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코인송금대행24시자금믹싱업체코인송금대행24시자금믹싱업체'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흔들리는 레지스탕스의 서글픈 초상 <굿모닝, 나잇>

1977년 말 로마의 한 아파트, 어느 신혼부부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새를 키울 만한 정원이 있고, 적당히 널찍한 침실과 부엌이 있으며, 거실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곳. 얼핏 평온한 삶의 안식처처럼 보이나 실은 극좌파 무장세력 ‘붉은 여단’의 아지트가 될 공간이다. 신혼부부로 위장한 남녀는 급진적 혁명노선을 함께 걷는 동지이며, 이들 외에도 두 남자가 더 숨어들어 위험한 미션을 수행한다. 새해가 밝아오고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일 때조차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감정을 나눌 여유가 없다.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사(巨事)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본격적인 아지트 역할을 시작한 것은 1978년 3월16일, 붉은 여단 멤버들이 전 총리이자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로베르토 헬리츠카)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다. 이날은 알도 모로가 공산당과 우파 여당 5당을 연합한, 연립내각이 승인되는 날이다. 알도 모로. 시민들에게는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여당 당수지만, 붉은 여단에는 보수정치세력을 대변하는 반동주의자이자 수정주의자일 뿐이다. 단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처형한다”는 명목하에 모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정부와 교황을 상대로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협상에 실패하고 국민의 비난만 거세지자, 그토록 견고했던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이탈리아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좌파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의 2003년작으로, 그해 베니스영화제가 ‘미래의 영화상’과 각본상으로 화답했던 작품이다. 함께 이탈리아 영화계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비해 벨로키오는 고집스럽게 계급과 정치를 영화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굿모닝, 나잇> 역시 감독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정신분석이라는 화두를 관통한다. 거친 화면의 뉴스릴과 픽션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1978년 이탈리아 전 총리 알도 모로가 납치됐다가 55일 만에 암살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역사적 트라우마지만 감히 입 밖에 내기 어려웠던 민감한 기록들을, 벨로키오는 대담하게 끄집어낸다. 그러나 벨로키오의 관심은 역사의 한 자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평범한 일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붉은 여단의 흔들리는 표정에 더 주목한다. 그중 유일한 여성 단원 키아라(마야 산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이다. 자유의 대안은 과연 죽음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이 현 이탈리아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혹은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벨로키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 대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조용하지만 파장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제목 ‘굿모닝, 나잇’은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에서 가져온 것. 극중 키아라의 동료 엔조(파올로 브리구글리아)가 테러리스트들을 소재로 쓴 시나리오 제목이기도 하다. 엔조는 건조하게 살아가는 키아라를 자극하는 인물로, 일상생활이 전혀 없는 붉은 여단 멤버들을 비난한다. 바깥세상의 사람들 역시 수군댄다. “붉은 여단은 혁명활동을 하지 않을 때 포르노영화를 볼 것”이라고. 이들의 지적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붉은 여단은 모로를 가두고 감시하는 동시에, 자신들 역시 모로와 함께 감금된 자들이다. 아파트가 그들의 유일한 세상이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뉴스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키아라는 “상상력이 현실을 구하진 못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가 그토록 굳게 믿었던 이데올로기 역시 현실을 구하지 못했다. 미묘하게도 그녀는 감시 구멍을 통해 모로의 늙고 지친 모습을 목격한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모로는, 키아라에게 적이기 이전에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변모한다. 동시에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자신의 동지들과 ‘그의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모로 사이에서, 키아라는 점점 정신분열에 가까운 판타지에 시달린다. 이를테면 파시스트들에 대항하다 죽은 키아라의 아버지가 등장한다거나, 모로가 감금에서 풀려나 유유히 걸어나가는 장면들이다. 이제 키아라가 꿈꾸는 것은 혁명적 투쟁 이전에, 인간성이 회복된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가 꿈꾸는 판타지가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총성이나 끔찍한 구타장면 하나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잡아낸 벨로키오의 연출솜씨는 놀랍다. 이웃집 여자나 지역 사제의 예기치 않은 방문, 좀도둑들의 침입 등은 언뜻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 감도는 긴장감, 서늘한 시선 속에 감지되는 뜨거운 열기는 어떤 장르적 장치만으로 연출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벨로키오는 대사나 동선을 절제하는 대신 이미지와 음악(핑크 플로이드의 터질 듯한 사운드와 슈베르트 협주곡의 대비!)의 절묘한 조합 또는 배우들의 떨리는 눈동자만으로 짙은 후유증을 남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극도에 달한 포스트 9·11 시대, 그 후유증은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굿모닝, 나잇>은 철저하게 감성에 호소하는, 기묘한 정치스릴러다.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드>가 관객들을 사로잡지 못한 이유

어느 스튜디오 감독들보다 마틴 스코시즈는 홍콩 뉴웨이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우삼은 <첩혈쌍웅>을 그에게 헌사했고 왕가위는 <비열한 거리>를 따라 자신의 첫 극영화 <열혈남아>를 만들었다. <택시 드라이버>의 비오는 슬로모션의 도시적 스타일은 수많은 홍콩영화들에 녹아들어갔다. 스코시즈는 최근 가장 강력했던 아시아의 액션영화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를 통해 이에 대한 보답을 보내고 있다. 유위강과 맥조휘의 2002년작 <무간도>의 뛰어난 이야기는 영화 역사의 두 번째 세기를 맞아서야 등장했다(만약 그전에 나왔다면 독자들은 알려주시기를). 강력한 조직의 두목은 소년기 아이를 데려다 경찰 조직에 심고, 경찰은 비밀 요원을 두목의 폭력 집단에 심어놓는다. 두 조직은 고정 첩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영화의 절정에 가서야 깊숙이 숨겨진 첩자 둘은 서로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중요한 극적 장치로 휴대폰이 사용되는데 <무간도>는 그 전제가 주연의 역할을 하는 흔치 않은 영화다. 스코시즈는 그러나 불가피하게 유명 배우들로 자신의 리메이크를 가득 채웠다. 맷 데이먼은 경찰로 변신한 조직원으로 나오고 (원작에서 유덕화가 맡은 역)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에 상응하는 (양조위가 깊은 감수성으로 연기한) 비밀경찰로 나온다. 젊은 배우들 위로 군림하는 잭 니콜슨은 비중이 높은 역- 원작보다 훨씬 더 부풀려진 폭력조직 두목- 을 연기한다. 증지위가 둥근 얼굴을 한, 기가 넘치는 악의 화신으로 <무간도>의 장면들을 훔쳤다면 잭 니콜슨은 첫 장면부터 영화를 휘젓는다. <디파티드>는 상업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상상하진 마시라. 오프닝 장면에서 터지는 로큰롤 소리, 롤링 스톤스가 거리 싸움을 회상하는 장면을 위해 연주한 부분은 단연 스코시즈풍이다. 감독은 액션을 남부 보스턴의 비열한 거리로 옮겨 자신의 장기를 한껏 보여준다. 폭력단 조직원들보다 더 쌍스런 욕을 해대는 주인공들은 경찰들이고 현란하게 욕을 해댈 수 있는 아이리시 갱단원들은 이탈리아 갱단을 능가한다. 처절한 생존의 사투가 있고 범죄 조직의 두목은 음란한 광인이다. 인용된 존 포드 영화는 <추적자>가 아니고 필수적으로 <밀고자>다(영화 속 텔레비전에서도 중계되었다). 또한 가톨릭 죄의식도 짙게 깔려 있다. <무간도>는 놀라우리만큼 쿨하고 홍콩 액션영화치고 효과적으로 절제되어 있지만 스코시즈는 극한 폭력으로 그 온도를 한껏 올려놓고 있다. 호전성과 중상이 넘쳐나 거의 쿠엔틴 타란티노 수준에 육박하는데, 타란티노의 영역을 넘보고 있으니 그것도 당연하겠다. 시나리오작가 윌리엄 모나한(지난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십자군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맡았었다)은 의도된 모독을 퍼붓는다. “야, 나무에 가서 고양이 새끼나 낳아라, 이 동성애자 놈들아!” 콜린(맷 데이먼)은 경찰 대 소방관 럭비 경기에서 상대에게 외친다. 물론 신부를 남색꾼이라고 욕하는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학교 운동장에서 들을 법한 대사들을 더하는 것 외에도 모나한은 두 주인공의 애정의 대상인 두 여자를 베라 파미가가 연기한 아주 자신없는 한 정신과 의사로 결합했는데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배신의 가능성을 더하게 된다). 카메라의 위치 선정과 델마 스쿤메이커의 팡팡 이어지는 편집 등 기술적으로 영화는 일등급이다, 적어도 초반에는. 두 시간 반의 <디파티드>는 원작보다 50분이 긴데 부분 부분이 긴장을 일으킨다기보다 바로크적이고 영화의 결들이 전제를 삼키고 있다(절정처럼 느껴지지 않는 유혈 낭자한 차 충돌 총격장면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극중 베라 파미가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심리는 원초적이다. 가짜 경찰로 위장한 콜린은 자신의 속임수에 눌려가고, 쉽게 격해지고 우울증 약을 먹는 가짜 폭력 조직원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점점 불안해한다(디카프리오가 맡은 역은 충분한 동기를 갖고 있지 않지만 완고한 그의 존재는 데이먼의 연기보다 더 효과적이다). 갖가지 배역들로 특징짓는 영화에서 마크 월버그는 욕을 가장 많이 하는 경찰로 가장 단순하고 동정적이며 (가장 웃기는) 연기를 펼쳐 두각을 나타낸다. 물론 맷 데이먼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연기를 하는 존재들이다. 그와는 다른 잭 니콜슨은 <이스트윅의 마녀들>(1987)에서 자신이 맡았던 악마적인 역을 다시 보여주며 점점 광적으로 변해가고 영화를 피범벅으로 만들며 술에 취해 조소하는 쥐의 얼굴을 흉내낸다(지옥의 악마처럼 아무리 광분해도 조직의 이인자 레이 윈스턴이 훨씬 더 무섭다). 스코시즈는 자신의 영화에 흉악하고 달갑지 않은 중심인물들의 연기를 집어넣길 좋아하는데,여기선 잭 니콜슨이 <갱스 오브 뉴욕>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맡았던 역의 콧수염을 잡고 빙빙 돌리는 듯한데 이는 제작자 하비 와인슈타인에게 해당되는 역이다. 망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지만, 감독이 자신만의 해피엔딩을 제공하려 노력했음에도 <디파티드>는 어느 선까지만 효과가 있을 뿐 결코 감정적으로 관중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나는 내 환경의 결과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프랭크는 뽐낸다. “난 내 환경을 직접 만들고 싶어.” 주저리주저리… 바로 그 점이 문제인 것을. 공들여 만들어졌지만 잭 니콜슨이 없었다면 (그리고 한 30분 짧았다면) 고쳐지지 않았을까. 어쩌겠나, 스코시즈는 저 분장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 했으니.

봉준호 감독, 이누도 잇신 감독 심포지엄 중계

“영화를 보기 이전부터 관객을 흥분시키는 감독이다”, “독특한 감수성으로 관객을 감화시키는 연출자다”. 한국의 봉준호 감독과 일본의 이누도 잇신 감독이 제3회 메가박스일본영화제에서 만났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11월19일, ‘영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 두 감독은 서로에 대한 칭찬과 질문을 시작으로 각자 개인의 영화적 경험을 털어놓았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데라와키 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대화가 다소 거창한 심포지엄 주제인 ‘영화의 현재와 미래’의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TV와 만화를 통해 영화적 감수성을 쌓아온 두 감독의 대화는 현재 한국과 일본영화의 한 경향을 설명하는 데 충분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터치> 상영 뒤, 90여분간 진행된 심포지엄을 여기 옮긴다. 데라와키 겐: 우선 봉준호 감독께 <터치>를 본 소감을 부탁드린다. 봉준호: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야구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에 대한 것이다. 고교 시절 야구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야구의 정취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야구만의 리듬이 영화에 잘 묻어났다고 생각한다. <터치>의 원작을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작가(아다치 미쓰루)가 쓴 작품인

는 재밌게 봤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만화는 많이 보고 있다. 이누도 잇신: 원작을 읽은 관객은 불만이 많더라. <터치>의 원작은 20권이 넘는다. 만화 팬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이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제작사쪽에서 영화화를 제안받은 프로젝트고, 여주인공이 나가사와 마사미라고 하기에 찍은 영화다. (웃음) 이번 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로보콘>을 보고 그녀와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라와키 겐: 두 감독은 서로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이누도 감독은 봉 감독을 어떤 감독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누도 잇신: 봉준호 감독 영화 중 맨 처음 본 게 <살인의 추억>이다. 그 당시 봤던 영화들 중에서 최고였다. 극본, 조명, 카메라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컨트롤돼 있었다. 최근 미국영화는 촬영을 많이 하고, 편집을 하면서 맞춰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영화가 산만해진다. 하지만 봉 감독의 영화에는 산만함이 전혀 없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좋아”, “됐다”라는 느낌이 든다. 지난주에 내가 무리하게 주선을 해서 (웃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만났는데, 봉 감독을 만나는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만나는 것과 똑같이 설레더라.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사람을 흥분시키는 감독이다. 이건 영화를 본 뒤에 “대단하다”고 느끼는 감상만큼 중요한 거다. 내가 너무 칭찬만 하는 건가? (웃음) 봉준호: 이누도 잇신 감독은 독특한 감성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가 등장해도, 전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관객을 자연스럽게 인물 곁으로 데려간다. 테마적인 강박이 없다. 인물들이 겪는 감정이 마치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관객에게 전해진다. 감정에 마술을 부리는 영화랄까. 강한 자극이나 충격은 없지만, 지진에 비유하면 강한 여진이 남는 영화인 것 같다. 나에겐 텔레비전이 시네마테크 데라와키 겐: 두 감독 모두 어떤 경로로 영화를 만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이누도 잇신: 5~6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영화를 잘 보지 않았다. 미국영화에는 관객이 많이 들었지만, 일본영화는 외면당했다.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생계가 불가능한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영화는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또 많이 봐왔다. 그러다 스스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느꼈고, 17살 때 처음으로 8mm영화를 만들었다. 그게 너무 재밌더라. 그래서 대학교 때까지 몇편 정도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 졸업 뒤에도 TV광고 찍는 일을 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서 다시 한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짧은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상을 받았다. 그 덕에 다음 작품을 제작해줄 회사가 나타났고, 좀더 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영화감독이 되었다. 봉준호: 영화를 만들게 된 과정은 이누도 감독과 참 비슷한 것 같다. 다만 나는 영화를 좋아했어도 극장엔 자주 가지 못했다. 어머님이 지구상에서 가장 세균이 많은 곳이 극장과 지하다방이라고 하셨다. 극장은 세균의 온상이고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곳이라고. (웃음) 당시엔 비디오도 DVD도 없어서 나에겐 텔레비전이 시네마테크였다. 특히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해주는 영화들을 즐겨봤다. 영어 대사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비주얼에 더 집중하게 되고, 무슨 이야기일지 멋대로 상상하고 이야기를 구성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누도 잇신: 나도 초등학교 때는 TV만 봤다. 정말 재밌는 영화에서 정말 시시한 영화까지. 당시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추천해주는 작품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무작정 보면서 스스로 좋은 영화와 시시한 영화를 구분하고, 자신만의 명작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즐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우리 가족도 여행, 스포츠, 레저를 전혀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일년 내내 TV만 봤다.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의 흉을 보는 게 가족들의 취미였으니. (웃음) 샘 페킨파 영화를 좋아했는데, 페킨파 영화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때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조금씩 잘린다. 그런 걸 보면서 ‘여기는 컷이 연결이 안 되는군, 이런 장면이 있었겠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심지어 <겟어웨이>가 낮시간에 방송된 적이 있는데, 폭력적인 신이 나오면 분홍색 별표가, 애정 장면에서는 분홍색 하트가 등장하더라. 만화와 영화는 서로의 씨앗 데라와키 겐: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는 <터치> 외에도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 많은 것 같다. 이누도 잇신: <금발의 초원>도 만화가 원작이고, 이번에 찍은 <노란 눈물>도 만화가 원작이다. 내 영화에는 소녀만화에서 받은 영향이 압도적인데, 이들은 주로 49년조라 불리는 작가군들의 작품이다. 49년조는 1970년대 등장한 49년생 작가들의 집단을 말한다. 일본에서 소녀만화는 남자들이 읽을 수 없는, 읽지 않는 장르다. 하지만 49년조의 작품들은 남자들이 숨어서 볼 정도로 임팩트가 대단했다. 보통 소년만화가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계기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점프를 한다면, 소녀만화는 일상은 일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렇다할 사건은 없지만 이야기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데라와키 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만화를 보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젊은 감독들은 만화에서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는 오히려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 만화와 영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어떤지 궁금하다. 봉준호: 나는 스스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우주왕자 고라망>이라고 도라에몽을 모방한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를 그린 적도 있다. (웃음) 한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도 했었으니. 어릴 때는 거의 모든 장르의 만화를 다 봤다.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유리가면>과 <들장미 소녀 캔디>. 어린이 만화지만 다크한 감수성이 풍부한 <바벨 2세>, 기발한 SF물 <도라에몽> 등 내 영화가 만화에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이누도 잇신: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한 적이 있나. 봉준호: <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고, 동시에 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연극 공연이 있다. 절반 정도 원작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 2편 중 하나가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누도 잇신: 그림이 먼저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거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가. 봉준호: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들은 장면 연출이 굉장히 영화적이다. 만일 누군가 그 사람의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면 굉장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화 자체가 이미 뛰어나게 영화적으로 연출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이 질문은 오히려 만화가 원작인 <터치>를 만들어본 이누도 감독에게 묻고싶다. 이누도 잇신: 나는 <터치>와 <금발의 초원>을 만들면서 원작을 완전히 잊으려고 했다. 그림을 재현하는 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아주 유명한 장면들, 너무 유명해서 원작 팬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장면들은 최대한 동일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떼샷이 살아야 영화가 풍부해진다 데라와키 겐: <터치>를 보면 기존의 야구영화와는 다른 각도의 촬영들이 눈에 띈다. 만화의 지면을 영화의 영상으로 옮기면서 나타난 부분인 것 같은데, <터치>에서 주인공들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보통 만화는 주인공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지 않나. 이걸 야구경기 장면에서 영화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누도 잇신: 그건 <터치>가 연애물이기도 하고, 시선이 교차하는 게 중요한 모티브니까 그런 것 같다. 기존의 야구영화와 다르다는 건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다소 이질적인 작품에서 힌트를 얻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터치>의 야구장면을 찍으면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렸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에는 주인공이 총으로 세명의 사람을 쏠 때 그 세명의 얼굴이 모두 ‘방! 방! 방!’ 소리와 함께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나는 이 느낌을 야구의 타격장면에서 떠올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찍을 때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쓰바키 산주로>를 떠올렸고, 최근 <비잔>이란 영화를 찍을 때는 <죠스>를 떠올렸다. 예전에 봤던 전혀 다른 영화의 장면들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내 영화에 힌트가 되는 것 같다. 데라와키 겐: <터치>의 군중신도 궁금하다. 주인공을 제외한 배경 인물들의 움직임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이누도 잇신: 그건 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느낀 점이다. <괴물>의 강변장면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송강호를 잡고 있지만, 스크린엔 송강호 이외의 인물들까지 생생하게 비친다. 나는 영화의 이런 장면들이 작품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선 요즘 이런 부분들이 소홀해지고 있다. 예전엔 촬영소란 것이 있어 거기에 소속된 능숙한 엑스트라들이 이 부분의 문제점을 해결해줬지만, 요즘엔 그렇지 못하다. 봉준호: 그런 군중신을 한국에서는 속칭 ‘떼샷’이라고 하는데, 여기엔 나 혼자뿐 아니라 조감독, 연출부 등 모든 스탭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이누도 감독에게 궁금한 건 <메종 드 히미코>의 춤신이다. 댄스홀에서 많은 인원들이 함께 춤을 추는데, 그 시퀀스는 몇회에 걸쳐 완성된 건가. 이누도 잇신: 아침부터 점심까지 한번,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4시까지 또 한번 정도. 봉준호: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임과 동시에 주인공의 감정이 섬세하게 상승하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감독을 비롯해 스탭들의 숙련도가 대단한 것 같다. 얼마 전에 사카모토 준지 감독을 만났는데, 일본에선 보통 규모의 영화는 한달 반, 대작은 두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 나는 찍었다 하면 다섯달이니 일본에서 연출제의가 들어오면 겁부터 난다. (웃음) 이누도 잇신: 아마 일본에서 봉 감독에게 연출을 부탁할 때는 빨리 찍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웃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도 일본에서 촬영기간이 긴 걸로 유명한데, 그 감독이 <살인의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7개월 걸렸다고 하더라. 근데 실제론 5개월이라고 하니 유키사다 감독이 부풀려 말했나보다. (웃음) 봉준호: 전반적으로 부끄럽다. 이누도 잇신: 아니다. 나는 봉 감독이 계속 시간을 들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실 그게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100회 촬영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된다. 그래서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매우 마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봉준호: 실제로 촬영기간에는 4~5kg 정도 빠진다. 편집하면서 제자리에 앉아 많은 양의 음식을 먹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긴 하지만. 영화는 보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데라와키 겐: 최근 어떤 감독들을 만나보면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전혀 보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1년에 5편 정도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보는 행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두 감독은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영화를 많이 봐온 감독인 것 같다. 또 두 감독의 영화는 재미가 있다. 영화는 결국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누도 잇신: 재미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흥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봤던 영화들을 떠올리면, 아주 재밌는 미국영화도 있지만 누벨바그 영화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내게 흥미를 자아냈다. 모든 영화가 그 당시에 해답을 주거나 재미를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는데, 그때는 ‘너무 심술궂다’, ‘뭐야’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다시 보니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 봉준호: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의 흥분도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누나의 손을 잡고 봤던 <사운드 오브 뮤직>이 기억난다. 영화가 세 시간이 넘어서, 극장에 들어갈 때는 낮이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밤이 되더라. 어릴 때는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 또 영화 자체의 흥분도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MBC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자전거 도둑>이 기억난다. 그때는 이게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작품인지, 네오리얼리즘인지도 모르고 봤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집에 있는 내 자전거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영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휴대폰 폴더를 한번도 열지 않고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한 ’스시’의 오마주?

미이케 다카시가 새 영화로 일본식 웨스턴을 촬영 중이다. 지난 11월20일 야마가타현 쇼노이 스튜디오의 촬영현장을 공개하면서 밝힌 제목은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60년대 유행했던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한 오마주로 지은 제목이다. 특히 프랑크 네로가 주연을 맡고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연출했던 스파게티 웨스턴 <장고>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내용은 12세기 일본 겐페이 전쟁을 배경으로 두 집안의 무사가 서로 대립하는 이야기이며, 제작비는 8억엔 정도다. 벌써부터 “스시 웨스턴” 등의 표현을 얻으며 서구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의 대사는 대부분 영어로 이루어져 있어, 배우들 또한 2개월간 영어 훈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인공 총잡이 역의 이토 히데아키를 비롯하여 모모이 가오리, 사토 고이치, 이세야 유스케, 안도 마사노부 등 일본과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다. 유명 영화제작자이자 감독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도 출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란티노의 출연은 그가 총제작을 맡았던 영화 <호스텔>에 미이케 다카시가 카메오 출연한 것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전해진다.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쿠엔틴 타란티노는 11월 말에 일본을 찾아 촬영할 예정이다. 현재로서 그가 맡을 역은 “미스터리 맨”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아버지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열혈 팬이셨다. 어린 시절 나는 그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그 영화들을 즐기곤 했다. 나 자신만의 웨스턴을 만드는 것은 나의 오랜 염원이었다”며 이번 일본식 웨스턴 연출의 동기를 밝혔다. <오디션> <이치 더 킬러> 등 폭력성 넘치는 장르영화 감독으로 손꼽히는 미이케 다카시가 일본의 중세와 서구의 웨스턴 장르를 어떻게 결합시킬지가 관심사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11월 내에 촬영을 마치고 내년 하반기 소니픽쳐스가 배급할 예정이다.

[현지보고] <로맨틱 홀리데이> 시사회와 케이트 윈슬럿 인터뷰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웨딩 칼럼에 글을 쓰고 있는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럿)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재스퍼(루퍼스 시웰)가 다른 여자와 곧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외의 조그마한 자신의 집에 돌아가 목을 놓아 통곡하는 아이리스. 바로 그 시각, 햇살이 내리쬐는 LA 브렌트우드 아만다(카메론 디아즈)의 집. 영화 트레일러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른바 잘나가는 그녀는, 남자친구인이던 에단(에드워드 번즈)이 바람을 피운 것을 알게 되고 크리스마스를 바로 앞에 두고 절교 선언을 한다. 이 두 여자의 사정은 낯설지 않다. 집이 떠나가라 흐느끼는 아이리스와 울어보려 별별 애를 쓰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 아만다는 사랑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기분 전환을 해야 할 절체절명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인터넷에 접속하게 된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크리스마스 휴일 동안 서로의 집을 바꾸어보는 황당한 계획에 동의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벗어나고픈 현실이지만, 아이리스에게 아만다의 LA는, 아만다에게 영국 시골의 동화 같은 아이리스의 집은, 무엇인가 멋진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준다. LA에 도착한 아이리스가 아만다의 커다란 집에 환호성을 지르는 반면, 눈 내리는 시골길을 하이힐을 신은 채 가방을 끌고 가야 하는 아만다의 신세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리스의 오빠인 그래엄(주드 로)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국 아가씨 아이리스에게 할리우드 황금기의 작가 아서(엘리 왈라치)와의 만남이 판타지라면, 영국의 어느 날 밤 집 앞에 서 있는 아이리스의 오빠 그래엄은 미국 커리어우먼 아만다의 거부할 수 없는 판타지이다. <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등을 통해 이미 시나리오 집필력과 안정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은 낸시 메이어스 감독은 <로맨틱 홀리데이>에서 역시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르는 사랑에 대한 희망을 로맨틱코미디의 예의 그 달콤한 방식으로 서술해나간다. LA에서 열린 시사회를 마치고 케이트 윈슬럿과 나눈 짧은 인터뷰를 소개한다. 케이트 윈슬럿 인터뷰 “내 생애 최초의 코미디 연기” 아이리스는 한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데 무척 힘들어한다. 본인도 아이리스와 비슷한가. 전혀 아니다. 난 언제나 내 자신의 선택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지난 일에 미련을 갖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만, 아이리스만큼은 아니다. 이번 작품은 그간 해온 역보다 좀 가벼운 역일 것 같은데, 촬영하기는 어땠나. 아주 힘들었다. 촬영기간도 길었고, 현대 영국 여성을 처음 연기해본다는 점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가발이나 악센트, 고전 의상 등으로 나 자신을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를 연기하기 위해 나는 주위의 친구들이나 혹은 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어떤 단면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리고 코미디 연기도 처음이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파트너인 잭 블랙에게 컷이 끝날 때마다 내 연기가 웃긴지 아닌지 늘 확인하곤 했다. 코미디 특성상 즉흥연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 맞다. 상당히 있었다. 근데 그것은 시나리오가 탄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엄마로서의 삶과 배우의 삶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이, 정해진 장시간을 밖에서 일해야 하는 다른 직업을 가진 엄마들보다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몬트리올] 사라진 80년대의 유명 화가를 찾아서

세상을 살다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을 겪을 때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에서 범세계적인 사건까지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도처에 널렸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깊숙이 파고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뭐가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혼돈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시대에 알 수 없는 일은 그냥 덮어두는 게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예술가, 특히 영화감독들은, 특히 사건이 자신의 영혼과 맞닿을 때 반드시 영화화하고야 마는 일이 종종 있다. 80년대에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던 몬트리올 출신의 어느 화가는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모든 작품을 한줌의 재로 날려버린 뒤 사람들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한줄로 끝난 이 사건은 그가 사라진 다음 정확히 15년 뒤인 지금, 퀘벡 출신의 영화감독 소피 데라스페의 데뷔작 <빅토르 펠레린을 찾아서>로 다시 이야기된다. 지난 2000년부터 시작된 텔레필름이 후원하는 저예산영화 보조 프로그램(캐나다 정부의 문화산업 확장을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영상부문과 음악부문을 후원하는데 영화부문에서는 기존·신인감독에 상관없이 작품당 75만달러를 지원한다)에 선정된 <빅토르 펠레린을 찾아서>는 올해 선정된 10개의 영화 중 4개의 불어권 영화 가운데 한 작품이다. 빅토르 펠레린을 알고 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난데없이 펠레린 그 자신이 등장하는가 하면 실제의 시간에 실제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그리다가도 회상형식의 본연의 다큐로 돌아가기도 한다. 펠레린이 사라진 사건처럼, 온통 알 수 없는 의문부호들이 가득한 다큐멘터리 혹은 모큐멘터리 혹은 영화적 설치작품 <빅토르 펠레린을 찾아서>는, 그렇기 때문에 펠레린이 사라진 그 미스터리한 사건을 더욱 미궁 속으로 빠뜨리고 만다. 영화를 보고 나면 현실과 픽션은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 동시에 존재한다는 감독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야심찬 시도 <다케시즈>

<다케시즈>의 영어제목은 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제목이다. 한편으론, ‘다케시들의’, 라고 말해놓고 나머지는 열어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에 놓일 것은 공백 내지는 괄호다. 그냥 무수한 가능성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12번째 장편영화의 제목을 상상적 빈칸을 남겨두는 것으로 지었다. ‘다케시의’라고 지었다면 덜 이상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 되기’에 관한 영화로 추측되었을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가 자기의 뇌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얼굴들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케시 역시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불완전한 욕망들이 있는지 스스로 궁금하여 탐색하는 영화일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다케시즈>는 자기애는 고사하고 다케시 특유의 야심찬 내용과 형식의 자멸성으로 가득 차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다케시즈>의 가제는 오랫동안 <프랙탈>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프랙탈(Fractal)은 만델브로트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형들의 측량법을 제시하기 위해 75년에 쓴 논문에서 사용한 기하학적 개념어이자 조어다. 프랙탈이라는 용어를 문화적으로 이해하자면 복잡성의 세계 구조를 생생하게 인정하되 동시에 설명 가능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다. 혹은 그 복잡성을 이루는 패턴으로서의 유사 반복적 단순성의 연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방점이다. 말하자면, 무디고 딱딱한 합리적 근대의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각광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로 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프랙탈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의 대가는 단연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다. 다케시의 이번 영화는 그들과 알게 모르게 사유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다케시는 단수가 아닌 끊임없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이-공간에서의 복수로 스스로를 생각하며, 혹은 정수가 아닌 소수적 인간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전체 구조는 당연히 일목요연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연상과 유사’를 통해 뻗어나가는 일종의 미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전쟁터 같고 일본군 복장으로 죽은 척 누워 있는 다케시가 보인다. 그걸 보면서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그가 처음 배우로서 출연했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군 병사 하나와 눈이 맞아 사살되기 직전 <다케시즈>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이번에는 다시 총격전을 벌이는 어떤 장소로 이동한다. 다케시는 쌍권총을 쥐고 쏘아대는 야쿠자다. 그리고 그건 다시 도박장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출연작이었음이 밝혀진다. 그걸 보면서 갱들은 멋있다는 둥 말들을 해댄다. 다케시는 지금 갱들과 마작을 하고 있다. 마작을 마치고 세트장으로 향한 다케시는 자신과 같은 ‘기타노’라는 성을 가진 피에로 분장의 무명배우 지망생을 만난다. 다케시가 여기서 1인2역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나티네>의 클라이맥스를 변조한 듯한 장면의 촬영이 세트장에서 끝나갈 때쯤, 기타노 다케시의 이야기는 그와 닮은 사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의미가 깊다. 이후로 영화는 편의점 직원이자 배우 지망생인 남자의 잠의 미로 혹은 꿈의 미로를 반복하면서 진행된다. 이를테면, <3-4X10월>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전체 구조를 가져와 잘게 나누어 ‘그 안의 안으로’라는 방식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남자의 꿈이 절정에 달하는 곳은 <하나비>의 바닷가를 가져온 대목이다. 거기에는 사무라이들도 나타난다(<자토이치>). 그 남자의 꿈의 연속이 끝날 즈음 그는 자기에게 모욕적으로 사인을 해준 기타노 다케시의 태도를 갑자기 기억해내며 칼을 들고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다. 그때 이야기는 다시 초반의 기타노 다케시로 넘어간다. 영화 속 기타노 다케시가 그 남자를 상상한 것인지, 그 남자의 꿈 안에 기타노 다케시가 있었던 것인지 모호해진다. 비트 다케시와 기타노 다케시, 유명 코미디언과 유명 감독, 두개의 정체성을 따라 이 영화가 그 둘 사이에 놓인 갈등에 관한 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어떤 형식의 극한을 추구해보고 싶었던 야심이 더 강하다. 때문에, <다케시즈>는 자기 반영성이 깃든 영화 만들기의 계보와도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와 그를 닮은 무명의 배우 지망생이라는 인물 구조를 세워놓고 세계도 그 두개로 나눈다. 나머지 인물들도 그렇게 대개 1인2역을 하는 식으로 두 세계에 각자 다른 인물들로 산다. 그러나 다시 그 두개의 구조는 기타노 다케시 자신을 통해 겹쳐지는 것이다. 어쩌면 <다케시즈>는 <하나비>에서 여러 명이 뒤엉켜 죽어가던 그 총격전의 편집 방식을 확장한 것이다. 몽환적인 편집과 리듬은 중반부까지 확연하게 돋보인다. 후반부가 난삽해지지만 않았다면 중반부까지의 장면은 다케시의 영화 중 가장 철학적인 리듬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케시는 확실히 편집이 중요한 영화를 만드는데, 이 영화에서 이중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과 상황들을 연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연상과 유사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다케시가 단순히 편집을 에디팅이 아니라 몽타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표식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미와 정서의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케시즈>의 그 몽타주는 너무 유희적이다. 다케시 영화 중 중요한 것은 몸의 정지와 운동을 이어주는 기이한 속력 그리고 시선의 타이밍이다. 그것이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폭발하면서 이어져나가는 영화의 전체 편집 리듬과 섞일 때 하나의 느린 소우주적 생성을 한 인간의 몸에서 보는 듯한 영화적 경험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건 단순히 무대 위에서 배운 만담가의 팬터마임적 기술이라고 설명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정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다케시는 하락 양상의 길을 걷는다. 근작들은 모두 기대 이하다. <하나비>에 이를 때까지 그토록 노력했던 영화감독으로서의 인정투쟁의 길을 뒤로하고, 그가 근자에 바라는 것은 자기를 홀로 진전시키는 것 혹은 그의 말처럼 “종잡을 수 없도록” 홀로 변화하는 것인 것 같다. 이번은 특히 형식의 야심이 내용의 존재 이유를 덮어버린 경우다. 그러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어떤 가능성을 끝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리듬은 그냥 만들어질 만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희망의 단서를 걸고 싶다. 만약, 아는 사이라면 그 리듬을 다듬어 지금껏 완성되지 않은 다른 영화를 꼭 한 번 만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물론, 그 결단 역시 ‘다케시들의’ 무엇 중 하나에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이창] 즐거운 기다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어언 20여년 전 이산가족 찾기는 끝났지만, 오늘도 ‘이산애인’ 찾기의 애절한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만남의 광장은 KBS 앞이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 단면 중의 하나, 어느 남성동성애자(게이) 사이트 ‘사람찾기’ 코너에 올라온 애끓는 사연들을 소개함다. “오늘 밤 9시 반쯤에 봉천역에서 5xx9번 타신 분?” 이어서 ‘그분’의 인상착의와 복장묘사가 나오고, “이쪽 분이신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정말로 대책없다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고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얼마나 간절했으면. 일상의 남남상열지사가 봉쇄돼 있으니 이렇게 스치는 한번의 눈길도 간절할 수밖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한순간의 눈빛에도 영겁의 세월이 스민다고 하지 않던가. 지하철, 사우나, 공항, 헬스클럽, 어디서든 눈빛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미련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소도시의 사우나에서 생긴 일. “이른 아침 목욕하고 나오는데 금테 안경 쓰고 눈 마주친 친구. 잠시 스쳤지만 잊을 수가 없네요.” 이어서 터미널. 길을 물었던 청년에 대한 인상착의를 쓰고 “동포라고 하면서 씩~ 미소를 짓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왠지 이쪽 분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디 그들의 ‘게이다’(게이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레이더)가 정확했기를. 그래도 다음 사연은 만남의 가능성 짙음. “이태원 xxx 클럽에서 별 모양의 금색 목걸이를 했던 분.” 그분을 찾지만, 정작 대답은 ‘딴분’이 하시기 다반사. “내 애인인데.” 사실인지 의심되지만, 그래도 ‘야리는’ 댓글이 아니니 대답도 정중하게 “하하 네 아쉽네요!”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든 시선의 부익부 빈익빈. 어젯밤 클럽에서 내가 찍었던 그놈을 찾는 글을 네가 올리고. 세상은 넓지만, 노는 바닥은 좁다. 게이들이 노는 클럽, 가는 사이트가 ‘다행히’ 뻔하므로, 그나마 ‘사람찾기’의 가능성이 생긴다. 남들이 올린 글을 보면서 웃었던 그들이 올리는 글의 서두는 대개,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적나라하지만 간절하며,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우며, 유치하지만 애절하며, 어처구니없지만 서글프다. 애절한 욕망이 들끓는 정신의 풍경, 정말로 구슬픈 연가다. 당연한 물음. 클럽에서 말걸어 보지? 서울의 퀴어마을 청년들 혹은 종족으로서 퀴어(Queer As Folk), 그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혹은 동아시아적인 수줍음이 원흉이다.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유교문화의 부작용. 그분을 찾는 크루징(Crusing)의 8할은 응시의 기술. 하지만 몸에 달라붙은 관습의 굴레. 친구들과 원형으로 모여서 강강수월래 춤추기, 영원히 테이블에 엉덩이 붙이고 아는 사람과만 얘기하기. 그리하여 만남의 광장은 폐쇄되고, 시선은 원형감옥에 갇히고. 다음날 후회하다 컴퓨터 앞에서 망설이기. 이번엔 자책하기. “그룹 xxx을 좋아했던 일본인을 찾습니다… 받은 건 많은데 해준 건 없어서 미안해요.” 친구로든, 애인으로든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10년도 모자라 15년을 거슬러 올라가 누군가를 불러보기. “6x사단 xx중대 91~92년.” “참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친구는 가끔 한번씩 생각이 납니다.” 혹시나 ‘이쪽’이 맞으면 연락을 달라는, 오래된 그리움. 그분과 교환한 ‘전번’을 잃어버렸다는 애절한 사연도 빠지지 않는다. 맞춤법이 틀리고, 외계어투성이지만, 당신의 진심이 뚝뚝 묻어나서 정말로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나조차 기도함.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장난스럽게 사람찾기. “XX병원 치과 선생님~ 너무 귀여워요! JJW 선생님~.”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어지는 댓글놀이. “앗 나 조만간 XX병원 가는데 JJW 선생님 눈여겨봐야지 ㅋ.” 때때로 명품 매장의 야릇한 점원도 입질에 오르고. 이번엔 ‘나에게도 애인 아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9시30분에 XXX역에서 XXX역쪽으로 걸어간다… 과연 이반(동성애자)이 있을까… 눈인사라도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다양한 외로움이 전시되고, 장난인지 정말인지 모를 답글이 달린다. “저요. 전 9시20분 정도 ㅋㅋ.” 선배들의 경험담도 이어지고. “예전에 그런 만남이 있었지 출퇴근시 서로 호감 느끼다 바에서 보고서 1년 정도 만남.” 어쩌다 “왜 이런 글을 올리는 걸까”라는 철학적인 자문자답까지. 어처구니없다가 처연해지는 인생의 ‘희비극’ 혹은 ‘러브 액추얼리’(영화 한편은 거뜬히 나와요). 그리고 텔레비전. <웃찾사> 방청석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웃는 모습이 비치고,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TV에서 단 몇초간 당신을 봤지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감대 ‘만빵’이었다는 다음 UCC 광고 ‘그 남자의 프러포즈’. 무엇이 다르랴. 광고로 포장된 사람찾기일 뿐. 그 남자의 프러포즈는 아름답고, 그 남자들의 사람찾기는 유치할 이유야 없는 법. 이렇게 ‘후회’하지 않겠다는 합리주의 명분과 ‘우연’을 기대하는 무속적인 기대에 기대서 인간들은 연명한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개똥철학 하나. 버스는 기다리면 오지만, 사람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나름의 방법, 즐겁게 놀면서, 딴짓을 하면서, 딴놈들과 놀아나면서 기다리기. 세상에는 어쩔 수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그것을 할밖에. 사람찾기라도, 달리기라도 하거나. 혹시나 게으른 기다림에 망가진 모습 탓에 그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이보다 큰 비극이 또 있으랴. (게시판의 사연은 혹시나 몰라서 조금씩 각색했슴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게리 쿠퍼의 세 마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는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 대목이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같은 걸작 코미디를 만든 빌리 와일더가 왕년의 미남스타 게리 쿠퍼에 대해 한 말이 재미있는데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인기를 누린 것은 딱히 멋진 대화 솜씨를 가져서가 아니야. 다만 그는 들을 줄 알았어. 이건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여자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특별히 집중하지도 않았지. 다만, 계속 떠들어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때로 다음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곁들이는 거야.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사이에 여자들은 자연히 그에게 몸을 던지게 되는 거야.” 포털사이트 뉴스에 오른다면 “게리 쿠퍼, 여자를 정복하는 데는 단 세 마디면 충분했다” 같은 제목이 붙을 내용이다. 게리 쿠퍼의 이런 일화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감상은 각자 다를 것이다. 남자라면 ‘그놈 참 대단한걸’ 싶어 배가 아플 테고, 여자라면 ‘여자를 바보로 아는군’ 싶어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녀의 반응이 그런 식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내게 인상적인 대목은 단 세 마디로 상대가 계속 말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빌리 와일더가 지나친 과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세 마디건 열 마디건 상대가 마음을 열고 말하게 하는 그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같다. 잘생긴 외모와 스크린에서 보여준 믿음직한 이미지가 절대적이었으라 짐작하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 있지 않았을까 싶고, 있다면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로 하여금 술술 말하게 만드는 그 기술은 여자를 꼬이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건 무엇보다 기자들한테 필요한 능력이다(형사한테도 그렇겠지만 아무리 게리 쿠퍼라도 범죄사실을 이야기할 여자는 없으리라). 그래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는 인터뷰를 하는 상상 말이다. 기자 생활을 하다 생긴 병일 텐데 이런 망상이 우뇌를 비집고 싹튼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단지 게리 쿠퍼처럼 안 생겨서 아닌가 좌절하기도 하면서. 물론 대체로 많이 묻고 많이 말해야 좋은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기자는 정말 잘 듣는 게 중요하다. 워낙 언론매체가 많아져서 별별 인터뷰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기사를 보다보면 정말 잘 듣고 쓴 기사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들도 적지 않다. 박찬욱 감독이 예를 든 것처럼 기자가 질문을 해놓고 그걸 감독의 답변인 것처럼 옮겨놓는 것은 그나마 애교있는 경우이고 상대가 힘주어 얘기한 대목은 쏙 빼놓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 적는 왜곡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게리 쿠퍼처럼 마음을 열게 만들진 못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말아야 할 텐데 말이다. <씨네21> 너나 잘해. 이런 말을 들을 소리일 텐데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우리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나저나 진짜로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아님 ‘왜요?’, ‘그렇군요’, ‘그럴 리가요’가 나으려나? 어디선가 우린 게리 쿠퍼가 아니라고요, 라는 기자들의 항의가 들썩이는 듯하다. P.S. 드디어 새로운 기자를 뽑았다. 지난 1년간 <씨네21> 객원기자로 일했던 강병진과 내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김민경, 두 사람이 최종 합격자가 됐다. 두 기자의 활약을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