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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국민배우를 만나다

◆안성기 vs 야쿠쇼 고지 한,일 국민배우가 말하는 삶과 영화 “한국이 처음이라고? 그랬나?” “그러게요.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더라면….” 안성기와 야쿠쇼 고지(役所廣司). ‘국민배우’라고 말을 하면 그저 마주보며 씩 웃어버릴 듯한 이 한·일 두 국민배우의 만남은 성공한 남자들 특유의 격조와 몇번 만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을 듯한 막역함으로 처음부터 멋들어졌다. 둘이 손을 맞잡고 있으니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한 듯한 이들은 생일도 똑같은 1월1일. 1952년생인 안성기가 1956년생인 야쿠쇼 고지보다 4살이 위다. 1996년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잠자는 남자>에 출연하며 처음 만났던 이들은 그때 일본에서 몇달을 함께 보내며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이복형제 역으로라도 함께 또 영화를 하자”고 말할 만큼 형제에 가까운 우정을 나누었다. <쥬바쿠> 홍보차 야쿠쇼 고지가 한국을 찾으면서 이들의 재회는 성사됐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기로 소문난 두 배우. 야쿠쇼는 이 만남 직전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안성기의 이름을 세번이나 꺼내며 자신이 그를 흠모하고 존경한다는 사실을 밝혔고, 안성기 역시 “야쿠쇼야말로 일본 최고의 배우”라고 치켜세웠다. 97년 안성기가 일본에 들렀을 때 만나곤 햇수로 4년 만인 이번 만남에서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그나마 여러 취재진의 시선에 둘러싸인 채이긴 했지만, 뜨거운 ‘동지’의 눈빛을 나누기에 여념없는 모습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남자 사이는 이런 건가, 한국말로 말을 건네면 한국말로 답할 것 같고 일본말로 말을 건네면 일본말로 답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며 껄껄 웃는 이들. 이 멋진 중년의 두 배우에게서는 혀끝에서 나오는 어느어느 나라 말보다 훨씬 진득한 그들만의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편집자 ■프롤로그 안성기(이하 안) 곤니치와. 야쿠쇼 고지(이하 야쿠쇼)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오구리 고헤이 감독에게 한국에 가서 안성기씨를 만난다고 했더니, 덕분에 골프 실력 늘었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안 아, 그래요. 오구리 감독 한번 초청해서 해야지. 안 예전에 80년대에는 일본영화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출연한 영화가 일방적으로 소개되고 해서 늘 관계가 불편했는데, 이제 3차까지 개방이 돼서 일본의 좋은 영화들을 거의 다 볼 수 있게 됐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국 관계를 위해서도 상당히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야쿠쇼 4년 전 <잠자는 남자> 때문에 만났을 때, 그때 한국영화계가 일본영화의 전성기 때와 비슷하다고 말을 했었는데, 지금 와보니까 한국영화들이 훨씬 대작이 많고 에너지가 느껴지네요. 그때가 전성기가 아니었나봐요. (웃음) 안 어떻게 보면 억울하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이 빨리 됐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빨리 봤을 텐데…. 그렇게 서로 자연스럽게 교류함으로써 좋은 문화가 많이 들어오게 돼서 잘된 일이 아닌가 해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이렇게 가까운 나라끼리 교류한다는 것은. 야쿠쇼 아까 기자회견 때도 그 얘길 했지만, 한·일 문화교류를 안성기씨가 <잠자는 남자>로 열어준 게 아닌가 합니다. (웃음) 안 아이 참,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딱딱한 얘기만 하게 돼서…. (웃음) 부산국제영화제 얘기는 혹시 들어보셨는지. 야쿠쇼 초청받은 적도 있는데 갈 수 없었습니다. 안 꼭 오시죠. 많은 영화인들이 국적을 떠나서 만나는 진짜 좋은 장소인 것 같아요.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에 영화배우 하기 잘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야쿠쇼 다른 나라 영화제에 가봐도 그 도시의 사람들이 자원봉사하고 하는 걸 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구나 실감하곤 합니다. 나의 첫발자국, 그날 이후 안 잠깐, 어떻게 불러야 하나, 야쿠쇼상이라고 해야 하나? 야쿠쇼상은 배우를 늦게 시작했죠? 다른 직업도 가졌었고. 몇년 정도 하셨죠? 야쿠쇼 10년 됐죠. 영화배우 한 것은.(야쿠쇼 고지가 영화계에 데뷔한 것은 85년 <담포포>를 찍으면서다. 당시엔 연극과 TV를 병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답한 것 같다.) 연극도 했었지만. 이것저것 하고 있었는데 <잠자는 남자>의 오구리 감독이 영화만 하라고 해서 영화만 했죠. 그런데 요즘은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니냐, 그러세요. (웃음) 안 그럼 요즘에는 주로 영화만 하시나요? 야쿠쇼 지난해에 오랜만에 13편짜리 드라마를 하긴 했는데, 그것말고는 영화만 했어요. 안 <잠자는 남자>할 때 그 얘길 했던 게 기억나요. 한국이 부럽다, 영화배우가 아직 있다니, 했는데 야쿠쇼상이 ‘영화배우’이니 일본도 이제 부러울 게 없겠네요. 야쿠쇼 (웃음) 안 내가 본 야쿠쇼상 영화는 <우나기> <쉘 위 댄스> <쥬바쿠> 이렇게 세편하고 내가 함께 나온 <잠자는 남자>인데, <쉘 위 댄스>는 아주 감동적이었고…. 앞에서 이런 얘기 해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흔히 일본영화는 연기가 과장된 것이 많다고들 하는데, 야쿠쇼상은 연기가 상당히 자연스러워서 그런 것이 관객을 많이 불러모으지 않았나 생각해요. 야쿠쇼 <쉘 위 댄스> 얘기를 하셨는데, <잠자는 남자>를 끝내고 바로 <쉘 위 댄스>를 찍었어요. 그 사이에 3개월 동안 댄스교습소를 다니면서 춤연습을 했죠, 오구리 감독 몰래. 안 (웃음) 야쿠쇼상, 우리 영화를 많이 못 봤겠죠. 야쿠쇼 안성기씨 나오는 영화를 골라서 봤는데요. (웃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안 저는 요즘 우리 영화가 상당히 좋아지고 있다, 그런 느낌들을 갖는데, 한국하고 일본하고 서로 좋은 점들을 많이 배워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야쿠쇼 일본영화는 상업적으로는 성공 못하는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도 종종 젊은 작가들은 저예산으로 작가성을 살려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지요. 일본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작품성을 평가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서 일본 관객이 일본영화를 외면하다가 다시 눈을 돌리게 됐어요. 한때는 호러영화가 많았죠. 나 역시 <큐어>도 했는데, 호러가 돈이 된다고 많이들 만들었죠. 안 그거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죠. 이번에 중국 가서 <무사>를 찍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유럽에서는 촬영은 어느 나라 사람이, 녹음은 어느 나라 사람이, 이런 식으로 정말 유럽공동체라는 느낌이 드는데, 우리도 한국, 일본, 중국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구요. 중국은 물가가 싸니까 장소를 제공하고, 일본은 녹음이나 현상기술이 뛰어나니까 그쪽으로 참여하고 배우들도 여러 나라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식으로요. 야쿠쇼 네…. 근데 그럼 어느 나라 말로 하죠? (웃음) 안 그렇네, 그럼 또 잠자야 하나? (웃음) 우리나라 어느 제작사에서 야쿠쇼상하고 나하고 같이 하는 작품을 하자고 그런 얘기도 있었는데, 그게 실현됐으면 하는 생각도 드네요. 야쿠쇼 4년 전 일본에서 만났다가 마지막 헤어질 때 안성기씨가, “이복형제 역할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웃음) 배우로 늙어가다 안 아, 저거 좀 궁금한 것 있어요. 요즘 저 같은 경우에는 촬영현장에서 제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야쿠쇼상은 어떤지. 야쿠쇼 일본은 한국 정도는 아니에요. 저는 제가 항상 최연소라고 생각하고 연기해 왔는데, 어느새 중간이 됐어요. 일본은 스탭 중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서 최연장자가 되는 경우는 없고, 다만 <쉘 위 댄스> 할 때는 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저랑 동갑인데 중견감독 소리를 들어서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생각했죠. 안 그건 정상인 것 같아요. 시대적인, 우리의 어떤 상황이 있어서, 지금 우리는 활발한 중견 50대가 없는 거거든요. 선배가 있고, 중간쯤 된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일 것 같아요. 요즘 전 솔직히 외로운 때가 많아요. (웃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사랑하는 영화 안 야쿠쇼상은 출연작이 몇편 정도 돼죠? 야쿠쇼 음, 한 스물세편 정도? 확실하진 않아요. 안 (웃음) 나도 그런데, 한 육십몇편 정도? (웃음) 좋아하는 작품이랄까, 의미있는 작품 몇편을 꼽는 게 가능할까요? 야쿠쇼 <가미가제 택시>하고 <잠자는 남자>가 전 제일 애착이 가요. 하라다 마사토 감독의 <가미가제 택시>는 처음으로 영화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게끔 한 영화이고, 영화를 하면서 쇼크를 받았던 작품은 <잠자는 남자>거든요. <잠자는 남자>를 찍고 바로 <쉘 위 댄스>를 했는데, 만약 그 순서가 거꾸로였다면 둘 다 전혀 다른 작품이 됐을 거예요. <잠자는 남자>의 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천천히 말하라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곤 쇼크를 받았어요. 그뒤로 연기가 많이 바뀌었지요. 안성기씨는 어떠신가요? 안 몇편 꼽는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굳이 한다면, 이장호 감독과 만나고 또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바람불어 좋은 날>, 임권택 감독과 만나고 연기자의 기반을 다진 작품인 <만다라>,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던 <고래사냥>, 관객은 없었지만 재미나게 찍었던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그리고 <하얀 전쟁>은 내가 베트남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고, 영화도 좋았고,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투캅스>,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감독의 한마디 안 이제 영화배우로 10년이 됐으니 함께 작업했던 감독한테 들었던 어떤 말 중 절대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야쿠쇼 꼭 어느 분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선배들의 작품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면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어떤 말을 얘기하자면,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지요. 안 내가 80년 <바람불어 좋은날>을 할 때였지요. 물론 성인으로서 데뷔는 그전에 했지만, 그래도 일반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게 그 작품인데, 거기서 중국집 배달부 역으로 나왔어요. 이렇게 사람들이 죽 다 나를 보고 있고, 그런 속에서 철제가방을 들고 어리숙하게 걸어가는 장면이었는데, 내가 너무나도 어리숙하게 하니까, 이장호 감독이 “그렇게 해서 뭘 하겠냐”고 하더라구요. 심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핀잔을 들었다는 게 나는 굉장히 가슴이 아팠어요. 칭찬은 못 들을망정 내가 이런 소리나 듣나, 싶었죠. 그날 내가 울었어요. (웃음) 그리곤 그 다음날부터는 참 잘했죠. 다행히 그 작품이 잘됐고, 그 다음부터 하고 싶은 작품을 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비치는 이미지,원하는 이미지 안 영화 속에 보여졌던 내 모습을 죽 돌이켜보면, 나는 80년대에는 주로 70년대에 못했던 이야기들, 우리가 건너뛴 이야기들을 하려고 배우로서 노력했던 것 같아요. 또 그런 작품에 참여하려고 애썼고, 그러다보니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 역을 많이 했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면으로 대놓고 하지 못하니까 바보스럽게, 풍자적인 모습으로 많이 나왔죠. 고독이나 반항이나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섞여서 영화 속에 나타나는 것이지 자기의 모습이 그대로 영화 속에 드러난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다큐멘터리가 아니고는 힘들지 않을까…. 근데, 그 모습이 바뀌어가요. 야쿠쇼상도 인물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배우로 알고 있는데, 90년대 들어와서 사회가 자유스러워지고 예전의 검열 문제라든지 하는 구속에서 자유스러워지니까 인물도 자유스러워지고, 그러다보니까 코미디도 하게 되고, 성격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역할도 하게 되는 거죠. 최근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나 <무사> 같이 나이들면서 또 강한 역할을 하게 된다든지. (웃음) 그것은 시대가 어떤 영화를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나도 부응해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해요. 어떤 역할을 고집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야쿠쇼 저도 이미지를 고정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것은 안 좋죠. 이미지를 고정시키면 관객이 배우에게 선입견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배역의 연기를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스타가 많았을 때에는 스타에 맞게 각본을 썼고, 배우에 맞게 내용도 고치고 했죠. 제가 ‘다가가는 연기’, 그러니까 배우가 캐릭터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는 연기에 대해 얘기하곤 하는데, 그렇게 해선 배우는 가만있고 시나리오 같은 다른 게 다가오는 거죠. 그래서 관객은 각기 다른 영화를 보아도 똑같은 성격의 배우만 보았죠. 저는 관객이 저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그 선입견을 깰 수 있는 배역을 맡고 싶어요. 내가 못하는 역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역들을 끌어내서 좋은 사이클을 유지하며 연기해 나가고 싶습니다. 안 비슷한 생각이군요. 야쿠쇼 저는 젊었을 때부터 중년 역할을 했고, 나이 들어서도 중년 역할을 하는데, 나이 들어 하는 중년 연기가 훨씬 더 재미있어요. 많이 살아왔고, 복잡하게 많은 것들을 겪어왔기 때문에 중년 연기자로서 연기하는 게 더 재미있는 거지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빨리 못 뛴다든지 몸을 쓰면 근육통이 생긴다든가 하는 거예요. (웃음) 안 그 얘기 잘하셨는데, 언뜻 듣기로 운동을 잘 안 하신다고…. 물론 <쥬바쿠> 보니까 영화를 찍으면서 충분히 많은 운동을 하신 것 같지만…. (웃음) 야쿠쇼 네…. 안 저도 요즘 배우의 정년이 언제일까 그런 생각을 해요.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건데, 내 몸이 안 따라준다거나 관객이 나를 보기 싫어한다거나 하면 관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몸이 안 따라주는 것에 대해서는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운동을 밥먹듯이 해야 한다고.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는. 야쿠쇼 만일 60살 먹은 사람 연기를 하려면 배우는 다섯살은 어려야 해요. 왜냐면 60살 먹은 사람은 한번만 뛰면 죽는데, 배우는 그걸 스무번은 해야 하니까요. (웃음) 이런 감독 좋아한다 안 야쿠쇼상은 좋아하는 감독 스타일이 있나요? 난 감독 이전에 인간 대 인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생각을 공감도 할 수 있고, 뜻이 같다고 할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왔죠. 배창호 감독 같은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케이스예요. 촬영하면서 다음 작품 얘기도 하고, 얘기를 아주 많이 한 편이죠. 저는 그런 감독을 좋아하기도 해요. 연출 자체만을 너무 생각하기보다는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컨트롤하는 스타일 말이에요.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님도 그렇고. 임 감독님 같은 경우에는 안 보는 것 같으면서 다 꿰차고…. 점심도, 일 늦게 끝나고 제일 마지막으로 먹는 사람을 봤다가 그 사람이 다 먹으면, “이제 시작할까” 한다든지. 그런가 하면 밥도 안 먹이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오늘도 이 인터뷰가 밥을 안 먹이는데…. (웃음) 야쿠쇼 옛날 일본 영화산업이 전성기였을 때는 영화사가 배우를 데리고 있었지요. 회사가 배우를 키우는 시대였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비즈니스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배우를 성장시키는 사람이 있었죠.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감독이 나의 가능성을 봐주고, 새로운 역이라도 시켜주고, 그렇게 나를 발견해주는 게 중요하죠. 서로 대화를 해가면서 감독도 배우를 발견하고 배우도 감독을 발견하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해요. 그런 감독이라면 그의 영화에 또 나가고 또 나가고 하죠. 나를 바꿔주는 감독 말이에요. 역시 안성기씨 말대로 인간 대 인간 관계지요. 안 또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향을 제시해주면, 그게 또 의욕이 나고 좋죠. 그런 아이디어를 많이 가진 감독도 좋은 것 같아요. 관객은 국경을 넘어? 안 일본은 관객층 연령대가 어떻게 되죠? 야쿠쇼 10대, 20대가 대부분이죠. 안 한국 같은 경우는 가장 아쉬운 게, 젊어서 데이트할 때는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보다가도 결혼하고 나이먹고 그러면 다 비디오나 TV로 빠져요. 그것에 비해서 일본은 나이든 관객도 있는 것 같은데. 야쿠쇼 작품에 따라서 달라요. 안타까운 일은 상업영화들이 대개 10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거죠. 안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부산영화제에 와보고 외국인들이 젊은 관객들이 북적북적대는 걸 보고는 아,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다 그러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그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도 그런 곳에 계속 와주고 해야 하는데 나이 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또 밑에서 젊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그런 식이니까요. 참 아쉬워요. 야쿠쇼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유럽은 문화적인 전통이 강해서 그런지 고연령층의 사람들이 극장에 많이 오죠. 놀라워요. 안 맞아요. 그 작품을 내 품에 야쿠쇼 요즘 영화는 너무 호러나 폭력물이 많아요. 사회 따라 영화도 변하는 거죠. 전 따뜻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그런 영화들을 주로 찾고 있죠. 그런데 의외로 그런 작품이 드문 게 현실이에요. 안 나로서는 다가올 하나하나가 다 하고 싶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얼마나 이 역에 빠져들 수 있나를 생각해서 배역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에필로그 안 아유, 얘기하면 바로 한국말을 할 것 같은데, 언어 때문에 참. 그렇게 친숙감이 드는데…. “가자!” 그러면 바로 “좋아!” 그러고 갈 것만 같다고요. 야쿠쇼 저도 그래요. 오늘 공항에 내려서 생각한 게 한국이 일본하고 너무 비슷한 거예요. 길도, 사람도 비슷한데 다른 말을 쓰니 이상하더라구요. 신이 시련을 준 것같이. 안성기씨는 4년 전 봤을 때하고 지금하고 하나도 안 달라졌어요. 전혀 안 늙고 오히려 젊어진 것 같네요. 나 혼자 나이먹은 듯해서 질투가 납니다. 안 운동을 많이 해서 오래오래 사랑받는 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나도 노력하겠지만. 야쿠쇼 저는 이제 영화를 10년 했으니 다음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서 출연작을 결정할 시기죠. 충고대로 (웃음) 운동도 열심히 해서 다음엔 더 젊은 모습으로 만났으면 합니다. 글 문석 기자 ssoony@hani.co.kr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사진 정진환 기자 jungjh@hani.co.kr 통역 강민하 ▶ 안성기 , 야쿠쇼 고지의 내인생의 연기자 ▶ 안성기 , 야쿠쇼 고지의 프로필

프로필

안성기 5살 아역을 시작한 것. 돌아가신 김기영 감독님하고 아버지하고 친하셨는데, 그래서 우연히 눈에 띄어 영화를 하기 시작한 게 지금 내가 영화와 가까이 있게 된 아주 큰 사건이었던 같다. 중3 때 영화를 관둔 것도 나름의 큰 사건이다. 계속했다면 아역 이미지를 벗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그리고 보편적인 일반인의 감정을 갖고 생활했기 때문에 결국 성인이 돼서 어떤 인물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됐기 때문에. 대학 시절 베트남어를 전공한 것. 졸업과 동시에 베트남이 망했기 때문에 먹고살 일이 없어서 갈 길이 영화쪽으로 정해졌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로 성인연기자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야쿠쇼 고지 0살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4번째 형까지 낳고 부모님께서 이제 그만 낳자 하셨는데, 형제 중에서 가장 무뚝뚝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15살 처음으로 친구랑 포크밴드를 결성했다. 학교축제 때 공연을 했는데, 난생 처음 러브레터를 받아봤다. 고3 때 이대로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게 너무 싫고 두려워서 교실에서 폭죽을 막 터뜨렸다. 그 일 때문에 교장실에서 1주일간 자습을 해야 했다. 18살 공무원이 되었다. 도쿄에 와서 자취를 했는데, 그때 영양결핍 상태여서 도쿄의 지옥철에서 도저히 견디지 못해 몇번이나 내려서 구토하고 다시 타고를 반복했던 것. 4년 뒤 어느 날- 공짜로 연극 표가 들어와서 보러 갔다. 우울한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너무나 감동받았다. 그래서 연극배우가 돼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연극 자체는 별로 매력이 없는데, 배우라는 존재는 매우 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공무원을 관두고 배우가 되었다.

제12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 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정말이지 이곳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초행자의 이런 추측에 올해로 벌써 열두해째를 맞는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실제로도 국제영화제라기엔 아주 소박하기만 한 자태로 응수해주었다. 예컨대, 정식 영화관이 아니라 문화스포츠센터나 호텔의 강당 같은 장소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이나 번듯한 영화제 데일리조차 발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은 유바리영화제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타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수준임을 일러주었다. 북한영화 만났다 공식초청 부문,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 디지털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오프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비디오 페스티벌 등으로 짜여진 이 영화제의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식초청 부문일 터. 이 부문에서 선보인 17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한국 관객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판타스틱’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인 <프루프 오브 라이프>와 폐막작인 을 비롯해, <나인 야드>와 <치킨 런> 등의 할리우드영화들이 이미 한국의 관객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작품들인 것. 사미르 마흐말바프의 <칠판> 같은 경우도 부산영화제를 통해서 소수나마 한국 관객의 눈을 거쳐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초청 부문의 식단이란 게 일본 관객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이 봤을 땐 당연하게도 다채롭고 푸짐한 성찬(盛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문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북한영화 <태권도 여인 소미>(1997)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소미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무예를 연마해 결국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북한판 무술영화는 <민족과 운명> <임꺽정> 등 북한에서 주로 시대극과 역사영화를 만들었던 장용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최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열풍은 약 1만6천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이 아담한 도시라고 해서 그냥 비켜가진 않았다. 양윤호 감독의 ‘파이어 액션영화’ <리베라 메>가 공식 초청 부문에 초대돼 일본 관객에게 또 한번 한국영화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이 영화의 상영장인 문화스포츠센터를 가득 메운 일본 관객은 영화의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도 CG 도움없이 ‘불’을 연출해내는 솜씨에 놀라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유바리에서 보여준 <리베라 메>의 선전(善戰)은 이 영화가 일본 극장가에 공식적으로 입성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줄 전망이다. 제작사쪽에서는 일본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 영화의 드러나는 약점들을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엔젤>,<버서스> 관심 끌어 유바리에서 선보인 할리우드영화들 가운데 아직 한국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다크 엔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은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 뒤에 굳이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Created by James Camero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영화 <다크 엔젤>은 실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것도, 또 그의 ‘영화’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카메론이 제작 총지휘와 공동각본을 맡아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다크 엔젤>의 첫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영화는 미래의 2009년에서 시작한다. 어느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된 12명의 아이들이 연구소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이 살아남는데, 그 생존자는 맥스라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영화는 10년 뒤, 그 본격적인 무대인 2019년으로 넘어온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또한 미모도 출중한 소녀 맥스는, 억압과 빈곤, 부패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검은 천사’로 자라난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유전자 조작의 모티브는 각각 <다크 엔젤>이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맨>의 요소를 흡수·융합한 영화임을 일러준다. 그렇듯, 영화는 암울한 미래세계에 대한 풍경과 맥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자주 왔다갔다한다. 문제는 영화가 그 두 이슈 사이를 어정쩡하게 왕복하다가 정작 카메론적인 스펙터클조차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다음 이야기가 뒤를 이을 테니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크 엔젤> 시리즈의 첫 편은 적당한 맛보기 정도로 끝나고 만다. 아마도 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을 수를 차지할 일본영화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영화는, “네오 인디펜던트의 기수”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소개된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버서스>(Versus)였다.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대된 이 영화는 정말이지 숨쉴 사이를 주지 않고 전개되는 영화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인물들은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피를 흠뻑 묻혀가면서 싸운다. 목이 잘리는 것은 예사이고,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잔인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감독의 잔인무도한 재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영화는 전체적으로 호흡 고르기에 실패했다는 느낌도 준다.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싸움만 반복되니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버서스>는 일본 인디펜던트 고어영화(이런 말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잘 참기만 한다면. 디지털, 전진 또 전진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다른 많은 영화제들에서처럼 유바리영화제에서도 작으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어터’(Digital Theater)라 명명된 이 부문은 영화와 디지털을 어떻게 연결해볼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물론 디지털과 관련한 섹션이 올해 처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유바리에서는 ‘디지털 시네마 프리젠테이션’이란 부문을 통해 디지털의 현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지난해 디지털 섹션이 주로 미완성 필름과 견본 필름들만을 그저 ‘전시’(Presentation)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 디지털 섹션은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실험을 해보였다. 일본의 통신회사인 NTT의 기술 협조를 받아 도쿄에서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고 그 신호를 받아 유바리에서 단편애니메이션들과 실사영화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영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올 유바리영화제에서 이 디지털 시어터 부문을 기획한 사타니 히데미(수플렉스 영화사의 프로듀서)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 디지털을 열심히 알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이야기되는 디지털 논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을 던졌다. “현재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만 너무 급급하다. 하도 디지털, 디지털, 하고 소리만 시끄러우니 이건 마치 디지털에게 오히려 이용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와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디지털을 왜 이용할 것인가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조건 제작비를 삭감하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그럼 당신은 디지털의 주요 목적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솔직한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은 아직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진행중인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유바리 =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산소 한 잔 하실래요?

<키쿠라와 마녀의> 국내 상영에 맞춰 지난해 말 ASIFA 회장 미셸 오슬로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가가 누구인지" 물어봤다. 이런저런 작품을 하던 그는 "이 작가가 아직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말 대단한 작가다. 특히 이번 최신작은 올해 나온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걸작이다"며 한명을 극구 칭찬했다.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페트로프의<노인과 바다>도 "너무나 상업적" 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미셀 오슬로가 이처럼 극찬한 작가는 누구일까? 바로 네덜란드 출신의 미하엘 두독 드 비트이다. 현재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 마흔여덟살의 작가는 까탈스러운 이름만큼이나 우리들에게 무척 낯선 인물이다. 하지만 그동안 세 작품밖에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는 이미 정상급 애니메이션 작가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오슬로가 '걸작' 이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았던 그의 최신작은 지난해 제작한 8분 30초짜리 단편 <아버지와 딸>이다.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비롯해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 네덜란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올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페리 메이커>와 함께 후보로 올랐다. <아버지와 딸>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성장과정을 담담한 시각으로 그린 작품으로 , 두독 드 비트 특유의 간결하고 예쁜 그림체와 리드미컬한 카메라 워킹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필과 목탄, 컴퓨터 그래픽을 적절히 활용한 이 작품에서 감독은 대사없이 네덜란드의 사계절 풍광을 보요주면서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안고 사는 한 여인의 심성을 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두독 드 비트 특유의 이름은 그리 친숙하지 않지만, 그를 세계에 알린 <수도사와 물고기> 를 아는 사람은 꽤 많다. 95년 발표한 <수도사와 물고기>는 안시, 히로시마, 오타와 등 각종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많은 상과 함께 관객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줄거리는 무척 단순하다. 수도원 에서 사는 한 수도사가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낚으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수도사를 피해 물고기는 연못에서 나와 수도원 주위를 날아다니고, 그런 물고기를 수도사는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쫓아간다. 코렐리의 <라 폴리아>(La Follia)의 단아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마치 발레를 하듯 넉넉한 여백의 스크린 위를 유명하는 수도사와 물고기의 움직임은 드 자체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이 있다. 96년 히로시마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수도사와물고기>를 본 박재동 화백은 "꿈을 꾸는 것 같다"는 말로 작품에 대한 감동을 표현했다. 두독 드 비트의 애니메이션 심오한 철학이나 세계관 또는 톡 쏘는 재기나 익살을 발견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페트로프나 프레데릭 벡처럼 보는 이를 오금 저리게 만드는 치열한 장인의식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너부 진하지 않고 담백해 마치 작은 잔에 담긴 맑은 차 한잔을 떠올리게 하는 투명하고 은은한 느낌. 그의 작품을 보면 신선한 산소를 마신 듯한 상쾌함이 느껴진다. 섬세한 그림체도 아니고 배경도 대강대강 특징만 살려 반 추상적으로 상징화했지만, 그런 영상이 "예쁘다" 는 표현밖에 달리 적절한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돋보인다. 아직 올 아카데미 시상시기 발표되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다. 그래야 아카데미 시상에 약한 우리 정서에 힘입어 그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때문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나는 소망한다, 대륙의 비상을!

■<하나 그리고 둘> <화양연화> <와호장룡> <소무> <플랫폼>의 지아장커가 2000년 세계인을 매혹시킨 중국권영화 세편을 만났다. 정작 대륙에선 정체와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변방의 중국이 길어올린 빛나는 미학적 성과를 중국영화의 희망으로 공인받은 지아장커는 경탄과 회한이 교차하는 수려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주간신문인 <南方周末(South Weekend)> 2001년 2월 15일자에 실린 지아장커의 기고문을 본인의 동의 아래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지난해 베니스영화제가 끝난 뒤, 나는 <플랫폼>의 여주인공 자오타오와 함께 여기저기 떠돌다 프랑스를 거쳐, 홍보차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갈 참이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에드워드 양의 새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포스터를 보았다. 아이가 한층 한층 빨간색의 높다란 층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포스터만 봐서는 양 감독이 이전 영화의 실수를 다시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그의 이전 작품을 그다지 치켜세우고 싶지는 않다. 설사 가장 뛰어나다는 <고령가소년살인사건>조차도 의기는 넘치지만 절제력은 부족했다. 에드워드 양은 이념을 앞세워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꾸미는 성향이 있는데, 나는 그 점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오타오는 <하나 그리고 둘>이 화어영화(중국어영화)라는 말을 듣고는 보러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를 데리고 전철을 타고 밀치락달치락하며 퐁피두아트센터 부근에 있는 극장에 가서 표를 샀다. 극장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랑비 속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나는 이런 영화관람 분위기에 감동해 잠시 영화가 성스럽고 순결한 것이 아닌가 느꼈다. 오 헨리 소설 속의 유랑인이 교회당을 지나며 오르간 소리를 듣는 그런 느낌의 경지처럼. <하나 그리고 둘>, 2000년 가장 아름다운 영화 나는 내심 웃고 있었다. 일전에 자오타오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라이온 킹>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장 2시간40분이나 되는 이 ‘철학영화’를 절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 감독 팬도 아닌데 중간에 극장을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겠지 하고. 그러나 영화가 시작한 뒤, 나는 에드워드 양이 섬세하게 처리하고 있는 일상생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 가정에 관한, 한 중년에 관한, 인간상황에 관한 영화였다. 이야기는 우니엔전이 연기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점차 번져나가, 한 행복한 중국인의 보통 가정 배후에 있는 진짜 모습을 펼쳐보였다. 지금 이 영화의 스토리를 하나하나 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영화 전체에 깔려 있는 행복의 모습이 실상 너무도 힘겹고 부서져 깨질 듯이 아프기 때문이다. 끝부분에 “저는 겨우 일곱살이지만, 전 제가 늙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이 한마디에 가슴이 차고 숨이 멈추었다. 에드워드 양이 이 걸작에서 소박하게 써내려가는 삶의 무게에, 나는 심지어 가쁜숨조차 느꼈다. 내가 <하나 그리고 둘>을 그의 이전 영화와 서로 연관지어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에드워드 양이 자신을 훌쩍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귀한 생명경험은 끝까지 관념에 의해 중단되지 않았고, 느리고 슬프게 껍질을 벗기듯 지천명 나이의 진실한 인간미를 드러내었다. 그렇게 나는 파리의 그 비떨어지는 오후에 2000년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보았다. 영화관 안에 조명이 켜진 뒤에서야 나는 자오타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같이 애니메이션영화를 좋아하는 소녀가 이렇게 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극장을 가득 메운 프랑스 관객이 거의 한 사람도 퇴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스크린을 향해서, 막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향해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용교사를 하는 자오타오는 왜 우리 대륙에서는 이런 영화를 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영화는 진실한 모습을 찾지 않는다고, 행복하면 되지, 행복에 참모습이 없으니. <화양연화>, 중국 고대시를 변주하다 눈깜박할 새 9월이 왔다. <플랫폼>이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 지역 시사회를 하기로 되어 있어, 나와 촬영기사 위리웨이는 부산에 갔다. <화양연화>는 이번 영화제 폐막작이고 위리웨이가 그 영화의 촬영세컨드였지만 아직 완성작을 보지 못해 폐막식에 슬쩍 보리라고. 술집에서 왕가위와 만났다. 선글라스 뒤로 만면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베이징에 가서 함께 술 한잔하자고 했다. 이야기를 해가면서 비로소 굉장히 득의양양해하는 것을 알았다. <화양연화>는 대륙에서 이미 심사를 통과했는데, 그것이 그가 유쾌해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또 자기영화가 언제 상영될지는 미지수여서 다소 씁쓸한 내색도 보였다. 부산은 가는 곳마다 <화양연화>의 분위기로 가득해, 젊은 사람들이 손에 종이뭉치를 들고 있으면, 십중팔구는 <화양연화>의 팸플릿이었다. 나는 폐막식에 참가하지 않고 돌아왔다. 폐막식날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화양연화>를 노천에서 상영하는 동안 몇 천명의 관중이 추운 바람 속에서도 유행을 즐겼다고 나중에 들었다. 유행의 힘은 무한한 것인지, 정오쯤 베이징에 도착해, 오후에 <화양연화>의 VCD를 샀다. 서사가 잠시 멈추고, 고속촬영과 음악이 이중 작용을 하는 가운데 장만옥과 양가위가 춤추듯이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갑자기 고대장편소설 속에서 상하편을 잇는 시를 생각했다. 알고보니 왕가위는 고대유행을 잘 꿰고 있어서 풀었다 당겼다 하며 우리 국학의 바탕무늬를 영화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치파오와 불륜의 이야기가 중년관객을 끌었는지는 모르지만, 왕가위는 그 숨결을 찍어내었고, 이 숨결이 중년관객으로 하여금 유행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와호장룡>,여전히 매혹적인 동양 다시 10월 말 파리에 돌아갔다. 파리의 전철역은 온통 <와호장룡>의 포스터로 바뀌어 있었다. 시청광장에는 대형TV화면이 서 있는데, TV 속 주윤발과 장쯔이가 대나무숲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에 행인들이 발길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역학지식으로, 중국인들이 어떻게 중력을 벗어나는 법을 단련하고 있는가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프랑스의 영리한 영화마케팅은 영화이름을 “용과 호랑이”로 간략하게 바꾸어놓았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홍콩대만의 무협영화를 보기 시작해 무협영화의 경지는 호금전의 <공산령우>와 <협녀> 속에서 일찍이 식견을 닦았는데도 신비한 동양의 색채는 여전히 우리 관중을 매혹시켰다. 그때는 아직 미국에서는 상영이 되지 않았는지 뉴욕의 친구가 전화를 해 해적판을 한장 사서 보내달라고 했다. 그 며칠 뒤 런던에서 리안을 만났다. 전세계적인 성공이 그를 굉장히 피곤하게 한 기색이 역력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가득 걸려 있는 한 술집에서 모두들 잡담을 하는데, 에어컨바람이 그를 불어 쓰러뜨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와호장룡>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한마디했다. “관중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본 적이 없는 그 무엇을 생각하라.” 나는 이 말이 리안의 사업비결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쑤셔넣었다. 에드워드 양, 왕가위, 리안의 영화는 바로 세 가지 제작방향을 대표하고 있다. 양은 생명경험을 그려내고, 왕가위는 유행모드를 만들어내고, 리안은 대중소비를 생산해내고 있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제작방향이 화어영화가 각각 다른 생산시스템 속에서 거대한 창작능력을 잠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영화생태와 구조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오늘 이 세 영화가 얻은 성공을 더이상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만 <하나 그리고 둘>이 30만명을 넘었고, <화양연화>와 <와호장룡>이 각각 60만명과 180만명의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를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관심을 화어영화에 쏠리게 했다.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중국권영화의 명예가 그들로 하여 회복된 것이다. 나 자신도 그들 세 사람의 시장개척의 덕을 보았다. <플랫폼>이 괜찮게 팔린 것도 곧 관객경향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중국영화 부상, 그러나 대륙은 잠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사람이 각각 대만과 홍콩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화로서의 영화는 광활한 대륙에서는 이미 침몰한 것 같다. 화어영화를 구제한 영웅은 모두 축축한 작은 섬에서 왔다. 9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산영화는 창작의 활력과 국제시장의 신임을 잃어버렸다. 국제적인 대감독들은 몇년 전에 벌써 국제시장에서 판로가 거의 사라졌고, 매체에 의존해서 겨우 지지고 볶아 겉치장만 하고 있다. 자기에게 관중이 있다고 생각하는 감독도 베이징 말투로 아큐(阿Q)를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거대한 영상공백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나는 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에드워드 양, 왕가위, 리안 이 세 감독이 화어영화의 새로운 세기를 열어놓은 것을 보고서도, 그 속에 대륙감독이 빠진 것에 대해 같은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이런 ‘여유’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가 반드시 곧바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고있다. 지아장커(賈樟柯) / 영화감독·<소무> <플랫폼> 번역 장병원 / 베이징 통신원

영화에, 혀가 말리다

1972년생 인하대 독문과 졸업 방송작가·<무뇌아> <샤이닝> <광우> 각색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 혀가 말린다. 공개 전, 사건의 전말이 비밀에 부쳐진 채 <번지점프를 하다.>(영화에 마침표까지 있다)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잡지사에 한장의 시놉을 공개했다. 남녀의 관계도 남남의 관계도 밝히지 않은 시놉에는, 우산 속으로 뛰어든 운명적인 사랑에 ‘혀가 말리다’, 이런 식으로 두루뭉실한 표현에 난데없는 말의 수수께끼가 끼어들었다. 우성, 열성 실험도 아닌데, 도대체 혀는 왜 말리는 것일까? “그런 말 안 써요?” 고은님씨는 오히려 의아해한다. “애절하다, 예요.” 그에게 세상은 ‘호기심 천국’ 같다. “선생님! 숟가락은 ㄷ인데, 왜 젓가락은 ㅅ인가요?”라고 중학교 때 궁금해서 수업시간에 물었던 일이나, ‘당근이지’라는 말의 유례가 어떻게 된 건가 궁리하던 일은 <번지점프를 하다.>에 일화로 녹아들어갔다. 그런 ‘사소한’ 관찰력과 말 사랑이 <번지점프를 하다.>를 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입바른 말이 손 붙잡은 남자 둘이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거대한 벽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고은님씨가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99년 봄. 시나리오 작가 공모하는 데 자기소개서를 팩스로 밀어넣고 나니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각색에 열심으로 참여했고, 신망을 얻었고,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을 온전히 풀어낼 기회를 얻었다. 한달만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5일 동안 집중하여 쓰니 시나리오가 되어 나왔다. 그것이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 5고가 나온 상태에서 감독이 정해졌다. 시나리오는 한 신(태희가 인우를 비오는 날 발견하는 장면)만이 첨가되어, 한 신의 누락없이, 대사는 편집상의 필요에 의해서만 잘려 공개되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좋다’는 평가가 나왔다. 영화사마다 찾아다니는 발품도 팔지 않았고, 이건 필요없는 것 같다, 이건 좀 막 나가는 것 같다고 시나리오 부분부분이 턱턱 잘려나가는 걸 보는 마음고생도 하지 않았다. 다음 작품도 이미 정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작한 눈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시나리오는 ‘액션 판타지 어드벤처’. 이런 경우가 어딨어? 태희가 현빈으로 환생하는 듯한, 하늘에서 떨어진 밀씨 하나가 바늘에 꽂히는 듯한 확률로나 가능한 일. 그런 행운이 따른다면 재능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 같다. “급하게 쓴 것은 표시가 나고” 닭살스런 대사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겹치지만, 지금이 행복하다. 인우가 되었다가, 태희가 되었다가, 우는 장면을 쓸 때 울고, 웃는 장면은 웃으며 혼자 원맨쇼 하던 때는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던가. 원맨쇼의 결과, 스토리 전체의 책임이 그에게 돌아오는 지금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인다. “컬트영화인가봐요.” <번지점프를 하다.>를 10번 넘게 본 사람이 있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는 의아한 시선도 한쪽에 있다. “이걸 판타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냥 멜로하고 해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도 상상, 환상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 황당해 보이는 스토리로 공감을 얻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각색하고 쓴 시나리오의 공통점이었다.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야 바람이 있는 것을 알고, 사람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안다.” 고은님씨가 <번지점프를 하다.>를 쓸 때 마음에 들어왔던, 언젠가 읽은 소설의 한 구절과 상통하는 말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건, 그런 온전한 자기반영이 묻어나지 않는 상업영화에서 발휘된 그녀의 순발력을 믿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절벽을 알아버렸다고 해도, 뭐, 그것은 순환하는 궤의 앞바퀴를 물어버릴 것을. 우리는 절벽 끝에 비상이 있다고 그녀의 설득에 홀딱 넘어가버리지 않았는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한국영화 산업화, 당연하다”

영상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최근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95년 문을 연 이래 줄곧 원장 자리를 맡아왔던 최민 교수가 물러나고 3월부터 심광현 교수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 90년대 초반 민중미술계의 날카로운 평론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문화이론가를 거쳐 요즘 들어선 영화계와 문화시민운동 분야까지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오고 있다. 현재 영화인회의 정책위원장,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정책위원,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불과 보름 전쯤 원장으로 내정돼 이전보다도 훨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개교 당시부터 이곳의 핵심업무를 맡아온 그답게 “영상원의 2단계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급작스럽게 취임하게 됐다. 지난 3년간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등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실무적인 진행의 책임을 맡아왔는데, 학교 일이 커지다 보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 한다. 나도 힘들다. 어쨌건 학교에서 결재, 관리 업무 등을 책임져야 하므로 밖에서 움직이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최민 전 원장이 물러난 것은 혹시 전주영화제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 원장은 출범 이후 원장 직위를 세번이나 연임했다. 학교에서도 네번 연임에는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수들끼리 모여 합의를 했다. 박종원 교수는 휴직 중이고 김소영 교수는 안식년이고….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전주영화제 파문의 두 주체가 모두 영상원에 재직중이라 분위기가 어수선했겠다. 외부에서는 그렇게 볼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물론 발단의 문제는 있었지만 당사자끼리는 해소된 것으로 안다. 사실 정성일씨가 주로 문제제기를 했고 김소영 교수 입장에서 그쪽 실무팀의 일원으로 ‘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최민 원장도 위원장이라는 입장이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갈등이 확산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내부에서는 두분의 사정을 대충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당황하긴 했지만…. 참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어떻게 하다보니 두루두루 얽히게 됐다. (웃음) 사실 그 업무들은 내용상 겹치는 부분도 많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그동안은 초기 작업이었으니까 내가 관여해야 했지만 이제는 과도기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졌다. 이제 좀 역할분담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의 바깥 일들도 모두 영상원과 관계가 있다. 스크린쿼터 문제는 그야말로 영상원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영화인회의도 우리가 영화인을 배출하는 입장이니 당연히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심 원장 개인적으로는 영화와 별 관계없는 경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나. 서울사대 독어과를 다니던 시절엔 화실을 차려놓고 그림을 그리곤 하며 생활했다. 대학 4학년 때인 78년 가을 한 선배가 이장호 감독의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에 연출부로 들어간다며 나에게 함께 작업할 것을 제의했다. 다음해 5월까지 연출부 막내로 일했는데 제작사의 트러블 때문인지 그 영화는 결국 개봉되지 못했다. 영화에 꿈을 품고 군에 복무하던 중 제대 직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맏아들로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대우의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하며 해외 공사 수주하는 입찰 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미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막상 학교를 다니다 보니 직장생활이 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운좋게도 서울미술관 학예실장 자리를 맡게 됐다. 그러다 90년 박광수 감독이 <베를린 리포트>를 만든다고 해서 미술감독으로 합류했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영화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영상원 개교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와 관계를 맺게 됐다. 원장으로서 당면한 영상원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나름의 판단으로는 이제 영상원의 1단계 작업이 끝났다.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영화산업 현장과의 실질적인 결합이다. 수업에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함과 동시에 디지털 같은 현장의 새로운 요구를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다. 영화이론과 내부에 기획, 프로듀서, 순수이론 등 세부 전공을 나누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획에 대한 학생들의 희망이 굉장히 크다. 배운 이론을 현장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수진도 충원해야 한다. 금년에는 받아놓은 티오가 바닥이 나 만화과와 디자인과에서 두 명을 충원하는데 그쳤다. 정말이지 교수가 많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교수는 19명 뿐이다. 많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단과대학이다. 최소한 40명은 필요하다. 일반대학 영화학과에는 영상원이 지나친 특혜를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기 석박사 학위의 인정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고. 그 문제는 전망이 좋은 편이다. 과거 교육부가 문화부와 같은 레벨에서 티격태격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교육부가 부총리급으로 격상되고 총체적인 인적관리 업무를 맡다보니 오히려 더 전향적인 결론이 날 것 같다. 교육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교육발전과제를 보면,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전문석박사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대학의 자율권을 더 보장하는 쪽으로 제도가 많이 바뀌어서 좀 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사실 1999년 당시에는 대학개혁의 방향이라든지 하는 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왜 저기만 잘 되냐’는 식의 반발심이 컸던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21세기 형의 새로운 예술가나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느냐 하는 것이다. 또 타 대학도 BK21 등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도 이전과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라 본다. 영화산업과의 산학협동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 올해 서울시와 한강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졸업생, 재학생, 교수들이 힘을 모아 기획에서부터 최종 완성본까지 끌고갈 계획이다. 앞으로도 그런 형태로 외부와 연계할 생각이다. 특히 프리 프로덕션 컨설팅은 몇군데와 논의 중이다. 현장에서 고정적인 기획 인력을 상주시키면 비용도 나갈 뿐더러 전문성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단순 기획이 아니라, 조사, 기획에서부터 시나리오에 대한 컨설팅을 거쳐 촬영 콘티까지 일관되게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방송영상과가 신설되는데. 초기부터 만들려고 했는데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뉴스나 오락 프로그램, 드라마 같은 것을 제작하는 인재를 기르려는 생각은 없다. 교육목표는 다큐멘터리와 교양물에 한정돼 있다. 따라서 필요로 하는 장비의 수준도 그렇게 높지 않다. 특히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불러일으킬 변화까지 커리큘럼 속에 담으려 한다. 올해 세번째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동안의 성과가 있었다면. 1999년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이인균의 <집행>이 나가는 등 외국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크랭크인했고 현장에서 시나리오도 많이 쓰고 있다. 또 이론과 출신들은 전주영화제 등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졸업생 중 한 명도 노는 사람이 없다. 아직 질에 대해 평가할 단계는 아니지만 일단 충무로 진입은 성공적으로 시작했다고 본다. 영상원은 다른 대학 영화학과와 차별성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영상원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재상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국립학교이므로 일종의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 영상분야의 기간인 영화산업이 유지되도록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자유로운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2차적인 임무다. 영화산업이 붕괴되면 자유로운 예술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미디어센터도 생기고 영화제들도 틀을 잡아갈 텐데 엄청난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이런 데 쓸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낼 것이다. 실무능력 위주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인가. 단순한 실무능력이 아니다. 거시적인 정책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서 미시적 단위를 코디네이션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이론과 실기, 정책과 산업을 코디하는 능력을 가진 인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유럽이나 할리우드 영화계도 그런 인력이 없었으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수진의 대외활동이 너무 많다는 학생들의 불만이 있다. 출범 당시부터 우리는 다른 학교와 달리 교수진이 현장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야 현장의 변화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수업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려면 교수가 2년에 한번씩은 작업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교수의 절대적인 숫자가 모자라다는 것이다. 때문에 학생에게 부탁하고 당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수들이 학교에 붙어 있는 것보다는 현장에 나가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예산의 한계도 있다. NYU처럼 교수가 없어도 보조스탭들로 하여금 기자재 대여, 시설 이용 등을 원활하게 하려면 운영예산이 나와야 하는데 거의 확보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영화계를 보면 산업화 논리가 지배하는 모습이다. 심 원장의 논지에서도 산업화 논리가 어느 정도 묻어나는데. 어느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산업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 영화계의 문제는 상업화는 됐지만 산업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구분돼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영화계는 산업이 아니다. 표준계약서 하나 없이도 일이 이뤄지는데…. 올해 영화인회의에서 세운 4대 과제인 미디어센터 설치법, 표현의 자유 확대, 지역영상위원회의 전국적 확대, 영화제 지원 정책 제고 등은 이같은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산업화란 결국 공적 인프라의 문제라는 주장 같다. 영화의 산업적 인프라, 문화적 인프라는 공공성을 통해 확보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법 체계가 달라 외양적으로는 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공공자원과 지원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영화는 산업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세계 영화사를 훑어봐도 산업적 기반 없이는 자국 영화가 생존할 방도가 없다. 산업을 부정하는 것은 영화를 개인적인 창작작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 파인아트적인 성격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산업적인 성격과 병행될 때만 존립이 가능하다. 미국이 이 두 가지의 성격을 잘 병립시켜 영상문화 선진국이 된 것 아닌가. 문석 기자 ssoony@hani.co.kr

죽음의 춤은 계속된다

지난주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허크 하비의 <영혼의 카니발>(Carnival of Souls)이죠. 혹시 심야영화 시간에 보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자동차 사고로 익사할 뻔한 오르가니스트가 유타에 있는 작은 성당에 취직하는데, 사고 이후로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이상한 남자가 그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쫓는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이게 어떻게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연결되냐고요? 조지 로메로가 사람 고기를 먹는 좀비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영화는 <화이트 좀비>나 <좀비의 역병>과 같은 기존 좀비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영혼의 카니발>이었죠. 전 종종 어느 꿀꿀한 날 드라이브 인 시어터에서 이 아마추어의 서툰 냄새가 폴폴 나는 싸구려 공포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조지 로메로가 느꼈던 감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합니다. 일단 로메로의 좀비가 이 영화의 유령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건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고, 그걸 잊더라도 이 극저예산영화에서 그가 앞으로 만들 영화의 미래를 보았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으니까요. 극저예산 동네 공포영화였다는 점에서 <영혼의 카니발>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직계 조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캔자스의 소도시에서 교육자료용 영화를 찍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 잠시 짬을 내어 만든 아마추어영화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발판 삼아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감독 허크 하비의 야심은 배급업자가 돈 들고 튀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의 용감한 시도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블레어 윗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등불이 돼주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이 작은 영화는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공헌은 만들어진 뒤 수십년 동안 숨어서 몰래몰래 영화사에 끼친 영향에 있지 않나 싶군요. 조지 로메로를 잊는다고 해도 수많은 현대 호러영화들에 <영혼의 카니발>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데스티네이션>은 어때요? 비행기 사고 이후 죽음의 그림자가 뒤를 쫓는다는 이야기가 과연 <영혼의 카니발>과 무관할까요? <식스 센스>는 어때요? 이 영화의 유령들은 <영혼의 카니발>에서 죽음의 춤을 추던 사람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제이콥이 겪는 악몽 같은 경험은 <영혼의 카니발>에서 메리 헨리가 겪는 경험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수십년 전에 동네 방송사 심야공포영화 시간에 우연히 보았던 이 영화를 기억 못할지 몰라도, <영혼의 카니발>의 영향은 진짜 유령처럼 장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지난해에, 크라이테리언에서 이 영화를 새 DVD로 재출시했습니다. 덕택에 전 제가 가지고 있던 낡아빠진 3배속 테이프를 제 페이지 퀴즈 상품으로 넘겨버리고(그래도 꽤 정들었을 테이프를 이렇게 훌렁훌렁 넘겨버리는 걸 보면 누구처럼 테이프 자체에 대한 페티시즘은 없는 모양입니다) 새 DVD의 근사한 화면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답니다. 제발 이 DVD가 이 숨은 고전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도움을 주길 바랄 뿐입니다. djuna01@hanmail.net

꼬리에 꼬리를 무는 취향, <타인의 취향>

피부색이나 국경과 다르게 아무도 열심히 입에 올리지 않지만 인간사회를 강력하게 분리시키고 있는 경계. 취향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실상 몹시 중대한 인생살이의 이슈 중 하나다. 매너에 관한 코미디 <타인의 취향>은 끝말잇기처럼 엮인 관계의 사슬을 타고 흘러간다. 모든 일의 시작은 돈은 많지만 지성이 부족한 기업체 사장 카스텔라가 영어교사인 여배우 클라라에게 반하면서부터. 클라라는 바텐더 마니와 친구 사이고, 바텐더는 경호원과 사귀고, 경호원은 운전기사와 함께 일하고, 기사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위해 핸들을 잡고, 그 디자이너는 다름 아닌 미세스 카스텔라다. 클라라와 그녀의 보헤미안 예술가 친구들 틈에 끼어들고픈 카스텔라의 순진한 바람은 그로 하여금 느닷없이 콧수염을 밀고 서툰 영어로 연시를 쓰게 만들지만 클라라는 무덤덤하다. 그런가하면 고지식한 경호원 모레노는 그의 마음을 빼앗은 바텐더 마니가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사실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생생한 인간관계의 연쇄를 통해 입맛과 눈높이, 센스와 센서빌리티의 충돌을 묘파한 이 세련된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감독은 코미디 연기로 프랑스에서 사랑받아온 배우 겸 작가 아녜스 자우이. 그녀는 입봉작인 이 영화에서 남편이자 공동 각본가로 활동해 온 장-피에르 바크리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까지 3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