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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활력있고 뜻있는 영화,<죽어도 좋아>

■ Story 칠순의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는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져 정화수 한 그릇 놓고 결혼식을 올린다. 장구 치며 노래를 가르치는 아내, 한글을 깨우쳐주며 훈장 노릇 하는 남편, 밤 늦게 귀가해서 남편을 애끓게 하는 아내, 투정을 너무 부리다가 아내를 울리고 마는 남편, 몸이 아픈 아내, 종일토록 곁에서 수발드는 남편으로서의 일상이 정답게 흘러간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노부부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생활이다. ■ Review 올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죽어도 좋아!>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관객은 쉽사리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서성댔다. 그건 유쾌한 흥분이었다.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볼 때에는 뜻밖에도 첫 장면의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울컥 하는 기분이 들더니만 끝내 젖은 눈으로 앉아 있었다. 선하고 충만한 사랑 때문이었다. 허다한 청춘과 청춘영화들이 사랑의 부재에 절망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세월을 보내는 와중에, 사랑의 존재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이 칠순의 실제 부부라는 사실이 이중의 낯선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짧지만 효과적인 도입부 역할을 해준다. 거리의 담배판매대에 앉아 있는 박치규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소 올려잡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여준 다음, 수납구 밖으로 약간 걸쳐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손으로 클로즈업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터득했지만 눈을 내리깐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노인의 시선, 움직이지 않는 주름진 손, 눈발이 흩어지는 겨울 거리가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느낌은 대가의 명화 한폭을 보는 듯했다. 첫 장면이 위력적인 이유는 노인 세대를 바라보는 내 자신의 관점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주기 때문이다. 청장년층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지배자의 눈으로 보기에 노인이란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 채 지상에서 사라질 날만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복 바람으로 방 안에 앉아 틀니를 손질하는 다음 장면도 마찬가지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67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을 갖고 있는 <죽어도 좋아>는 이렇게 간단히 서두를 연 뒤, 나머지 60여분을 이같은 편견에 대한 폭풍 같은 반격에 바친다. 공원 벤치에서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일체의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동거에 돌입한다. 박치규-이순예 커플의 실제 결혼과정이 그랬는지 아니면 작가와 감독이 극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나에게 이 장면은 무척 통쾌하게 여겨졌다. 재산분배나 수발들기 같은 이해타산을 저울질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노인의 체면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자손의 동의니 주변의 축하니 하는 허섭스럽고 주제넘은 절차를 내세우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두 주인공이 여러 번에 걸쳐 실제로 섹스하는 장면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등급 분류를 둘러싼 논란이 컸지만 여론 주도층과 국제영화제의 역할에 힘입어, 일부 장면을 어둡게 색보정하기는 했지만 삭제하지 않고 개봉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사안은 여전히 곱씹어볼 만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검열은 100여년에 걸친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쟁점 사안 중 하나다. 일본제국주의와 군사독재가 전체 역사의 2/3 이상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죽어도 좋아>건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검열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의 윤리적 갈등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 경우다. 윤리적인 입장 차이는 토론할 수는 있어도 비난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성은 문화적으로 가장 크게 재검토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성을 둘러싼 교육과 제도를 설계하는 우리의 기본 패러다임은 그것을 필요악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섹스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비단 보수적인 등급심사위원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적인 지표다. <죽어도 좋아>는 섹스를 표현하는 방법과 수위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합의를 충격적으로 위반하는 영화다. 두 주인공이 실제로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갑자기 이 영화를 그토록 옹호하는 것일까 표현이 예술적이라고 둘러댈 만한 구석도 없건만. (왼쪽부터 차례로)♣ 칠순의 실제 부부인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결혼식을 올린다.♣ 함께 노래하고, 서로 글을 가르치고, 몸이 아플 때 간병하며 지내는 두 부부.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심이 되는 건 성생활이다. 그것은 아마도 억압되었던 존재에 대한 발견과 죄의식이 아닐까 싶다.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가장 크게 배제되는 대상은 미성년, 여성, 노인의 섹슈얼리티다. 억압된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되돌아와 반격한다. 최근 여성과 미성년자의 성문제를 다룬 에로티시즘영화들이 극장가에 하나둘씩 나타나 흥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예다. 특히 <죽어도 좋아>는 지금껏 한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노인이 주인공으로 나와 섹스를 둘러싼 윤리와 관습의 심장부로 돌격하는 급진적인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가 극장에 내걸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 사회 전체의 윤리 체계를 바꾸자고 자신도 모르게 발자국으로 서명한 셈이 되었다. <죽어도 좋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 지점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의 위치는 주인공의 삶을 관찰하고 기다리는 위치에 가깝다. 그가 이야기를 꾸며낸 사람이 아니라 소재를 발견하고 기다리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위치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감독의 위치는 극영화 사상 관객의 위치와 가장 비슷한 상태다. 이것은 또한 주인공들에게 빚진 바가 크다. 좋은 의미에서 소재주의가 적중한 셈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디지털영화제 ‘레스페스트 2002’

잡담 먼저. 영화의 앞날을 걱정하는 따위의 주제넘은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앞날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눈앞에 벌어지는 영화 현상의 이면을 캐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지만,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해외의 영화 전문가들과 유학생들은 한국영화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대중영화와 작가영화가 뒤섞여 곧 터질 듯 꿈틀대는 화산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진담, 농담같은 진담, 위악스런 진담 대신에 농담 그 자체이거나 진담 혹은 위악으로 포장된 쓰레기같은 대부분의 한국 영화를 나만 혹평하고 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여하튼 한국 영화와 영화 산업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그 이면에는 참혹함 혹은 나약함도 있다. 분명히 개봉은 했건만 불과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영화가 참혹함에 속한다면, <메이드 인 홍콩>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홍콩 감독 프루트 첸의 야심작 <화장실 어디에요>는 나약함에 속한다. 한국, 홍콩, 중국, 인도, 미국 등을 무대로 아시아의 아픔을 그리고자 했던 이 영화를 보다가 나 역시 졸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봤다. 하지만 치밀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예술적 야심, 그 나약함과 단순함에 경기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해외의 추킴에 으쓱해 있는 한국 감독들과 아시아 영화의 바람에 스스로 감복하는 프루트 첸 등은 여전히 ‘후진 상태’에 머물고 있다. 디지털 영화제를 표방하고 있는 ‘레스페스트 2002’(11.29~12.5,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는 그 후진 상태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 음악, 디자인 그리고 문화와 예술이 영상을 통하여 만나는 이 자리는 단순히 기술적 진보만 주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실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 혹은 미래의 실험에 대해 논쟁하는 자리, 주류 영상의 시장터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분명 기술의 진보는 개인의 표현력을 향상시킨다. 이 말은 우리가 거대 자본과 결합하지 않고도 영상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이제 혼자서도 영상으로 놀 수 있다고 유혹한다. 수많은 영화제들의 세속적 통속성에 동조하지 않고도 각자의 ‘첫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각자의 세상을 보는 시선과 상상력에 달려 있다. 이런 주장은 지난 토요일 밤 5시간 동안 상영된 심야 프로그램에서도 드러난 편이지만, 개막작으로 상영된 크리스 커닝햄의 뮤직 비디오 <프로즌 : 마돈나>, <플렉스>, <컴 투 데디 : 에이펙스 트윈> 등 12편은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에이리언 3>의 특수효과팀을 이끌었던 커닝햄은 이제 주류 영화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끓고 있는 분노와 욕망 그리고 절시증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드러낸다. 그것은 격렬하거나 느끼한데, 그가 시대와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술과 시장의 진보는 언제나 가능하다. 하지만 예술의 진정한 진보는 시대의 진보 정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 진보가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이효인/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유치하니까 좋네, 그치? <가유희사>

새롭게 어딘가로 들어서는 순간은 항상 모든 것이 어색하고 산란스러운 것인지, 1995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새 교복의 다림질 자국만큼이나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눈알만 매롱매롱 굴리고 있다. 그런 그때, 어리둥절함을 떨쳐버리고자 주변의 어색한 사람들과 나슨하게 ‘영화감상서클’을 만들었다. 사실 그때는 영화를 무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좀더 빨리 친해지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도 딴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란 의미의 ‘Kino Kids’라는 서클명을 짓기도 했다. 당시 교칙상, 서클을 만들려면 지도선생님이 꼭 한명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첫 수업시간부터 수업진행 보다는 영화에 관해 열변을 토했던 세계사 선생님을 지목했다. 선생님은 영화에 관심있어하는 우리를 아주 대견해하며 서클 모임 때마다 영화에 관한 자료들과 테이프들을 챙겨와 보여줬는데, 대부분이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영화사에서 대단히 손꼽히는 고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를 앉혀놓고 네오리얼리즘이니, 표현주의니, 숏의 병치가 어쩌고, 푸도프킨이니 그리피스니 하는 당시로서는 수학공식보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꺼이꺼이 토해냈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영화들은 다 훌륭한 고전들이긴 했으나, 별로 특별할 것 없이 나부룩한 여고 1년생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영화들이 많았다. 흑백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을 보던 날은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는지 아무리 눈을 아당지게 뜨려 해도, 목을 가누어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졸았다가 눈을 떠도 희끈거리는 화면에는 매번 잔다르크의 사느라한 얼굴만이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내용 이해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슨 의무인 양 선생님을 쫓아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도 보러 다녔다. 제대로 이해는커녕 매번 졸아젖히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점점 선생님의 열정을 힘겨워하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매주 새로운 영화들로 우리를 담금질했다. 그러던 어느 모임날! 선생님이 <시민케인> 테이프를 어렵사리 구하여 틀어주고는 급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틈타 <시민케인>을 꺼버리고 한 친구가 빌려온 주성치, 장만옥, 장국영 주연의 <가유희사>라는 홍콩영화를 틀어버렸다. <가유희사>는 한 집안 삼형제들의 좌충우돌을 담은 그야말로 홍콩식 코미디의 결정판이었다. 이 영화에는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홍콩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했는데, 주성치, 장만옥은 물론, 장국영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수많은 여자를 거느린 바람둥이 둘째아들 역할로 주성치가 등장하여 장만옥과 (말도 안 되지만) 환상적인 에펠탑 키스신을 펼치고, 셋째아들 역할로 장국영이 등장하여 <영웅본색>등에서 보여줬던 터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꽃꽂이를 열심히 하는 여성스런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 배우들의 황당무계한 코미디 연기를 보면서 딥 포커스나 기호학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주성치가 나무에서 떨어진 새알을 맞고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리는 뜬금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배우들이 갑작스레 말도 안 되는 가사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춤을 춰도, 장만옥이 마돈나처럼 플라스틱 뾰족 가슴을 달고 슬로모션으로 등장을 해도, 시답잖은 스토리로 우당탕탕 어이없게 모든 상황들이 종료되어버려도, 우리는 그날 온몸이 날연해질 정도로 아주 신나게 웃으면서, 오직 영화만 봤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영화서클이라는 오만한 소속감과 의무감 때문에 각자의 그 ‘유치하고 망상스런’ 취향들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뒤 우리는 선생님이 정해준 영화를 보다가 졸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취향에 맞게 한껏 유치해지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 솟구치는 열정으로 머리 아픈(?) 영화들을 볼 때면 주성치와 장만옥의 서커스 같았던 ‘에펠탑 키스’가 남상남상 떠오르곤 한다.

서울 2002년 겨울,<외투> <나마스테 서울>

차가운 바람이 분다. 개인의 연민에만 빠지지 말고 외롭고 힘든 사람들도 생각하자는 캠페인도 들려온다. 이번 주 독립영화관(KBS 2TV, 금 새벽 1시 10분)도 예외가 아니다. 여균동 감독이 만든 단편 <외투>(베타 컬러, 12분, 1996)도 그렇고 <나마스테 서울>(김대현 연출, 16밀리 컬러, 18분, 1994)도 그렇다. <나마스테 서울>은 네팔에서 온 불법 거주 노동자 나바라즈에 관한 영화다. 그는 여권도 뺏기고 임금과 치료비도 받지 못한 채 비오는 서울 밤거리를 헤매다가 마음 착한 한국 여자와 하루 밤을 보내게 된다. 그의 쓸쓸함과 난감함은 왜 그렇게 착한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한 한국 여자에 의해 잠시 지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이 일어나지만 그 반전은 주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인다. <외투>는 12년 간 투옥된 채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 아들을 대신하여 '일일 아들' 노릇을 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대리 아들인 주인공은 어머니 안경도 맞춰드리고 무릎에 눕기도 하며 어머니를 위로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면서 소원을 푼다. 외투 그 아들이 입던 옷이다. 그는 헤어지면서 그 외투를 다시 벗는다. 어머니는 다시 처연한 상태로 돌아간다. 얘기는 그렇게 끝나지만 여운은 꽤 오래 남는다. 언제쯤이면 양심수가 모두 풀려날까 아직 사회와 정부는 우리를 위한 사회나 정부는 아닌 것 같다. 딸들이 타국의 전차 바퀴에 깔려 죽어도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정부다. 전차 바퀴라도 구속시킬 일이지….이효인/영화평론가 yhi60@yahoo.co.kr

만만찮은 사제지간,<동갑내기 과외하기> 촬영현장

“침소봉대.” “열라 구라 푸는 거지.”“사면초가.” “다구리 붙을 때 적들에게 빙 둘러싸인 거지.”“호사다마.” “다마라… 다마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알지. 그러니까, 다마에는 알다마, 포켓다마, 점프다마가 있는데….”언뜻 들으면 마치 조폭들의 선문답 같지만 엄연히 스승과 제자가 수업 도중 나누는 얘기로, 지난주 양수리촬영소에서 있었던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한 장면이다. 과외를 하지 않으면 등록금을 내지 못할 처지인 대학생 수완(김하늘)이 내로라 하는 정재계 거물의 아들인 지훈 (권상우)의 과외수업 중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과외수업 장면 촬영은 지훈의 방 세트에서 이루어졌다. 웬만한 신혼부부의 살림을 차려도 될 만한 공간, 벌써 10명이 넘는 과외선생을 갈아치운 만만찮은 경력의 소유자 지훈이 한칼에 닭을 잡는 닭집 딸인 수완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성어를 공부하는 시간이다. 두 사람의 이력만 봐도 섬뜩한 수업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듯. 수완과 지훈의 감정대립이 이날 촬영의 최대 관건이다. 그래서일까 지훈 역을 맡은 권상우의 NG가 심상치 않다. “감정 좋아졌을 때 가자”라는 제작진의 요구에 머쓱했던 권상우도 이내 자세를 고쳐 잡는다. 이번엔 김하늘이 NG를 냈다. 권상우의 코에 담배를 꽂는 장면에서 너무 세게 꽂는 바람에 담배가 부러지고 만 것. 장내는 한바탕 폭소로 이어지고…. 동갑내기의 알콩달콩 연기만큼이나 부드러운 현장 분위기다. 연출을 맡은 김경형 감독은 “인터넷에서 동명수기를 보고 작품을 결심했어요. 신분 차이가 나는 동갑내기가 만나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얘기로 상황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어요”라며 다른 코믹영화와 차별을 둔다면 “두 인물의 감정이 축적돼가는 과정에서 묘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12월 중순까지 촬영을 끝내고 내년 설 직후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사진·글 정진환 (왼쪽부터 차례로)♣ 이 작품으로 데뷔하는 김경형 감독은 “두 배우의 작품이라고 할 만큼 작품과 배우의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다”라며 특히 권상우의 코미디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업 중 지훈이 담배를 입에 물자 화가 난 수완이 담배를 뺏어 지훈의 코에 냅다 꽂아버리는데…. 김하늘은 여러 번의 NG 끝에 꽂는 데 성공, 스탭들의 박수를 받았다.♣ “시나리오가 만화책처럼 쉽게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었어요”라는 권상우. 그가 맡은 지훈은 공부는 뒷전인, 고등학교를 2년이나 꿇은 문제아다.♣ TV드라마 <로망스>에 이어 다시 한번 제자와 사랑에 빠지는 선생 역을 맡은 김하늘. TV에서 보여주던 다소곳하고 차분한 역이 아니라서 맘에 든다는 그녀는 이미지 변신에 강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2002년 영화계엔 어떤일이 일어났나

칸과 베니스에서의 연이은 낭보, 다양한 영화들의 해외영화제 진출과 잇따른 리메이크 판권 판매 등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세계 속에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아진 해로 기록될 것 같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10월말까지 45%로 지난해 46%에 비하면 조금 떨어진 수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내에서의 한국영화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올 최고의 화제작은 상반기 <집으로..> 와 하반기 <가문의 영광>. ‘대박’을 기대하지 않던 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반면 100억 가까운 제작비를 들인 몇몇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흥행 실패는 충무로 위기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올 영화계에는 유난히 검찰에 소환된 영화인들이 많았다. 개그맨출신 영화제작자 서세원씨는 방송사 PD에게 PR비를 제공한 혐의로 검찰에 쫓기는 처지고 곽경택 감독은 조직폭력배에 자금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대종상 비리’또한 수사대상이 됐다. 후반기에는 영화 <죽어도 좋아>의 제한상영가 등급부여와 관련 등급체계와 영등위의 개혁에 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영화 <바람난 가족>의 출연 약속을 어기고 TV드라마에 출연한 김혜수와 제작사 명필림 간의 공방도 있었다. ■세계속에 높아진 한국영화의 위상 = 올해 한국영화계는 사상 최초로 3대 영화제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난 5월말 칸영화제는 <취화선> 을 연출한 한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에게 감독상을 수여했고 9월 초에는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차지하며 그렇게도 넘기 힘들던 세계 3대 영화제의 벽을 차례로 뛰어넘었다. 11월 열린 부산영화제에 칸과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높아진 한국영화의 위상을 입증해준다. 이밖에도 <집으로..>, <동승>, <괜찮아 울지마>, <화산고>, <고양이를 부탁해> 등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크고 작은 영화제에 속속 진출했다. 또 지난해 <조폭마누라>에 이어 올해는 <달마야 놀자>, <시월애>의 리메이크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리기도 했다. ■한국영화 점유율 45% = 영진위가 발표한 10월말까지의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5%로 한국영화는 2년 연속 40%대를 기록하며 강세를 유지했다. 올해 흥행랭킹 10위 중 한국영화는 <가문의 영광>(서울 160만), <집으로…>(서울 160만), <공공의 적>(116만), (88만) 등 4편으로 지난해에 비해 2편이 줄었다. 비슷한 점유율에도 빅히트작이 줄어든 것은 한국영화의 제작편수가 지난해보다 대폭 증가했기 때문. 영등위의 등급분류통계에 따르면 올 11월 말까지 제작된 한국영화는 모두 109편으로 같은 기간 60편이었던 지난해에 비해 갑절 가까이 늘었다. ■<집으로…>와 <가문의 영광> 돌풍 = 전반기 <집으로…>와 후반기 <가문의 영광>의 흥행 ‘대박’을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와 따뜻한 시선으로 전국 413만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며 소재의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고 조폭영화에 가족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인 <가문의 영광>은 ‘한물갔다’는 조폭 영화도 변형을 통해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블록버스터의 실패에 따른 충무로 위기론 = <예스터데이>, <아유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제작비 70억을 넘는 블록버스터급 한국영화가 잇따라 흥행에서 참패하며 몇몇 투자사가 재정사정이 어려워지자 ‘한때 불어닥쳤던 벤처 열풍이 잠잠해지듯 영화투자자금도 물밀듯이 빠져나가는 것 아니냐’는 한국영화 위기론도 확산됐다. “제작편수는 늘어났지만 흑자를 낸 영화는 줄었다”는 논리와 “<친구> 같은 빅히트작은 없지만 전국 80만~200만명의 흥행영화는 많아졌다”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으며 “과도한 마케팅비와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용을 줄여서 거품을 거둬내야 한다”는 말도 영화인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한편, 해외자본의 한국영화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플라스틱 트리>는 프랑스의 자본으로 제작을 마쳤으며 <왕조의 눈>도 프랑스 합작을 논의 중이다. 이밖에 <블루>는 일본으로부터 일부 제작비를 투자받았고 한맥영화사의 <실미도>와 장윤현 감독이 계획중인 미국영화 의 리메이크판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전액투자가 결정됐다. ■<죽어도 좋아> 논란 = 70대 노인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구강성교와 성기노출 등의 이유로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자 영등위 위원 3인이 ‘적합한 근거에 따른 의사결정이 아니다’며 사퇴했고 문화관련 시민단체와 영화인들이 반발하고 나서는 등 등급 심의 기준에 대한 논란이 영화계 안팎에서 끊이지 않았다. <죽어도 좋아>는 3차 심의에서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오는 6일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영화 등급체계 개선과 영등위 개혁 문제는 영등위 내부와 영화관련 문화단체들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충무로와 ‘조폭’ =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조직폭력배로부터 압력을 받아 거액을 건넸다는 의혹을 받고 검찰 조사를 받자 영화계를 맴돌던 충무로 조폭자금 유입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명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소문’이지만 충무로에는 “많지는 않지만 몇몇 영화는 조직폭력배의 자금으로 만들어졌다더라”는 식의 얘기가 널리 퍼져있다. “‘양지’에서의 사업을 계획하는 조직폭력배와 투자자를 애타게 찾는 제작사의 필요가 서로 맞아 떨어져 조폭자금이 충무로에 흘러드는 것”이라는 것이 소문의 내용. ■치열해진 극장시장 = 지난 한해 서울시내에서 문을 닫은 극장은 명화극장, 신촌아트홀, 밀레 아트홀, 코리아극장, 매트로 시네마, 파고다 극장, 시넥스 등 모두 7개로 전부 단관 극장이다. 반면, 멀티플렉스 극장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CJ-CGV는 올 한해 명동과 구로, 목동에서 모두 23개 스크린이 새로 오픈됐으며 메가박스는 부산 해운대, 김포와 목포에 19개 관이 추가됐다. 올초 8개 스크린을 갖추며 재개관한 대한극장은 멀티플렉스로의 변신에 성공하기도 했다. 여기에 극장사업 진출을 선언한 플래너스도 내년 신림동에 멀티플렉스 극장을 개관할 계획이며 종로의 단성사와 피카디리도 내년 대형 멀티플렉스로 다시 문을 열 계획이어서 갈수록 극장 시장의 경쟁은 치열해질 전망이다.

<맨발의 겐> 만화원작자 나카자와 게이지 인터뷰

반핵, 반전만화로 알려진 <맨발의 겐>(전 10권, 김송이·이종욱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펴냄)의 나카자와 게이지가 지난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한국을 다녀갔다. <맨발의 겐>은 원폭투하로 초토화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소년 겐과 주변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만화. 실제 히로시마 출신으로 6살 때 원폭투하 지점에서 불과 1.3km 떨어진 곳에서 피폭을 당했고, 피폭후유증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던 작가 자신의 체험과 함께, 전쟁과 핵무기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도 포기한 채 생업에 나서야 했던 나카자와는,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만화의 꿈을 키웠다. 이후 도쿄에서 <울트라맨> <킹콩> 등의 작가 가즈미네 다이지의 사사를 받았으며, 낙진 때문에 시커먼 비가 내렸던 히로시마의 기억을 담은 <검은 비를 맞으며>로 1968년에 데뷔했다. <맨발의 겐>은 1973년 소년만화잡지 <주간 소년점프>에서 기획한 만화가의 자서전 시리즈 첫 번째로 선보인 작품. 잡지를 바꿔가며 연재된 끝에 1987년에 단행본 10권으로 완간됐고, 세계 각국에 번역·출간됐다. 82년에는 동명 애니메이션이, 96년에는 동명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뉴욕에서도 호평받았다는 이 뮤지컬은 ‘2002년 한·일국민교류의 해 기념 초청공연’으로 11월21일부터 24일까지 문화일보홀 무대에 올려졌다. 때마침 핵문제와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인 아시아프레스인터내셔널에 의해 초청된 나카자와를,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마련된 조촐한 간담회 자리에서 만났다. 피폭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건강이 안 좋았는데, 요즘은 어떤지. 지난 8월 <맨발의 겐> 번역판 완간 출판기념회에 못 온 것도 건강 때문이라고 들었다. 많은 피폭자들이 당뇨병에 시달린다. 나도 당뇨병을 앓아왔는데, 출판기념회 때는 좀 심각한 상태라 못 왔다. <맨발의 겐> 번역판은 물론, 이번 뮤지컬 공연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돼서 기쁘다. 무리가 되긴 했지만, 정말 오고 싶었다. 만화에서 겐의 아버지는 군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파’로, 경찰에 끌려가고 투옥되기까지 한다. 실제로 당신의 아버지도 그랬나. 그랬다면 그런 집안에서 자라고, 또 그 경험에 바탕한 작품을 그린 당신도 어떤 압력을 받았나. 아버지는 실제로 반전운동을 했고, 히로시마형무소에 1년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당시 극단에서 일하셨는데(제정러시아 말기와 사회주의를 다룬 고리키의 <밑바닥 인생> 등을 상연- 편집자) 단원 전원이 경찰에 끌려가고 그랬다. 아버지의 반전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작품을 쓰기 전부터 탄압은 감수했다. 아내에게도 분명히 이상한 편지나 전화가 올 거다, 비난이 있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했고. 그런데 실제로는 격려의 편지나 전화가 많았다. 우익의 반발은 없었나. 또 일본의 피폭이 한국에서는 식민지배를 끝내게 한 계기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사상보다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려고 한 작품이라 우익쪽에서도 별말은 없었다. 우익단체들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게 아닐까. 아니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작품에도 나오지만 난 ‘박씨’라는 한국인 이웃사촌과 아주 친하게 지냈고, 아버지로부터 늘 한국인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에 반대해왔다. 일본의 피폭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일본인 사이에는 피폭의 피해자란 인식이 많은데, 그 이전에 우리 자신도 가해자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 나쁜 짓도 많이 했으니까. 원래 자서전을 써 달라고 제안을 받았는데, 만화란 장르를 택한 이유는. 만화는 어린이와 가장 가깝고 친근한 미디어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무시하면 안 된다고, 또 전쟁과 핵에 대한 이야기를 차세대에게 전달하기에 가장 적격인 매체라고 생각했다. 핵전쟁 이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그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좀 화가 났었다. 핵전쟁이 나면 인류가 망하는데, 그 이후라니. 밝은 부분은 밝게 가더라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핵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 만화책 표지에도 겐이 보리를 쥐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리가 상징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아버지한테 많이 들은 말인데, 보리는 추운 겨울에 싹을 틔워 몇번이고 밟혀도 꿋꿋이 살아남는다. 보리는 겐의 테마이자 내 자신의 테마다. <맨발의 겐>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에 대한 소감과 독자들에게 한마디. 한국 독자들에게도 발견되어 기쁘다. 원폭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핵과의 전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또 핵과 전쟁에 대한 만화일 뿐 아니라 보리의 의미처럼 밟혀도 밟혀도 굴하지 않는 삶에 대한 만화로 읽힐 수 있길 바란다. 읽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 꼭꼭 많이 읽어주시길…. 창작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은 좀 피곤하고 많이 지쳐 있지만, 평생 만화가로 살아왔듯 회복한 뒤에 또 만화를 그리고 싶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도서자료제공 아름드리미디어 <맨발의 겐>역사의 참상, 만화로 드러내기 총 10권으로 발표된 나카자와 게이지의 <맨발의 겐>은 픽션의 형식을 빌린 논픽션 만화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소년 겐은 작가 나카자와의 분신이며, 소년 겐이 겪는 참혹한 일상 역시 나카자와 자신이 겪은 일이다. 간판가게에서 일하고, 독학으로 그림에 대한 꿈을 키운 겐의 모습도 그대로 작가의 바이오그라피와 일치한다.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의 진창으로 들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서술해 르포르타주만화인 <팔레스타인>을 그렸다면, 나카자와 게이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단지 픽션이라는 외형을 빌려 서술한다. 그래서 <맨발의 겐>은 매우 주관적이며 정치적 입장이 선명하다. 원폭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그 참상을 경험한 소년 겐은 세계와의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성장해나가 군국주의 일본과 천황제에 대한 명확한 반대입장을 드러낸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기미가요를 부르려는 교장에 맞서 “왜 빌어먹을 놈의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하느냐”고 항의한다. 겐은 “천황은 전쟁 범죄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원폭 피해나 중국이나 조선의 피해도 모두 천황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어느 만화에서도, 역사책에서도 심지어 우리나라의 정치인들도 쉬쉬하는 강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겐, 류타와 함께 사는 가추코의 입을 빌려 살인죄로 형무소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사람들로 ‘천황’과 ‘도오조오 내각의 장관과 공무원’, ‘육해군의 간부들’을 꼽는다. 강한 분노가 칸 위로 넘실거리며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어도 우리가 <맨발의 겐>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죽어도좋아/바운스/스토커/피아노치는대통령/철없는아내와‥‥

■ 죽어도 좋아 칠순의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는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져 정화수 한 그릇 놓고 결혼식을 올린다. 장구 치며 노래를 가르치는 아내, 한글을 깨우쳐주며 훈장노릇 하는 남편, 밤 늦게 귀가해서 남편을 애끓게 하는 아내, 투정을 너무 부리다가 아내를 울리고 마는 남편, 몸이 아픈 아내, 종일토록 곁에서 수발드는 남편으로서의 일상이 정답게 흘러간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노부부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생활이다. 박진표 감독, 박치규, 이순예 출연, 청어람 배급, 상영시간 67분 박평식 늙어도 좋은 걸, 낮에는 더 좋아, 죽도록 좋다니까 ★★★☆ 심영섭 오럴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라 ★★★☆ 유지나 훔쳐볼만한 노인의 성생활, 나이주의를 극복한다 ★★★☆ 홍성남 절망이 아니라 기쁨을 노래하는 한국판 ‘아무르 푸’ 이야기 ★★★★ ■ 바운스 리사(오카모토 유키코)는 뉴욕에 가기 위해 있는 돈을 모두 털어 비행기표를 산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비용을 모으던 리사는 그동안 모았던 돈을 모두 강탈당한다. 주로 성인용 영화를 찍는 일 등으로 돈을 모았던 리사는 순식간에 절망에 빠진다. 존코(사토 히토미)와 라쿠(사토 야스에)는 거리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소녀들. 리사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이들은 그녀를 돕기로 선뜻 결정한다. 하지만 어려움은 있다. 리사와 함께 거리로 나선 아이들은 기성세대와 크고 작은 마찰을 계속 빚는다. 리사가 미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존코와 라쿠는 리사에게 새로운 생활을 마련해줄 돈을 모으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하라다 마사토 감독, 사토 히토미, 사토 야스에, 오카모토 유키코, 야쿠쇼 고지 출연, (주) 앤더슨컴퍼니 수입, 콜럼비아트라이스타 배급, 상영시간 109분 김봉석 10대를 바라보는 바람직한 시선의 하나 ★★★★ 박평식 딸들아, 테니스볼처럼 부드럽고 세차게 튀어라 ★★★ 심영섭 아이들의 눈으로 치받는다. 원조교제 권하는 세상 ★★★ ■ 스토커 쇼핑몰 한구석에 자리한 사진 코너에서 일하는 싸이는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는 수년간 제이크 가족의 사진을 현상해주며 그들을 실제 가족으로 상상하며 살고 있다. 제이크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싸이는 실제로 자신이 정말 그들 가족의 일부라고 여기면서 병적으로 제이크에게 집착하게 된다. 제이크 가족의 사진을 모으기 위해 사용한 회사자금이 빌미가 되어 싸이는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또한 그는 마야 버슨과 제이크의 아버지 윌 욜킨이 불륜관계임을 알게 된다. 싸이는 ‘가족으로서’ 격분하게 되고, 점점 더 집요하게 이들 가족 일에 관여한다. 마크 로마넥 감독, 로빈 윌리엄스, 코니 닐슨, 마이클 바탄, 에린 대니얼스, 다이랜 스미스 출연, 이십세기 폭스코리아 수입·배급, 상영시간 98분 김봉석 스토커 때로는 바라보는 것만이 행복 ★★★ ■ 피아노 치는 대통령 최은수는 전근 온 첫날부터 학생으로 변장해 자신이 담임을 맡을 학급 아이들의 상황을 파악할 정도로 열의에 넘치는 국어교사. 문제아로 소문난 영희는 은수의 관심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반항하고, 은수는 영희에게 부모님을 만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영희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대통령 한민욱인 것. 그는 급작스런 암행사찰과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등의 기행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딸아이 교육만큼은 손놓고 있던 인물. 그는 은수로부터 영희 대신 숙제로 <황조가>를 100번 써오라는 벌을 받지만, 다 써놓은 과제물을 잃어버리고 만다. 전만배 감독, 안성기, 최지우 출연, CJ 엔터테인먼트 투자·배급, 상영시간 95분 박평식 대통령보다 홀아비를 강조하면 결말이 뻔해지지 ★★☆ 심영섭 노래하는 수녀가 사기라면… ★★ 유지나 풍자는 힘을 잃고, 뻔하고 부자연스런 연애판타지가 압도한다 ★★☆ ■ 철없는 아내,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금숙과 은희는 여고 동기다. 은희가 길에서 남자 불량배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 태권부 선수인 금숙이 구해준 뒤로 둘은 친해져 애인 사이로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은희는 철이 없다. 나이트클럽에서 남자들의 유혹에 덥석 응하려 하자, 화가 난 금숙이 남자들과 싸워 교도소에 간다. 그동안 은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가 불치병에 걸리자 금숙은 치료비를 위해 돈을 훔치다가 또 교도소에 간다. 금숙이 두 번째 교도소에 간 사이 은희는 코미디언 오두찬과 결혼한다. 이무영 감독, 공효진, 조은지, 최광일 출연, 뉴라인코리아 배급, 상영시간 92분 박평식 성인용품을 박리다매합니다. 참외는 덤이고요 ★★ 홍성남 더 이상했어도 됐을 파란만장한 퀴어 스토리★★☆

한국식 파이? <색즉시공>

<색즉시공>(제작 두사부필름/필름지)은 첫 영화 <두사부일체>로 전국 350만의 ‘대박’을 기록하며 단숨에 한국 코미디 영화계의 기대주로 떠오른 윤제균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한국판 <아메리칸 파이>’를 표방하며 제작된 이 영화는 ‘정액 프라이’나 ‘돼지 발정제’를 등장시키는 과감함과 생쥐를 통째로 삼킨다든가 구토 중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엽기성을 갖추며 <아메리칸…>보다 오히려 한 발짝 더 나가는 듯 하다. 영화는 남자들끼리 술자리에서 나누는 질펀한 음담패설과 비슷하다. 야하고 자극적이며 보는 순간은 배꼽을 잡을 만큼 재미있지만 너무 직접적이고 감독의 상상력은 풍부하지만 남성중심적이다. 여주인공 은효는 70년대의 여자처럼 잘 생긴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착한 남자에게서 구원을 받고 여자와의 ‘하룻밤’만을 꿈꾸는 남자아이들은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하철 성추행이나 낙태도 별 거리낌 없이 등장하고 수영복이나 에어로빅 복장의 여배우들은 남성 관객들의 눈만을 즐겁게할 뿐이다. ‘단지 코미디일 뿐, 재미있으면 그만’이랄 수도 있겠지만 마초적 상상력에 불쾌해 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주는 웃음은 넘치지만 스토리의 흡인력도 <두사부일체>에 비해 떨어진다. 군 제대 후 스물여덟에 대학 신입생이 된 은식(임창정)의 대학생활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담뱃재에 가래침을 막걸리에 섞어 먹는 신입생 신고식도 힘들고 실수로 속옷바람에 3층 기숙사방에서 뛰어내려 캠퍼스의 명물로 소문나기도 한다. 어느날 무료하기만 하던 은식의 대학생활에 서광이 비춰온다. 에어로빅부의 ‘킹카’ 은효(하지원)가 그 앞에 나타난 것. 하지만 어떻게든지 관심을 끌어보려는 은식의 노력에도 은효는 무관심하기만 하고 오히려 그때마다 상황은 꼬여서 은식은 변태취급을 당하기만 한다. 해프닝 끝에 은식이 속한 차력부와 은효의 에어로빅부는 같은 연습실을 쓰게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오히려 은효는 바람둥이 상욱(정민)과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남녀 주인공역을 맡은 임창정이나 하지원의 연기도 무난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은식의 차력부 선배역의 최성국. TV시트콤 「대박가족」에서 ‘진지한 코미디’연기를 보여준 그는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최성국의 상대역인 에어로빅부 코치 역을 맡은 댄스가수 출신 유채영의 연기자 변신도 성공적이다. 12일 개봉해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반지의 제왕:두개의 탑>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선다. 상영시간 96분. 18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