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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30대 기혼녀들의 쿨~한 이야기, MBC 주말극 <발칙한 여자들>

미국 인기 티브이 시리즈 〈위기의 주부들〉의 한국판이라는 소문으로 관심을 끌었던 문화방송 주말극 〈발칙한 여자들〉이 뚜껑을 열었다. 26일 문화방송경영센터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이승렬 피디는 “〈위기의 주부들〉 한국판보다는 14년 전 최수종, 최진실이 주연했던 〈질투〉의 주부판에 가깝다”고 했다. 제작진은 “한국의 가족·남녀관계의 유형을 담다보니 미국의 〈위기의 주부들〉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며 “한국 가족이 부닥치는 문제를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 안배에 가장 고심했다”고 했다. 〈위기의 주부들〉처럼 이 드라마도 4명의 여자들이 주인공이다. 전남편(정웅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국에서 돌아온 미주(유호정)의 비중이 가장 크고, 유부남을 가로채 결혼해놓고 남편의 선배와도 몰래 만나는 은영(임지은), 흠잡을 데 없는 전업주부이면서 도벽에 알코올중독까지 있는 상미(사강), 작업의 달인 다림(오주은) 등이 함께 30대 기혼여성의 현실적인 문제를 대변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30대 여자를 그린 드라마가 대세다. 유행을 넘어 관습적인 장르로 굳어가는 인상이다. 그런데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가 입양, 혼외정사, 마약중독 등 폭넓게 소재를 가져가면서 30대 여자의 현실을 신랄하게 그리는 반면 한국의 30대 여자 드라마의 소재는 불륜과 부부 갈등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해왔다. 〈발칙한 여자들〉도 이런 점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며, 주인공 여자들의 직업이 치과의사, 병원장, 전업주부, 백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30대 여자를 대표하는 캐릭터’인지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피디는 “똑같이 가정의 소중함을 말한다고 해도 결국 연출, 화면구성에 따라 전혀 다른 드라마가 된다”며 “주부들의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신선한 방식으로 구성했다”고 자신했다. 이 피디가 선보여왔던 감각적인 연출력과 함께 유호정, 임지은, 사강 등 연기 경력부터 변화무쌍했던 여배우들도 자산이 될 것이다. 극에서 “선배는 권태기 때 잠깐 바람피는 상대였을 뿐”이라며 돌아서는 임지은은 악역인데도 통쾌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가정부 노릇이 천직인 양 굴면서도 사강은 굴욕적이지 않다. 〈카이스트〉 〈대망〉을 집필한 문희정 작가가 극본을 맡은 〈발칙한 여자들〉은 29일 밤 9시40분에 첫방송된다.

<올미다> 올겨울 극장서 만나요!

지루한 장맛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쨍한 햇빛이 쏟아진 22일 오후, 서울 낙산공원 근처의 주민 휴식터에 놀러나온 노인들의 한갓진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영락없는 동네 할머니들의 마실 풍경이지만 그들의 대화가 예사롭지 않다. 한 할머니를 향해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나도 너만한 때가 있었는데, 어쩜 그리 탱탱하냐?”라고 ‘귀여워’하면, 칭찬받은 할머니(김영옥)는 주책없이 이까지 딱딱 부딪혀가며 자신의 ‘젊음’을 자랑한다. 그 옆의 다른 할머니(김혜옥)가 맹렬하게 질투심을 드러내면서 시비를 걸다 급기야 “내가 결혼 못했다고 지금까지 처년 줄 알아?” 소리를 꽥 지르니 앞에서 축구공 차던 꼬마들까지 벙 찐 표정으로 이들을 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노인들은 바로 지난해 종영한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개성 강한 자매들로 지금은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이다. 지난 6월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청년필름·싸이더스에프엔에이치 공동제작)에는 미자와 친구들, 할머니 세자매, 부록과 우현까지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같은 배우의 연기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지난 6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한영숙씨를 대신해 서승현씨가 새롭게 들어왔을 뿐이다. 1년 동안 일일드라마를 찍으면서 같이 살다시피 했으니 다시 만난 영화촬영장에는 여느 촬영장에서 느끼기 힘든 여유와 살가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스스럼없이 배우들을 아는 척하고 같이 수다를 떨다가 종종 엑스트라로 즉석 캐스팅되기도 한다. 작가와 감독까지 드라마에서 영화로 고스란히 옮겨온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굳이 나누자면 드라마의 초기 버전과 같은 정서다. 백수나 다름없는 ‘개점휴업’ 성우이며 애인도 없는 서른두살 미자가 집과 직장에서 골고루 구박을 당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프로듀서와 이루는 사랑의 큰 줄기 사이로 세 자매의 깜찍발랄 로맨스와 미자의 삼촌 우현의 좌충우돌 은행강도 도전기가 삽입된다. 드라마에서는 없었던 인물 박 피디가 새롭게 등장해 미자의 인생을 한층 더 꼬이게 만들며 미자의 상상들이 판타지처럼 적극적으로 구현되면서 드라마와 차별되는 영화적 재미를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여느 때처럼 본인 촬영분이 없는 이날도 촬영장을 찾은 미자역의 예지원은 “의기소침한 초기 미자로 돌아가라는 게 감독님의 유일한 주문인데 친한 동료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 보면 저절로 목소리가 밝아져 ‘그 얼굴 미자 아니에요’라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자와 전세계 노처녀들의 아이콘이 된 브리짓 존스와의 차이점을 “미자에게는 비슷한 성격의 식구들이 있어서 그 소심함이나 엉뚱함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미자의 일터인 여의도와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지금까지 반 이상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8월 초 촬영을 끝내고 올겨울 개봉할 예정이다. “드라마서 ‘영화’ 추려내기 참 까다로웠죠” <올·미·다> 김석윤 감독 드라마에 이어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까지 연출하게 된 김석윤 감독은 1992년 한국방송 예능국에 공채 입사한 현직 피디다. 영화사가 한국방송 자회사인 KBS미디어와 계약을 맺은 탓에, 감독 개런티 대신 한국방송으로부터 피디 월급을 받고 일하는 ‘파견직’ 감독인 셈이다. 이 영화를 하기 전에 시트콤 〈멋진 친구들〉 〈달려라 울엄마〉 등을 연출한 그는 “영화와 텔레비전 매체의 기술적인 차이를 따라가는 것보다 시나리오 작업이 훨씬 힘들었다”고 말했다. “1년 동안 이어져온 드라마여서 이야기의 큰 방향만도 열 갈래가 넘는데 이 가운데 ‘영화적’인 걸 추려내는 게 가장 까다로웠고, 그 과정에서 일부 캐릭터의 비중이 줄어든 게 무척 미안하다”는 그는 “드라마의 기획의도에 맞춰 ‘주눅들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나리오의 가닥이 잡히면서 주인공 미자도 초반의 일거리 없는 백수로, 지 피디도 까칠한 초반 성격으로 되돌아갔다”고 설명했다. 텔레비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영화로 옮긴 배우들의 한결같은 토로처럼 감독인 그도 촬영 초반에는 ‘기다림의 미학’에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다스리는 데 꽤나 고생을 했다고. “처음에는 조명 맞추는 몇시간 기다리는 데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는 그는 지금도 감독 의자에 좀처럼 앉지 않는다.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탓에 캐릭터를 변용할 수 있는 폭이 좁은 게 아쉽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빨리 진행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하는 그는 데뷔감독답지 않게 그날그날의 촬영계획을 거의 100% 지켜나가 제작사와 스태프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제작사에서 35회차로 잡았던 촬영을 29회차로 줄인 것도 감독이다. “영화의 흥행이 잘돼도 영화보다는 방송을 더 하고 싶다”는 그는 “매체가 무엇이든 소소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고 특히 노인들의 이야기는 놓치지 않고 좀 더 공들여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괴물> 주연 제2전성기 누리는 변희봉씨

“칭찬받으면 기쁜 건 사실이지만 사실 배우들 연기야 종이 한장 차이지요. 감독이 잘 다듬은 캐릭터에 맞춰가는 거니까 좋은 연기의 가장 큰 부분은 감독 몫이에요.” 27일 〈괴물〉 개봉을 앞두고 인사동에서 만난 변희봉(64)씨는 자신의 연기에 쏟아지는 찬사를 주저없이 감독의 공으로 돌렸다. 영화에서 자식 잃은 아들 강두(송강호)를 감싸주고 손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박희봉은 1965년 라디오 성우로 데뷔한 변씨가 연기해온 인물 가운데 가장 평범하고 살갑다. “우리 자랄 때 환경이 그랬듯 곤궁한 환경에서도 식구들을 보듬는 아버지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꿈을 40년 만에 이룬 셈이다.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까지 봉준호 감독의 모든 연출작에 출연하면서 “감독이 똑같이 웃고 있어도 저게 아니라는 건지, 오케이라는 건지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변씨는 둘의 관계를 친한 선후배나 부자지간 같은 친숙함 대신 감독과 배우 사이로 규정짓는다. “매점에서 졸고 있는 세 자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할 때 박희봉이 눈물에 젖으면서 넋두리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시나리오에서 그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 잘려나갔어요. 아쉬웠죠. 그런데 편집된 걸 보니 저런 게 앙상블이구나 하면서 무릎이 탁 쳐지더군요. 누가 뭐래도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요. 연기자가 앞서 나가면서 자기 욕심을 차리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어요.” 연기인생 접을즈음 봉감독과 인연, 모든 작품 출연 눈빛만 봐도 통해 〈플란더스의 개〉 이후 여러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을 연기해오며 젊은 관객들에게도 그 이름을 각인시켰지만 봉 감독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배우 변희봉은 잊혀진 이름이 됐을지 모른다. “회사원뿐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아이엠에프 타격은 큽니다. 역할이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게다가 나이든 배우들의 급료를 깎는다는 소식까지 들리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식구들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던 참에 봉 감독에게 전화가 왔죠.” “더 버티면 추해진다”는 몇 번의 거절 끝에 만난 봉 감독이 〈수사반장〉 등에서 그가 했던 “잡범 중의 잡범” 연기를 생생히 기억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녹았다. “배우에게 자기 알아주는 사람 만나는 것만큼 기쁜 게 또 어딨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받으니 경비원인데다 개까지 잡아먹는 인물이니 다시 안 내키데요. 딸내미들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말이지.” 감독의 지극정성 설득으로 출연은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볼 생각도 안했다. “개봉된 다음에 감독한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전화가 왔어요. 안 갈 수도 없고 매점에서 소주 한병 사서 그 자리에서 다 마시고는 서울극장엘 갔는데 야, 저런 게 영화구나 깜짝 놀랐지요.” 그 이후 접힐 뻔한 변씨의 연기인생은 2막을 열었고 〈선생 김봉두〉로 만난 장규성 감독의 새 영화 〈이장과 군수〉에서 백사장 역을 맡아 다음달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점쟁이 역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연기 배우느라 점쟁이들도 많이 만나봤는데, 정말 인생에는 운이라는 게 있는 거 같아요. 거의 접었던 연기를 다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운이죠. 그래서 정말 이 길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후배들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스크린에서 부활하는 <올드미스 다이어리> 촬영현장 [2]

“여성을 잘 모르지만 마음을 열어두고 연출한다” 김석윤 감독은 1992년에 공채 19기로 KBS 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초기에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연출자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본격적으로 ‘극’에 맛을 들인 것은 지난 2000년 유재석, 이휘재, 남희석이 출연한 시트콤 <멋진 친구들>을 연출하면서부터다. 일종의 시트콤 연출 실험이었다고 할 만한 그 작품 이후 김석윤 감독은 <달려라 울엄마>와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거치며 한국의 대표적인 시트콤 연출자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게 좋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는 확실히, 여러모로, 버라이어티한 사람이다. -직접 감독을 맡기까지는 고민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캐스팅이나 시나리오 부분에서 지원은 하겠노라고 했지만 감독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1년이나 시트콤 연출을 해서 타성에 젖은 상태여서 영화계 시각으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라고 했다. 영화는 나와 별로 상관없는 매체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청년필름쪽의 지속적인 권유를 받으면서는 내 손을 통해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과 영화는 상당히 다른 매체다. 직접 현장에서 느끼는 차이점은 뭔가. =조명이나 촬영 등 기술적인 부분들은 물어보고 배워가며 한다. 그러나 동시녹음 같은 부분은 큰 화면에서 어떻게 들릴지 감이 없기 때문에 영화쪽 스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방송이든 영화든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경써야 할 부분은 같은 편이다. 제작 과정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겠고 오히려 시나리오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 스크린에 걸어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니까. -영화 현장이 방송보다 더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현장에서의 동선이 매우 큰 편이더라. =방송쪽 스탭은 PD와 눈빛만 스쳐도 알아서 일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만 영화 스탭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래서 감독이 피사체에 가장 가깝게 위치해야 가장 신속하게 현장이 돌아가는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 기다리지를 못한다. 처음엔 방송과 비교해서 느릿느릿한 영화 현장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점차적으로 적응이 됐다. 하지만 나는 테이크를 여러 번 가지 않는다. 연기자들도 나와의 작업에 익숙하기 대문에 첫 번째나 두 번째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 가끔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번에 할당된 테이크는 딱 두번입니다. 상영관에서 땅을 치면서 보지 않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웃음) -TV에서 주로 활동한 배우들이다. 연기 지도를 하는 데 곤란한 부분은 없나. =보통 TV 연기자들은 바스트 연기를 한다고 한다. 나도 연기자도 그런 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조금 거쳐야만 했다. 그래도 헷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두세 테이크를 먼저 찍어놓고 쉬는 틈에 현장 편집기사와 붙여보며 어색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한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여지를 두고서 전체 톤에 맞아떨어지는 테이크를 고르려고 한다. -현장에서도 사석에서도 꽤나 남성적인 분인데, 그간 <달려라 울엄마>나 <올드미스…>처럼 여성의 이야기로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해왔다. =내가 여성문제에 대해 특별히 많이 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멋진 친구들>을 끝내고 나서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달려라 울엄마>를 했고, 그걸 하다보니 여자들의 이야기가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드미스…>를 했다. 집안에 여자가 많아서 여성의 심리 같은 것에 흥미를 많이 느끼고 또 재미있어하는 편이다. 물론 연출하면서도 ‘이럴 때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부분까지 내가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여자들에게서 듣는 건 매우 좋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성 캐릭터들의 리액션 자체는 작가들이 써놓은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저 나만의 ‘깔깔이’를 치는(재미있는 부분들을 만드는) 거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두고 연출한 것이 시청자에게도 어필을 많이 한 것 같다. 또 내가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분해하지 않고 흥미롭게 여겼던 것 역시 끝까지 시트콤을 연출하고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일일 시트콤에서는 인물과 상황이 진행에 따라 점점 변해간다. 하지만 영화는 압축된 하나의 이야기를 가져야 한다. 시트콤을 영화로 압축하는 경우 시트콤의 이미지나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맞추어가려고 하나. =방송은 종점이라는 거 모르고 시작한다. <올드미스…> 역시 232회를 가면서 합리적이고 정확한 하나의 방향만을 따른 것은 아니다. 1개월을 하다 끝날지 3년을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6개월이 지나고부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캐릭터를 결혼시켜야 하는 시점부터는 너무 쏜살같이 달려가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논리가 정확해야 하니까 <올드미스…>의 초기 기획의도를 살리는 게 가장 아귀가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패배감에 시달리는 좌절한 백수 30대 노처녀, 결혼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주눅 드는 노처녀인 시트콤 초기의 미자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신데렐라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로 끝내지는 말자는 생각이었다. -<올드미스…>는 여성문제에 노인 이야기가 겹쳐져 있다. 패륜 사건으로 쓸데없는 오해를 사긴 했지만, 노인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연출자는 흔치 않다. =우리 어머니가 올해 일흔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20년 전의 어머니랑 다를 바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 몸매가 영 아니신데도 나름대로 셰이프를 만들어보려고 애쓰시고. (웃음) 그렇게 집안에서는 우리 어머니가 여전히 코믹하게도 보이지만, 일단 노인이라는 집단 개념에 묶이면 달라진다. 나 자신도 노인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서늘한 기분이 든다. 사실 노인들은 자신이 노인이라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지 않나. 나도 몇 십년만 있으면 노인인데 그런 상황들이 답답하다. 노인들이 배경 화면으로 전락할 존재는 아니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여성성과 남성성은 존재한다. 그래서 뭔가 사회적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부분을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실재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올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닌데, 쇼프로그램에서 “누구누구 컴백순!”이라고 나오면 “권백순이가 누구냐?”라고 물어보시기도 한다. (좌중 폭소) 내가 흥미를 많이 느끼니까 계속 해보고 싶다. 사실 소명의식, 이런 건 얕지만. -시트콤 연출을 하기 전에는 오락 프로그램 연출을 주로 했다. =나는 원래부터 쇼프로그램 PD가 꿈이었다. (웃음) 꿈꾸던 일을 하면서 재미나게 살던 터에 시트콤이라는 장르를 만났고, 그게 또 다른 맛이 있더라. 사실 시트콤은 드라마국이 아니라 순발력이 있는 오락국 PD들에게 더 맞다. 송창의, 김병욱 PD처럼 오락 PD들이 만든 시트콤들이 성공한 전례도 있지 않나. -그럼 대학 때부터 오락 프로그램 PD가 되기로 결심을 한 건가. =전혀 아니다. 나는 도시공학과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 간 군대에서 MBC에서 FD를 하던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가 나더러 ‘형은 PD 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PD가 뭔지도 몰랐지만 말을 들어보니 좋은 거 같았다. 일단은 제대하고 나서 모그룹 입사시험에 합격을 했는데 도저히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PD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랬더니 먼저 시험을 봐야 한다더라. 입사도 꽤 힘들다고들 했고. 어쨌든 시험을 쳤는데 3차까지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한번에 합격을 하고 말았다. (웃음) -영화 연출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나. =할리우드 키드도 아니었던데다 영화는 잘 모른다. 방송이 아직은 더 잘 맞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제약이 많은 날 연출이 더 잘되는 편이다. 극장판 <올드미스…>를 찍으면서는 3회로 계획된 경찰서 장면 같은 경우, 낮장면을 모두 5시 안에 끝내야 했고, 10시까지는 김혜옥씨 장면을 다 끝내서 보내야 했고, 12시까지는 지현우 장면을 다 끝내서 보내야 했다. 빡빡하다. 근데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라고 하니까 오히려 촬영이 잘되더라. (웃음) 물론 전체 퀄리티는 호언장담을 할 수 없겠지만, 완성도라는 게 결국은 감독의 기준에 달린 게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더 찍어봐야 오버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각 신의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해서 골라낼 수 있는 기준이 없다. 그래서 매 촬영에서 나름대로 후회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갔다. 낙천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내 성격은 예민한 편이다. 장면이 마음에 안 들면 집에 못 간다. 그런데 <올드미스…> 찍으면서는 항상 집에 가볍게 가는 편이다. -그래도 영화가 좋은 성적을 올리게 된다면 영화를 계속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 않을까. =나는 소소한 일상의 극화를 좋아하지만 영화에서는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는 안 되지 않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미니시리즈뿐만 아니라 일일 드라마도 매우 선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아이템을 영화나 드라마로 하려면 100% 거절당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방송과 영화계가 ‘저게 과연 아이템이 될까?’라고 반문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는 울고 웃으며, 그걸 할 수 있는 매체는 시트콤이다. -일을 굉장히 즐기면서 하는 듯하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14년쯤 됐다. 그런데 후배들 말에 따르면, 내가 직업적 만족도가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이 많아도 일 같은 생각이 안 든다. 직업 하나는 잘 골랐다.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한데.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서 딸이 둘 있다. 전화해서 자고 있다 하면 더 일하다 가고, 안 자면 집에 가서 놀아주다가 다시 일하러 간다. 하지만 워커홀릭이라는 말을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쁘다. 예전에 한 후배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란 책을 선물해주면서 “형, 하늘도 가끔 보고 살아요”라더라. 그래서 하늘을 봤더니 너무 날이 좋아서 크로마키(chroma-key·색채의 불현효과(不現效果)를 이용해 화면을 합성하는 텔레비전 트릭) 정말 제대로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하지만 그게 정말 워커홀릭인가? 일을 일처럼 생각 안 하기는 하지만 일 관계로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아서 스트레스는 전혀 안 받는다. 그래서 나에게 워커홀릭이란 단어는 맞지 않는다.

일본 젊은 영화의 힘! [4]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가 매달 한편씩 차례로 개봉했다. 그 선두는 역시 최근 일본영화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원을 제공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누도 잇신이 만든 <메종 드 히미코>였다. <조제…>에 환호했던 관객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차 이누도 잇신의 영화를 반겼고, 그 관심의 폭은 이미 다른 영화들에도 미쳐 있었다. 네편의 영화는 적게는 2만에서 많게는 10만 사이를 오가는 관객을 모았다. 입소문은 늘어갔고, 마니아들은 더 분명하게 수면 위에서 형성됐다. 급기야 7월에 열린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은 매진을 기록하며 보기 드문 성공 사례를 남기고 있다. 물론 이 성공을 뒷받침한 외부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니아들을 상대로 한 영화사의 소규모 장기 상영 전략과 일본영화 전용관 개관에 따른 여파,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의 일반화로 인해 일본 대중영화의 소재와 캐릭터와 이야기 방식에 더욱더 친숙해진 관객, 그중에서도 다운로드족의 일본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도와 그에 이어진 극장으로의 발걸음, 그리고 아사노 다다노부와 그에게서 이제 막 왕관을 이어받은 오다기리 조, 쓰마부키 사토시에 대한 소녀들의 열광이 맞물린 결과다. 하지만 간단한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영화 자체에 이유가 없었다면 이 호응은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때문에 어떤 호소와 호응이 작동한 것인지 영화를 빌려 말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이 외부 요인에 대한 분석은 현상에 대한 수치적 환산이거나 전략에 대한 결과론이거나 해석을 위한 치장이거나 산업적 보고서에 불과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다시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로 돌아가자.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일본영화는 모두 합쳐도 이 네편의 영화와 서너편의 공포영화와 한편의 멜로드라마(<언러브드>) 정도다. 그러나 올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달궈놓은 것은 함량 미달 수준으로 개봉된 서너편의 공포영화가 아니라 위에 열거한 바로 이 영화들이다. 이 작품들 사이에는 묘하게도 어떤 내용적 연쇄의 지점이 있다. 그게 주목의 연쇄 또한 만들어냈을 것이다. 궤도의 이탈, 밀려쓰는 답안지의 재미 지금 이 목록에 5월 개봉작 <언러브드>가 빠져 있는 이유가 네편의 영화를 묶는 첫 번째 고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러브드>는 네편의 영화에 비해 결코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종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영화다. 비교하자면, <언러브드>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와 <메종 드 히미코>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건 자기를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미치코와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는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여자다. 한명은 자기애의 실현을 꿈꾸고 있고, 또 한명은 타자에 대한 박애를 꿈꾼다. 두 인물은 모두 누군가의 방문을 받지만, <언러브드>의 미치코가 가쓰노와 시모카와라는 남자의 방문을 차례로 받는 것과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가 게이 아버지 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의 방문을 받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 차이란 나의 영역에서 남을 받아들일 것인지, 나의 궤도를 이탈해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를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다. <언러브드>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주인공 미치코가 하는 것은 자기 세계에 대한 고민이자 확립이다. 누구도 그녀의 세계를 흔들 수 없고, 끝내 그녀는 자기의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미치코는 나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같은 자리에서 고민하고, 그 대답을 통해 얻은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오리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없다. 애욕의 흔적은 더 없다. 새로 접한 게이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더 있고 그걸 유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자아의 목표치다. <언러브드>에는 정박의 고수가 있지만, <메종 드 히미코>에는 이탈의 유혹이 있다. 이탈의 스토리는 일찌감치 <조제…>에서 볼 수 있다. 유모차에 뭔가를 싣고 다닌다는(사람들은 그걸 황금일 거라고 한다) 괴이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쓰네오가 새벽녘에 그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고, 떠밀려 내려오는 유모차 안의 조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건은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는 주인공의 이탈의 시작이다. 이제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규율을 바탕으로 한 삶 안에서 펼쳐진다. 사랑도 그 타자의 일상을 끝까지 인준함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다면 쓰네오가 그랬듯이 떠나야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러브스토리는 그런 이유에서 안타깝긴 해도 담담할 수밖에 없는 진리다. 그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해, 결별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이유였을 것이다. <스윙걸즈>의 소녀들이라면 그 상황을 코믹하게 맞을 것이다. 낙오생 소녀들이 스윙재즈의 멋을 알아버린 건 수업을 벗어나 밴드부의 도시락을 갖다주려다 어영부영 잘못된 시골로 들어서고, 도시락은 다 상해버리고, 그걸 먹은 밴드부원들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고, 그녀들이 그 자리를 강제로 대신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린다린다린다>의 송은 부주의한 성격 탓에 그만 말을 잘못 알아듣고 밴드에 들겠다고 허락한 것이고, <박치기!>의 고우스케는 일본 여고생을 괴롭힌 적이 없지만 어쨌든 같이 휩쓸려 봉변을 당한 덕에 절실한 사랑에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한칸씩 밀려쓰는 답안지다. 그런데 그렇게 밀려쓰다보니 그들에게는 목표가 보인다. 러브스토리이건 코미디이건, 이것이 일단의 재미를 이룬다. 마을이라는 공간, 청춘이라는 시간 그런데 이탈은 이동의 문제고, 경계를 넘어서서 진입하는 것의 문제다. 그게 어디고, 언제쯤 벌어지는지는 그 때문에 중요한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네편의 영화에서 그것을 공간적으로 나누면 마을이 되고, 시간적으로 나누면 청춘이 된다. 가령 이렇게 나누면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한편의 ‘마을영화’(<메종 드 히미코>)와 또 한편의 ‘마을·청춘영화’(<스윙걸즈>)와 두편의 ‘청춘영화’(<박치기!> <린다린다린다>)를 본 것이다. ‘마을영화’란 실은 어디에도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마을에 사는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이하는 이야기가 일본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가족영화와는 또 다른 것이어서 항상 내부의 갈등보다는, 어찌됐든지 완성되는 화해와 합심의 드라마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마을에는 항상 피로 맺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애환과 정이 넘친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라면 그것은 게이 공동체로서 히미코의 집이다. 그곳으로 진입한 사오리는 결국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 남기로 한다. 반면, 마을영화와 청춘영화의 양면을 모두 지닌 <스윙걸즈>는 마을영화가 추구하는 합심과 화해의 드라마를 청춘이라는 유한적 시간 속에서 한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행위로 대신함으로써 충족시킨다. 만약 이 두편의 영화에 호응한 관객이라면 마을영화와 마을·청춘영화의 이 낭만적 화해 무드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경우에, 즉 주인공들이 온전히 청춘영화의 틀 안에 있을 경우에, 그 이탈의 시간이 잠정적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나, 청춘이란 잠정과 유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반영이다.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간을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피할 수 없다. 마을영화에 절반을 걸치고 있는 <스윙걸즈>는 그 요구를 간단하게 저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화합의 집단적 기념비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더 청춘영화의 범위 안에서 운위하는 <박치기!>와 <린다린다린다>는 좀 다르다. 게다가 이 두편의 영화는 정치적 함의의 개입을 허용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유한적 시간이란 좀더 절박한 무엇이다. <박치기!>는 이미 일본 안에 들어와 있는 조선인들의 이야기고, <린다린다린다>는 일본 여고생과 한국 여고생의 교집합이다. 적어도 이 두편에는 <스윙걸즈>와 달리 소속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박치기!>에서 일본인 친구가 죽자 마치 그 일원처럼 여겨지던 교우스케는 갑자기 한국인 어른에 의해 돌아가라며 내쳐진다)과, 무료한 속도를 따라 이어지는 장애 내지는 그걸 넘어서려는 시도(<린다린다린다>에서 그녀들의 침묵과 대화)가 있다. 그 때문에 <린다린다린다>와 함께 이야기될 만한 영화는 <스윙걸즈>뿐만 아니라 <박치기!>일 수도 있다. <린다린다린다>는 <박치기!>의 인물들이 나눈 약속에 대한 미래의 실현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박치기!>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간의 싸움 끝에 급기야 조선인 학생이 죽는다. 그런데 그와 일본인 학생 교우스케가 했던 미완의 약속을 기억하자. 그들은 언젠가는 함께 밴드를 결성해 노래 부르자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역사에 떠밀려 사멸해버린 그 약속은 40여년이 지난 뒤 <린다린다린다>에서 송과 그 친구들의 노래로 드디어 지켜진다. <박치기!>를 혹은 <린다린다린다>를 선호한 관객이라면 이 과거와 미래가 나눈 미완과 실현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다.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한 콘서트 혹은 축제 자, 다시 마을과 청춘을 합쳐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 이왕 밀려쓴 이 답안지의 이야기는 끝까지 밀려나가 무언가 다시 맞춰지는 기적을 이뤄야만 한다. 그럼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해 네편의 영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보기의 쾌감을 혹은 감동을 선사해준 장면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이 영화들은 모두 그 자리에 ‘축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잘못 시작된 출발이었거나 아니거나 이제 이 축제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달려간다. 그게 유한적 시간 속에서, 그 너머의 영역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방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축제가 스포츠가 될 경우에는 실패의 확률이 높다. 그건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하는 축제이기 때문이고, 가령 <박치기>의 경우처럼 앙금을 제거하기 위한 자리라면, 그런데 쉽게 해소될 수 없는 자리라면,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소통의 언어는 날아가고 몸의 본능적인 열기만 남기 때문이다. <박치기!>의 진보적인 일본 선생이 (나쁜) 전쟁은 (착한) 전쟁으로 풀어야 한다며, 조선인 고등학교와 일본인 고등학교 사이의 친선 축구 시합을 성사시키지만 결국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합은 발길질과 주먹질의 난투극으로 끝난다. 때문에 그것은 곧잘 공연으로, 특히 음악회나 연주회가 되어야만 한다. 음악이 매개가 되는 것이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 사오리와 게이 노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연주와 춤이 흐르는 나이트클럽에서다. <스윙걸즈>와 <린다린다린다>의 소녀들은 음악제와 학교 문화제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뜨거운 공감의 열정을 느낀다. <박치기!>의 배경인 1968년은 비유적으로 봐도 혁명적 페스티벌로 점철된 시간이었고, 교우스케가 라디오에서 <임진강>을 부르는 오디션은 그걸 듣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보이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동의 콘서트다. 인물들은 이 축제를 완성하기 위해, 즉 잠정적으로 주어진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재즈를, 펑크를, 포크를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들은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어하고, 우리도 이 순간 즐거워하거나 감동한다. 차이와 다름에 관한 일본영화식 사지선다 하지만 일본영화에 관한 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만약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올해 개봉된 목록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음악회 장면이 있었다. 아름다운 화음의 아카펠라가 울려퍼지고 그 정도면 외양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한 여학생 구노가 일부러 자신의 자리를 빼고 만든 작곡에 힘입은 화음이다. 선생도 나머지 학생들도 소품처럼 무대 한편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체한다. 그건 아름다운 합창이지만, 이지메가 만들어낸 화음이다. 영화 속에는 인물들이 신봉하는 가수 릴리 슈슈의 콘서트도 있었지만, 그걸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자신이 생각하는 릴리 슈슈에 대한 의미에 반하는 남의 어떤 의견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축제는 갈등을 해소 못할 뿐 아니라, 더 드러내는 사건이다. 여기까지 미쳤기 때문일까. 이쯤에서 이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말하자면, 혹시 우리가 올해 본 네편의 마을·청춘영화들은 이탈을 기회 삼아 차이와 다름의 인준에 관해 말한, 이른바 일본영화식 ‘톨레랑스’에 관한 네 가지 쌍곡선은 아니었을까. 무작정 흥겨움으로 달려나가며 다름에 대한 인식을 제외한 의아한 화합(<스윙걸즈>), 또는 다름을 인정하되 그 안으로 들어가 일원이 되는 것의 낭만(<메종 드 히미코>), 또는 공존하지만 인정하기까지의 어려움(<박치기!>), 그러나 다시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면서 같이하는 것의 아름다움(<린다린다린다>)에 관한 네 가지 묶음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의 제각각 선택과 호응은 아니었을까. 처음 이 봇물을 쏟아놓은 <조제…>의 러브스토리가 톨레랑스에 기반한 러브스토리였음을 기억하자. <유레루> <빅 리버> <전차남>이 온다고 한다. <유레루>와 <빅 리버>는 스타 오다기리 조의 출연작이고, <전차남>은 드라마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이 영화들이 도래하면 또 다른 일본영화의 면모가 얘기돼야 하겠지만, 그래도 마을영화와 청춘영화는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 영화들의 성격상 톨레랑스에 대한 담화는 그때마다 다시 이야기돼야 할지 모른다. 그때 과연 우리는 어떤 영화를 선택하여 울고 웃을 것인가. 그건 단순히 재미로 말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그건 우리의 톨레랑스에 대한 인식을 시험받는 우회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올해 우리는 그 경험을 한번 한 것이다.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2]

사회적 인과응보의 집행자로서의 괴물 물론 박희봉의 연대기를 내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매점 안에 걸려 있는 멧돼지의 박제머리와 ‘엽우회’(獵友會)라는 모임에 박희봉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기념사진은 그의 삶의 이력 가운데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박희봉이 그들 가족 중에서 괴물과 마주쳤을 때 유일하게 총을 잘 쏜다는 사실 이외에는 더이상 이 박제와 기념사진은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혹은 멧돼지를 잡은 그가 그 반대로 괴물에게 붙잡혀 죽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뜻일까? 물론 괴물은 박희봉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괴물은 그 무언가를 집행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괴물의 등장은 어떤 패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자. 괴물이 처음 한강 둔치에 나타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난다. 그때 사람들은 철제 이동식 화장실 안으로 도망친 다음 미처 마지막 여자가 들어오기 전에 무정하게도 문을 잠가버린다. 그때 괴물은 이 여자에게 아무 관심도 없이 그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그 창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그 여자뿐이다. 여기서 왜 창고 바깥에 남겨진 희생의 잉여가 필요해진 것일까? 이 살아남은 잉여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가? 혹은 괴물이 두 번째 나타났을 때. 비내리는 한강에 방역 가스를 뿜으며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춰 서서 방역 요원 중 한명이 내려 떨어진 돈을 주우면서 좋아한다. 그때 괴물은 갑자기 나타나 그 돈을 주웠다고 좋아하는 사내를 바로 잡아먹는다. 여기서 왜 괴물이 나타나 그냥 잡아먹는 대신 돈이라는 미끼가 필요해진 것일까? 돈이라는 근본적인 유혹. 남의 것을 주인을 찾아주는 대신 자기가 갖는 행위. 그런데 돈에 주인이 존재하는가? 돈에 주인이 있다는 생각에는 무슨 믿음이 있는가? 화폐라는 물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모순의 치환. 세 번째 장면. 세진과 세주는 한강에서 사람들이 철수한 틈을 타서 매점을 턴다. 하지만 세진에게는 원칙이 있다. 매점 물건을 털긴 하지만 돈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이건 도둑질이 아냐, 우린 지금 매점 서리를 하는 거야, 매점 서리, 알어? 수박서리, 참외서리, 할 때 서리 (중략) 서리는 배고픈 자들의 특권이 되겠다, 이 말이야, 알겠어?”라는 말이 끝나자 세진과 세주 앞에 기다리는 건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나타난 괴물이다. 그리고 그 말은 세진이 한 마지막 말이다. 두 번째 희생의 논리에 대한 반대의 논리의 집행. 이번에는 상품의 유통이라는 과정에서 시장의 존재를 부정하고(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에 대한 부정), 배고픈 자들에게는 가진 자들의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했을 때 괴물은 그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괴물이 출현하여 벌이는 행위는 신기하게도 생물적인 본능을 따른다기보다는 사회적인 인과응보의 그 어떤 집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은 영화적으로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지만, 동시에 괴물의 행위는 ‘제때에 나타나’ 현실 속의 불편한 행위를 중단시킨다. 여기에는 두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괴물이 그의 본능에 따라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괴물 자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 그가 법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벌은 법이 내리는 벌보다 훨씬 잔인하고 피비린내 난다. 봉준호는 법이 내리는 벌이 너무 가볍다고 보여준다. 혹은 어쩌면 두개의 벌이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인과응보. 그런데 인과응보는 이 영화에서 거의 영화 전체에 집행되고 있는 잉여지식이다. 무자비하고 어떤 타협도 알지 못하는 지식. 말하자면 세상의 질서?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이어서 외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노골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법질서 혹은 도덕. 좀더 인상적인 장면. 현서의 합동분향 영결식장에는 많은 화환이 놓여 있다. 그런데 웃지 못할 화환 중의 하나. ‘대구 지하철 유가족 일동.’ 그게 왜 거기에 놓여 있을까? 한강에 나타난 괴물과 대구 지하철에서 불이 난 것은 무슨 동병상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봉준호의 인터뷰(위의 <한겨레>). “(중략) 이 사람들은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되고, 도움은커녕 방해만 받지만 아무도 시스템 탓 안 하고 자기들끼리 보듬으며 재앙을 개인화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예를 들자면 대구 지하철 참사도 구조적 모순을 탓하기보다 내가 돈 잘 벌었으면, 대학입학했을 때 차 사줬으면, 안 당했을 변을 당했다, 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재앙은 훨씬 더 구조적인 것에서 온 건데, <괴물>의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훨씬 더 구조적인 결과로서의 재앙. 하지만 재앙의 개인화. 봉준호의 이 말의 방점. “이런 게 한국적이고 사실적이다.” 괴물은 거기 훨씬 구조적인 결과로 나타나 현서를 납치하지만, 박강두 가족은 그 재앙을 개인화한다. 그런데 그게 박강두 가족만일까? 혹시 영화를 보는 당신도 그 재앙을 개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해일이 연기한 박남일은 ‘추억’의 타임머신 그런 다음 현서의 삼촌이자, 박강두의 남동생인 박남일. 그때 박남일을 박해일이 연기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괴물> ‘이후’에 <살인의 추억>에 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할 엔딩이 뻔한 <살인의 추억>을 봉준호가 왜 만들어야 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 모든 노력에 대한 허망한 결론. 그런데 사실 <살인의 추억>은 그 이야기만으로 본다면 결국 <괴물>과 같은 이야기이다. 혹은 <플란다스의 개>까지도 봉준호는 이미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중이다. 그는 세번 모두 같은 이야기를 찍었다.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열심히 찾아다니고(seek and…) 그런 다음 찾는다(…find). 그런데 그들이 찾은 건 이미 죽었거나,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그때 봉준호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범인이 아닌 용의자. 이미 죽어버린 현서.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봉준호 영화의 두개의 그림. 거기서 봉준호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저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의 과정에서 반복되어 ‘보여지는’ 고문. 우리가 <살인의 추억>에서 보는 것은 고문장면이었다는 것을 환기해보자. 만일 이 영화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대신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빌려 1980년대 고문에 관한 ‘정치적인 영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허문영은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이) 흥미로운 건 이 인물에게서 대학생의 이미지가 나온다는 점이다. 대학생인데 뭔가 쫓겨서 운동하러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80년대 억압을 영화가 말하는데도 억압을 빚어낸 장본인인 살인범이 그 시대에 억압과 맹렬히 싸운 대학생 이미지를 가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중략)”(<한겨레> 2003년 12월19일자, ‘소통 넓어진 호러-사극, 금기와의 대면 기념적, 그런데 ‘현재’는 어딨지; 2003년 한국영화 결산좌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봉준호의 다음 영화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괴물>에서 봉준호는 그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괴물>에서 박해일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하다가 졸업한 다음 백수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남일로 옮겨온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1980년대의 후일담, 아니 차라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혹은 80년대에서 그냥 걸어나온 듯한 인물. 박남일은 그 선배의 말을 빌리면 “도바리의 천재”이고(그런데 이런 말을 2006년에 누가 쓸까? 혹은 10대 관객은 이 말뜻을 알 수 있을까?), 그가 ‘꽃병’ 만드는 걸 보면서 노숙자는 말한다. “아주 도사구만, 손이 안 보이는구만, 손이, 딸딸이 저리가라다”(그런데 21세기 대학교 시위에서 당신은 ‘꽃병’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박남일은 <살인의 추억>의 시간을 고스란히 들고 <괴물> 안으로 옮겨온 일종의 ‘추억’의 타임머신이다. 혹은 이 말이 과장되었다면 박남일은 2006년에도 1980년대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이상 연대는 없다.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그의 선배는 졸업한 다음 대기업 이동통신 회사에 취직했고, 그런 다음 현상금을 타(서 빚을 갚)기 위해 그의 후배를 신고한다. 그때 선배는 단 한 숏에서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현상금에서 얼마나 세금을 떼는가뿐이며, 다만 그 자리에 남일이 그의 누이마저 데리고 나타나지 않아 두배로 현상금을 받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 뿐이다. 그때 이 장면이 <괴물>에서 유일하게 한강 강변 바깥의 도시를 다룬 신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강변 저편의 휘황찬란한 도시. 이제 어떤 정치적 연대도 기대할 수 없는 배신과 신고로 이루어진 저편. 납치당한 손녀, 딸, 조카를 찾기 위해 가장 보잘것없는 가족이 그렇게 애를 쓰는데 누구도 관심없는 시대. 카드와 빚으로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디지털 시대의 스산한 사리사욕의 이해관계만 남아 있는 저 거대한 빌딩. 거기에 남일의 자리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꽃병’을 들고 한강에 가야 한다. 거기만이 그가 서 있을 장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괴물이 무엇의 결과이며, 결국 그 결과를 없을 때 그가 없애는 것이 그 결과가 제공하는 원인의 이유를 말소시킴으로써 그것을 제공한 미국에 무죄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남일에게는 눈앞의 투쟁만이 그의 목표이다. 봉준호의 냉소적인 웃음이 여기서 울려퍼진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봉준호는 남일이 던진 꽃병을 보면서 한껏 웃는다. 그는 단 한번도 괴물을 ‘꽃병’으로 맞추지 못한다. 심지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그는 그만 어처구니없게도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고 만다. 남일은 현서의 영결식장에서 묻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남일에게 봉준호는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다음 힘든 질문이 남아 있다. 13살 중학교 1학년 현서는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괴물에게 잡혀가야 하며, 그녀는 무엇을 대가로 결국 죽어야 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이미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그냥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의 대답. 괴물은 현서를 잡아다놓았고, 현서는 하수구 틈새에 숨어 있었으며, 괴물은 그 다음 세주를 잡아왔고, 현서와 세주를 잡아먹은 다음, 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꺼냈을 때 현서는 이미 죽었고, 세주만 살아남았다. 괴물은 아무 생각이 없었고, 현서는 그냥 운이 없었다.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그러나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숏이 있다. 그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괴물>은 시작하면 바로 현서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서진 가족이고(합동분향소에서 박희봉의 대사, “행여,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간 게 벌써 13년짼데…”), 그런 다음 괴물이 나타나서 현서를 그들과 떼어놓는다. 그들은 영화에서 단 한번도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아마 영화 시작 이전에도 모인 적이 없을 것이다(같은 자리에서 박희봉의 대사, “우리가 현서 덕에 다 모였다”). 박강두의 눈앞에서 괴물은 현서를 잡아먹는다. 그런데 그게 아주 멀리 떨어진 밤섬 저편에서 삼키는 게 희미하게 롱 숏으로 보인다. 그걸 보는 사람은 박강두이다. 그런 다음 현서는 가족과 떨어진 채 괴물이 살고 있는 원효대교 북단 하수도에서 네번 보여진다. 그런데 42번째 신, 현서의 두 번째 하수도 장면 보여주기 직전의 신. 그러니까 매점 내부의 장면. 병원에서 강두 가족 일행은 도망쳐 나와서 다시 매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여 앉아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붙잡혀간) 현서가 부스스 일어나서 라면을 함께 먹는다. 더 이상한 것은 가족들 중 아무도 놀라지 않고 현서의 라면에 이런저런 반찬을 올려놓아준 다음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라면을 먹는다. <괴물>이 초현실주의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초현실주의적인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신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신을 앞장면, 그러니까 세진과 세주 앞에 괴물이 나타난 다음 도망치기 위해 매점 문을 열었는데 그걸 할아버지 박희봉의 손으로 연결한 트릭 숏으로 연결하지 않고, 그 신의 다음 신, 그러니까 하수구 아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현서의 얼굴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수구에서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가 잠시 생각한 숏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순서를 뒤바꿔 붙인 이 숏은 ‘서프라이징’ 이외의 어떤 기능도 없다(상식적인 편집은 정신을 잃어가는 현서를 보여주고 그런 다음 이 매점 숏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놓으면 두개의 신은 설명이 되지만 갑자기 편집이 뒤죽박죽이 된다. 한번은 앞으로 가고 다음번은 뒤로 가보자. 먼저 매점의 숏을 놓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그 앞은 할아버지 박희봉이 매점 문을 여는 인서트 숏이다. 그런데 이 인서트는 마치 그 앞의 신에서 세진과 세주가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쳐서 매점 문을 여는 것처럼 매치-트릭-숏으로 연결하였다. 그 앞의 신은 매점을 ‘서리하는’ 세진과 세주이다. 그런데 세진과 세주는 한강 다리 지하도 하수구에서 총을 쏘는 강두 가족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등장한 인물이다. 영화는 여기서 세진과 세주가 나타난 다음 옆으로 빠져서 세진과 세주를 따라서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숏에서 강두 가족으로 넘어왔다. 그 다음 매점 숏에서 뒤로 가보자. 라면을 먹는 숏이 나온 다음 하수구의 현서의 얼굴로 이어붙였다. 그때 괴물이 나타나서 세진과 세주를 버리고 간다. 현서는 세진의 코에 손가락을 대본 다음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이 숏은 박강두가 매점에서 그들의 가족 곁에 누워 잠을 자는 쇼트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강두는 계속 자고 있는 데 박희봉은 남주와 남일을 앉혀놓고 그 자신과 강두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 미묘한 문제가 생겨난다. 매점을 현서의 꿈으로 보지 않고, 하수구에 있는 현서가 강두의 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매점의 숏은 꿈속의 꿈이 된다. 반대로 현서가 꿈을 꾼 것이라면 강두가 자는 장면은 시간적 동시성의 숏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매점 안에 들어와 라면을 먹은 장면은 꿈인지 실재인지 모호하게 된다. 나는 이 숏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좀더 앞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맨 처음으로. <괴물>은 제목이 보이고 나면 박강두가 매점에서 잠자는 숏으로 시작한다. 그는 항상 잠을 잔다. 매점에서 잠든 강두를 보면서 하는 박남일의 대사, “진짜 신비롭지 않냐?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 박희봉의 대답, “그냥 냅둬라, 얜 짬짬이 눈을 붙여줘야 돼”. 제목이 나온 다음 잠든 박강두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등장인물은 ‘매점 서리하러’ 온 세진과 세주이다(그런데 그때 자막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놓치기 쉽다). 박강두는 그들을 보지 못했지만 세진과 세주는 그를 보았다. 그런데 세진이 본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진은 두번 다시 강두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 강두를 보는 건 세주뿐이다. 현서는 세진과 세주가 매점 앞을 떠난 다음에 등장한다. 그 둘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 차지한다. 하나가 등장하면 하나가 퇴장한다. 처음에는 이게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서가 납치되고 난 다음 이 자리는 일종의 포르-다 게임처럼 진행된다. 현서는 괴물에게 유괴된 다음 강두의 가족에게 휴대폰으로 그녀의 생존을 알린다. 우리가 현서의 생존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를 본 다음 그녀가 휴대폰을 거는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병원에서 골뱅이를 먹다가 강두에게 걸려온 현서의 잡음 심하게 섞인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 전화를 무참하게 그냥 끊어버린다. 단지 전화만 끊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숏도 그렇게 한다. 현서는 이 신에 뒤이어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방독 가스를 뿌리고 다니는 자동차의 남자들이 돈을 줍기 위해 나온 다음 괴물에게 붙잡히는 신이 있다. 그들을 잡아먹은 괴물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고 우아하게 그 서식지에 까지 쫓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서 현서를 보여준다. 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병원으로 돌아온다. 사실 방독가스 차에 탄 남자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한번이라도 더 괴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봉준호는 이 신의 진행을 일단 중단시키고 그 사이에 괴물을 개입시킨 다음 현서를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병원에서 다시 병원으로. 좀더 정확하게 병원 신 안의 하수구 신. 이 말의 핵심. 그리고(and)가 아니라 그 안(into)에. 현서가 하수구에 붙잡혀 있는 두 번째 장면과 매점장면 사이의 편집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세 번째 현서의 신. 다시 붙잡힌 박강두는 한강에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더글라스 부소장과 김씨를 만난다. 물론 박강두는 눈앞의 더글라스가 현서를 납치해간 골뱅이-괴물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박강두는 지금 마취제를 맞아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그 박강두를 침대에 묶어놓고 카메라가 하이 앵글로 내려다볼 때 한참을 난동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문득 하수구의 현서로 옮겨간다. 현서는 세주에게 “뭐가 제일 먹고 싶어?”라고 물은 다음 자신은 “시원한 맥주”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대답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이 나타나서 트림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뼈가 쏟아져 나오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캔 맥주를 토해낸다. 캔 맥주에 대한 두개의 대답. 그 하나. 그 캔 맥주는 잡혀가기 전 현서가 발로 찬 것을 먹은 다음 소화가 되지 않자 이제야 토해낸 것이다. 두 번째 질문. 그런데 이 신이 박강두가 마취제를 맞으면서 진행되는 신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현서가 희생자들의 옷을 묶어서 탈출하기 위한 동아줄을 만들지만 실패한 다음 이어지는 신은 (다시 앞으로 돌아와?) 병원에서의 박강두의 장면의 연속이다. 나는 이 신이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 까닭은 병원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일단 중단하고 왜 그 안으로 편집을 나눈 다음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를 끼워넣었느냐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의 진행을 구태여 번잡하게 만들고 있다. 나의 두 번째 대답. 만일 현서의 이 신이 마취제를 맞으면서 의식이 흐려져가는 박강두의 비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괴물은 그 순간에 나타나 트림을 한 다음 많은 토사물 중에 캔 맥주를 토해냈을까? 그때 그 맥주는 매점에서 아버지와 딸이 사이좋게 앉아서 남주의 양궁 중계를 보면서 박강두가 건네주던 그 캔 맥주라는 기억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캔 맥주라는 기억의 매듭. 그러니까 이 현서의 신 전체는 병원장면의 일부이며, 이 신은 박강두가 마취제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문득 떠올린 현서의 비전이라는 편이 이 편집을 이해할 수 있는 순서가 아닐까? 네 번째 현서의 신. 박강두는 병원에서 탈출하고 난 다음 원효대교를 향하여 달린다. 그리고 현서의 이름을 외친다. 그때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 텔레파시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나는 현서가 아니라 현서가 ‘있는 하수구의 신’이라고 썼다. 현서는 세주를 깨운다. 그런 다음 잠들어 있는 괴물을 보면서 세주에게 말한다. “누나가 금방 나갔다 올게, 빨리 나가서 의사랑 119랑, 군인 아저씨, 경찰 아저씨, 죄다 데리고 올게.” 하지만 우리는 설혹 현서가 나갔다 할지라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강두 가족의 ‘사투’를 보면서 잘 알고 있다. 현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괴물을 밟고 동아줄을 잡지만 그러나 괴물은 깨어나고 만다. 도망치는 현서를 향해 괴물이 달려들면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그런 다음 이 장면은 박강두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박강두는 괴물의 은신처에 도착했고, 괴물은 입 속에 현서와 세주를 물고 원효대교 북단을 향해 가는 중이다. 현서가 나오는 네 번째 하수구 장면도 세 번째 장면과 같은 편집을 하고 있다. 박강두의 행동을 일직선으로 따라가지 않고 그 사이에 현서의 에피소드 신을 넣어서 그 행동을 나누고 있다. 여기에는 편집에서 신 안의 인서트의 주관성이라는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나는 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편집에 의지해서 두 번째 매점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은 박강두가 꿈속에서 현서를 만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설명된다면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모두 박강두의 신 안에서 생각하는 현서의 신이다. 현서의 죽음에 우리 모두는 정치적으로 유죄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텔레파시가 있다. 구태여 <괴물>을 본 다음 어떤 영화를 떠올려야 한다면 봉준호의 <괴물>이 왜 피터 잭슨의 <킹콩>이 아니냐고 묻는 대신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의 ‘사우스 코리아’ 버전으로서의 대답이라는 편이 어떨까? 네티즌들 사이에서 봉준호를 부르는 표현, ‘봉필버그’. *^^*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그 무엇. 그런 다음 무지비한 공격. 납치당한 자식, 그 아이를 구하려는 아버지의 악전고투. 여기에는 있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텔레파시와 구원을 향한 드라마.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까지이다. 나는 신42의 매점장면에서 현서가 나타나는 장면이 현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갑자기 현서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지막 장면에는 현서를 죽여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더 비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는 사람을 울리기 위해서? 아니, 그 반대이다. 만일 현서를 죽이게 되면 봉준호는 괴물 영화의 컨벤션과 정면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봉준호는 괴물영화라는 장르와 싸우는 데 관심이 없다. <괴물>은 비장한 척할수록 웃겨지는 영화이다. 박강두는 심각해질수록 보는 사람을 웃긴다. 혹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웃는다. 이를테면 박남일이 ‘꽃병’ 투척에 실패하는 대목. 한강에 괴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봉준호는 지금 2000년 2월9일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끌어안고 끔찍한 질문을 하는 중이다. 내 생각에 <괴물>의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할리우드 괴수영화가 한강 강변에서 매점을 하는 가족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소동 속에서 보여지는 스펙터클에 대한 휴머니즘의 무관심과 영화 속과 같은 날 벌어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 그 둘을 할 수 있는 한 거의 맞닿을 만큼 서로 가깝게 다가갔을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있는가? 그 대답. 외양이 실재와 가까이 다가갈 때 그 사이에서 선택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여기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의 고리를 끊으려 할 때 정치적 무관심을 포기하고 휴머니즘의 무관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이미 그 역은 구하기에 틀렸다. 맥팔랜드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미군 기지가 이전하고 있는 지금 같은 사태가 심지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을 끊을 때 사실상 둘 다를 잃는 것이다. 그때 현서는 그 매듭이다. 그러므로 봉준호는 현서의 죽음을 놓고 내기를 한다. 무슨 내기? 피할 수 없는 질문(의 내기). 현서의 죽음 앞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걸 괴물에게 떠넘길 것인가? 만일 괴물이 마지막 순간에 현서를 잡아먹어서 죽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무죄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서는 그 순간 왜 그 매점에 나타나서 함께 라면을 먹은 것일까? 차라리 현서는 그보다 훨씬 앞, 그러니까 괴물이 현서를 꼬리로 붙잡은 다음 그의 서식지로 데려갔을 때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런 다음 그 모든 현서의 신은 박강두가 현서를 되찾기 위해 그 자신에 동기를 부여하는 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에게 현서의 죽음은 사실상 현서가 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야만 하는, 봉준호의 말을 빌리면 “훨씬 더 구조적인 데서 온 재앙”, 즉 그녀의 계급적 운명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 옳다. 현서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죄를 지었다. 이것이 정치적 정의의 죄의식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남주의 마지막 화살을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판본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결국 남주의 화살에 괴물을 쓰러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남주가 아니라 그 화살에 주목한다. 사실 남주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녀가 대전에서 어떻게 자라나서 양궁선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아무 설명이 없다. 왜 강두가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는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건만” 4년 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왜 남일이 한강 강변에서 술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 그리고 왜 현서에게 엄마가 없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주가 왜 매번 제시간을 놓쳐서 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거북이”인지(남일은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도 남주의 심리적인 망설임을 더이상 읽을 수 없다. 그 불투명성. 이 네명의 설명의 영화적 판본의 공통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봉준호는 이 가족의 내면적 심리(의 과정)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화살은 이 영화의 마지막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걸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남주의 화살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 그 설명의 판본에서 내가 택한 것은 이 신 전체가 사실상 이 영화에 처음 괴물이 나타난 신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때 이 반복 안의 차이 혹은 차이처럼 보이는 반복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괴물이 나타나는 첫 번째 신(이하 첫 번째 신).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한가롭게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그 다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신(이하 마지막 신). 원효대교 남단, 그러니까 여의도 둔치에서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에이전트 엘로우’ 살포를 반대하면서 시위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 갑자기 나타나는 괴물. 첫 번째 신. 이 괴물이 나타나자 박강두는 철제 주차표지판을 들고 달려든다. 마지막 신. 박강두는 ‘1급 오염구역’ 철제 표지판을 들고 괴물에게 달려든다. 철제 표지판. 첫 번째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미군 도날드 하사관이 보도블록을 깬 다음 이걸 들고 괴물에게 달려가 싸운다. 이걸 맞자 괴물이 잠시 멈칫거린다. 마지막 신. 모두가 도망가는데 거기 설치된 ‘에이전트 옐로우’ 풍선을 터뜨려 괴물에게 황색분말을 쏟아붓는다. 이걸 뒤집어쓴 다음 괴물은 비틀거린다. 미군. 첫 번째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신, 괴물이 나타났을 때 박남일은 한강변에서 소주에 휘발유를 넣은 ‘꽃병’을 들고 괴물에게 던지지만 단 한개도 맞지 않는다. 박남일의 소주병. 첫 번째 신. 박남주는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났을 때 전국체전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때 박남주는 시간을 놓쳐 활시위를 당기지 못한다. 그걸 본 현서는 실망하고 매점에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마지막 신. 박남주는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남일이 마지막 ‘꽃병’을 떨어트려 깨트리자 화살 솜방망이에 불을 붙인 다음 괴물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질문. 그래서 오직 남주만이 그의 행위를 성공시켰는가? 내 대답은 반대이다. 남주의 행위도 사실상 남일의 행위의 반복이다. <괴물>은 대부분의 장면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숏이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신 안에서 두개의 신이 진행된다. 영화의 앞부분. 괴물이 나타났을 때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보여지는) 남주는 화살을 쏘고 있다. 그런데 그 화살은 결국 시간을 놓쳐서 쏘지 못한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 화살은 결국 과녁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남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실망한 현서는 매점 바깥으로 나왔다가 괴물에게 납치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괴물이 나타난다. 그 괴물을 향해 남주는 활시위를 당긴다. 그런데 이게 남주가 괴물을 향해서 활 시위를 당긴 네 번째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처음은 비오는 새벽, 할아버지 박희봉이 괴물에게 죽을 때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제지당한다. 두 번째는 달려오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그만 괴물에게 하수구에 처박힌다. 세 번째는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현서를 입에 물고 있기 때문에 강두에게 제지를 당한다. 그리고 지금 괴물에게 활시위를 당긴다. 그러나 이미 현서는 죽은 다음이다. 그것이 복수의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남일이 ‘꽃병’을 던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 화살은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 맞기는 했지만, 그 화살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과 목표의 분리. 그때 목표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괴물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정말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는가? 그 활시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일종의 공허한 몸짓의 반복이다. 남주의 화살보다 더 우리 시대의 정치적 제스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알레고리가 있을까?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봉준호의 차가운 냉소주의이다. 그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향해 깔깔대고 웃으면서 공허한 제스처처럼 다룬다. 그는 여전히 항의한다. 그러나 한참 항의한 다음 그 항의라는 행위가 지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서 환멸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나는 봉준호가 이 외설적일 만큼 노골적인 ‘정치적인 영화’에서 무엇을 은폐하려는지가 궁금하다. 나는 현서의 시체 앞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괴물>에서 끝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그 하나는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 <괴물>은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부서졌고, 그런 다음 더 부서져가는 과정을 밟을 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괴물이 죽었을 때 사실상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순환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 영화가 끝난 다음 (다시 시작하는 현실 속의 속편의) 첫 장면은 당연히 다시 주한 미8군 부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선택이 남는다.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정치적 어젠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모호함 속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그냥’ 살 것인가? (더글라스 부소장의 말을 빌리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 양자택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선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것’의 상태와 탈정치적인 일상 사이의 선택. 정치적인 각성을 일깨워 실재를 보라고 외치다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그런 다음 음산한 에필로그가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무대는 눈 내리는 한 겨울 밤 한강 강변으로 옮겨간다. 거기 강두의 매점이 있다. 남일과 남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헤어져서 아마도 이전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현서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박희봉의 대사 “현서 덕에 우리가 다 모였다”). 그 매점에 박강두와 세주가 살고 있다. 현서의 자리를 대신한 세주. 일종의 유사 가족. 여전히 어머니의 자리의 부재. 나는 이 장면에서 현서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애도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에필로그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괴물은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일까? 또 새로운 골뱅이가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있는 것일까? 강두는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아마도 현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방송일 텐데 그는 발가락으로 채널을 꺼버린다. 눈이 내리고, 강변에는 강두의 매점만이 홀로 쓸쓸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낮과 밤의 차이가 아니다. 혹은 현서에서 세주에로의 대체가 아니다. 여기에는 좀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박강두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그런 게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낮에도 밤처럼 잠을 잔다. 그런데 괴물과 싸우고 난 다음에는 한강에 언제든지 괴물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총을 잡는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바깥을 살피면서 두리번거린다. 사실상 박강두의 입장에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걸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서 그 차이가 지금 정치적인 것의 위기감과 탈정치적인 것의 나른함 사이의 차이와 불길할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이 마지막 장면이 만족스럽거나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 만족과 불만은 정확하게 위기감과 나른함 사이의 차이의 반복이다. 만족스러운 위기와 나른한 불만족. 이 비대칭의 공존.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어두운 하수구. 화성에서는 연쇄살인이 벌어져 시체들이 발견되었던 그 하수구, 한강에서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하수구. 현실 속의 실재가 있는 그 블랙홀.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의 어두운 구멍. 나는 정확하게 <괴물>의 거기까지만 지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MBC 수목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한희 피디

일주일에 한번 귀가 ‘강행군’ 마약 같은 무대의 불꽃 청춘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누구나 공감할줄 알았는데…” 가요계에 뛰어든 젊은이 4명의 이야기인 문화방송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수·목 밤 9시50분, 연출 한희, 극본 홍진아·홍자람)는 춤과 노래, 이야기가 서로 떠받치고 있다. 10·20대 취향의 드라마이지만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선과 악의 이분법도 없다. 인물들은 저마다 욕망과 이유를 지닌 채 새파란 청춘을 무기로 연예계의 복마전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의 직업은 멜로를 위한 추상적인 배경이 아니다. 희수(김옥빈), 렉스(환희), 혁주(지현우), 상미(서지혜)가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성장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이 드라마를 연출하는 한희 피디는 이전에 춤과 노래를 주인공 삼은 적이 있다. 단막극 〈고무신 거꾸로 신은 이유에 대한 상상〉, 미니시리즈 〈내 인생의 콩깍지〉에서 뮤지컬드라마라는 생소한 영역을 보여줬다. 〈회전목마〉 〈신입사원〉 등 정통 드라마를 거쳐 화려한 무대를 다시 찾은 그를 지난 3일 문화방송에서 만났다. 1·2편은 현란한 춤과 힙합 음악이 버무려져 화려했다. 영상은 세련되고 깔끔했다. 하지만 한희 피디는 100년 동안 인파 100만명이 몰린 휴양지에서 부대낀 사람처럼 초췌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어가요. 춤은 연기도, 찍기도 힘들어요. 대역도 불가능하고. 육체적 정서적 표현이 다 되어야 하니까요. 보통 춤 장면을 카메라 5대가 3번 정도 찍어요. 일일이 확인해서 동작별로 제일 나은 걸 고르고 이어붙여야 하니 미칠 노릇이죠. 그냥 드라마 1분짜리 만드는 데 1시간 걸린다면 이건 10시간이 드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춤·노래 장면 많지 않을 거예요. 음악드라마라기보다 갓 20살이 된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솔직히 춤을 많이 찍을래야 찍을 시간도 없어요.” 왜 굳이 음악과 춤을 택했을까? “15년 전 예능국에서 조연출을 했어요. 그때 뮤직비디오도 찍었는데 춤과 노래가 볼거리의 원형질이라고 느꼈죠. 가장 치열한 복마전이 벌어지는 곳이죠. 10대 후반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요. 하늘같이 떠받들다가 어느 순간 전화 한통 안 하는 곳이 가요계죠. 그래도 아이들은 무대가 마약 같다고 해요. 몇걸음만 더 올라가면 무대에 닿을 수 있을 듯한 아쉬움, 회한 이런 게 느껴지죠. 쇼비즈니스와 가수의 예술적 포부, 팬들의 욕망이 부닥치는 곳이 가요계이고 이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죠.” 〈오버 더 레인보우〉에는 캐릭터가 지닌 욕망을 긍정하는 시선이 있다. 희수는 댄서 혁주의 애인이지만 인기가수 렉스의 관심도 놓치고 싶지 않다. 혁주의 팔짱을 끼면서도 렉스에게 고양이 같은 눈빛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악당이 아니다. “나쁜 편, 착한 편이 확실히 나뉘면 훨씬 쉽죠. 하지만 치열하게 살다보니 경쟁자도 되는 거잖아요. 하다못해 렉스를 상품 다루듯 하는 프라이드 기획사 사장도 ‘걔(렉스)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 나만큼 걔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할 때는 이해가 되잖아요. 20살 평범한 사랑과 무대의 주인공, 모두를 갖고 싶은 욕망이 희수 안에서 부닥칠 수 있죠. 아버지까지 잃으면서 선택한 무대니까요.” 춤·노래 다 해야 하니 배우들에게 부담이 클 법하다. 하지만 김옥빈은 극 중 뉴질랜드 동포라는 설정을 감안해도 가끔 발음이 샌다. 지현우는 춤의 고수라고 하기엔 때때로 엉거주춤하다. 듀엣 ‘플라이 투더 스카이’의 환희에겐 첫 연기 도전이다. “김옥빈은 눈빛에 야망 같은 게 어리고 춤의 리듬을 타요. 환희는 일관성 있게 캐릭터를 끌고가는 힘이 있죠. 지현우도 옥빈이랑 나이키(한쪽 팔로 땅을 짚고 공중에서 다리로 나이키 상표 모양을 만드는 춤)를 성공했어요. 쉬운 일이 아니죠.” 캐릭터와 직업 세계에 대한 묘사가 꼼꼼하고 전개에 속도가 붙는데도 시청률은 7~8%를 맴돈다. “텔레비전이 나이 든 매체가 돼 가고 있죠. 30·40대 취향의 드라마가 잘 돼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선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나이 들면 고작 택할 수 있는 게 이사를 분당으로 갈까 일산으로 갈까 그 정도잖아요. 누구나 겪었을 시기니까 공감할 줄 알았어요. 저만의 착각이었나봐요. (하하)”

<신데렐라>의 봉만대 감독

“신음 소리만 낸다고 에로 영화가 아니듯 비명 소리만 지른다고 공포 영화는 아니다.” 성인 비디오 영화계를 주름잡다 극장용 성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과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용 에이치디(HD) 영화 〈동상이몽〉을 선보인 뒤 농담 반 진담 반 ‘에로 영화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봉만대(36·사진) 감독이, 이번에는 공포 영화 〈신데렐라〉를 들고 관객들을 찾았다. 〈신데렐라〉는 성형수술과 극단적인 모성애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들였음에도 애써 자극적인 비주얼과 효과음을 피해간 흔적이 역력하다. 에로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뿅점’(결정적으로 야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던 그의 취향과 신념이 그대로 반영된 듯도 하다. 봉 감독은 〈신데렐라〉를 ‘봉만대 식 공포 영화’라고 정의했다. “나는 에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에로보다 멜로를 중시했는데, 공포 영화에서도 공포보다 멜로 쪽에 무게를 뒀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공포 대신 슬픔을 느끼고 극장문을 나선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봉 감독이 ‘슬픔’을 유난히 강조하는 탓에, 〈신데렐라〉의 주요 축을 이루는 것도 ‘성형이 불러온 참사’보다 ‘성형외과 의사인 엄마(도지원)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깊은 슬픔’이다. 공포 영화를 만들어 놓고 공포보다 슬픔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생뚱맞기도 하지만, 이는 봉 감독 나름의 공포에 대한 정의가 반영된 결과다. 봉 감독은 “귀신이 무서운 건 머리카락이 길어서도, 피를 흘려서도 아니다. 슬픔을 간직하고 죽어서 한을 품은 게 무서운 거고, 그 한을 풀 때 공포스러운 거다. 슬픔을 뺀 공포는 ‘처키’이고, 〈신데렐라〉는 처키 식 공포 영화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시사회 뒤엔 ‘덜 공포스러움’을 아쉬워하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봉 감독은 “내가 그 정도 (비판에) 상처받을 사람이 아니다(웃음)”라며 단호했다. “사실 난 ‘에로 영화의 거장’보다 ‘에로 영화의 꼬장’이라는 별명으로 훨씬 더 유명했다. 공포 영화를 만들면서도 남들이 다 하는 뻔한 방식으로 무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잔혹한 비주얼을 되도록 피해 가고, 세지 않은 효과음으로도 공포감을 줬다는 점 등 새롭다고 평가해 줄 부분도 많지 않은가.” 〈신데렐라〉는 17일 전국 200여개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에로 비디오에서 에로 영화로, 다시 공포 영화로 보폭을 넓혀온 봉 감독이기에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하지만 그는 “나는 비디오 찍을 때도 한 작품 끝낸 뒤 바로 다음 작품을 찍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생길 때 다시 영화를 찍을 예정이고, 에로가 될지 공포가 될지, 다른 어떤 장르가 될지 나도 모른다”며 끝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