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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 여기는 스누피 3차원 미술의 세계!

오는 6월29일~9월16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스누피를 테마로 한 미술, 건축, 패션, 생활디자인 전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열린다. 2005년 스누피 탄생 55주년을 맞아 일본 전시기획사 We’ve가 작가 찰스 M. 슐츠의 부인과 유나이티드 피처스 신디케이트의 동의를 얻어 기획한 이 디자인 전시는 유명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재창조한 스누피 작품을 선보인다. 대중문화와 강박증을 테마로 활동한 국제적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해 소개된 페이퍼테이너 미술관 설계로 우리나라서도 유명한 반 시게루 등이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이미 40만명의 관람객을 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은 아티스트들의 작품부터 상품 브랜드와 결합한 패션, 생활소품 디자인까지 포괄하는 크로스오버 전시라는 점이 새롭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친숙한 캐릭터 스누피를 둘러싼 작가들의 다양한 해석. 이들이 본 스누피의 폐소공포증, 강박, 자아도취와 깨달음 등의 테마를 미리 살짝 공개한다. “<피너츠>의 시학은 아이들의 모습에 슬쩍 감추어둔 어른들의 근심과 걱정을 재발견한다.”(움베르토 에코) 1950년 10월 첫 신문연재를 시작한 이래 50여년간 75개 국어로 번역된 <피너츠> 시리즈의 인기야 새삼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야구도 공부도 어설프기만 한 애처로운 주인공 찰리 브라운, 담요를 끌고 다녀야 마음이 안정되는 조숙한 철학자 라이너스, 만사를 제 손 안에 휘둘러야 속이 시원한 그의 누이 루시 그리고 두발로 걷는 지적인 강아지 스누피는 연재가 끝난 뒤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움베르토 에코는 저서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에서 시대를 초월한 시리즈의 인기 비결로 개그와 선문답에 은밀히 함축된 ‘어른들의 노이로제’를 꼽은 바 있다. 자신의 교양을 증명하기 위해 다이제스트판 문고와 자기계발서에서 그러모은 잡식을 떠벌리고, 상대의 인정을 받으려 헛된 투쟁을 벌이는 현대인의 수고로움이 <피너츠> 속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에서 언뜻언뜻 비쳐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대의 관심을 끌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 고민이 많아 구강기적 안정(담요와 손가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라이너스, 삶에 대한 어떠한 회의도 없는 이기주의자 루시 캐릭터가 만드는 피너츠의 소우주는 어른들에게 “돈주머니를 톡톡 털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축소판 ‘인간희극’”인 것이다. 스누피의 강박증은 ‘땡땡이’무늬로, 폐소공포증은 ‘쿠션’으로 그리고 <피너츠> 인기의 핵심엔 시리즈의 아이콘인 스누피가 있다. 사색하고, 소설을 쓰고, 수시로 변장을 즐기고, 나르시시스트인(물그릇에 비친 자기 모습을 더 보기 위해 물 마시기를 거부할 정도다) 이 강아지는 특유의 초연함과 엉뚱한 현실도피적 공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스누피의 변신은 창작자와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테마다. 85년 미국의 한 아트 갤러리에서 열린 <스누피 인 패션>이라는 전시는 펜디, 미야케 이세이 등이 스누피를 위해 디자인한 명품 옷을 선보였고, 98년 맥도널드가 각국 민속의상을 입은 스누피를 제공했을 때 홍콩선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 경찰이 질서유지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재미도 이 친근한 캐릭터들이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의 시각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재해석됐는지 확인해보는 데 있다. 그러니 이번 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피너츠> 캐릭터들의 성격과 특성을 미리 복습해두는 게 좋겠다. ‘아트 스테이지’와 ‘리빙 스테이지’ 두 가지 섹션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선 미술과 디자인, 상품에 구현된 스누피와 친구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면면들도 예사롭진 않다. 대표적인 작가는 스누피를 강렬한 ‘땡땡이’무늬로 뒤덮어버린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지난 2월을 포함해 한국에서도 몇 차례 전시를 가진 구사마는 60년대 미국에서 반전 행위예술과 전위 패션쇼 등을 열며 활동한 현대미술가다. 오랫동안 앓은 정신분열증의 환영을 반복적인 물방울 무늬와 그물망 무늬로 표현했던 그가 이번엔 스누피에게서 강박증을 발견했다. 사랑스런 스누피에게 마구 덧칠된 점박이 무늬와 그물망, 금속 마카로니가 안쓰러울 정도지만 애정과 강박에 둘러싸인 스누피라는 구사마만의 해석이 담겨 있다. 지난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페이퍼테이너 전시에서 종이로 미술관을 지었던 반 시게루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그가 출품한 세개의 개집은 1995년부터 유엔의 난민고등판무관 컨설턴트로 난민 보호와 구제에 종사해온 환경건축가 반 시게루의 건축 철학을 반영한 작품이다. 벽돌집이 가장 튼튼하다는 <아기돼지 삼형제>의 모티브를 뒤집어, 재해에 가장 취약하고 피해도 큰 벽돌집 대신 종이기둥으로 만든 스누피 집을 제안한다. 상업적인 수주를 거의 받지 않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번 전시에선 스누피를 통해 현재 자신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구호 건축 활동을 홍보하고 있다. 그외에도 패션, 공예, 제품디자인 작품에서 스누피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만날 수 있다. 영국의 디자인 건축 사무소 클라인 다이섬 아키텍처가 스누피에서 주목한 건 폐소공포증이다.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지붕에서 일상을 보내는 스누피에게 집은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는 해석으로 개집을 쿠션으로 재창조했다. 일본 무인양품(MUJI), 미국 IDEO의 디자이너를 거쳐 지금은 생활브랜드 ±0를 운영하는 세계적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스누피의 특성을 3개의 입상과 주변 공간에 표현했다. 무기질의 대상에 따뜻한 니트옷을 입히는 패션디자인그룹 민트디자인은 <피너츠> 캐릭터 입상에 파스텔톤의 니트를 씌우는 작업을 했다. 일본 전시에게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네일아티스트 미우라 가나코의 패디큐어를 받은 스누피상과 핫핑크빛 네일칩으로 만든 스누피 모자이크도 감상할 수 있다. 일본 전통공예, 고급 브랜드와 접목되어 생활소품으로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스누피와 일본 전통공예의 접목이다. 일본에서 처음 기획된 이 전시에선 헬로키티에게 기모노를 입히는 일본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에도시대 서민들의 목면수건에 스누피의 성격을 묘사해 넣은 테누구이, 전통 방식으로 떠낸 닥종이로 만든 스누피 머리모양 전등은 실용상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말린 꽃잎을 하나하나 눌러 만든 오시바나 공예작품에선 수백개의 꽃잎에 새겨진 스누피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3D로 구현된 수묵애니메이션 <꽃은 붉구나(화홍)>는 이번 전시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 웹 솔루션, 광고영상 등을 만드는 테크놀로지 집단 팀랩이 만든 이 6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전통예술 ‘에마키모노가타리’(긴 두루마리에 그린 스토리가 있는 회화)를 영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4대의 PDP 스크린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작품이다. 정원에서 한가로이 꽃을 바라보던 스누피가 가마와 학을 타고 세상을 유람하는 백일몽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 단아한 수묵화로 그려진 스누피 이미지도 신선하지만 시점을 무한히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동양산수화의 미학이 3D 그래픽으로 구현돼 흥미롭다. 작가들뿐 아니라 상업 브랜드가 대거 참여한 터라 전시 관람인지 윈도 쇼핑인지 혼돈을 일으키는 작품도 많다. 루이 14세 때부터 내려온 프랑스 고급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는 스누피 캐릭터가 정밀히 세공된 샹들리에를, 일본 자기회사 하쿠산 포슬린은 스누피 식기를 내놓았다. 홍차 블렌드 아티스트 구마자키 순타로가 내놓은 스누피 홍차 ‘SPOOTEA’의 발상도 재미있다. 소심한 찰리의 홍차엔 밀크티 베이스에 캐러멜과 너트의 풍미를 섞는 등, 캐릭터 성격에 맞춤한 홍차 제품을 세트로 출시한 것. 모든 전시를 둘러보면 한국의 창작그룹 노네임노샵이 마련한 포토존을 즐길 수 있다. 흑백의 피너츠 만화를 폼보드에 인쇄해 설치한 이곳에선 마치 신문 만화 안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라이프디자인전’이라는 이름에서 미리 명시한 대로, 캐릭터 상품과 긴밀한 이번 전시는 디자인의 숙명인 상업성을 부담없이 즐길 기회이기도 하다. 쇼핑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둘러보는 게 이번 전시를 즐기는 바른 방법이다. 최근 급성장한 명화전과 어린이 대상 전시와 달리, <스누피라이디자인展>은 가족과 어린이 관객뿐 아니라 스누피를 기억하는 20~30대 여성층의 소비 문화를 공략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를 매개로 낯선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부담없이 즐기는 컨셉이다.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이 교과서용 명화나 난해한 디자인전과는 다른 재미를 쏠쏠하게 선사한다는 건 분명하다. 캐릭터에서 무한히 변주되는 디자인의 즐거움, 올 여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글 스누피와 함께 누려보시길. 스누피에 대한 사소한 상식들 낑낑, 내가 사실은 58살이라고! 스누피의 등장 우리에겐 <피너츠>라는 원제보다 ‘스누피’가 더 익숙하지만, 스누피는 처음엔 연재가 시작된 지 이틀 뒤인 1950년 10월4일에야 등장한 조연이었다. 스누피가 처음 생각을 표현한 건 2년 뒤인 1952년 5월27일, 두발로 걷기 시작한 건 1956년 1월5일부터다. 스누피의 언어 스누피는 말이 없다. 대신 생각을 의미하는 말풍선으로만 의사를 표시한다. 다른 피너츠의 캐릭터들처럼 스누피도 비속어, 은어, 줄임말을 전혀 쓰지 않고 문법을 철저히 준수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들은 “하버드의 언어”를 쓴다고 할 정도. 스누피의 공상 몽상가 스누피는 언제나 지붕에 올라 꿈을 꾼다. 원작자 슐츠는 “그는 살아남기 위해 공상한다. 안 그러면 지루하고 비참한 개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라고 설명했다. 스누피의 집 겉보기와 달리 내부 면적은 상상을 초월한다. 침대, 당구대, 탁구대, 텔레비전, 샤워실, 자쿠지 욕조까지 있다. 스누피의 밥 그릇을 5280회 굴리면 1마일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미루어보아 직경은 10.25cm 정도로 추정된다. 밥그릇은 빨간색, 물그릇은 노란색이다. 가장 좋아하는 개밥 브랜드 이름은 ‘1차대전 비행 경험이 있고 불어를 좀 아는 강아지를 위하여’다. 스누피의 상징 조종사 변장 덕에 스누피는 미국 공군과 NASA의 마스코트로 자주 쓰인다. NASA 직원들은 아폴로 10호의 비행모듈을 스누피, 지상 명령 모듈을 찰리 브라운이라 불렀다. NASA 우주비행복에 쓰이는 흑백 헬멧도 “스누피 캡”으로 통칭된다. 슐츠가 평생 가입했던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MetLife)의 상징도 스누피다. MetLife는 이번 <스누피라이프디자인展>의 공식후원사도 맡았다.

[2007 납량 공포 특선] 다리오 아르젠토 회고전 상영작 4편

가장 완벽한 아르젠토의 영화 <수정 깃털의 새> The Bird with Crystal Plumage, 1970년, 98분 올해 다리오 아르젠토 회고전에서 단 한편의 영화를 보아야 한다면, 그 영화는 당연히 <수정 깃털의 새>가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아르젠토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젠토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너무 잘 만들어서 오히려 덜 아르젠토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르젠토 영화는 적당히 어색하고 지루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수정 깃털의 새>는 날렵하고 잘 짜여졌으며 학살장면 사이의 이야기들도 꽤 재미있는 편이다. 게다가 그는 가장 훌륭한 서스펜스 장면 하나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멋지게 해치우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당시 평론가들이 아르젠토를 ‘이탈리아의 히치콕’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해가 된다. 물론 그는 그 뒤로 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80년대만 해도 그 별명은 엉뚱한 병에 붙은 상표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줄거리는? 이미 위에서 다 설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탈리아인 여자친구랑 같이 사는 미국인 작가가 우연히 살인미수 현장을 목격하고 그 뒤로 젊은 여자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했는데도 <딥 레드>의 추리물은 지겨운데, <수정 깃털의 새>는 그렇지 않은가? 답은 이탈리아 호러 영화계에서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스토리텔링 따위는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시절의 아르젠토는 스토리의 재미를 그처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아르젠토의 심리묘사는 어떤 맛? <스탕달 신드롬> The Stendhal Syndrome, 1996년, 120분 <스탕달 신드롬>의 원작은 그라지엘라 마게리니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안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만 보면 정신을 잃는 스탕달 신드롬을 앓는 강간 전문 형사인데, 우연히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갔다가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보고 정신을 잃게 되고 그 무력해진 상태 속에서 연쇄강간범의 희생자가 된다. 그 뒤로 안나는 스탕달 신드롬과 강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범인을 추적하는데, 전형적인 강간복수극인 것 같던 이야기는 중반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탕달 신드롬>에는 아르젠토식 연쇄살인 묘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검은 장갑의 살인마도 없고 현란한 가짜 피도 거의 없다. 대신 아르젠토 특유의 현란한 스타일은 온갖 정신적 충격으로 황폐해진 주인공의 내면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집중한다. 만약 그가 이 복잡한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만한 좋은 배우와 연기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추었다면 이 영화는 90년대 나온 가장 훌륭한 아르젠토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냥 잠시 궤도를 이탈한 원로의 야심적인 실험작 정도로 남은 듯하다. 아르젠토 버전으로 뒤틀린 <오페라의 유령>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1998년, 103분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의 유명한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이를 위해 아르젠토는 로만 폴란스키의 파트너로 유명한 저명한 각본가 제라르 브라크를 공동각색가로 기용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땠냐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영화에서라도 어색한 대사와 연기를 끌어내는 아르젠토의 재능은 전문 작가 브라크의 재능을 능가한다. 영화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팬텀’은 마스크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줄리언 샌즈처럼 생긴 잘생긴 남자이다. 팬텀의 과거사도 원작의 팬텀보다는 오히려 <배트맨2>의 펭귄에 가깝다. 갓난아이가 파리의 하수도에 버려졌는데, 친절한 쥐떼가 그 아기를 키웠고, 그들 사이에서 자란 아기는 훌륭한 가수를 알아보는 예민한 귀와 시청의 쥐잡이들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되었다는 거다. 19세기 파리를 재현한 세트와 촬영은 아름답고 오래간만에 한팀이 된 엔니오 모리코네 역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며 크리스틴 다에를 연기한 아시아 아르젠토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큼 아름답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그냥 실패작이다. 영화를 구성하는 코미디, 로맨스, 섹스는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그냥 덜컹거릴 뿐이고 그나마 감독의 장기인 피투성이 살인장면도 낯선 설정 탓인지 영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 팬텀을 연기한 줄리언 샌즈는 아마 가장 따분한 아르젠토 괴물일 것이다. 히치콕의 패러디 혹은 아르젠토의 패러디 <히치콕을 좋아하나요?> Do You Like Hitchcock?, 2005년, 93분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논문을 쓰느라 바쁜 영화학도인 줄리오는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자 이웃 사샤를 가끔 훔쳐본다. 사샤가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페데리카와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샤의 어머니가 살해당하자 줄리오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한다. 사샤와 페데리카는 히치콕의 <열차 안의 이방인>을 보고 교환살인을 계획했던 것이다! 지극히 히치콕적인 스토리에 산더미 같은 히치콕 오마주를 담은 아르젠토의 2005년작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앨프리드 히치콕을 추모하기 위해 이탈리아 텔레비전이 계획한 텔레비전영화 연작의 첫 작품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리오 아르젠토는 한동안 ‘이탈리아의 히치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니, 이 계획의 첫삽을 뜨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히치콕의 패러디일 뿐만 아니라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의 패러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르젠토 영화를 특징짓는 피투성이 살인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흉기를 휘둘러대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살인자는 여전히 나온다. 단지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살인자가 검은 장갑 대신 흰 장갑을 끼고 있고 멀리서 주인공이 왜 살인범이 그 장면에서 장갑을 끼고 있는지 여자친구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아르젠토 영감이 이렇게 엉큼한 농담을 구사할지 어떻게 알았겠나. 여전히 어색하고 뻣뻣한 영어 대사가 군데군데 신경을 긁긴 하지만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대표작들보다 더 재미있다. 주인공 캐릭터는 생생하게 살아 있고 페이스는 적절하며 유머감각도 풍부하다. <수정 깃털의 새> 이후 거의 죽어 있던 스토리텔러 아르젠토가 은근슬쩍 부활하기라도 한 걸까? 아르젠토식 피투성이 자극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비교적 얌전한 사건 전개에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늘 아르젠토가 같은 종류의 지알로 영화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히치콕을 좋아하나요?>는 지난 몇년 동안 아르젠토가 시도해왔던 예술적 일탈 시도 중 가장 눈에 뜨이는 성공작이다.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 진중한 울림의 A급 감동

가슴에 쿵하고 무겁게 떨어지는 대사, 눈시울을 천천히 적셔오는 음악, 소리 내진 않아도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게 해주는 이야기. <철큰 근크리트> <신동>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은 보고나면 가슴이 훈훈해지는 영화들이다. 말초적인 재미보단 진중한 울림을 주는 영화 3편을 모았다. 철콘 근크리트 鐵コン筋クリ-ト 감독 마이클 앨리어스 | 목소리 출연 니노미야 가즈나리, 아오이 유우, 이세야 우스케, 구도 간쿠로, 다나카 민 | 2006년 | 110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도시, 삶은 무엇이 지탱하는가. 노숙자와 야쿠자들이 모여 사는 거리 ‘다카라쵸’에는 쿠로(黑)와 시로(白)란 이름을 가진 두명의 고아소년이 있다. 고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다카라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고 다니는 아이들. 하지만 다카라쵸에는 ‘어린이 성’ 프로젝트로 떼돈을 벌어보려는 외부인과 야쿠자의 음모가 다가온다. 다카라쵸를 자신의 근거지마냥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쿠로와 시로는 이들에게 눈엣가시. 이후 영화는 다카라쵸를 지키려는 쿠로, 시로와 그 거리를 자신의 마을로 만들려는 조직의 대결을 그린다. <우울한 청춘> <핑퐁> 등으로 유명한 마쓰모토 다이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철콘 근크리트>는 콘크리트의 냄새를 전하기라도 하듯 도시 묘사에 충실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다르고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묘한 기운을 내뱉는다는 콘크리트의 향내는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 도시의 뒷골목과 피폐한 구석의 어둠은 쿠로의 내면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영화적인 연출도 눈에 띤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 디지털 이펙트 작업을 했던 마이클 앨리어스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이동이나 도시 전체를 빠르게 돌아보는 회전이 두드러진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도시의 드라마로 풀어가는 화법도 뛰어나다. “부모의 죄는 자식이 진다”는 대사나 트로이와 카산드라의 에피소드를 인용하는 부분은 쿠로와 시로가 왜 그렇게 다카라쵸에 연연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대목.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진실이 무겁게 가슴을 누룬다. 영화의 마지막, 시로가 지구별 일본국에서의 교신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는 함께 박수를 쳐주고 싶어질 정도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미국의 예술잡지 <아트포럼>이 선정하는 2006년 베스트필름에 뽑혔다. 초호화 보이스 액팅 목소리에 값을 매긴다면 <철콘 근크리트>의 캐스팅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쿠로와 시로를 각각 연기한 인기 댄스그룹 아라시의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훌라걸스> <허니와 클로버>의 아오이 유우는 물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허니와 클로버>의 이세야 유스케, <메종 드 히미코>의 히미코를 연기한 다나카 민도 참여했다. <이치 더 킬러> <돌스>의 오모리 나오와 개그 트리오 모리 산추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스타들의 색다른 목소리를 듣는 재미로 영화를 봐도 나쁘진 않을 듯. 참고로 아이오 유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남자아이다. 신동 神童 감독 하기우다 고지 | 출연 나루미 리코, 마쓰야마 겐이치 | 2007년 | 120분 13살 소녀 우타(나루미 리코)는 피아노 신동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제는 피아노를 싫어한다. 학교도, 피아노 레슨도 지루할 뿐이다. 반면 대학 입시를 앞둔 와오(마쓰야마 겐이치)에게 피아노는 애정의 대상이다.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며 계속 따라가야 할 과제다. 와오는 우타의 실력을 부러워하지만 우타는 와오의 재능에 호기심을 느낀다. 귀가 좋은 와오는 바다, 물, 바람처럼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리에 별다른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던 우타는 어느 순간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챈다. 아버지의 죽음과 과거의 상처를 연상시키는 소리. 우타는 이제 병과 싸워야 한다. 사소우 아키라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 이 영화는 음악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다른 성장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을 하는 두 인물 우타와 와우의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다. 하지만 하기우다 감독은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인물들의 아픔과 극복만큼은 아름답게 그려낸다. 음악이 끝난 뒤 전해지는 여운에서 사람의 슬픔이 느껴지는 영화.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ALWAYS 三丁目の夕日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 출연 호리키타 마키, 쓰쓰미 신이치, 고유키, 요시오카 히데토시 | 2005년 | 133분 2006년 일본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 12개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 무츠코는 집단 취업으로 도쿄에 올라온 십대 소녀다. 작은 정비소에 일터를 잡고 정비소 사장인 스즈키(쓰쓰미 신이치)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같은 마을에서 과자점을 운영하는 류노스케(요시오카 히데토시)는 삼류 소설가로, 고백도 못하고 혼자 좋아하는 여자 히로미(고유키)의 부탁으로 남자아이를 떠맡고 있다. 소설을 좋아하는 그 아이는 류노스케의 팬. 류노스케도 점점 그 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1950년대 도쿄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삶을 그린 만화 <3번가의 석양>을 영화화한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즐겁게 살았던 쇼와 시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다. 마을에 하나뿐인 텔레비전을 함께 모여 보고, 살림이 어려워 고향에도 가지 못하는 이웃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에피소드가 따뜻한 정취로 그려진다. 소박한 이야기지만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라스트 사무라이>, 드라마 <닥터고토의 진료소 2006>의 요시오카 히데토시는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의 미지근한 열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히노키오>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호리키타 마키는 사투리를 구사하며 시골 소녀의 풋풋함을 잘 살려낸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고유키,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쓰쓰미 신이치도 출연했다.

[인디 뮤지션 3인] <상사몽>의 정민아

가야금의 음색이 사람의 울음소리를 닮아서인가. 지난해 11월 ‘모던 가야금 정민아’라는 카피 아래 발매된 정규앨범 <상사몽>을 듣고 있으면 뮤지션 본인이 우울하고 슬픔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둥글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그는 엉뚱하고 웃음이 많다. “곡을 쓸 당시에는 생각보다 별 감정이 없어요.” 7개 트랙이 실린 EP 형식 앨범 <애화>의 동명 타이틀곡 제목은 그의 어머니 존함을 따서 지어진 것인데 정작 작업하는 동안엔 곡 쓰는 일에만 몰입하다 나중에야 ‘아, 엄마 생각이 나네’ 하며 그제야 주위 사람들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는 애절한 정서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대상을 보는 처연한 정서가 좋다. 정민아는 국악고등학교와 한양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 가는 좋은 길을 가려고 할 땐 한번도 일이 풀린 적이 없었”다. 국립국악원에 8번 낙방하고 텔레마케터로 생계를 꾸려온 시절은 여러 기사에 실린 스토리. 그는 안양의 모 라이브 클럽에 손님으로 다니다 주말 연습실을 이용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됐고, 가게 사장님 권유로 무대에 서면서 연주곡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보컬곡을 쓰게 됐다. 홍대로 라이브 터전을 옮긴 다음 EP <애화>를 자비로 제작해 장당 7천원씩 500장을 팔았다. “서른살 전에 자작곡 앨범을 내는 꿈은 이뤘다”는 그의 말이 소박하게 들린다. 초등학교 때 유재하음악제 2회 대상수상곡인 <거리 풍경>을 듣고 날마다 음반가게에 가서 “고찬용 1집 나왔어요?”를 묻곤 했던 그는 얼마 전 기적적으로 그와 인연이 닿아 “레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제 음악을 들어봤다고, 좋긴 좋은데 기본적인 화성을 쓰시네요, 하시더라고요.” 이건 물론 단편의 예일 뿐 정민아는 이 인연이 자신에게 더 큰 배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2집 앨범을 준비하기 전에 3개월간 인도 여행도 계획 중이라는 그는 “가야금이 하프처럼 조바꿈만 가능해지면 정말 세계적인 악기가 될 수 있다”며 “내가 하고 싶은 건 어떤 장르가 아니라 그냥 가야금으로 좋은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집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할 말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더 많은 걸 알고 할 말만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이젠 알고 하고 싶고요.” <상사몽> 소니BMG 발매 민속음악의 퓨전과 월드뮤직이 음반시장에서 상업성을 증명해주고 있는 요즘, 정민아의 음악은 장르적으로 분명 그 카테고리에 속하겠지만 여전히 변두리의 음악이다. 현악과 드럼, 베이스를 최소한의 세션으로 활용한 검소한 사운드, 심플한 곡의 구성, 저음의 굵은 보컬 등의 요소가 가난하고 단순하고 고독하고 “처연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정민아의 ‘모던 가야금’ 음악은 민속음악적 색깔을 클럽용 리믹스 가능한 트렌디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게 아니라 본색 그대로 소박하게 다듬어 동시대 음악으로 들리게 한다. 음악적으로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 신뢰를 떨어뜨릴 요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값싼 멜랑콜리함을 진짜 감성인 것처럼 포장한 장식적인 음악들이 대중에게 ‘음악성’의 다른 말로 대체되어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생각했을 때 이만큼 진지함과 꾸밈없음과 겸손함을 갖춘 음반을 만난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지하철에서 악상을 떠올려 한번에 써내려간 <무엇이 되어>나 역시 2∼3시간 만에 완성했다는 <상사몽>은 필청 트랙.

한국영화의 성찬, 마음껏 즐기시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제작부터 상영까지 변방에 있는 한국독립영화들의 새로운 흐름은 오히려 영화제에서 먼저 빛을 발한다.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또한 한국독립영화의 성찬을 마련했다. 단, 영화제 성격에 맞게 매우 판타스틱한 독립영화들이다. 올해 부천에 입점한 독립영화들의 특징은 장르의 쾌감과 변주에 주목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이 인생의 허무를 깨닫거나 미래의 불안을 담아온 것에 비해 이들의 시도는 독립영화계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금지구역 상영작 중 하나인 김진원 감독의 <도살자>는 말 그대로 ‘작정하고 만든’ 하드고어 영화다. 아마도 <도살자>를 본 관객은 배우들의 신변과 영화를 만든 ‘데빌그루브픽쳐스’가 도대체 어떤 일당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온 한 부부가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로부터 사지가 찢기는 봉변을 당하는 게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등장인물들의 머리에 카메라를 매달아 P.O.V(Point-Of-View)숏으로 찍은 이 영화는 거친 화면과 사운드로 아비규환의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톱에 갈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귀청을 때린 뒤에는 뼈를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는 광경이 여과없이 눈앞에 펼쳐질 정도다. 이 모든 게 쇼였다는 반전을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도살자>는 그런 자비심 따위는 갖추지 않은 영화다. 장르영화의 활약이 두드러져 <도살자>가 저예산 독립영화의 제작환경을 드러내며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면 <편지>와 <산책>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과 영상원 4학년생인 김민숙 감독이 공동연출한 <그림자>는 저예산의 장점을 통해 영화의 군살을 뺀 경우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적장 기무라를 죽이지 못하고 혼자 죽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논개를 진심으로 사랑한 기무라는 논개의 죽음을 애도하고, 논개는 그런 기무라의 꿈과 현실에 나타나 조금씩 그의 숨을 죄어온다. 몇 백년 뒤의 현실로 넘어온 영화는 기무라와 논개, 그리고 논개의 연인 최경회의 삼각관계를 또 다른 구성으로 풀어간다. 패랭이꽃을 찾으러 산을 찾은 두 연인과 산을 안내해 주겠다는 한 남자 사이에 흐르는 갈등은 과거의 이야기와 맞물려 또 다른 반전을 만들어낸다. 1편과 2편으로 나뉜 <그림자>는 2억원이란 저예산을 미술과 내러티브에 알뜰히 사용한 흔적을 보여준다. <도살자>나 <그림자>와는 다르게 무협장르에 신선한 감각을 더한 영화도 있다.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도심 속에 숨어 있는 무술고수들의 고민과 우정, 의리를 다룬 작품이다. 사적복수가 허용되는 영화 속의 한국에서는 만 20살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경관 1명과 공증인 1명이 있는 자리에서 원하는 사람과 결투를 벌일 수 있다. 주인공 영빈은 회사에서는 무능한 직원이지만, 결투의 세계에서는 백전백승의 숨은 고수. 어느 날 친구 운광의 무술도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닮은 본국을 만나고 이들 세 남자는 결투의 환란속에서 또 다른 운명의 만남을 맞이한다. <도시락>은 배우들의 액션연기와 은근한 유머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공들여 만든 액션과 무협영화에 대한 애정이 눈에 띈다. 특히 연출, 시나리오, 편집, 미술, 무술 등 1인 5역을 한 여명준 감독의 메이저 진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예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 보여줘 제11회 부천영화제가 발견한 한국독립영화의 또 다른 모습은 ‘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시선이다.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김삼력 감독의 <아스라이>는 대구 독립영화 출신인 감독이 직접 겪은 20대의 성장기를 다루는 이야기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영화의 세계에 매료된 주인공은 영화를 향한 갖가지 꿈을 꾸지만 점점 현실과의 괴리에 부딪히며 좌절을 겪는다. 문화의 변두리인 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과 좌절, 희망을 흑백의 영상으로 담은 <아스라이>는 단지 영화를 만드는 이들뿐만 아니라 20대를 살고 있거나,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우열 감독의 <소년 감독>은 영화가 찍고 싶은 아이의 시점에서 영화 만들기의 순수성을 생각해보는 작품이다. 강원도 산골마을에 사는 소년 상구는 어느 날 아버지의 유품인 8mm 카메라를 갖게 된다. <소년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상구가 서울로 상경해 겪는 갖은 고충을 담지만 아이의 모험을 통해 감동을 끌어내려하지 않고, 대신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인 색채를 가미하며 쓰디쓴 엔딩을 맞이한다. 이야기만 놓고보자면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윤제문, 김상호 등 낯익은 조연배우들과 주연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독립장편영화뿐만 아니라 단편영화들 또한 영화제에서 맛볼 수 있는 진미다. 독특한 상상력과 강렬한 영상이 단편영화의 고유한 장점이지만 부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단편영화들은 특히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에 선정된 10개의 단편영화들 가운데 한국단편영화는 총 4편이다. 한병아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두가 외로운 별>은 이미 지난 6월25일 미국에서 열린 플랫폼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진출한 작품. 성격과 생활 모두에 하나 이상의 장애를 겪고 있는 인물들은 저마다 외롭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캐릭터 구성과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연대의식에서 벗어난 주제가 돋보인다. 그런가 하면 황보임 감독의 <루치아의 자동인형>은 영화 메커니즘의 흥망성쇠를 <노스페라투> 같은 공포영화와 멜로영화의 특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볼렉스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이안식 무반사 카메라로 불리며 폐품처리가 될 지경에 이른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남자를 살리려고 하지만 세상은 이미 HD카메라의 선명한 화질에 빠져 있다. 디지털 메커니즘이 창궐하는 현대에 아날로그 기계의 아날로그적 사랑을 그리는 영화로 무성영화적인 연출이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 기자였던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도 발칙한 상상력과 풍자가 눈에 띄는 영화다. 영화는 월드컵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집단의식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좀비영화로 풀어낸다. 부천 초이스에 선정된 단편영화중 마지막 작품인 <汗(한)>은 제목 그대로 땀이 솟고 흐르는 풍경을 유장한 리듬과 연출로 그려낸 영화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영상이 땀의 액체성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땀 흘리는 자와 안 흘리는 자, 그리고 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자와 먹고 섹스하는 걸로 땀을 흘리는 자의 대비를 통해 계급의 격차를 논하기도 한다. 부천 초이스,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의 단편들도 뛰어나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의 상영 편수가 적다는 사실이 불만인 관객이라면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에 선정된 단편들의 홍수에 빠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천영화제의 상영부문 중에서 관객의 가장 높은 호응을 받아온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부문은 총 58편의 단편영화 중 28편의 한국단편영화를 소개한다. 특징으로 보면 호러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거나 비트는 영화들이 많다. 고등학교 3학년인 세 여고생의 추억회상담인 <버스를 타다>는 <여고괴담>과 같은 학원괴담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설프지 않은 피의 향연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아이들이 떠난 잠깐의 외출을 통해 거대 도시 서울의 이면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유령영화다. 또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체과학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미래사회를 그린 <뼈칼>은 묵시론적이면서도 좀비영화 같은 특징이 반영된 작품이다. 한편 평범한 일상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영화들도 도드라진다. 축농증으로 고생하는 천재소녀의 코에서 검은 생물체가 빠져나오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지적능력이 점점 저하되는 과정을 그린 나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하룻밤을 판타지로 풀어낸 <자야 한다>, 그리고 무허가 쪽방촌에 사는 한 소년과 신비한 소녀의 만남을 담은 <미유>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또한 유기견이 자신을 버린 가족에게 복수한다는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 같은 독특한 작품도 있다. 28편의 한국단편영화들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은 가족 안의 관계를 판타지적인 색채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러 다니는 소년의 여정을 담은 <들리나요?>와 전파상의 고장난 텔레비전으로 죽은 엄마와 교신하는 <보이지 않는 천국>,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아들 사이의 애증을 미스터리로 풀어낸 <프랑스 중위의 여자>,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형제가 사라진 사실을 깨닫게 된 아이를 그린 <늪 속의 괴물>이 있다. 이 밖에도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꿈의 해부>, 통일한국에서 만난 북한 소년과 소녀의 희망을 그린 <서울까지>, 우연히 얻은 권총으로 갱영화를 찍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굿바이 칠드런>, 그리고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장르의 상상력展’에서 대상과 촬영상을 받은 <10분간 휴식> 등이 단편영화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줄 것이다. 배부를 만큼 보고 토할 만큼 즐겨도 된다. 어차피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비처럼 가벼워지련다

<별빛 속으로>의 황규덕 감독에게 살짝 물어봤다. 배우로서 김민선은 어떤 사람인가? “영화 끝나고 최근 떠오른 생각인데 미국 배우로 치면 조디 포스터 같은 사람이다. 조디 포스터는 출신부터가 제대로 된 문화예술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미국 상업문화권 안에서 활동하며 적응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뭔가가 있는 사람이다. 내 추측인데 김민선은 연기자를 넘어 연출에 대한 역량까지 꿈꾸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걸 따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런 성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충무로 주연 여배우라는 틀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찾으면서도 항상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김민선에게도 물어봤다. 촬영하면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 “첫날이 좀 갑갑했다. (웃음) 대사도 많았고 동선도 복잡한 원신 원컷 촬영이었다. 물론 연기자로서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할 마음으로 뭔가 열어놓고 오긴 하지만, 감독님 스타일상 길게는 말씀 안 하시더라. 삐삐소녀가 누구인지 아직 감도 잘 안 잡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머리는 아파오고. 그래서 감독님에게 재차 물어보게 되더라.” 사실 같은 얘기다. 한 발짝만 움직이기 위해서도 본인이 납득이 되어야만 발을 떼는 타입의 배우들이 있는데 김민선이 그렇다. 그건 김민선의 오래된 완벽주의자 기질이다. “집안의 넷째다 보니 가족 사이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아이였고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완벽해지려고 했고, 어렸을 때는 혹시 내가 이런 말 하다 틀리면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생각하며 토씨 하나까지 준비하는 타입이었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요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나와 허허실실 곧잘 재롱과 익살을 떨면서 보여주는 그 빈구석은 뭔가. 그런데 그게 바로 김민선에게 지금 중요한 변화다. “시키면 해야 하는데 생각은 안 나고, 게다가 어찌나들 애드리브가 좋고 데시벨들이 높은지 내가 얘기하면 다 묻힌다”며 다른 ‘여걸’들을 향해 부러움 섞인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그 일이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쇼 프로를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완벽해지고 싶어서 그런 쪽에 이미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시선들을 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너무 무거운 이미지고 그래서 그게 비호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웃음)”이다. 김민선은 지금 좀더 가볍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이제 완벽에 대한 갑옷을 벗고 자신 역시 친근하고 또 대하기 편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다만 갖고 있는 걸 버리면서 가장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직 못 보여준 한쪽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를 맡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삐삐소녀가 참 밝더라. 이런 친구 역할을 한번 하면 나도 기운을 좀 받겠다 싶었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는 시대가 강제한 획일성을 뛰어넘는다. 죽음 같은 시대에 살다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펄럭거리면서 돌아다닌다. 김민선이 삐삐소녀에게서 받고 싶었다는 기운은 분명 그런 것일 거다. 영화에서 삐삐소녀는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보헤미안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나는 나비’ 같은 존재인데, 지금 김민선이 배우로서 꿈꾸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김민선이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해 보여 도리어 무거워 보인다고 느꼈다면 한 가지 우스개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하류인생> 때 일인데, 촬영 전에 테스트 촬영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이 이런저런 연기 지도를 하시기에 이분이 나에 대해 걱정을 참 많이 해주시는 구나 고마운 생각이 들어, 감독님 어깨를 탁 잡고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나서 옆을 보니까 주변이 싸하더라. 다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 있고. 나중에 들으니 감독님 어깨에 손 올린 배우는 나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웃음) 그런데 그때 감독님은 껄껄 웃으셨고 촬영 내내 예뻐해주셨다.” 감독 임권택의 어깨에 감히 덥석 손 얹고 나서 귀여움받은 사람이 과연 흔할까. 김민선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그런 친근한 도발이 있다.

<화려한 일족> ‘기무타쿠-장준혁’의 카리스마를 보라

화려한 일족 華麗なる一族 XTM 우리말 녹음 방송 목요일 밤 11시, 자막 방송 일요일 오전 10시 모든 건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욕망과 권력이 문제. <하얀거탑>이 병원을 둘러싼 권력의 다툼이었다면 <화려한 일족>은 부자 관계에 얽힌 권력과 질투의 응어리다. 100만부가 넘게 팔린 야마사키 도요코(<하얀거탑> <여계가족>)의 베스트셀러 <화려한 일족>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만표 집안에 숨겨진 비밀과 음모를 바탕으로 부자 관계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만표 가문의 아버지 만표 다이스케에서 그의 아들인 만표 텟페이로 주인공을 수정한 드라마는 몇몇 인물설정과 관계에서 원작과 차이를 갖는다. 텟페이(기무라 다쿠야)가 사랑했던 아키코란 여성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으며, 후사코(이나모리 이즈미)가 텟페이와 과거에 교제했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이외에도 드라마는 텟페이가 아버지와 재판을 하는 부분, 고로 건설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원작과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비롯해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같다. 모든 게 빠르고 복잡하게 움직였던 혼란의 196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부자의 어긋난 운명이 지독할 만큼 실감나게 그려진다.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준비가 한창인 고베시에는 은행간 합병 바람에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외국 자본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대장성은 국내 자본을 보호하기 위한 합병안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12개의 도시 은행이 곧 4∼5개로 통합될 참이다. 예금보유 9위의 한신은행 역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궁리 중. 만표 다이스케(기타오지 긴야)는 ‘소(小)가 대(大)를 먹는 합병’을 하겠다며 계획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고, 거기엔 아들인 텟페이가 전무로 있는 한신특수제강의 발목을 잡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다.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버릴 것인가,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접을 것인가. 텟페이가 자신의 아버지인 만표 케이스케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만표 다이스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택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빚어낸 불화, 만표 다이스케는 항상 텟페이를 보고 ‘아버지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기무라 다쿠야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드라마는 20%가 넘는 시청률로 첫회를 시작해, 드라마의 무대가 된 관서 지방에서는 39%가 넘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개국 55주년 기념 드라마로 방송돼 ‘국민드라마’란 평을 들었고, 기무라 다쿠야는 이 드라마로 <더 텔레비전>에서 선정한 52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방영이 끝난 뒤에도 <스마스테이션> <치친푸이푸이>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드라마 특별 방송을 내보내며 <화려한 일족>의 의미를 정리했다. 드라마가 일본에서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야마사키 도요코의 촘촘하고 긴박한 사건 전개와 이를 뒷받침해준 드라마의 구현력이 있다. 1960년대 실제 있었던 은행간 합병 사건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는 60년대 거리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감행한 중국 상하이 촬영 등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호수를 끼고 있는 만표가의 저택은 시즈오카현에서, 한신특수제강의 공장장면은 지바현 기미쓰시에서 촬영됐다. 눈이 오는 장면을 위해서는 홋카이도 후라노시의 로케도 감행했다. 한마디로 <화려한 일족>은 일본을 위아래로, 양옆으로 훑은 셈이다.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도 좋다. <화려한 일족>은 하나의 사건에 얽힌 많은 사람들의 권력관계를 어디로 튈지 모를 불똥처럼 그려낸다.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건조한 느낌을 주고, 다큐드라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부자 사이의 비밀을 매개로 엎어졌다 또 뒤집히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적인 긴장감을 준다. 만표 다이스케 역의 기타오지 긴야나, 다이스케의 첩인 아이코 역의 스즈키 교가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텟페이를 연기한 기무라 다쿠야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진정한 리더가 갖춰야 할 모습을 갖고 있어’서 캐스팅했다는 제작진의 말처럼 기무라는 한신특수제강의 리더, 아버지에게 미움을 갖고 있는 아들, 성공과 꿈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기품있게 그려낸다. 기무라 다쿠야는 마지막 비극의 결말까지 이 드라마를 만표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텟페이의 모놀로그로 완성해낸다. <하얀거탑>이 장준혁의 드라마였다면, <화려한 일족>은 텟페이, 아니 기무라 다쿠야의 작품이다.

골때리는 가족이 돌아왔다

심슨 가족이 왔다. 지난 20여년간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온 미국 TV코미디 프로의 대명사다. 국내에도 여러 차례 방영된 바 있어 친숙한 그들이다. 20세기의 아이콘으로 시작하여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는 그들이 브라운관을 떠나 영화 스크린에서는 또 어떤 웃음을 선사할 것인가. TV코미디 프로 <심슨>이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과 완성된 영화의 이모저모를 전한다. 한손에는 맥주를 그리고 나머지 손에는 도넛 또는 핫도그를 들고 비록 그게 상했거나 땅바닥에 떨어진 거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고 먹으면서 쇼파에 앉아 멍청하게 텔레비전 시청을 즐기는, 그리고 술에 취해 스프링필드의 주정꾼들이 즐겨 찾는 모의 술집에 널브러져 거창한 트림이나 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 게으른 사내 호머 심슨. 그는 위대한 위를 가졌으니 위장의 슈퍼맨이다. 또는 독실하고 성실하며 다정다감한 옆집의 기독교 신자 플랜더스를 사정없이 조롱하거나, 자식 바트를 가르칠 때는 있는 힘껏 목을 조르는 매우 몰지각하지만 일관된(?) 이웃 사교와 자식 교육법을 가졌다. 그는 좋은 이웃과 좋은 아버지의 반대말이다. 지능은 젖먹이 막내딸 매기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것 같고 때때로 사고를 칠 때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 아들 바트보다 한수 위다(하지만 그렇다고 바트의 말썽 실력이 부족한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런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착한 현모양처(이지만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마지를 아내로 만났다는 것과 그에게 리사라는 똑똑하고 교양 넘치며 게다가 정치적 진보주의자이기까지 한 딸 리사가 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텔레비전 코미디 시리즈 <심슨>의 이 가족은 아주 이상한 구성원들이다. 그뿐인가. 원작자 매트 그로닝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흔한 도시의 이름이어서 지었다는 스프링필드라는 이 마을에는 심슨의 가족을 포함하여 평범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어른들은 패잔병 같고 아이들은 못됐고 그중에서 드물게 착하거나 성실한 어른과 아이는 너무 지나쳐 바보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 이 평범한 마을의 이상한 부조화를 보는 것이 그렇게나 신날 수가 없다. 심슨 가족을 포함한 스프링필드 사람들은 세속과 순수가 뒤섞인 조크와 유머를 부리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그 때문에 미국의 <타임>은 “20세기 최고의 텔레비전 시리즈”라고 <심슨>을 칭했을 것이며, 우리 역시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보아왔기 때문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미국인의 표상 호머 심슨과 그들의 가족은 지난 18년간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애니매이션 캐릭터가 되었으며, 아마도 가장 멍청한 미국인의 표상쯤으로 말해도 괜찮을 만한 호머의 삶은 미국인들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미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사랑을 받는다. 1960년대 <플린스톤> 시리즈가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이후 30여년 동안 그런 애니메이션 시트콤이 없었지만, <심슨>이 그 자리를 차지한 뒤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1989년 정식으로 시작한 뒤 매주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면서 올해 5월 400회를 넘었고, 이번 가을 19시즌이 시작될 예정이다.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호머가 지르는 탄성 “D’oh”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심슨> 시리즈를 주제로 한 각종 연구들이 쏟아져 나온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미국 텔레비전 코미디 시리즈로는 가장 장수 프로그램인 <심슨>의 떨어지지 않는 인기를 두고 해석이야 많겠지만, <심슨>을 부러워하는 후배들의 증언처럼 더 뜨거운 말도 없다. <심슨>을 더 강력한 성인풍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가공하여 제작한 것이 분명한 <패밀리 가이>의 창작자 중 한명인 세스 맥팔렌이 <심슨>에 관해 “그건 마치 <스타트랙>에 관해 SF팬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심슨> 시리즈라는 장르’의 관객을 창조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말처럼 들리며, <사우스 파크>의 작가 매트 스톤이 “심슨은 우리 존재의 맹독이다. 그들은 너무 많은 패러디를 했고,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건 <심슨>에서 한 거잖아!’, 이 말은 회의 때마다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라고 한탄할 때, 후대의 그 악동 캐릭터들조차 심슨가의 또 다른 자식들이 된다. 게으르고 뻔뻔한 인물 호머 심슨은 모든 악동들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호머 심슨을 위시한 <심슨>의 이 캐릭터들의 매력을 한데 모아 장편영화로 만들어볼 계획이 없었을 리 없다. 팬들의 요구도 적지 않았다. 미국의 SF 장수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트랙>이 이미 오래전 영화 버전을 내놓았다는 걸 감안한다면 텔레비전 코미디 시트콤의 마스터피스인 <심슨>이 지금에서야 영화로 나온 건 거의 미스터리일 정도다. 원작자 매트 그로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뜻처럼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즌4의 에피소드 <캠프 크러스티>나 혹은 미키 마우스가 주인공이었던 <판타지아>를 패러디하여 <심스타지아>로 만들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영화화되지는 못했다. 원작자 매트 그로닝이 각본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동시에 <심슨>의 연출 경험이 있고 <몬스터 주식회사>의 연출도 해봤던 데이비드 실버먼이 감독을 맡고, 그동안 이름을 떨쳐온 제임스 브룩스, 알 진 등 <심슨> 시리즈의 제작 주요진들이 총동원되며 드디어 영화화 계획은 윤곽이 잡혔다. 무엇보다 중요했을 성우들 역시 TV시리즈의 익숙한 목소리들이 고스란히 투입됐다. 2001년 성우들의 출연을 확정 지은 뒤 각본 작업을 시작했고,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100번 이상 각본을 거친 끝에 지금 우리가 만난 <심슨가족, 더 무비>가 탄생한 것이다. 스프링필드를 벗어난 심슨 가족?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대통령이 된 미국. 그러나 여전히 그러거나 말거나 스프링필드에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호머 심슨. 그는 지붕을 고치러 올라가 아들과 장난을 치거나 혹은 벌거벗은 채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아들을 꾀고 있다. 왜 아닐까, 아버지에게 질세라 바트는 또 기어이 그렇게 한다. 마을의 환경문제가 심각해지자 리사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펼치지만 수월하지 않다. 한편 호머가 얻어온 돼지 한 마리가 문제의 발단이 된다. 호머가 공짜 도넛에 눈이 팔려 돼지똥이 담긴 통을 호수에 버리고 가자 스프링필드의 호수는 완전히 썩어버리고 미국 정부의 환경보호국은 환경오염에 빠진 스프링필드를 돔으로 가둬버린다.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호머 가족을 습격하고 그들은 매기가 발견한 통로로 빠져나가 알래스카로 향한다. 그러나 정부가 스프링필드를 지구상에서 없앤 뒤 새로운 그랜드캐니언으로 위장하려는 속셈을 선전하는 TV광고를 본 마지와 자식들은 스프링필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고 마지못해 호머도 가족을 뒤따라 나선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심슨 가족이 스프링필드를 벗어나는 희귀한 경험을 보게 된다. “호머 심슨식의 <트루먼 쇼>”라거나 “호머 오디세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 붙여졌다. 미국의 대중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내게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세 가지 웃음은 폭스 네트워크를 위한 광고, <오스틴 파워>에서 영감을 얻은 스케이트 보딩 시퀀스, 그리고 물고기를 잡는 독특한 방법이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도중 화면 밑으로 폭스사를 선전하는 문구를 내보내는 장면과 바트가 나체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그의 x추를 교묘히 가려내는 연출의 재치와 물고기를 잡기 위해 호머가 호수를 전기로 지지는 장면이다. 중요한 건 여기에 <심슨> 시리즈의 전통 중 하나인 패러디 장면이 꼽혔다는 것인데, 영화에는 환경보호를 강조한 엘 고어의 영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의 제목을 패러디하여 리사가 ‘짜증나는 진실’(An irritating Truth)에 대해 강연하는 장면이나, 환경운동을 부르짖던 록밴드 그린데이가 썩은 호수로 침몰하면서 전자 악기를 버리고 바이올린을 켜며 <타이타닉>을 패러디하는 장면 등이 들어 있다. 스파이더 피~그, 스파이더 피~그라며 <스파이더 맨>의 주제가를 고쳐 부르는 심슨의 모습을 역시 빼놓을 수 없으며, 톰 행크스가 정부의 정책을 광고하는 모델로 나오는(물론 자신의 목소리로) 장면 역시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이어받은 흥겨운 전통이다. 과욕부리지 않는 깜찍한 코미디 <심슨가족, 더 무비>에 대한 최상의 찬사는 <타임>의 필자 리처드 콜리스가 한 “이 영화의 작은 기적은 당신에게 일말의 두통도 주지 않은 채 (시리즈의) 네배의 시간을 풀어낸다는 것이다. 영화는 스스로의 보폭을 알고 있고 그 개성을 유지한다. 더 무례해지거나 비꼬려고도 하지 않고 더 크거나 나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시리즈 초반에 제임스 브룩스가 세워놓은 그 룰을 따른다”라는 말일 것이다. 일리가 있다. 물론 <심슨> 시리즈만의 치고 빠지는 식의 조크와 유머가 굵직한 서사 안에서 다소 밋밋해진 면이 있어,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호머가 마치 정장을 갖추고 입 밖으로 음식을 튀기지 않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텔레비전 시리즈의 여러 재미를 안고 있다는 건 공감할 만하다. <심슨가족, 더 무비>를 볼 때 우리를 사로잡는 건 결코 이야기의 매끈함과 인간사의 매너가 아니다. 또한 심슨가와 스프링필드를 통해 미국을 본다는 건 짜릿한 말이며 또 가끔은 그게 사실이지만 그건 너무 호사스런 수긍이다. 그보다 우리는 호머처럼 일상을 유치하고도 나태한 자태로 즐기는 그 캐릭터들의 과장됨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당신은 마지와 리사, 매기의 세계관, 그러니까 착하고 현명한 땅에 결국 도착하겠지만, 당신이 즐거워 웃는 순간은 호머와 바트의 난장판 진창 안에서 놀 때다. 애초에 호머와 스프링필드의 괴팍한 사람들이 대다수 블루컬러라는 건 사실 중요하다. <심슨>은 계층의 조건을 과장되게 유희한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대되는 건 이 영화가 속편에 대한 암시를 남긴 것인데, 그때 늙지 않은 호머의 주접을 보기 위해 다시 기다릴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을 것이다. 호머의 유머가 좀더 괴팍한 블루컬러의 맹렬함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도 이 노란 인간들의 주접이 귀엽다. 누가누가 나왔나 <심슨가족, 더 무비>에 캐스팅된 스프링필드 주민은? 늘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보니 텔레비전 시리즈 <심슨>에는 번갈아가며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에 나오는 조연들도 모두 그 낯익은 얼굴들이다. 그러나 수많은 조연을 모두 주요하게 등장시키기는 건 무리였기에 이번 영화에서는 다소 주변으로 밀려난 캐릭터와 좀더 부각된 캐릭터들로 나뉜다. 짓궂기로 치면 호머와 만만치 않은 마지의 심술궂은 두 쌍둥이 언니 패티와 셀마, 스프링필드의 블루컬러들과는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원자력 공장의 사장 번즈와 그의 비서 스미더스가 주조연 자리에서 다소 밀린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스프링필드의 일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여전히 한몫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바바바~밤, 바바바~밤, 하며 이십세기 폭스의 로고송이 울릴 때 따라 부르고 있는 소년은 상상력 많고 코 파기 좋아하는 랄프다. 뒤를 이어 갑자기 달나라가 등장하면 거기 이치(쥐)와 스크래치(고양이)가 있다. <톰과 제리>에 대한 심슨판 패러디의 진수이며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바트와 리사가 공유하는 매우 드문 프로그램이다. 바트가 호머 대신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되는 옆집 아저씨 플랜더스는 두 아들을 보살피며 살고 있는 착한 홀아비고, 마을에 재앙이 생길 것을 계시하는 할아버지는 심슨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다. 한편, 본의 아니게 재앙의 돼지를 호머에게 건네는 역할을 하게 되는 마을의 변태 엔터테이너 크러스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시건방지게 뉴스를 전하는 앵커, 언제나 사건을 안주 삼고 주정꾼들을 친구 삼는 술집의 주인 모, 사건이 일어나건 말건 수수방관하고 일처리의 무능함과 도넛을 좋아하는 걸로 치면 호머의 거의 유일한 적수인 경찰서장 클랜시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심슨가족, 더 무비>의 성우들이 역시 시리즈의 전통을 따라 여러 역할의 목소리를 동시에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호머 역의 댄 카스텔라내타는 20여개의 캐릭터를, 바트 역의 낸시 카트라이트는 7~8개를, 플랜더스 역의 해리 시어러와 경찰서장 역의 행크 아자리아는 각각 10개가 넘는 배역을 목소리 연기한다. 그들이 누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알아맞혀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고보니, 18년을 넘게 해온 이 성우들 역시 스프링필드 지역민으로 쳐줘야 하는 건 아닐까?

호머의 오디세이 <심슨가족, 더 무비>

‘극장용 장편’이라는 개념을 이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와 원작 TV시리즈의 결정적 차이라곤 약 4배로 늘어난 에피소드의 길이와 와이드스크린 비율로 넓어진 화면 너비가 전부다. <심슨가족, 더 무비>는 캐릭터와 사건의 성격, 표현 수위, 농담 색깔은 물론, 오락성과 완성도마저 TV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의 평균치다. 요람 격인 폭스사를 놀려먹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스크린 하단에 방송 예고가 흐르면 “그래요, 폭스는 영화 상영 중에도 채널 광고를 하죠”라는 자막이 뜬다. 뒤집어 말해, 매트 그뢰닝과 제임스 L. 브룩스를 비롯한 <심슨네 가족들>의 창조자들은 텔레비전 우주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마음껏 해보지 못한 작업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극장용 영화로서 <심슨가족, 더 무비>가 구가하는 자유는 주로 공간적 여유다. 관객은 브라운관에서 익힌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파노라마, 360도 등의 참신한 앵글로 둘러볼 기회를 얻는다. 횃불을 든 이웃들이 심슨네로 몰려오는 군중신이나 배경 그림에는 3D 표현도 눈에 띈다. 알래스카라는 제2의 배경 역시 다분히 화면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400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온갖 이슈를 건드리고 무수한 문화상품을 패러디해온 <심슨가족, 더 무비>는 환경문제를 장편 소재로 골랐다. 미국에서 가장 심하게 오염된 호수로 뽑힌 스프링필드 호수에서 밴드 그린데이가 경각심을 일깨우는 콘서트를 벌이다 익사한다. 그들의 장례식이 열린 교회에서 호머(댄 카스텔라네타)의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멸망을 암시하는 신의 계시를 전한다. 곧이어 돼지 분뇨와 관련된 호머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스프링필드의 환경 오염을 극히 위험한 수준으로 악화시키고, 예언은 실현된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대통령이 아무 생각없이 이끄는 연방 정부는 스프링필드에 거대한 돔을 씌워 격리한다. 이웃의 분노를 피해 탈출한 심슨 가족은 알래스카로 이주하지만, 정든 고향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 마지(줄리 캐브너)는 삼남매를 데리고 반성 모르는 남편을 떠난다. 호머에게도 불가피한 각성의 시간이 다가온다. 영화의 흐름은 발단과 전개 대목이 두툼하고 결말이 단출하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용두사미’식 구조는 <심슨네 가족들> 시리즈에서 전통에 가깝다. <심슨네 가족들>의 매혹은 무정부적이고 전복적인 감수성과 밝고 따뜻한 성정이 어우러진 웃음이다. 흔히 평자들은 이러한 양 갈래 미덕의 수원지를 매트 그뢰닝의 진보적 풍자정신과 제임스 L. 브룩스의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돈 많은 백인 남자가 권력을 잡는 시대가 겨우 왔군”이라는 반즈 회장의 대사가 전자의 예라면, 마지에게 매달리며 “난 그저 다시 당신 옆자리로 돌아와 누울 때까지 다치지 않은 채 하루를 견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뿐이야”라는 호머의 대사는 후자의 예다. 이 가족과 안면이 있는 관객이건 아니건 <심슨가족, 더 무비>는 99%의 확실성으로 웃음을 주는 코미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려낼 수도 없는 촘촘한 패러디와 비주얼 조크, 고도로 함축된 한 줄짜리 농담들은 18년간 그래왔듯 객석으로부터 “나는 이 농담을 이해했다”는 미량의 우월감이 섞인 폭소를 끌어낸다. <심슨가족, 더 무비>에서 호머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깨닫고 리사는 마음에 드는 소년을 만나며, 바트는 성실한 가장인 옆집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하고 은밀히 소망해본다. 장편답게 각각의 인물은 나름대로 성장의 여정을 거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심슨 가족의 세계를 지탱하는 불문율은, 인물들이 결코 나이 들지 않으며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반복 재생산되는 결점과 과오들을 그리기 위해 이 시리즈는 존재한다. 발전도 없는 이야기를 왜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하냐고? 심슨네 막내 매기가 내뱉는 첫마디 말이 궁금하지 않은지? 그걸로 부족하다면 노출장면도 꽤 포함돼 있음을 첨언한다. 딱히 원하는 인물의 누드는 아니겠지만. 하나 더! <심슨가족, 더 무비>의 엔딩 크레딧은 참을성있는 당신에게 보상할 것이다.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 슈퍼히어로 시트콤의 탄생

keyword | 시트콤 블록버스터 블록버스터가 시트콤이 될 수도 있다고? 저 멀리 1961년 탄생한 <판타스틱4>는 같은 마블 코믹스 영화들인 <엑스 맨> <스파이더 맨> <헐크> <데어데블>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역사로 보건대 사실 그들의 ‘원조’라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다. ‘변이’를 겪은 캐릭터라는 점에서 <엑스맨>이나 <스파이더 맨>과 유사하지만 그들은 매스컴 앞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 ‘일상의 슈퍼히어로’라는 측면에서 <판타스틱4>는 <스파이더 맨>보다 몇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속편인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은 심각함과 상징의 부재 혹은 매스컴 앞에 선 스타로서의 슈퍼히어로라는 점에서 좀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처럼 <판타스틱4>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시트콤이 된 블록버스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스파이더 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고전적인 미국 슈퍼 영웅 만화책들이나 그 만화책들을 기반으로 한 각색물들에 익숙해져 있다가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을 접하면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전편에 언급되는 이들의 태생은 특별할 게 없다. 전에는 평범했던 다섯명이 임무 수행 중 우주선에 노출돼 네명은 슈퍼 영웅이 되고 한명은 슈퍼 악당이 된다. 뻔한 이야기.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얘들은 신분을 위장하지도 않고 가짜 아이덴티티도 만들지 않는가? 왜 뻔뻔스럽게 본명과 맨 얼굴로 공공장소에 나오고 심지어 결혼식에 연예기자들이 총출동하는가? 이들 중 한명은 유니폼에 기업 광고까지 달고 다닌다. 셀레브리티 슈퍼 영웅들 답은 이렇다. 걔들은 원래부터 그랬다. <판타스틱4>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그리고 <배트맨>과 같은 DC 코믹스 캐릭터들이 쌓아올린 미국식 슈퍼 영웅 이야기에 대한 마블 코믹스와 편집자 스탠 리의 대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스탠 리는 전통적인 미국 슈퍼 영웅 이야기의 과장된 신화를 조금 깎아내고 그 빈자리에 사실주의와 일상묘사를 끼워넣어 슈퍼 영웅이 등장하는 연속극 같은 스타일의 만화책들을 만들었는데 <엑스맨> <스파이더 맨> <판타스틱4>는 모두 그런 시도의 일부다. <스파이더 맨>과 <판타스틱4>의 사실주의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신분을 위장한 고전적인 영웅인 스파이더 맨이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평범한 미국 청년인 피터 파커의 일상을 초능력과 슈퍼 악당이라는 돋보기를 빌려 확대하고 과장해 묘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터 파커/스파이더 맨의 모험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들고 연애와 직업 사이에서 고민도 하는 평범한 미국 청년의 일상을 신화화한 것이다. 하지만 <판타스틱4>의 사실주의는 좀더 직설적이다. 시리즈는 일단 말도 안 되는 만화 설정을 통해 그들이 슈퍼 영웅이 됐다고 우긴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 그들과 사회가 이 새로운 설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사실적이지는 않다. 사방에서 초능력을 가진 악당들이 쳐들어오고 그들은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역시 설정이라고 받아들이면 <판타스틱4>의 세계는 충분히 사실적이다. 적어도 <스파이더 맨>보다는 사실적이다. 그 결과물은?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들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 당연한 게 아닐까? 대중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갈망하고 영웅시한다. 몸을 자유자재로 늘리고 투명해지는 것과 같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요안 그리피스나 제시카 알바처럼 생겼다면 파파라치와 연예 프로그램 기자들이 달라붙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오히려 슈퍼 영웅의 초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일상생활에선 늘 구박만 당하고 돌아다니는 피터 파커가 비정상이다. 원래 슈퍼 영웅 공식은 좀 괴상한 구석이 있다. 스파이더 맨은 그래도 가면이라도 쓰고 다니지만, 얼굴 그대로 드러내놓고 다니는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이중생활이 들통 나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하긴 원더우먼은 중간에 포기하고 자기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고…. 그러나 <판타스틱4>는 <스파이더 맨>과 같은 깊은 진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스파이더 맨은 가면을 쓰고 신분을 위장함으로써 자신의 사생활을 정상적인 프라이버시의 영역 안에 감추어둘 수 있다. 하지만 <판타스틱4>의 모든 행동들은 미디어의 관찰대상이 된다. 그 과정 중 진지함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나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이혼 전후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부부들처럼 진지한 갈등을 겪었고 그 뒤에도 심각한 고통과 마주쳤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과연 타블로이드 신문과 파파라치가 배달한 사진들을 통해 그들의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본 우리에게 과연 그 드라마가 심각하게 느껴지는가? TV 카메라 앞 셀레브리티의 시트콤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그건 개인의 갈등을 진지하게 끌어가려면 일단 프라이버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예로 들 수 있는 멋진 예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더 퀸>(2006)이다. 프리어스와 각본가 피터 모건은 훨씬 자료가 풍부한 공식 일정 속에서 여왕의 드라마를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게 다이애나와 윈저가를 다룬 수많은 TV영화들이 했던 일들이다. 하지만 프리어스와 모건은 기자들이나 매스컴의 방해가 없는 발모랄 궁 안에서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그 안에서 갈등하는 여왕의 모습을 그린다. 이유는 당연하다. 기자들과 TV 카메라는 드라마를 깨먹기 때문이다. 이 공식은 <판타스틱4>와 <스파이더 맨>에도 정확히 일치한다. 액션은 다른 사람들이 봐도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개인의 영역이다. 그 결과 <판타스틱4>는 시트콤이 된다. 그것도 가족 시트콤. 아들들 노릇을 하기엔 휴먼 토치(크리스 에반스)와 씽(마이클 치클리스)이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인비져블 걸(제시카 알바)과 미스터 판타스틱(이안 그루퍼드)이 모범적인 시트콤 커플로 나와 리드하는 이들 4인조는 분명 시트콤 가족이다. 하긴 원작도 어느 정도 그랬다. 그래도 매스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긴 호흡으로 멜로드라마를 끌어갈 수 있는 만화책과 달리 영화는 거의 순수한 시트콤의 범주에 남는다. 진지한 드라마를 다루기엔 매스컴의 존재감과 농담의 비중이 너무 큰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주인공들이 아니라 그들이 대항하는 모호한 악역인 실버서퍼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속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 심각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으며, 그걸 적절한 순간에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금발 미녀에게만 몰래 살짝 털어놓을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미디어가 가공하지 않은 진짜 드라마다. 그의 소중한 그런 프라이버시가 나중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실버서퍼>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할리우드 사람들이 공감하는 블록버스터 이 작품을 만든 할리우드 사람들에게는 <판타스틱4>의 모험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스파이더 맨>보다는 <판타스틱4>에 훨씬 더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파이더 맨>이 관객의 삶을 대표한다면 <판타스틱4>는 할리우드 영화쟁이들을 대변한다. 그들이 자기 이야기인 후자에 기우는 건 당연한 일. 매스컴 서커스에 치여 갈등하는 인비져블 걸과 미스터 판타스틱의 갈등 스토리는 할리우드 사람들의 자기 고백이고 선언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우린 우리 사생활을 침입하는 파파라치와 타블로이드가 지겨워! 우리도 남들 방해받지 않고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부르는 한 우리는 계속 당신네들이 보는 앞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겠어! 그게 우리 일이니까!” 이런 고백이 더 좋은 각본과 액션 속에서 나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설리반의 여행>(1941)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감동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