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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경성 라디오에서 생긴 일, <라듸오데이즈> 공개

일시 1월24일 오후 2시 장소 CGV 용산 이 영화 1930년대 경성. 경성방송국 PD 로이드(류승범)는 작가 노봉알(김뢰하)와 함께 <사랑의 불꽃> 드라마를 만들기로 한다. 기생 명월(황보라), 아나운서 만철(오정세), 재즈 가수 마리(김사랑), 독립투사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음향 담당 K(이종혁) 등이 가세헤 드라마팀이 꾸려진다. 조선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사랑의 불꽃>은 방송 초기 애드립 사고와 팀내 불화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음향 효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일본군의 압력을 받고 있는 방송국 국장은 로이드에게 드라마의 엔딩을 수정하라 명령하고 로이드는 고민에 빠진다. 100자평 걱정했던 것만큼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를 노골적으로 흉내내지는 않았다. 배우들의 능청맞은 연기는 썩 좋고 화면 위에 구현된 30년대 경성도 그럴싸하며, 설정도 잘 잡았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 안전하게만 논다. 충분히 폭발할 수도 있었던 농담들이 몸을 사리는 통에 반쯤 주저앉았달까. 재료는 충분히 좋지만 <라듸오데이즈>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료가 가진 기본적인 장점 이상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못한다. 듀나/영화평론가 늘 충무로가 위기라고 하는데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텔레비전 단막극보다 못한 이야기에 극장용 제작비를 투자할 여력이 있으니 말이다. <라듸오데이즈>는 뭣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어떻게든 웃기려 하지만 마냥 지루하기만 하고, 배우들은 그저 낭비만될 뿐이다. 한국 TV 드라마의 클리쉐를 비꼬면서 튀고 싶었나?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임성한 작가의 <하늘이시여>는 오마주인지 조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할것 같다. 누구나 코웃음 치는 그 뻔하디 뻔한 TV 드라마가 <라듸오데이즈>보다는 몇배는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김종철/ 익스트림무비(extmovie.com) 편집장 시대의 아픔을 거둬내고 노곤한 삶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라듸오데이즈>에는 이상할 만큼 이야기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를 기획하고, 방송국의 압력과 갈등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극적인 결말이 있음에도 영화는 시종일관 나른한 분위기에 빠져있다. 이것이 시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르의 요소를 갖고도 활용하지 않는 방식은 영화의 위치를 애매하게 한다. K의 드라마가 단지 판타지적인 엔딩만을 위해 사용되는 부분도 아쉽다.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모두 정치적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에피소드를 소홀히 하는 건 영화 자체에 대한 태도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재혁/ <씨네21> 기자

배우들이 인정한 최고의 배우

배우가 뽑은 배우는 누굴까. 1월27일 열린 제14회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시상식에서 <데어 윌비 블러드>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영화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부문 여우주연상은 <어웨이 프롬 허>의 줄리 크리스티. 남녀 조연상은 각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과 <아메리칸 갱스터>의 루비 디가 가져갔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트로피를 받은 뒤 시상식장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는 완벽했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는 이미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다”며 수상의 영광을 히스 레저에게 돌렸다. TV부문 남녀 주연상은 분야를 ‘텔레비전 무비·미니시리즈’, ‘드라마 시리즈’, ‘코미디 시리즈’ 등 세 가지로 나눠 <애즈 유 라이크 잇>의 케빈 클라인과 <라이프 서포트>의 퀸 라티파, <소프라노스>의 제임스 갠돌피니와 에디 팔코, <30 록>의 알렉 볼드윈과 티나 페이에게 수상했다. 배우가 뽑은 시상식답게 올해는 최고의 앙상블상과 스턴트 앙상블상이 신설됐다. 최고의 앙상블상은 <소프라노스>와 <오피스>가 가져갔으며 스턴트 앙상블상은 영화 <본 얼티메이텀>의 171명과 TV시리즈 <24>의 7명에게 돌아갔다. 한편 이번 시상식은 계속되는 작가조합 파업, 골든글로브 시상식 취소 등 최근 활기를 잃은 할리우드에서 오랜만에 축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행사였다. 조촐하게 치러지긴 했지만 브래드 피트, 안젤리나 졸리, 케이트 블란쳇, 토미 리 존스, 조지 클루니 등이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영객잔] 새롭게 사유하라! ①

(스포일러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실 분들은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충분히 경고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가 아니라 지난 한해에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를 한달 동안 몰아서 본 다음 중얼거린 질문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의 ‘10대 소녀의 지옥을 웃기게 그린’ <주노>와 마이클 베이의 ‘10대 소년의 로망을 심각한 척 담은’ <트랜스포머>를 한해에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텍사스에 관한 두편의 ‘웨스턴 이후’의 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범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라드>와 조엘 코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다음 뉴질랜드에서 온 앤드루 도미닉이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연출한 ‘웨스턴’ <제시 제임스 암살>을 보게 될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를 동시상영처럼 보았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던지는 <본 얼티메이텀>과 <아임 낫 데어>(와 <스파이더 맨3>까지)를 거의 연달아 보게 되었을 때, <본 얼티메이텀> 각본을 쓴 토니 길로리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마이클 클레이튼>으로 감독 데뷔했을 때, 미국에 관한 두개의 이상한 연대기인 <조디악>과 <아메리칸 갱스터>를 시즌별로 보았을 때, 그런 다음 1980년대 뉴욕을 무대로 한 경찰과 러시아 마피아 사이에 낀 클럽 매니저를 다룬 제임스 그레이의 <우리는 밤을 지배한다>를 보게 될 때, <클로버필드>를 본 다음 집에 와서 다운로드받은 리처드 ‘도니 다코’ 켈리의 <남쪽나라 이야기>를 볼 때, 지지난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것을 숀 펜이 <인투 더 와일드>에서 거의 이루어낸 것을 볼 때, 그냥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 구스 반 산트가 ‘여전히’ <파라노이드 파크>를 찍고 있을 때, 지금 미국영화는 무엇일까, 라고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는 이야기지만 스필버그가 <우주전쟁>을 찍었을 때 무언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했다. 프랭크 카프라처럼 <터미널>을 찍은 다음 갑자기 존 포드의 <수색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워드 혹스처럼 <뮌헨>을 연출했다. 그러고 난 다음 두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전쟁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제작했다. 올해 (루카스와 함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돌아오지만 지금 준비하는 영화는 <링컨>(!)이다. 할리우드영화가 영화보는법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토픽의 단절이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하겠지만, 1999년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가 (미국에서만) 1억달러 블록버스터가 되었을 때 (할리우드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벌어졌다. 이 쓰레기는 1999년 버전 <네 멋대로 해라>가 되었다(‘의미심장하게도’ 그해에 <매트릭스>가 만들어졌다). 이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비평적 용어란 없다(하지만 온갖 해설은 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미국영화는 영화를 거의 와해시켰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와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비밀의 형식이라는 것을 마치 잉여인 것처럼 몰아세운 다음 재빨리 거기에 영화와 닮은 새로운 근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과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의 분모가 있는 집합처럼 보였지만 일단 구멍이 뚫리자 그 속으로 새로운 모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구멍이 뚫려 통과하기 시작하자 거기서 어떤 상황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술이라기에는 너무 생산적이고, 재생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놀랄 만큼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조너선 드미의 <섬씽 와일드>를 언급하고 있지만 난 그 ‘이후’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걸 그냥 포스트모던하군, 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지난 유머다. 내가 할리우드영화를 보면서 점점 기괴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 자체는 금방 이해가 되는데 본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거의 플롯의 구조가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할리우드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가? 플롯없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조디악>을 본 다음 <살인의 추억>처럼 플롯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본 얼티메이텀>을 본 다음 이 영화가 아무 인과관계 없이 고작해야 세개의 시퀀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텅 빈 플롯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가? 단 하나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두편의 영화의 (놀랄 만큼 창조적인 다음 한심할 만큼 게으른) 반복 <데쓰 프루프>. 아니, 차라리 스포일러의 만연 속에서 그 영화의 플롯이 궁금해서 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는가? 심지어 <클로버필드>를 보러 온 관객의 대부분은 어떻게 찍혔는지조차 알고 온다. 그 앞에서 우리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새로운 상황이라면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무엇을 어디서? 왜 보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혹은 의심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 미국영화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고 있다면 당신은 내 논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다.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하는 게임방 시대의 시네필들 오늘날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영화라는 사건을 가능한 세계의 한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사건-가능, 이라는 하나의 삼각형. 다른 하나는 영화라는 정보를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로 읽는 것이다. 영화-정보-경험, 이라는 또 다른 삼각형. 전자의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눈에 보이게 줄어들고 있다. 후자의 방법은 거의 모든 영화들이 우리 시대의 광학적 기계장치를 다루는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볼 때 이제는 그것을 보는 직관적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풍요로운가라는 (다소 상투적인 비유이지만) 유목민적인 산책의 구경보다 그 영화를 둘러싼 정보를 얼마나 더 많이 갖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영화가 더 잘 보이는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적 전송과 리플이 이 시대의 영화감상을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착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 이 네트워크의 특징은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오로지 사이버 대화가 있다. 정말 있는 것은 전송뿐이다. 전송하고, 전송받고. 베냐민적 영화보기에 대한 맥루한적 영화보기의 승리.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미국영화(의 관객교육 방법)의 승리. 오늘날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둘러싼 정보에 더 열중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노트북 세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게임방 시대의 첫 번째 시네필들. 그들은 사실상 재빨리 새로운 영화 보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들은 영화를 본 다음 견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정보의 오류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를 경유하고, 정보를 통해서, 정보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더 잘 보려고 혼자서 명상에 잠겨 자기의 생각을 말하려 들 때 새로운 시네필들에게 그 노력이 일종의 영화적 문맹이거나 혹은 부질없이 관념적인 잡담처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 혹은 지식이 이들을 간섭하려들 때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보는 쪽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할리우드영화가 있다. 이제 영화를 볼 때 시각적 플롯이나 시간적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코드를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코드를 놓치면 더이상 영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MTV는 새로운 감상방식을 교육했고, 게임은 내용보다 룰이 중요한 플롯을 만들었으며, (펄프 소설과) TV와 팝송과 만화는 영화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멀티플렉스는 거의 테마파크가 되었으며(혹은 그 역을 성립시켰으며), 속편 시리즈물은 영화를 박스 세트로 부풀렸고, 웹은 지구상의 모든 관객에게 각자 자신의 ‘사이버 지면’을 가진 블로그 영화평론가로 만들었으며, DVD 서플은 해설로 해석을 대체하였고, 유튜브는 명장면 발췌의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영화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의 일부가 되었다.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임 낫 데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번 보는 쪽보다 웹 사이트를 뒤지는 쪽이 낫다. 이제는 검색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선택하느냐가 얼마나 적합한 미학적 용어를 알고 있느냐보다 그 영화의 핵심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이 새로운 영화들의 핵심은 정보를 미학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 미국영화, 말 그대로 정보의 바로크적 네트워크.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이상한 태도 중 하나는 할리우드영화가 바보 같다고 그냥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다. 사태는 정반대이다. 바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위대한가?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정보로 이루어진 미국영화가 단지 하부의 뇌만을 자극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부의 뇌를 자극하는 영화만 다루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머리 안에서 영화가 작동한다면 그때 상부와 하부는 동시에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한쪽없이 다른 한쪽이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표현주의영화들은 필름누아르와 하드보일드와 공포영화와 뒤섞였으며, 러시아 몽타주영화들은 갱스터영화들과 뒤섞였으며,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영화들은 멜로드라마와 뒤섞였으며, 네오리얼리즘영화들은 텔레비전과 뒤섞였으며, 모더니즘영화들은 MTV와 뒤섞였으며, 홍콩영화들은 액션 미장센이 되었으며, (… 등등) 변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미국영화의 ‘지금’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동시대 영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데없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상황은 거의 전면적이고 게다가 ‘여기’서 재생산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저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그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혹은 당신의 컴퓨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동의를 제안하는 것이다. 같은 말의 다른 테제. 나는 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 미국영화의 전술 앞에서 우리가 새로운 유격전을 벌이기 위해 재빨리 함께 새로운 사유의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말하자면 이 글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훈련을 위한 사용자의 가이드북을 만들려는 일종의 예비적인 서론으로 읽혀야 한다. 가벼운 몸 풀기, 너무 헤비하지 않게. 약간 성공적이고 대부분 엉성하지만, (스포일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그렇지만’ 전선의 약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미스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른 영화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해를 요구하는 <미스트> (그러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모든 것을 안개 속에 가린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쪽은 투명한데 저쪽은 그냥 하얀 벽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슈퍼마켓 유리창 저편을 쳐다보는 것뿐이다. 마지막에 잠시 안개가 걷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를 보고 있으면 첫 번째 질문은 거기서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게 상관이 없어진 것일까? 여기에는 어떤 유혹이 있다. <미스트>는 영화를 보는 관객을 슈퍼마켓 안에 있는 누구와도 동일하게 다루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안개 너머의 ‘그것’과 어떤 연대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상황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듯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을 구경꾼이라고 말하기에도 다소 애매하다. 이때 관객은 슈퍼마켓 안의 희생자들이나 혹은 ‘그것’ 말고 영화 바깥의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바깥의 누군가? 그렇다. 이때 그 누군가는 이미 이것을 본(것의 반복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 자신이다. 오늘날 제대로 매장하지 않아서 귀환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속의 증후가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이미 우리가 본 영화들의 경험이다. <미스트>는 자신의 부족한 설명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에 떠넘기고, 그런 다음 비슷한 상황을 약간 변주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두명의 군인 시체 앞에서 데이빗이 웨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다그칠 때, “막을 찢자 저쪽 구멍에서 무언가가 나왔어요”라는 대답을 할 때,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그 말은 화면 저 너머의 영화들로부터 당신이 이미 본 것들이잖아요, 라는 대답의 판본으로 읽혔다. 그래서 관객에게 다 설명되지 않더라도 끝내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어떤 우쭐거림 같은 것을 부추기고 있다. 설명되지 않은 설명된 것들, 이라는 어떤 이상한 합의. 우리에게 떠넘긴 설명.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 합의를 끌어내는 일곱 가지 판본이 있다(물론 이것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카모디 부인의 말을 따라 일곱개의 봉인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읽어볼 생각이다).

[전영객잔] 새롭게 사유하라! ②

1. 프랭크 다라본트와 스티븐 킹의 관계로 읽기 첫 번째 판본. 이게 가장 따분하다. 프랭크 다라본트와 스티븐 킹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합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스티븐 킹의 소설을 프랭크 다라본트는 마치 그의 소설의 집사라도 된 것처럼 충실하게 옮겼고, <쇼생크 탈출>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다음 <그린 마일>은 (지루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스티븐 킹의 팬클럽이라면 이 판본은 충분히 따져볼 만한 게임이다. 우선 영화의 절반 정도를 따라갈 때까지 프랭크 다라본트는 매우 충실한 독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모디 부인이 점점 종교적 광신을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부터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핵심은 마지막에 있다. 둘 다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무언한다. 스티븐 킹은 문자의 상태이기는 하지만 ‘희망’(hope)을 제시한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아들로 이루어진 ‘유사 대가족’의 몰살로 끝을 낸다. 그런 다음 갑자기 군대가 나타나 데이빗이 살아났음을 알린다. 이것이 절망인지, 아니면 새 출발의 암시인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홉살인 아들 빌리를 아버지의 손으로 죽이는 것은 어떻게 읽어도 음울하다. 하지만 프랭크 다라본트는 자신만이 이 책의 유일한 독자임을 주장하면서, 이 마지막 장면은 오로지 스티븐 킹 책의 독서 끝에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한다. 증후적 독해? 차라리 신경증적 독서라면 어떨까? 좀더 밀고 나아가서 1980년에 쓴 소설을 2007년에 영화로 옮길 때 각자의 배경이 된 각자의 시대의 대중을 통과하기 위해서 엔딩을 바꾸어야 했는가? 레이건 시대로부터 부시의 시대에로. 그런데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차이? 아니면 원래 스티븐 킹의 소설이 이러하게 끝이 나야 했던 것을 오로지 원작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수정한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에 매달릴 때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 안개가 흐려놓은 것은 진짜 무엇인가? 첫 번째 판본의 변형. 그러므로 만일 <미스트>를 스탠리 큐브릭이 찍었다면?(<샤이닝>) 브라이언 드 팔마가 찍었다면?(<캐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찍었다면?(<데드 존>) 존 카펜터가 찍었다면?(<크리스틴>) 로브 라이너가 찍었다면?(<미저리>) 조지 로메로가 찍었다면?(<크립쇼>) 브라이언 싱어가 찍었다면?(<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괄호의 자리에 호명된 영화 대신 <미스트>가 각자의 그 영화를 만들었을 때 있었다면? 2. 히치콕의 <새> 버전으로 읽기 두 번째 판본. 주유소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에 갇힌 다음 ‘그것’이 찾아든다. 이 상황은 거의 즉각적으로 히치콕의 <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멜라니는 슈퍼마켓에 갇히고, 그런 다음 주유소가 폭발하자 새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물론 히치콕의 <새>는 슈퍼마켓에서 내내 진행되지는 않지만 미치의 집에 갇혀서 새들의 마지막 공격을 받는다. 그런 다음 미치와 멜라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차를 타고 해변가 마을을 빠져나간다. 희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 너머의 햇빛은 여기를 벗어나면 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 마지막 장면은 프랭크 다라본트보다는 스티븐 킹의 버전에 가깝다(당연히 스티븐 킹은 <새>를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미스트>를 <새>와 비교하는 대신 <새>의 버전으로 다룬다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새>를 ‘새 없는’ 이야기로 읽을 때 미치가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멜라니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다시 쓸 수 있는 것처럼, 만일 <미스트>에서 ‘그것’들은 단지 맥거핀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데이빗을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다시 세우는 이야기로 읽게 된다면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잠시 등장한 다음 영화가 거의 끝날 때 거미줄에 묶인 아내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라는 난처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미스트>는 데이빗의 가족을 두번 부수는데 한번은 데이빗의 실제 가족이고, 다음 한번은 데이빗의 유사가족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곤충들의 개입이다. 데이빗이 그의 곁에 다가온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 아만다와 서로 결정적으로 이끌리는 순간 슈퍼마켓에 날아온 ‘그것’은 거대해진 불나방들이다. 그 둘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 마치 그 불길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곤충들이 날아들고 슈퍼마켓 안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마치 아만다에 대한 데이빗의 어떤 감정적 물(物)의 즉각적인 현신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다음 데이빗을 괴롭히는 문제는 당연히 가족이라는 끈이다. 그때 데이빗을 성가시게 만드는 ‘그것’은 거미들이다. 끊임없이 거미줄을 뽑아내고 데이빗을 붙잡으려 든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돌아갔을 때 그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거미줄에 칭칭 묶인 그의 아내의 시체다. 그런 다음 데이빗은 새로운 가족을 꾸밀 수 있을까? 그러나 데이빗은 더 나쁜 선택 앞에 직면하게 된다. 안개는 그의 눈앞에서 끝나지 않고, 이 오리무중 속에서 결국 아들과 아만다와 (할머니)이렌느와 (할아버지)밀러를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몰살한다. 그리고 혼자서 ‘그것’의 희생양이 되기를 기다린다. 말하자면 <미스트>에는 가족의 몰락이라는 테마가 있다. 이때 질문은 단순하다. 이 욕망의 대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공허한 저항의 몸짓 속에서 절망적인 엔딩이 사실상 가족으로부터 데이빗을 완전하게 탈출시키는 알리바이라면 문득 <미스트>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포스터를 그리는 데이빗이 지금 거의 완성을 눈앞에 둔 그림은 외로운 총잡이 롤랜드다(IMDb.com ‘잡동사니’ 정보에 의하면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존 카펜터의 <안개>(The Fog)가 있단다).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고, 갑자기 닥친 폭우가 그 그림을 완전히 망쳐놓는다. 만일 그 그림이 데이빗의 욕망의 지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림이 데이빗의 현실 속의 행동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밑그림이라면? 그때 아만다는 팜므파탈이라기보다는 데이빗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죄의 전이를 대신 떠안는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그때 데이빗은 아들 빌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 좀비영화로 읽기 세 번째 판본. <미스트>는 괴물영화인가, 좀비영화인가? ‘그것’의 형상은 괴물이지만 행동은 좀비처럼 보인다. 그때 <미스트>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거의 리메이크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마을을 점령하고, 그런 다음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할로윈 데이도 아니고, 13일의 금요일도 아니다. 그냥 오늘 안개가 마을을 채우고, 그런 다음 안개 저편에서 ‘그것’들이 공격을 해온다. 내 관심은 이들이 공격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 때맞춰 공격하느냐는 것이다. 때를 안다는 것. 좀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아무 계획이 없으며, 전술도 없다. 사실상 좀비는 허깨비들이다. 그런데 항상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들이 습격해야 할 때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 다음 우리를 경유하여 ‘그것’들은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이때 나는 이 말을 약간 수정하고 싶어진다. 안개 저편에서 ‘그것’이 습격해온다기보다는 안개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미스트>를 읽을 때 대부분 기대고 있는 것은 이 판본이다. 이때 안개가 만들어내고 있는 ‘그것’은 슈퍼마켓을 공격해오는 문어처럼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촉수달린 괴물, 날개달린 곤충, 거미들,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슈퍼마켓 안에서 미쳐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슈퍼마켓 안으로 몰아넣은 다음 계속해서 사람들을 자극한다. 물도 충분하고, 먹을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생필품이 있으며, 공간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여기서 바깥이 잘 보이는 슈퍼마켓의 커다란 통유리 창만이 여기와 저기를 나누고 있다. 안개로 가득 차서 차라리 벽처럼 보이는 저기. 나가면 몸이 순식간에 두 동강난 채 돌아와야 하는 안개 속. 매번 다른 ‘그것’들. 이 순간 영화적 게임은 단순하다.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거의 통제 불능까지 밀어붙인 다음 마치 이 내부의 드라마의 진행을 잘 아는 것처럼 한껏 미루었다가 때로는 조금 일찍 때로는 조금 늦게 안개 저편으로부터 대답이 온다. 물론 그 대답은 무자비한 공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 안개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부등가교환의 대칭이다. 관객은 바깥에 있는 ‘그것’보다 안에서 (전반부) 설명에 귀기울이지 않는 뉴욕에서 온 흑인변호사 브렌트와 (후반부) 종교적 선동을 하고 있는 카모디 부인을 훨씬 미워하면서 이 영화의 악당의 자리에 배치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 상황에서 카모디 부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을 카모디 부인이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카모디 부인이 없다고 해서 이들이 안전한 것도 아니다(혹은 그럴 능력도 없다). 이때 <미스트>는 도착적 경제의 방식으로 희생의 대상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브렌트와 카모디 부인은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대답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악의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이는 나쁜 행동. 그러나 그 행동이 임무에서 나온 것이며, 그 임무가 법과 종교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때 법과 종교를 동시에 부정한 다음 데이빗과 그의 일행은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것도! 그들은 그 다음에 안개 속의 무아지경을 헤맨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미스트>는 역설적으로 차라리 안개 이쪽 편에 법과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쪽과 그 둘을 부정한 다음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으로 가는 것,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내기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내기가 끝나면 더 나쁜 다음 내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음산한 파시즘의 도래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 방어선을 포기했을 때 마주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을 보는 편이 나은지를 선택하라는 내기로 볼 것인지는 당신의 판단이다. 4. 생태파괴가 부른 재난영화로 읽기 네 번째 판본. 이것은 약간 고지식하다. 그냥 제목 <미스트>를 믿는 (척하는)것이다. 말하자면 을 보면서 얻은 교훈을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음모론의 신도들은 이야기에 관점의 이동을 통해 일종의 왜상으로 보는 대신 그 자체를 믿음으로써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다음 약간의 재치를 부린다. 자, 스티븐 킹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믿습니다. 다만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나에게 설득시킨다면. 믿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에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복잡한 음모론과 과학에 대한 비관적 정보들과 저 너머에 총체적인 그 어떤 계획이 있다는 신념이 뒤죽박죽이 된 삼위일체를 세우면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개를 믿을 만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판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제쳐두고 “안개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린다(그렇게 함으로써 안개를 맥거핀으로 생각하는 입장과 불화에 빠져든다). 물론 음모론은 현대판 사이비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이 의심이 어떤 위로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미스트’라는 기표의 형식적인 기의는 ‘안개’지만 실제적인 기의가 ‘사실은’ (사실은?) ‘알고 보니’ (정말?) ‘공해’였다, 라는 환경주의적인 생태학적 의심으로 바꿔치면 갑자기 모든 플롯의 황당무계함이 어떤 상징성의 인과관계를 획득하고 (사이비) 과학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그것’들은 환경파괴의 희생으로 인한 생물학적 기형의 결과이며, 인간들은 자신이 파괴한 환경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결과 앞에서 이성과 종교는 무기력하며, 후회는 때가 늦었다. 하지만 … 등등. 이때 <미스트>는 괴물영화나 좀비영화가 아니라 재난영화라는 장르로 재빨리 옮겨간다. 흥미로운 것은 <미스트>가 재난영화가 되었을 때 일차적인 희생자들은 슈퍼마켓 이쪽이 아니라 유리창 저쪽의 ‘그것’들이며, 이쪽의 사람들은 이차적인 희생자들이자 간접적인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자, 무엇이 ‘그것’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그 원인의 고갈이 이루어지자,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져서 멈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집단적으로 자살한다. 그때 자살의 행위가 희생자로부터 사실은 자신들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결정한 선택이라면? 말하자면 멈춘 자동차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를 이해한 것이라면? 만일 이 자살이 공해를 만들고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인간들의 잘못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죄의식의 표현으로 읽으려고 시도한다면? 그때 데이빗만이 살아남은 결과가 ‘안개’의 진정한 메시지라면? 당신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이때 당신의 자리에 인간이라고 말을 바꾸면 좀더 근사해진다). 그러므로 공존을 모색하라! 하지만 어떻게? X파일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가지씩 있다. 좋은 소식은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그 비밀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5. 포스트 9·11로 읽기 다섯 번째 판본은 이것을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이건 좀 웃겨 보이는데 슈퍼마켓을 미국이라고 환유의 자리에 가져다놓는 것이다. 이를테면 1963년에 만들어진 <새>에서 ‘새들’의 공격을 쿠바의 미국 침공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읽는 글이 만연한 적이 있다(그리고 이러한 시사적 읽기를 정치적 읽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같은 방식으로 ‘안개’를 포스트 9·11로 쳐다보는 것이다. 요즘은 문화 담론에서 이라크가 인기다(그러나 이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스티븐 킹이 1980년에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잠시 눈 감아야 한다). 사실 슈퍼마켓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근사한 비유다. 슈퍼마켓 안에는 마치 중계방송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다른 계층, 인종, 남자와 여자, 직업, 나이, 그리고 종교까지 골고루 배치해놓았다. 그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린 다음 자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행을 위해서 슈퍼마켓 주변을 안개로 둘러싼 다음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위협 아래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매번 새로운 ‘그것’이 공격을 해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정말 목표로 하는 것은 다문화주의인가? 만일 그것을 핑계로 내세워서 법적인 형식의 절차(브렌트)와 종교적인 믿음의 담론(카모디 부인)을 고의적으로 과장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다음 그것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기 위해서 던져진 미끼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프랭크 다라본트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것’들이 공격해왔을 때 문득 카모디 부인에게 달라붙은 곤충이 유심히 만져보더니 마치 그녀를 알아본 것처럼 그냥 무사히 내버려두고 떠나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것이 우연인지 응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랭크 다라본트는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런 예외적인 순간을 포함한 ‘그것’(들)의 공격 방식은 예고없는 테러처럼 보이며, 슈퍼마켓 안의 토론은 번번이 중단된다. 말하자면 슈퍼마켓 안의 민주주주의적 절차를 방해하는 것은 안개 너머의 ‘그것’이다. 마치 세계화에 대한 그 어떤 민주주의적 절차를 포기하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테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그래서 9·11 테러는 빈 라덴이 부시와 짜고 벌이는 사기극이라는 설은 꽤 구체적으로 많은 글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것’들은 때를 맞춰 공격해온다. 이때 이 판본에서는 안개보다 유리창이 놀랄 만큼 구체적인 비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화에 무척 열린 입장을 갖고 있다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슈퍼마켓의 유리창은 공격을 당하는 이쪽을 투명하게 모두 보이게 전시하고 있다. 반면 유리창 저쪽은 안개에 가려서 무언가 기분 나쁘고 섬뜩한 비밀을 지닌 채 음험하게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여기에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슈퍼마켓 안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으며, 안개는 저쪽의 ‘아마도’ 폐허가 되어버렸을 황폐한 풍경을 감추고 있다. 마치 이라크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북한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판본은 여기서부터 정말 재미있어진다. 왜냐하면 이 논의를 계속하기 위해 이제부터는 영화가 논쟁적 불화를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본은 슬라보예 지젝이 나보다 백배는 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는 지젝에게 맡겨두기로 하자. 6. 텔레비전의 문법으로 읽기 여섯 번째 판본은 <미스트>가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첫 장면에서 폭우가 내린 다음날 아침 집을 떠나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이상한 줌이 나온다. 꼭 그것을 드러내놓고 찍은 것은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갑자기 망원렌즈로 잡은 다음 마치 인물을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잡아당긴다. 전체를 그렇게 찍은 것도 아닌데 종종 ‘느닷없이’ 그렇게 찍었다. 처음에는 <미스트>가 저예산영화이기 때문에 규모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연출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절반이 지나도록 슈퍼마켓 안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이 공간을 일종의 스튜디오처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 안에 들어온 모든 인물들이 어차피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통제할 필요가 없는데도 구태여 그렇게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깥은 온통 안개뿐이기 때문에 <미스트>는 바깥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야기는 바깥에 나가면 위험하다, 는 전제를 놓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연출자 입장에서는 반대로 바깥을 무시해도 된다. 도대체 이 줌은 무엇일까? 그건 줌으로 ‘무엇’처럼 보이고 싶기 때문에 동원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유사 효과 때문이다. 좀더 이상한 것은 테크니컬러로 찍었는데도 매우 흐릿하게 현상했다는 것이다. 바깥은 안개 속이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것이 투명한 유리창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낮의 채광상태가 가장 나쁜 상태에서 진행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런 다음 공간의 폐쇄성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데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그건 표정을 잘 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미학적인 선택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전체 공간의 마스터 숏도 없고 공간 설정은 유리창을 기준으로 잡고 세로로 진행된다. 그래서 인물들의 동선은 앞과 뒤로만 움직이고, 종종 그게 뒤엉켜서 이 인물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그래봐야’ 슈퍼마켓 안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공항 터미널이지만 훨씬 큰 공간의 이동선을 정확하게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스필버그의 <터미널>과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미스트>는 이상할 정도로 단조롭게 찍힌 영화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문득문득 끼어드는 페이드다. 그게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여기서 일주일씩 머무는 것도 아닌데 시간의 경과를 왜 설명해야 하는가) 종종 이런 영화에서는 가까스로 만든 긴장을 중단시키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편을 권장한다. 그렇다고 페이드를 이용해서 트릭을 쓰거나 그 사이에 어떤 감정적인 변화의 추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어떤 리듬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개입한다. 그냥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이나 <그린 마일>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조롭게 만들어졌다. 왜 그렇게 찍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스트>는 텔레비전처럼 찍은 영화이다. 아니, 차라리 영화관보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영화다. 혹은 텔레비전을 보는 방식으로 보아야 하는 영화다. 나는 셋 중 어느 쪽이 가장 좋은 답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미스트>가 영화와 텔레비전 사이를 흐릿하게 만들 목표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프랭크 다라본트 자신도 이런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전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스탭을 구성했다. 프로덕션디자인을 한 그레고리 멀튼, 촬영을 한 론 시미트, 편집을 한 헌터 M. 바이어는 프랭크 다라본트가 <마제스틱>을 찍은 다음 텔레비전 시리즈 <레인>과 <쉴드: XX 강력반> 에피소드를 작업할 때 함께 일한 스탭들이다. 할리우드에는 오늘날 자신이 텔레비전 드라마인 줄 아는 많은 영화들이 있다. <러브 액츄얼리>(2003)는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예일 것이다. <클로버필드>는 자기가 유튜브인 줄 아는 영화다. 점점 더 영화의 존재론은 외양과의 틈새 사이에서 위협받고 있으며, 그것이 위험인지 혹은 진화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꾸만 영화는 이 외양의 하위 분할 속에서 새로운 정보의 모델들과 뒤섞이고 있다. <미스트>는 새로운 영화는 아니지만 (이동진의 관용구 ‘재미있는 척’을 다소 변주하여) 새로운 척하는 영화이기는 하다. 7. 안개를 가스로 놓고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읽기 일곱 번째 판본만 나에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미스트>를 미루어두었다. 이제 이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스포일러에 대한 두려움없이 비로소 이 판본을 이야기할 생각이다. 나는 스포일러 때문에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미스트>에서 안개의 카니발리즘(의 스펙터클)을 본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정한’ 취향이다. 내가 <미스트>에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은 데이빗이 그의 아들 빌리와 아만다, 이렌느 할머니, 밀러 할아버지를 ‘안락사’시킨 다음 죽음을 기다리며 괴물을 기다리는데 안개 너머로 탱크가 나타나서 구조되었음을 알린다. 이 장면 자체는 별로 놀랍지 않다. 슈퍼마켓을 떠난 다음 안개 속을 달리는 자동차를 방향을 맞추지 않고 세번에 걸쳐 반복 편집했을 때 이 엔딩은 예고된 것이다. 이 편집은 사실 계속 그 자리에 있다는 뜻이며, 그런 다음 ‘그것’들이 저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롱숏으로 볼 때 그 빈자리를 무엇이 대신 채울 것이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이 영화의 편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다음 장면에서 데이빗 앞을 트럭이 지나간다. 그 트럭에서 머리 짧은 한 여자가 두 아이를 안고 가면서 데이빗을 냉랭하게 쳐다본다. 그녀는 거의 영화 초반부에 슈퍼마켓을 가장 먼저 떠난 두 아이의 엄마다. 두 아이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큰애가 산만해서 둘째를 돌보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브렌트에게 도움의 시선을 던지고, 카모디 부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군인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아들 빌리를 껴안고 쭈그리고 앉은 데이빗에게 마지막 간청을 한다. 데이빗은 이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차마 말을 꺼내길 주저하면서 “보시다시피 저도 지금 아이 때문에”라고 그 눈길을 피한다. 그러자 이 젊은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참으로 모두들 매정하군요”라는 한마디 말을 남긴 다음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금방 이 젊은 엄마를 잊었고, 대부분 아마도 그녀가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은 그녀가 생존했음을 알린다. 내 질문은 그녀가 어떻게 살았을까, 가 아니라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는 것이다. 그녀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미스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영화인가?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미스트>는 안개가 드리워진 ‘이전’과 걷힌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생존이 확인되는 순간 갑자기 ‘이전’과 ‘이후’가 하나로 묶인다. 여기에는 체험의 공유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공포를 공유할 것인가, 생존을 공유할 것인가? 그녀는 책임을 물을 것인가, 증오를 상대화할 것인가? 그녀가 거기 살아 있을 때 데이빗은 죽은 아들을 위해서 어떤 변명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미스트>를 정말 감당할 수 없게 밀고 가는 것은 슈퍼마켓을 포로수용소로 설정한 다음 안개를 가스로 놓고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읽는 것이다. 나는 젊은 엄마의 짧은 세버그 헤어스타일을 보면서 할리우드영화들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여자들을 다룰 때 항상 관습적으로 보여주는 동일한 머리 모양이 떠올랐다. 물론 <미스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질문을 밀고 갈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이라는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 만일 <미스트>가 우리에게 단 한 가지만이라도 진지하게 질문을 제기했다면 나는 이 마지막 숏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이 예술적이건 아니면 상업적이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 살인을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방어해야 할 숏은 무엇인가? (첫 번째 유격훈련 끝)

[현지보고] 3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스페인 보물을 찾아라!

1715년. 스페인 여왕의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실은 채 허리케인을 맞아 카리브해 바닥으로 사라져버린 아우렐리아호. 이후 잠자고 있는 보물은 예술작품과 당시 문서들을 통해서 희미하게 그 그림자만 드리운 채 전설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핀과 테스에게는 처음 둘을 맺어줄 만큼 특별한 꿈이었다. 8년 뒤, 여전히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에서는 무책임한 남편이 되어버린 핀과 현실에 지친 테스. 결국 테스는 핀이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이혼 법정에서 도장을 찍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핀과 함께 나타난 것은 3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보물로 그들을 인도할지도 모르는 부서진 그릇 조각.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그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테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으로 성공적인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매튜 매커너헤이와 케이트 허드슨이 서로 옥신각신 싸워가면서 보물을 찾아나선 핀과 테스로, 이들 부부의 모험에 본의 아니게 동참하게 되는 억만장자 나이젤 역으로는 할리우드의 관록있는 배우 도널드 서덜런드가, 나이젤의 철없는 어린 딸로는 짐 자무시 감독의 <브로큰 플라워>에서 강한 이미지를 남겼던 알렉시스 지에나가, <베오울프>로 존재감을 한껏 높인 레이 윈스턴이 이제 300년 전에 사라진 스페인 왕실의 보물탐험에 뛰어들었다. 핀의 배가 폭발하는 장면을 다소 느긋한 호흡으로 보여주면서 시작되는 <사랑보다 황금>은 박진감 넘치는 액션으로 매 순간 가슴을 죄는 어드벤처영화라기보다는 카리브해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틱코미디에 가깝다. 각각의 인물들은 전설의 보물을 찾아나선 모험을 통해 자신들을 둘러싼 관계, 소원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나이 많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라든가, 너무나 사랑하지만 같이 있다보면 서로 돌아버릴 것 같은 남편과 아내인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보물의 위치를 알아내는 결정적인 순간이 300년 전 스페인 왕실의 가족사의 비밀, 보물처럼 역사 속에 묻혀버린 가족애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분명해진다. 카리브해의 황금빛 태양과 맑고 푸른 바다가 배경인 <사랑보다 황금>은 허리케인 때문에 카리브해 대신 호주에서 9개월에 걸쳐 대부분 촬영되었는데, 수중 폭파장면은 촬영에 필요한 물탱크의 규모가 너무 커서 따로 제작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너무나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바다. 그러나 그 수면 아래 있는 ‘이루칸지’라 불리는 독해파리 때문에 촬영 막바지에 제작진은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보다 황금>은 결국 카리브해로 돌아가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랑보다 황금>의 라운드 테이블은 샌타모니카의 호텔 카사 델 마에서 이루어졌다. <스위트 앨라바마>와 의 박스오피스 성공으로 수많은 프로젝트 제의를 받아왔다는 앤디 테넌트 감독을 시작으로 도널드 서덜런드, 매튜 매커너헤이와 케이트 허드슨과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앤디 테넌트 감독 인터뷰 "코미디에서 중요한 것은 웃음의 호흡이다" -처음부터 매튜 매커너헤이와 케이트 허드슨을 염두에 두었나. =원래 리즈 위더스푼을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리즈와는 오랜 친구이다보니까. 알다시피 이런 장르는 상대 남자배우 캐스팅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매튜가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럼 리즈 대신 케이트가 어떨까 싶었다. 리즈는 호주에 가서 촬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케이트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육체적으로 힘든 연기도 마다하지 않는데다가 이 둘은 전작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적도 있는 등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알다시피 코미디 연기에서 중요한 것은 웃음의 호흡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케이트는 영리한 배우다. 재미있으면서도 순간순간 또 다른 깊이를 더해낼 줄 안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케이트와 도널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경우, 참 아름다운 순간이지 않나. -그 커플이 특별한 점이 있다면. =둘은 티격대는 남매 같다.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이를테면 핀이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테스의 지도가, 정확히는 지도를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서로 상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에 둘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상대의 뚜껑이 열리는지도 안다. 사실 이들 둘은 보물 자체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역사를 사랑하는 커플이다. 미스터리에 끌리는 두 사람은 서로 싸우지만, 결국 함께할 수밖에 없다.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번 작품이 이전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간 로맨틱코미디를 연속으로 만들면서 이번에는 좀더 큰 규모의 작품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로맨싱 스톤>이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어드벤처코미디나 코미디스릴러에서처럼 두 장르를 혼합한 작품들 말이다. 한동안 이런 장르의 영화가 나오지 않기도 했고. 그다지 심각하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재미있는 영화라고나 할까. 그 두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작품. 이를테면 <러시아워>는 액션코미디이지만 기본적으로 액션영화이기 때문에 10분마다 액션신이 들어간다. 반면, 나는 실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어쩌다보니 모험에 뛰어들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 말이다. 주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캐릭터들이 운전할 줄 모르는 비행기에서 떨어져 내려야만 한다라든지. 그러니까 클라이맥스에서 캐릭터가… 대체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지라고 되묻게 되는 그런 상황. 그게 재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보물 사냥꾼은 깨닫는 것이다. 보물을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사실 내 보물은 내 옆에 있는 아내구나. 뭐 이런 깨달음이랄까. 나이젤 역의 도널드 서덜런드 인터뷰 "멋있다고? 옷을 벗으면 전혀!" -프로덕션 노트에 보면, 캐스팅 당시 제작진에게 이번 캐릭터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써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내용이었나. =그 내용은… (무척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꼭 이번 작품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내게 시나리오를 읽으라고 보내오면, 나는 에이전트에게 언제나 이 캐릭터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고, 어떤 점이 내키지 않는지에 대한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그래야 에이전트도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에이전트 보라고 쓴) 그 편지가 제작진에게도 들어간 모양이군. 원래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쓸데없이 긴 글을 쓰는 경향이 있다. -나이젤이라는 캐릭터는 어떤 면에서 끌렸나. =그를 둘러싼 여성들과의 관계, 나아가 가족과의 관계에는 딱 집어낼 수는 없지만 마음에 다가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판타지라는 것… 판타지 그 자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제까지 겪어왔던 사람들 가운데 그 정도 재력이 있는 사람들 중 300년 전 가라앉은 보물을 찾아나서겠다라는 판타지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싶었다. 오래전 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을 찾으러 나서는 것을 통해 어쩌면 소원해진 딸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 멋있지 않나. 오래전에 <조애나>라는 작품에서 내가 맡았던 영국인을 연상케 하는 면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울림이 있는 캐릭터다. -매튜 매커너헤이와 케이트 허드슨과의 연기는 어땠나. =매튜와는 이전에도 한번 연기한 적이 있고, 케이트는… 케이트 엄마랑 잘 알아왔으니까. 둘 다 좋은 아이들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전과 오늘날의 영화에서 달라진 점을 느낀다면. =요즘 감독들은 기껏해야 14인치 모니터 화면만을 들여다보며 컷을 외치는 것 같다. 예전 감독들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로 그 공간에, 그 순간에 함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피부로 느끼는 차이는 관객이다. 60∼70년대 관객을 생각해보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존 F. 케네디가 암살되고, 로버트 케네디가, 마틴 루터 킹이 총탄에 쓰러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지금과 같은 파워를 가지지 않았을 때, 관객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 속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때의 영화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관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2살인데도 여전히 멋있어 보인다. =옷을 벗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웃음) 적어도 140살까지는 계속 연기할 테니까 반 정도 온 셈인가? 연기란 내 인생의 즐거움이니까. 주연 맡은 케이트 허드슨과 매튜 매커너헤이 인터뷰 "롤러코스터 속에서의 순간을 즐기려 한다"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가. =케이트 허드슨: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나라는 이미지가 있다.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거기에 얽매이기 시작하다보면 버텨낼 수가 없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빌리 허드슨, 골디 혼)이나 그들의 친구들을 보면서 그 이미지가 얼마나 무상한지 늘 지켜보며 자랐다. 결국 나를 단단하게 붙들어주는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다. 이 산업은 언제나 끊임없이 움직인다. 롤러코스터처럼. 어느 날은 하늘로 비상하다가도 다음날은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냥 내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의 관점을 늘 유지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롤러코스터 속에서의 순간을 즐기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파파라치가 따라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매튜 매커너헤이: 공공장소에서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나 내 집까지 침범하는 것에 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그러면 그들도 다 알아듣는다. 나는 레스토랑 같은 곳에 나타나서 보란 듯이 데이트하며 포즈를 잡는다거나 그러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 말에 케이트 허드슨이 “정말?”이라며 웃는다.) -영화에서 둘 다 노출이 많은 옷차람인데, 부담스럽지 않았나. =케이트 허드슨: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나만 그렇게 여기는지 몰라도, 어떤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오늘은 정말 몸상태가 별로인데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남자들이야 그냥 훌렁 벗어버리면 될지 몰라도 여자들은 다르니까. 필라테스를 계속했다. =매튜 매커너헤이: 전혀. 메이크업이나 의상 때문에 차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싫어해서 영화 내내 간편한 옷차림인 게 좋았다.

여자라서 더 절절해요

연기파 선수들이 ‘헛둘헛둘’ 뛰는 주말연속극의 새로운 만찬이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제법 배부르다. 오래 입은 속옷 고무줄 같은 진도에 등장인물도 버글버글한 연속극의 마라톤 레이스는 ‘닥본사’의 충성심을 계속 발동하지 않아도 괜찮은, 후덕한 군살을 자랑한다는 게 특징. 그런데 지난 2월2일 나란히 출발한 KBS2 <엄마가 뿔났다>와 MBC <천하일색 박정금>은 시작부터 자장면과 짬뽕처럼 선택의 갈등을 자아내더니 본방과 재방으로 두루두루 맛보고 싶은 매력마저 드러내고 있다. <엄마가 뿔났다>는 김수현 작가표 가족드라마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데 한줌의 주저도 보이지 않는다. 목욕탕집에서 세탁소집으로 업종 변경한 대가족이 하루 쌀소비량이 궁금할 만큼 아침부터 꼬박꼬박 따뜻한 밥과 국을 챙겨먹으며 크고 작은 갈등과 권태가 산재한 일상을 복각해내고 있다. 김수현 작가의 똑똑이 어법 페르소나 가운데 한명인 배종옥이 얄궂게도 ‘박정금’으로 출동한 <천하일색 박정금> 역시 아줌마 여형사의 각 잡지 않은 활극 등 짬짬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면서도 가족의 이름으로 얽힌 징글징글한 인간사를 다루는 주말극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점잖게 방관자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성들에 비해 김혜자, 배종옥 등 여성들이 분노, 한숨, 독기, 연민, 파이팅 등으로 부지런하게 인생의 고락을 타고 있는 대목은 흥미롭다. 또 그들은 그 진부한 감정의 군더더기로 가슴을 때리고 있다. 제 이름보다 ‘엄마’나 ‘에미야’라는 호칭이 익숙한 60대부터 엄마이면서 여성인 30대까지 여물디 여문 완숙한 암컷들은 인생이 그냥 머물거나 대충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 못하고 있다. 웬만한 경제력의 배필과 결혼해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평범한 희망마저 차례차례 배반하는 자식들 때문에 기막히고 황당한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혜자는 ‘누군들 제 인생이 맘에 들까’와 같은 긍정과 포기의 넋두리, 걸레 휙 집어던지기와 같은 ‘뿔내기’로 텔레비전 앞 엄마들의 육성을 예리하게 떠내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에는 조금 더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후련한 공명을 낸다. 첫아들은 실종됐고, 범인 검거 실적도 좋지 않은 이혼한 여형사 배종옥은 신파의 눈물에 익사할 상황에서도 꼿꼿하고 씩씩하게 건강한 생활력을 파닥거린다. 비운의 조강지처이자 박정금의 모친인 나문희는 걸핏하면 동거인 박준규와 툭탁거리며 도도한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고 있다. 조강지처의 안방을 차지한 ‘청주댁’ 이혜숙의 등등한 독기, 늘 화가 난 얼굴로 휘청거리는 ‘사공유라’ 한고은의 막돼먹은 방어벽 등도 행복한 생존의 욕구가 번득여 미움과 연민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 인생의 후반부를 관통 중인 이들은 답답한 인내나 대책없는 폭발만으로 아물 수 없는 과거의 상처와 예기치 않는 현재의 지뢰를 마주보지 않는다. 중얼거리거나 이글거리는 등 목소리의 볼륨은 다르지만 저마다 부릅뜨고 부딪친 뒤 포기하는 정면돌파로 자잘한 인생의 파도를 넘고 있다. <엄마가 뿔났다>와 <천하일색 박정금>은 주름살과 비례해 절절해지는 엄마의, 여자의 뜨거운 가슴을 경쟁적으로 내밀고 있다.

[What's Up] 군부세력 해치우는 람보를 보고 싶다

버마(미얀마)의 국민들은 람보를 절실하게 원한다? <텔레그라프> 등 서구 외신들은 최근 버마인들이 <람보4: 라스트 블러드>의 불법복제 DVD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람보4…>는 버마의 반정부단체 카렌민족연합을 돕기 위해 파견된 미국인 종교봉사단원을 구출하는 람보의 활약상을 그리는 영화. 버마 국민들이 이 영화를 애타게 찾는 이유는 람보가 버마를 지배하고 있는 군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우기 때문이다. 버마 군부독재 정권은 지난해 9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민주화 조치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 2월15일에는 카렌족 반군의 지도자가 타이에서 암살당하는 등 혼란스런 정국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버마사회의 밑바닥에서 불고 있는 ‘람보 열풍’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람보를 통해 대신 해소하려는 국민들의 욕구가 반영된 듯 보인다. 물론 버마 군정이 이를 그대로 둘 리는 없다. 외신들은 “많은 고객이 <람보4…> DVD가 없냐고 계속 묻지만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경찰은 이 영화를 팔 경우 7년형을 살게 된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양곤의 한 불법 유통업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지 분위기를 소개했다. 다른 판매업자는 “매일 20명 이상이 이 DVD가 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이 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보고 싶지만 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람보4…>의 주연이자 감독 실베스터 스탤론의 귀로도 흘러들어갔다. 그는 “이상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들 대단히 용기있는 국민들은 미국영화에서 어떤 주장을 찾았다. 내가 영화를 한 이래 가장 뿌듯한 순간 중 하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물론 스탤론의 지능으로도 버마 국민들이 실제로 미국의 람보전사들이 버마를 휘젓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이해는 될 것이다.

[김수진] “시나리오 보고 모두가 반대한 영화였다.”

일일 관객 수가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추격자>의 흥행기세로, 제작자인 김수진 영화사 비단길 대표는 축하전화를 받기 바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로 걸고 만든 영화는 최근 <음란서생>(2006)과 <추격자> 두편이지만, 그에게 축하전화를 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김수진 대표가 지난 20년간 영화계에 몸담고 지내면서 알아온 지인들이거나 사업 파트너들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영화일을 시작한 김수진 대표는 당시 하명중영화제작소, 신도필름 등을 거쳐 20대 초반에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회사를 꾸릴 만큼 이미 당찬 사업가였다. 그는 <꽃잎> <나쁜 영화> 등 한국영화 기획에 참여했고 <레옹>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영화를 수입해 흥행시켜서, 한국에 짧게 프랑스 예술영화 수입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올해로 영화일을 한 지 꼭 20년이 된 그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충무로 원로”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듣지만, 6년여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본격적인 제작에 뛰어든 신인 제작자이기도 하다. 1966년생. 이제 한창 일할 때인 젊은 여성제작자로서 김수진 대표를 두고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뭘 해도 할 사람”이라는 것.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분명한 불같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호불호로 갈리가 한다는 김수진 대표를 만나기 전, 다소 두려운 맘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햇볕 좋은 홍대 부근의 작은 카페에 들어앉아 호랑이 한 마리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으나, 그곳에 나타난 건 경쾌한 초록색 스웨터에 트레이닝 점퍼 차림을 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오늘은 머리도 감고 빗질도 하고 왔다”며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머릿결을 매만지던 김수진 대표는, <추격자> 제작과정을 비롯해 길고 곡절 많은 개인사를 세 시간 동안 빠르게 쏟아놓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뭘 쉽게 얻을 운은 아닌가봐요. 그런 행운은 나한테 없는 것 같아. 편안한 걸 할 팔자가 아닌 거지.” -오늘(2월27일) <추격자>가 200만명을 넘었다. 무엇보다도 평일 관객이 많은 분위기다. =어제도 하루 동안 12만명이 들었다고 그러더라. 지난주 화요일엔 10만명이었으니까 늘어난 셈이다. -어떤 기사에선 벌써 본전 다 뽑았다고 그러던데. =이제 시작이다. 아직 손익분기점도 못 넘었는데.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순제작비가 정확하게 37억5천만원 들었고, P&A비용이 20억원 정도 들 것 같다. 프린트 수가 계속 늘고 있어서. -현재 스크린 수가 몇개나 되나. =450개다. 개봉할 땐 400개로 했다. -처음부터 개봉 규모가 작진 않았다. =쇼박스에서, 우리가 이 영화는 책임지고 벌여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기다려준 팀이 감사하고. 그동안 투자사들한테 얼마나 까였는지. 그거 다 얘기 하려면… 진짜 할 말 많다. (웃음) -어떻게 <추격자>를 만들게 됐는지 그 얘기부터 하자. =2005년 여름 <음란서생> 촬영 직전에 <완벽한 도미요리>를 봤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받은 그 영화. 그걸 보고 (갑자기 저돌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찌르며) “저 감독 무조건 잡아와! 무조건 잡아!” 그랬는데 마침 <음란서생> 제작실장이 그 영화 PD를 해준 거라. 그래서 운 좋게 얼른 잡아올 수 있었다. (웃음) 나홍진 감독에게 뭘 준비할 거냐 그랬더니 그전에도 다른 아이템들로 여러 제작사와 계약을 했는데 다 잘 안 됐다며 나 감독이 풀이 죽어 있더라. 김선일이나 유영철을 소재로 얘기하면서 자주 만나다가 <음란서생> 개봉 직전에 감독이 초고라며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자기가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골방에서 오랫동안 혼자 썼다고. 그걸 저녁을 시켜놓고 읽는데, 읽다가 토할 뻔했다. 숨이 막히고 너무 세고 잔인하고. 문자화된 걸 읽는데도 긴장감이 넘쳤고. 그래서 결국 그 밥을 못 먹고 전화했다. 이거 하자. -<추격자>와 같은 아이템을 하자고 감독에게 먼저 얘기 건넸던 건가. =감독이 그런 얘길 쓰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초고를 보고 같이 하자 얘기했던 거다. 어쨌든 시나리오는 많이 고쳐야겠다, 어렵겠지만 나를 믿고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날 우리 회사에서는 모두가 다 반대하는 거야. 영화가 너무 세고 잔혹하고, 유영철 얘기도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모두가 다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나는 유영철이 누군질 몰랐다. 그 시기에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게 뭐냐? 유영철을 왜 반대하는 거야? 인터넷 쳐봤더니 극악무도하더만. (웃음) 반감을 가질 것 같더라. 그래도 나는 (또 손가락을 찌르며) “고!” 했지. 그날부터 나 감독과 같이 신 바이 신, 지문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이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냐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일년 내내 회의했다. 중간에 물론 각색자도 붙였다. -뭘 고쳐야 했나. =초고의 느낌이 지금 영화로 보여지는 것과 근간은 다르지 않은데, 중요한 네개의 포인트가 크게 바뀌었다. 나 감독의 초고는 규모가 작은 하드코어 잔혹스릴러였다. 사적인 느낌이 컸고. 거기에 사회적인 이슈들도 찾아넣고 심리적으로도 사이즈가 큰 영화로 보일 수 있게,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넓힌 거다. 그 과정에 일년이 걸린 거지. 나는 몰랐는데, 최근에 누가 나한테 그러기를, 진짜 옆에서 보기 질릴 정도로 물고 늘어졌더라고 하더라. 저러다 말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집요했다고. (웃음) 나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출장안마사 얘기는 기본적으로 사회 밑바닥 얘기다. 남들이 별로 관심 안 갖는 그런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죽어간 이유는 결국 모두가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경찰도 안일했고 하다못해 개미슈퍼 아줌마도 안일했다. 그런 걸 사회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으면 영화는 작은 스릴러가 되고 만다. 유영철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화가 났던 게, 그 여자들이 죽어가던 당시 아무도 제대로 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건 그들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이 다른 계층에 속했으면 경찰도 사건을 더 파고들었을 거고 사회도 더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고작 출장안마산데 뭐, 이러면서 무시하고 넘어간 게 아닌가 싶더라. -투자사들한테는 왜 그렇게 ‘까였다’고 생각하나. =연쇄살인마, 출장안마사, 영화 90%가 밤신, 60%가 비신. (웃음) 투자받으러 다니던 2006년 그해가 한국영화 수익률이 바닥을 쳤을 때여서 더 어려웠다. 그때, 알고 지내던 김선용 이사가 밴티지 홀딩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맘에 줬더니 얼른 하겠다더라. 갓 만들어진 투자사라 유연한 장점이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42억원 정도는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선 30억원이면 찍겠다는 거야. 줄이고 줄여도 31억5천만원인데. 그래서 이건 무조건 오버다, 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캐스팅은 그 이후에 된 건가. =캐스팅이 먼저 됐다. 그게 2007년 1월인데, 당연히 캐스팅도 잘 안 됐지. (웃음) 만날 그 고민에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그전에 심엔터테인먼트에서 자기네 배우들 사진이 있는 달력을 준 게 있었는데, 눈을 딱 뜨니까 눈앞에서 김윤석씨가 활짝 웃고 있는 거다. (웃음) 김윤석씨 생일이 1월이거든. 그 사람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거다, 됐다, 싶더라. 미진 역은 초고 때부터 서영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고, 영민 역으로는 하정우를 하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너무 좋았고, 굉장히 큰 배우가 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근데 투자사에서 하정우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라. 스타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두달을 밀고 당기다가 투자사에서 자기네가 다른 스타 캐스팅을 해오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날 나는 난리를 치면서 전화기 집어던지고 (집어던지는 시늉) 당장 투자 빼라 그랬다. 그랬더니 이젠 거기가 뒤집어진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고 황당해했지. 요새같이 어려울 때 투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도 다른 투자사들한테 다 퇴짜 맞고 왔으니 그쪽에서 투자 빼면 대안이 없거든. (웃음) 일주일 있다 연락이 왔다. 그냥 하정우 하세요. 투자사가 양보해줬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하정우도 이 배경을 알고 있나. =촬영 50%쯤 지났을 때, 김윤석씨랑 하정우씨랑 같이 술 마시는데 갑자기 하정우씨가, “저 이전에 영민을 누구 생각하셨어요?” 하고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걸 왜 물어보냐 그랬더니 항상 궁금했는데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더라. 자기가 제일 늦게 합류했으니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던 거다. 그래서 그 얘길 해줬다. 그랬더니 정우씨가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웃음)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고집 부려서 정우씨를 캐스팅했는데 정우씨 연기 꽝이었으면 나 완전히 바보 되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영민이 망원지구대에 끌려가서 진술서 쓰다가, 여자들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 할 때 그 장면 보고 모든 걱정을 놨지. -미진 역은 왜 처음부터 서영희였나. =예전부터 서영희씨 눈빛이 되게 슬프고 불행해 보인다고 느껴왔다. <마파도> 보고 그걸 느꼈다. 참 운이 없구나. 불행하고 억울한 느낌. 그런 사람이 미진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연민도 많이 느낄 것 같았다. 영희씨도 처음엔 걱정하긴 했는데 무조건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여자배우들은 되게 몸 사리잖아. 근데 영희씨는 몸 사리는 게 없더라고. 힘들어서 도망갈 줄 알았더니 안 도망가데. (웃음) -촬영기간 동안 나홍진 감독은 제작자에게 자기가 헛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중간 편집본을 가져갈 때도 최종편집본처럼 편집이니 색보정에 공을 들였다던데. =나는 이 영화 찍는 동안 매일 아침 텔레시네 보는 재미로 일찍 출근했다. 텔레시네는 편집은 고사하고 사운드고 뭐고 하나도 안 된 거잖아. 그것만 보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그림 그대로 다 찍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시네 본 지 사흘쯤 됐을 때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더라. -걱정했던 부분이 뭐였나. =밤신이 너무 많고, 감독이고 촬영감독이 모두 신인이라 너무 실험적이거나 스타일적으로 과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정말 클래식한 앵글에 공식 그대로 찍어왔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액션과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감독은 어떻게 숏을 찍고 붙여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지 정말 잘 아는 사람이다. <완벽한 도미요리>를 보고 좋아한 것도 그 점이었다. 숏을 찍어서 붙이는 감각이 정말 뛰어나다. 미드 세대라 그런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70년대생 이후의 영상세대라고 할 만하다. 그 이전 세대엔 없었던 컷 감각인 것 같다. 김선민 편집기사가 잘해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 감독이 그렇게 되게끔 찍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나. =제목도 없는 시나리오를 나 감독이 가져와서, 제목은 지어주세요, 했다. (웃음) 제목 갖고도 진짜 말이 많았다. 고전적으로 힘있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중호의 마음을 담고 싶었고. 그래서 어느 날 ‘추격자’로 정했더니 또 모두가 반대하고…. (웃음) 나 감독도 추격과 추적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자기가 일주일만 고민해보겠다 그래서 내가 그냥 ‘추격자’로 가, 오늘부터 제목 갖고 얘기하지 마. (웃음) -프로덕션의 면면에 있어서 영화 그 자체로 승부하고 돌파하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정공법. =처음부터 그랬다. 스타 캐스팅 가지 말고 연기자로서 적역 캐스팅으로 가서 캐스팅 비용 들어갈 거 영화에 더 쓰고, 정통적으로 홍보하고 마케팅하고. 하다못해 우리는 연예프로에서도 다 까였다. 쇼프로 같은 거, 우린 나간다고 하는데도 그쪽에서 배우들이 너무 약하다고 안 내보내주더라. (웃음) 그래서 그쪽으로는 홍보도 하나도 못했다. 영화 제목도 장난 안 치고, 무식하지만 촌스럽게 가자. 모든 과정이 다 그랬던 것 같다. 편집할 때까지도 나 감독과 논쟁을 많이 했거든. -감독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대. (웃음)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충돌했을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있으려면 내가 감독보다 시나리오 더 많이 보고 콘티 더 많이 보고 고민도 더 많이 해서 논리로 승부해야지. 그 사람은 감독인데 얼마나 고민했겠어. 이미 머릿속에 확고한 그림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감독은 편집실 뛰쳐나가고, 나는 달래서 데려오고, 중간에서 김선민 기사는 어쩔 줄 모르고. -그래도 한편쯤은 더 같이 해야 하지 않나. =애초에 세편 계약했는데 안 할지도 몰라. (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편집할 때까지 징그럽게 싸워서. 내 생각은 이렇다. 신인감독이 영화 잘 만들어서 500만명 들고 대성하면 메이저 투자사들이 돈 덥석 주고 데려간다. 크리에이티브 자유 다 줄게, 돈 다 줄게, 하면서. 그러면 두 번째 작품 가서 깨진다. 영화는 제약과 조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돈 다 주고 자유 다 주고, 그렇게 해서는 영화가 될 수가 없다. 편집하는 2주 동안 그래서 진짜 괴로웠다. -편집을 2주 했나. =모든 후반작업을 한달 만에 했다. 처음에 개봉일 얘기할 땐 쇼박스에 내가 우리 영화는 개봉을 무조건 구정으로 가야 한다, 1월30일로 하자고 했는데 촬영이 지연됐잖아. 다시 찾아가서 2주만 늦춰달라 그랬는데도 후반작업할 시간이 한달밖에 안 남은 거다. 그러니 나 감독은 이가 갈리지. (웃음) 자기는 한달 내내 밤새고 나는 옆에서 안 떨어지고. -첫 제작영화인 <음란서생>도 성공작이었다. =평 좋았고, 관객도 267만명 들었고. 근데 아직도 수익금이 안 들어왔다. 그게 일본에 120만달러에 팔렸는데, 그 수익이 영화가 개봉해야 들어오는 거다. 근데 영화가 아직 개봉을 안 했다. 3년 내내 빚지고 산 거지. 그래서 <추격자> 잘돼서 빚이라도 갚았으면 좋겠다. (웃음) <음란서생>은 국내극장 수입으로는 제작비 똔똔했다. -<추격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들 것 같은가. =그건 잘 모르겠고,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인데 500만명은 넘어줬으면 좋겠다. 500만명은 넘어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남들 다 안 된다고 했던 영화가 이렇게 나와서 500만명은 넘어줘야 지금의 한국영화 투자환경이 바뀌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400만명도 좋고 300만명도 좋지만, 이상하게 500만명이 안 넘으면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쉽게 잊혀지는 것 같더라. 오래 기억에 남고 투자 마인드도 바꾸려면 500만명은 넘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500만명이 넘어야 연말에 상도 탈 거 같아. (웃음) 윤석씨, 정우씨 다 상 받았으면 좋겠고 나 감독님도 받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나는 빚 갚으면 좋을 것 같고. 한쪽에선 부담도 된다. 주위의 기대가 너무 커져서 다음 작품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작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계는. =시나리오 고치는 중이다. 똑같다. 신인감독이고 스타 캐스팅 안 할 거다. 이번에도 매니지먼트사에서 달력 꼭 줘야 돼. (웃음) -어떤 내용인지. =주식 갖고 사기치는 사람들 얘기다. 무지하게 재미있다. 대한민국에서 요즘 펀드 안 갖고 있는 사람 없잖아. 나는 주식을 한번도 안 해봐서 아는 게 전혀 없지만 공부는 안 하고 있다. 나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어야 하니까. -일찍부터 영화계에서 일했다. 90년대 중반에 본인이 대표로 운영했던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곳은 채윤희 대표의 올댓시네마와 함께 홍보마케팅의 양대산맥이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웃음) 그러다 1999년 AFI(미국영화학회)로 유학을 떠났는데, 무엇을 배우러 간 것이었나. =인생이… 이런 얘길 다 해야 하나. (웃음) 철없을 때 결혼했던 남편이 부도를 내고 도망갔다. 당시 6억5천만원이었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수입해서 번 돈, <레옹> 수입해서 번 돈, <나쁜 영화> <꽃잎> 이런 영화들 기획, 제작해서 번 돈으로 그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허망하더라. 공부라기보다, 이젠 남을 위해 살지 말고 나 자신에게 투자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갔다. -조엘 실버가 운영하는 실버프로덕션에서도 일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인턴을 잡으려고 팩스를 1천 군데 정도 넣었다. 전화가 한통도 안 왔다. 근데 실버네가 전화했다. 지금 바로 와줄 수 있냐 그러더라. 우리 너무 급하다고. 오케이, 바로 가겠다, 하고 갔는데 처음 두달은 복사만 했다. (웃음) 한국에서 영화 제작하고 기획하던 사람이 만날 매니지먼트사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있으니까 자존심이 되게 상하더라. 고생도 많았고. 그래서 어느 날은 막 울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와서 너 왜 울고 있냐, 한국에서 제작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일 하니까 화가 나서 울고 있지? 너 여기 일 그만 하고 자기랑 같이 제작일 하자 그러더라. 그래서 난 일을 좀더 배워야 될 것 같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워너의 월드와이드프로덕션 부서, 그러니까 제작·투자·판권구매 부서로 나를 소개시켜줬다. 거기에서 일년 반을 근무했는데 그때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을 다 본 것 같다. 하루에 200권씩 받아서 처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감당이 안 되지. 열 장으로 해결해야 돼. 앞부분 열장, 뒷부분 열장, 그래도 미심쩍으면 중간 몇 페이지. 하루에 최대 12권까지 영어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나중엔 몇장만 봐도 감이 온다. 지문 몇줄, 대사 몇줄 보고 던져, 던져, 던져. 그렇게 1년 반을 일하면서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러다 2004년 여름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김대우 감독이 같이 영화하자고 꼬셔서 그 말 한마디에 짐 싸들고 돌아온 거다. -비단길의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회사 이름을 한국말로 짓고 싶었고, 실크로드가 한국어로 뭐지? 하다가 비단길, 좋다 싶어서 무조건 등록하자 그랬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름대로 큰 뜻을 담아, 동양과 서양을 잇는 그런 제목이면 좋겠다 싶어 생각한 거다. (웃음) 그걸로도 놀림 많이 당했다. 비단길이 가시밭길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모교인 이대에서 영화동아리 누에가 만들어졌을 때, 본인은 85학번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82, 83학번의 대선배들과 함께 앞장서서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학년이. (웃음) 기지촌 여성들을 담은 다큐도 만들었다. 직접 생활도 같이 했다고. =아니 그런 얘기까지. (웃음) 근데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그랬던 거 같아. 선배들은 다 말렸는데 내 생각엔 그렇게 찍지 않으면 다큐가 안 나올 거 같더라고. 민들레회라고 수녀님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었는데 혼자 들어가기는 무서워서 친구를 꼬여서 들어갔다. 매일 밤 죽음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후배가 신경안정제를 사줬는데 그걸 먹고 이틀 밤을 울고 불고 했다. 그 다큐 만들어서 KBS 토크쇼도 나갔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상도 타고 상금도 당시 300만원 받고, 이대 총학에서 500만원 지원해줬고 여성학 교수님들이 돈도 주셨고, 그 당시 돈을 무지하게 벌었다. (웃음) 그땐 또 전국 대학에서 데모를 했기 때문에 데모를 하는 동안 틀어놓을 영화가 없어서 우리 영화를 다 가져갔다. 그래서 그 당시 몇천만원을 벌었다. 돈이 너무 많은 거야. 근데 영화는 너무 후진 거지. 난 감독에 재능이 없구나. 돈은 버는데. 그래서 나는 뭘 하면 좋겠냐고 선배한테 물으니까 기획이나 제작하라 그러더라. -1989년에 처음 영화일을 할 때, 시작은 어디였나. =선배가 하명중영화제작소를 소개시켜줬다. 2년 있다가 나와서 회사를 차렸다. 만 스물세살이었지. 그 해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기획해서 번돈 500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영화보러 갔다가 영어,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사와서 16억원 벌었다. 근데 지방 배급업자한테 사기당해서 다 날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떤 영화를 앞으로 하고 싶은지.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좋게 패키지로 꾸려진 영화들,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재미가 없다.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것, 새로운 것, 그런 것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작전> 외에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가. =방은진 감독과 한편 하게 될 것 같고, 그 다음엔 큰 액션영화를 한편 하고 싶다. -방은진 감독과 하는 영화 장르는 뭔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주인공은 여자인가. =아니, 남자다. 나도 여자주인공인 영화 해보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안 하게 된다. 시나리오 고치고 있다 보면 액션이 되고(웃음)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랑말랑한 게 나랑 안 어울리나.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인생이라서 그런가보다. -취향 문제일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 (웃음)

전주에서 만나는 두 유럽 거장의 실험 정신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굵직한 회고전 두개를 선보인다. 헝가리의 영화 거장으로 구스 반 산트와 짐 자무시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벨라 타르와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알렉산더 클루거의 회고전이다. 벨라 타르 회고전에서는 총 12편의 장·단편이 선보인다. 상영작은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인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비롯하여 <패밀리 네스트> <아웃사이더> <프리팹 피플> <맥베스> <가을> <파멸>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등의 장편과 단편 <호텔 마녜지트> <평원에서의 여행> <프롤로그> 등이다. 제1회 때 미드나잇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상영한 바 있던 435분짜리 대작 <사탄탱고>는 이번에도 역시 심야 상영작으로 소개된다. 벨라 타르는 영화제 기간 중 직접 내한하여 특별강연을 할 예정이다. ‘영화보다 낯선’ 섹션에서 상영될 알렉산더 클루거 회고전의 상영작은 장편 7편과 단편 5편, 텔레비전 방송물 3편 등이다. 클루거를 유명하게 만든 그의 데뷔작 <어제와의 이별>을 비롯하여 <서커스단의 예술가들> <어느 여자 노예의 부활> <독일의 가을> <애국자> <감정의 힘> <블라인드 디렉터> 등 이번에 상영될 장편영화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으로 아버지 영화의 종언을 알리고 새롭게 출발한 뉴저먼 시네마의 숨겨진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영시네마 인터내셔널 포럼’ 부문의 전 집행위원장 울리히 그레고르가 내한하여 알렉산더 클루거의 영화 세계에 대해 강연한다.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벨라 타르 회고전에 관해 “우리 시대 가장 독창적인 영화감독이자 비타협적인 예술가 가운데 한명인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들을 마침내 한자리에 모아 상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한편, “예술가이자 교육자, 행동하는 마르크시스트이자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는 모험가이기도 한 클루거 감독의 영화 세계로 입문하기 위한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알렉산더 클루거 회고전의 의의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파리] 구설에 휩싸인 오스카의 여왕

지난 2월24일 마리온 코티아르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은 프랑스 언론에 실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프랑스영화의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스카에서 프랑스 배우들의 활약은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1960년 <오트빌로 가는 길>(Chemins de Haute-ville)의 시몬느 시뇨레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의 젊은 여배우가 다시 한번 반세기 전의 영광을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회상시킨 것이다. 시상식 당일 코티아르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삶과 사랑…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도시에는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라며 시적인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오스카의 수상과 더불어 그녀는 영국의 BAFTA(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어 프랑스 영화사에 곱절의 영광을 안겨다주었다. 하지만 오스카 시상직 직후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 마리온 코타아르가 9·11을 “미국 정부의 조작”이라 이야기했던 2007년 2월16일의 인터뷰를 재방영하면서, 그녀가 오스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얘기가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의 동영상은 “비행기가 충돌했다고 빌딩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내리나? 뉴욕에서는 몇분 만에 모든 것이 붕괴됐다. 우리는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그녀의 멘트를 담고 있다. 이 클립은 곧 유튜브와 데일리모션(Dailymotion) 사이트에 그대로 업로드됐고 1만1천명 이상의 네티즌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커지자 마리온 코티아르의 변호사인 뱅상 톨레다노는 “그녀는 단 한번도 9·11 테러 발생에 대해 정치적 반론을 일으키려 한 적이 없다. 과거의 그녀가 일으킨 반향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그녀를 변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과 영국의 여러 언론들의 한 지면을 장식하며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이 취소될 것이라는 루머까지 양산해내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2007년 당시 방송 멘트에 대한 마리온 코티아르의 자세한 입장이 실린 기사를 저마다 싣고 있으며, 이 같은 논쟁이 코티아르의 예술적 재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다가 그녀가 지금 미디어의 ‘음모’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