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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

작업을 하다보면 신인연기자들도 만나고 후배연기자들도 만나게 된다. 아직 연기력이 본격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니까 우선 그 연기자의 이미지를 보고 느낌을 본다. 이미지와 느낌이 좋으면, 거의 확정하는 편인데 모든 캐스팅 작업이 이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미지와 느낌이 다 맞는데 개런티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당신의 이미지와 느낌이 이 배역에 맞는 것 같으니 같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캐스팅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당신의 이미지와 느낌이 이 배역에 맞는 것 같은데 개런티가 안 맞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안 될까요?” 하거나 “그렇게 개런티가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이번 한번만 봐주실래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쿨하게 연기자를 만난 뒤 집에 들어가 무릎꿇고 기도나 드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이미지와 느낌, 게다가 개런티까지 맞아서 축복받은 기분으로 첫 리딩을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사를 읽으면서 갑자기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첫 리딩 때 열연까지 하는 연기자들도 보았다. 연기는 대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의 동기를 연기하는 것이다. 리딩 때나 현장에서나 나는 신인연기자들이나 후배연기자들한테 줄곧 다그치는 말이 있다.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 왜 말을 안 하지? 리딩 때 낭패스러울 경우는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감정을 미리 잡는 감정파와 그냥 책을 읽는 낭독파가 있다. 둘다 말을 안 하긴 마찬가지다. 저런 대사를 관객이 듣는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발음이나 음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은 연기자들에게 부차적인지도 모른다. 우선 말은 전적으로 말같이 들려야 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귀를 열어야 한다. 남의 말을 들어야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연기란 게 들은 만큼 주면 되는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하려니까 잔뜩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연기의 70%는 리액션이란 말이 있는 것도 잘 듣고 대답하라는 중요한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대사가 말 같아지면 연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된다. 이런 것은 비단 연기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대국민을 상대로 말씀이라고 하는 걸 보면 밥먹고 있다가도 당장 텔레비전 속으로 뛰어들어가 대통령의 멱살을 부여잡고 “제발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라고 다그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왜 말을 안 할까? 외국의 경우, ‘부적절한’ 예를 드는 것 같지만 빌 클린턴이 텔레비전에 나와 스피치할 때 그냥 편하게, 쿨하게 말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의 말하는 모습을 기억해보면 한결같이 잔뜩 불필요한 힘과 권위만 들어 있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말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하는데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하나도 친애하지 않는다. 국민의 말을 안 들어서일까 독재자들의 말은 하나같이 무겁고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바라건대 다음 대통령은 말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다. 말을 말처럼 안 하고 허영심이나 권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기분을 잡친다. 나 또한 말투가 워낙 느리고 느끼해서 혹시 상대가 내 말투와 어감을 듣고 권위적으로 생각할까봐 말에 힘 안 주고 가볍고 빠르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촐싹거리냐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게 말인데….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반칙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이재용 - 영화감독 좋은 영화는 나를 깨어나게 한다 1995년 여름에 나는 영화 편집일로 뉴욕에 몇개월간 있었다. 어느날 한 시네마테크에서 무성영화시대의 거장 에른스트 루비치의 회고전이 있었는데, 사실 그전까진 그의 이름을 영화사 책에서나 본 듯한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그중 1919년 작품 <굴 공주>(Oyster Princess)를 보았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무성영화 코미디이고 폴라 네그리라는 여배우가 나왔으며 무척 재미있었고 기술로나 표현기법이 지금 보아도 별로 낡지 않게 매우 뛰어났다. 그 영화를 보고나서 무엇보다 ‘우리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를 때 그들은 벌써 영화의 완성을 이루고 있었구나. 우리는 1927년에야 비로소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만들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한해에 꼽을 만한 수작이 한두편 나올까 말까 했고 과연 한국영화에도 르네상스가 올까 하고 나 스스로 의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출발선이 너무나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한국에서는 저런 영화는 필름으로는 물론 비디오로도 못 보는 거겠지. 좋겠다…’ 하는 거였다. 영화공부는 극장에서 영화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시네마테크에서 필름으로 보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사실 영화사 공부를 한다 해도 영화는 보지도 못한 채 제목이나 감독이름을 외우거나 영화를 본다 해도 고작 비디오로, 그것도 네오리얼리즘영화 이전 것은 볼 기회도 거의 없이 그렇게 열악하게 공부하던 한국 상황이 서글펐다. 한국에서도 비록 비디오지만 시네마테크라는 이름을 걸고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 몇 군데 있었으나 초창기에 좀 찾아다니다가 안 가게 되었다. 화질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번역이 안 된 채 봐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봤는데도 기억이 잘 안 나는 영화를 생각해보면 한글 자막이 없었던 것이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올 여름 나는 무척 행복하게 보냈는데, 보기 드문 영화들을 서울에서 필름으로, 그것도 한글 자막을 넣어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등에서 주관하는 영화주간들이 그것인데 비디오영사로 자막을 입히는 기술이 나오면서 비로소 시네마테크운동이 본격화하지 않았나 싶게 그것은 훌륭한 방법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난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즈 야스지로며 로베르 브레송, 알랭 레네 등등 거장이라는 그들의 영화를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기 전까지 필름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실은 비디오로도 본 적이 없다. 에릭 로메르도 거의 마찬가지고 지난주에 한 ‘영화사강의’ 영화들도 그렇다. 한때 내 영화를 만들면서 보니까 재미로 보는 것 외에 굳이 남의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 생각 한 적 있었다. 왜냐면 결국은 자기 식대로 영화를 만들지 그다지 다른 영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다시 드는 생각은 좋은 영화는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잠든 뇌를 한 번 흔들어 깨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을 사람을 만나는 것에 비유하곤 하는데 영화와도 인연이 닿아야만 제대로 만날 수 있다. 시네마테크 영화주간들에서 보여주는 영화들은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영화들이다. 그것들을 굳이 만나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건 자유지만 분명히 누군가에겐 아주 소중한 경험들이 될 것이다. 많은 것들의 가치에 의심을 품는 나로서도 당연히 옳다고 지지하는 것 중 하나가 시네마테크운동이다. 놓치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보길 바란다. 유운성 - 영화평론가 비디오에 만족했다면 많은 걸 놓쳤을 것 내겐 그다지 흔치 않은 영화적 경험을 맛보게 해준 영화 가운데 하나가 (얼마 전 TV에서도 방영된 바 있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세 가지의 관람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지난해 말 브레송 회고전을 통해 이 영화를 처음 보았고 얼마 뒤 프랑스문화원에서 다시 보았다. 그리고 위성방송을 통해 본 것이 세 번째이다. 사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았을 때도 이 영화의 비극성에 공감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경험은 과장없이 말해 가장 소름끼치는 공포영화를 보았을 때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그런데 난 아직 공포영화 중에서는 그만한 정서를 유발시키는 예를 보지 못했다). 영화제나 회고전을 찾아다니는 건 두 가지 단순한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미 (비디오로)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영화적 경험을 전해주리라 믿어지는 영화들을 찾아나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제나 회고전이 아니고서는 개봉관에서 거의 접할 가망성이 없는 영화들 가운데 이른바 ‘발견’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물론 기대가 충족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긴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다. 가령 포르투갈영화제에서 본 올리베이라의 <아브라함 계곡>이 전자의 기대를 만족시킨 영화였다면 같은 감독의 <불안>이라는 영화는 후자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외침과 속삭임>이나 <악의 손길>을 비디오로 보는 데에 만족했다면 난 아마 많은 것을 놓쳤을 것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마지막 볼셰비키>나 <레벨 5>는 (개인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몇편의 영화들이 있다. 두상 마카베예프와 파졸리니의 영화들, 혹은 존 포드의 영화들. 내가 그 영화들을 예전에 비디오로 보았을 때 놓쳤거나 알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삼 궁금해진다(이 속보이는 말로 영화제를 기획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습니다만…). ▶ 싹은 틔웠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 함께 둥지 틀까요? ▶ 영화 유학, 이제 갈 필요 없다! ▶ 3500명의 `공범`이 만든 시네필의 천국 ▶ 영화에 물주기, 숨통터주기 ▶ 영화인 4인이 말하는 시네마테크의 매력 (1) ▶ 영화인 4인이 말하는 시네마테크의 매력 (2)

“정치적 올바름에 다함께 박수”

김기덕 감독은 이제 유럽에서 적지 않은 지명도를 얻은 것 같았다. 제5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일인 지난 8월29일(현지시각) 오전 <수취인불명>의 기자 시사회가 열린 뒤 이탈리아 위성채널인 <텔레플리>(tele+), 영국의 텔레비전 뉴스 등 이탈리아, 영국, 독일, 포르투갈의 신문·방송사 20여곳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인터뷰를 해온 기자들은 모두 <섬>을 기억하고서 이 영화에 대한 질문을 빠뜨리지 않았고, <수취인불명>과 관련해 영화의 표현방식뿐 아니라 주한미군문제와 한-미관계 등을 묻느라 인터뷰 시간이 대부분 1시간을 넘겼다. 이런 관심은 김 감독이 지난해 <섬>에 이어 올해 <수취인불명>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2회 연속 진출한 데 힘입은 바가 크겠지만, 그의 영화가 지닌 강렬한 개성이 먹혀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수취인불명>을 본 현지 언론인이나 일반관객에게 반응을 물었을 때 나온 말들은 이랬다. “강렬한 이미지가 상징하는 것들이 일관성이 있다…. 폭력적인 장면들이 의미가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캐릭터 구현이 잘돼 있다, 원작소설이 있는가….” 30일 오후의 공식상영 때는 주상영관인 살라그랑데의 좌석 1300석의 3분의 2가량이 찼고,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표정도 대체로 밝았다. 상영도중 극장을 나서는 이는 찾기 힘들었다. 지난해 <섬>을 이곳에서 상영했을 때, 상영도중 극장을 박차고 나가는 이와 마지막까지 남아 박수를 크게 보낸 이들로 반응이 갈렸던 것과 대조를 보였다. 감응의 정도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지만, <수취인불명>이 <섬>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갔다는 건 분명해보인다. 30일 밤 이 영화의 제작사 LJ필름이 마련한 리셉션장에 온 이번 영화제 작품선정위원인 알베르토 크레스피는 <수취인불명>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47년작 <파이자>에 견주며 찬사를 보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때를 다룬 <파이자>는 미군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양가적 감정을 대변했는데, 54년이 지나 이탈리아인들은 <수취인불명>을 보면서 그 영화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순간 이건 훌륭한 경쟁작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나라의 합작영화가 유달리 많고 그 영화들이 세계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이번 영화제의 한 특징이고 보면, 주한미군 기지촌 주민의 이야기인 <수취인불명>은 그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이건 심사에서 장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보인다.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르베라도 리셉션장에 와서 <수취인불명>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간략하게 밝혔다. “<섬>과는 영화언어 등 여러 면에서 다른 영화로 보인다. 사회적 주제를 다루고 있고, 그런 면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영화다. 김기덕 감독은 다양한 접근방법을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한다. 그래서 장래가 기대되는 감독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에두아르도 안틴은 같은 자리에서 내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영화제 행사에 김기덕 감독의 회고전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기덕 감독은 이날 “공식시사회장에서의 박수소리가 <섬> 때와는 다르게 들렸다”면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렸던 <섬>과 달리 이번에는 대다수 관객이 한국의 역사적 상처에 공감하며 박수를 보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공식행사가 이어지던 이날 내내 ‘월드컵 2002’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는데 이와 관련해 “월드컵을 홍보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글자가 제일 큰 티셔츠를 샀다”고 말했다. 베니스=임범 기자/ 한겨레 문화부 isman@hani.co.kr

국산 <큐빅스> 미국서 대박

“대단한 일 아닙니까. 올해의 한국 콘텐츠상이라도 만들어줘야 할 거 같아요. 미국에 제대로 진출한 한국 문화상품 1호라고 봐야죠. 영화야 찔끔찔끔 갔지 메이저로 푼 적이 있나요. 완성도요? 훌륭하잖아요. 현지 시장의 정서도 잘 담았고.” 최근 열린 3D(3차원) 애니메이션 <큐빅스> 시사회 직후, 이를 관람했던 영화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등을 만든 그가 허튼 소리를 할 리는 없다. 말하자면, <큐빅스>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나타난 국산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8월 중순 미국 공중파 <키즈워너브러더스>를 통해 방송을 시작했는데, 이 채널의 프로그램 가운데 일본의 세계적 히트 상품 <포켓몬> 다음으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1위를 차지했다. <큐빅스>, 국산품 맞나? 20분짜리 텔레비전 시리즈인 <큐빅스>를 보다보면 완성도가 워낙 좋아 이게 정말 국산품 맞나 싶다. 매년 한두편의 장편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지만 완성도와 독창성에서 늘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고, 이는 국내의 애니메이션 제작 능력에 짙은 회의감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큐빅스>는 순도 90%가 넘는 국산품이다. 작품의 출발이 된 로봇 `큐빅스'에 대한 착안부터 모든 캐릭터의 개발, 디자인, 3D 작업,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모든 공정이 `영상벤처기업'인 ㈜시네픽스에서 이뤄졌다. 연출과 시나리오 분야에서 일본 인력을 고용했다는 약점이 있지만, 일부 공정에 대한 하청이란 점에서 그리 문제삼을 건 아니다. 곧 `실전'에 투입될 자체 연출팀이 꾸려진 상태다. 작품의 배경은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도시 버블타운이다. 이곳에서 큐빅스가 미지의 에너지원 솔렉스를 두고 악당 닥터K와 대결을 벌여나가는 이야기다. 선악 대결의 단순한 구도이고 80가지가 넘는 로봇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화면에는 따뜻하고 유쾌한 감성이 듬뿍 묻어난다. 살벌한 기색이 은근히 감도는 <포켓몬>과는 많이 다르다. 또 하늘, 유리, 민우 등 인간 캐릭터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특징을 고루 지닌 무국적성을 띠는데 이것 또한 강점으로 작용한다. 단순 재조립으로 무한 변신이 가능하도록 만든 로봇 큐빅스의 아이디어는 특히 빛을 발한다. 26편까지 이어질 두 개의 시리즈는 미국 방영을 먼저 끝내고 내년 봄께 한국과 일본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지금, 해외 배급사들은 52편까지 만들자며 계약을 서두르고 있다. 경제적 효과 “글쎄요, 너무 엄청나서 뭐라 말하기가 어려운데….”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엔지니어를 시작으로 이력을 쌓아온 황경준 시네픽스 회장의 말은 과장같지 않다. 편당 2억6천만원짜리 <큐빅스>는 이미 판매를 시작한 캐릭터 상품, 개발에 들어간 게임, 그리고 극장용 영화화로 부가가치를 계속 높여갈 텐데, 이는 로열티라는 외화수입 형태로 현금화된다. 미국 및 세계 배급은 미국의 포키즈 엔터테인먼트가, 일본 배급은 JR기획이 맡았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총수익금의 14~20%가 시네픽스에게 돌아온다. 연간 5백~천만달러가 고정적으로 들어올 예정이다. <포켓몬>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포키즈가 <큐빅스>의 마케팅비로 천만달러를 쏟아붓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박 가능성'을 증명한다. 현재 포키즈는 차기작 <아쿠아 키즈>를 빨리 계약하자고 재촉하고 있지만, 시네픽스는 충분한 값을 받기 위해 `여유'를 부리고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게 자본이득이다. 경영진은 시네픽스를 미국 나스닥에 상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유명한 `픽사'의 주식 평가액은 2조6천억원에 이른다. “<큐빅스>에 이은 후속물들이 계속 성공해준다면, 픽사 가치의 5분의 1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자본금 20억6천만원짜리 회사의 희망사항이지만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콘텐츠 제작의 모범사례 `장난감 큐빅을 응용해보자. 각 몸체가 자석 자장을 갖고 있어 공중에서 완전 해체된 뒤 재조립될 수 있는 변신 로봇!' 지난 97년에 시작된 <큐빅스> 아이디어였다. 이후 디자이너가 1년여간 수천장의 그림을 그려 지금의 로봇 큐빅스가 완성됐다. “처음부터 세계시장, 곧 미국을 겨냥했죠. 일단 영화쪽에서 일을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유태계가 꽉 잡고 있는 `영화계의 휴먼 네트워크'를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텔레비전쪽으로 돌렸죠.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더군요. 처음에는 애니메이터만 확보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제작 단계마다 속썩이는 거예요. 스토리보드를 만들려고 하니 그 인력이 없고, 그 다음에는 포스트 프로덕션 인력이 없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의의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일련의 시스템을 갖춰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자존심과 지구력'이 주효했다. 홍종우 디자인 슈퍼바이저는 “로봇 캐릭터를 개발하는데 국내에 참고할만한 게 별로 없어 갑갑했다”며 “그래도 일본과 미국의 로봇들과는 차별화하자는 원칙을 늘 염두에 뒀다”고 말한다. 진짜 두려움은 불확실성의 문제였다. “이 프로젝트가 과연 될 수 있느냐를 아무도 얘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게 늘 어려움이었죠. 3~4분짜리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일정이 자꾸 늦어지면서 과연 될 것이냐는 문제는 더욱 커져갔었고….” “남의 것을 따라가면 돈만 깨진다”는 회사의 방침은 4년만에 “좋은 물건을 만들면 돈은 따라온다”는 현실로 바뀌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나보고 <무사>를 비평하라고?

● 정치적 혹은 윤리적 측면은 잠시 잊자. 단순히 시청률만을 놓고 따지자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블록버스터는 단연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민항기 자폭테러다. 평소 텔레비전을 고철덩어리로 보는 내가 밤새도록 똑같은 신들을 보고 또 보며 앉아 있었으니 말 다했다. 한마디로 오마이갓(!)이다. 그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치밀한 콘티 그리고 엄청난 제작비가 도무지 초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네티즌들 사이에 테러의 배후인물이 닥터 이블 아니면 팀 버튼일 것이라는 찬탄 섞인 농담들이 오고갔을까? 아 참, 요새 <무사>가 개봉중이지, 하는 현실감각(?)이 되돌아온 것은 이 전대미문의 블록버스터가 깜짝개봉을 감행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이다. 제작사에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객석점유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단다. 21세기의 국제 테러리스트들이 14세기의 고려 무사들을 압도하고 있는 판국이다. 관람평, 시종일관 노코멘트! 몇주 전 기자 및 평론가 초청시사회가 열린 중앙시네마. 상영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 면식이 있는 기자와 평론가들이 서로 협약이라도 한 듯 내게 다가와 다소 위악적인 눈빛을 장난스럽게 빛내며 그렇게 물었다. 어떻게 봤어요? 나는 피실피실 웃으며 미끈덩거렸다. 두 눈 뜨고 봤죠. 그들은 집요하다. 아이 그러지 말고, 솔직히, 영화 어땠어요? 내가 되돌려줄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노코멘트죠. <무사>의 스탭과 캐스트들은 몇년 동안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특히 김성수와 조민환은 동료 이상은 물론 친구 이상이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날더러 <무사>에 대해서 평하라는 것은 피붙이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 평하라는 것과도 같다. 자랑하면 팔불출이요 욕하면 개새끼다. 내가 뭐라고 해도 가재는 게 편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된다. 내가 <무사>라는 프로젝트의 외견상 아웃사이더인 동시에 심정적 인사이더인 까닭이다. 덕분에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걸려오는 전화에 나는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 얘긴 관두고 술이나 한잔 합시다. 괴로운 부재증명 괴롭고 난감한 질문은 술자리에서도 이어진다. 이번에는 왜 시나리오를 안 쓴 거야? 걔네들이랑 싸웠어? 김성수가 <무사>를 만들 동안 넌 도대체 뭐한 거야? 환장할 노릇이다. 평생토록 함께 작품을 하자며 무슨 혈서를 쓰고 도원결의를 맺은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의무를 방기한 중죄인이라도 되는 듯 다그치니 술도 안 취한다. 나도 핏대가 나서 알리바이를 주워섬긴다. 야, 나도 그동안 열심히 일했어. 시나리오를 세편 쓰고(그중 몇개나 스크린으로 옮겨질지는 미지수지만), 단행본 네권 분량의 원고를 각종 매체에 연재했고, 다섯 군데의 강단에서 시나리오작법을 가르쳤고…. 그래도 소용없다. 결국 술판은 멱살잡이 직전에서 끝난다. 염병할! 네티즌들의 의견은 언제나 그렇듯이 옳고 그르다.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었다고? 결과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감독이 직접 쓰지 않고 전문작가에게 맡겼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거라고?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무사>의 시나리오 크레디트를 김성수가 독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김성수가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고 혼자 독단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무사>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시나리오가 고쳐지는 모든 과정을 줄곧 옆에서 지켜봤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대안을 내놓았고 그것들 중 몇몇은 현재의 <무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인 아청도 <무사>에 관계했다. 그는 부용 공주를 위시한 중국인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집중적으로 손보는 작업에 성실히 동참했다. 그뿐이 아니다. 김성수는 현장의 스탭과 캐스트들이 내놓는 의견들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줄 아는 감독이다. <무사>의 시나리오에는 어떤 뜻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숨결이 녹아 있다. 전문작가가 썼더라면 훨씬 더 나아졌으리라는 의견에 그래서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영화 만들기는 본질적으로 협동작업일 수밖에 없으며, 시나리오 쓰기 역시 영화 만들기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빤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무사>의 시나리오 크레디트는 김성수 혼자 감당하는 것이 옳다. <무사>는 김성수가 충무로에 “입사하기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꿈꿔왔던 필생의 프로젝트였던 까닭이다. “디렉터스 컷은 없다” <비트>를 찍을 때의 일이니 벌써 5년 전이다. 야, 산아, 중국 대륙에 버려진 고려 무사들이 사막을 가로질러 조국으로 돌아온다, 어떠냐? 김성수가 그렇게 운을 떼었을 때 나는 대뜸 샘 페킨파의 <철십자훈장>을 떠올렸다. 그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와일드 번치>와 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멋진데? 하지만 돈 엄청 들겠는걸? 당시만 해도 그저 멋진 꿈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김성수는 불과 5년 만에 그 꿈을 현실화시켰다. 그가 수백명의 스탭과 캐스트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누비며 악전고투를 계속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무사>의 제작과정에는 꿈과 힘을 동시에 갖춘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이 서려 있다. 그 감동은 스크린에도 그대로 묻어나온다. 그렇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긴 필생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무사>의 초고가 나왔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것은 저마다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펄펄 살아 숨쉬는 한편의 장엄한 대서사시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중에야 재삼 확인하게 된 바이지만, 너무 길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무사>의 시나리오에서 패착점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나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시간계산상의 착오다. 본래 3시간 분량으로 쓰였으나 실제 촬영에 들어가자 그것이 넘친다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잘라내야만 했고, 러시 편집을 해보니 아무리 줄여도 4시간 이하로는 못 줄일 작품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을 폭력적(!)으로 줄여 2시간 반짜리로 만든 것이 현재 극장에 걸려 있는 <무사>다. <무사>에 대한 고언(苦言)들은 나름대로 모두 옳다. 플롯이 성기고 캐릭터가 너무 많다. 캐릭터의 내적 필연성이 희박하고 그 변화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무사>가 본래의 시나리오 그대로 극장에 걸렸더라면 듣지 않아도 될 지적들이다. 어쩔 수 없는 편집으로 생긴 가장 가슴 아픈 공백은 리듬과 페이스의 난조(亂調)다. 덕분에 감정곡선은 툭툭 끊어지고 서정에 젖어들기 전에 또다른 전투가 시작된다. <무사> 시나리오의 변천사와 그 제작과정 전체를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들이다. 제작진의 입장에서 ‘디렉터스컷’의 욕망을 품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노래는 무대에서 말하고 영화는 극장에서 말할 뿐이다. 어차피 2시간 반으로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면 처음부터 그에 맞춰 영화를 만들었어야 옳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사실은 이랬는데 결과는 저랬다고 말하는 것은 프로의 자세가 아니다. <무사>의 제작진은 이 점에서 당당했다. 정우성은 말한다. “아쉬울 것 하나 없다. 극장에 걸린 <무사>가 전부다.” 김성수도 말한다. “디렉터스컷은 없다.” 분석하기 전에 즐겨라! 문맥의 흐름상 이제 <무사>의 장점과 그것이 영화산업 내에서 창출해낸 의의 따위를 늘어놓을 차례다. 하지만 관두겠다. 그래봤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테니까. 대신,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무사>를 다시 보면서, 내가 ‘비로소’ 이 영화를 ‘즐겼다’는 사실만은 덧붙이고 싶다. 훌륭한 시설의 극장에서 일반관객들과 함께 봤기 때문일까? 심정적 인사이더로서 품고 있던 흥행과 비평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냉철하게 뜯어보리라던 결심은 영화가 시작되자 가뭇없이 잊혀졌고 나는 어느새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화면 죽이고 사운드 좋고 배우들은 멋졌다. 영화는 분석과 논쟁의 대상이기 이전에 즐김의 대상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다. <무사>는 너무 많은 소문과 비평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너무 높은 기대수준에 버거워하는 영화다. 있는 그대로의 <무사>를 보자. 평론이고 시나리오고 제작후일담이고는 다 그림자에 불과하다. 분명한 실체는 지금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2시간 반짜리 <무사>라는 영화 그 자체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가 있다. 적어도 현재 미국이 획책하고 있다는 ‘더러운 전쟁’보다야 훨씬 더.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더티 하리, 웃긴다 이거죠

● 막 <러시아워2>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뭐, 1편이랑 크게 차이나는 영화는 아니더군요. 차이가 있다면 성룡의 영어 구사력이 그동안 조금 더 늘었고 크리스 터커의 농담은 종종 도가 지나칠 정도로 저질이 되었고 전체적으로 두 콤비는 전편보다 훨씬 호흡이 잘 맞아 보였고 액션과 코미디가 늘었고…. 또 뭐가 있나요? 네, 영어 대사가 단 두개밖에 없지만 여전히 시원스럽게 사람들을 두들겨패대는 장쯔이도 있었습니다. <무사>에서 눈물만 흘리는 연기에 조금 갑갑했던 터라 이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걸 보자 속이 확 풀리더군요. 역시 몸을 움직여야 하는 배우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서는 안 됩니다. 글의 주제가 따로 정해져 있거든요. 전 <러시아워2>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러시아워2>를 통해 최근 할리우드 버디 액션물의 유행에 대해 써야 합니다. 끝내려면 간단한 끝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리쎌웨폰>의 유행 때문이다!’라고 외치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의 수고로 원고료를 챙길 수는 없죠. 형사 버디의 시조는? 기초부터 따져봅시다. 현대 할리우드 형사물의 시조는 무엇일까요? 아마 한쪽 끝은 추리물에 닿아 있겠고 다른 한쪽 끝은 갱스터물에서 서부극에 이르는 수많은 액션 장르에 닿아 있을 겁니다. 이들 중 두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들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별로 없습니다. 서부극에서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작품이 떠오르고 형사물에서는 <스타스키와 허치> <마이애미 바이스>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가 떠오르지만 그뿐입니다. 더티 하리에게 파트너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대부분 형사물에서 파트너는 폭력 형사가 내미는 복수의 핑계입니다. 당연히 영화 초반에 죽죠.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액션 위주의 작품에서 주인공 수가 많으면 맥이 빠집니다. 서부극을 생각해보죠. 서부극의 결말은 악당과 주인공의 일대일의 대결이어야 합니다. 총 역시 악당에게 하나, 주인공에게 하나 주어져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클라이맥스가 산만해집니다. 아무리 착한 쪽에 두명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 총을 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고요. 추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물은 액션보다도 더 폭이 좁습니다. 왓슨을 홈스처럼 똑똑하게 만들어놨다고 치죠. 셜록 홈스가 묵상하는 동안 왓슨 박사가 범인을 잡아 베이커 거리로 끌고 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진상이 하나면 탐정도 하나여야 합니다. 둘이면 중심없이 헛갈리기만 하죠. 독자들은 마지막에 완벽하게 일관된 설명을 요구하는데,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의 의견을 떠들어댄다고 생각해보세요. 둘의 생각이 같으면 어떠냐고요? 그렇다면 애당초부터 두명을 붙여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둘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명탐정의 난제나 서부극의 위기나, 주인공 한명이 풀어야만 서스펜스가 자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으면 서스펜스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세 사람이 있으면 3분의 1로 줄고요. 그 결과 액션물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생기게 됩니다. 맨 위에는 악당들에게 정의의 총알을 날려대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주인공한테서 액션장면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그의 모자란 점을 커버해줄 만한 보조 조연이 있고요. 그 밑에는 초반에 죽어 넘어지는 소모품 파트너들이 있습니다. 출신이 아닌 기능적인 이유로 배치되는 게 다를 뿐, 실제 사회의 계급사회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죠. 성룡과 크리스 터커, 알고보면 한 사람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계급구조가 타파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셋이나 넷보다 더 헛갈립니다. 사람이 많으면 앙상블 드라마가 될 수 있죠. 하지만 둘이라면 이건 전쟁입니다. <타워링>처럼 주인공들의 직업이 전혀 다른 영화에서도 두 주연배우들이 얼마나 요란한 신경전을 벌였는지 생각해보세요. 둘은 균형잡기가 결코 쉬운 숫자가 아닙니다. 이런 걸 무릅쓰고도 ‘둘’을 내세웠다면 뭔가 절실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러시아워> 시리즈에서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룡은 영어 구사력이 아주 뛰어난 배우는 아니죠. 홍콩영화에서와 달리 할리우드영화에서는 그의 떨어지는 영어 구사력을 커버할 무언가를 빈자리에 넣고 채워야 합니다. 이 경우 세븐 일레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말빨이 센 크리스 터커의 존재가 그 역할을 합니다. 성룡의 리 형사와 터커의 카터 형사는 악당을 걷어차는 팔다리와 수다떠는 입이 양쪽으로 몰려 쪼개진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두 개성의 충돌보다는 보완이 더 중요합니다. 그보다 살짝 위선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버디영화는 종종 할리우드에서 이퀄라이저의 역할을 합니다. <리쎌웨폰> 시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 주인공과 흑인 주인공을 나란히 내세워서 인종적 평등성을 슬쩍 과시하는 것이죠. <리쎌웨폰> 시리즈의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멜 깁슨이지만 그래도 요새 스크린 위를 뛰어다니는 흑인 액션 주인공들은 이런 식으로 주류의 자리에 오른 대니 글로버의 덕을 꽤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대니 글로버가 혼자 주연한 영화라면 보지 않았을 수많은 관객이 멜 깁슨과 함께 딸려온 그를 보고 익히기 시작했고 그러다 그 역시 상당한 거물로 굳어졌으니 글로버 역시 손해본 건 없죠. <러시아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성룡은 국제적인 스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기반이 약하죠. 동양 배우를 그냥 내세우는 것보다는 홈그라운드의 장점이 있는 흑인 배우를 하나 붙여주는 게 흥행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액션에 코미디를 허하라 그렇다면 요새 <리쎌웨폰> 식 버디 액션물들이 유행하는 건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군요? 외국 배우들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고(갑자기 <아메리칸 드래곤>이 떠오릅니다! 왜 이 영화를 잊었나 몰라요) 적당히 인종 균형을 맞추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비판을 슬쩍 빠져나가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버디 액션물들이 이런 목적으로 시작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좀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었겠죠. 예를 들어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버디물은 유리합니다. 영화보다 예산이 부족한 텔레비전 시리즈는 액션의 스케일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게 필요하죠. 두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충돌이 있다면 비슷비슷한 작은 액션들 사이에 생기는 빈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스타스키와 허치> 같은 시리즈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남녀 커플이지만 <엑스파일>도 이 부류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조금 다른 이유일 겁니다. 여기서는 이전에 버디 액션물의 단점을 지적하기 위해 내밀었던 숫자 놀음을 다시 시작해보죠. 주인공 숫자가 둘로 늘면 서스펜스는 반이 됩니다. 당연히 스토리의 심각함도 반이 되지요. 더티 하리에게 하리만큼 큰 비중에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파트너가 붙어 있고 둘이 대충 쿵작쿵작 죽이 잘 맞는 사이라면 더티 하리의 무자비한 처벌들이 결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폭력에 대한 광적 집착은 어느 순간부터 희극적인 것으로 떨어지겠지요. 모든 과도한 것들에는 희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걸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 극중 등장인물이 그걸 지적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티 하리는 스크린 위에서 왕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계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관객도 당연히 그를 왕 취급했죠. 그리고 총 든 높은 양반들이 하는 일들은 늘 심각해 보이는 법 아닙니까? <내일을 향해 쏴라>가 성공적인 버디 액션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두 주인공은 살짝 경박하고 애교 넘치는 소악당들로 그렇게까지 진지한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결국 버디 액션물은 심각한 액션을 코미디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국내에서 히트한 <투캅스>도 예외는 아니죠. 다시 말해 이런 버디물은 <더티 하리> 식 진지한 액션에 숨통을 열어주는 방법으로 꽤 효율적입니다. 물론 브루스 윌리스처럼 액션과 코미디를 모두 해치우는 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이게 편하지요. 만드는 사람들에게나 보는 사람들에게나요. 거꾸로 보면 <더티 하리>식의 심각하기만 한 폭력꾼은 더이상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말이겠죠.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더티 하리를 코미디언으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관객의 세대가 바뀌었던 것이죠. <리쎌웨폰> 시리즈에서는 오히려 그런 특성을 이용해 폭력장면을 늘렸습니다. 멜 깁슨은 더티 하리처럼 위험한 폭력 형사지만 대니 글로버와 함께 다니니까 어딘지 모르게 정신나간 어릿광대처럼 변했습니다. 어릿광대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괜히 덜 위험하고 덜 잔인해 보이는 법이고요. 게다가 온화한 대니 글로버의 캐릭터가 뒤를 돌봐주므로 살짝 더 위험해져도 되었죠. 덕택에 <리쎌웨폰> 시리즈는 말도 안 되는 폭력으로 주변에 시체를 뿌리고도 키들거리며 시치미를 뚝 떼는 영화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시리즈의 후반 작품들은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주절거렸던 이야기가 맞긴 한 걸까요? 신나게 떠들다가 과연 요새 할리우드영화에 이런 종류의 버디 액션물이 몇개나 되나 살펴봤는데, 지금 떠오르는 건 <러시아워> <리쎌웨폰> <맨 인 블랙> 정도에 불과합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몇리개 더 추가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는 유행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만큼 대단한 숫자는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서운하군요. 그래도 예로 언급한 영화들에 대한 설명으로는 여전히 그럴싸하게 먹힐 수 있겠지요.듀나 djuna01@hanmail.net

시네마 이탈리아노(Cinema Italiano)

이탈리아사람들은 `다혈질`로 통한다. 정열적인 지중해의 햇빛 속에서 살아서 그런가. 그들의 음악 역시 그렇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엔리코 카루소 같은 불세출의 테너들이 지닌 목소리는 `빨간색`이다. 트럼펫과 비슷한 느낌. 이들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이탈리아의 음악은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 고독한 산책자 브람스가 음울한 독일 빵에 사는 동안, 이탈리아에는 화려한 무대에서 드라마틱한 표정으로 사랑과 죽음을 노래하는 가수들을 위해 불멸의 아리아를 작곡하는 로시니가 살았다.이탈리아사람들은 그 음악을 사랑한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위대한 19세기 오페라의 전통은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음악 속에 면면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옛날 오페라 부파 시절에서 현대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사람들은 드라마와 음악이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 훌륭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정열적이고도 서정적인 방식으로, 거의 직접적으로 관객의 영혼에 호소하는 음악들을 통해 영화음악의 가능성들을 넓혀온 엔니오 모리코네, 니노 로타 같은 현대 영화음악의 거장들은 위대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예들이다. 이번에 나온 <시네마 이타리아노>(Cinema Italiano)라는 모음 앨범은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대표곡들을 나름대로 재미나게 편집하여 모음 앨범, 이 앨범에서도 이탈리아 영화음악이 서정적인 선율과 드라마틱한 감수성을 주요 특색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앨범을 기획한 사람은 플루트 주자 안드레아 그리미넬리이다. 그는 루치오 달라,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이탈리아 음악가뿐 아니라 스팅, 데보라 해리 같은 무게있는 팝 뮤지션을 초빙하여 이탈리아 영화음악 명작선을 호화롭게 꾸미고 있다. 앨범의 첫곡은 스팅이 부른 <시실리 마피아>의 테마음악,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솜씨다. 얼핏 여성적인 노래일 수도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테마를 파바로티의 우렁찬 목소리로 듣는 것도 색다른 풍취가 있다. 뉴욕의 펑크밴드 출신인 밴드 '블론디'에서 말괄량이 목소리를 들려주던 데보라 해리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나는 기억한다>의 메인 테마를 부르고 있다.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데보라 해리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노래를 잘 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플루티스트 안드레아 그리미넬리가 직접 나선 <석양의 무법자>의 테마, 트윙, 트윙, 하는 기타 선율을 플루트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미넬리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지은 이 음산한 분위기의 테마곡을 제트로 툴의 이안 앤더슨의 분위기로 혀를 차며 휘파람 불듯 부는 플루트를 통해 소화해내고 있다. 그 밖에도 <지중해> <일 포스티노> <길> 등 대표적인 이탈리아영화의 테마들을 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으로 그 음악이 가진 힘을 다 파악하긴 힘들 것이다. 그 힘을 느끼려면 영화를 보고, 직접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들어야 한다. 그리로 가는 안내자라 여기고 들으면 무난한 앨범이다.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