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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어느 쾌락주의자의 절제, 디자이너 정구호

어디에서 읽었더라. 상대에게 옷을 선물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치는 일이라고 했다. 디자이너 정구호의 옷은 그 소망을 단호하게 전한다. 품은 넉넉하고 실루엣은 유유하지만, 입는 이가 어떻게 느끼고 움직이길 바란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한다. 정구호의 영화미술도 비슷한 이유에서 압도적이다. <정사> <텔미썸딩>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위해 정구호가 지은 영화 의상은, 과장하자면, 인물의 성격을 거의 ‘폭로’한다. 새로 제작하지 않고 구호(KUHO)의 기성복을 협찬한 경우에도 정구호의 옷은, 여배우를 특정한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관객을 부추긴다. 낭창거리는 바지와 셔츠를 입은 <사랑니>의 조인영은, 천방지축으로만 보였던 배우 김정은 속에 숨은 호리호리하고 나긋한 여인을 노출시켰다. 블라우스를 비단뱀처럼 감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은숙은, 배우 문소리가 가진 줄 몰랐던 싸늘한 광택을 뿌렸다. 6월 개봉을 앞둔 <황진이>는 정구호가 4년 만에 참여한 영화다. 송도 기생 명월도 어김없이 옷과 장신구를 선언처럼 걸친 여인이 될 터다. 정구호가 만든 옷은 좀, 고독해 보인다. 길쭉한 타원형 체경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자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다. 왁자한 모임에도 입을 수 있으나, 자리에 어우러지기보다 외따로 떨어져 주목을 끄는 옷. 디자이너 자신도 다른 브랜드의 옷과 뒤섞어 입기 용이하지는 않다고 긍정한다. 심지어 구호 컬렉션 쇼에서조차 피날레에 여러 모델이 한꺼번에 행진하면, 이게 아닌데 싶다. 흔히 미니멀리즘이라고 요약되는 정구호 스타일의 아름다움은 주의를 기울이고 시간을 들여 보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 부류다. 그런데 정구호는 문제의 주의와 시간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97년 부티크 구호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젠(Zen/禪) 유행에 시동을 걸었고 옷 외에도 인테리어, 문구, 식기, 공연 의상 등의 디자인, 설치미술 작업, 인사동 쌈짓길 프로젝트를 두루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정구호는 옷이 그의 활동의 정점임을 분명히 한다. 나머지는, 아이디어의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옷에 담긴 생각을 더 잘 이해시키는 작업이다. <정사> <순애보> <텔미썸딩> <하루> <쓰리>로 이어진 그의 영화 미술은, 디자이너가 눈치 보지 않고 뽐낼 수 있는 코스튬드라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물을 만났다. 미국판 <보그> 편집장을 지낸 다이애나 브뤼랜드는 “디자이너란 사람들이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재주를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난 10년간 정구호는 거기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 이충걸 편집장에 따르면, 정구호는 세상의 아름답고 맛있는 것을 죄다 섭취하려고 애쓰는 탐식가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입고 싶은 건 다 입을 거야!”라고 아이처럼 외칠 수 있는. 문외한인 내가 잡지를 통해 엿보는 패션은, 오답은 있으나 정답은 없는- 그리고 가격은 미정인- 세계다. 그러나 디자이너 정구호는, 유사시에는 한 벌의 옷을 가리켜 “옳다”, “그르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선명한 직관을 대화 갈피에 보여주었다. 그와 세편의 영화를 만든 이재용 감독은, 옷본의 선을 내리그을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과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절묘한 지점을 감지하는 아주 예민한 촉각이 정구호에게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뭇사람들이 ‘재능’이라 칭하는 힘의 정체는 결국 그 촉각이 아닐까? 정구호가 확인해주었다. “항상 그것이 문제예요. 언제 멈추고, 언제 나아갈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그 지점을 생각해왔어요.” -옷, 그릇, 문구, 인테리어 디자인, 영화미술, 요리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오래된 친구이자 영화를 같이 만든 이재용 감독님 표현으로는 힘이 더 들지언정 일한 자리가 분명히 표나는 쪽을 좋아하신다고요. 요즘은 어떤 일로 바쁘세요? =구호뿐 아니라 제일모직 10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맡고 나서 10배로 바빠졌어요. 저는 둘러보고 지시만 하기보다 영화현장으로 치면 팔 걷고 사다리 올라가 망치질하는 부류예요. 제가 이것저것하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 옷 하는 사람이야, 뭐야?” 하고 욕한 모 디자이너도 있었대요. 하지만 요새는 “저런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실은 다른 일들을 같이 해서 오히려 제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옷 한 가지를 하는 데 열 시간을 일한다고 해도 열 시간 전부 실질적인 작업 시간은 아니잖아요? 유학기간에 저는 아르바이트를 스무 가지 넘게 해서 살았어요. 수업 끝나면 일하고 일 마치면 집으로 프로젝트하고 다시 일하러 가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고 조절하는 생활을 열여덟살 때부터 한 거죠. 그래서 일의 집중도가 높아요.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점도 잘 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 종교가 민속신앙이라서. (좌중 웃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아요. 30분만 말을 나눠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두번쯤 만나면 확실히 알겠고. -성함을 그대로 브랜드명으로 쓴 경우인데요. 구호라는 이름에 원래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브랜드 이름이 된 뒤 뉘앙스가 더 붙었다고 생각하세요? =구 자는 돌림자고요. 오랫동안 이름 안 짓고 아명으로 버티다가 세 살 반 때 할아버지가 절 불러 “앞으로 이게 네 이름이다”라고 붓글씨로 써서 보여주셨어요. 구할 구 자에 하늘 호 자. 어렵죠. 하늘을 구하라니, 뭘 어쩌라는 건지. (웃음) 철학하는 분들도 이름이 너무 세다고 해요. 브랜드 이름도 많이 고민했는데 외국인들에게 물으니 발음 느낌이 옷과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뉴욕에서 공부를 마친 뒤 출판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셨는데 곧 그만두셨습니다. 평면 디자인이 주는 답답함이 컸나요? =책상에 가만히 앉아 하는 일을 잘 못해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다보면 정해진 종이 규격, 화면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니 몹시 답답했어요. 졸업 뒤 2년쯤 그러다보니 뭔가 움직여서 만들고 지저분하게 일을 벌였다가 치우기도 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뉴욕에서 식당을 열었는데 관련된 일 중 디자인에 속하는 일은 전공이니 내가 하자 싶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을 제가 하게 됐죠. 구호의 브랜드 로고도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구호(KUHO)의 로고 글씨체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맨 인 블랙>의 자막 서체(파블로 페로)와 비슷해요. 구호 옷의 실루엣도 그러고 보니 세로로 기름하네요…. (웃음) =워낙 긴 실루엣을 좋아하고 컨덴스드 체(condensed: 옆으로 눌려서 세로가 긴 서체)를 좋아해요. 학창 시절 프로젝트에서도 그 서체만 고집했고 막판에는 아예 <컨덴스드>라는 책을 만들었더니 선생님들이 두손 들었죠. 초등학교 때 TV보고 박공예, 매듭공예 따라했죠 -어려서도 영화를 좋아하셨다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현실보다 서양영화를 보며 원체험을 한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여섯살부터 <주말의 명화>의 단골손님이었죠. 가요보다 팝송, 외국영화를 더 친숙하게 섭취한 세대라서 그것이 더 깊이 흡수됐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는 고교 졸업 직후 유학을 떠나 80년대 대학가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죠. 이런 이야기, 친구들은 화내겠지만 방학 때 귀국해 신촌에 놀러가면 다들 막걸리집에서 인상 쓰고 담배를 피우며 슬퍼하고 있었어요. 내일 하늘이 무너질 표정으로. 저는 기쁘고 즐겁게 사는데 친구들에겐 삶이 역경이었죠. “너희는 왜 그렇게 슬프니?” 물었지만 이야기의 끝은 “넌 이해 못할 거야”였죠. “알았어. 난 이해 못한다. 그냥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할게.” 그랬어요. 저도 한국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보고 겪었다면 다르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체험을 못하고 물질주의적 세계에서(웃음) 지낸 거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런웨이>의 스타일리스트 나이젤(스탠리 투치)이 “친구들이 풋볼할 때 몰래 재봉을 독학했다”고 회고하죠. 선생님도 어려서 새 옷을 사면 스스로 수선해서 입고 동생의 인형 옷도 지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공예부터 했어요. 흙장난, 소꿉장난부터 종이접기까지 뭐든 손으로 하는 작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부터 코바느질도 하고 TV에서 박공예니 매듭공예니 강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보자마자 재료를 사서 이튿날 똑같이 따라했죠.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사먹는데 전 사탕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 돈으로 재료를 샀고 하나를 완성해야 다른 작품에 착수했죠. 박공예를 해서 몇개 걸어놓고는 다음 프로그램 예고를 보며 “와, 이번엔 매듭이구나!”하고 또 매듭을 만들어서 걸어두고. 어머니는 그걸 떼내시기를 반복하는 그런 싸움을 고등학교 때까지 했어요. -록음악 하겠다는 아들 기타를 아버지가 부쉈다는 이야기의 박공예 버전이네요. (웃음) =아버지는 제가 만든 물건을 말없이 가져다 버리셨어요. 그러다가 홍익대 교수인 어머니 친구분이 소질이 있으니 가르치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미대를 지망하게 됐죠. <캔디> <올훼스의 창> 같은 만화를, 트레이싱 페이퍼에 베끼지 않고 대번에 아크릴로 채색해 그리기도 했어요. 이웃 금란여고 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죠. (웃음) -어려서 어머니의 스커트에 매혹된 추억을 쓰신 글을 봤어요. 구호의 옷을 살펴보아도 여성의 치마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평소 어머니는 아주 짧은 커트머리에 ‘당꼬바지’라고 하는 시가렛 팬츠(통 좁은 바지)를 주로 입으셨어요. 제가 치마를 입으라고 늘 졸랐죠. 처음 부티크(디자이너가 직접 운영하는 작은 매장)로 구호를 시작할 무렵엔 스커트를 훨씬 많이 만들었어요. 스커트는 여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스커트와 다리의 밸런스와 컴비네이션을 굉장히 좋아해요 샤넬라인보다는 길고 예전 미디스커트보다는 짧은, 무릎과 발목 중간의 길이가 제가 사랑하는 스커트 기장인데, 매장에서 다리가 짧아 보이는 길이라고 불평이 들어와도 우겨서 만들었어요. 트임이 적은 스커트도 좋아하는데 어떤 손님이 제 치마 때문에 출근길에 버스 타려 뛰다가 넘어졌다며 “뛰지 말고 걸으라는 정구호 선생 뜻이구나” 싶었대요. -다리와 치마의 조형적인 조화 말고도 스커트를 입었을 때 따라오는 몸의 움직임을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요? =스커트는 몸 전체를 길어보이게 해요. 바지를 입으면 서 있을 때 길어보일지 몰라도 걷기 시작하면 달라요. 스커트는 걸을 때도 면(面)으로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길어 보이죠. 또, 스커트에는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섹시함이 있어요. 여성들이 중요한 결정과 모임을 하는 날은 꼭 스커트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체형이 어떻든 스커트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어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웃음) 제가 여성복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남자라 옷을 직접 못 입어보고 만드는 거예요. 입다보면 옷을 달리 느낄 수 있거든요.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졸업 뒤 기성복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아서 옷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출판사에 입사하셨다고 읽었습니다. 출발부터 아예 독자적인 부티크로 시작하겠다는 건 대단한 자신감 아닌가요? 또 한 가지, 부티크를 차릴 자본을 모으기 위해 귀국 뒤에도 레스토랑을 계획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레스토랑을 해서 거꾸로 빚을 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돈이란 내가 기획해서 추진하면 벌 수 있다는 굉장한 낙관과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 신기합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제가 지닌 재주 중에 가장 현금화하기 좋은 것을 생각해보니 요리였죠.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다들 제 음식이 맛있다고 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퓨전 음식점을 하려고 했는데 정통 프랑스 요리를 제대로 하는 집도 드문 상황이라 제대로 배우자 싶어 요리유학을 간 거고요. 그런데 결국 레스토랑을 차리지 않고 바로 구호 부티크를 열었어요. 젊고 부양가족도 없는데, 간절히 하고 싶은 일부터 하자, 언제든 망하면 난 음식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은 거죠. 처음 기성복 회사에 취직 안 한 것은 패션 전공자도 아니고 경험도 없으니 그 부담을 안고 저를 채용해줄 사람도 드물 것이고 저도 그런 리스크를 남의 회사에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구호는 매장도 없는 상태에서 이태원의 레스토랑을 빌려 쇼부터 하는 특이한 출발을 했는데요. =광고비도 없었고 숍을 여는 것보다 신뢰를 얻기 위해선 제가 어떤 디자이너고 뭘 할 수 있는지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선배 디자이너들께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고 행사를 알렸고 기자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어요. 카탈로그와 포트폴리오도 보냈고요. 쇼도 모델라인에 찾아가 그냥 모델만 달라고 청해서 혼자 기획하고 음악 넣고, 이재용 감독을 포함한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죠.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죠. 다시 하라면…, 그래도 하고 싶네요. (웃음) 영화미술을 시작한 동기도 돈이었어요. (웃음) <정사>의 의상을 부탁받았는데 미술까지 담당하면 받는 돈도 커지니 목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고 여겼죠. -1990년대 말 청담동 레스토랑 실내장식을 담당하고 부티크 구호를 열면서, 젠 스타일 유행의 한복판에 계셨어요. 패션잡지 편집장들께 여쭤보니 트렌드와 정구호의 고유한 개성이 맞아떨어졌다는 의견도 있고 젠 스타일 바람을 형성한 주체라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젠을 굳이 염두에 뒀다기보다 원래 제 취향이 장식보다 기본 구조, 기본색에 충실하게 접근하는 쪽이니까요. 저는 자연은 자연대로 가만히 두되 그 위치만 바꿔놓자는 생각으로 모던한 실내에 돌절구와 잔디만 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보여드린 것뿐이죠.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저로 인해 동요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2003년 제일모직에 스카우트되기 전에도, 부티크 구호를 내셔널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FNF라는 기업과 제휴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기업과 결합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일찍 판단하셨나요? =외국 같으면 디자이너에게 아틀리에를 지키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유통구조가 그러기 어려워요. 매니지먼트, 재정, 작게는 천의 직조나 염색도 일정 규모 이상이 돼야 원하는 원단을 얻을 수 있어요. 후배들을 직접 지원 못해도 바람직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07년 봄/여름 시즌 쇼에서 엘스워스 켈리, 프랭크 스텔라 등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미니멀리즘에 한결같이 끌리십니까?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제가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무엇을 덜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더 해서 걸러낸 상태예요. 남들이 대여섯개 디테일을 쓴다면 저는 거기서 소거해가는 것이죠. 한편 완벽하게 장식적인 것은 미니멀한 것과 상통해요. 건축도 아주 고전적인 공간은 극히 모던한 공간과 어울릴 수 있고요. 라벨을 떼어내도 브랜드를 알 수 있어야 해요 -구호의 옷은 재단 방식에 큰 무게를 두기 때문에 건축하듯 옷 짓는 디자이너라는 평도 많이 들으셨죠. =구호의 기본 컨셉 중 하나가 뉴 커팅입니다. 일반적 양장 재단 패턴이 아니라, 그 옷이 보여주려는 실루엣에 따라, 표현하려는 체형에 따라 재단법을 바꾸는 거죠. 초기에는 어깨선이 없는 옷도 만들었는데 사이즈 분류를 위해 공장에 보냈더니 이런 옷은 처음 봤다고, 못하겠다고 도로 보내왔더라고요.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니까 어떤 사람이 입으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입으면 다른 식으로 옷이 떨어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 체형과 상관없이 입는 옷들이 있어서 부티크 시절에는 임신 사실을 공개하기 전인 연예인들이 많이 오기도 했어요. (웃음) 6개월까지 커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좌중 웃음) 저는 맞춤옷에는 재능이 없는 디자이너 같아요. 팔뚝이 굵으니 소매길이는 반드시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고정관념이 있는 분들을 안 좋아하거든요. 어쩌면 그것이 부티크를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죠. -매장을 구경해보니 지퍼를 쓴 옷이 드물어요. 여밈 방식도 고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퍼보다는 단추, 단추보다는 후크(걸고리), 후크보다는 스트링(끈)으로 여미는 옷을 좋아합니다. -여성의 몸에서 옷과 만났을 때 표현력이 가장 풍부한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목을 좋아해요. 목선이 쇄골을 딱 가리는 크루넥(crew neck)과 어깨선을 보여주는 스퀘어넥 라인을 특히 선호해요. 어깨는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목선만큼은 크루넥을 쓸 때도 있어요. 얼굴 주변을 단순하고 고전적으로 처리하면,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제가 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반면 허리선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죠? 몸의 곡선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옷인데 이른바 ‘여성적’라고 말하는 조형적 요소는 뭘까요? =여성스러움의 실루엣은 억지로 만들어진 곡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드러나는 선이라고 봐요. 종이 봉지 속에 사과가 들었을 때, 둥근 형태감은 있지만 정확한 모양은 구분가지 않는 상태처럼. 난 허리가 23이다, 26이다 보여주기보다 상상하게 만드는 편이 좋아요.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옷이 주름지고 자락이 쏠리는 실루엣 변화가 좋아서 자꾸 그런 장난을 칩니다. -옷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을 강조해오셨죠. 못마땅한 옷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브랜드마다 고유 실루엣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블라우스, 원피스가 색상만 바뀌어 들어가 있는 것은, 옷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결과예요. 옷은 라벨을 떼내도 색깔과 소재에 상관없이 실루엣과 옷이 입혀지는 방법으로 어느 브랜드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출발할 때 목표도 라벨을 떼어내도 구호라고 알아볼 수 있는 옷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1년에 몇벌의 옷을 지으세요? =900개의 스타일을 만들어요. 스타일마다 색채와 소재를 변주하니까 옷의 가짓수는 더 많죠. 미국 경우 연간 400개 스타일이 최대치라고 해요. 미국보다 한국이 매장에 걸리는 옷의 회전 주기가 3배가량 빨라요. -그건 버려지는 옷이 많다는 뜻도 되나요? =맞아요. 아까운 옷이 많습니다. 극장에 걸렸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영화가 많듯이. -한국 여성들이 유행에 순응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비슷한 옷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해에 새 옷을 사면 원하건 원치 않건 유행을 타게 되는 면도 있어요. =저는 통이 넓은 바지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새 옷을 사러갔더니 가게마다 시가렛 팬츠만 걸려 있어서 못 산 적이 있어요. 유행은 패션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입을 수 있게 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해요. 어렸을 때는 동네 가게에도 사과가 국광, 홍옥, 인도, 골덴, 스타킹 등 20, 30종이었는데 지금은 부사밖에 없어요. 잘되는 건 너도나도 하고 안 되는 건 무조건 없애버리는 문화는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옷도 마찬가지죠. 덜 팔리는 몇 가지 옷이 바로 그 브랜드를 유지하는 옷일 수 있어요. -구호는 고가 브랜드입니다. 매장 직원 말씀이 단골손님들이 이 옷은 구호의 몇년도 스타일이 돌아온 거라고 거꾸로 가르쳐주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요. 친숙한 고객에게 패션 이외의 조언을 할 때도 있습니까? =소비자 의견을 듣는 작업은 계속하려고 해요. 반영 여부는 제 자유지만요. 반면 저도 소비자들의 견해를 납득할 수 없다면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옷을 잘 입는 유일한 길은 많이 입어보는 거예요. -많이 입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양의 멋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영향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에게 큰 행복을 주거나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키는 물건이 있다면 다른 것을 포기해서 살 수 있다고 봐요. 진짜 자기가 원한다면 다른 소비를 포기하고 오페라 시즌 티켓을 사는 게 여유라고 생각해요. 학생 시절 저는 옷 10벌을 살 시간을 참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요지 야마모토의 와이셔츠 하나를 사 입었어요. 졸업 때까지 침대없이 살면서 입으로 불어 쓰는 에어 매트리스에서 잤어요. 진짜 원하는 침대는 살 처지가 아니었고, 그 침대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어디서 자든 상관이 없었어요. 뱅앤올룹슨(덴마크 오디오 브랜드)를 마련하기까지 오랫동안 19달러짜리 스테레오로 버텼어요.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디자이너니까 다른 걸 포기하고 최상의 디자인을 가진 물건에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향에 민감한 사람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진공관에 돈을 쓰겠죠.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경우 촬영현장에서 손수 전골을 끓이고 구석구석 정성을 기울이셨죠.그러나 아무래도 편집에 들어가면 주로 음식이나 소품을 보여주는 숏부터 잘려나가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웃음) =분노가, 생기죠. 엉엉. <스캔들…>은 심해요. 다 잘렸어요! 하지만 영화의 주체는 감독이니까 할 수 있나요. 해서 딱 한편 영화를 감독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미술이 아주 잘 보이는 영화로 말이죠! --<스캔들…> 이후 방송, 영화계에서 사극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사를 다룬 작품은 고증보다 상상이 앞선 의상도 선보였고요. 관심 갖고 보셨나요? =변형 자체가 금기시됐던 과거와 달리 <스캔들…> 이후 전통의상을 응용하는 범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잘됐다고 봐요. 하지만 일정한 규칙은 있어야 해요.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룰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보여줄 의상의 한계, 범위와 뿌리에 관한 창작자 자신의 규칙이죠. 그 범위가 보이지 않으면 깊이가 사라져요. 디자이너가 어깨선을 올리겠다고 말하면 저는 꼭 이유를 요구해요. 그냥 예뻐 보여서라고 답하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유있게 어깨선을 올리는 것과 그냥 올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가 흘러가는 중에 의상이 변한 이유가 분명히 보일 때 남과의 차별성이 생겨요. 단순히 이것 예쁘니 가져다 쓰자는 것과 작품에 맞게 해석하고 변형하는 건 달라요. -미술을 맡은 <텔미썸딩>에서 심은하씨의 캐릭터는 내내 싱글 버튼 H라인 의상을 입었는데요. 스릴러는 너무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옷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나요? =맞아요. 보통 미스터리영화는 관능미를 강조하고 화려한 색을 쓰는데 저는 스릴러라고 세련미가 떨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또한 심은하씨 캐릭터가 치밀한 성격이 아니고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죠. -<순애보>를 보면, 우인(이정재)이 매형과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마른멸치를 접시에 둥글게 담고 깨, 참기름, 고추장을 찍어먹는 종지 세개를 놓더라구요. 내심 웃었어요. =그 멸치는 저보다 이재용 감독 취향이에요. (웃음) 우인이 감독을 많이 닮았어요. -<스캔들…>이 전작이다보니 <황진이>의 미술 의뢰를 수락하기까지 오래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스캔들…> 이후 사극을 여러 차례 의뢰받았지만 사양했어요. <황진이>를 하기로 결심한 건, <스캔들…> 이후 나온 사극들이 잘했지만 의상을 해석하는 범위나 틀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스캔들…>이 고증에 제 생각을 약간 더한 영화라면 이번에는 고증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변화를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어요. -고증 대 상상의 양극단으로 대비하셨는데 <황진이>는 어떤 범위에서 두 가지를 결합한 건가요? 홍석중 작가의 원작에는 옷차림과 살림살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꽤 많은데요. =원작의 묘사는 개의치 않았어요. 실제 황진이의 시대와 무관한 일제 강점 직전 조선 말기 기생들의 자료를 봤습니다. 신윤복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고리 위로 치마를 완전히 뒤로 끌어당겨 둘러서 일자형 셰이프가 나오더군요. 미술이 기존 <황진이> 이미지를 깨지 못하면, 차별화의 부담을 연출과 연기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는 그 부분을 돕는다고 생각해 파격을 제안했어요. -물에 둘러싸인 명월(황진이)의 집과 명월의 옷을 사진으로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성공한다면 <황진이> 스타일의 응용이 유행할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은 관객의 눈에는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예요. 우스꽝스러워지는 것과 혁신은 종이 한장 차이니까요. =영화를 보면 더 놀랄 거예요. 모험하지 않고 애매해지면 이 영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기본 컨셉은 제가 잡고 진행은 김진철 미술감독이 하셨죠. 명월 집만 제가 신경을 많이 썼고요. 안채를 둘러싼 중원을 연못처럼 물로 채워서 징검다리로 직접 건너거나 누마루를 통해 갈 수 있도록 했어요. 기생의 집은 밤에 화려한 공간이고 그 화려함을 물의 반영이 증폭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죠. 그 추운 날씨에 땅을 파고 물을 채우느라 난리를 쳤는데 영화에 덜 보여 아쉽죠. 그리고 <황진이>는 붉은색이 없는 영화예요. 오방색(청, 황, 적, 백,흑)을 놓고 정리를 해보니 빨강을 빼지 않으면 색 조합이 달라지지 않더군요. 붉은 기가 빠지면서 영화가 차가워졌지요. -붉은색을 쓰지 않고 화려함을 구현한다는 목표네요. <스캔들…> 개봉 당시 마음에 드는 빨강을 얻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빨강의 까다로움은 무엇인가요? =까닥하면 천해 보이고 잘하면 고급스러운, 천의 얼굴을 가진 색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지는 위험한 색입니다. <스캔들…>은 그 위험에 대한 도전이었죠. 요즘 사극들이 붉은색을 남발하고 붉은색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이번에는 “아니다, 그렇게 센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개된 사진을 본 사람들이 빨강을 쓰지 않은 것보다 검정에 먼저 강하게 반응해요. =우리나라 실내색은 주로 나무와 창호지, 노란 장판인데 <황진이>는 까맣게 갔죠. 일본스러우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있었는데 안 그럴 거라고 설득했어요. 바닥은 검정 화문석으로, 거문고도 까맣게 칠했죠. 병풍은 빼고 장롱으로 채웠어요. 조선 후기 기생들은 남자들에게 선물받은 가구를 쌓아올려 세를 과시했대요. 북한에서 들어오는 골동품을 사서 장식을 뜯어내고 검게 칠해 리폼하고 백동 장식이 많이 붙은 개성장을 재현했어요. -색채도 색채지만 한복 소재가 인상적이었어요. 검은 크로셰(손뜨개) 레이스도 쓰인 것 같은데요, 엉뚱하게 고야의 여인 초상화가 떠올랐습니다. =한복 소재는 통상 자가드나 실크인데 그보다 로코코 소재를 응용해보고 싶었어요. 오간자(얇고 빳빳한 실크)에 레이스를 덧대고 은박도 썼어요. 기존 한복과 가장 다르게 느껴질 점을 간추리면, 소재, 색채의 조합 그리고 액세서리예요. 액세서리는 다 새로 제작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머리꽂이를 만들고 바닥까지 끌리는 1m 넘는 노리개도 제작했어요. 디자이너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구호의 옷은 미인이라고 무조건 어울리는 옷이 아닌 듯합니다. 예를 들어 2006년 1월에 바비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행사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어색한 느낌이었어요. =홍보의 일환이지만 제 개인 취향은 아니죠. 사람을 좀 타는 옷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당장은 어색해도 그 어색함을 딛고 나아가면 인이 박힐 수 있는 옷이라고. 공간도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장소가 나중엔 더 오래 친숙해질 수 있는 곳일 때가 많아요. 사람도 까다로운 사람이 접근하긴 어렵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 가는 이치와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첫눈에 사람을 풀어지게 하는 편한 집보다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게 해 주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하죠. =몸에 밀착하는 옷의 재단이 제일 쉬워요. 옷은 사람 몸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만들기 힘들어요. 옷이란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몸과 옷 사이에는 일정한 공기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상의 입체공간, 적당한 공기층을 생각하면서 옷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숨쉬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옷을 직접 입었을 때 디자이너의 힘을 강렬하게 느낀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앤트워프 출신 마틴 마르지엘라 같은 전위적 디자이너 옷에 반해 옷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티셔츠 하나에도 다른 느낌이 있는데 그걸 알고 나면 그렇지 못한 ‘상업적인’ 옷을 입기 힘들죠. 저는 구치나 돌체 앤드 가바나 같은 브랜드도 상업적인 옷이라고 생각해요. 사람한테 반짝이 가루를 확 뿌려서 금세 반짝거리게 만들어주잖아요? 그런데 1년이 지나면 그 옷을 다시 못 입고 다른 반짝이를 뿌려야 해요. 예술이나 패션이나 구획화(zoning)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격대보다도 옷의 분위기와 속성, 연출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뜻이죠. 영역 구분 없이 아무나 어디서나 통하는 건, 모두 똑같은 위치에 소파, 텔레비전을 놓고 사는 우리 아파트 문화와 같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구호는 청담동 ‘규수’들의 옷이라는 이미지가 셌습니다. 그동안 요가, 생활용품 등 라인을 확대하셨는데 상대적으로 중저가 라인을 만들어 구호 특유의 세심한 재단과 좋은 구조가 있는 옷의 맛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는 없으신가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호의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호의 느낌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어요. -맛과 아름다움에 예민한 만큼 추한 사물과 현상에도 민감하시죠?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재능이 있어요. 민속신앙인데가 운명론적인 사람이라, 예쁘고 세련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정의하고 생활하세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해요. 누구나 태어나 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능력이 많아 자선사업을 크게 할 것도 아니고, 학식이 높아 학생을 가르칠 수도 없으니 다만 가진 감성으로 노력해 새로운 발상을 시각적으로 보여드리고 사람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할 뿐이죠. 더이상 영향을 줄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하거나 조그만 장소에서 만들고 싶은 물건만 만들면서 지내겠죠. 그 둘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요. (웃음)

[외신기자클럽] 영화제에 로그인하시겠습니까?

2007년 영화제들이 급진적일 정도로 새로운 방식으로 온라인으로 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영화제는, 재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저작권 소유자에게 1회 상영료를 지불하는 방식을 취하며 대안적인 배급망으로 부상해왔다. 이제 영화제들은 배급사들이 아직 감히 시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온라인상에 영화들을 올리고 있다. 독립영화를 다루는 유럽의 주요 영화제인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지난 1월, 영화제 상영작을 몇 편 선정해 500명의 로테르담 거주자들이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실험을 감행했다. 영화제는 앞으로 로테르담의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에서 영화제를 병행하기 위해 선정작 70∼80%를 온라인으로 가져올 생각이다. 같은 달, 선댄스영화제는 몇 개월간 아이튠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선정된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를 제공하기 위해 애플사와 협력했다. 이는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단편영화 후보에 오른 다섯편의 영화를 애플의 디지털 미디어 스토어에서 각 1.99달러에 온라인에서 볼 수 있도록 한 협력에 연달아 이어진 것이다. 2월에 애플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탤런트 캠퍼스에서 ‘뉴 가라지 플릭’ 이벤트를 후원했다. 이 이벤트에서 양성하는 세계 각지에서 온 350명의 젊은 감독들은 6일간 매일 한편씩 영화를 만들었으며, 애플은 이 영화들을 온라인에서 상영했다. 애플은 또한 특정 영화제 이벤트와 인터뷰들을 무료 다운로드할 수 있는 파드캐스트(podcast)를 제공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보스턴독립영화제는 17편의 영화제 상영작과 지난 5년 동안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단편영화를 같이 구매할 수 있는 애플TV 세톱박스를 이 기기의 일반적인 소비자 가격보다 50달러 높은 349달러에 판매했다. 500달러를 내면 보스턴의 관객은 애플TV에다가 모든 영화제 상영과 파티에 우선적으로 갈 수 있는 아이디를 받게 된다. 영화제들이 온라인으로 가는 동기는 각기 다르다. 로테르담은 분명히 자신들의 실험을, 그들이 전세계에서 가져오는 영화문화를 더 넓은 커뮤니티로 확대하는 도시민들에 대한 서비스로 보고 있다. 선댄스와 베를린은 신인감독들에게 더 많은 노출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들의 브랜드를 이용한다. 보스턴의 경우 비영리 조직인 영화제가 돈을 모으는 방법이다. 올해의 온라인으로의 변화가 급진적인 이유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화제들이 이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베를린의 인터내셔널 포럼 부문이 영화를 선정하며 독일 인터넷 판권을 요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참가를 철회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베를린은 유럽의 인터넷 판권을 요구하면서 선정작들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의 포럼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자국 내 박스오피스에서도 블록버스터가 아니며, 해외에서도 거의 팔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주 특별한 손님>은 한국 개봉시 1만5천달러 이하의 총수입을 냈다. 지난해 포럼 영화들 중 <피터팬의 공식>과 <방문자>는 한국 개봉관에서 각각 대략 2만달러와 4만달러의 총수입을 냈다. 만약 한국의 부산국제영화제가 뉴커런츠 부문 참가작들에 국내 인터넷 판권을 요구한다면, 아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경쟁부문을 국내에 더 잘 알리고 젊은 감독들의 노출 기회를 증가시켜줄 것이다. 아시아 최고의 인터넷 접속을 자랑하면서 아시아영화가 가장 약한 마켓 중 하나인 한국은 그런 실험을 하기에 완벽한 나라다. 어쨌든 지난해 뉴커런츠 부문 선정작 중에서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단 한편만이 한국 개봉을 잡고 있다. 이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흥분되는 데뷔작인데, 인터넷에서라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In 2007, film festivals have gone online in a radical new way. Over the past decade, they have emerged as an alternate film distribution network, paying one-off screening fees to copyright owners for minimal financial risk. Now they're taking films online in ways that distributors don't yet dare. In January, International Film Festival Rotterdam, Europe's key festival for independent cinema, began an experiment in which 500 city residents were able to watch selected festival films through their television sets. The festival hopes to take 70-80% of their programme online in the coming years so as to create a parallel film festival on the city's television screens and computer monitors. In the same month, Sundance Film Festival teamed up with Apple to offer selected features, documentaries and shorts for sale on iTunes over a period of several months. It follows Apple's collaboration with last year's American Academy Awards in which the five nominations for Best Short Film were available online for $1.99 each from the company's digital media store. In February, Apple sponsored a new Garage Flick event at the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Talent Campus. The 350 young filmmakers from around the world that are nurtured by the event produced a film every day for six days that Apple made available online. Apple also distributed selected festival events and interviews on iTunes as free download-able podcasts. And this month, the forthcoming Independent Film Festival of Boston is selling an Apple TV set top box pre-loaded with 17 festival films and shorts from the past five editions for $349, $50 more than the media device's normal retail price. For $500, Boston moviegoers get the Apple TV and a festival pass that gives priority access to all screenings and parties. The festivals have different motivations for going online. Rotterdam clearly sees their experiment as a service to city residents, sharing the film culture they bring from around the world to the wider community. Sundance and Berlin are using their brand to bring greater exposure to new filmmakers. For Boston, it's a way to raise money for their non-profit making organisation. What's radical about this year's shift online is that it's coming from some of the world's most powerful film festivals. What would happen if Berlin's International Forum of New Cinema demanded German internet rights from films in their selection? Would South Korea's Ad Lib Night have pulled out? I don't think so. Berlin could demand European internet rights and keep its selection. Movies that screen at Berlin's Forum generally aren't blockbusters at their domestic box office and rarely sell outside of their own countries. Ad Lib Night, for example, grossed less than $15,000 on release in Korea. The films in last year's Forum, The Peter Pan Formula and Host & Guest grossed approximately $20,000 and $40,000 respectively on release on Korean screens. If Korea's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required domestic internet rights from films submitting to its New Currents competition, I suspect it would secure them. It would promote the competition nationwide and increase the young filmmakers exposure. With the region's best internet access combined with one of the weakest markets for Asian cinema, Korea is the perfect country in Asia for such an experiment. After all, only one of the films in last year's New Currents selection has a Korean theatrical release scheduled, Driving with My Wife's Lover. It's an exciting debut that deserves to be seen by a wider audience, and the internet could provide just that.

영상 포엠 혹은 생과 사에 관한 고찰 <화이트 발라드>

<화이트 발라드> A White Ballad 스테파노 오도아르디/이탈리아, 네덜란드/2007년/78분/인디비전 이탈리아의 신인 감독 스테파노 오도아르디의 장편 데뷔작. 강건한 양식성으로 일관하는 영상 포엠 혹은 생과 사에 관한 고찰. 어느 노부부 한 쌍이 있다. 그들은 서로 말이 없다. 각자의 상념만이 있다. 그런데 그 상념들이 마치 텔레파시처럼 메아리가 되어 서로의 대답이 되고 질문이 된다. 영화는 그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그들이 대화 대신 독백의 교환에 빠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남편은 슬퍼한다.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깊고 긴 상념에 잠겨 지나간 삶과 얼마 남지 않은 공존에 대해 기억하거나 침묵으로 질문하는 것뿐이다. 이 노부부의 에피소드에 지속적으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병치된다. 유적지인 듯 보이는 곳을 배회하는 젊은 여자. 간접적인 주석자처럼 개입하는 이 여자를 죽음의 형상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그리고 덩그러니 비어있는 두 개의 의자. <화이트 발라드>의 이미지들은 이야기 대신 정신의 상태를 전하기 위해 있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두고 “고독과 젊음, 쇠락과 사랑에 대해 말과 이미지로 이루어낸 영화적 여행”이라고 말했다 한다. 양식적이며 상징적인 영화에 지치지 않는 관객들에게 권함. 2006년 로테르담영화제 상영작.

[일제시대 경성의 매혹] ‘모-던 뽀이’와 ‘모-던 껄’을 만나다

1930년대 경성이 배경인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기묘한 중국 여관을 보며 “이 모든 것이 뒤섞인 지나치게 음울하고 복잡한, 그러다보니 급기야 약간 코믹하기까지 한 분위기는 다시 보니 영락없는 경성풍이었다”는 감상을 토로한다. 식민지 시대 경성은 정말 그런 도시였을 것이다. 한복 치마 아래에 하이힐을 신고 히사시가미(앞머리를 부풀리고 뒷머리를 올린 머리)를 한 여인처럼, 양풍도 아니고 왜풍도 아니며 조선풍도 아니었던 도시, 그리고 사람들. 그 때문인지 요즈음 한국 영화계는 항일을 논하지 않고는 등장하지 못했던 일제강점기를 뒤져 소재를 건져올리고 있다. <모던보이>(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는 향락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잃어버린 연인을 찾는, 한때 아무 생각 없었던 조선총독부 소속 공무원 청년의 이야기고, <라듸오 데이즈>(감독 하기호, 출연 류승범)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PD가 주인공이다. <기담>(감독 정식·정범식, 출연 김태우·김보경·진구)은 1940년대 경성 병원을 배경으로 끔찍한 살인사건을 파헤친다. <다리퐁 걸>(가제, 감독 송일곤)은 비도덕적이거나 욕설이 섞인 대화가 오가면 전화를 끊어버리기도 했다는 경성의 전화교환수 다리퐁 걸(텔레폰의 일본식 발음)을 선택한 로맨스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얽혀 있던 일제강점기 경성. 장르를 불문한 여덟권의 책을 징검다리 삼아 그곳으로 건너가보려 한다. 그 무렵 경성에는 혼부라당이라는 무리가 있었다. 밤이 늦도록 번화가인 혼마치(충무로 일대) 일대를 헤매고 다니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일컫는 이 속어는 1920, 30년대 경성의 풍경과 더불어 그 구조까지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1927년 미스코시백화점 개장을 시작으로 고급 상점가를 형성했던 혼마치는 전통적인 조선 상권을 무너뜨린, 일본인 지역 남촌을 대표하는 상권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시와 중절모를 눌러쓴 젊은이들은 혼마치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치장을 했으며, 웨이트리스들은 상대하는 남자마다 양반집 규수나 프롤레타리아로 신분을 바꿔가며 농락하거나 농락을 당하곤 했다. 비단옷으로 차려 입던 기생들마저 여학생처럼 보이고 싶어 하얀 저고리 검은 통치마 차림으로 나들이하던 그 시절, 만화는 전차 안에서 똑같은 자세로 금시계와 보석반지를 쳐들고 섰는 모던걸들을 그리며 그걸 사줄 돈이 없으면 가정조차 꾸리지 말라는 풍자를 내뱉곤 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남들보다 먼저 외국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이처럼 자주 희화화되었다. 드러낸 여인의 종아리며 계집처럼 단장한 사내의 얼굴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떤 가치보다도 화폐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자본주의를, 그들이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만화들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값비싼 옷을 걸치고 나오거나 부유한 시골 사내의 손을 잡아끌어 백화점으로 향하는 모던걸들을 비난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한 허영 이상의 사회현실이 깃들어 있다. 모던걸을 대표하는 여학생과 신여성들은 대부분 학력에 걸맞은 직업을 찾기가 어려웠고, 부유한 남자의 첩으로 지내거나 심지어 거리로 나서 ‘스트리트걸’이 되기까지 했다. 스웨덴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나중에 채워넣을게요)이 취직을 하지 못해 콩나물을 팔며 가난에 시달렸던 것이 그 예다. 게다가 모던걸과 연애를 할 만한 모던보이들은 거의 모두 어릴 적에 정해둔 아내와 정혼자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모던보이보다도 모던걸이 더욱 통렬한 풍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근대의 혼돈과 식민의 아픔이 서로 뒤섞인 시절 그런데 경제력과 겉치레가 어긋남을 조롱하는 만화들을 자세히 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감수해야만 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 또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구시가 중심이었던 대한제국의 도시계획을 뒤엎고 용산과 명동을 아우르는 남촌을 중심으로 도로와 사회기반시설을 설계했다. 북촌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고 하수도 제대로 빠지지 않는데 비해 남촌은 시원한 도로와 더불어 화사한 불야성을 이루었던 것이다. 종로가 더럽고 비좁다 한탄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진고개(지금의 명동)로 발길을 돌려 재즈를 들으며 홍차와 칼피스와 커피를 마시고 찰스턴을 추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돌아갈 곳은 결국 북촌이었음에도. 이처럼 일제강점기 경성은 모든 것이 어긋나고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기묘한 도시였다. 해수욕과 피서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모두들 가난했기에 삼십전이면 갈 수 있는 한강철교가 휘어지도록 피서 인파가 몰렸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연애가 만연하여 구여성들은 버림을 받았으며, 도쿄역사를 그대로 본뜬 서울역사가 찬탄 속에 기둥을 세웠다. 그 시절, 모던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였을까. 몸이 채 자라기도 전에 어른 양복을 맞추어 입은 소년처럼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을까 혹은 모진 운명을 겪은 경성 트로이카와 나혜석 같은 신여성들에게 그랬듯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자유였을까. 반세기가 넘은 2007년과 2008년에 우리는 몇편의 영화를 통해 현대를 낳은 ‘모던한’ 경성으로 돌아가 그 시대의 명암을 멀리서나마 관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과 열정사이] 21세기에 도래한 신파 뉴웨이브

갖다 붙이자면 ‘토끼굴’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이 있다. 좁은 굴 속에 토끼를 몰아넣고 연기를 피워 질식시키는 토끼 사냥식의 이야기를 가진 영화들이다. 토끼 사냥과 토끼굴 영화들의 다른 점은 사냥에서 토끼는 연기에 질식해 굴을 뛰쳐나오는 시나리오지만 영화에서 토끼는 굴의 구석을 점점 더 파고들어가다가 결국 그 안에서 죽는다. 비극적 죽음이라는 점에서 엔딩은 같다. 토끼굴 영화의 대표작이라면 나는 단연 <어둠 속의 댄서>를 꼽겠다. 2000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 장르 최고의 작품임을 인정받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셀마의 인생은 구석으로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린다. 더이상 굴을 파고들어갈 손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다. 그것도 사형당한다. 그것도 살인 누명을 쓰고. 밀려오는 연기로 질식하는 와중에 그녀는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의 것을 포기한다. 멀어져가는 눈과 평생 모은 돈과 결국에는 목숨까지. 그리고 7년이 흘러 셀마에 필적할 순교자적 인물이 강림했으니 ‘혐오스런’ 마츠코다. 마츠코가 얼마나 재수없고, 남자복이 지지리 없으며, 또 심지어 그녀의 선택 또한 어쩌면 그렇게 삽질스러운지는 여러 리뷰들이 잘 알려줬기에 여기서 더 쓸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그녀도 일 버려, 돈 버려, 몸 버려, 마음 버렸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철없는 꼬마들의 장난 같은 폭력으로. 그렇게 죽은 그녀의 머리 뒤로 영화는 후광을 씌운다. 웃자는 거지? 웃자는 거 맞다. 여기서 토끼굴 제1범주와 제2범주가 갈린다. 전자가 <어둠 속의 댄서>라면 후자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가 창시했다. 이 두 가지 하위장르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한 가지만 꼽자면 ‘토끼몰이’의 적용범위다. <어둠 속의 댄서>는 주인공 인물과 관객 양쪽에게 쌍끌이식으로 운영한다. 셀마가 겪는 인생의 혹독한 시험이 단계를 올려갈수록 관객도 ‘어때, 불쌍하지?’에서 ‘이래도 안 울어? 니가 인간이야?’까지 압박의 단계 상승을 경험한다. 셀마가 교수대에 오를 때에는 그 압박감이 너무 심해 거의 온몸을 두들겨 맞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영화보다 주연배우 비욕의 그 유명한 파파라치 폭행사건이고 내가 비욕으로부터 두들겨 맞던 그 여기자가 된 것 같다. 주인공의 신파성과 파국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의 그 과감한 보폭으로 따지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어둠 속의 댄서>에 못지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을 압박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쯤 울어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 싶을 때 ‘릴렉스~릴렉스~’를 외친다. 신파적 표현의 궁극이라고 할 만한 동반자살 기도 장면에서 상대 남자는 입에 들어 있는 수십개의 알약들을 질질 흘리며 “무서워서 못 죽겠어”라고 말하고, 비참하게 망가져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던 50대의 마츠코는 텔레비전 속 아이돌 그룹에 벼락처럼 꽂혀 책 한권 분량의 팬레터를 신나게 쓴다. 또 마츠코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포르노 배우 친구는 죽은 마츠코의 유품들을 수습하던 조카 쇼에게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최신 출연작 3종 세트를 선물한다. 웃다보면 어느새 후광을 배경으로 한 마츠코가 마치 천국의 아버지와 재회하러가는 예수님처럼 계단을 끝없이 올라간다. ‘이 계단, 길어도 너무 긴 거 아냐?’라는 반감이 살짝 들 때쯤 가슴속에 뭔가 뭉클한 게 느껴진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비브르 사 비>(그녀의 삶을 살다)잖아. 왜 꼬이는 인생이라고 삶의 즐거운 순간과 한심스러운 순간과 어처구니없는 순간과 웃기는 순간이 없겠는가. 왜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안 짓고,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지 않겠는가. <어둠 속의 댄서> 같은 지금까지의 토끼굴 영화들은 내용상의 희생뿐 아니라 눈물을 짜내기 위해 캐릭터의 희생(텔레비전 안 본다! 바보 같은 표정 안 짓는다! 아마 똥도 안 눌걸?)을 동반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손수건을 든 관객에게 아첨하기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아끼는 마음으로 돌본다. 이것만으로도 ‘21세기에 도래한 신파의 신파(뉴웨이브)’라고 이름 붙일 만하지 않은가.

이세영, 추상미 주연 <열세살, 수아> 첫 공개

일시 5월 30일 오후 2시 장소 씨네코아(스폰지하우스) 이 영화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추상미)와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는 열 세살 수아(이세영). 평범하고 약간 숙맥이지만 착한 소녀다. 하지만 아빠 없이 사는 요즘 엄마가 고물상 아저씨와 친해지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친구와의 사이는 틀어지고 우연히 수아는 또 다른 친구와 어울리다 경찰서까지 가게 된다. 서먹했던 엄마와의 사이는 나빠지고, 엄마와 싸우고 난 뒤 수아는 진짜 엄마를 찾으러 가겠다며 서울로 상경한다. 수아가 애타게 찾는 진짜 엄마는 자신의 환상 속에 그리고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유명 여가수다. 말말말 "한 번도 애기엄마가 되 본 적 없다. 그래서 13살 아이 엄마를 하는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수아가 꼭 내 13살 모습이더라. 모든 게 낯설고 구름위를 걷는 것 같던 때가 아닌가.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이 영화를 하게 됐다. 이번에는 수아가 욕심나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중요하지 않고 수아를 잘 보아 달라"(추상미) "우리 엄마가 너무 말씀을 길게 하셔서 저는 짧게 하겠습니다. 저는 어리니까요. 재미있게 봐주세요"(이세영) 100자평 "숫자를 세며 걷는 조용한 아이, 수아는 열세 살이다. 아버지가 돌아신 후 식당 하는 지겨운 엄마와 단둘이 산다. 수아에겐 비밀이 하나 있는데, 진짜 엄마가 사실 유명가수 윤설영이라는 것. 고요한 무채색의 세계에 살지만, 자신의 내면에 환상과 마술의 따뜻한 세계를 품은 아이 수아. 삶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듯, 환상은 환상이고 현실은 현실. 그러나 <열세살, 수아>는 현실과 환상의 균형점을 마침맞게 찾아냈다. 청보리밭 옆으로 지나는 노란 버스에서 수아가 받아들이는 현실과 환상의 화해가 아름답고 감동적. 아이와 소녀 사이, 아릿한 성장통 속에서 한때 수아였던 어른들을 위한 영화. 음악 감독을 맡으며 특별 출현한 자우림 보컬 김윤아의 빨간 드레스도 만날 수 있다." 송효정/영화평론가 “처음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이세영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깍쟁이 역할을 맡았던 지난 작품들보다 미열에 시달리는 사춘기 초입의 지금 역할을 훨씬 잘 해내고 있다. 이 어린 배우는 지난 영화들에서 어른들의 손때를 탔던 것보다 훨씬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보통아이의 고민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보다 너무 평탄하다.” 정한석/씨네21 기자

[신진 여성작가 3인] <달로>의 한유주

실재가 아니었던 실재와, 실재가 아닌 실재와, …그런, 되짚어 돌아가고만 싶은, 지난 세기와, 여자들이 종아리까지 긴 양말을 신었던 시대를, 손바닥에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눌러 끄고, 끝없이 그물처럼 펼쳐진 어느 길을 따라서, 긴긴 밤을 지새우며, 세월에도 빛바래지 않은 누군가의 최초의 기억들을 찾아…. _<달로> 중에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언어가 미끄러진다. 허공을 맴도는 단어들, 의미에 정박되지 않는 문장들, 응집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문단들. 한유주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며, 종종 난독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문장은 읽어내림과 동시에 기억에서 휘발되기 일쑤고, 문단과 문장, 단어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해 읽는 과정을 거듭해야 한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달로>는 각각의 작품이 사실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잠언에 가까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로, 달로, 세계는 현재를 그대로 간수하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달로>)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죽음의 푸가>) 하나의 몸짓으로 수렴되지 않는 단어들의 윤무 속에서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들은 행간을 떠돌며 이미지의 맥박을 느껴야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하나 정도 짚어보자면 바로 자기분석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쓰는 것이었다. 인과관계나 서사적인 요소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지금의 글쓰기로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한유주의 글에는 우리가 흔히 소설에 기대하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매끈한 서사의 흐름에 독자를 흡입하는 대신, 역으로 몰입 자체를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이인성의 평을 빌리자면, “체질적으로 이야기에서 자유로운” 한유주의 작법은 넘쳐나는 “가짜 이야기들”에 대한 반작용의 지점에 있다. 전파를 타고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수신되는 메시지들, “세계를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하는 폭력적인 이야기들. 삶을 간결하게 재단해 틀에 집어넣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적어도 내 삶은 기승전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거기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지 않나. TV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뻔하면 쉽긴 하지만, 너무 설명을 하려 드니까.”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채워 넣는 것은 온전히 읽는 자들의 몫이다. 예컨대 <달로>는 우주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기억과 역사, 신화를 경유한 상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각자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을 정서를 환기하고, 촉발한다. “달은 정말 흔해 빠진 상징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딱 하나의 달을 두고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이 있고, 각자 부여한 의미가 있지 않나.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독자들의 편지를 보니 그들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느꼈더라.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고.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가장 기쁜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말줄임표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빈 공간을 채워 넣을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일방향처럼 보이던 독백은, 백지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수신받기보다는 끊임없이 발신할 것을 촉구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탐닉했다는 한유주이지만, 등단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문예창작론 수업을 듣던 중 기말과제로 소설을 완성하게 됐고, 친구의 권유로 문예지에 응모한 것이 바로 등단으로 이어졌다.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얼떨떨했다. 지금은 그래도 덜하지만,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작가라는 자의식도 거의 없었다. (웃음)”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남들이 새롭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렇지 않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내가 10년 뒤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를 곰곰이 자문하는 타입이다. 의미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자신의 작품처럼, ‘작가’라는 타이틀의 무게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주는 매혹에 더욱 관심이 많다. “글을 쓰다보면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저 아, 내가 정말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지나갈 때, 그게 너무나 좋다.” 대학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아마도 졸업 뒤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직장에 취직해 밥벌이와 글쓰기를 병행”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작정이고, 운이 좋다면 대륙의 공기 속에서 첫 장편이 탄생할 것이다. “대단한 걸 써야지, 하는 마음은 없다. 그냥 쓰는 것뿐이다. 10년쯤 뒤에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내가 쓴 책을 읽어준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외신기자클럽] 세계 최고 영화도서관의 몰락

영화도서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런던에 있는 영국 필름인스티튜트(BFI) 국립도서관은 역사적인 영화잡지와 신문자료, 스틸사진, 영화제 카탈로그와 시나리오에다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에 관한 5만여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도서관일 것이다. 1934년에 “국내외의 제작, 상영, 배급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일에 관한 정보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설립된 BFI 국립도서관은 과거 70년 동안 증가하는 수집목록을 적재하고 공적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다섯번은 자리를 옮겼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곳의 독서실에서 아시아영화를 연구하며 5년을 보냈다. 도서관은 소수정예의 지식을 갖춘 인간들로 가득했다. 매주 월요일에는 <버라이어티>에서 최신 영화평들을 읽으려는 경쟁이 대단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날에는 그저 입장하기 위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할 정도였다. 월드와이드웹 시대 이전, BFI 국립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1930년대부터 시작한 종이 인덱스 카드의 상호참조 시스템을 사용했고, 1980년대에는 도서관 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수작업으로 입력됐다. 일반인들은 도서관 독서실에 있는 단말기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관료주의와 두려움으로 인해 BFI는 1990년대에 더 많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온라인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기회들을 놓쳤다. IMDb의 분산된 접근법과는 반대로, BFI는 품질을 유지해주는 식견이 넓고 꼼꼼한 관내 팀이 자료를 모은다. 2002년 정도까지도 BFI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영화 데이터베이스로 자리잡고 있었다. 1996년, 나는 서초구에서 4주를 보냈다. 한국영상자료원과 그곳의 열람실에 걸어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잠기지 않은 캐비닛에 있는 VHS 테이프들을 갖다가 누구나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비디오 모니터들이 있는 걸 보고서 충격받았다. 런던에서 관람은 엄격하게 규제되어 약속을 잡고 지하에 있는 방에서 시간당 돈을 지불하고 봐야 했다. BFI 도서관에서 특정 영화에 대해 읽어 내려가며 며칠을 보내면서, 결코 쉽게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술궂은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에 관해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과 그 의견에 대해 들을 만한 자격밖에 못 갖춘 사람들이 있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과도 같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최근 180억원을 들인 상암동 센터로 위치를 옮겼다. 그곳엔 일반인들이 무료로 DVD를 볼 수 있는 도서관 독서실에 26개의 단말기가 있다. 연말까지 자료원은 900편의 한국 장편영화를 비롯해 700편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도서관 내에 디지털 스트리밍할 수 있도록 준비 완료할 계획이다. 이번 여름 BFI 도서관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었다. 5월과 6월은 학생들이 시험에 집중하는 때이기 때문에 한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수의 감소가 현저하다. 영화도서관과 자료원들은 대중이 구글, IMDb, 위키피디아 등으로 돌아서면서 영화사 기록에 대한 자신들의 독점권을 잃었다. 한국, 홍콩, 대만의 영화도서관들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반면, BFI 도서관은 2008년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료 회원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BFI 도서관은 현재 위치에서 개방을 유지할 만큼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새로운 사옥도 못 찾고 있다. 인터넷이 세계 최고의 영화도서관을 물러나게 한 게 아니라, 그 도서관이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시간이 소중하다

2005년 11월 어떤 인터뷰에서 이누도 잇신 감독은 60년대 청춘의 이야기, 모녀의 이야기, 고양이를 기르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앞의 두 작품은 올해 4월과 5월 각각 <황색눈물>과 <비잔>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뒤의 고양이 이야기는 현재 <쿨쿨 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세편을 구상하는 감독의 심보란 무엇일까.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2005년에도 <터치> <우리 개 이야기> <메종 드 히미코> 등 3편을 연출했고, 2004년과 2003년에는 각각 두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촘촘한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풍부한 상상력과 넘치는 창작력?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의외로 너무도 싱거운 답변을 남긴다. “그냥 상황에 따라 되는 대로 찍고 있어요.”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촘촘함과 동시에 불균질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가 부드럽게 연결되는가 싶더니 <터치>의 풋풋함은 다소 모나 보이고, 똑같이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후의 영광>과 <금발의 초원>도 이야기를 버무린 색채가 다르다.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묶어주는 주제나 정서, 태도는 있지만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한 작품들도 가끔 눈에 띈다. 특히 나가사와 마사미에 반해 연출한 <터치>. 그는 너무도 솔직하게 “나가사와 마사미가 출연한단 소리를 듣고 바로 연출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말 상황이 그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황색눈물>은 이누도 잇신 감독이 어릴 적 보았던 TV드라마가 원작이다. 만화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누도 감독은 만화보다 드라마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했다. 어릴 때 느꼈던 TV드라마의 감동이 너무 컸다며. 그래서 <황색눈물>은 이누도 감독의 ‘영화적 색채’보다 그가 어릴 적 가진 꿈의 향내가 더 강하다. 60년대 도쿄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삶 속에 그의 열정이 묻어난다. 하지만 꿈의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게 쉬었을까. 게다가 만화 <황색눈물>은 요즘 젊은이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40여년 전 작품이다. 아마 이 영화의 제작을 제이스톰이 하지 않았거나, 출연배우가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가 아니었다면 이누도 감독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좋은 상황. 영화의 한국 개봉차 방한한 이누도 감독을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릴 때 <은하테레비소설>에서 <황색눈물>을 보고 영화화를 다짐했다고 했다. 당시 그 작품은 어떤 느낌이었나. =그때 나는 14살이었다. 20대 전반의 남자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그냥 좋아 보였다. 동경했달까. 특히 1960년대는 일본이 경제성장에 몰두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다. 잘못된 것에 눈을 감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다. 만화도 팔리는 만화만을 강요했고. 그런데 에이스케라는 주인공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화를 계속해서 그린다. 그 자세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영화의 주인공 에이스케를 샘 페킨파 영화의 주인공처럼 봤다는 멘트가 있더라. =내가 중학생 무렵에 가장 많이 본 영화가 샘 페킨파의 영화다. 당시가 샘 페킨파가 가장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등을 좋아했다. 페킨파 영화에는 시대가 변해도 자신은 변하지 않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와일드 번치>도 근대화해가는 미국에서 혼자 변하지 않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인물이 나온다. 그런 주인공이 에이스케와 비슷하게 보였다. 에이스케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니까. -영화에는 60년대의 모습이 기록 화면으로 삽화처럼 들어가 있다. 일본의 60년대를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일단 60년대라고 하면 매우 신기하다. 그리고 그립다. 당시에는 미래가 정해져 있었고, 확실히 보이는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그쪽을 향해 나아가면 좋아진다고 누구나 말했다. 그게 당시 일본인들의 마음가짐이고 행동방식이었다. 건강하고, 즐거운 시기였다. 그때 내가 10살 정도였는데 실제로도 경제가 좋아졌다. 돈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텔레비전도 생기고. 하지만 이는 60년대 전반까지의 일이다. 후반이 되어 사람들은 일본의 밝음 뒤에 감쳐진 문제를 알아차렸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1970년대가 되기 이전부터 경제성장 뒤편의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영화에서 그 전후의 변화를 담고 싶었고, 그래서 올림픽 한해 전인 63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60년대의 당신은 매우 어렸을 텐데, 그런 변화를 실제로 느꼈나. =내가 1960년생이라 도쿄올림픽 때에는 4살이었다. (웃음) 하지만 변화는 실감했다.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일본에는 공해문제가 많이 제기됐다. 이전에는 경제가 발전하면 모든 게 다 좋아진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긴 거다. 공장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주변 사람들과 농민들은 피해를 봤다. 미나마타병 같은 이상한 질병도 생기고. 또 당시에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데 주변에 기지가 많았다. 베트남 반전운동도 한창이었고. 그런 게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또 내가 <황색눈물> 드라마를 본 게 1974년이었는데 그때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모두 실패해서 젊은이들이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느낌이랄까. 젊은이들이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는 그런 시대가 돼버린 거다. 많은 걸 시도해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결론. -영화 주인공들은 시대를 일부러 거스른다기보다 그냥 둔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둔감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멈췄다는 느낌이다. 모두 열심히 달리고, 좋은 목표를 보고 가는데 영화의 네 청년은 그걸 보지 않고 어딘가에서 내려버렸다. 자기들만 마음에 드는 게 있어서 다른 길을 가는 상황이다. 사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웃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뭔가 큰 의미가 아니라는 느낌이 좋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멈춰 서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게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달리고 있으면 앞밖에 볼 수 없는데, 잠시 멈춰 서면 다른 게 보인다. 그건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거다. 그런 시간, 공기를 중요시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다시 원작 드라마를 보았을 때 14살 때와 똑같은 부분에서 감동받았다고 했다. 그게 어떤 부분인가. =영화에 들어 있는 장면은 다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웃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에이스케가 길을 가다가 쇼이치의 노래자랑 방송을 듣는 것. 땡 소리와 함께 떨어지지 않나. 드라마랑 똑같다. 또 마지막에 에이스케가 아이한데 편지를 주는 장면도 좋다. 드라마는 좀더 담백한 느낌인데 영화에선 좀더 감정을 고조시켰다. 그래도 거의 똑같다. -영화에는 만화의 원작자인 나가시마 신지의 ‘사소설 경향’이 묻어난다. 시대를 매우 개인적인 시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각본은 드라마의 각본을 썼던 이치가와 신이치가 썼는데, 정확히 원작은 만화인가, 드라마인가.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 그대로다. 고치지 않았다. 다섯 시간짜리 드라마를 단지 짧게 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웃음) 사실 내가 드라마를 봤을 때 다시 보고 싶다고 느낀 장면만을 영화에 넣은 거다. (웃음) 기본적으로는 그걸 해보고 싶었다. 만화보다 드라마를 우선했지만 드라마나 만화나 영화의 테마는 비슷하다. 단 만화는 1968년에 시작해서 70년대에 끝난다. 드라마는 1963년에 시작하지만. 만화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공동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혼자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메시지는 드라마에서도 같다. 드라마에서는 에이스케가 마지막에 방에서 혼자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건 개인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거다. 아파트 안에서 혼자. 함께 모두를 위해 싸운다는 정치성에 대한 불신감이 만화나 드라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모 인터뷰에서 <황색눈물>은 60년대 일본에 대한 안티지만, 공투(共鬪)하지 않고 공명(共鳴)한다고 말했다. 이는 감독의 전편에 흐르는 주제와 관련있어 보인다. =공명할 순 있지만 같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나의 전 세대들은 무언가에 대해 함께 싸웠지만 결국 그 전 세대와 똑같아져버렸다. 그들이 운동했던 방식에 대한 반감이다. 싸웠던 상대와 똑같아지는 것, 그건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번 기대했었는데, 실망했다. 저항했던 조직과 결국 똑같은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기고, 거기에서 또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 분노의 싸움이 되고, 그 조직은 사라지고, 이전 조직에 흡수되고. 그런 과정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런 실패는 이제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웃음) 그런데 이런 얘기가 영화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웃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지즈루, <터치>의 나가사와 마사미처럼 <황색눈물>에도 아라시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보인다. 처음 아라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의받았을 때 그들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고 했는데, 어떤 느낌이었나. =일단 뭐를 하는 애들인지 몰랐다. 그래서 콘서트에 가봤다. (웃음) 느낌은 너무 좋더라. 다섯명 멤버들 사이가 매우 좋아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 가서 이야기를 해봤는데,‘아, 이 녀석들이라면 뭐를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를 할까, 생각하다 예전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황색눈물>을 떠올렸고, 얘들이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영화화하자고 말한 거다.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쇼와시대와 딱 맞는 느낌이지만, 마쓰모토 준을 쌀집 청년으로 캐스팅한 건 의외라고 생각했다. 원래 화려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인데. =니노미야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쇼와 느낌과 맞다고 생각했다. <황색눈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좋다며 데려갔다. 결국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 촬영했다. (웃음) 마쓰모토가 연기한 유지는 극에서 객관적인 인물이다. 4명의 청년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존재가 필요했고, 근로 청년을 넣자고 생각했다. 당시엔 집단취업으로 도쿄에 올라오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화려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라도 반대의 역할을 연기하면 오히려 더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쿨쿨 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를 포함해서 올해 벌써 세 작품이다. <비잔>에 대한 일본의 평을 보니 이누도 작품답지 않게 눈물이 뜨거워졌다고 하더라. 쿨하지 않고 제대로 울리는 영화라고. 그간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또 다음 작품을 결정할 때는 어떤 기준으로 하나. =변화? 그건 잘 모르겠다.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웃음) 기본적으로는 내가 하려고 생각했던 영화와, 의뢰받았지만 거절했던 영화 중에 다시 하자고 결심한 영화를 순서대로 찍는다. (웃음) 거절했던 영화도 다시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면 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그래도 영화를 찍는 게 반년 정도 시간이 소요되니까, 영화에 대한 나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이 최소 반년은 지속될 수 있는 작품만 한다. <비잔>과 <쿨쿨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도 의뢰받은 작품들이다. 그런 점에서 <황색눈물>은 좀 특이한 영화였다. 그건 단지 내가 예전에 봤던 드라마를 재연해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웃음) 어떤 이들은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넣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내가 14살 때 보았던 드라마 그대로다. 대사도 똑같고, 사건도 다 똑같다. 새로 만들어서 넣은 대사가 한줄도 없을 정도다. 그냥 내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웃음)

스크린을 강타하는 오색 폭풍

“자니스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보물창고다.” 일본의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의 표현처럼 일본의 대표적인 남자 아이돌 연예소속사 자니스사무소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끊임없는 물줄기다. 팀 결성과 CD 데뷔 이전의 연습생이 활동하는 자니스주니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짝짓기로 여러 형태의 조합을 구성하는 스타 양성 과정은 자체가 하나의 탄탄한 시스템. 노래와 댄스가 주요 활동 분야지만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해내며 아이돌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는 아이돌도 꽤 많다. 1999년 결성돼 올해로 데뷔 9년째를 맞은 댄스그룹 아라시(嵐)도 아이돌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하고 있는 그룹. 2001년 11월부터는 자니스사무소에서 설립한 아라시의 개별 레이블 제이스톰 아래서 그들만의 노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황색눈물>은 <피칸☆치 LIFE IS HARD 하지만 HAPPY> <피칸☆☆치 LIFE IS HARD 그래서 HAPPY>에 이어 아라시의 멤버 다섯명이 모두 함께 출연한 세 번째 영화. 제작은 이전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제이스톰이다. 1963년의 도쿄를 살아가는 다섯 청춘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그래서 이누도 잇신의 영화라기보다 아라시의 영화에 더 가깝다. 이누도 감독은 나가사와 마사미의 풋풋함에 취해 연출을 다짐했던 <터치>에서처럼, 이번에는 아라시 다섯명의 젊음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 중학생 시절 보았던 TV드라마 <황색눈물>에 대한 이누도 감독의 꿈이 아라시의 다섯 색깔로 채색되어 표현된다. 실제로도 사이가 매우 좋아 멤버끼리 서로 기념일을 챙겨주는 ‘아라시의 분위기’는 영화에 그대로 묻어난다. 에이스케를 연기한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아라시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한방에서 같이 지냈다면 컬쳐 쇼크를 받았을 거”라고. 그들의 우정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세계에 폭풍(嵐)을 일으키다’는 뜻을 갖고 태어난 그룹 아라시. 아이돌의 전형적인 이미지의 빈틈으로 내비치는 새롭고 신선한 모습이 반갑다. 일본의 최고 아이돌 그룹이자 이제는 어엿한 배우. 니노미야 가즈나리, 마쓰모토 준, 사쿠라이 쇼, 아이바 마사키, 오노 사토시. 그 다섯 청춘을 소개한다. 팔딱거리는 언더그라운드 에이스케 역의 니노미야 가즈나리 “현재 일본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배우다.” TV드라마 <한도쿠>에서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함께 작업한 영화감독 쓰쓰미 유키히코가 남긴 말이다. 아이돌 스타를 배우로서 가장 신뢰한다니. 조금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니노미야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임이 분명하다. 2006년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출연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으며, 그 영화의 프랑스 개봉일에 맞춰 발행된 프랑스의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선 그의 얼굴이 담긴 영화 스틸이 표지를 장식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아이돌 스타라니. 니노미야의 현재 위치는 이 위화감만큼 예측 불가하고, 그 신선함만큼 긍정적이다. 1996년 중학교 2학년 때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아라시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TV드라마, 영화 등에 많이 출연하며 주목받았다.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라 ‘쇼와시대의 냄새’가 느껴지는 그는 전통적인 일본 사람의 이미지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여 주로 고등학생, 그것도 17살의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지만(그래서 그는 ‘영원한 17살’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외모는 왠지 모를 애수를 전하기도 한다. 조금은 굽은 듯 보이는 어깨와 반달형 눈매는 서늘한 상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니노미야의 첫 영화 주연작인 <푸른 불꽃>을 연출한 니나가와 유키오는 그에게 “등에 애수가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푸른 불꽃>의 의부를 살해하는 역할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사이고.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 사이에서 니노미야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또 한번의 쇼와. <황색눈물>의 에이스케는 그래서 딱 니노미야였다. 아동만화가를 꿈꾸지만 팔리는 만화만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책상 앞에 정좌하고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펜을 움직이는 청년은 니노미야여야 했다. 뒤에서 보이는 겹친 그의 발바닥은 에이스케란 인물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감독님이 지시한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웃음)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TV드라마)에서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나는 정좌하는 장면이 많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가 연기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어떤 배우는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한 다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대본을 읽는다고 하더라. 에이스케가 책상 앞에 앉는 것도 만화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거다.” 다들 그를 쇼와시대와 연결하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에이스케를, <황색눈물>을 현실의 이야기라 받아들였다.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 그게 내겐 제1조건이었다. 지금은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그때는 매우 큰 행복으로 다가갔다. 무엇이 정말 즐거운지를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산다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아웃도어보다는 “인도어(Indoor)”, 오버그라운드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니노미야는 자신의 취향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언더그라운드’라고 설명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순진한 병사 사이고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보다는 니노미야의 색채가 더 진하게 묻어난 인물이다. “사람들은 사이고 같은 병사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체질이 언더그라운드랄까. 그냥 그렇게 되더라. 감독님이 자세한 건 지시하지 않으셨으니까 (웃음) 하지만 어차피 전쟁은 정상이 아니지 않나.” 평소엔 게임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아이답지만, 연기에 대해선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니노미야 가즈나리. 역시 언더에 앉아 있는 아이돌 스타의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화통, 유쾌한 형아 쇼이치 역의 아이바 마사키 ‘쇼와시대에 저런 스타일리스트라니!’ <황색눈물>에 아이바 마사키가 나온다고 했을 때 아라시의 팬들은 아이바의 몸매를 떠올렸다. 176cm에 60kg, 마쓰모토 준과 함께 멤버 중 가장 키가 큰 그는 패션 감각도 좋아 역시 마쓰모토와 함께 ‘모델 콤비’로 불린다. 선글라스와 페도라, 꽃무늬가 들어간 셔츠는 그가 쇼와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기본 옵션. 대책없어 보이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만은 어디에도 버리지 못하는 쇼이치는 아이바 마사키의 옷을 입고 나서야 쇼와시대의 도쿄로 상경할 수 있었다. 노란 염색 머리와 붉은 입술. 1996년 중학교 2학년 때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아이바 마사키는 멤버 중 이미지가 가장 컬러풀하다. 화려해서 거리감을 갖게 하는 요란한 스타와 달리 친밀감이 느껴지는 색채들. TV 오락 프로그램 <아이 러브 SMAP>를 보고 “SMAP와 농구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예계 데뷔를 결정한 만큼 농구 코트의 활기와 오락 프로그램의 유쾌함도 함께 묻어난다. 호랑이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동물과 친하고, 기쁠 때에는 “텐션이 무한대로 올라갈” 정도로 화통하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천재! 시무라동물원>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해 아이들에겐 ‘이웃집 형’의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그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기르고 있다. 1998년 아라시 결성 이전부터 <신주쿠 소년 탐정단>의 주연을 맡으며 영화를 시작한 아이바는 연극 <제비가 있는 역>, 드라마 <우리들의 용기 미만 도시>에 출연하며 연기를 닦았다. 웃기도 잘 웃지만, 울기도 잘해서 <24시간 텔레비전>의 마지막 방송과 <제비가 있는 역>의 첫 커튼콜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기쁨과 슬픔, 감정 표현도 솔직한 그에게 연기란 “다음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 그래서 아마도 그는 <황색눈물>의 쇼이치를, <피칸치…> 시리즈의 슌을 사랑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쇼이치는 원래 더 바보 같은 인물이었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며 장면마다 조금씩 바꿨지만. 슌도 갑자기 대학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 동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다. (웃음) 시시한 인물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나름대로 열심히,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거다.” 아이바는 지금 하나의 사이클을 그리고 있다. 영화와 콘서트, 쇼 버라이어티를 돌며 자신의 꿈을 “킵(keep)하고” 있다. “긴 시간을 들여,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게 매력”인 영화를 하면서는 여유를 느꼈다고 했다. “내 꿈은 하나, 하나씩 일을 제대로 하는 것.” 패션 리더인 아이바가 쇼와시대에서 배운 교훈도 아마 여유가 아닐었을까. 한 바퀴를 돌아온 질문에 아이바 자신의 답변을 붙여본다. “(어떤 일에 대한) 자세와 노력은 모두 다 내게 다시 돌아온다.” 보기만 해도 즐거운 멜로디 유지 역의 마쓰모토 준 아이바 마사키 못지않게 쌀집 청년(<황색눈물>)으로 분하는 마쓰모토 준의 모습도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커다란 눈과 진한 눈썹, 순정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의 캐릭터는 화려하고 눈부셨으니까. <고쿠센> <꽃보다 남자> <너는 펫> 등, 실제로 그가 출연한 작품도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경우가 많다. 반항하는 학생들의 리더이자 교사를 사랑하는 사와다, 학교의 4대 천왕처럼 군림하는 도묘지, 연상의 커리어우먼 품에 안겨 강아지가 된 다케시. 그는 그냥 스타였다. 아라시 멤버 중 유일하게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사람 역시 그다(자니즈사무소쪽은 마쓰모토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바로 입소를 확정했다). 확실한 스타성이랄까. 그는 일본 남자로는 최초로 패션지 <마리클레르>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스타라는 표현은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 마쓰모토 준도, 그의 침묵은 종종 팡파르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평소 나는 조용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활동적이라고 하더라. (웃음) 나라는 인간의 다른 부분을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 이제는 항상 내 안의 모습이 겉으론 어떻게 보일지 생각한다.” 마쓰모토에게 <황색눈물>의 유지는 침묵으로 침묵을 깨는 도전이었다. 원작 TV드라마에는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 유지는 꿈만 쫓는 4명의 청춘들과 달리 열심히 노동하는 청년이다. “당시 대다수 젊은이들은 일본이란 나라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지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다. 다른 네명의 청년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인물이랄까.” 그래서 그는 “리얼리티”를 고민했다. 배우의 편의를 위해 준비된 가벼운 쌀가마를 사양하고 10kg의 쌀부대를 직접 날랐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의 발동작이 거짓없어 보이기 위해. 콘서트 구성과 연출에도 관심이 많은 마쓰모토는 아라시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콘서트 구성에 참여했다. 1998년 자니스주니어의 콘서트가 첫 작품. 원래 멤버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콘서트를 구성하는 자니스의 시스템이지만, 마쓰모토는 의견을 내는 데 더 적극적이다. 일명 ‘자니스무빙스테이지’라 불리는 객석 위를 이동하는 투명한 무대는 2005년 여름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마쓰모토가 제시한 아이디어다. 화려한 미적 감각으로 재밌게 즐긴달까. ‘enjoy’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그는 세심하고, 능숙하게 일에 임한다. “프로의식이 강하다”는 게 주변 스탭들의 평. 올해 마쓰모토는 ‘스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2 리턴스>와 영화 <나는 누이를 사랑한다>에 출연했고 동시에 노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드라마 <밤비노!>와 영화 <황색눈물>에 출연했다. ‘살림을 재건할 수 있을지’ 망설이는 네명의 동료들에게 외쳤던 “가능하다”는 말은 “좋아, 힘내볼까”라고 다짐하는 밤비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서투르지만 힘찬 동력. 2007년 한해에 벌써 네 작품이나 마친 열정은 밤비의 것일까, 스타의 것일까. 그는 지금을 “현재까지 느낀 것을 표현하는 시기”라고 표현한다. “전부 발산해서 빈 공간이 되는 것도 한번쯤 해보는 게 중요하다”며. 부드러운 것이 좋아 류조 역의 사쿠라이 쇼 ‘선생님으로 삼고 싶은 아이돌’, ‘인텔리처럼 보이는 아이돌’. 잡지 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사쿠라이 쇼는 항상 똑똑하고, 지적인 아이돌 스타로 뽑힌다. 게이오대학을 쉬는 기간 없이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최근 늘어나는 ‘대학생 아이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1999년 히로스에 료코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화제가 됐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대학생 신분이다. 메이지대학의 야마시타 도모히사, 와세다대학의 데고시 유야 등. 1995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자니스사무소에 들어가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시험기간에는 하던 일을 잠시 쉬었다. “시험범위 중 못 본 부분이 있으면 불안해서 벼락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공부에 대한 사쿠라이의 생각. 2006년 10월부터는 보도 프로그램 <뉴스 제로> 캐스터를 맡아 환경문제, 북한문제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황색눈물>의 류조는 유쾌하다. 속이 텅 빈 듯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 예술가”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쾌활하게 울린다. 소설의 표지만 그리면서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그래서 밉지 않다. “류조만 조금 다른 공기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꿈을 향한 절실함보다는 그냥 작가에 대한 동경.” 그래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연기 톤을 찾기에 힘썼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그냥 간사이 사투리’라고 말했던 단어를 그는 ‘교토 사투리’라 판단했고, 그걸 류조의 캐릭터로 사용했다. “교토에는 일본의 수도가 도쿄가 아니라 교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교토 사투리는 어린아이들에게도 경어를 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류조라는 인간이 떠올랐다.” <황색눈물>의 류조는 세상을 모르고 사랑에 빠졌던 <허니와 클로버>의 다케모토, <키사라즈 캐츠아이> 시리즈의 밤비와 일면 비슷해 보인다. 시대에 눈을 감고 잠시 정지해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이번엔 순정만화 속 어수룩함이나 펑크 느낌의 씩씩함이 없다. 부시시한 머리카락과 자르지 않은 수염이 쾌활함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배우, 어딘가에 또 다른 챕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단서처럼. 건강하고, 동안의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사쿠라이는 ‘아라시의 엄마’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잘 보살피는 상냥한 성격 탓에 그렇게 불린다. 멤버인 니노미야 가즈나리, 아이바 마사키, 또 다른 자니스사무소의 댄스그룹 간자니 에잇의 요코야마 유타카와 함께 간 낚시여행에서도 그는 항상 뒷정리하는 모습만이 사진에 담겼다. 동료 친구들을 초대한 대규모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기꺼이 성공시킨다. 공부, 연기와는 달리 사람을 좋아하고, 추억을 즐기는 모습.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무대에서도 줄곧 뮤지컬만 공연해왔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뷰티풀 게임> 등. 즐거운 음악 시간이랄까. 이런 선생님이라면, 청춘을 배워도 좋겠다. 빈틈을 그리는 재능 케이 역의 오노 사토시 빈틈. 그림을 그리다 여자에게 반하는 케이(<황색눈물>)의 얼굴엔 순간 백지로 변하는 표정이 있다. 친구의 엄마뻘 되는 여자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루(<피칸치…>)의 입술은 삐죽 나와 현실과 작은 마찰을 일으킨다. 음악 오락프로그램 <우타방>에 나와 선배인 SMAP의 나카이 마사히로에게 던지는 대담한 발언은 곧 돌아올 기습 공격에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된다(이는 모두 대본상 짜인 상황이다). 일명 ‘하극상 콩트’라고 불리는 드라마. 아라시의 <우타방>에서 오노 사토시는 항상 실소의 공격자가 된다. 그가 가진 빈틈은 일견 코미디가 되어 웃음을 만들지만, 그는 사실 노래로, 그림으로 그 공간을 채우길 더 즐긴다. 그룹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오노 사토시는 팀 내에서 노래가 가장 뛰어나다. 춤도 능숙해 자니스주니어 시절부터 선배들한테 “신입 주니어들은 오노 뒤에서 춤춰”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춤과 노래를 단지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정해진 안무와 멜로디 안에서 빈틈을 찾아 자유롭게 즐기는 게 더 좋다고. <황색눈물>을 찍으면서도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기를 했다. “다른 멤버들은 간사이 사투리나, 기타를 맹연습해야 했지만 나는 딱히 그럴 건 없었다. 감독님도 기본적인 것만 말해주시고 나머지는 스스로 만들어가도 좋다고 하셨고.”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영화에서 화가 지망생 케이를 연기한 그는 실제로도 그림을 그리는 청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그린 <드래곤볼>의 그림을 보고 경쟁심에 시작한 그림이 지금은 꽤 능숙한 솜씨를 자랑한다. 영화에 보이는 그림도 절반은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엷게 그려진 그림을 받았다. 세트를 준비하는 시간에 기다리면서 할 게 없으니까 그 그림 위에 덧칠을 했다. 감독님은 리얼한 그림을 원치 않았는데, 점점 리얼하게 돼서 안 돼, 라고 했지만. (웃음)” 1994년 중학교 2학년 무렵, 엄마의 권유로 자니스사무소에 들어온 오노 사토시는 10년이 넘게 춤, 노래, 연기와 함께하며 말이 늘었고, 여유가 생겼고, 꿈이 커졌다. 데뷔 초기엔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수면 시간에 “연예계가 정말 이런 곳이라면 도망치고 싶다”고 말했지만, 2002년 10월엔 단독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아라시 디스커버리>를 시작했고, 2005년 8월엔 이란 솔로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는 <아오키씨 집의 부인>으로 연극을 시작해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대극 <센고쿠푸> 등에 출연하며 무대 경력도 쌓아가고 있다. <황색눈물>에 대한 소감은, “5명이 모여 영화촬영을 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 쉽게 잡히지 않는 그의 코믹한 미소가 사실 매우 진지한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빈틈 안에 녹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