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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냉정과 열정 사이] 극장에서 보니, 반갑다 친구야!

나는 <심슨네 가족들>의 팬이다. “그래서 뭐?”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국에서 <심슨네 가족들>을 방영하기 전 90년대 중반부터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에서 를 매주 즐겨보는 팬이었다, 라고 하면 뻥이고, 어쨌든 <심슨네 가족들>을 한국에서 정식 방영하기 전부터 좋아했던 건 사실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 어쨌든 잘난 척하는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잘난 척 맞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 앞에서는 잘난 척을 해서라도 뭔가 내 순정의 오리지널리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내게는 <심슨네 가족들>이 그렇다. 언제 이 시리즈를 처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발견이었다. 지금이야 자기반영적 유머의 한 경지를 개척한 <무한도전>도 있고, 막 나가는 찌질이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도 넘쳐나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심슨네 가족들>의 비꼬는 유머와 거침없는 찌질성은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신선하게 보였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너무나 잘 활용한 귀여움까지 완벽한 삼위일체였다. 한때는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심슨네 가족들>의 대본작가가 됐을 텐데’라는 애석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나의 조크를 수백번 반복해 보고 124번째 되니 지겹다 싶으면 과감히 버린다’는 작가들의 회의 풍경을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하여 <심슨가족, 더 무비>는 당연히 올해 최고 기대작이었다. 반즈 사장과 스미더스 이하 십여명의 캐릭터 목소리를 연기하는 해리 시어러의 증언대로 폭스 간부진이 자체 검열을 할 기회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성공해서 자리잡았다는 이 시리즈가 기민하고 영악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세계에서 10년 이상 영화화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좋았지만 그래서 17년 만에 영화화되는 게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본래 좋으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거다). 개봉 첫날, 뭉게구름이 퍼져나가며 <더 심슨~스> 노래가 나오는 인트로를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에서 볼 때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조차 했다. 이런 10분이나 벌써 지나갔잖아, 70분 밖에 안 남았군, 과자를 먹으면서 그 과자가 없어지는 걸 아까워하는 아이처럼 아까운 80여분을 극장 안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체적인 총평을 하자면 <심슨가족, 더 무비>는 시리즈의 딱 평균적인 수준의 작품이었다. ‘다다다다’라는 허밍을 프롬프터를 보면서 노래하는 그린데이나 정부의 정책 홍보자로 등장해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톰 행크스, 서류 뭉치를 보고서 나는 리드(lead)하려고 대통령질을 하는 거지, 리드(read)하려고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발칵하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카메오들의 등장은 즐거웠지만 자기 반영적 유머의 강도가 셌던 것도 아니고, 주요 대박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반즈 사장이 그 못된 소가지와 처참하게 허약한 체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 건 가장 큰 유감이었다.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도넛만 처먹으며 시간을 죽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모우 술집에 처박혀 시간을 죽이는 호머의 그 한심한 일상을 더 디테일하게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쉽고, 알뜰한 주부이자 자상한 엄마인 마지의 그 수많은 빈틈- 파티에 가서 술에 전다든가, 옛날 동창을 만나 바람기에 흔들린다든가- 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쉽고, 골초에 수염과 다리털 많은 바트의 쌍둥이 이모가 등장하지 않은 건 특히나 아쉬웠다. 그래서 실망스러웠냐면 전혀 아니다. 사실 바트의 친구가 이십세기 폭스사 로고가 나오는 장면에 등장해 그 로고 음악을 열심히 따라 부를 때부터 완전히 녹았다. 반즈 사장은 칫솔에 묻은 치약의 무게로 쓰러질 때 이미 할 만큼 했고, 마지는 알래스카에서의 그 분홍색 속옷만으로 숨겨진 ‘야성’을 보여주지 않았나. 10년 가깝게 <심슨네 가족들>을 좋아해온 지지자들에게 이번 영화는 ‘반갑다, 친구야’ 같은 느낌의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왜 텔레비전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걸 극장에서 돈 주고 보냐, 이 바보들아”라고 나를 손가락질하는 호머를 향해 팝콘을 던지며 “우우~” 킥킥거리고 야유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툭툭 치고 설탕 묻은 끈적한 손을 문대며(D’oh!) 반갑게 악수를 한 기분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한계를 깨다

다큐멘터리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기획된 ‘다큐플러스 인 나다’ 두 번째 프러포즈가 준비되었다. 두달 간격으로 진행되는 다큐플러스 인 나다의 프로그램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20분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된다. 9, 10월 프로그램의 컨셉은 ‘경계에 선 다큐멘터리’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드는 영화들이 마련되었다. 이 영화들을 보면 극영화는 ‘허구’이고 다큐멘터리는 ‘사실’이라는 이분법의 한계효용이 점점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큐의 형식을 차용한 극영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형식인 다큐와 애니메이션의 결합, 다큐와 픽션의 혼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큐는 재창조되고 있다. ‘페이크다큐’ 형식을 차용한 <목두기 비디오>는 인터넷으로 상영되었을 때, 네티즌이 실화인 줄 착각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몰카 화면에서 귀신의 형상과 목소리가 발견되자 그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는 촬영이나 편집 등에서 텔레비전 추적 프로그램 유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출연진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단골 성우의 해설까지 덧붙여지니 사실 같은 느낌은 한층 강화된다. <고추말리기>는 장희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풀어놓은 영화이다. 늘 가사에 시달리는 칠순을 넘긴 할머니와 바깥일에 바쁜 활달한 성격의 엄마, 영화를 한다면서 집에서 뒹구는 딸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항상 불만을 토로한다. 이들 세 여자가 9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할머니의 연중행사 ‘고추말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쌓인 벽을 조금씩 허문다. <택시 블루스>에서 한평 택시 안은 천태만상 서울을 비추는 만화경이 된다. 승객들은 택시에 오르기 전 거쳤던 장소의 온갖 냄새를 안고 와서는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강변하고, 은밀한 사생활을 털어놓는가 하면, 막무가내 주사를 부리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을 조각이불처럼 누벼놓은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요지경 속 서울을 발견할 수 있다. 다큐와 픽션이 결합된 중국영화 <당신의 물고기는 안녕하십니까?>는 시나리오작가가 구상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만드는 시나리오작가의 일상이 뒤섞인 몽환적이며, 자기 반영적 영화이다. ‘나’는 20년 전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중국의 최북단 ‘모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이 꽁꽁 언 모헤는 버스도 도서관도 레스토랑도 없는, 20시간 동안 해가 떠 있기도 하는 신비로운 곳이다. <록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 가지> <외딴 섬, 모켄> <자정 1분 전>은 중단편 모음으로 묶여 하루에 상영된다. 전설적인 일본 록큰롤 밴드 <기타 울프>의 내한 공연 과정을 찍은 <록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 가지>는 독특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밴드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와 언행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 로큰롤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는 ‘가오’, ‘근성’, ‘액션’이라고 주장하는 이 밴드는 그들의 모토에 딱 맞는 삶을 살고 있다. 단지 “건방지다”는 이유만으로 멤버를 뽑는 밴드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할 것이다. 안다만 해의 작은 섬 모켄으로 여행을 떠난 게이 청년 보르의 이야기를 담은 <외딴 섬, 모켄>은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로 진행되지만 문명, 자본에 침식당하는 자연과 원주민들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상영시간이 13분인 <자정 1분 전>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이다. 약 1분 정도씩, 호주 노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하였다. 각각의 내용에 맞는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질적인 두 형식을 매끄럽게 조화시켰다. <시테 솔레이의 유령>은 마이애미비치에서 두 시간 정도 비행거리에 위치한 아이티 공화국에 살고 있는 갱단의 리더이자 래퍼인 형제 투팍과 빌리를 화면에 담고 있다.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는 아이티는 유엔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투팍과 빌리는 아이티의 슬럼가 시티 솔레이에서 “신만이 알고 있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얼굴없는 것들>의 김경묵 감독은 웬만한 포르노그래피보다 충격적인 이 다큐에서 맥락을 읽어달라고 주문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성정체성이나 변태적 성행위가 아니다. 영화는 ‘얼굴없는 것들’로 타자화 된 사람들의 관계를 성이라는 프리즘으로 조명한다. 단 세컷으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사실에 근거한 재연이고, 2부는 실제 상황을 찍은 필름이다.

[2008 기대작]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

“아직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 뭐가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짧은 시놉시스만을 슬그머니 훔쳐본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는 한강 무인도에 상륙한 남자의 생존기다. 남자 ‘김씨’가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 교각에서 뛰어내린다. 하지만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김씨는 한강에 떠 있는 무인도 모래사장에서 눈을 뜬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수영으로 섬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신세. 김씨는 유람선을 향해 살려달라 손을 흔들어보지만 승객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할 뿐이고, 휴대폰은 텔레마케터와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배터리가 나가버린다. 체념한 김씨는 한강 무인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보기로 결심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철새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자급자족을 영위하던 김씨에게 어느 날 와인병에 담긴 쪽지가 도착한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망원경으로 남자의 삶을 지켜보던 한강변 고층 아파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여인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한강 교각에 붙은 이상한 존재의 기억으로부터 <괴물>을 떠올렸듯, 이해준 감독은 서강대교 근처에 홀로 떠 있는 밤섬으로부터 <김씨 표류기>의 영감을 얻었다. “다리 아래의 밤섬을 바라보며 한강의 섬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낯설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혹시 저 섬에 남자가 살고 있다면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뒤로는 한강 무인도의 남자라는 존재가 마음속에서 도통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한강 무인도에 상륙한 남자의 표류기라니. 초현실적인 부조리극이 아니라면 지독한 코미디영화의 거친 초안처럼 들릴 지경이다. 물론 <김씨 표류기>의 표류일지는 전자에 닿아 있다. 이해준 감독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나 <캐스트 어웨이>처럼 의식주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육체적인 투쟁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혼자 고립된 사람이 의식주를 모두 해결한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의식주 외에 결핍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결핍이 오히려 고립된 섬에서 채워질 수도 있을까.” 물론 긍정주의자인 이해준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의 소통 가능성을 굳건하게 믿는 듯하다. 히키코모리 여인은 김씨에게 서신을 띄워보내기 위해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벽의 외출을 감행하기 시작하고, 김씨의 삶도 여인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할 것이다. 이해준 감독이 이 부조리한(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내겠다 결심한 이유의 뒤편에는 오랫동안 작가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갑갑함이 도사리고 있다.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온 터라 분명한 이야기적 목적이 없이는 작업을 못했었다. 결국 이야기의 논리 속에서 운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갑자기 갑갑해지더라. 이제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없을까. 이야기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게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김씨 표류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 “섬처럼 떠 있는 인간들의 소통 의지에 대한 우화”로 도달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전히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Key Point: 섬 <김씨 표류기>에서 인간 캐릭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타포이기도 한 ‘섬’이다. 이해준 감독이 최초로 영감을 얻었던 밤섬은 철새 도래지라는 특이성으로 지난 1999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기에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밤섬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재하는 공간인지 아닌지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 감독의 말이다. “섬 자체보다는 배경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재 밤섬 주변에 있는 63빌딩이나 국회의사당, 공장, 강변 아파트 같은 요소들만 있으면 된다. 섬과 주변 풍경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충돌은 영화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밤섬에서 촬영을 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원하는 이미지의 충돌을 만들어낼 것인가. 대답은 CG밖에 없다. 이해준 감독의 계획은 한강에 있는 섬에서 촬영한 다음 CG로 배경을 만들어서 합성한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섬을 조망하는 서울의 배경은 진짜가 아니어도 느낌이 괜찮을 것 같다. 오히려 합성한 가짜 티가 나는 것이 영화가 표현하려는 섬의 고립감이라는 부분에 더 근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해준 감독은 한강의 다른 섬에서 타이트하게 촬영을 마친 뒤 후반작업에 최대한의 공을 들일 예정이다. 제작 영화사 반짝반짝 촬영예정 2008년 봄 개봉예정 2008년 가을 예상 제작비 27억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부모 심층인터뷰

대화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죽도록 안 한다. 열살 먹은 우리 아들은 하루 종일 유희왕 카드만 쳐다본다. 용돈이 생기면 문방구로 달려가 카드부터 고른다. 전화통을 몇 시간씩 붙들고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90%는 유희왕 카드에 관한 거다. 아빠 얼굴 한번 쳐다볼 때 유희왕 카드는 100번도 넘게 들여다본다. 조근조근 말을 붙일라치면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해진다.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 달라질까? 중딩, 고딩 자녀를 둔 선배들에 따르면 “네버”다. 어쩌면 “포에버”일지도 모른다. 성장할수록 아이들은 따로 놀고 싶어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오른 뒤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없다. 몇 마디 ‘서바이벌 영어’로 나 홀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지나치게 간단한 한국어 회화로만 부모와의 시공간을 유영했던 건 아닐까. “밥 줘, 학교 갑니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어머니는 늘 딸 같은 살풋한 말 상대를 원했지만, 무뚝뚝한 아들은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으며 수다를 떤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버지와는 더욱 그랬다. 소가 닭을 볼 때 그럴 것이다. 마지막 병상에서조차, 진심을 담아 살가운 애정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한달 전 고향집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14년 전 돌아가셨지만, 당신의 손때가 묻은 서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서가엔 아버지가 생전에 구입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단정했다. 9시뉴스가 흐르는 텔레비전 앞에서 의견일치를 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모르겠다. 서재의 책들을 차분히 들여다보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문학과 사회과학, 신학에 관계된 상당수의 책들은 평소 아버지의 지론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그것들을 다 읽었을까? 그저 단순한 책 수집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서가를 뒤지다 낡은 사진첩도 발견했다. 틈틈이 찍은 풍경사진을 모은 뒤 사진들 밑에 꽤 긴 감상을 끼적거린 일종의 수상록이었다. 표지엔 ‘1965’라고 연도가 표기돼 있었다. 그때 나이, 서른. 앨범의 글 속엔 유독 ‘고독’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했다. 치기어린 감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고독에 몸서리치도록 만든 사건이 있었을까. 사회 전체가 압축성장으로 질주하던 그 시기에, 아버지는 무슨 희망을 안고 살았을까. 보람과 기쁨을 어디서 얻었을까.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국사나 세계사 시험 준비를 하듯 부모의 역사를 요약 정리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건 ‘대화’ 따위의 수준으로 가능하지 않다. ‘심층 인터뷰’가 필요하다. 얼마 전 일본 추리소설을 읽다가 가족을 상대로 ‘심층인터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레몬>에서 고등학생 딸이 ‘아버지의 자서전 쓰기’ 방학숙제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죽은 아버지의 옛 지인들을 만나 조사를 벌이는 내용이었다. 범인을 쫓는 소설의 맥락과 관계없이, 그 부분이 유독 참신하게 와닿았다. 아버지가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누구와 친했고, 누구와 사이가 나빴는지, 특기할 만한 사건은 무엇이었는지를 기자나 수사관처럼 캔다는 게 신선할 따름이었다. 그 소설처럼 해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옛 지인이 아닌 어머니나 아버지 본인을 직접 심층 인터뷰한다면 더 좋겠다. ‘인터뷰이’가 ‘인터뷰어’를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접하고, 민감한 질문에도 솔직히 답변해준다면 특종(!)이 터질 게다. 까마득히 몰랐던 가족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쏟아지고 각종 의혹이 풀릴 테니까. 부모가 전혀 다르게 보이면서 가족에 대한 이해가 상상을 초월하여 깊어질 거라 추측된다(아, 물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역사는 수많은 개인사의 퍼즐로 이뤄진다. 개인의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기억들은 역사의 피와 살과 뼈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역사학자들은 “개인적인 것은 역사적이다”라고 말한다. 그 어떤 무지렁이 할머니일지라도 그의 전 생애를 ‘구술’받으면 의미있는 역사의 한 자락이 더듬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심층 인터뷰하다 보면 그때의 사회상과 트렌드, 정치적 배경이 자연스레 포착될 거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방학숙제나 리포트로 ‘부모 심층 인터뷰’를 시켰으면 좋겠다. 가족과 역사 두 마리 토끼 잡기다. 유년의 기억에서 연애나 직장생활, 해외여행 경험, 정치적 태도 등 두루두루 구체적으로 묻고 기록하도록 하자. ‘87년 6월’, ‘97년 외환위기’ 등 특정 시기로 주제를 좁혀도 좋다. 그 기록을 함께 공유한 뒤 가족 야사 자료로 남기면 훌륭한 가보가 되지 않을까. 추석이 코앞이다. 고스톱만 치지 말고 가족을 심문해보자.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서방견문 西方見問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and 2 Days 크리스티안 문주 | 2007년 | 113분 | 35mm | 루마니아 | 월드 시네마 낙태가 금지된 차우셰스쿠 독재하의 1987년 루마니아. 오틸리아는 기숙사 친구인 가비타가 불법 낙태를 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던 중 불법 낙태 시술자를 고용한다. 사실 모든 것은 간단하게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몰래 낙태를 시술하기 위한 호텔방도 잡았고 돈도 모았다. 하지만 가비타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인해 괴물 같은 낙태 시술자는 점점 더 위험한 대가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200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의 윤리적인 대가 따위에 대한 쓸모없는 언변을 늘어놓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크리스티안 문주는 낙태한 아기를 싸들고 칠흑같은 거리를 내달리는 오틸리아의 뒤를 아무런 인공조명도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로 뒤쫓고,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비타의 모험은 사회와 제도의 부조리에 걸려든 인간의 지옥을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투영해낸다. 미학적인 통제와 윤리적인 문제제기가 합일을 이룬, 대담하고 불편한 걸작이다. 남은자는 침묵한다 The Rest is Silence 나에 카란필 | 2007년 | 140분 | 35mm | 루마니아 | 월드 시네마 1911년의 루마니아. 연극 흥행사 아버지를 둔 그리고레는 터키와의 독립전쟁을 다룬 극영화를 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요즘도 그렇다시피) 블록버스터 제작에 뒤따르는 문제란 한두 가지가 아니며, 당시의 루마니아 문화층은 영화란 저급한 노동자들을 위한 싸구려 오락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자본을 구하거나 저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데 시련을 겪던 그리고레는 심지어 당대 무성영화 배급의 거성이었던 프랑스의 고몽영화사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또 다른 독립전쟁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역사적 실화에 바탕한 <남은자는 침묵한다>는 이십대의 몽상가 청년이 루마니아 역사상 첫 번째 극영화 <루마니아의 독립>을 완성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다. 할리우드의 문법을 빌려온 뒤 목에 힘주지 않고 자국의 역사적 텍스트를 오락거리로 풀어내는 이 작품은 21세기 동유럽 대중영화의 활달한 진화상처럼 보인다. 솔직한 말로, 기술적인 요소부터 극적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웰메이드에 근접한 한국 대중영화는 별로 없다. 악단의 방문 The Band’s Visit 에란 콜리린 | 2007년 | 85분 | 35mm | 이스라엘 | 오픈시네마 정치적 발언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중동의 평화를 부르짖을 수 있을까. <악단의 방문>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는 영화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경찰관악단이 공연을 위해 이스라엘 공항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마땅히 나와야 할 안내인이 보이지 않자 근엄한 단장은 스스로 공연장으로 갈 수 있다면서 악단을 끌고 공항 밖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방문이 처음인 이들이 길을 제대로 찾을 리 없는 일. 결국 외딴 지역에 떨어진 이들은 조그만 식당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들 악단원들과 식당 식구들이 함께 보낸 하룻밤을 그리는 <악단의 방문>은 자잘한 에피소드를 통해 정치·문화·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도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로맨틱하게 말이다. 정교한 시나리오와 훌륭한 연기, 그리고 넉넉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악단의 방문>은 올해 칸영화제 마켓에서 ‘최고의 쏠쏠한 발견작’으로 손꼽혔을 정도로 대중성 또한 품고 있다. 아빠의 화장실 The Pope’s Toilet 엔리케 페르난데스, 세자르 샬론| 2007년 | 97분 | 35mm | 브라질, 우루과이, 프랑스 | 월드 시네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루과이의 가난한 마을 멜로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주민들은 교황을 보기 위해 몰려들 수만명의 순례객에게 음식을 팔아 한밑천 거둘 계획을 세운다. 밀수꾼 베토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중 앞뜰에 유료화장실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수만명의 사람들로부터 화장실 사용비를 받는다면 까짓 딸 대학입학료 정도는 거뜬히 벌 게 분명하다. 과연 그들의 가난은 구제될 것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빠의 화장실>은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영화다. 8천명이 몰려들었으나 대부분은 멜로 주민들이었고, 브라질 순례객은 겨우 400명에 불과했다. 겨우 10여분을 머문 교황은 가난을 구제하는 신의 천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종교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지언정 삶에 대한 희망만은 버리지 않은 베토 부녀의 모습을 비추며 따스하게 막을 내린다. 공동감독인 세자르 샬론은 <시티 오브 갓>과 <콘스탄트 가드너>의 촬영감독 출신. 긴박한 첫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이 압권이다. 다이빙 벨 앤 더 버터플라이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줄리언 슈나벨 | 2007년 | 112분 | 35mm | 프랑스 | 월드 시네마 패션지 <엘르>의 편집장인 장 도미니크 보비(마티유 아말릭)는 어느 날 돌연 의식을 잃는다. 병상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육체가 마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식은 멀쩡한데 육체가 마비되는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에 걸린 그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왼쪽 눈뿐이다. 한동안 신세를 비관하던 그는 병원의 도움으로 왼쪽 눈을 깜박여 알파벳을 지적하면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이빙 벨 앤 더 버터플라이>는 보비가 1995년 감금 증후군에 걸려 15개월 뒤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책 <잠수복과 나비>에 기반한 영화다. 몸은 사지를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구식 잠수복 안에 갇혀 있지만 영혼만큼은 나비처럼 자유로웠던 한 사람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삶의 소소한 슬픔과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특히 보비의 시점만으로 보여지는 영화의 초반부는 압권이며, 기괴한 육체에 갇힌 아름다운 영혼을 온몸으로 보여준 마티유 아말릭의 연기 또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 할람 포 Hallam Foe 데이비드 매킨지 | 2006년 | 95분 | 35mm | 영국 | 월드 시네마 제이미 벨의 팬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매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가치가 있는 기이한 성장영화. 시골의 거대한 저택에서 아빠와 살아가는 할람 포는 어딘가 비뚤어진 사춘기 소년이다. 젊은 새엄마 베리티가 엄마를 익사시켰다고 믿어온 그는 자신을 추궁하는 베리티와 우연히 섹스를 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며 몰래 에든버러로 도주한다. 나무에 엄마의 재단을 만들 만큼 병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할람은 엄마를 쏙 빼닮은 지배인이 근무하는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일하게 되고, 에든버러 시내의 높은 지붕들을 스파이더 맨처럼 타고 올라 그녀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기 시작한다. <영 아담>의 데이비드 매킨지가 감독한 이 기묘한 블랙코미디는 군데군데 <피핑 톰>식 스릴과 성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지나치게 나아가는 법 없이 할람의 비틀린 청춘을 쓰다듬는다. 동물적인 청춘의 호르몬을 발산하는 제이미 벨의 연기는 대단히 훌륭하다. 우리시대 청춘배우의 매력이 보석처럼 빛난다. 컨트롤 Control 안톤 코빈 | 2007년 | 119분 | 35mm | 영국 | 월드 시네마 미국에 커트 코베인이 있다면 영국에는 이언 커티스가 있었다. 커티스의 밴드 ‘조이 디비전’은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 운동이 금세 사그라진 영국에서 뉴웨이브 록의 서막을 열어젖힌 선구자였다. 하지만 두 번째 앨범이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하루 전, 보컬이자 리더였던 스물세살의 이언 커티스는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을 맴으로써 록의 불운한 전설로 남고 만다. U2와 너바나 같은 록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했던 안톤 코빈은 요절한 록스타의 삶을 되살리기에 아주 적절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톤 코빈이라는 존재는 <컨트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영상예술가 중 한명인 그는 지나치게 세련된 감각으로 미장센을 재단하는 데 바빠서 눅눅하고 절망적인 80년대 초 영국 청춘들의 공기를 잡아내는 데는 은근히 인색하다. 그러나 커티스를 똑 닮은 샘 라일리가 조이 디비전의 초기 공연들을 재현하는 순간, 그가 소름끼치는 명곡 를 주술처럼 읊는 순간, 커티스의 팬들이라면 솟아오르는 감정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아버지 Our Father 크리스토퍼 잘라 | 2007년 | 110분 | 35mm | 미국 | 월드 시네마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아들은 둘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잘라의 영화 <아버지>는 뉴욕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아들의 여정을 담는다. 어릴 때 부모가 헤어져 단 한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페드로는 간직하고 있던 편지와 주소만을 갖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험난한 길을 지나 겨우 뉴욕에 도착하지만 이미 가방을 도둑맞은 상태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또래의 남자아이 주안이 그의 가방을 들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후 아들 행세를 하는 주안과 아버지의 관계를 약간의 유머와 눈물에 담아 보여준다. 비극의 이야기가 경쾌하거나 관조적인 리듬으로 진행되는 건 선댄스 출품 영화들의 전형성 그대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돌변한다. 가짜 아들은 진짜 아들의 자리를 지우고 아버지는 엄청난 희생을 오해 속에 짊어진다. 뉴욕의 멕시코 체류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육중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 순간이다. 부자관계로 시작했지만 거짓말과 아이러니가 판치는 현실을 절묘하게 묘사한다. 달링 Darling 요한 클링 | 2006년 | 90분 | 35mm | 스웨덴 | 월드 시네마 스톡홀름에 사는 유복하고 아름다운 처자 에바에게 삶의 무게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내 중심가의 구치 매장에서 일하는 건 신분의 표상이며 잘생긴 남자친구를 소유한 건 신분에 뒤따르는 포상이다. 하지만 그녀의 지위는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구치에서는 건성으로 일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단 한번의 바람 탓에 남자친구는 떠나고, 재정적인 물주였던 엄마마저 새살림을 차려 나가고 만 것이다. 이제부터는 홀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지만 마땅한 직장도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친구들마저 등을 돌리고 만다. 극도의 수치심을 무릅쓰고 맥도널드에서 감자를 튀기기 시작한 에바는 이제 50대 점원 베르나르드와 교류하며 세상의 잔혹한 섭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급강하하고 친구들로부터 버림받는 철없는 부르주아 처녀의 암울한 처지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단 한번도 주접스러운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무심한듯 세련된 기운이 아주 ‘스웨덴적’이라고나 할까. 할리우드나 충무로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만한 영화. 문유랑가보 Munyurangabo 리 아이작 정 | 2007년 | 97분 | 35mm | 르완다, 미국, 홍콩 | 플래쉬 포워드 르완다 내전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극 중 하나였다. 후투족은 50만명의 투치족을 살해했고, 투치족은 100만명의 후투족을 살해했다. 이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호텔 르완다>의 DVD를 빌리는 것이 편리하고도 감동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궁금한 관객이라면 재미동포 2세 감독 리 아이작 정의 아름다운 데뷔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고아소년 문유랑가보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친구 상그와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상그와는 오랫동안 헤어졌던 부모와 살기 위해 고향집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문유랑가보는 홀로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문유랑가보는 여정의 끝에서 복수라는 칼날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문유랑가보>는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로 완성한 초저예산영화다. 35mm로 블로업한 화면은 어둡고 거칠어서 가끔 눈이 쓰라리다. 하지만 컴컴한 화면에 오롯이 박혀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와 얼굴들은 영화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망막에서 쉬이 거두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을 ‘이미지의 진정성’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노란 집 The Yellow House 아모르 하카르 | 2007년 | 83분 | 35mm | 알제리, 프랑스 | 월드 시네마 죽은 아들의 시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남자는 말한다. “신이 원하시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영화 <노란 집>은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가슴을 울리는 영화다. 결혼 행렬이 시끄러운 가운데 물루드는 아들 벨케즘이 이틀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는 시신을 찾아 바트남 지역으로 향한다. 군사지역을 통과하기 위한 허가를 받고, 경운기 위에는 경광등도 단다. 난황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정은 이외로 쉽게 끝나고 물루드는 두 번째 문제에 부닥친다. 부인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후 물루드는 부인을 위해 강아지를 사고, 텔레비전을 가져온다. 슬픔을 치유하는 색이 노란색이란 말에 집도 노랗게 칠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영화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태도에서 아름다운 마술을 발견한다. 노란색 집과 어울린 풍광의 여유와 고난과 행복을 관조하는 듯한 아프리카 음악은 이들의 슬픔이 정말로 치유되고 있다는 믿음을 안겨준다. 직접 물루드로 출연한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연기도 돋보인다. 나쁜 버릇 Bad Habits 시몬 브로스 | 2007년 | 98분 | 35mm | 스페인 | 월드 시네마 어쩌면 식탁이란 수많은 비밀이 오가는 자리가 아닐까. 함께 모여앉아 음식을 나누는 가족들조차 고기를 써는 나이프 아래 저마다의 욕망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 시몬 브로스 감독의 <나쁜 버릇>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의 문제를 침묵 속에 달그락거리는 접시와 포크 위로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40kg이 조금 넘는 깡마른 어머니는 도통 먹으려 들지 않고, 그녀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아버지는 육감적인 여대생에게 끌리며, 다이어트를 강요받는 통통한 딸아이는 먹을 것에 집착한다.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수작. 음식과 관련된 갖가지 ‘나쁜 버릇’들은 심리적 기제로 영리하게 치환되며, 다소 거칠고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들은 매번 의미심장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극에 비밀스러운 기운을 더하는 인물들의 내밀한 연기도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광고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는 시몬 브로스 감독의 경력이 긴장감 넘치는 데뷔작을 내놓는 데 큰 밑천이 됐을 듯. 2007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다.

[LA] 현대적 해석으로 다시 살아나는 서부극

동명의 57년작을 리메이크한 서부극 <결단의 순간 3:10>가 비평과 흥행에 청신호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 <브레이브 원>에 박스오피스 1위를 내주긴 했지만 관객과 비평계의 반응이 좋아서 입소문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또 하나의 서부극 <제시 제임스의 암살> 역시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등, 한때 지나간 유행이라 치부하던 서부영화는 캐릭터의 현대적인 해석을 무기로 하나둘씩 또다시 극장에서 붐을 일으킬 조짐이다. 서부극은 이미 TV쪽에서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지 오래다. 절찬리에 방영된 의 <데드우드>를 비롯해 지난 9월16일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로버트 듀발) 및 조연상(토머스 헤이든 처치)을 휩쓴 <브로큰 트레일>에서도 TV계에서의 서부극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 ‘서부’의 시대정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한데, 그것을 바탕으로 좀더 복잡하고 현대적인 캐릭터의 관계를 흥미롭게 창조해낸 TV작가들의 매력적인 시나리오가 지금과 같은 인기의 바탕이 됐다. 서부극에 대한 열정은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7월 <블레이드 러너>의 파이널 컷을 홍보하기 위해 샌디에이고 코미콘을 찾아온 리들리 스콧 감독은 차기 프로젝트로 좋은 서부극의 시나리오를 찾는 중이라고 밝혔고, <프랙티스>와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TV 에피소드 감독인 로드 하디 역시 첫 장편영화인 <디셈버 보이>의 개봉시 참석한 인터뷰에서 차기작으로는 서부극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서부극을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감독으로는 이미 <늑대와 춤을> 등으로 장르에 익숙한 케빈 코스트너도 있다. 대체 왜 갑자기 서부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일까. <사이드웨이>로 커리어의 반환점을 밟았던 에미상 수상자 토머스 헤이든 처치는 지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서부극에 대한 러브콜은 “이 장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신들 세대의 바람”이라고 말한다. 산업의 중심이 코믹북 장르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로 옮겨가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가는 나이 든 세대가 자신들에게는 특별했던 장르인 서부극의 부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드 하디 감독은 “앞으로만 달려온 우리가 이제는 과거를 한번쯤 되짚어볼 때가 된 것이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는 <배틀스타 갤럭티카>로 현실적인 미래상을 다루었듯이,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재가공된 과거로서의 서부극을 꿈꾸고 있다. 서부극 장르의 매력은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대자연, 그 위를 달리는 야생마들. 황량하게 펼쳐진 대지 위의 생존 법칙은 원초적이고 잔혹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분명해서 매력적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 도시의 원형 속에서 서부극의 카메라는 거대한 자연과 그 속의 인간들이라는 대비를 통해 시적인 화면을 잡아낸다. 금요일 밤 할리우드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결단의 순간 3:10>의 상영이 끝나자 박수를 치며 만족한 듯 극장을 나서던 사람들은 젊은 관객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가 전 세대의 희망사항을 받아줄지는 아직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현지보고] 아~ LA 한복판에서의 승천은 꿈이었던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와이드 릴리즈를 하는 <디 워>의 프리미어가 열린 9월13일의 LA. 전미 2275개 극장에서 다음날인 14일에 개봉될 <디 워>는, 적어도 LA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극장 여름 성수기가 지나 관객이 뜸해진 탓도 있었고, 게다가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낸다는 유대인 설날 휴일이었던 탓에 도시 전체는 더더욱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온통 TV시리즈 광고로 가득한 도시의 전광판들 속에서 간간이 눈에 띄는 영화광고는 같은 날 개봉하는 조디 포스터의 <브레이브 원>과 일주일 전에 개봉한 <3:10 to Yuma>, 그리고 10월에 개봉하는 벤 스틸러의 <하트브레이크 키드>정도였다. <디 워>는 보이지 않았다. 7시30분에 시작하는 프리미어까지 세 시간 반이 남은 오후. 기대했던 반응을 전혀 건지지 못한 채 남은 시간 동안 LA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디 워> 광고가 눈에 띄는지를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은 할리우드 대로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오래된 건물의 낡은 외벽 전면에 붙은 대형 광고 하나와 한인타운 근처 101 고속도로를 내리자마자 보이는 길가 클럽 광고 벽보들 사이에 겨우 끼어 있는 두장짜리 포스터, 그리고 다운타운 길가 한곳에 일렬로 붙어 있는 포스터였다. 그동안 <브레이브 원>의 노란 포스터를 단 버스는 여럿 지나갔고 버스 정류장은 텔레비전 시리즈 광고로 반짝였다. LA에서 <디 워>는 옥외 광고를 거의 하지 않는 듯하다. 포스터 등 광고물 거의 눈에 안띄어 다만 <디 워>의 텔레비전 광고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려왔다. 그리고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광고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인이었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디 워>의 개봉은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폭스>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나간 스폿 광고는 그들 안에서만 화제가 되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 올려진 트레일러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한국 사람들에게서만 광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확인도 할 겸 몇몇 미국인 친구들에게 <디 워> 광고를 본 적이 있냐고 묻자 대부분 고개를 저었지만, 그날 저녁 몇몇은 전화를 걸어 텔레비전 광고를 봤다고 전해주었다. 가족 단위의 커뮤니티인 오렌지 카운티에 살고 있는 지인은 한인 커뮤니티쪽에서는 주말에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니 예매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전해 들을 바로는 토요일 오후 3시 상영관은 비록 매진 사례는 없었어도 그런 대로 사람들이 많이 들었고, 그중 대부분은 가족 단위의 한인 가족이었다고 한다. 할리우드의 이집션 극장에서 개최된 <디 워>의 프리미어는 대다수 참석자가 한인 영화관계자들로 이루어졌고 한인들의 기대를 반영하며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행사장에서 <디 워>의 홍보담당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있어서 영화의 타깃을 십대 남자아이들로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화 상영 뒤의 반응을 살펴보면, 십대들보다 어린 관객층이 훨씬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8살짜리 소년은 영화가 시작한 뒤 용에 대한 전설이 설명되기 시작하자 쏟아지는 정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 계속 옆에 앉은 아버지에게 저게 무슨 말이야라고 묻곤 했다. 그렇지만 다운타운 액션장면이나 용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소년은 “아빠, 정말 멋져!”라고 중얼거렸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설명들을 따라가기 힘들어했던 것이 그 어린 소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극장엔 대부분 한국인 관객들 일요일 오후에 다시 할리우드의 차이니즈 만 극장을 찾았다. 오후 2시50분, 600석 규모의 상영관에는 11% 정도가 찼는데, 그중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온 미국인 가족이 몇몇 눈에 띄였다. LA에서 <디 워>는 한국인들의 영화였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디 워>가 어느 나라 영화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프리미어장에서 만났던 행사 설치요원은 내게 왜 이렇게 아시아인이 많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디 워>를 보았던 지인들은 한국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관객으로 떠들썩했다는데 솔직히 좀 부럽기도 했다고 했다. <영구와 땡칠이>를 기억하는 세대들의 열정적인 추임새와 함께 보는 <디 워>는 어떤 것이었을까. LA의 <디 워>는 그런 마법이 빠진 채, 어이 없는 대사와 멍한 연기, 진지하지만 고개가 갸우뚱해지게 하는 플롯 등, 여러 가지 엉성한 요소들 때문에 터져나오는 실소로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사고를 당한 동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뭐, 녀석은 괜찮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무신경하게 내뱉는 장면이라든지 주인공이 가슴에 총을 맞고도 “괜찮아”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객석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컸다. 배급사의 전략은 텔레비전과 인터넷 트레일러를 통해 광고를 한 뒤 한인 커뮤니티를 주요 타깃으로 해 언론의 본격적인 리뷰가 나오지 않는 첫주에 승부를 걸고자 한 것 같다. 주말 개봉 이후 를 비롯한 현지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리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때 이해가 가는 전략이기도 하다. 공통적인 반응은 부실한 플롯, 엉망인 대사 등에 대한 혹평이다. 는 “<디 워>는 웃기려고 하는 부분에서보다 심각한 상황에서 더 웃긴 영화, 케이블에서 방송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술 취한 친구들을 불러놓고 같이 볼 영화”라고 꼬집는다. 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9월14일 개봉 첫주 주말 5위로 올라선 <디 워>는 월요일에는 6위로 떨어졌고, 화요일에는 8위로 떨어졌다. 박스오피스 집계 전문 사이트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디 워>의 매표 수입은 일요일부터 급감하기 시작해서 9월18일(화) 기준으로 1일 평균 40%의 하락율을 기록하고 있다. <디 워>는 개봉 2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10위를 차지했다. 태평양 건너 간 <디 워> 논쟁 호러블 보이부터 WWE 경기 피켓 시위까지 <디 워> 논쟁이 태평양을 건넜다. 인터넷 UCC사이트인 유튜브(www.youtube.com)와 IMDb(인터넷영화데이터베이스), 야후닷컴(www.yahoo.com) 등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한국인이 주도한 <디 워> 관련 논쟁이 한창이다. 특히 유튜브에서는 지난 9월15일 Justinwar라는 아이디의 10대 소년이 “<디 워>는 올해 최악의 영화”라는 동영상 감상문을 올리자 한국인 악플러들이 일제 공세를 퍼부었다. “연기도 호러블하고 특수효과도 호러블하다”라며 시종일관 ‘호러블’(Horrible)이라는 표현을 쓴 탓에 ‘호러블 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소년의 동영상은 순식간에 5만8천여건의 페이지뷰와 176개의 리플을 기록했고, 리플의 대부분은 한국인 악플러들의 원색적인 공격으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한국인 악플러들은 ‘깜둥이’(Nigger)처럼 영어권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인종차별적 표현들마저 여과없이 사용하고 있다. 해당 동영상이 국내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으로 옮겨져 또다시 리플 전쟁을 낳고 있는 상황에서, ‘호러블 보이’는 유튜브에 2부작으로 이어지는 <디 워> 리뷰를 올려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왜 자신이 <디 워>를 최악의 영화라고 생각하는가”를 조리있게 설명한 소년은 “나는 한국을 욕하는 것이 아니며 <디 워>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십대 소년이고 개인적인 감상을 비디오로 만들 뿐이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 성숙한 사람들이니 성숙하게 행동해달라”며 한국인 악플러들에게 충고를 보냈다. 이에 몇몇 한국인 네티즌은 “국가주의적인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국가의 정체성이라고 여긴다”고 말하며 한국인 악플러들의 원색적인 모욕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주기를 당부하고 나섰다. 이미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급속한 하락세를 겪고 있는 <디 워>의 최종성적이 1천만달러를 넘지 못할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동안 국내 <디 워> 팬들의 파상공세로 몸살을 겪어온 IMDb와 야후닷컴의 영화 별점평가 섹션 역시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때 높은 점수까지 치솟았던 <디 워>의 IMDb의 이용자 점수는 현재 10점 만점에 5점을 기록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전히 이용자들의 점수 분포가 극단적으로 10점 만점과 1점에 몰리는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인 이용자들이 IMDb 게시판의 점수 매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야후닷컴의 영화 별점 평가에서도 <디 워>는 9월20일 현재 C+의 낮은 평점을 기록 중이다. 이처럼 북미 관객의 평가와 흥행성적이 기대를 훨씬 밑도는 가운데, 미국 WWE 프로레슬링의 한 관중이 “<디 워> 보지마”(Don’t See D-WAR)라고 쓴 피켓을 쳐들고 있는 장면이 캡처되어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는 ‘디시인사이드 <디 워> 갤러리’의 한 이용자가 WWE 프로레슬링 경기의 국내 중계 방송분에서 캡처한 장면으로, 네티즌 사이에서는 해당 장면이 합성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두고 팽팽한 설전이 벌어졌다. 이 같은 설전은 한 네티즌이 합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기 동영상 일부를 인터넷에 올림으로써 마무리됐다. 해당 동영상 캡처는 현재 국내 유머 게시판과 블로그를 통해 급속도로 유포되고 있다. 한편, 많은 네티즌은 북미 언론들의 리뷰가 일부 국내 언론과 <디 워> 팬들에 의해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다며 성토에 나섰다. 특히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뉴욕타임즈>의 리뷰다. 심형래 감독 역시 미국 시사 직후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재미없이 볼 수 없는 영화(It’s impossible not to be entertained)라고 평가해주었다”며 <뉴욕타임즈> 리뷰를 인용했고, 많은 언론들 역시 해당 인용구를 대표적인 격찬으로 간주해 기사에 실어왔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리뷰어는 “영화는 숨가쁘고 정신착란적인 스튜로, 즐기지 않는다는 게 불가능하다”(It is such a breathless, delirious stew, it’s impossible not to be entertained, provided)라는 문장 뒤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여놓았다. “물론, 유머감각이 있어야 하는 건 필수적이다.”(this is crucial you have a sense of humor) 김도훈

부끄러운 역사 앞에 침묵을 거부하다

1950년대 후반 독일 영화계가 처한 상황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패전 이후 독일 영화 산업은 할리우드의 영화적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고, 더군다나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은 독일 영화산업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했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베를린 영화제를 개최하면서도 영화제에 출품할 만한 자국 작품이 없는 것이 당시 독일 영화계의 현실이었다. 1962년 서독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를 위해 모였던 스물여섯 명의 독일 청년 영화인들이 “옛날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믿는다”라고 선언한 사건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었고, 그것이 밑알이 되어 독일 영화계는 1960년대 독일 청년영화와 1970년대 뉴저먼 시네마를 꽃피우게 된다. 독일 청년 영화, 오버하우젠 선언의 기수 폴커 슐렌도르프는 오버하우젠 선언이 뉴저먼 시네마로 꽃피울 수 있도록 토양을 다진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칸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외국영화상을 동시에 안겨준 <양철북>(1979)으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폴커 슐렌도르프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IDHEC)을 졸업하고, 이후 루이 말을 비롯해 알렝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등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영화를 익혔다. 그러던 중 1969년, 그러니까 오버하우젠 선언의 실질적 리더였던 알렉산더 클루게가 자신의 데뷔작 <어제여 안녕>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던 바로 그 해에, 슐렌도르프는 <젊은 퇴를레스>를 발표하며 독일 청년영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 독일 사회에 대한 폭로자 클루게의 <어제여 안녕>이라는 제목 속에는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동독 출신의 한 젊은 유대인 여성은 서독으로 탈출하지만 가정을 이루는데 실패한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에 출몰하며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독일 청년영화와 그로부터 비롯된 뉴 저먼시네마는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을 강조하면서, 현재 속에 떠도는 유령 같은 과거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로베르트 무질의 중편소설을 각색한 슐렌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슐렌도르프는 독일 3제국의 전말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다. 두 명의 학생이 어느 유대인 학생을 괴롭힐 때, 한 독일 학생은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혐오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즐기는 듯한 시선으로 이를 바라본다. 이처럼 슐렌도르프는 잔혹한 행위를 보고도 이를 묵인했던 나치 시대 체제 순응자들의 과거를 들춰내고자 한 것이다. 뉴 저먼시네마의 감독들은 자율적 작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체제 순응적으로 자기만족적 정서에 빠져가는 대중들의 태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의견이 일치했다. 슐렌도르프의 초기 대표작인 <젊은 퇴를레스> <살인의 정도>(1967) <반항아, 미카엘 코올라스>(1969) <벼락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들>(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 등도 독일 청년영화와 뉴 저먼시네마가 추구했던 영화적 목표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슐렌도르프는 분명한 독일의 과거이면서도 이전 독일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역사와 사회의 문제들을 폭로하는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벼락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고향 영화’라 불리는 전통적 독일 영화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작품이다. 슐렌도르프가 볼 때, 더할 수 없이 풍성한 이미지로 묘사된 독일의 숲, 경치, 행복 등은 독일 대중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양철북>은 슐렌도르프의 영화적 성향을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슐렌도르프는 자신의 사회비판적 주제의식을 창작 시나리오를 통해 표출하기 보다는 이미 문학성을 인정받은 소설들을 각색하기를 즐겼다(그의 필모그라피는 위대한 작가의 소설들을 각색한 작품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슐렌도르프는 독일 청년영화를 이끌었던 클루게나 장-마리 스트라우브, 뉴 저먼시네마와 함께 등장한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크 등과 비교할 때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감독이었다. 슐렌도르프 스스로도 “난 영화의 존재 이유를 가장 대중적인 전달 매체로 간주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슐렌도르프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 위해 독일 사회의 치부에 메스를 가하는 원작의 의도를 훼손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양철북>의 오스카가 괴성을 질러 유리를 깨면서 자신의 의사를 세상에 전달하고, 양철북을 두드려 나치 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회장으로 둔갑시키며 회화화했던 것처럼, 슐렌도르프에게 <양철북>은 독일의 역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윗세대에 대한 거침없는 저항이자 도전이었다. 독일 보수화와 슐렌도르프의 침체, 그리고 부활의 조짐 1982년, 파스빈더의 죽음은 뉴 저먼시네마의 종말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적 정치성이 강했던 헬무트 콜과 그의 기독교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이후, 엘리트주의적이고, 비판적이고, 비도덕적인 영화에는 재정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뉴 저먼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그러했듯이, 슐렌도르프 역시 파리와 할리우드의 작가와 배우들을 기용한 합작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슐렌도르프는 <스완의 사랑>(1984), <세일즈맨의 죽음>(1985) 같은 작품을 합작으로 연출했지만, ‘독일이라는 영화적 뿌리’를 상실한 그의 영화는 위대한 원작의 충실한 영화적 번역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독일을 떠난 슐렌도르프의 침체는 그가 헐리우드에서 연출한 <핸드메이즈>(1990)에서 그 정점을 보여준다. 마가렛 앳우드의 <하녀이야기>가 원작인 <핸드메이즈>는 원작이 지닌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는커녕, 흔하디흔한 디스토피아 SF영화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실패작이다. 그 이후 발표한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와 <팔메토>(1998) 역시도 섬세한 심리 묘사나 장르적 충실함 등의 장점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뉴 저먼시네마를 이끈 감독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별다른 특징 없는 범작에 불과할 뿐이다. 꽤 오랜 침체의 시간을 보내던 슐렌도르프가 부활의 조짐을 보인 것은 <레전드 오브 리타>(1999)를 통해서이다. 독일로 복귀하며 발표한 이 작품에서 슐렌도르프는 그의 영화적 뿌리인 독일의 역사에 다시 접근한다. 서독의 테러리스트였다가 동독으로 망명한 리타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혐오하며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상은 또 다른 현실 앞에서 너무도 초라하게 부서질 뿐이다. 어쩌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70년대는 우리에게 황금기였어. 스스로 대단하고 생각했지”라는 리타의 고백은 슐렌도르프의 회상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의 슐렌도르프에게 황금기 시절의 창조적 역량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망각의 유혹을 뿌리치며 독일의 현대사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적 시도는 청년의 열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청년영화와 뉴 저먼시네마를 이끌었던 바로 그 저항의 열정.

풍광의 여유와 아프리카 음악 <노란 집>

<노란 집> The Yellow House 아모르 하카르 | 2007년 | 83분 | 35mm | 알제리, 프랑스 | 월드 시네마20:00 | 부산극장3 죽은 아들의 시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남자는 말한다. “신이 원하시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영화 <노란 집>은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가슴을 울리는 영화다. 결혼 행렬이 시끄러운 가운데 물루드는 아들 벨케즘이 이틀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는 시신을 찾아 바트남 지역으로 향한다. 군사지역을 통과하기 위한 허가를 받고, 경운기 위에는 경광등도 단다. 느리게 움직이는 경운기와 고장난 경운기를 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남자는 조바심 내지 않는다. <노란 집>은 당연히 난황이라 예상했던 여정을 편안히 그리고, 실제로 남자는 아들의 시체를 찾아 나선 길을 이외로 쉽게 끝낸다. 죽음과 전쟁, 현실에서 벌어지는 외부적인 사건들은 이곳의 평화를 깨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나서는 것보다 물루드를 힘들게 하는 건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부인이다. 물루드는 부인을 위해 강아지를 사고, 텔레비전을 가져온다. 슬픔을 치유하는 색이 노란색이란 말에는 집도 노랗게 칠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영화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태도에서 아름다운 마술을 발견한다. 노란색 집과 어울린 풍광의 여유와 고난과 행복을 관조하는 듯한 아프리카 음악은 이들의 슬픔이 정말로 치유되고 있다는 믿음을 안겨준다. 정작 중요한 건 눈 앞에 벌어진 일보다 그 일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는 걸 <노란 집>은 침착하게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직접 물루드로 출연한 아모르 하카르 감독의 연기도 돋보인다.

[이즈쓰 가즈유키] “아직 발굴되어야 할 과거가 많다”

<박치기!>의 감독 이즈쓰 가즈유키가 후속편인 <박치기! Love&Peace>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후속편은 68년 교토를 무대로 했던 전편과 달리 74년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성격은 청춘영화의 활기에서 소시민 영화의 애환을 담는 쪽으로 변화했다. 주인공 안성의 아버지인 진성의 이야기를 추가하여 재일 한국인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에도 더 접근하고 있다. 이즈쓰 가즈유키는 소시민 장르와 희극 장르 등으로 단련되어온 영화 장인으로서, 일본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새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일본사회에 대한 논평을 힘주어 들려주었다. 10월3일 오전 11시경, 마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인터뷰가 시작됐고 그는 문득 “지금쯤 만났을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인터뷰보다 남북정상회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웃음) =그건 아니지만, 남쪽의 대통령이 그쪽으로 넘어간 건 그야말로 박치기 정신이 아니겠나. 박치기 정신이란 뭔가 새로운 도전정신이 아닌가. 나도 박치기를 하려고 서울에 와 있는 것이고 한국의 대통령도 박치기 정신으로 지금 넘어가고 있는 거니까 관심이 간다. 북쪽에서 얼마나 호의적인 박치기가 돌아올지 그게 궁금하다. -영화 개봉 직후 일본에서 호평과 혹평을 같이 들었다고 말했다. =재일 한국인의 삶에 대해 알게 되어 감동했다는 말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 이 영화를 반일영화라고 낙인찍고 인터넷상에서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인이 왜 조선인의 편을 드는 영화를 만드나, 지금 조선인 일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필요없다, 그건 그들의 이야기다, 라며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건 일본의 지금 사회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일본의 지금 젊은이들은 신보수주의 성향이 강하다. 일본인만의 긍지를 강조한다든가 일본인만의 사회를 생각하고 소수자를 배척하고 소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은 일본 젊은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는 한국 젊은층도 같은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그럴 수 있다. 눈앞에 당장 보이는 대세를 적당히 따라가려는 것 같고 특히 과거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경향도 강하다. 하지만 정말로 긍정적인 미래지향이란 과거를 돌아보며 가는 것 아니겠나. 멍청하게도 그런 생각을 너무 하지 않는다. -일본의 텔레비전 시사프로그램에 자주 나오고 또 독설가로도 유명하다고 누군가가 그러던데, 듣다보니 그런 느낌이 온다. =나의 독설이라는 게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만 말할 기회가 없을 뿐, 현명한 서민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텔레비전에 비쳐지니 독설처럼 보이는 것뿐일 거다 -전편을 말해보자. 전편이 청춘의 활기에 집중됐다면 속편은 재일 한국인의 문제가 더 강조됐다. =그렇다. 이번에는 전편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이 주가 됐다. <박치기!>에서는 청춘, 대립, 융합, 공생등이 주제어였고 그것이 재일 한국인 2세들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1세들의 청춘, 그것도 전쟁에 놓인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그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2세들에 관해서도 모르는데 1세들에 관해서는 더 모르지 않았겠나. <박치기!>를 통해 재일 한국인 2세들의 청춘을 보고 관객의 큰 반향이 있었던 건데, 이제는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그들의 삶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진성의 일화들이 너무 적었거나 혹은 자리를 못 찾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그럴 수 있다. 가령 제주도에서 남아시아 전쟁터까지 옮겨가는 그런 일화들을 더 자세히 그려내고 싶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지금 일본 관객이 더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고,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현재(안성과 경자의 이야기)로 자주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게 된 것 같다. 제주도나 전쟁 기간의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었겠지만, 사실 그것만 갖고도 한편의 다른 영화가 나올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진성의 이야기는 이 영화제작자의 아버님(씨네콰논 이봉우 대표)이 겪은 거의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걸 더 확장해서 한편의 다른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주연배우들이 모두 바뀌었다. =전작에서 6∼7년 정도 지난 이야기라 모두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분장이라는 방법 등을 선택하면서 같은 배우를 유지하려 했을 것 같은데, 당신은 좀 다르게 생각했나보다. =전편에 나온 강한 청춘의 인상들을 어른들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는 역시 이미지라서 그것을 분장 등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부>의 알 파치노가 3부작 전부의 주연을 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 같다. 또 알 파치노만큼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기용한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웃음) -전반적으로 보면 당신은 소시민 장르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건 이미 내가 영화를 시작했던 20대 초반부터 그래왔다.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권력자나 실업가의 성공 스토리 같은 데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럼, 20대 초반의 이즈쓰 가즈유키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22살, 23살쯤 포르노그래피영화 현장에 있었고, 포르노그래피영화를 몇편 만들고 나면 그때 메이저쪽으로 가야지 생각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런 영화를 했던 것도 70년대 상황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유행한, 전 국민이 다 중산층을 지향하고 꿈꾼다는 의미에서 나온 ‘일억 총 중류’의 흐름에 대한 반항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다들 고상한 생활들만 꿈꿨으니까. 하지만 밤 되면 하는 일은 다 똑같지 않냐, 뭐 그런 나 나름대로의 반발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 당신의 관심사는 뭔가. =여러 가지로 모색 중이다. <박치기!> 시리즈 이후 강연 요청이 너무 많아 연말까지는 일단 그걸 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죽이는지, 혹은 얄팍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 그 안에서 터지는 사건은 무엇인지 등에 관심을 갖고 자료 조사 중이다. 그리고 재일 한국인 이야기로는 종전 직후 일본 내 재일 한국인의 상황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 생각에는 한국의 급진적인 감독 중 누구라도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아직 발굴되어야 할 과거가 많다. 역시 시장의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바보 같은 영화나 그저 그런 영화들이 있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