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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Pusan,3 Days 2 Nights

* 개막식의 문턱: 개막 이틀 전에 <씨네21> 후배에게 개막식 입장권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홍보팀에 표가 쌓여 있을 테니까 그냥 한장 달라고 해.” 다년간의 경험에 따르면, 영화제 시즌이 되면 개·폐막식 입장권이 부산 시내 길바닥에 은행잎하고 같이 굴러다닌다. 잠시 뒤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입장권이 없다는데요 올해는 개막식을 시민회관에서 하기 때문에 좌석도 적고.” 이 후배들에겐 내 주문이 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흡사, 몰라보게 변해버린 고향마을에 와서 “여그가 옛날엔 다 사램 댕기는 길이었단 말여” 하면서 차도를 막 건너다니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섭섭할 건 없다. 부산영화제도 이제 7년이 됐으니 그 권위에 어울리는 절차상의 엄격함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 * <해안선>: 11월14일, 마산과 창원에서 몇 가지 일정을 치른 뒤 부산 시내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다. 올해 씨네21은 중구 대창동에 영화제 데일리 사무실을 차렸다. 영화제 첫해 데일리 사무실은 중앙동 부산호텔 앞에 있었는데 그 골목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의 맛을 잊을 수 없어 나는 해마다 남포동에서 야근을 끝내면 굳이 중앙동 뒷골목까지 오뎅 먹으러 가곤 했다. 마감 때문에 저녁을 거른 데일리 식구들을 위해 그 유명한 부산 오뎅을 사러 나간다. 개막작 <해안선>은 결국 서울에 돌아와서 보았다. 나는 밥숟가락 들기 전에 기도를 올리듯, 영화관의 조명이 꺼지기 전에 잠시 남동철 기자에게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한다. 김기덕 감독이 아직 ‘괴상한 재야작가’였던 시절, 데뷔작 <악어>에서 김기덕 감독을 ‘발견’한 이래 그는 <씨네21> 편집진 내부에서 초지일관 김기덕의 지지자이자 연구자이자 후원자였다. 내가 아직 서른다섯살이 되기 전이었다면 <해안선>을 좋아했을 것이다. 예전엔 장르 불문하고 ‘임팩트’가 강한 영화를 좋아했으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옆자리 친구에게 “이제는 병적인 폐쇄성을 즐기는 영화가 싫다”고 말했다. 친구는 “출구가 없는 게 현실이잖아.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가 오히려 사술 아냐”라고 반문했다. 나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 영화 역시 사술이지”라고 대꾸했다. 뭐가 사술이 됐든 간에, 내가 철저한 개인으로서 내키는 대로 영화를 보고 또 지껄일 수 있게 된 건 행복한 일이다. 나는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게 된 김에 한마디 덧붙인다. “창작이 작가의 강박을 치유한다면, 김기덕 감독은 이제 다 나았을 때도 됐는데….” *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화제 이틀째에 뒤따라 내려오는 일행을 위해 나는 개봉관에서는 볼 수 없을 프랑스 영화 두편을 선택했다. <금요일밤>과 <기차를 타고온 남자>. <금요일밤> 입장권을 샀다고 했더니 <씨네21>의 한 후배가 “잘 선택하신 거에요. 아주 관능적인 영화예요”라고 논평한다. 득의만만해서 영화관에 들어간 나는 대사도 음악도 없는 롱테이크들의 행진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관능은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만다. 나는 자다깨다 하는 틈틈이 옆자리의 후배에게 “내가 자는 사이에 관능 나왔어” 하고 묻는다.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일행으로부터 내게로 일제히 비난이 쏟아진다. 친구 하나가 “베니스에서 봤는데 <기차를 타고온 남자>도 만만찮아”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기차’ 티켓을 영화관 앞에서 만난 후배들에게 다 줘버린 뒤 택시를 타고 남포동을 떠나 시민회관으로 <그녀에게>를 보러간다. 알모도바르 영화가 있는 줄 알았으면 챙겼을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티켓카탈로그를 훓으면서도 이 영화를 놓치고 말았다. 이 영화까지 실패했으면 나는 두고두고 이지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한편으로 우리 다섯은 모두 행복해졌고, 나는 ‘올해 최고의 영화’를 부산에서 건졌다. 나는 알모도바르의 칸 감독상 수상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보다 이 작품이 한결 좋다. 알모도바르는, 젊은 시절의 재기(才氣)에서 객기(客氣)가 빠져나가고 오직 천재(天才)만이 남아서 숙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그런 ‘숙성’의 50대를 맞을 수 있을까. 숙성이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됨을 뜻하는 건 아닐지. 걸작은, 모든 창작자들을 행복하게 한다.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처럼, 하늘은 왜 그에게 천재를 주고 내게는 열정만 주었을까, 하고 탄식하게 된다 할지라도.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공히 어떤 상상력의 영토가 허락돼 있으므로. 넓든 좁든, 비옥하든 척박하든 간에.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

[조종국] 오래 묵은,아니 잘 익은 영화

지난주 어느 날, 벼르고 별러 오랜만에 연출부, 제작부 스탭들과 외식을 하기로 했다(우리 회사 식구들은 입지 조건 때문에 끼니 때마다 가까이 있는 어느 대기업의 사원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받는 밥을 먹기 때문에 외식은 나름대로 이벤트가 된다). 마침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가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열리던 날이라 여의도 일대가 북새통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한결같이 남루한 행색에 이런저런 구호를 새긴 머리띠까지 두른 농민들로 어수선했다. 날은 저물었고, 그들은 표정에는 추위에 지친 듯, 뭔가 낙담한 듯하면서도 서둘러 먼길을 또 가야 하는 조바심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막걸리라도 한잔 자셨는지 불콰한 촌로는, 길을 막고 있는 게 마음이 쓰였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중얼거렸다. “우리도 살아볼라꼬 하는 짓인께 좀 이해하소….” 직원 두명이 음료수를 3만원어치 사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농민들께 전해 드리고 약속장소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나는 좀전에 만났던 농민들과 농촌을 무대로 한 ‘돈 버는 영화’ 궁리를 했고, 그날밤 우리는 회도 먹고 노래방에도 갔다. 이번주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이었지만 부산 근처에도 못 간 나는 홍기선 감독의 <선택> 촬영장에 다녀왔다. 촬영 시작했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가봐야지…’하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였다. 일정을 알아보니, 아뿔싸! 그날이 마지막 촬영이라는 소리에 귤 한 박스를 사들고 선걸음에 달려갔다. 촬영장소는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옛 수도여고. 을씨년스런 날씨와 폐교의 스산함이 교실과 복도를 부분 개조한 감옥 세트와 어우러져 제법 그럴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지막 촬영날이어서 그런지, 여전히 수줍음 많은 홍기선 감독과 주연 배우 김중기는 물론 스탭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은 밝아 보였다. 홍기선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만들었을 때 신촌 기차역 앞에 있던 영화사 영필름 사무실에서 어설픈 인터뷰를 하면서다. 그뒤 ‘가고파축구단’(아는 사람만 아는 ‘전설’의 영화인축구팀)에서 함께 축구도 했지만, 영화 일로 남다른 교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홍기선 감독 영화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에서 보여준 ‘비린내 나는 리얼리즘 정신’을 지지하고, <선택> 또한 홍기선 감독의 사람과 세상, 역사에 대한 올곧은 신념을 담아낼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홍기선 감독의 이런 신념이 더욱 정갈하게 보이는 것은, 수만명의 농민들이 그 추운 한강 바람을 맞으며 생존권 타령을 해야 하고, 미군이 장갑차로 사람을 치어 죽여도 우리나라 법정에 세울 수조차 없는 이 땅의 믿고 싶지 않은 현실 탓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선택>은 꽤 오랫동안 ‘묵은’ 영화다. <선택>은 무려 4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홍기선 감독이 수년 동안 각고의 공을 들인 작품이다. 몇몇 제작사를 떠돌며 가슴을 졸여야 했고,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까지 받았지만 제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던 천덕꾸러기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장사될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신씨네의 결단에 힘입어 지난 10월 촬영을 재개해 마침내 끝을 보게 된 것이다. 영화 <선택>의 앞날이 불투명하던 언젠가 홍기선 감독에게 굳이 왜 <선택>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어눌한 말투로 되돌아온 홍기선 감독의 대답은 명료했다. “누군가 꼭 해야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이 글 때문에 혹시라도, <선택>이 재미없는 고지식한 영화려니 하고 지레짐작하지 마시길. 조폭이나 깡패 이야기에만 의리와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

우리나라 드라마를 벤치마킹했나,<엘리어스>

<엘리어스>는 비밀조직과 CIA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는 ‘여대생’ CIA 요원 시드니 브리스토의 이야기다. 재학 중 갑자기 CIA가 되라고 접선을 받아 CIA가 된 시드니. 애인한테 자기 정체를 밝히는데 애인은 살해되고 만다. 이로서 알게 된 사실, 자기가 CIA라고 생각하고 몸담았던 곳은 일부 요원들이 ‘그림자 정부’식으로 만들어낸 ‘조직’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드니는 이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다시 ‘조직’의 하부조직인 SD6로 돌아가고, ‘조직’을 쫓는 CIA와 SD6 사이의 이중첩자를 자처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15세기의 램발디라는 사람이 작성한 ‘예언서’가 시드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험담부터 시작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엘리어스>는 정말로 주인공 캐릭터가 엉망이다. 주인공 시드니 브리스토는 문학전공 대학원생이면서 CIA와 비밀조직의 이중첩자라고 한다. 아주 바쁘게 산다. 그런 황당무계한 설정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시드니 역의 제니퍼 가너가 대학원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을 전공해서, 그만큼의 교양을 쌓고, 그만큼의 문학적 성찰을 한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옆에서 ‘쟤는 공부 잘한다더라’라고 말은 해주는데 우습게 보인다. 게다가 능력도 있고 실력도 있고 잘 빠지고 얼굴도 그럴싸한 여자가 늘 하는 짓은 남 앞에서 비굴하게 보여서 위기를 탈출한다. 정말이지 ‘김기덕 영화의 간도 쓸개도 없는 여자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OCN에서 <엘리어스> 예고편을 ‘여대생 CIA 시드니 브리스토의 좌충우돌’이라고 했던 것을 보고 너무 핵심을 꿰뚫어서 놀랐다. ‘여’대생. 여자는 대학생이 된 게 특별나단 소리다. 여류. 남자들 세상에 여자가 끼어들었단 얘기다. 시드니 브리스토는 정확하게 여대생, 여자 스파이밖에 되지 못한다. 드라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시드니 브리스토는 주인공이 아니라 구경거리다. 시드니의 변장은 변장이 아니라 패션쇼라는 것은 삽입곡이 증명한다. 이야기도 주인공 못지않게 허무하다. <와호장룡>도 아니고 몇백년 전의 비급을 놓고 CIA와 FBI, 비밀조직이 싸우지를 않나. 탈출시에 중력법칙은 무시하기 일쑤이다. <엘리어스>가 <스타워즈>의 부녀판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압권이다. ‘내가 니 아비다’ 부녀판 패러디에 이르고 나면, 굉장히 진지한 톤을 유지하려 하는 이 드라마가 알고보니 허풍을 기본으로 하는 007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리어스>의 허술함은 의외로 쉽게 발견된다. 보통 ‘스페인’ 하고서 한 교회에서 활약을 하는데, 그 교회 안에서 상대 스파이와 치고받고 싸우고서 문을 나가면 그새 ‘LA’다. 건물만 벗어나면 나라를 건너오다니 <더 원>의 제작자들이 돈이 없어서 집에서 도망친 뒤 자동차 추격전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첩보물에서 공항검색 시스템을 무시한다는 것은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에서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일까 게다가 차를 타고 물 속에 빠진 우리의 주인공, 타이어의 바람을 이용해서 숨을 쉰다. 만 열심히 봐도 타이어 바람빼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데, 뻥을 아주 태연자약하게 한다. 물론 를 시청도 안 한 우리 아버지가 이 장면에서 하시는 말씀, “타이어가 불량품이군!” 그러나, 이토록 한심한 설정을 격파하는 것이 있으니 전체적인 그림이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제작자의 능력이다. 이야기를 한참 진행하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야기를 끊어버려서 사람의 애를 태우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는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사실 <엘리어스>의 진짜 재미는 바로 이 <클리프행어>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시드니의 아버지 잭에는 빅터 가버, SD6의 대장 슬론 역은 론 리프킨 등 연기에 잔뼈가 굵은 배우들을 제니퍼 가너 옆에 붙여줘서 어설픈 연기를 감춰준다. 그리고 램발디의 말도 안 되는 ‘예언’을 논할 때마다 에이미 어빙, 테렌스 퀸같이 (특히) 목소리가 엄청나게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는 배우들을 데려다놓는다. 주인공이 아무리 어설프고 내용이 어처구니없어도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받쳐주니 왠지 그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그냥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엘리어스>가 우리나라를 분석하고 따라한 것일까 너무나 한국 드라마와 비슷하다. 연속극 방식, 구시대적이고 허술한 인물, 상식을 벗어나는 스토리, 자기 나라 국민 이외에는 생각도 없는 지나친 자기합리화와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순간순간을 넘기는 이야기 다음편이 궁금하고 조연들이 이야기를 받쳐주고 여주인공은 연기력과 상관없이 날씬해서 본다.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와 너무 비슷한 패턴 아닌가 <엘리어스>는 아무리 허풍의 연속이어도 위 규칙만 지키면 온 국민이 다 용서하고 시청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규칙 한도 내에서는 최상급의 드라마임이 틀림없다. 열심히 보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

<밀애>,멜로영화인가 재난영화인가

‘여성주의 다큐 감독’으로 알려진 변영주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밀애>가 ‘격정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개봉되었다. 영화는 당연히 ‘여성영화’ 혹은 ‘멜로영화’로 감상/비평되고 있다. 그러나 <밀애>는 결코 여성영화가 아니며, 멜로영화로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 영화의 장르는 뜻밖에도 ‘재난을 당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여자’를 그린 ‘재난(극복, 그러나 결국 실패) 영화’이다. Oh! Really 물론 <타이타닉>처럼 재난영화이자 멜로영화이고 여성영화인 경우도 있다. <타이타닉>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재난영화이자, 짧지만 평생토록 간직될 운명적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이고, 한 여자가 자유로운 자의식에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도정을 보여준 여성영화이다. <밀애>의 그녀는 사고와 연애를 통해 어떤 진실을 깨달았으며, 어떤 해방을 맛보았는가 “그래, 어찌 됐든 죽거나,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미친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성장이고, 성공이야… 아예 뭐라고요 ‘해∼방’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왜 여성영화가 아닌가? - 남성중심의 매춘적 성담론 그녀는 “온몸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남자에 의해 재평가받아 획득되는 자신감은 열등감으로부터의 회복일 뿐 성적 자아의 각성이 아니다. 대체 “통째로 빨아들이는…” 그녀들의 흡입력은 누구를 위한 기능, 혹은 효용인가 성의학적 견지에서, 오르가슴에 도달한 질의 율동적인 수축은 남근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작용을 하며, 사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섹스란 남자는 사정을, 여자는 오르가슴을 목표로 경주하며 상호 서비스를 교환하는 과정’인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의 성의학적 함의는 여성의 흥분이 직접 남성의 극치감을 유도한다는 것이요, ‘섹스란 직접적인 극치감의 교류, 혹은 공유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교감의 과정에는 “내가 잘했나요” 따위의 질문은 필요없다. 섹스란 ‘나/너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것’이요, ‘내가 느끼는 바로 이것을 동시에 네가 느끼는 것’이라야 한다. 흔히 ‘잘한다’는 ‘변강쇠/옹녀’적 담론은 상대를 기능적 객체로 전락시키며, 심각한 소외를 양산한다. 또한 성기 중심의 페티시적 섹스관에는 여성이 아닌 암컷, 아니 하나의 거대한 구멍만이 남게 된다. 외람되게도 이 영화의 성기 중심적이고 기능적인 성담론은 “여성들이여 ‘예쁜’ 성적 대상에 머물지 말고 ‘잘 빠는’ 성적 주체, 아니 ‘잘 빠는’ 거대한 구멍이 되어 남자들을 만족시키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자!”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위하여 더 많은 애무를!’을 주제로 삼았던 <결혼 이야기>가 10년 전에 나왔고, 비록 도구적이고, 성기 중심적이지만 (남성에 의한 인정이 아닌) 여성의 자족적 성을 강조하였던 <처녀들의 저녁식사>로부터 몇보나 후퇴한 이 영화를 단지 유부녀 혼외정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성적 해방을 논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정부는~ <애마부인> 시리즈를 재평가하라! 재평가하라!) 남성에 의해 평가되는 여성의 ‘성기적 기능론’은 온몸의 성감이 오로지 성기로만 집중된 남성들에게 복무하는 남성 중심의 매춘적 성담론이자, 소외된 성담론이다. 남자는 여자를 빨판으로, 여자는 남자를 몽둥이로, 즉 살아 있는 자위기구로 보는 성, 나아가 음경확대시술과 질괄약근수축시술을 받아 모두모두 ‘잘하게 되는’ 성을 우리가 꿈꾸는가 소외가 아닌 해방을 지향한다면 성기적 성이 아닌 전신적 성, 나아가 전인적 성을 논해야 하지 않는가 ‘악하고 나쁘고 못된’ 게 아니라 ‘약하고 아프고 못난’ 그녀 그녀는 선배였던 남자에게 찍혀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였고, 믿었던 남편에 의해 치유할 수 없는 외상을 입어 한동안 좀비처럼 살다가(그녀가 가사노동을 소홀히 하는 것은 모든 생활을 방기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엥꼬’가 난다. 길 가던 남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그녀는 얼빠진 상태를 눈여겨본 그에게 찜당해 섹스를 하게 되고 자신의 성적 ‘기능’을 재평가받는다. 빤짝 정신이 들어 잠시 생기를 되찾은 그녀는 그 특별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거절당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남편과 잔다. 코딱지만한 동네에서 윗집 남자와 뒹굴며 좋아라 하다가 “너무 멀리 온 탓으로” 동네방네 소문나고, 남편에게 들킨다. 잠시 오리발을 내밀어보았으나 소용없었고, 흠씬 두들겨맞고 가정과 아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이 쫓겨나자, 애인을 불러내 질질 짠다. 사태가 이리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다지 새로운 희망을 품지도 않는 그와 대책 없이 떠나보려 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남자는 죽고 그녀 혼자 남는다. 자… 여기서 그녀는 어떤 주체적 선택을 하였으며, 어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그녀의 마지막 내레이션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는 어떤 장면으로부터 감지/유추되는가 그녀는 자발적으로 가족주의를 깨부수며 금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는가 불행하게도 그녀의 모든 삶은 남자의 선택과 버림으로 점철된 삶이요, 남성 중심 사회와 운명(<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하느님도 남자더라”라는 대사가 나온다)에 의해 등떠밀려온 삶이다. 그녀는 무엇을 쫓아, 무엇을 위반하였는가 성기의 성능을 인정해준 특별한 남자와의 섹스를 위해, 언제부터 하찮아 죽겠다고 생각한 그놈의 가정의 울타리를 담치기 했을 뿐이다(<우묵배미의 사랑>의 최명길보다 뭐가 더 나은가). 그녀가 처음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았을 때, 그와의 섹스를 통해 뭔가를 느꼈을 때, 하다못해 온천장 앞에서 남편과 딱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였나 신뢰가 파탄난 가정에서 멍~하니 살다가, 맞바람을 피우면서 온갖 거짓말과 변명을 너절하게 늘어놓다가, 끝까지 “목욕하러… 한 시간 전에…”라며 발뺌하는 그녀, 먼저 쪽박을 깬 게 누군데 손찌검이냐고, 내가 무슨 죽을죄로 내 딸도 못 만날까보냐고 맞붙지 못하고 딸의 사진이 없다며 신파를 연출하는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랴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과연 성을 통해 자아에 새롭게 눈뜨고, 성 혹은 사랑, 남녀관계 등을 일반화하고, 객관화하여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 이후 확장된 사회관계에서 누구와도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나 그와의 눈물의 마지막 섹스는 ‘엉클어진 상황에 대한 피차에 대책없음’의 정서이지, 결코 희망 혹은 해방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사회적으로 변화된 삶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생전에는 그에게 집착하였고, 그 남자가 죽고 나니 “내 생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그”를 추억하며 살 것 같다. 처량하고 궁상맞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악하고, 나쁘고, 못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약하고, 아프고, 못난 여자”에 불과한 그녀를 젖혀두고 누구 탓을 하랴마는, 그녀가 만난 놈은 디카프리오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똥폼 잡는 그 그는 게임을 제안해놓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감정 기복에 쩔쩔매며, 이를 감추느라 시종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권태를 냉소로 치환해낸 쿨한 사내가 아니라, 절망과 혼돈의 와중에서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는 불안정한 남자이다. 그는 결혼이니 사랑이니 섹스에 대해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어떤’ 실패를 반추하며, 자신의 불행과 허무의식을 상대에게 투사시키는 인물이다(356호에 기술한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명확히 하며 애인에게 결혼문제까지 상담해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 혹은 묻지마 섹스를 즐기며 강수연의 팬티까지 빨아주며, 그녀를 프로로 키워내는 <그대 안의 블루>의 안성기와는 생판 다르다). 그는 “이런 건 가벼워야 하는데…”라고 짐짓 아는 척을 하였으나, 자신은 천근만근이다. 그가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있기나 한 걸까 아니 넋나간 그녀말고 그런 재수없는 칙칙한 표정으로 입으로만 가벼운 게임을 제안하는 그에게 걸려든 여자가 또 있었을까 그의 장기는 오직 하나이다. 애무를 꼼꼼히 하고, 오럴을 해주며, 관계 중에나, 관계 뒤에 여자의 성기를 칭찬하는 “섹스매너가 좋은 남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그의 애무에 성감이 살아나고, 그가 ‘성기의 생김새와 기능’을 칭찬하자 자존심이 고양되어 희색이 만연해진다. 물론 그 바람에 그녀가 죽은 거나 진배없는 삶 속에서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게임을 제안한 그는 맥없이 무너져 자기 감정도 게임의 페이스도 추스르지 못한다. 결국 “너무 멀리 왔다”며 실패를 자인하는 그는 “너와 나는 예전에 품었던 가정에 대한 희망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반복될 것이고…”를 읊조리지만, 애당초 그는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제시하기는커녕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타이타닉>에서 여자의 가슴 속 열정을 발견하여 이끌어내고, 그녀의 아름다운 (성기가 아닌) 전신을 훑듯이 그려주고, 그녀의 함께 살고자 고군분투하다, 죽으면서까지 “반드시 살아남아…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죽으라”는 축복의 훈화말씀을 남겼던 디카프리오와 비교해보라. 하기야 남편 복 없는 년이 애인 복이나 있을라구 그러나, 해방은 어디에 이 영화는 스위트 홈의 꿈이 개박살나는 재난을 당해 좀비가 된 여자와 무슨 재난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되 허망해진 남자의 출구없는 연애담이자, 재난 극복(결국은 실패)기 이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녀가 품고 살아갈 희망은 무엇인가 “내 성기가 예쁘고 쓸 만하다는 남자가 있었다네… 그 남자는 죽고 나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외롭지 않네… 내 성기는 내 자존심의 근간이라네…” 노래를 부를 그녀에게 유머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소대장의 훈시, “기쁜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전하겠다. 기쁜 소식은 ‘모두 팬티를 갈아입는다!’와~ 나쁜 소식은 ‘김 상병은 이 일병 것으로, 이 일병은 박 이병 것으로 갈아입는다’. 실시!” 갈아입긴 하였으나 새 팬티가 아니다. 살아나긴 하였으나 새 삶이 아니다. 해방은 어디 있는가?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

아저씨,<바람이 우리를....> 키아로스타미와 조우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는 고백은 자신이 왕초보 무비고어(moviegoer)라는 자백일 터이다. 최인훈이나 황석영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는 고백이 자신이 왕초보 독서인이라는 자백이듯.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를 봤다. 이 소문난 이란 시네아스트와의 첫 대면이었다. 황홀경의 기대로 너무 들뜬 채 영화관엘 들어간 탓인지, 그만그만하다는 소감으로 차분해진 채 나왔다. 물론, 반반한 영화 한편을 내 시네마 천국에 새로 등록했다는 속물적 만족감은 있었다. 화면은 달디단 박하차 같았다. 나는 박하차를 파리의 한 터키 식당에서 몇 차례 얻어 마셔본 적이 있다. 터키와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면서도 이슬람 문명권의 중요한 역사적 주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배경인 시어 다레 마을은 쿠르드족 거주지라니, 아마 터키 국경 언저리에 있을 터이다. 시어 다레는 ‘검은 계곡’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스크린에 오른 이 마을 풍경이 내 뇌리에 박아놓은 빛깔 이미지는 하양이었다. 청명한 햇빛 속에서 집들은 온통 하얬다. 마치 석회로 빚은 듯. 사실 하양은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내게 이슬람의 이미지였다. 이슬람 세계에 가본 적은 없다. 그러나 10여 년 전 이슬람의 자취가 남아 있는 스페인 남부 지방을 버스로 여행했을 때, 내 상상력 속에서 하양은 이슬람의 빛깔이 되었다. 그라나다나 코르도바 같은 도시들의 구시가들이 온통 하얬기 때문이다. 테헤란에서 450마일쯤 떨어져 있다는 영화 속 시어 다레에 그 이름이 뜻하는 검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새하얀 햇빛 아래 만물의 그림자가 까맣고, 마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들도 대개 검다. 집들의 하양은 옷들과 그림자들의 검정에 졸여지며 박하차의 달디단 맛을 우려내고 있었다. 그 점에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흑백영화였다. 시어 다레는 온통 비탈이었다. 그 비탈길들이 만들어내는 스테레오 공간은 미로의 세계였다. 현무도(玄武圖) 속의 뱀처럼 엉켜 있는 골목들과 앞뒷집을 잇는 사다리가 그 마을의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그 네트워크는 인트라넷일 뿐이다. 장례 풍습을 취재하러 시어 다레로 들어간 테헤란 저널리스트 베흐저드의 휴대폰은 그 마을에서 가장 높다란 곳, 묘지에서만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용건이 있으면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앞마당이나 뒤뜰까지도 비탈이었다. 이 비탈의 세계에서 둥그런 것은 죄다 굴렀다. 사과든 공이든 돌멩이든.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번역하며. 그것은 동화 속 공간이거나 놀이동산이었다. 대사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 담긴 소리들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 소리들은 흔히 동물들의 울음소리다. 병아리들과 중닭들과 염소들과 양들과 개들의 웅성거림. 기계문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시어 다레에서 이 소리들은 잠을 망치는 소음이 아니라 생명을 구가하는 복음이다. 거북이나 말똥구리 같은 미물들도 시어 다레 생명 공동체의 버젓한 멤버다. 쏟아지는 햇빛 속의 싱싱한 삶. 그러나 가난한 삶. 그 가난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소란없이 아이를 쑥쑥 낳아 잘도 기른다. 그 삶은 이방인에게는 볼거리일지 모르나,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존의 시공간이다. 자기 사진을 찍지 말라고 베흐저드를 나무라는 찻집 여주인의 위엄이 그 자존에서 나온다. 그녀는 베흐저드의 자동차나 카메라가 순금으로 돼 있을지라도 시어 다레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라는 단언으로 근심 많은 이방인을 멋쩍게 만든다. 그러나 이방인은 시어 다레 사람들의 심성에 끝내 동화하지 못한다. 베흐저드가 마을 소년 파흐저드와의 깨어진 우정을 끝내 회복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다. 영화 속에서 베흐저드를 비롯한 취재팀은 한 할머니의 죽음을 기다린다. 타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더러 저널리스트의 운명이다. 윤리적으로 미묘한 상황이다. 영화 속 베흐저드의 처지는 내게 어떤 기억을 강요하며 낯을 화끈거리게 했다. 한 신문사의 파리 주재 기자로 일하던 8년쯤 전, 나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와 관련해 큰 오보를 낸 적이 있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기사였는데, 그게 그만 종교면 머리기사로 올랐다. 그 기사가 나가고 얼마 동안 나는 교황 성하께서 어서 선종하시기만을 빌었다. 성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신없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 계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느리고 낙천적인 삶을 찬송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바람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결국 죽음이 아니라면 일상의 쾌락에 속도를 강요하는 죽음이 아니라면 중세 이란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의 연작 4행시 한 대목.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은 짧디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의 겨울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

덜 격정적인,더 평온한 <밀애> O.S.T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로 잘 알려진 독립영화판의 여걸 변영주가 메가폰을 쥔 첫 본격 극영화인 <밀애>는,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교과서적인 사랑의 전복’을 꿈꾼 영화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부일처제의 구조를 받아들였던 한 여자가 남편의 외도에 의해 그 구조 자체가 허위라는 걸 깨닫는다. 2) 배신감에 젖어 있던 그녀가 역시 일부일처의 구조에 회의를 품고 있는 한 시골 의사와 한여름 동안의 격정적인 밀애를 겪는다. 3)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다. ‘격정멜로’라는 근사한 장르명이 붙어 있는 이 영화는 마치 플로베르의 <보바리부인>의 현대 한국판 같다. 특히 시골 밤길을 잠옷바람으로 달려 자신의 애인을 찾아가는 장면 같은 데가 그렇다. 이 불륜의 드라마에서 어느 정도 ‘고전’의 느낌이 풍긴다. 음악은 이 영화의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나 싶다. 심리극에 잘 어울리는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주로 구사하고 있다. 브람스의 <피아노 사중주 G단조> 같은 작품을 선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전적인 실내악풍의 음악은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 시골스러운 공간에도 잘 어울린다. 핀란드의 민요나 빌라로보스, 비발디의 작품이 선곡된 것도 내면적인 심리드라마, 전원풍의 분위기, 그리고 고전적인 향취라는 세 꼭지점에 포인트를 고려할 때 이해가 간다. 작품을 이끄는 중요한 모티브로 여겨지는 존 바에즈의 <도나 도나> 역시 이러한 맥락에다가 여성적 소박함에서 오는 굳셈이랄까, 그런 것을 추가한 느낌이다. 핀라드 민요에서 존 바에즈의 음악까지, 시공을 종횡으로 누빈 음악을 감독한 사람은 조영욱이다. 알다시피 그는 <접속>에서 <러버스 콘체르토>를 발굴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탁월한 선곡자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영화음악계에서 그의 음악선곡 폭이 가장 넓지 않나 싶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폭넓은 ‘리스너’라는 점을 알려준다. <텔미썸딩>에서는 닉 케이브의 노래를 선곡하더니 <해피엔드>에서는 북으로 간 가수 김해송의 음악까지 선곡했다. 그가 이렇게 폭넓게 음악을 선곡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음악을 엄청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선곡에서는 그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가 절절히 묻어 있다. 감상적이면서 차분한 오리지널 스코어는 최승현, 심현정이 썼다. 전체적으로 선곡과 스코어가 무리없이 영화에 들어맞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조금 덜 ‘격정적’이지 않았나 싶다는 것. ‘격정멜로’치고는 뾰족한 데가 덜하고 오히려 동글동글 갈려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평온하다는 것. 물론 ‘여성의 시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대놓고 격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밀애>는 결과적으로는 약간 아이러니한 대목이 있다. 여주인공이 한여름 동안의 격정적인 밀애를 통해 남편과 자식 대신 자기 자신을 찾는다. 그건 맞다. 그러나 그녀의 죽은 애인이 ‘한 여자에 한 남자’식의 애인관계를 부정하는 반면 그녀는 여전히 그 구조 속에 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한다. 자기 애인을 자기와 일대일 대응시키고 그 구조 속에 묶어놓으려 한다. 어떻게 보면 바람둥이인 남자 애인은 미꾸라지처럼 그 구조를 빠져나간다. 여관방에서, 잠을 깨고나니 남자는 가고 없다. 일대일 대응의 관계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건 오히려 여주인공이다. 그래서 ‘조금 덜 격정적인’ 느낌이 들었던 걸까. 어쨌거나 음악은, 그런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일본의 색과 색,그리고 만화 <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좁은, 그나마 분단되어 4면이 막힌 한반도 남쪽에서 사는 내게 ‘중국’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상상이 만주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대륙의 파란만장한 깊이를 느끼게 했지만 ‘일본’이 내게 모종의 ‘충격=감동’적 실감으로 온 것은 약 5년 전, 나이 40을 넘기고서다. 프랑스 라루스 테마 백과사전 ‘예술과 문화’편을 뒤지다가 마주친, 약 1천년 전에 출간된 무라사키 부인의 ‘세계 최초-걸작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삽화는, 명징한 색깔과 명징한 모양의 결합이 달하는 또한 명징한 깊이가, 개방된 성(性)으로서 색이 예술로서 색과 상호교통하는 통로를 응축하는 듯하여, 내 눈과 감각이 유교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점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 이러한, 일본적 일상의 ‘색과색’은 정치지상화할 경우 잔혹한 ‘육체성’을, 예술지상화할 경우 ‘죽음의 탐미주의’를 낳지만( <바람의 검심>은 그 결합이다), 일본 만화는 이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을 다시 한번 일상화, 대체로 양극단을 은폐하거나(<몬스터> 계열) 완화하거나(<시마 과장> 계열>, ‘일상의 깊이’로 전화하는(<초밥왕> 등) 세 가지 방식을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만화 왕국’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위 세 가지 맥락이 우파 혹은 중도우파적이라면 이 만화는 단연 사회주의적이다. ‘그림’과 ‘드라마’는 너무 단순하고 줄거리도, 전일본대학 축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도 ‘국가도 따라하지 않고 국기에 경례도 붙이지 않’은 ‘불경’ 때문에 축구계에서 추방될 위기를 맞은 스미카와 진이 천황제의 폐해와 천황제 철폐의 당위를 ‘몸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각주형식으로 붙은 ‘해설’은 어지간한 일본 근현대사 못지않게 자세하고 해박하고 적절하여 사회과학적 일반성을 득한다. 그리고 이 일반성이 아연, 일제 잔재가 ‘본토 일본’보다 더 뿌리깊게 남아 있는 남한 현실의 폐부를 찌른다. 사회주의적 일반성이 만화-예술적 일상성에 달하는 장면을 목도하려면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이 책은 튼튼한 출발점이다. 이 책을 펴낸 천희상은 번역자로 실한 명성을 쌓다가 출판에 투신, 7∼8년 동안 진지해서 (당연히) 안 팔리는 책 출판을 고수해온 사람이다. 80년대에는 누가 출판사를 때려치우면 친구들이 차라리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숫자는 다섯이 채 안 된다. 이 책이 또한 ‘세계인’ 천희상의 튼튼한 출발이 되기를 비는 까닭이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

MBC 「어사 박문수」촬영현장

27일 낮 충북 충주시 살미연 재오개리에 마련된 MBC 사극 세트장. 계절을 앞서온 매서운 추위 속에서 MBC 새 월화 미니시리즈 「어사 박문수」의 촬영이 한창이다. 「어사 박문수」는 정의와 대의를 구현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암행어사 박문수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로 탤런트 유준상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이날 촬영분은 4부 방영 예정으로 어사에 임명된 박문수가 종복인 칠복(이한위) 과 함께 양반의 도량형에 문제가 있는지 우회적으로 알아보는 장면. 양반이 경영하는 쌀가게에서 박문수는 “쌀 닷되를 좀 꾸어주시오”라고 말한다.그러자 박문수의 요구를 받은 양반은 “아니 내가 뭘 믿고 댁에게 꾸어줍니까?”라고 반문한다. 박문수는 웃으면서 같이 다니는 칠복을 가리키며 “이놈을 담보로 삼으면 아니되겄소?” 라고 말하는 찰나 충주 공항에서 뜬 비행기 엔진 소리에 NG가 났다. “컷. 조금만 기다렸다 다시 갑시다. 레디…액션” 촬영이 재개되자 유준상은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으로 칠복을 가리키며 양반에게 “아예 하나 사시면 어떻겠소? 내가 워낙 형편이 어려워서리.”라고 대사를 던진다. 그러자 칠복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듯 ‘어허’ 하는 헛기침과 함께 박문수를 쳐다본다. 이어 박문수는 갑자기 “아니오. 내 마음이 바뀌었소. 칠복아 가자.” 하면서 자리를 뜬다. 그 사이 박문수는 도량형의 크기를 이미 파악해 버린 것. 이 장면은 도량형을 속여 백성을 수탈하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우회적이고 해학적으로 도량형의 크기를 재어보는 장면이라고 연출자 정인 PD는 설명했다. 정인 PD는 이어 “이 장면이 드라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신”이라면서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완벽한 인물로 박문수를 그리기보다는 백성의 입장에서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해학적이면서 살아있는 인물로 묘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오후에는 MBC가 총 제작비 1억원을 들여 건조한 나룻배 두 척의 진수식이 이어졌다. 이 나룻배 두 척은 전장 16m 폭 4.3m의 쌍돛배와 전장 15m 폭 3.5m 규모의 외돛배로 앞으로 극중에서 쌀, 특산물 등 물류 이동의 수단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바닷물에 담근 소나무를 재료로 목재의 이음매는 송진과 노끈으로 만들어 영락없이 조선시대의 나룻배를 연상케 한다. 배 안에 눈에 안 띄게 장착한 모터를 동력으로 삼아 바람이 거꾸로 분다 해도 촬영에 지장이 없게 만들었다고 한 제작진이 전했다. 이 배는 드라마 촬영이 끝난 뒤 충주시와의 협의를 거쳐 오픈 세트와 함께 관광 명소로 자리잡을 예정이다. (충주=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