바람이 불 때>는 그처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를 통해 핵전쟁의 잔인함과 공포를 비판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2차대전을 겪은 짐과 힐다라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료주의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핵전쟁의 무서운 모습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톤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현란한 그래픽이 등장하거나, 긴박감 넘친 움직임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이들 머리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잔잔하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전쟁의 잔인함은 목소리 높인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문예진흥기금을 영화진흥기금으로

유신문화창달을 위해 한국문예진흥원을 설립한 뒤, 유신운동자금 조성방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문예진흥기금을 영화관과 고궁과 각종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거두기로 했다. 지난 73년부터 입장료에서 6.5%씩 떼낸 이 돈은 유신시대도 한참 지난 뒤로는 예산이 부족한 문화부나 문화체육부의 행사비로 전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중요한 쌈짓돈으로 활용됐다. 독특한 점은 이게 대부분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관에서 걷혔다는 것. 지난해만 해도 245억원 가운데 179억원을 영화관객들이 냈다. 그 가운데 90억원이 영화쪽으로 다시 흘러왔다. 모은 돈의 절반을 다른 문화예술의 형제자매들에게 내주었으니, 영화는, 영화관객은 돈벌어 형제를 가르치던 개발기의 젊은 누이들과 닮은꼴이다. 그나마 영화쪽 환원이 이정도 된 것도 미국영화 직배로 영화토착자본이 말라가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런 사정을 언뜻 살피면, 2004년까지 걷기로 한 문예진흥기금을 2년 앞당겨 폐지하겠다는 기획예산처의 최근 발표는 그럴 법해보인다. 관객과 영화관에서 준조세 성격의 돈을 ‘뜯는’ 대신, 국가가 지원을 하겠다는 선언 아닌가. 그러나 속사정을 살피면 달라진다. 영화의 경우, 미리 문예진흥기금을 폐지함으로써 차질이 생긴 진흥기금을, 그 차액만큼 국고에서 지원해줄 테니 기금의 과실금으로 지원책을 펴나가라는 얘기인데, 그게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과실금이 한국영화가 지금 요구하는 정책을 펴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차라리 영화관에서 거두던 문예진흥기금을 이번 기회에 영화진흥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 합당해보인다. 그것이 자국영화를 지킬 의지가 있는 나라들이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관람료의 11%를 입장세라는 이름으로 환수해 한해 6억3천만프랑 정도를 만드는 프랑스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텔레비전쪽에서 6억8천만프랑을 내놓는다. 두 돈을 합쳐서,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격인 국립영화센터가 영화지원에 쓴다. 독일은 조금 더 온건해서, 관람료의 3%를 걷지만 비디오테이프에 추가로 2%의 영화세를 붙여놓았다. 유독 산업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영화라는 매체의 양육비가 비싼 탓이다. 전반적 문화예술의 금고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예진흥기금 폐지를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지만, 그 재원은 다른 방도를 통해 마련할 일이다.

대처를 배우자고?

<트레인스포팅>으로 상종가를 치던 시절, 대니 보일은 켄 로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대처 시절, 영국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해온 그 감독에겐 자기들을 설득하거나, 사로잡을 어휘나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대니 보일에게서 형식주의자, 스타일만 번쩍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 나라안에서도 지역차이를 고스란히 빈부격차로 떠안은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의 끝모를 방황과 추락을 재현하는 그 영화에 매력을 느낀 축에 들었다. 어디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의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따위의 낙서, 뜻없는 질주에서도 쾌락을 낚지 못한 채 황량한 하늘을 이고 이곳은 스코틀랜드(어쩔 수 없는, 저주받은 땅)라던 이들의 자조에 가끔씩 감전되곤 했다. 켄 로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저 사람이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로 이적한 뒤, 완전히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선 인간에 대한 애정, 정의에 대한 열정이라는 `구시대'의 아직도 값진 유산을 재생해낼 의지가 읽히지 않았다. 그가 문제삼았던 건 켄 로치의 발언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가 생긴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먹히지 않아. 소외된 이웃, 분단문제, 패배한 사람들, 환경, 구원…, 부지불식간에 기피목록에 오른 말들인데, 텔레비전은 그것보다 상품성 높은 연예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을 늘려간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집들과 가구들은 날로 `세련'되어 간다. 주인공들이 설사 비탄에 빠져 있더라도, 배경은 우아해야한다는 약속이라도 한듯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오해가 씻겨나가는 순간이 온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런 역할을 하던 지난 해, 영국의 극장을 휩쓸고 딴나라 평단의 호평을 얻은 <빌리 엘리어트>도 비슷한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대처시대 영국 탄광촌의 발레 천재가 춤에 이끌려 성장하는 길을 따르다보면 곳곳에서 사람살이의 여러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사례로 떠받들리는 대처 시대 노동자들의 삶이 거기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 아들의 성장기는 그 아버지들의 생존을 성공신화의 보조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배울 것'은 대처만이 아니지.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나서, 울고 난 눈이 부끄러워 사람들을 외면하고 거리에 나서며 되뇌었다.

나이, 이제야 실감나네

2000년 마지막 날 진짜 21세기를 앞두고 송구영신, 경건한 마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나 들을까 해서 조신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아직 10여분 남았기에 소파에 누웠다가 거실도 춥고 해서 침대 패드를 끌어다 덮었다. 거기까지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5시였다. 상상해보라. 나름대로 새해엔 각오도 새롭게 하고 거듭 참사람으로(?) 태어나고자 결의도 다져보려고 했는데 결의와 각오는커녕 잠이 덜 깬 후줄그레한 몰골과 어깨쪽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한바탕 재채기로 나의 21세기는 시작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희망찬 얘기는 고사하고 이렇게 궁상맞은 얘기로 시작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기 그지없지만 남자가 혼자서 나이먹어가는 풍경이 그렇게 썩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밝혀둔다. 그 당시 심정이 어떠했냐면 고등학교 때 모처럼 맞는 일요일, 한번 마음잡고 놀아보려고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가 거의 해가 저물 때쯤 일어났을 때의 그런 막막한 기분과 똑같았다. 게다가 집에 식구도 없고 밥도 없을 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어제랑 별다르지 않은 오늘인데도 인간들이 편의적으로 만든 시간의 단위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깜빡 잠든 사이에 한살을 더 먹어버렸다. 제기랄!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일까? 마지막 라운드 종이 울리기 전에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싱선수의 마지막 라운드로 향하는 느낌과 비슷할까? 챔피언 인생보다는 인생 자체를 도전자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겠지만 21세기 첫날을 맞은 형언하기에도 측은한 내 모습이란 도전자의 모습도 아닌 것 같았다. 여태 한번도 나이에 대한 생각을 안 했었다(진짜로). 좀더 정확히 애기하면 25살 이후로 내 나이를 세어 본 적이 없다(아 글쎄, 진짜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가끔씩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버스나 전철에서 빈자리가 났을 때 그건 빈자리가 아니라 아줌마석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석엔 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한 사람 앉을 공간에 다른 아주머니랑 약속이나 한듯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때, 어떤 여자분이 병뚜껑이 안 열린다고 나보고 열어달라고 했는데 죽어도 안 열려 황당할 때, 평생,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움직이기 싫어 모든 걸 말로 때울 때, 혼자 살면서 정말 힘든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밥먹는 거라고 말할 때, 관공서나 식당에서 불친절에 대해 꼬장꼬장 따져물을 때, 외국 나가는 기내에서 식사가 나오면 고추장 하나 더 달라고 한 뒤 주머니에 집어넣을 때, 눈앞에 삽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내입에서 “어이구, 저런” 이런 아저씨들이 쓰는 신기한 단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 등등. 30대 초반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영화를 하고서부터다. 평생 백수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일시에 떨쳐버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조용한 가족>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고서부터가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내 가슴을 방망이질할 어떠한 흥분도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늘 판타지를 꿈꾸던 소년이 성인 백수가 되도록 현실에선 판타지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남머시기 기자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판타지는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최소한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영화 만드는 재미를 붙여가는 것은 아마도 슬슬 나이먹는 재미를 느낀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류승완은 나이도 어린데 도대체 어디에 기대 에너지를 뽑고 있을까? …이따가 물어봐야지.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계, 그 미지와의 조우

특집/ 설 비디오 가이드 해마다 최소한 3∼4일씩 놀 수 있는 설 연휴는 작심하고 비디오 가게를 섭렵하기 좋은 시기이다. 올해는 한번 애니메이션으로 설 연휴를 즐기면 어떨까? 애니메이션 비디오라고 하면 흔히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데 살펴보면 그외에도 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평소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단편이나 유럽 애니메이션 비디오들을 골랐다. 모두 국내에 출시된 작품들. 그동안 지면으로만 소개된 단편들이 궁금했던 팬들이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한번 아래 작품에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장인의 손길, 작가의 숨결 <위대한 강> (Le Fleuve aux Grandes Euex) (2000년 출시, 24분, 라바필름(02-765-8312)) 현존하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한명인 캐나다 프레데릭 벡의 93년 작품. 캐나다 퀘벡 지방을 흐르는 센트로렌스 강을 중심으로 그곳의 역사와 자연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그려냈다. 이미 <크랙>(1981)과 <나무를 심는 사람>(1987)으로 명성을 얻은 이 노 작가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혼자 5년여 동안 수만장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손으로 제작하는 정성을 보였다. 반투명 셀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매력이다. 하지만 비슷한 화풍의 레이먼드 브릭스가 비교적 온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반해(물론 <바람이 불 때>는 예외), 프레데릭 벡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환경보호와 반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분의 짧은 시간 속에 수백년 세월을 담아낸 이야기 솜씨도 탁월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의 모습과 동물, 역사적 사건들은 현장을 수십 차례의 항공촬영과 자료조사를 통해 꼼꼼하게 재현한 것들이다. 깊은 밤 느긋한 마음으로 따스한 차 한잔과 함께 본다면 그동안 각종 대중매체의 현란한 시각적 자극에 찌들었던 심성을 해독할 수 있는 훈풍 같은 작품이다. - 한마디 더: 프레데릭 벡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음악을 맡은 노르만 로제. 퀘벡 지방의 민속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는 그의 음악은 깊이와 활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위대한 강>의 영어판 성우는 배우 도널드 서덜런드가 맡았다. <우리 할아버지>(Grandpa)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존 버닝햄의 동명 그림책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스노우맨>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동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메마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성인을 위한 작품이다. 89년 감독 다이앤 잭슨, 음악 하워드 블레이크 등 <스노우맨>의 제작진이 손을 잡고 유니세프의 지원하에 제작됐다. 종이와 색연필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상이나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세계는 <스노우맨>과 닮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할아버지가 손녀의 방문을 맞아 잔잔하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두 ‘조손’은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한다.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특별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하나하나 시적 정감이 넘친다. 급하지 않은 어조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다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결말이 찡하다. 이 작품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면 정말 심각하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 등을 감독한 다이앤 잭슨의 매력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한껏 살린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점은 그러한 테크닉이 단순히 시각적 잔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훈훈한 습기와 여유를 준다는 점이다. <스노우맨>(Snowman)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느 채널이건 꼭 방송 전파를 타는 이 작품도 비디오숍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굳이 성탄절이 아니더라도 겨울철에 보기 좋은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영국의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명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는데 단편으로는 드물게 2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다. <스노우맨>의 탁월함은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을 살린 그림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시적 운율마저 느끼게 하는 눈사람의 움직임은 디즈니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스노우맨>만의 매력이다. 그런 리듬감 넘친 움직임은 후반부 북극의 눈사람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소년과 눈사람이 북극으로 날아가는 장면 역시 애니메이션 사상 손꼽는 명장면 중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중 비행신의 대가라고 하지만, 이 작품의 감독 다이앤 잭슨 역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을 그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산타 할아버지의 휴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하워드 블레이크가 만든 음악. 최근 국내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이 출시됐다. 주제곡 <워킹 인 디 에어>는 원작에서는 피터 오리라는 보이 소프라노의 청아한 음색으로 들을 수 있는데 조지 윈스턴의 앨범 <포레스트>에서도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Father Christmas) (99년 출시, 26분, 인피니스(02-2263-3233)) <스노우맨> <바람이 불 때>와 함께 레이먼드 브릭스의 애니메이션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 동화와 영화 속에서 스트레오타입화된 산타클로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그린 유쾌한 소품.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뭐 할까’라는 자연스럽고 천진스런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그림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타 할아버지의 묘사가 돋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유럽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때로는 풀장에서 느긋하게 선탠을 하는 산타의 모습은 “귀엽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돋보인다. 특히 산타 할아버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도 즐기고, 여자 무용수들의 화려한 레뷔쇼를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동화 속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간적인 산타’에 대한 묘사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배달하면서 방풍용 고글을 쓰는 모습이라든가 굴뚝을 들어갈 때 쩔쩔매는 묘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선물을 나눠주다가 사슴들과 함께 지붕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갖는 장면은 원작자와 감독의 삶에 대한 따스한 묘사 때문에 볼 때마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피리부는 목동> (2000년 출시, 19분, 라바필름(02-765-8312)) 대학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단골 상영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테웨이 감독이 63년 제작한 19분21초짜리 작품. <피리부는 목동>이 가진 큰 의미는 서구적인 회화 기준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섬세한 ‘농담’과 여백의 미를 애니메이션에 재현했다는 데 있다. 발표 당시 서구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시적인 영상과 우아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많은 평론가로부터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유럽의 작품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곳에도 애니메이션이 있었나?”라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만들어진 지 40년이 다 됐지만 지금 봐도 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아니 특별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소치는 목동의 한나절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과 줄거리를 능가하는 탁월한 ‘볼거리’ 때문이다. 초반부에 소가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테웨이 감독의 연출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기존 서구식 애니메이션 표현과는 확실하게 다른 영상은 서구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어 70년대 중국 애니메이션 붐을 불게 했다. 아이들용? 철없는 어른용! <만화의 세계1, 2>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우리가 다시 그려요> <배고픈 애벌레> <피브 앤 퍼그> <만화의 세계1, 2> (99년 출시, 1편: 48분 2편: 9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애니메이션의 넓은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해도 국내에서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나라의 단편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비디오도 만나게 된다. <만화의 세계>는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이다. 이슈 파텔, 캐롤라인 리프, 코 회드만, 자크 드로앵, 조지 웅가, 게일 토마스 등 NFBC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 NFBC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꽤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들의 지명도만 따진다면 단연 이 비디오가 최고이다. 현란한 색채의 향연인 이슈 파텔의 <파라다이스>, 페인트 온 그래스로 제작한 캐롤라인 리프의 <거리의 소년>, 컷아웃 기법으로 만든 코 회드만의 <찰스와 프랑수아>, 핀 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자크 드로앵의 <밤의 요정> 등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기법을 접할 수 있다. 1편은 각 작가들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2편은 작품을 담고 있다. ‘애니에는 뭔가 색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꼭 보는 것이 좋다. - 한마디 더: 어쩌다가 이 단편 걸작집이 제목이 ‘만화의 세계’가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99년 출시, 8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유니세프가 어린이의 권리 선포를 기념해 NFBC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집. 피에르 M. 트뤼도, 미셸 쿠르노이에, 클로드 크롤디에, 유진 페도렌코 등이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10분 내외의 소품들로 구성됐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화의 세계>보다 부담없이 볼 수 있다. ‘코코의 산수’, ‘사랑의 띠’, ‘TV와 춤을’, ‘후나스와 리사’, ‘어린 예술가’ 등 모두 13편의 단편이 2개의 비디오에 수록돼 있다. 이중 부엌의 각종 기구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는 한 소녀를 그린 ‘어린 예술가’가 교육방송 등을 통해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이 단편집에서 작가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이들은 결코 미성숙된 인격이 아닌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어린이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훈계나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가족 등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단편집은 ‘철없는’ 어른들을 일깨우는 성인들의 교훈서이다. - 한마디 더: 여기에 수록된 ‘어린이를 위하여’를 제작한 유진 페도렌코는 2000년 <백치들의 마을>을 발표해 안시와 히로시마에서 수상한 스타급 작가이다. <우리가 다시 그려요> (2000년 출시, 108분, 라바필름(02-765-8312)) 단편 애니메이션을 찾을 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쪽도 한번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만 보면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 교재 같은 <우리가 다시 그려요>도 그런 점에서 ‘숨은 보석’과 같은 비디오이다. 원래 이 비디오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2개로 구성된 비디오에 각각 6편씩, 12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수록돼 있다. 이름만 본다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폴 드리센을 비롯해 재닛 펄만, 브제니슬라브 포아르 등의 작품 중에서 어린이들과 삶과 사회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들로 골랐다. ‘하늘의 제왕’, ‘너만 먹니?’, ‘행복했던 가족’, ‘존 베일리의 불장난’, ‘도둑맞은 꿈’, ‘5분 남으셨습니다’, ‘제발 그만’, ‘맛있게 드세요’, ‘파블로프의 쥐’ 등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토론용으로 선정돼 주제가 선명하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품에서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기능, 인간의 사회성, 생존의 의미, 흡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 한마디 더: 이 단편집은 다른 비디오와 달리 특이하게도 작품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재가 첨부돼 있다. 굳이 아이들이 없더라도 비디오와 책을 함께 보면 어른들도 공부가 된다.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 (99년 출시, 31분, 인피니스(02-2263-3233)) 아이들과 함께 보기엔 딱 좋을 깜찍한 작품. 93년 더 일루미네이트 필름(The Illuminated Film)에서 제작한 ‘배고픈 애벌레’와 다른 단편들을 모은 작품이다. <배고픈 애벌레>는 원래 70년 에릭 카일이 발표한 동화책으로 전세계적으로 1천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자연 친화적인 내용과 풍부한 감수성을 지녀 영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단편집과 달리 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나 이야기에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이 특징. 화려한 작가적 완성도보다는 아이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천진스럽다. 기법면에서도 장인적인 현란한 테크닉의 구사를 자제했고, 색채나 배경도 단순화했다. ‘배고픈 애벌레’를 비롯해 ‘아빠 저 달 좀 따주세요’, ‘벙어리 귀뚜라미’, ‘샘많은 카멜레온’, ‘음악으로 세상을 그려요’ 등이 수록돼 있다. <피브 앤 퍼그> (97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애니메이션 ‘브랜드’이다. <피브 앤 퍼그>는 아드만의 팬이라면 꼭 챙겨볼 것을 권할 만한 작품이다. 이 비디오는 피터 로드와 닉 파크가 아드만 애니메이션을 세운 뒤 발표한 초기 작품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아드만에 첫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동물 인터뷰’(Creature Comforts)를 비롯해 ‘왕자와 거지’, ‘아담’, ‘사랑이란’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동물원 우리 속에 사는 고릴라, 사자, 북극곰 들을 통해 인터뷰 형식을 도입한 ‘동물 인터뷰’는 아드만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꼭 많은 움직임과 액션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터뷰를 할 때 동물들의 표정이나 동작들은 감독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안경을 닦거나 옆사람을 흘낏 보는 등 작은 동작이지만 그 타이밍과 추임새가 점토로 만든 인형인지 아니면 TV에서 보는 거리의 시민인지 혼동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격하지 않고 적당한 풍자와 재치, 평범한 삶에 대한 예찬을 담은 아드만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 외에 ‘사랑이란’과 ‘왕자와 거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담’. 아주 작은 소품이지만, 아기자기한 익살이 그만이다. - 한마디 더: 출시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비디오숍에서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을 듯. 애들은 가라. 뭔가 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 <톰 섬의 비밀모험> <샌드맨> <이온 플럭스> <톰 섬의 비밀모험>(The Secrect Adventure of Tom Thumb) (2000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은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오브제, 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사용된 작품이다.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태어나 ‘톰 섬’이라 이름이 붙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펼치는 무용담을 그린 영국 동화이다. 그러나 극본, 디자인, 연출, 편집 등 1인4역을 한 데이브 보스윅은 작품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어둡고 음침한 마을로 바꾸었다. 주인공 ‘톰 섬’은 민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픽실레이션(사진과 같은 정지된 영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톰 섬’의 부모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땀이 번들번들한 얼굴에 피곤하고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석, 동화적인 안온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기본 틀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만 봐서는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톰 섬’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은 ‘위악적인’ 영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화의 틀을 빌려 현실과 잘 구별이 안 되는 ‘악몽’을 그리고 있는 보스윅의 작품 세계는 같은 영국의 선배 작가인 퀘이 브러더즈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작품에서 픽실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는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 스탭이다. <샌드맨>(Sand Man) (2000년 출시,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이 동화 속 세계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비틀었다면, <샌드맨>은 중세 유럽의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펼친 작품이다. 서구 전설에 등장하는 샌드맨은 잠을 재우는 귀신. 우리의 ‘삼신할미’처럼 친근한 대상이다. 그런데 사뭇 낭만적인 존재인 ‘샌드맨’을 감독 폴 베리는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바꾸었다. 팀 버튼 영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세트로 작품의 음산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문, 딥 포커스로 촬영해 원근감이 왜곡된 집안, 그리고 앙각으로 촬영해 등장인물이 주는 중압감을 강조한 카메라 앵글 등은 <노스페라투> <칼리가리 박사의 정원> 같은 무성영화 시대 작품을 연상케 한다. 섬세한 칼 맛을 느끼게 하는 인형의 모습과 간결하지만 어색함이 거의 없는 동작은 전통을 가진 유럽 인형 애니메이션의 힘을 느끼게 한다. <톰 섬의 비밀모험>과 함께 한 비디오로 출시됐다. - 한마디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대개 캐릭터에 관객의 시선을 모으는데, 이 작품은 세트의 양식미를 보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이다. <이온 플럭스>(Aeon Flux)(1996년, 미국, 120분) (99년 출시, 120분, CIC) 이온 플럭스라는 미래사회의 여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독특한 양식의 SF애니메이션. 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피터 정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이다.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 아트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그는, 디즈니, 한나 바버라 등의 프로덕션을 거쳤는데 우리에게는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는 나이키의 애니메이션 CF로 알려졌다. 이후 <팬텀>(국내에서도 방영)의 원화 디자인을 맡은 뒤 미국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리퀴드 텔레비전>에 <이온 플럭스> 시리즈를 발표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7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 SF양식을 빌렸지만 <이온 플럭스>는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작품이다. 독특한 메커닉 디자인과 마치 오슨 웰스를 연상케 하는 딥포커스의 카메라, 인체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그의 캐릭터는 잘 정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류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전후도 모호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강박관념과 과도한 섹스어필, 미래의 희망과 꿈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도 없는 마치 무기질 같은 세계가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다 놓칠 수 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도와 역동적인 주인공의 움직임, 기발한 아이디어의 메커닉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 한마디 더: 우리말 자막이 있지만 워낙 줄거리의 인과관계가 모호해 이해하는 데 무척 힘들다. 자막내용 고민하느니 차라리 그림만 보는 게 오히려 작품의 진가를 파악하는 데 더 쉽다. 비디오 하나 더! <요괴인간> ‘난데없이 웬 <요괴인간>’ 하겠지만 정확히 국내에 94년에 출시됐다. 요즘 엽기나 공포물이 유행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엽기로 따진다면 이 작품이 선조이다. 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이 일본에 합작으로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일동화’에서 만든 TV시리즈이다. 70년대 T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정말 ‘한 인기’를 모았던 작품. ‘구하지도 못할 케케묵은 작품을 왜 소개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의외로 중고 비디오숍에 꽤 있다. 물론 유려하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찾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30대 이상 애니메이션 마니아 중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음산한 분위기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연구하던 한 과학자의 손에 의해 태어난 세 요괴. 벰, 베라, 베로. 비록 모습은 흉측하지만 심성만은 바르고 올바른 그들이 권선징악의 길에 나선다. 언젠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림이나 전개는 엉성하지만 지금 봐도 기가 막힌 것은 60년대에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에피소드마다 독특하다. 특히 유럽의 괴담을 일본적인 상황에 맞게 적당히 각색한 것과 좀비, 해골, 귀신, 유령, 늑대인간 등 괴기물의 각종 주인공들을 아이들 대상의 애니메이션에 등장시킨 점이 놀랍다. 물론 지금 이런 내용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면 영락없이 언론에서 집중 성토를 당하기 쉽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설경구 취중진담

한 남자와 여자의 시냇물 흐르듯 잔잔한 사랑 이야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사건도, 커다란 감정의 출렁임도 없는 이 영화는 일상의 자그마한 풍경을 짜임새 있게 늘어놓는 최근 멜로영화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여자가 자신이 품은 사랑의 감정을 남자에게 솜이 물에 젖듯이 자연스레 전달하는 것처럼, 관객의 마음을 구석에서부터 서서히 장악해나가는 이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았던 박흥식 감독이 정성스레 파놓은 ‘함정’과 곳곳에 숨겨놓은 ‘덫’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멜로영화로 간주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갖게 됐다. 문제는 그 ‘특별한 것’을 이루는 각각의 성분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 꽤나 영악한 영화인 듯하면서도 때론 너무나 순진한 구석이 엿보여 허술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해독하기 위해 <씨네21>은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사실 이 만만치 않은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바로 영화에서 궁상맞은 노총각 봉수 역할을 능청스러울 정도로 잘 소화했던 설경구 말이다. 영화에서 워낙 봉수라는 캐릭터가 강하다는 점뿐 아니라 현장에서 박 감독과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인물 중 하나였던 그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인터뷰가 술을 마시며 진행돼야 한다는 것. 이 ‘취중 인터뷰’는 그가 평소에도 워낙 술을 즐기기로 소문난 애주가였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영화 현장 밖에서는 대인기피증이 있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과묵한 성격의 박흥식 감독의 성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인터뷰는 대학로의 한 한식집에서 시작, 맥줏집을 거쳐 허름한 소줏집에서 막을 내렸다. 설경구가 박흥식 감독을 날카롭게 몰아붙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동석한 기자(물론 기우에 불과했지만)들의 존재를 의식했던 탓인지 인터뷰의 형식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돼버려 아쉬움이 남았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아쉬웠던 점은 이날의 만남이 꽤 많은 양의 알코올과 더불어 진행된 탓에 인터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알코올 성분과 함께 휘발되었다는 것이긴 하지만. 편집자 박흥식(이하 박) | 저희는 대화를…. 설경구(이하 설) | (말을 끊고)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박 | 한 1분 이상 안 해요. (웃음) 대화를 별로 안 해요. 이거 어떤 거 같으냐, 해서 괜찮다 그러면 그게 오케이에요. 촬영현장에서의 ‘대화’를 이렇게 엇갈리게 기억하던 이들은 술이 한 순배 돌고난 뒤 장장 6시간이나 지속된 취중진담을 시작했다. 한잔은 고백 - 데뷔작 끝낸 감독, 떨리고 또 설레고 박 | 영화 개봉할 때까지는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개봉하는 건 영화가 제 손을 떠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개봉하기 전까지는 내 손아귀 안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개봉하고 나서는 제 손을 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관객시사를 할 때는 계속 갔는데 개봉하고 나서는 딱 한번 들어가서 보고는 더 안 봤어요. 볼륨 조정이나 색보정이 이상하다는 것도 더이상 내가 할 얘기가 아니다 싶어서 얘기를 안 했고. 설 | 믹싱 끝나고 색보정 끝나기 전에 전화해서 “이젠 내 손을 진짜 떠나는 것 같아” 하더니 그 다음날 색보정까지 다 끝나고 시사회 전날, 또 전화해서 “내 손을 진짜 떠났어” 그러대요. 그래서 제가 “아니, 뭐 입양 보내?” 했죠. (일동 웃음)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장난이 아니에요. 난 이런 감독 처음 봤어. 박 | 내가 발가벗겨진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그게 좀 창피해요. 처음으로 기자시사회 하는데, 전도연씨하고 경구씨하고 내 옆에 있었는데 전도연씨가 내 팔을 꼭 껴안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더라구요. 막 벌벌 떨면서 봐요. 아무리 톱스타고 대배우라도 영화를 처음 보는 느낌에서는 관객, 기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근데 내가 손을 슬쩍 뺏어요. 나도 떨리니까….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숨이 턱턱 넘어가더라구요, 숨이. 사람들은 웃는데, 난 웃지도 못하고. 기자들 웃는 게 꼭 비웃는 것처럼 들리고. 영화를 많이 했다는 배우도 이 정돈데 싶더라니까요. 영화 끝나고 나서 기자들하고 인터뷰하는데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더라고요. 설 | 모든 감독이 자기 영화에 애정이 있겠지만, 이 사람처럼 울려고 했던 사람은 처음 봤어요. (사진기자가 건배하는 장면으로 사진촬영을 하자고 하자) 박 | 근데 지금 얼굴이 빨개가지고…. 설 | 색보정 해주신대! 내가 오늘 형을 너무 씹었나? 박 | 아니야. 설 | 뭐 늘 하는 얘기잖아. 우린 솔직해져야 하잖아. 인간적이잖아. (더 가까이 붙어보라고 하자) 설 | 우리 안 친해요. 박 | 이게 제일 이상한 거예요. 설 | 맞아요, 설정하는 거, 설정 너무 싫어. 두잔은 회고 - 주연 캐스팅, 그 감격의 순간 박 | 두 양반 없었으면 영화화하기 힘들었죠. 전도연, 설경구 이 두 양반. 다른 배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남자배우는 미상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나리오 건네는 날 설경구씨 매니저가 옆에 있었어요.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이창동 감독님하고 작업을 많이 했고,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씨 연기하는 걸 보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런데 내가 프로포즈한다고 될지, 무거운 작품, 진지한 작품 하다가 라이트한 걸 하자면 본인이 거절할 것 같더라구요. 설 | 나는 오히려 감독님이 거절할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배우는 오히려 라이트한 걸 하고 싶겠죠. 바꿔보고 싶으니까. 근데 감독은 안 불안하겠어요? 박 | 이 양반 말은 별로 믿을 게 못되구요. 아마 이창동 감독님이 개인 느낌으로 시나리오를 괜찮게 봤던 것 같아요. 그것에 의해서 내 이야기를 좀 들었던 모양이에요. 출연하겠다고 하기에 그럼 좀 기다려달라, 완고가 나올 때까지. 그래서 최종 원고가 나오고 나서 딱 한번을 보였어요, 시나리오는. 그전까진 저하고 얘기만 했죠. 왔다갔다하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안 보여줬어요. 설 | 진짜 안 보여주더라구요. 이창동 감독님은 딱 한마디 했어요. “은행원 얘기야, 별 얘기는 없어.” 그것뿐이었어요. 한 사나이가 있어서, 이 사나이는 이랬어, 뭐 이런 게 아니구. 박 | 뭐 정확한 얘기네. 은행원이 살아가는 얘기고, 은행원이 어떻게 살다보니까 사랑을 얻는 얘기야. 뭐 그런 얘기지. 근데 그건 아실 거예요. 전도연씨가 처음에 거절했었어요, 남자 중심 영화라고. 근데 나중에 원주쪽을 후반부에 강화하니까 하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일지를 시나리오 쓰면서 시작해서 꼬박 일년을 썼거든요. 거기에 모든 기록이 다 있는데, 전도연씨 캐스팅된 날이 6월18일인가 그래요. 설 | 어떻게 날짜를 기억하냐? 감격적이었구나…. (웃음) 나 캐스팅된 날은 모르지. 박 | 그것도 기록돼 있어. 내 기억으로는 1월 말인가 그랬을 거야. 신인감독이 다 겪는 일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스타가 캐스팅되지 않으면 영화되기가 힘들어요. 특히 내 영화 같은 경우는 내러티브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감정을 쫓아가는 거니까 스타가 없이는 영화화하기가 힘들어요. 그걸 알고 있었고, 캐스팅이 안 되면 영화가 무산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작업을 했죠. 세잔은 시비 - 감독은 왕따였다? 설 | 박흥식 감독은 적이 많아요. 나없으면 왕따야. 찍어놓고 영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스탭들이 좋아할 리가 있나. 왜 지가 찍어놓고 흔쾌해 하지를 않아. 뭐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가서 혼자 고민하고…. 박 | 데뷔감독이 영화현장을 즐길 수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많이 물어보는데, 실은 잘 모르거든. 그래서 거꾸로 내가 스탭들한테 물어보잖아? 그러면 또 불안해 해. 라스 폰 트리에 감독도 <어둠 속의 댄서> 찍고서는 지옥 같은 영화현장이었다고, 다신 안 한다고 했다지. 그러고도 다시 찍는 게 영화감독이야. 설 | 그렇게 말은 해도 라스 폰 트리에 그 사람은 현장에서는 즐겁게 일했을걸. 박 | 나는 영화현장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 만들어진 상황에서 관객이 영화에 공감하면 그땐 보람을 느끼고 기쁘지만. 안 좋은 반응도 있긴 있어요. 싸이더스 홈페이지에 어떤 사람이 돈이 아깝다고 썼는데, 그 사람한테는 정말 내가 돈을 주고 싶더라구. 설 | 아니, 형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화면에서 쪽팔리는 건 나하고 도연인데, 감독이 그러면 배우들이 섭섭하지. 박 | 감독은 왕따예요, 왕따. 설 | 밥 먹으러 가면 상 쫙 차려져 있는데 혼자 먹을 때가 있어요. 왜 스탭들은 감독 옆에 안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촬영감독한테나 조명감독한테도 안 오려고 하고 자기들끼리 뭉치려고 해요. 흥식이 형도 불쌍해. 하긴 나한테도 안 오니까. 박 |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얘는 숨소리 빼고는 죄다 구라예요. 설 | 아니, 내가 감독이라면 혼자 안 있고 스탭 있는 데로 내가 가겠어. 저는 가거든요. 그런데 외로운 게 좋은 것 같기도 해, 현장에선. 어떻게 보면 감독이 외로운 직업인 게 맞는 것 같아요. 또 현장에선 외로운 것이 어울려요. 박 | 그게 왜 외롭냐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정말로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찍으면 좋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는 감독은 없을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도 마찬가지이실 거예요. 물론 워낙 영화를 오래하셨으니까 스탭들을 어떻게 힘을 주고 끌고 나가야 하는지는 동물적으로 잘 아시죠. 그렇지만 데뷔감독들은 그것도 잘 몰라요.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난 정말 모르겠고, 내가 찍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싶으면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스탭들에게 물어봐도 스탭들은 관성 때문에 또 영화를 빨리 찍고 싶으니까 좋다, 괜찮다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요. 근본적인 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국 감독이에요. 감독은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표현돼야 하는가를. 그런데 그런 걸 주위에서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설 | 그게 아니고 주위에서 말 시켜도 안 들려. 감독이란 사람들은, 말을 시켜도 안 들리는 사람들이 감독이란 사람들이에요. 자기 생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설 | 감독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미친 짓을. 진짜 외로운 직업인 것 같아요. 박 | 시나리오 쓸 때가 제일 힘들어요. 저는 한국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실력은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컷을 나누는 방법, 연기를 연출하는 방법, 기본적인 컨셉 이런 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를 잘 만든다, 테크니션이다 하는 김성수 감독 같은 특별한 분들 빼고는 허진호 감독, 이창동 감독 같은 사람들 보면, 영화 만드는 실력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창동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시나리오가 90%라고,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인 게 한국영화에선 시나리오가 정말 중요해요. 할리우드에선 영상매체에 대해선 영화적으로 접근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감독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익숙하거든요. 그렇지만 한국 텔레비전하고 영화하고는 많이 다르죠. 텔레비전은 설명을 하려 든다면 영화는 설명을 안 하려고 하잖아요. 차이가 심한데 텔레비전 피해 때문에 영화감독들의 실력향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작가들의 도움을 참 못 받아요. 저도 이번에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제가 99% 쓰고 나머지 사람들이 계속 시나리오를 써서 주는데 제 코드에 맞을 때만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수용을 못 했어요. 영화사에서 각색작가도 붙여줬어요, 드라마가 약하니까 드라마를 한번 강화시켜보라는 거였죠. 그런데 영화 속에 드라마가 들어오니까 영화가 망가지더라구요. 태란이하고 원주하고 나중에 만나서 언니 동생을 하고 그런 식이었죠. (일동 그건 아니라며 웃음) 그걸 제가 보고나서 이렇게 영화가 되면 영화를 안 하는 게 낫겠다 했죠. 도저히 안 되겠다, 나 혼자 쓰겠다 하고 최종적으로 한달을 혼자 작업했어요. 영상원 친구 학생하고 같이. 디테일을 강화한 거죠.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건네주면서 “나는 영화를 못해도 좋은데 이게 내 완고이고 더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시나리오로 나는 이런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네잔은 공감 - 주인공 봉수는 ‘보통’ 한국남자 설 | 봉수 안에 많이 들어 있죠, 제 모습이. TV 보고 빈둥빈둥거리는 것도 닮았고, 봉수가 영화 속에서 밝지가 않잖아요. 저도 굉장히 무표정하면서 말도 그냥 툭툭 던져요. 그런 게 닮았죠. 근데 잘 보면 진짜 봉수랑 닮은 사람은 박흥식 감독님인 것 같아요. 박 | 그렇지, 뭐. 나도 범생이였고 취직해서 일도 해봤고, 결혼적령기고. 우리 둘이 한 얘기가 있잖아. 경구씨하고 나하고 전화를 하면서 한 얘기가,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좀 퉁명스럽다. 보수적인 데도 좀 있고, 결국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우리 같은 모습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 모습하고 내 모습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라. 감추지 말고, 그냥 우리 안에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거였어요. 한 여섯 번째 촬영 때쯤인가, 봉수가 “나 혼자 살아, 독립했어. 아 맛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걸 찍을 땐데, 스탭들한테서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어요. 그때 이후로 어떤 느낌이 왔냐 하면, 저 친구가 지금 화면 안에서 봉수처럼 놀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찍으면서 본인도 웃더라구요. 여유가 생긴 것 같더라구요. 설 | 근데, 저는 <아내가…>뿐이 아니라 스타일이 원래 그래요. 박 | 맞아요. 아무튼 그때 이후로는 저는 이 사람한테 별로 말을 안 했어요. 현장에 와서 느낌대로 가자고 약속했죠. 내가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설경구씨가 판단을 해서 이건 좋다, 이건 아니다, 하는 식으로. 경구씨는 그 판단력이 굉장히 정확해요. 이건 과장이 아니냐, 하는 것도 용기있게 하자고 하기도 하고. 내가 좀 확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감독은 별로 확신이 없어요. 설 | 세상에, 빤스만 입고 출근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장면 있잖아요. 그걸 놓고 감독님은 끝까지 오버래요. 촬영 쫑나는 날 직전까지. 자르려 그러는 거예요. 죽어도 못 자르게 했어요. 박 | 그래서 두 가지로 찍었잖아. 설 | 그게 불안해 갖고, 면도 크림 묻히고 나오는 거, 그것도 하나 찍어놨어요. 박 | 그때 이창동 감독이 왔었어요. 이창동 감독한테 내가 이거 오버하는 것 같다 그랬더니, “야, 이거 오버 아니야. 네 영화 속에 이런 거 많아야 돼” 하시더라구요. 설 | 난 오히려 흥식이 형이 너무 겁내는 게 불만이었어요. 저는 그런 사람 얘기를 실제로 들었거든요. 다섯잔은 설전 - 배우와 감독의 차이 박 | 저는 사실, 제 영화 속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거든요. 설 | (입술을 삐죽거리며) 이 사람이 인색해요, 원래. 박 | 그러지 좀 마. (서서히 신경을 곤두세운다) 설 | 인색하잖아요, 형. 진짜 인색해요. 마음은 안 그런데 되게 인색해요. 별명이 독일 병정이에요. 박 | 어린 봉수가 소나기 맞으면서 뛰어와서 엄마라고 하는 건 원래 시나리오 안에 있었던 게 아니고 제가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는데 좌절되었던 성장영화에 있던 거였어요. 설 | 이창동 감독님이랑 일반시사 같이 봤는데 그 장면 딱 나올 때 “상업영화 하면서 예술영화로 시작하네” 하시대요. 박 | 크랭크인한 첫날에 어린 봉수 나오는 그 장면하고 친구에게 염색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하고 두 장면을 찍었는데 촬영 중간에 경구씨하고 얘길 했거든요, 마지막에 봉수가 정리를 하고 나가야 할 텐데 무슨 얘기를 하는 게 좋겠냐고. 그러다가 “염색하지 마 이 새끼야”가 어떨까 했더니 경구씨가 좋대요. 홍상수 감독님이 영화 찍을 때 실제 술을 먹이고 찍었다고 하기에 나도 해보고 싶어서 해봤는데, 경구씨가 서태화씨하고 술을 먹는 장면에서 둘이 소주를 9병 마셨어요. 서태화씨가 먹은 것만 6병이 돼요. 설 | 저는 먹다가 물로 바꿨거든요, 그런데 태화 형은 제가 물로 바꾼 건지 모르고 계속 술만 먹었죠. 박 | 아직도 아쉬운 것은, 테스트할 땐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슛을 들어갔더니 그게 안 나오는 거예요. 이 양반이 웃기는 게 에너지가 어느 한순간에 나오면 그 다음엔 없어져요. 그러니까 그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해요. 17테이크를 갔는데 결국은 제가 만족을 못해 설경구가 나중에 나와가지고 자기는 끝까지 아주 징할 정도로 해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새벽은 가까워오지, 날은 다 샜지 더이상 못할 것 같은 거야. 서태화씨가 너무 술에 취해서 안 되겠더라구요. 설 | 그 다음날 전화했더니 어떻게 끝났냐 묻더라구요. 박 | 취해서는 무조건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긴 하는데 연기에 대해서 대화가 안 되는 거야. 첫 장면은 내 느낌대로 찍었는데 그 다음 둘이 찍을 때는 완전히 죽상이 되어 있더니 나중에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배우 앞에서 오케이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갈 수가 있냐구. 설 | 기분 좋게 오케이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오케이! 하면 배우도 기분 좋게 갈 수 있잖아요. 흥식이형은 제일 극찬하는 게 “괜찮다”예요. 한 테이크에 오케이 됐던 건 만화가게에서 찍은 것 하나예요. 잘렸지만. 확실히 감독은 세밀한 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배우는 짜증나요. 컨셉이 다르거든요, 감독이랑 배우랑. 박 | 이번 영화에서는 모두가 됐다고 했는데 나 혼자 아니라고 했던 게 하나 있었어요. 설경구씨가 신문지 찢는 마술하는 장면이 나는 좀 오버된 것 같더라구요. 첫 번째는 실수를 했고 두 번째 하는데 스탭들도 현장에서 웃느라고 NG날 정도로 다 좋았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오버인 것 같더라구요. 촬영감독도 웃느라고 잘 보면 뷰파인더가 조금 흔들렸어요. 그런데 제가 더 가자고 해서 다섯번을 갔어요. 경구씨가 나한테 화를 냈죠. 설 | 또 명함에서 동전 옮기는 마술할 때도 짜증났어요. 박 | 한번도 짜증을 안 냈는데 마술할 때 짜증을 냈어요. 설 | 뒤에 연결이 어떨지 모른다고 또 찍게 해요. 너무 짜증나더라구. 그러고서 두 번째 걸로 썼잖아요. 내가 막 했어요, “아까 것을 쓸걸” 하면서. (일동 웃음) 배우도 개겨야 돼요. 여섯잔은 사랑타령 - 원주는 뽀뽀하고 싶은 여자 설 | 형, 우리 영화 보면 왜 사랑이 보석 같은 거다, 마술 같은 거다, 싶다가도 또 굉장히 일상적이잖아. 형이 생각하는 사랑, 그것도 궁금하던데. 박 | 사랑은 보석 같은 것이기도 하고, 일상이기도 하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하고 난 뒤에도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지 모르고.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질 때 짧지만 빛나는 순간이 있잖아. 그래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같은 영화, 정말 좋아해. 어릴 때부터 미용사를 사랑해서 미용사의 남편이 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미용사 아내.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사랑의 절정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물에 몸을 던지잖아. 그 사랑의 순간을 지키고 싶었던 거겠지. 난 그 정서에 공감해. <일 포스티노>에서 남자가 여자랑 게임을 하며 구애하는 순간도 그런 느낌이 있어서 좋고. 그 전후가 크게 달라질 것 없더라도,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나도 아내가…>에서는 그런 순간보다 일상을 위주로 했는데, 다음에는 좀더 가보고 싶어. 인공적인 드라마가 아니면서도, 일상이 근간이 되면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격정적인 순간을 담아보고 싶어. 누가 누구를 만나서 사랑한다는 건 사는 모습의 일부야. 봉수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태란이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태란이는 자기 곁을 떠났잖아. 옆에 누가 없는 상태에서,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야. 누가 떠나간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또다른 사람을 찾게 되지. 거기에 집착해서 평생 그 여자만을 기억하면서 살겠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해도 떠나가버리면 또다른 사랑을 찾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해. 영화 속에서 봉수가 쉽게 태란이를 접고 원주에게 가는 이유는 그게 살아가는 일부이기 때문이야. 나는 정말로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담으려고 했어. 그런데 내 모습을 내가 반추해봤더니, 첫사랑을 생각하느라 내가 매일 괴롭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만났다구. 또 그 여자랑 잘 안 되고나서는 또다른 여자를 찾았고. 지금 나는 결혼은 아직 안 했지만,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해주고 나랑 통할 것 같으면 나랑 살 수 있는 여자가 되는 거지. 경구씨는 원주랑 태란 중에서 누구를 택하겠어? 설 | 설경구가요, 봉수가 아니고? 당연히 원주죠. 현실적으로 태란은 이혼녀잖아요. 밑지는 장사잖아요. 태란이랑 나랑 서서히 나도 모르게 깊게 빠져든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하룻밤 잤다고 남자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물론 그러고 나서 확 빠져들면 이혼녀고 뭐고 상관없겠지만, 시작인 상태에서는…. 박 | 봉수가 태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도 했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경구씨에게 물어봤어요, 이혼녀인 태란에게 쉽게 결혼까지 할 생각까지 갖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렇지 않죠” 하더라구요. 그럼 왜 좋아하는 거냐 했더니…. 설 | 성적인 거지. 박 | 제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은 ‘뒤통수 바라보기’였어요. 원주가 봉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봉수가 태란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그런데 누구 하나가 뒤통수 바라볼 상대가 없어졌을 경우에는 누구하나가 시선을 돌려주기만 하면 마주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겠냐. 근데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까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헤매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나중에 아니다 싶을 때는 자르기도 확실히 잘라요. 미련을 많이 남기고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것은 오히려 남자쪽이 강하더라구요. 여자들은 확실해요, 확신이 있어요.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혹은 이 사람은 나하고는 아니구나 싶으면 자른다고요. 선이 확실해요. 그런데 나는 원주가 봉수를 좋아해주는 마음에 여자는 남자보다 확신이 있고 강한 모습이 비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보같이 헤매던 봉수만 나중에 살짝 시선을 한번 돌려줘라, 그러면 이건 성립이 되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설 | 나는 시나리오 보고 봉수는 진짜 매력없다고 생각했고 원주가 너무 예뻤어. 뽀뽀해주고 싶은 여자다, 이 여자는. 진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싶었어요. 일곱잔은 결심 - 사랑하면, 표현하리라 박 | 다음 작품 할 때도 변할지 안 변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확신이 없으니까 저를 의심을 해요. 거기서 오는 게 커요. 내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스탭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는데 저는 표정이 얇아서 금방 드러나나봐요. 설 | 못 속여, 못 속여. “에이 이 씨발놈들아” 할 때는 하고 끝나면 “자 술먹자” 하고 가는 것. 어차피 그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주변이 불편한 거야. 눈치보게 만드는 거야. 그냥 화끈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멋이거든요. 하긴 감독이란 사람들이 현장에서 화끈할 수가 없어요. 저 같으면 더 할지도 몰라요. 순간 탁 털어버리고 주위를 여유롭게 만들어준 다음에 혼자 고민하면 되잖아. 박 | 그런데 영화를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대인관계상 내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건 그 사람에게 확실히 표현해야 하겠다는 건 이 영화에서 원주를 통해서 내가 배웠어요. 적극적으로. 스스로 내가 배운 것이 그거예요. 모더니티 비슷한 문젠데, 지금은 표현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누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배우를 좋아한다 그러면 이 배우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장면이 좋다면 그 표현을 해야겠다, 앞으로는. 나도 앞으로 결혼도 해야겠고 여러 가지를 해야 할 텐데. 내가 만나는 사람한테는 꼭 표현해야겠다는 걸 배웠어요. 설 | 흥식이 형은 굉장히 디테일한 사람이야. 짜증날 정도로. 배우들은 정말 힘들어. (손가락을 조그맣게 하며) 아, 그 좆만한 디테일 때문에 똑같은 걸 몇번씩 찍으니까. 그러고는 꼭 첫 번째 걸 써요. 다음 영화도 디테일로 할 건가? 박 | (웃으며) 다음 작품 제의가 들어오고 있어. 근데 다음에는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하지만 디테일은 모든 영화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 구조가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줄거리가 있구나” 하는 영화를 하고 싶어. 난 할리우드영화도 좋아하거든. 어떻게 말하면 난 드라마가 있는 영화를 부러워하기도 해. 일본영화를 보면 디테일이 다 존재하거든. 디테일은 기본이야. 설 | 그 영화, 저도 껴달라고 그랬어요. 박 | 공감하실지 모르겠는데 첫 장면은 제가 생각해놓았어요. 아주 어색한 부모님 생일파티. 다들 아시죠? 부모님 당사자만 좋아하고 주변의 식구들은 아주 어색해하는 느낌이 영화의 첫 장면이에요. 닭살이지만 해야 하는 행사잖아요. 그게 영화의 시작이거든요. 제가 그걸 갖고서 한번….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이랑 달리 가족간에 표현하는 사랑이란 게 되게 역설적인 것 같고, 서툴고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랑 이상의 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내가 한번 그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영화 전체를 표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런 영화 만들 수 있어?

50, 6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나이 지긋한 사람들과 옛날 할리우드영화를 보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죠. “요새는 저런 영화는 못 만들어.” 이런 한탄조의 회상은 너무나도 진부해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어렸을 때 ‘추억의 영화’에 대한 한탄조의 멘트를 지독하게 자주 반복하던 모 영화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를 거의 증오하기까지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사실이기도 합니다. 당연하죠.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이 50년대 사람들처럼 영화를 만든다면 그게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니겠어요?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영화 <지지>도 절대로 2000년대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입니다. 왜? 클래식 할리우드의 그 예스럽고 풍요로운 느낌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내용이 ‘정치적으로 공정’한 요새 만들어지기엔 문제가 많답니다. <지지>의 내용을 기억하시는지요? 중년의 사교계 신사가 15살짜리 소녀와 놀다가 그만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지>는 뮤지컬 버전 <롤리타>는 아닙니다. 요새 나오는 틴에이저의 성을 노리개로 삼는 수많은 영화들에 비하면 얌전하고 로맨틱하며 품위있죠. 문제는 그동안 관객의 태도가 바뀌었고, 그 결과 영화의 그 태평스러운 어조가 아무래도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슈발리에가 그 감칠맛나는 불어 악센트로 부르는 첫 번째 노래를 기억하시는지요? “Thank Heaven for Little Girls….” 슈발리에의 캐릭터 오노레 드 라사이유에게 이 노래는 단순히 아름다운 인생 예찬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관객에게 그 노래는 망령이 도를 넘어선 음탕한 페도파일의 주제가로 들리죠. 궁금하시면 아무 검색 엔진에서 ‘Thank Heaven for Little Girls’를 찾아보세요. 어떤 사이트들이 나오나. 그러나 냉소주의는 여기서 그만 멈추기로 하죠. 그렇다고 <지지>가 정말로 그런 식으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고, 오노레 영감도 벨 에포크 버전 험버트 험버트는 아니며, 영화 자체도 좋으니까요.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면 ‘정치적 공정성’은 살짝 뒤로 밀어놓고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와 빈센트 미넬리가 만들어낸 적당히 천박한 호사스러움을 즐기게 됩니다. <지지>는 한때 번역된 콜레트의 소설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던 자칭 콜레트 팬인 저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쩌다보니 전 원작인 중편소설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영화를 보았으니까요. 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죠. 아마 원작을 읽은 지 몇 주일 뒤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해주었을 거예요. 원작의 뒤바뀐 스토리 라인이 맘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군요. 당시 제가 꽤 순수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그 결말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뮤지컬의 화려함에 지나치게 목을 매다보니 극적 구조가 이상해져버린 것이죠. 그러나 레슬리 캐론과 모리스 슈발리에, 이미 패션사의 고전이 된 귀여운 스코틀랜드 격자무늬 스커트, 알란 제이 라너와 프레데릭 로의 달콤한 가사와 음악, 영화 전체에 담뿍 묻어 있는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쾌락주의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증오했던 그 영화음악 프로그램 담당자처럼 한숨을 폭폭 내쉬며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죠. “요샌 이런 영화는 못 만들어.” di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