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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파리] 프랑스 영화의 현재와 미래는 여기에

지난 9월14일에서 18일까지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는 프랑스 영화교육의 요람인 국립영화학교 ‘페미스’의 개교 2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제가 열렸다. 페미스는 프랑스 고유의 교육 시스템인 그랑제콜로 영화와 오디오비주얼 분야의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립교육기관이다. 어려운 입학시험과 엄격한 나이 제한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입학생을 선발하는 이 학교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전공하려는 많은 영화학도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20년 동안 600여명의 인력을 양성했으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수아 오종, 아르노 데스플레생, 노에미 르보브스키, 세드릭 칸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페미스는 촬영, 조명, 음향 등 테크닉 분야를 중점적으로 교육하는 ‘에콜 루이-뤼메에르’(Ecole Louis-Lumiere)와 더불어 프랑스 영화교육을 주도하는 학교이다.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이번 영화제에서는 졸업작품 중 단편영화 20편과 페미스 출신 감독의 대표 장편영화 20편을 상영했다. 상영과 더불어 열린 토론회에서는 ‘현대 프랑스 영화계에 전문 영화학교가 끼친 영향’, ‘영화교육과 프랑스영화의 전망’ 등의 주제로 열띤 토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영화를 이끌어온 두 부류는 실험성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독학을 통해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 전문영화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직업영화인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이자 영화학자인 르네 프레달에 따르면 90년대 이후 페미스 출신의 감독들을 ‘내면주의’적 경향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정치·사회적 시선의 부재로 보여지기도 하며, 몇몇 감독들을 제외하고는 페미스 출신들의 진로는 텔레비전이나 광고 등으로 많이 향하고 있어 영화분야의 규격화된 엘리트주의적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또한 나오고 있다.

당신을 조롱하는 B급 컬트, <기묘한 서커스>

살면서 괴로운 순간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힘들었던 장면이 떠오를 때다. 기억 속의 나는 고통받는 처절한 피해자지만 종종 나의 탐욕이 그 결과에 도움을 주었을 경우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이때 비겁하긴 해도 손쉬운 정신적 해결책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에의 충동’이 있다. 상상에서나마 가해자에게 참혹하게 복수하거나, 나 자신을 자책의 구렁텅이로 빠뜨림으로써 정신적 위안을 얻는 것이다. 소노 시온 감독이 <기묘한 서커스>에서 발휘한 상상력을 빌려서 표현한다면, 가해자의 사지를 전기톱으로 자른 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시련을 당하도록 방치하고, 못난 나의 피부를 벗겨 집안의 도배지로 활용한다. 이것으로도 모자란다면 그 모든 기억의 기표를 환상의 환상의 환상… 이라고 무한히 미끄러트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다. 학교 교실의 교단에는 소설 <1984>에서 등장한 텔레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화면 속에서 훈계를 하는 교장 선생님은 학생인 12살 소녀 미츠코(구와나 리에)의 아버지다. 그가 딸을 탐하는 방식은 강압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데 구멍을 뚫어놓은 첼로 가방에 딸을 넣은 뒤 부모의 성교를 훔쳐보도록 한다. 미츠코는 이런 관음에 취해서 어머니 사유리(미야자키 마스미)의 자리를 탐한다. 질투심에 광분한 어머니가 사고로 죽자 미츠코는 아버지의 여자로 살아가지만 자책감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휠체어 인생을 살게 된다. 남성 권력의 장 안에서 조종되는 여성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러나 이상의 이야기는 영화 중반에 사유리와 같은 모습을 한 타에코의 소설 내용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미츠코는 휠체어를 탄 타에코의 어린 시절일까? 아니면 딸을 죽인 사유리가 자책감에서 자신을 딸로 치환한 것일까? 거듭되는 반전의 스릴감은 영화의 진행에 탄력을 준다. 노골적으로 남자를 밝히는 타에코가 정체불명의 출판사 직원 유지(이시다 이세이)를 만나면서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가족사의 미궁이 밝혀지는 듯하더니 현재도 현실, 꿈, 서커스의 사형대 사이를 거듭 평면 이동한다. 유지는 관객에게 조롱하듯이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꿈일까요?” 전작 <자살 클럽>에서 잔혹한 죽음에 현혹당하는 현대인을 비판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지의 질문은 가부장제를 감내의 숭고함으로 소비해버리는 풍조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진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독특한 코드의 아시아영화”라는 평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래 엽기적인 소재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A to Z [2]

Meryl Streep: 메릴 스트립 “미란다 프리슬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마나 마녀가 아니다. 나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모순되고 정의내리기 힘든 하나의 인간을 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원작의 미란다 프리슬리는 그저 냉혹한 악마의 캐리커처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화 속 미란다 프리슬리는 성공을 위해 버린 것들을 독한 마음속에 다잡은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 숨쉰다. 이는 시나리오작가 알린 브로시 매켄나의 능숙한 각색 덕이기도 하지만, 능숙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메릴 스트립의 능력이기도 하다. “메릴의 미란다 프리슬리는 코미디적인 잔혹함과 진실된 슬픔의 경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진다. 메릴이 지닌 엄청난 재능의 키포인트는 코미디와 드라마를 섞는 절묘한 능력이다.”(데이비드 프랭클 감독) Numbers: (출판) 기록들 2003년에 출간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6개월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전세계 27개 언어로 번역되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으며, 북미에서만 지금까지 140만권이 팔려나갔다. 한국에서는 책이 발간된 2006년 5월부터 대형 서점의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10월 현재까지 모두 40만부가량이 판매되었다. Original: 원작 원작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가뭄의 염전처럼 짰다. <하퍼스 바자>의 케이트 베츠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리뷰에서 로렌 와이스버거가 <보그>에서의 독특한 경험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앤드리아는 왜 그녀가 상사인 미란다 프리슬리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깨닫지조차 못한다. 그렇다면 왜 독자가 앤드리아를 존중해야 하는가. 왜 싸구려 스릴로 점철된 작가의 문장을 환대해야만 하는가.” <데일리 페이퍼>의 재닛 마슬린은 “비열한 비난으로 점철된 이 책은 작가가 문장을 가십으로 도배하지 않고서도 흥미진진한 내러티브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암시를 보여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난도질하든 독자들은 서점으로 달려가 ‘프라다’를 외쳤다. Prada: 프라다 전세계 패션계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 회사. 프라다는 1913년에 마리오 프라다에 의해 가죽을 취급하는 회사로 설립되었고, 사업을 물려받은 마리오의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가 1989년에 여성복 라인을 만들면서 지금처럼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프라다의 디자인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소하고 세련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이 이탈리아의 투스카니에서 이루어지는 프라다의 디자인과 생산 공정은 단일 운영 시스템으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프라다의 집념도 동대문의 장인들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 프라다는 샤넬과 함께 한국에서 짝퉁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레이블이기도 하다. Queer: 패션계의 게이 파워 톰 포트, 칼 라거펠트, 존 갈리아노, 마크 제이콥스, 지아니 베르사체, 돌체 & 가바나, 장 폴 골티에, 입생 로랑, 빅터 & 롤프. 패션 문외한들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남성 톱디자이너들은 (여성분들에게는 아쉽게도) 대부분이 게이다. 스트레이트 남자들보다 심미안이 발달한(혹은 그렇다고 알려진) 게이 남성들에게는 성정체성에 대해 언제나 관용적인 분위기를 제공해온 패션계가 가장 적합한 일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호사가들의 통설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미란다 프리슬리의 오른팔이자 앤드리아의 조력자인 나이젤(스탠리 투치)이 패션계 게이의 스테레오 타입을 흥겹게 캐리커처한다. Runway: 런웨이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걸어다니는 스테이지를 일컫는 말. 영국에서는 캣워크(Catwalk)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한다. Stiletto Heel: 스틸레토힐 일명 스파이크힐(Spike Heel)이라고도 불리는 스틸레토 힐은 하이힐 중에서도 가장 좁고 긴 뒤굽을 가진 신발을 일컫는 말. 1955년에 유명한 구두 디자이너 살바토레 페라가모에 의해 발명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는 스틸레토힐을 신고 딱딱거리며 돌아다니는 런웨이 직원들을 딱딱이(Clackers)라는 경멸조의 명칭으로 부른다. Television Series: 텔레비전 시리즈 2006년 10월12일, <폭스TV>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시트콤 시리즈로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시트콤은 2007년 중 방영될 예정이다. Underplot: 언더플롯(곁줄거리)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원작의 결줄거리들이다. 알코올 중독증에 걸린 앤드리아의 친구 릴리의 존재는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럼으로써 앤드리아가 <런웨이>를 그만두는 이유가 외부적 요소보다는 자아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그외 영화에서 사라진 원작의 흥미진진한 요소 중 하나는 패션계의 거두로 성장하기 위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미란다의 뒷배경이다. 이 같은 설정에 대해 원작자 로렌 와이스버거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한다. “나는 보수적이고 개혁적인 시너고그(유대교회당)를 골고루 거치며 성장했다. 특히 유대교가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끼친 영향은 이스라엘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Vogue: <보그>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유물론)도 아냐 羨望(선망)조차도 아냐. 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羨望도 아냐.’ 김수영이 67년에 발표한 시 에 따르면 <보그>는 잡지가 아니라 선망할 수도 없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토록 선망하기도 두려운 패션계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보그>는 1892년에 뉴욕 상류층을 대상으로 창간된 잡지다. 현재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러시아, 스위스, 독일, 그리스, 브라질,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한국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창간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패션잡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보그’는 팝가수 마돈나의 몫이다. 앤드리아가 “Strike a pose, Strike a pose”(포즈를 취해! 포즈를 취해!)라고 읊조리는 마돈나의 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수많은 디자이너 옷들을 갈아입으며 뉴욕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 는 영화 <딕 트레이시>의 비공식 O.S.T인 앨범 수록곡으로, 1990년 북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됐다. Working Girl: 워킹 걸 여성상사와 부하의 갈등을 다루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워킹 걸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88년작 <워킹 걸>은 증권회사에서 성공을 거두기를 원하는 비서 테스(멜라니 그리피스)의 성공담을 다룬 로맨틱코미디로, 세련된 비즈니스 우먼에 대한 선망이 가득하던 80년대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물론 <워킹 걸>은 성공을 획득하려는 여성과 여성상사의 대결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편견을 재생산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Xtra: 엑스트라, 카메오들 지젤 번천 외에도 패션계의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영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눈에 띄는 인물은 패션계의 거장 발렌티노 가바라니. 인터뷰에서 “나는 메릴 스트립의 열렬팬이다. 잠깐 나오는 카메오 출연이지만 정말 큰 영광”이라고 감흥을 표현한 그는, 미란다 프리슬리가 자선 파티에서 입은 드레스를 직접 만들었다. 패션쇼 장면에서는 미란다 프리슬리의 근처에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이 앉아 있는 모습이 슬쩍 지나간다. 또한 톱모델 알리사 서덜런드는 <런웨이> 직원으로, 브리짓 홀은 그녀 자신으로 잠시 스크린에 등장한다. 안나 윈투어의 후환이 두렵지 않은, 용맹한 카메오들이다. Yawp: 불평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대한 패션계의 불만은 영화가 패션계의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영화의 개봉 직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누더기들’이라는 기사를 통해 “도대체 시크함이라곤 없다”며 영화 속 스타일의 실패를 벗겨냈다. “가장 끔찍한 실패는 미란다 프리슬리의 의상이다. 지나치게 평범한 은행원 같은 동시에 그냥 예쁘기만(Pretty) 하다. Fabulous의 세계에서 Pretty로는 충분치 못하다.” <엘르>의 패션 디렉터인 앤 슬로위는 “이 영화는 패션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패션계 사람들이 어떨 것이라는 편견에 입각해 만든 작품이다. 캐릭터들의 의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완벽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에 영화 의상을 담당한 패트리샤 필드는 자신의 의상들이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라고 변호했다. “내 직업은 사람들이 잠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오락거리를 창조하는 일이다. 패션계 사람들이 현실을 원한다면, 역사채널이나 볼 일이다.” Zillionaire: 억만장자 200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패션 디자이너들의 평균 연봉은 4만8530달러(약 4600만원)다. 연봉 순위의 중간 50%에 해당하는 디자이너들은 3만4800달러에서 7만3780달러 정도를 벌고, 가장 연봉이 낮은 10%의 디자이너들은 연간 2만4710달러를 받는다. 연봉 피라미드의 최상위 10%에 선 톱디자이너들이 1년에 벌어들이는 평균 수익은 10만3970달러(9800만원). 이런 디자이너들의 연봉을 올렸다 내렸다 할 힘을 쥔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연봉은 무려 200만달러다. 한해 20억원을 패션쇼와 파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트렌트와 디자이너를 개발하는 조건으로 받는 셈이다. 물론 윈투어에게 무료로 지급되는 의상비와 호텔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제3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개막작 <편지>의 다마야마 데쓰지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나나>에서 가장 만화 같았던 순간은 하치(미야자키 아오이)와 다쿠미(다마야마 데쓰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도쿄 생활에 지쳐 어깨를 늘어뜨린 하치가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자, 다쿠미가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건넨다. “하치, 어서 와.” 카메라는 다쿠미를 클로즈업으로 잡고, 시간은 그 위에 잠시 멈춰선다. 평소 블랙스톤즈 멤버 중 베이시스트 다쿠미를 좋아했던 하치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만화 같던 환상이 현실로 재현되고, 도쿄의 무게는 잠시 프레임을 벗어난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의 눈을 닮은 배우 다마야마 데쓰지는 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하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그의 속눈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큰 키와 가는 선, 또렷한 눈동자는 그를 종종 음악과 만화 속 프레임 안에 데려다놓기도 했다. <나나>의 베이시스트, <체게랏쵸>의 보컬, 뮤지컬 영화 <사랑을 노래하면>과 영화 <역경나인>(시마모토 가즈히코의 동명 만화가 원작)의 야구부 주장 등 그는 일견 일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어떤 모델이었다. 특히 인지도가 낮은 한국에서 다마야마 데쓰지는 과도하게 가공된 역할로만 기억되고 있다. 올해로 27살, 다마야마 데쓰지는 모델로 연기를 시작한 배우다. 고등학교 시절, 모델 제의를 받고 텔레비전 CM을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중학교 때 활동했던 육상부 경력이 신체적 조건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당시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연기에 대한 의식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는 이번 영화 <편지>를 통해 배우란 직업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내가 배우다’라는 기분은 글쎄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들었던 것 같아요.”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한 <편지>는 죄와 벌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다. 형 다케시는 동생 나오키의 학비를 위해 절도와 살인을 저지른 뒤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형이 살인자라는 사실은 이후 동생의 생활을 침범하고 동생은 세상의 차별에 꿈과 미래를 포기한다. 여기서 다마야마 데쓰지가 연기한 역할은 사형수 다케시다. “시나리오를 받아본 순간, 이 영화가 하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영화가 가해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죠. 다케시는 절도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지만, 동생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형이기도 해요.” 이는 곧 살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글쎄요, 이번 영화 이후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됐어요. 살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놈은 가해자고, 착한 놈은 피해자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과 동생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다마야마 데쓰지의 모습은 사실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형무소 안에서의 생활도 그의 얼굴과 몸보다는 목소리로 대체된다.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그래서 최대한 목소리 톤을 밝게 가자고 생각했죠. 나오키는 세상의 차별과 싸우느라 목소리가 어둡잖아요. 동생의 내레이션과 대조가 되기 위해선 최대한 밝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영화를 위해 록스타 다쿠미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야위어 보이기 위해 몸무게도 4kg 감량했다. 심지어 영화를 촬영하면서는 “입 속에서 죄수의 옷 색깔 벌레들이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화적 체험”이다. 다마야마 데쓰지는 자신의 외모를 조금씩 지워나가며 일종의 모험을 시도했다. “제 자신은 제가 프로듀스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다마야마 데쓰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제 희망이죠. 모델을 그만두고 연기만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역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어요.” 그는 올 여름 방영됐던 드라마 <누구보다도 엄마를 사랑해>에서는 게이로 출연하기도 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최근 다마야마 데쓰지를 다마데쓰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배우가 애칭을 갖는다는 건 어느 정도 인기스타가 됐다는 지표다. 아직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연기보다는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의 미래를 긍정하고 있다. “특정 역할이 하고 싶거나, 특정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스스로에 대한 컨트롤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조금은 뒤늦은 스포트라이트지만 그의 레이스는 전혀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

[오픈칼럼] 그림 감상법

아내의 보스에게 선물을 받았다. 그림이다. 40인치 텔레비전 정도 크기 될까. 기껏해야 그림이라곤 드문 외국 출장 때 미술관에서 사오는 아이 손바닥만한 명화 마그네틱이 전부였으니 호수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장님 코끼리 만지듯 그림을 부여잡고서는 ‘이건 무슨 뜻일까’, ‘저건 무슨 뜻일까’ 보고 있다. 벽에 못 하나 제대로 못 박으니 그냥 소파 위에 올렸다가 TV 뒤에 놓았다가. 그림의 운명은 기구하기도 하지. 카산드라 통신에 따르면 올해 우리 부부가 삼재수라고 한다. 아내는 돈 많은 근사한 남자가 유혹을 하는데 거기 넘어갈 거라고 했다. 또 소문통신에 따르면 보스의 매우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다면평가에서 아내가 1위였다고 한다. 아내가 직장에서 질투든 유혹이든 둘 중 하나는 받을 것 같다. 어쨌거나 ‘둥지’라는 이 그림, 정확히 말하면 판화는 심신에 아주 큰 평화와 안정을 준다. 어제까지 아내와 나는 ‘둥지라는데 새는 어디 있는 거야’ 하면서 그림 속을 장님처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림만큼 좋은 선물은 없는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이 평생 뜻을 같이한 정승혜, 조철현 대표에게 남은 평생도 같이하자며 자화상을 줬다는데, 또는 황지우 시인이 연초면 지인들에게 손수 그린 엽서를 보낸다는데 그림만큼 우정을 전달해주는 선물도 없는 것 같다. 새삼 아내의 보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다음엔 조금 더 알아보기 쉬운 그림을 선물로 받고 싶은 소망이 뭉게뭉게 떠오른다만). 사랑하는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서 앨범으로 선물하거나, 아름다웠던 순간을 붙잡아서 단편영화로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당신의 애타게 아름다운 순간을 캡처한 jpg 또는 동영상 파일이랍니다, 하고 틱, 클릭을 해서 메일로 보낸다면 거기엔 온기는 조금 없을 것 같다. 그걸 만드는 과정은 따스했을지언정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미디어는 조금 춥게 느껴진다. 자신의 마음을 쏟아서 그걸 붓이나 연필로 옮긴 뒤 종이 위에 꾹꾹 누르고 그걸 전했을 때 상대방은 꾹꾹 누른 마음속에 피어나는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 아닐까. 돌이켜보니 옛날 애인들은 참 잘도 그랬던 것 같다. 낙엽부스러기를 손수 골라, 그러니까 가을의 살점을 한잎 떼어, 정성껏 육필로 시를 옮겨 적은 그 갈피 사이로 얌전히 옮겨놓은 뒤, 그걸 전해줬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또 나도 연필로 끼적끼적거린 그림이나 시를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쉬운 건 그 기억들을 박제하지 않고 그대로 다 날려버렸다는 데 있다. 아마 오해 때문에 태우기도 하고, 새 애인에게 들켜서 에드거 앨런 포처럼 벽 사이에 던져넣고 콘크리트를 바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는 무슨 선물로 답례를 하나. 참다 못한 아내가 드릴로 못을 박아 그림을 걸자고 못을 박는다. 드릴이 뭐지? 먼 이국의 동사 변화처럼 들린다.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주인을 만나 그림은 거실에서 작은 방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그나저나 둥지 속의 새를 찾아야 할 텐데.

가족의 재구성, <트랜스아메리카>

‘트랜스아메리카’의 뜻에는 남자에서 여자가 되려는 트랜스섹슈얼 브리(펠리시티 허프먼)의 이야기라는 뜻도 있고 브리가 아들 토비(케빈 지거스)와 뉴욕에서 LA까지 횡단한다는 뜻도 있다. <천하장사 마돈나>나 <헤드윅>처럼 남자가 여자가 되기 위해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에, 아버지와 아들의 뜻밖의 만남이라는 이야기를 더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드라마도 극적이지만, 부정하고 싶은 자기 과거와 어떻게 화해하고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이야기는 더 극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 또는 주인공 브리는 끝까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한다. 남자의 몸 안에 갇힌 것에 대해,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에 갇힌 자신의 삶에 대해 분노도 설움도 터뜨리지 않는다. 그건 여자가 되기 위해 고심하는 브리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브리는 찔끔, 살짝 울고는 눈물을 손등으로 톡톡 훔친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오동구처럼 옥상에서 카세트를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광란의 스테이지 매너를 보여주는 헤드윅을 흉내내기엔 브리는 너무 내성적이다. 욕을 할 줄도, 주먹을 휘두를 줄도 모른다. 털을 제때 안 깎은 건 아닌지, 제때 여성 호르몬을 먹지 않아서 가슴이 작아진 건 아닌지 그게 먼저 문제가 된다. 나이가 들어서 과격함이 준 것도 있겠지만 그 남자, 천생 여자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것이다. 오동구나 헤드윅의 독기도 없고 이해해주는 가족도 없고 번듯한 직장이나 벌어놓은 돈도 없는데 이 연약해빠진 남자가 과연 험난한 세상도 뚫고 수술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게다가 아들이랍시고 머나먼 동쪽 끝 뉴욕 구치소에서 연락을 한 망나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배짱은 있는지. LA의 한 멕시코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브리는 평생 기다려온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짬날 때마다 집에서 텔레마케팅을 하는 브리는 운도 없게 업무 중에 뉴욕 구치소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던 전화 한통을 받는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상담치료사인 마가렛은 브리가 아들을 뉴욕까지 가서 만나야 하며 아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레즈비언’ 시절, 잠깐 남긴 사랑의 흔적에 대해 브리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가렛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남자 스탠리. 현재는 여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섹슈얼 브리. 미래는 아마도 여자 브리, 그리고 아마도 토비의 아빠. 수학에 가까운 복잡한 삶이다. 브리는 수줍고 내성적이며 겁이 많지만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하나씩 답을 던진다. 아버지-남자-스탠리 안에 갇혔던 어머니-여자-브리의 진심을 꺼내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가치를 횡단하지는 않는다.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라는 정치적 주제만을 묵직하게 밀고 나가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가족을 재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영화는 더 예민하다. 가족이 결합한 뒤 모든 게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당연한 과정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타인이었던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며 거기엔 어떤 새롭고 다른 가족의 도덕이 필요한가를 모색한다. 전혀 알지 못하던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브리의 젊은 날 남자 모습, 또는 브리의 성격만 본다면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와 퍽 닮았다. <돈 컴 노킹>이나 <브로큰 플라워>의 쿨하고 유연하지만 부자인(그래서 쿨하고 유연한지도 모른다) 아버지들과는 거리가 있다. 아버지다운 외양이 전혀 없다는 것, 아버지인데 아버지라고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어느 자식이 여자 아버지를 믿겠는가), 아버지 노릇을 할 돈도 없고 거기에 대해 미안해하지도 않는다는 게 브리의 다른 점이다. 게다가 보수적이다! 술, 담배 등과 거리가 멀며 아들에게 교회 전도사 흉내를 냈지만 흉내를 못 낼 것도 없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들은 난잡하며 제어하기 어렵고 충동적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코미디가 아닐까 싶지만 그건 아니다. 감독은 궁금증을 던져 관객을 낚고는 끝까지 그 긴장을 초보답지 않게 신선하게 밀고 가는데 그 궁금증이란 아버지가 과연 자식에게 진실을 솔직하게 전달하고 좋은 사이가 될 수 있겠냐는 거다. 생물학적인 남자(무엇보다 허리 아래 달려 흔들리는 그 묵직하고 무거운 종루)를 자식과 세상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수술실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집 밖을 벗어나자마자 브리에게는 난감한 과제가 연달아 달려든다. 호르몬이 떨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돈이 떨어져서 한방에서 자야 할 때는? 뱀이라도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벌판에서 우아하게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는 있을까? 상냥한 인디언 남자 캘빈이 브리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 이 리스트는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공감할 만하다. 이 공감에는 이유가 있다. 여자가 되고플 뿐인 가냘픈 아버지 역의 펠리시티 허프먼이 조용히 우리 내면 속에 스며들면서 이 영화는 볼만한 것이 된다. 아들이라는 작자의 한심함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았을 때, 뱀에게 물릴까봐 막대기로 정신없이 수풀을 뒤지고 있을 때, 아들에게 자신의 생물학적 기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우리는 토비가 아버지를 어서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소망하게 된다. 아니, 나아가서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아버지라는 타이틀에 대해 어쩔 줄 몰라하는 수많은 아버지들의 곤경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토비에게 섣불리 강요하지도 않고 호의를 내세워 부담을 주지도 않으면서 친구로 만드는 브리의 진심은 그 반대편에 있다. 거기는 여자, 남자 또는 아버지, 어머니 같은 계급장과 상관없는 마음의 영역이다. 서툴게도 토비가 그런 마음에 대해 감동한 나머지 성적인 대접(토비식 효도)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웃음을 머금게 된다. 브리의 그런 마음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불씨라는 걸 토비도 알고 우리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건 가족은 무엇이고, 가족에게 필요한 건 뭔지 알기 위해 떠나는 ‘트랜스패밀리’ 영화다.

한국영상자료원, 예산 및 인력 확충 시급

“한국영상자료원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 영화계 주요 단체들은 최근 ‘조선희 신임 한국영상자료원장에게 바란다’는 공개서한을 통해 영상자료의 체계적 보존 및 활용을 위해서는 예산 및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 단체들은 공개서한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의 2007년 종합영상아카이브센터로의 이전 예산이 국고가 아니라 “실행시기와 규모가 불투명한” 영화발전기금으로 편성되고, 시설 확장에 따른 소요 인력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 호주는 230명, 중국은 베이징에만 311명, 러시아는 600명, 베트남은 160명, 영국은 150명, 북한은 250명의 인력이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영상자료원은 고작 직원 수가 29명에 불과하다”면서 필름 복원장비는 물론이고 현상, 인화시설, 텔레시네 등 기본 장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영화계 단체들은 “많은 영화인들과 국민들이 영상자료원의 존재를 아예 모르거나 안다 할지라도 영화필름을 보존하는 창고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며, 한국영상자료원이 적극적인 마케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영상자료의 수집과 보존에 그치지 말고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창구와 아이디어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 이전 뒤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더했다. 국내 장편 극영화를 중심으로 프린트를 발굴하고 상영하는 운영 방식 또한 도마에 올랐다. 4개 단체들은 국내외 시네마테크와의 연계를 통해 그동안 “아카이브의 사각지대로 존재했던 독립영화, 해외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부문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면서 “한국영상자료원의 힘만으로 부족하다면 언제든지 저희 영화계에 손을 내밀어달라”고 말했다.

마틴 스코시즈 작품에서 발견되는 차용·참조·오마주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프로젝트에 대해 아직까지 파라마운트가 관심을 갖고 있을 시절,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와 마이클 아이즈너가 마틴 스코시즈를 찾아와 나눴다는 대화의 한 토막. 지지부진한 상황에 낙담해 있는 스코시즈에게 두 사람은 몇개의 대본 중 하나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베벌리힐스 캅>, 이걸 해볼 생각은 없어요?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을 맡기로 한 영화인데….” 그러자 스코시즈가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물 떠난 물고기의 이야기’라며 “왜 있잖아요. 촌 동네 경찰이 뉴욕에 와서 맹활약한다는 이야기 말이에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스코시즈의 (퉁명스러웠을) 대답. “그건 돈 시겔의 <쿠간의 협박>이잖아요.” 그러자 그들의 (당황스러워했을) 답변. “아니라니까요, <베벌리힐스 캅>이라니까요.” 그 대화의 깊은 속뜻이야 어찌 됐건, 물 떠난 물고기의 이야기라는 그 말에 스코시즈는 적어도 68년까지 올라가 돈 시겔의 <쿠간의 협박>을 기억해내고야 만다. 스코시즈는 어떤 식으로건 자기 영화를 영화사의 명맥 안에 위치지으려고 한다. 이건 어떤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저건 어떤 영화의 부분을 참조한 것이며 등등 수많은 예를 든다. <분노의 주먹>의 주인공 제이크 라모타를 설명할 때는 “(<워터 프론트>의 주인공) 테리 말론을 연기하는 말론 브랜도를 제이크 라모타가 연기하고, 다시 이를 드 니로가 연기한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일단 관객을 잡아채놓고 종종 무심히 사라져버리는 보이스 오버와 거기에 맞춰 사용되는 정지 화면(예컨대 <좋은 친구들>의 오프닝)은 트뤼포 영화 <쥴 앤 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화면 구성이 아니라 플롯 자체를 참조한 경우도 있다. <에비에이터>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과 포개어져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등 위험이 예고되는 장면마다 그의 영화에 끈질기게 등장하는 붉은 색조의 화면들은 어린 시절 본 마이클 파웰의 영화 색감에 영향을 받아 평생을 갖고 가는 것 중 하나다. 스코시즈가 차용한 것 중에서 인물에 관련되어 가장 유명한 것은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가 사실은 존 포드가 만든 웨스턴 <수색자>의 주인공 이산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택시 드라이버>의 방황하는 고독자 트래비스는 조카를 찾아 황야를 헤매는 이산의 그 허망한 표정에 기대어 생각하게 된다. 이번 작품도 그렇다. <디파티드>의 촬영감독, 프로덕션디자이너 등 스탭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스코시즈는 하워드 혹스의 영화 <스카페이스>(스코시즈의 전작 <에비에이터>의 주인공 하워드 휴스가 1932년에 제작한 갱스터영화)에 존경을 바친다는 뜻으로 영화 여기저기에 X(문자라기보다는)무늬를 그어놓았다고 한다. 촬영감독 마이클 볼하우스에 따르면 “그건 죽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스코시즈가 원했다”는 것이다. <스카페이스>는 유명한 갱 알카포네의 별명이자 그의 얼굴에 난 십자 상처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하지만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콜린(맷 데이먼), 두 남자의 관계를 놓고 생각할 때 <스카페이스>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참조 영화가 한편 있다. 스코시즈의 말대로 <디파티드>가 한편으로 “믿음이 없는 것”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빌리가 마약 중독자를 찾아가 예수가 그려진 액자로 그를 내리칠 때 텔레비전에서는 영화 한편이 잠깐 흘러나오는데, 그건 존 포드의 1935년작 <밀고자>다. 친구를 밀고하여 팔아먹은 주인공 기포가 교회에 들어와 십자가에 걸린 예수상을 향해 양손을 뻗치고 “프랭키! 프랭키! 네 어머니가 날 용서하셨어”라고 슬프게 부르짖으며 죽어가는 라스트신이다. 아마도 빌리와 콜린이 나누어 가진 ‘밀고’라는 모티브에 대해 스코시즈는 그런 식으로라도 또 한번 부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게다가 존 포드는 아일랜드 혈통의 대표적 감독이 아니던가. 사실은 그 밖에도 심증이 가는 표식들이 몇개 더 있긴 하다. 국장 이름이나 편지봉투에 쓰이는 시티즌이라는 글자는 확실히 오슨 웰스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오슨 웰스에 대한 스코시즈의 경외어린 말들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렇다. 오마주나 참조가 실상 영화의 질을 좌우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의 영향 아래 놓여 살아가는 스코시즈는 그걸 그만둘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아주 특별한 손님>의 이윤기 감독 인터뷰

이윤기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은 전작 <여자, 정혜> <러브토크>보다 비균질적이면서 다층적이다. <여자, 정혜>와 유사한 배경 아래 있지만 다소 건조해 보였던 그때의 영화적 표현에 비해 훨씬 더 정묘한 화음을 갖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보경의 하룻밤 이야기는 의문투성이의 구조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가능한 자기 회복의 조짐을 보이며 끝을 맺는 데까지 이른다. 게다가 영화의 중반부에는 그런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을 거라 상상하기 힘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우울한 분위기까지 끼어든다. 건조하면서도 직선적인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소설 <애드리브 나이트>와는 달리 <아주 특별한 손님>은 명백히 다른 차원에서의 영화적 중층을 만끽하게 한다. 이윤기 감독은 세 번째 작품에서 확실히 한발 더 디디는데, 그가 말하는 “생경함”이 바로 그 힘이 아닐까 싶다.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상했나? (웃음) 스탭들은 말이 없고, 배우들은 좋아한다. 아마 다들 조금 생경한가보다. -제작 기간이 길지 않다. =아무래도 예산을 작게 잡으면서도 내가 쓰고 싶은 스탭들을 쓰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프로덕션 기간을 길게 잡으면 많이 늘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무조건 정해진 기간 안에 맞추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경우는 큰 보수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배우나 스탭들에게도 믿음을 주는 차원에서 그런 걸 조건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실험적인 면도 있다. 그전보다 더 빡빡한 상황으로 한번 가보자 하는 거였다. 하룻밤에 벌어지는 일을 몇달씩 걸려 찍는 건 안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순간적 시너지’, 이런 게 가능한지에 대한 실험도 있는 거다. -어떤 제안을 받아 시작한 영화인가. =제안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지난해 말쯤 <러브토크> 끝내고 쉴 때 소설을 봤다. 단편소설집 하나가 재밌더라. 딱 내 스타일이었다. 그게 다이라 아즈코의 <멋진 하루>라는 단편집이었다. 그 소설집 속에 있는 서너개 정도의 단편을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들고 영화사에 가서 기본 예산으로 하자고 말하기에는 좀 평이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영화적으로 가능성있는 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단편 <애드리브 나이트>였다. 그즈음 KBS SKY쪽에서 창사 특집극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때 마침 쓰고 있던 다른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아 연기시킨 때였다. 그때쯤 제안이 들어온 거고 내가 거기에 오히려 역제안을 한 거다.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라면 고려해보겠다고. 그리고 그게 영화로 이어진다면 <애드리브 나이트>를 갖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렇게 이 영화가 시작됐다. 올해 6월쯤이었다. -원작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 =사실은 작위적 설정,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그래서 더 영화적인지 모르겠다. 그 단편집에 있던 소설들 모두 어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주어지고, 주변 인물들이 바보 같고, 상황에 그냥 이끌려가다가 나중에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낸다. 살냄새, 인간냄새가 나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거기에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주어지니, 그 소재를 갖고 내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영화적인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어떤 기묘함 같은 것. -원작과 몇 가지 차이들이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를 말하자면, 일단 소설과 달리 주인공이 이름을 밝히는 시점을 마지막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건 중요한 차이다. =그건 <여자, 정혜> 때 시도했던 것과 비슷한 의도다. 특히 마지막에 정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말이다. 이번 소설은 그런 상황을 주지 않지만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가진 느낌이 바로 그런 거였다. 자기 존재의 소중함이랄까.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주인공이 느끼게 되는 것 말이다.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 같다고 느끼는 그런 종류. 그게 <애드리브 나이트>가 담고 있는 의도는 아니지만, 그 소설을 보는 내 느낌은 그랬다. 그 여자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 것이 영화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야기상으로도 뒤가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겠지만, 여자주인공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많이 받아왔다. =비난도 받았고…. (웃음) -(웃음)호평이 있으면 비판도 있을 수 있으니까. 어쨌든 세 번째인 지금까지는 여자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을 이어가고 있다. =왜 공교롭게 여자여야만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데, 내가 선택한 소재가 여자가 주인공이어서 그런 거지, 꼭 여자여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남자가 더 섬세하고 여린 캐릭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늘 주장하는 건 내 영화 속 캐릭터는 비겁하거나 물러나는 여자들이 결코 아니라는 거다. -말이 나온 김에, 김지수나 박진희는 그전에 나온 그들의 다른 역할보다 이윤기의 영화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배종옥은 연기 경험이 많고, 또 양식적인 연기에 숙련된 배우라는 점에서 제외한다 하더라도, 금방 말한 두 사람은 각각 <여자, 정혜>와 <러브토크>에 나오면서 완전히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들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기에 이런 성과가 나왔는지 궁금하다. =경우마다 다르긴 한데, 김지수는 그전에 나온 텔레비전 드라마하고는 다른 메커니즘의 연기를 했던 거고, 영화로는 내 작품이 첫 번째니까 오히려 그 뒤에 나온 영화하고 비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내가 특별히 뭔가를 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내가 캐릭터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이 캐릭터의 처지를 가능한 한 많이 이해하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상기시켜주는 것 정도다. 박진희는 영화를 쭉 했지만 금방 지적한 대로 <러브토크>에서의 역할 같은 걸 한 적은 없다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이 기회가 없어서 발견을 못하는 자기의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진희는 내 영화를 통해서 그런 걸 발견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그럴 때는 김지수 경우처럼 내가 다시 적당히 뒤로 빠져서 주인공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 정도다. 굳이 노하우라면 상황만 이야기하고, 뒤로 물러나서 그 사람이 빠져들기를 기다리는 거다. -한효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나. =앞의 배우들에 비하면 신인에 가깝고, 이런 역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친구 아닌가, 너무 여고생 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는데, 실제로 이야기를 해보니까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운 친구였다. 어떤 반경으로 가더라도 이 친구가 따라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효주는 그전 영화에 나왔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배우처럼 보였다. 다른 캐릭터를 맡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상 자체를 완전히 다른 무엇으로 보이게 한다는 뜻에서 그렇다. =다른 주인공 여배우들에게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절대 예쁘게 보일 생각은 하지 마라, 이번에 너 영화 보면 아마 기절할 거다, 너는 전혀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고. -여배우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하나. =그렇다. -“이번에는 전작에서 보지 못했던 명랑함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현장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명랑함이란 기이한 유머 혹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주는 웃음 같은 것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그건 확실히 전작들하고 다른 측면인 것 같다. =그렇다. 일반적인 명랑함을 내가 할 이유는 없는 거고. 내가 여기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말한 대로 기묘한 아이러니나 사람들에게 흘러나오는 너털웃음으로 갈 수 있는 상황들이다.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 죽는 걸 많이 경험했는데 그때마다 가장 슬픈 순간이 코미디 같았다. 가장 진지할 때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그런 명랑함이라면 괜찮겠다 생각한 거다. 웃음 때문에 쓸쓸함이 느껴질 수 있는 그런 기묘한 불균형 같은 것 말이다. 스토리는 하나로 관통되지만, 영화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완전히 다른 영화. 나는 현실을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한다. 현실 자체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에는 미스터리 버전이고, 어느 순간에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가 싶을 때가 있고,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쓸쓸해지는 거다. 이렇게 이번 영화가 세 등분으로 가면 되겠구나 했다. -의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시작을 항상 핸드헬드로 한다. 움직이는 어떤 상태라는 것이 본인에게는 끌리는 무엇인가보다. 덧붙이자면, 세편 다 주인공이 거리에 서서 끝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네. 야외에서 어정쩡하게. -어정쩡하다는 말을 좀더 미학적으로. (웃음) 거기에 분명히 어떤 끌림이 있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그런 그림이 자꾸 떠오른다. 영화를 시작할 때는 마지막 장면 구성부터 생각한다. 그게 항상 거리다. 주인공 혼자 있는 느낌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도시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가장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랄까. 이번 건 특히 보경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그때 쓰이는 핸드헬드는 어떤 의미인가. =핸드헬드에는 몰입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작할 때 핸드헬드를 하는 것이 내게는 몰입도를 준다. 이번에는 처음에 그 몰입도를 주고, 집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어느 순간 픽스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핸드헬드가 된다. 그건 의도가 있다. 첫 시퀀스는 핸드헬드, 중간 시퀀스는 픽스, 마지막은 다시 핸드헬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중간 상황은 관객이 관조적인 느낌으로 보았으면 싶었고, 보경이 일상에서 탈피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은 관객이 보경에게 몰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감독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세개의 시퀀스를 따라서 촬영 기법도 세 등분된 거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정박되어 있던 주인공이 지리적 이동 내지는 이탈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형성된다는 건 세 번째 이어지는 테마다. =그러게. 항상 그렇게 되네. (웃음) -아까 여자 캐릭터에 대해 물었는데, 남자 캐릭터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뭐랄까 여주인공의 상대역으로 굉장히 순정한 남자들 혹은 맑은 남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령, 여자들이 어렵고 피곤하지만 당당하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남자들은 순박하고 순정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항상 맺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데 조금만 잘못되면 어떤…. =도식화된 연결…. -그렇다. 하지만 여하간 지금까지는 그걸 밀고 나가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남자들이 이상향이라고 생각해서 그린 건 아니다. 그 남자들은 여주인공 스스로의 순수를 일깨워주는 대상에 가깝다.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말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내 영화 속의 그런 남자들은 현실에서 바보 소리를 들을 거다. 캐릭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건 일종의 도구다. 여주인공들의 삶을 일깨워주는 도구. 그래서 실제로 그들을 로맨스로 연결시키지는 않지 않나. -이윤기의 영화에서 로맨스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건, 사랑을 한다는 것이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사랑하는 자기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연애담이 완성되기보다는 그 상태에서 여주인공이 어떤 징후나 조짐만 얻고 자기의 길을 가는 동기가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 태생적으로 로맨스로 달려가는 영화가 아닌 거다. 또, 조짐이라는 것이 이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 중 하나인 거고. 이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삶을 바꾸는 방식을 선택할 때 영향을 주는 수백 가지 중 하나가 남자인데, 어쨌든 사람이니까 가장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거다. 왜 꼭 순정적인 남자가 나와서 이 여자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 가느냐, 지나치게 관습적이고 도식적인 것 아니냐, 그런 걸 많이 의식하긴 하지만 분명히 그건 아니다. -촬영을 하면서도 완성된 이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생경하다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그랬다면 성공인 것 같다. =그런 쪽의 만족도는 확실히 있다. 도대체 이걸 어느 범주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내 의도에 맞는 것 같다. 어느 범주에도 안 들어가는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작의 생경함보다 영화의 생경함이 훨씬 더 분명한 것 같다. =이 스토리라면 <여자, 정혜> 때의 이야기를 또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다르게 할 수 있겠구나 한 거다. <여자, 정혜>를 하고, <러브토크>에서 좀 다른 시도를 했다면, <여자, 정혜>로 다시 돌아가되 완전히 다른 톤의 영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자, 정혜>와 유사하지만 또 다른 버전이다. 정혜가 자기 자신의 슬픈 궤적을 따라간 거라면 이번 주인공 보경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어느 한 여자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사실은 순간이나마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일지라도, 오히려 그럼으로써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받아들이고 되찾는 것이다.

이병헌과 수애의 기기묘묘한 눈빛 <그 해 여름>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이 휘둥그레져 되묻는다. “그러니까 저기에 사람이 가 있다는겨?” 호롱불로 밤과 어울리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처음 텔레비전을 구경하던 날, 사람들은 암스트롱이 달을 거니는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친다. 좌중의 놀라움은 젊은 처자의 천연덕스런 질문으로 정리된다. “그럼 달도 미국땅이 된 겨?” 전깃불을 과학의 최대 수혜처럼 감지덕지할 때, 누군가는 우주선을 띄우는 놀라운 불균형의 시대, 1969년. 예컨대 박정희가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누리려고 헌법을 멋대로 뜯어고치려 할 때, 대학생들은 별이 쏟아지는 밤에 미팅하랴, 계몽과 봉사 정신으로 농촌을 누비랴, 삼선 개헌 반대 데모를 벌이랴 분주하다. 권력은 젊은 반역자들을 간첩단 같은 조직 사건으로 엮어 시대를 훈육하곤 했다. 이런 혼돈과 불균형이 인간의 미세한 운명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한들, 그러니까 사랑의 아름다운 여백을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한들 믿지 않을 수 없다. 석영(이병헌)과 정인(수애)의 10년 같은 10일, 아니 일생을 건 10일의 사랑은 그래서 가능하다. 10일 이후의 긴 여백을 채우는 건 그들의 순수가 아니다. 미스터리 같은 시대와 미스터리 같은 사랑에 어울리는 건 미스터리 같은 인물이다. 석영은 삐딱한 대학생이다. 학내 집회의 한구석에 앉아 있긴 한데 매우 불편해하는 모습이다. 구호와 손을 내지르지만 힘이 담기지 않는다. 여대생들과 집단으로 어울리는 미팅의 한구석에 앉아 있긴 한데 심드렁하다. 으리으리한 부촌의 골목길을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다 지엄한 아버지를 만나는데 어딘가 반항적이다. 석영이 운동권이 작당한 농촌봉사활동에 갑자기 뛰어드니 운동권 친구 균수(오달수)가 놀랄 만하다. 모기와의 사투로 첫밤을 꼬박 샌 석영이 ‘나, 서울로 돌아갈래’라고 결론짓는 건 타당해 보이는데 정인(수애)의 미스터리가 그 발길을 잡는다. 운치있는 폐가에서 뒤죽박죽 음정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갸우뚱한 국민체조로 가냘픈 허벅지를 드러내며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정인을 목도한다. 석영에게 환한 미소를 선사하는, 운명적인 마주침이다. 정인은 당당하고 순백하다. 서울서 온 대학생들 앞에서 어설픈 노래와 춤을 당당히 내지르고, 도서관 사서임에도 <경아의 꽃을 꺾은 남자> 같은 ‘빨간 이야기책’을 마을 어른들에게 서슴없이 낭독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가족도 없다. 정확히는 부모가 월북해버렸다. 자유로운 영혼의 부자 대학생과 산골의 신비스런 고아 사서가 어울리는 공간은 순수해야 할 것이다. 비록 글을 읽지 못하는 마을 이장이 고집스럽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풍경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고마운 전깃불이 자식을 송장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수내리 산골은 동막골을 닮았다. 찌든 가난이나 매서운 증오의 기운이 없다. 농활 대학생들과의 갈등 같은 긴장감도 없다. 1969년은 그랬을지 모른다. 석영의 절친한 친구 균수가 운동권이기는 하지만 이념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그 시대의 순수일 수 있다. 혹은 감독의 순수일 수 있다. 균수가 반드시 이념적일 필요는 없지만 코믹해야 할 필연도 없다. 이 지점에서 오달수의 균수는 <그 해 여름>의 이상한 단추가 된다. 독신으로 평생을 보내는, 멋있는 교수 석영의 과거를 좇아 액자 구조를 만들어가는 방송국 김 PD(유해진)과 방송작가 수진(이세은)보다 더 기묘한 자리에 놓인 캐릭터다. 오달수의 균수(가 벌이는 코믹)는 <그해 여름>의 순수가 탈색된 것이라는 흔적이다. 석영과 정인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태생적 테두리(말하자면 계급적 신분)에 초연한 순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탈색된 순수라기보다 21세기의 젊음과 소통하기 위한 고육지책처럼 보인다. 석영이 유일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자본의 아버지는 그의 자유로움을 끝내 오염시키지 못하며, 정인이 편백나무의 은은한 향기처럼 사랑하는 이념의 아버지는 유령처럼 겉돌뿐 그녀의 삶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21세기적 스타일을 은연중에 지닌 아름다운 청년과 처녀가 1969년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디딤돌이 균수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여며주기 위해 균수는 시대적인 동시에 시대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 외모가 코믹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석영과 정인의 사연에는 시대의 절절한 아픔이 반영된 개연성이 담겨 있다. 일생을 바친 10일간의 사랑이라는 건 유효할 수 있지만, <그해 여름>은 이것이 영화적 공간에서 가능한 판타지라는 걸 동시에 입증해버렸다. 균수와 수내리 같은 탈색된 순수를 통해서. 가치보다 효용을 따지는 시대를 거슬러 순결한 사랑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웅변한다는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허풍과 겉멋은 삶의 윤활유일 뿐이라는 걸 유머 넘치며 짠하게 보여준 <품행제로>에 비하면 더욱더. 처연한 여운은, 굳이 먼 과거를 빌려와 만든 10일간의 사랑이 이 시대에 온통 자신을 내던질 만한 것이라는 데 동의하더라도 판타지로 가능하다는 역설에서 생겨난다. 순수를 확신하고 향유하는 건 불가능한 시대가 아니냐는 역설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