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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베이징] <로스트 인 베이징>, 싸움 걸다

지난 1월 중국국가광파전영전시총국(SARFT)으로부터 배급과 상영 중지라는 중징계를 당한 <로스트 인 베이징>(원제: 핑궈)이 SARFT를 상대로 소송 중이다. 제작사인 베이징 로레알의 대표 팡리는 지난 3월12일 영화에 내려진 중징계를 철회하고 상영 허가를 내달라며 저작권 문제를 다루는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한 상태. 중국에서 영화에 행해진 정부의 제재에 불만을 제기하고 고소까지 간 예는 이번이 처음이라 관련업계 종사자들과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지만, 문제는 이미 고소장 제출 한달이 가까워오는데도 법원은 묵묵부답이라는 사실이다. 중국행정소송법상 법원은 고소장을 받은 뒤 7일 내에 조사를 거쳐 입안을 하든지 혹은 적법성을 따져 수리 결정을 내리고 통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20여일이 지난 시점까지 법원은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고 있다. 정부의 징계로 향후 2년간이나 영화제작을 금지당한 팡리는 이런 법원의 침묵에 또 한번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 1월의 갑작스런 배급과 상영 중지 명령도 어떠한 법률적 문건 없이 전화 한 통화와 인터넷상에 오른 ‘금지령’ 통보로만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제작사는 광전총국에 해명과 법률적 근거를 신청했으나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했다. <로스트 인 베이징>쪽은 (광전총국 홈페이지와 언론상에 발표된 대로) 외설적 표현이 담긴 영상물이 심사를 통과하지 않은 채 인터넷에 유포되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행위가 건강한 영화 문화를 해치는 행위라는 게 제재 이유라는 걸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온라인에 상영된 것은 불법 DVD로부터 나온 소스였고 제작사도 피해자에 다름 아니다. 제작사로서는 영화의 상영을 위해 감내했던 6번의 심사과정과 56차례에 걸친 수정, 17분의 삭제라는 노력이 보람도 없이 최소 300만위안 이상의 손실과 2년간 제작 불가로 귀결된 것을 지나친 처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광전총국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제재와 통보방식은 <색, 계>에 출연한 여배우 탕웨이의 광고가 텔레비전에서 순식간에 내려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광고주나 제작사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묻지도 못했다. 광전총국은 최근 좀더 엄중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상영허가증을 받은 영화라도 온라인상으로 배급하려면 ‘온라인 상영허가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절차를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국영(급) 회사만 허가증을 신청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중국 3대 포털사이트 중 하나지만 민영으로 운영되는 ‘소후’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형편이다. 가뜩이나 배급 루트가 적은 저예산영화들에도 답답한 소식이다. 이번 소송 사건이 정부를 향한 중국영화계의 기나긴 저항과 싸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 뒤에는 올림픽을 지나면 정부의 간섭과 제재가 더욱 심해질 거라는 영화계 내부의 심각한 우려도 있다. 팡리가 건 싸움이 부디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지 않기를.

[외신기자클럽] 한편의 코미디, 프랑스를 덥히다

지난 3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 영화는 바로 <웰컴 투 슈티>다. 슈티란 프랑스 북부 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제 슈티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귀여움을 받는 지방 사람들이 됐다. 코미디 영화감독 대니 분이 만든 이 작품은 몇주 사이 프랑스영화계에서 가장 큰 흥행작이 됐고, 빙산처럼 떠서 <타이타닉>의 2천만 관객동원 기록 돌파를 향해 둥실둥실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계속 뜨다가는 <타이타닉>의 역사적 기록을 문제없이 깰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시대와 작품을 잘 연결해주고 있는, 그야말로 한눈에 반할 정도의 그런 작품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웰컴 투 슈티>는 프랑스 남부에 살다가 정반대에 위치한 전혀 매력없는 지역 노르 파드 칼레로 전임해온 한 우체국장의 모험을 그린다. 그는 북부 지역에 관해 온갖 선입견을 안고 부임해온다. 그는 북부 지방이 날씨가 엄청나게 추운 건 물론이고,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데다가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에 시커멓게 그을린 촌사람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나 그의 새 직장동료는 그에게 미리 경고한다. “여기선 두번 운다. 이곳에 도착하면서 울고, 이곳을 떠나면서 울고”라고. 그도 그럴 것이, 도착 직후 적응기의 충돌이 잠잠해지면서 주인공은 차츰 북부지역 사람들 자체와 그들이 가진 순박함, 우스꽝스런 사투리, 심지어는 입 안에 불이 날 정도로 지독한 그 지방 특유의 치즈에까지 애착을 느끼게 된다. <웰컴 투 슈티>는 그리 훌륭하게 촬영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효과 만점인 개그들이 작품에 적당한 리듬감을 주는 ‘정직한 코미디’다. 특히 이 영화는 기상천외한 <아멜리에>(2001)와 똑같은 도식으로 작동된다. 장 피에르 주네가 몽마르트르 동네를 그린 방식처럼 대니 분은 프랑스 북부지방을 따로 고립된 세계처럼 그려낸다. 관객은 세계화 돌풍의 여파가 아직 미치지 않은 밀폐된 공기방울 속으로 들어 가듯이 베르그시(市) 안으로 들어간다. 대니 분 감독은 베르그시를 마치 우체국이나 조그만 광장, 혹은 감자튀김 판매용 가건물이 전부인 양 단순한 지표물들로 축소해놓는다. 거기선 절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인터넷은 더더구나 없다. 소형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전부다. 거기엔 실업자란 없다. 빈민도 없다. 슬픔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지인이란 남부에서 상경한 주인공 하나뿐. 이처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세계, 동시에 노스탤지아를 자아내는 작품 속의 세계가 대인기를 누린다는 사실은 <웰컴 투 슈티>가 프랑스판 <웰컴 투 동막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프랑스 어느 도시에선 <웰컴 투 슈티>를 본 관람객 수가 주민의 인구수를 이미 초월했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다. 그것도 같은 날에 말이다. 이처럼 <웰컴 투 슈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화예술이 잃어버렸던 관객을 다시 영화관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웰컴 투 슈티>의 교육적 취향은 파리지엔 아가씨 <아멜리에>가 주는 최고급 유행성 미학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중·장년층 관객에게 그다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웰컴 투 슈티>는 또 한 가지 면에서 조심스럽지만 꽤 획기적인 작품이다. 흔히 프랑스식 코미디에선 선한 역할을 하는 배우와 악한 역할을 하는 배우가 서로 듀엣을 이루는 게 보통이다. 이와 같은 프랑스식 코미디는 키 큰 바보 부르빌(Bourvil)과 키 작은 심술보 루이 드 퓨네즈(Louis de Funes)의 전설적인 콤비가 등장하는 제라르 우리 감독의 <파리 대탈출>(1966)이 모델이다. 그러나 대니 분 감독은 선인과 악인이라는 대립 콤비가 아니라 약자 역할을 하는 두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품을 연출했다. 위기에 헐떡이던 아시아의 상처를 <쉬리>의 흥행이 치료해줬듯이 <웰컴 투 슈티>는 시장개방과 프랑스화(貨)의 가치 저하, 좋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터무니없이 비싼 유로화(貨), 또 점차 사라져가는 사회보장제도 등을 프랑스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다. 프랑스 관객은 남부와 북부의 화합이라는 상징을 통해 국가 전반적인 화해 분위기 조성을 주장하는 <웰컴 투 슈티>를 이 같은 위기의 시기에 접하게 된 셈이다. 요즘 같은 의혹의 시기, 나라 전체가 작은 온기를 찾아 화면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런 시기에 영화관은 때론 모닥불이 되어주기도 한다.

차가운 ‘애정의 하드보일드’ <입맞춤>

한적한 주택가. 무표정의 남자가 아무 집이나 불쑥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 중 문이 열려 있던 집으로 무작정 들어간 남자는 단란한 한 가족을 몰살한다. 일부러 경찰에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잡혀갈 때 그는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웃고 있다. 의문스런 이 살인마의 이름은 사카구치. 그가 왜 살인을 일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삶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마침 텔레비전에서 그의 웃음을 본 한 여자가 운명처럼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평범한 회사원 교코. 그녀는 사카구치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가고 사카구치의 관선 변호사 하세가와를 통해 사카구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길 원한다. 교코는 둘 사이에 어떤 관계도 없었지만 무언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자꾸 그에게 가도록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한 마디의 자기 변론도 거절한 채 사형대로 가기를 바라던 사카구치에게 쿄코의 존재는 그가 입을 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기를 주고, 마침내 사카구치의 마음이 교코에 의해 열린다. 하지만 남아 있는 충격의 마지막 시퀀스. 살인자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교감을 느낀 뒤 그를 찾은 여자. 단박에 김기덕의 <숨>이 떠오를 만한 이야기지만 만다 구니토시의 <입맞춤>은 김기덕의 <숨>처럼 철학적 이기보다 육감적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간다천 음란전쟁>,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등의 각본에 참여한 바 있으며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감독 만다 구니토시는 미사여구 없는 그러나 차가운 ‘애정의 하드보일드’를 선보인다. 갑작스런 교감에서 시작된 이 애정의 하드보일드는 과연 인물들의 관계가 어떤 끝점에 닿게 될 것인지 시종일관 궁금해지도록 만든다. 전반적인 인상은 국내에서 개봉했던 그의 전작 <언러브드>와 유사한데 <입맞춤>의 끝에는 기괴한 감정의 폭발지가 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추성훈 & 정대세

두 사람이 뜬다. 심하게 말하면, 한 사람은 ‘쪽바리’가 됐고, 또 한 사람은 ‘빨갱이’가 됐다. 그럼에도 뜬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대한민국 고유의 정서와 사상적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추궁을 받아야 할 ‘배신자’들이 오히려 환호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나라가 거꾸로 간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최근 한달간 가장 인상 깊게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황금어장-무릎팍도사>와 이었다. <무릎팍도사>는 유도 선수 출신으로 일본 이종격투기 K1 히어로즈에서 뛰는 추성훈이 나와 ‘고민 상담’을 할 때였다. 은 얼마 전 북한축구대표팀의 스타로 떠오른 정대세를 그린 ‘안녕하세요 인민루니 정대세입니다’ 편이었다. 두 프로그램의 성격은 판이했지만 두 주인공이 준 느낌과 울림은 비슷했다. 첫째, 눈물샘을 자극했다. 둘째, 그러면서도 밝고 쾌활했다. 추성훈은 재일동포 4세다. 정대세는 재일동포 3세다.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추성훈은 한국 유도계에서의 차별을 못 이겨 일본으로 귀화했다. 정대세는 ‘잘사는 조국’ 대신 ‘마음의 조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했다. 외국인 등록증에는 ‘한국’이란 국적이 표시돼 있다. 추성훈은 일장기가 박힌 유도복을 입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결승에서 한국 대표를 꺾고 금메달을 땄다. 정대세는 지난 2월 2008 동아시아연맹컵 2차전에서 적진의 공격수가 되어 대한민국 대표팀의 골망을 흔들었다. 추성훈은 요즘 한국에서 <하나의 사랑>이라는 노래도 녹음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미덕의 선구자다. 어떤 난관과 장애가 가로막아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남아야 한다’는 도그마를 깼다는 점에서다. ‘반일’과 ‘반북’은 쌍둥이처럼 우리 시대의 자유를 억압해온 키워드였다. 그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의 선택은 충격이었다. 한 사람은 숙적인 일본에 이기적인 투항을 했고, 또 한 사람은 ‘월북’을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여지가 컸다. 그런 그들이 한국의 공중파 방송에 스스럼없이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어쩌면 ‘쇼킹 코리아’에 속할지도 모른다. 물론 유도와 격투기를 못했거나 공을 못 찼더라면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게다.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과 그들만의 독특한 향기 또는 매력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다. 방송사의 잇속도 작용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두 사람은 한국사회의 도그마를 그냥 깬 게 아니라, 명랑하게 깼다고 평가할 만하다. 한국인들이 오매불망 지녀온 국가에 대한 ‘신앙’을 엔터테인먼트한 포즈로 질타한 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재일동포 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른바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동포(또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구조와 역사는 하도 얽히고설켜 당사자들조차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힘들다. 가령 이런 것이다. ‘조선적·한국적·일본적은 어떻게 다르지? 외국인 등록증에 표기된 조선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아니라 남북 단독정부 수립 이전의 조선이라고? 정대세는 한국적으로 돼 있는데 어떻게 북한대표가 됐지?’ 두 사람의 활약으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자이니치’의 정체성 혼란과 복잡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몇몇 언론이 10여년 동안 ‘자이니치’에 관해 줄기차게 보도한 것 이상의 효과를, 단 몇달 만에 해냈다. 두 사람 중 정대세는 아직 서울에 못 왔다. 올 여름엔 온다. 6월22일 2008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한국과의 경기를 위해서다.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을 외칠 것이다. 혹시 일부 붉은 악마가 정대세를 진심으로 응원한다면 불온할까? “국적보다 실력이 짜릿하다”는 추성훈 팬클럽은 한국에 있다. 정대세 팬클럽은 아직 못 찾았다(일본엔 팬클럽이 있다). 그날, ‘대~한민국’이 아닌 ‘정대세’를 연호하는 한국인들을 보고 싶다. 되게 재밌을 것 같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코미디언 김미화

초인종처럼, 오후 6시 시보가 울렸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주파수를 맞췄다. 5분 뉴스가 끝나자 행진곡풍 시그널이 흐르고 김미화가 오늘의 가장 인상적인 뉴스를 브리핑하며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1부를 연다. 낱말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천천히. 아마도 그녀가 정한 오프닝의 철칙인가보다. “신기하죠? 방송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뭐에 혹하는지 다 아는 모양이에요. 이 프로그램 오래 하는 걸 보면.” 간간이 혀를 차며 경청하던 아저씨가 신통해한다. 2003년 첫 전파를 탄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이른 출근 시간대의 <손석희의 시선 집중>과 더불어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양쪽 날개다. 두 프로그램의 결은 판이하고 상호 보완적이다. <손석희의 시선 집중>을 들으면 찬물로 머리 감듯 정신이 번쩍 난다. ‘시사(時事)의 신’ 앞에 뉴스들이 줄을 서서 품평(?)을 받는 광경이 떠오른다. 인터뷰 대상의 정파를 막론한 손석희의 공평한 ‘쌀쌀맞음’은, 밥벌이 전장으로 나서는 아침 청취자에게 적당한 긴장을 선사한다. 반면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하루치의 노동과 실망을 감당하느라 피곤해진 해질녘의 귀에 살갑게 달라붙는다. 황당무계한 뉴스의 자초지종을 헤아리고 싶지만 생각할 기운조차 달리는 시간, 그래도 피해를 입은 이웃이 우선 안타까운 우리 대신 김미화는 전문가들에게 재우쳐 묻는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대요?”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드문 김미화의 최근 히트작은 그녀가 최초로 기획안을 만든 <개그 콘서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스탠딩 코미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 된 이 작품은 물론 재미있기도 했지만 “웃겨야 산다”는 젊은 코미디언들의 절절함과 열정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코미디였다. 코미디언들이 얼마나 다재다능하고 지적이며 치열한 대중예술인들인가를 시청자는 폭소 속에서 재발견할 수 있었다. MC 김미화는 25년차 코미디언 김미화와 절연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세상만사를 시시콜콜 궁금해하는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김미화 옆에는 셋방살이하면서도 집주인에게 결코 기죽지 않았던 새댁 순악질(‘쓰리랑 부부’), 스타 아니라 스타 할아버지도 화장실은 간다는 사실에 착안해 대중의 호기심을 대신 풀어주던 방송사 미화원 삼순이 아줌마(‘삼순이 블루스’)가 붙어 앉아 있다. 토크쇼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김미화는 끊임없이 웃기고 싶어한다. 아니, 웃음을 구한다. 느닷없이 구성지게 <새타령>을 부르는 정도는 보통이고, 아이를 얻은 기자에게 오늘의 경제지표를 확인하기 전에 아내한테 인사 한마디 하라고 재촉하기도 한다(그러면 또 한다는!). 이제 패널들도 그녀의 흥에 전염된 눈치다. “물 왜 안 드세요?” “기자들은 물먹는 거 싫어합니다” 같은 대화가 예사다. 그러나 김미화의 진행에서 유머는 개그맨의 프리미엄을 살리는 특별부록이 아니라 본령이다. 그녀의 화법은 우리가 뉴스에 귀기울이고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근원적 이유를 환기시킨다. 요컨대 우리는 눈앞에 있는 타인을 걱정하고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때 온기를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쇼에 출연한 ‘클론’의 강원래에게 “그 눈높이에서 보는 세상은 어때요?”라고 물을 때 아무도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더불어 미소지을 수 있는 진행자가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수십개 비정부 시민운동단체에 참여하는 김미화의 활동을 꾸준히 지켜보았다면, 그 질과 양이 당위와 책임감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모르는 분야라면 배워서라도 돕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경지다. 지난 2003년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처음 기획, 연출한 정찬형 MBC 글로벌 사업본부장은 그가 파악한 김미화의 능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본을 외건 원고를 읽건 진행자 본인의 마음과 생각에 맞닿아 있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요즘 청취자는 예민해서 맘에 없는 소리를 하면 금방 눈치를 챈다. 사안에 따라 1인시위도 꺼리지 않는 김미화씨의 활동을 보면서 때로는 뜻을 위해서 손해도 감수할 수 있는 연예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야기를 던져놓으면 살아 뛰게 만드는 진행자다.” 김미화는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변화한 인물로도 간주되지만 달리 보면 코미디부터 NGO 참여까지 그녀의 모든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한 가지 소망이 계속 외연을 불려온 결과다. 매니저 없이 수첩을 손수 채워가며 일하는 그녀는 인터뷰 도중 몇번이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모든 통화를 “감사합니다”로 맺었다. 그러고는 놓았던 대화의 실마리를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정확히 멈추었던 그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인터뷰하실 때면 대개 기자를 학교나 방송사로 부르시는 모양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매니저 없이 활동해온 것은 아니죠? =<쇼 비디오자키>(1986)의 ‘쓰리랑 부부’를 할 무렵에는 매니저가 있었죠. 돈 벌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쓰리랑 부부’가 그런 시기의 정점이었는데 그러다 제가 뱃속의 아기를 잃었어요. 제 일 욕심이 돈에 관한 욕심인지 성취감을 위한 건지 다시 생각했죠. 돈에만 연관된 일이라면 진짜 성취와는 상관없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랬는데! 그렇게 결심하니까 돈이 쫓아오더라고요. (웃음) -운전이라도 다른 분이 도와주시면, 이동 중에 자료라도 읽을 수 있을 텐데요. =혼자 있는 차 안 공간을 아주 소중히 생각해요. 전 음악도 혼자 듣고 시장도 혼자 가고, 낙지볶음이나 추어탕 같은 음식도 혼자 식당 가서 사먹어요. 방송사 근처 식당 아주머니들은 으레 “아, 김미화씨 오셨네?” 하고 알아서 차려주세요. 일하는 동안 항상 스탭들과 있으니 나머지 시간은 혼자 있으려고 해요. 누가 운전해주면 불편해서 뒷좌석에서 온전히 다리 뻗고 쉬질 못하는 성격이에요. -2003년부터 MBC 라디오에서 진행해온 시사 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흔히 연예인에겐 시간이 돈이라고 하잖아요. 인기 높을 때는 ‘행사'를 뛰면 시간당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당시 인기가 높은 상태에서 황금시간대에 매일 2시간 생방송을 결심한 건 단지 한 프로그램을 하느냐 마느냐 이상의 결단이었을 듯합니다. 장기적으로 인생에서 뭘 얻고 뭘 버릴까의 결단이랄까. =정찬형 프로듀서(현 MBC 글로벌 사업본부장)가 찾아와 제안을 했을 때 “게스트로 일주일에 한번은 할 수 있다”며 선수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마흔이 넘으면서 사회적 책임을 나눠야 하지 않겠냐”며 약점을 찌르시더라고요. 이미 여러 시민단체를 돕고 있는데 굳이 라디오에 시간이 묶여서 일할 필요까지 있을까 했더니, 발로 뛰어 기여할 수도 있지만 방송으로 더 큰일을 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군요. 또 MBC 라디오에서 일하는 건 연예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해요. 라디오는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매체예요. 텔레비전은 감정을 표정과 눈빛으로 속일 수 있지만 라디오는 절대 가짜로 할 수 없어요. 목소리의 떨림이 먼저 진실을 전하거든요. 신기하죠? -정찬형 본부장님이 설득할 때 시사 프로그램 2년 하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값하는 내공이 생긴다고 하셨다면서요. 배우는 걸 좋아해 그 대목에 넘어가신 것 아닌지. (웃음) 사실 공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한국의 시사 프로그램만한 학교가 없을 거예요. 오늘 뭐 하나 알아두면 내일 또 다른 분야에서 일이 터지니까요. 그런데 처음에는 광고주들이 회의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광고야 PD가 걱정할 문제고 저야 잘 안 되면 잘리는 것이고 잘되면 오래가는 것이고. (웃음) 다만 MBC가 인내를 갖고 기다려주는 면이 있죠. 방송을 20년 했는데 설마 떨까 했는데 막상 그 큰 라디오부스에 혼자 앉아 있으니 누구든 떨리겠더라고요. 시그널 음악이 나오자 마음은 안 떠는데 몸이 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날 방송 들은 분들은 “저래서 시사 프로 하겠어?” 했을걸요. 방송 끝나고 문 열린 화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우리 PD가 소변을 보며 벽에 머리를 찧고 있더라고요. (좌중 폭소) 아마 내가 저 여자를 왜 데려왔나 싶었겠죠. 무척 미안했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오더니 제 앞에선 막 칭찬하면서 격려를 해주더라고요. -방송을 듣다보면 상대를 좋게좋게 감싸면서 대화해야 본인도 마음이 편한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협의 중입니다”, “A를 하면서도 B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같은 관료적인 두루뭉술한 답변이 나오면 “그래도, 저기, 대략 언제쯤 윤곽이 나올까요?” 하며 꿋꿋이 물고 늘어지시더군요. =역시 정치인들과의 인터뷰가 가장 힘들어요. 가끔 호통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면 그냥 받는 거죠. 거기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고요. 진심은 제가 아니라 청취자가 느끼거든요. 저 정치인이 가는 길이 맞구나, 아니야 저 사람 말은 가짜구나라고 듣는 분들이 느껴요. -사실 저는 라디오 전화연결 인터뷰가 듣기 부담스러워요. 질문자와 답하는 사람의 의중이 확실히 어긋날 때 저걸 어찌 마무리짓나 조바심이 나서요. 더구나 1분에 몇회 웃어야 한다 계산하며 연기해온 코미디언으로서 대화가 초점없이 흘러갈 때 초조하지 않으세요? =다행히 제가 아나운서들과 교양 프로그램 MC를 많이 해봤어요. 아나운서들이 처음에는 딱딱하게 진행하는데 어느 순간 제가 유도하는 쪽으로 빠져들다보면 상당히 실력이 향상된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방향으로 게스트들이 빗나갈 때 쓰윽 끌어오는 개그맨만의 능력이 있나봐요. 저희 프로그램에서 뉴스 브리핑을 하는 기자들도 처음에 제가 툭툭 애드리브를 던지면 “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하고 짜증냈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 비 오는 날 넌지시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하는 노래 한 소절 해보시라고 부추겨 생방송 중 어쩔 수 없이 기자가 노래를 한 거죠. 막 부끄러워했는데 막상 방송 끝나고 친구들이 전화해서 재밌었다고 칭찬을 해주면, 다음부터는 제가 뭔가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애드리브 하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내요. (웃음) -확실히 김미화씨가 긴장을 풀고 진행하니 패널들도 화법이 달라지는 걸 느껴요. 청취자 눈높이에 맞춰서 기본적인 개념도 되묻고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큰 강점입니다. 하지만 이제 김미화씨도 5년쯤 진행을 하다보니 식견이 쌓였잖아요? “이런 견해도 있던데요”라는 인용 대신 ‘나’를 주어로 반론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가끔 생기지 않습니까? =어느 부분에서는 의견을 밝히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해서 패널의 대응을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게 더 좋은 방송이라고 생각해요. 또 오늘 우리 프로를 처음 듣는 청취자도 있을 테니, 제가 아는 부분을 모두들 안다고 치고 이야기하면 무례라고 생각해요. 명랑한 성격이 인자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본래 밝은 성격이죠?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내성적인 시기가 있었다고도 들었습니다만. =명랑한 성격이 인자 속에 있는 것 같긴 해요. 아버지가 폐를 앓아 누워계실 때에도 어른들 앞에서 이미자씨 노래 흉내내고 1원씩 5원씩 받아 군것질하는 재미에 나돌아다녔어요. 수유리 천지촌 부근 반지하방에 살았어요. 창문 위로 사람들 발이 지나다니는. 엄마는 보따리 옷장사를 하느라 시골을 다니다 한달,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오시니 제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만날 논둑 밭둑 뛰어다니며 노래하고 삐라 줍고 자연을 즐기고…. (웃음) 환자 입이 계속 마르는데 주전자에 거즈를 담가 아버지 입가에 연결해놓고 나가 놀았어요. 어디서 그런 잔머리가 나왔는지! 그러다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해장국집 하느라 날 돌볼 정신이 없었죠. 한 친구가 “아빠도 없는 게”라고 놀려서 걔를 때렸는데 선생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제게 의자를 들려 벌을 세웠어요. 반항심에 학교를 안 가고 길음시장에서 살다시피했죠. 결국 선생님이 집에 연락을 했고 엄마가 일수 찍는 치부책에 칸을 그려서 학교 갈 때마다 선생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사인이 너무 쉬운 거예요. (웃음) 며칠 학교 다니다 그냥 사인을 제가 흉내내고 한동안 또 안 갔죠. 그제야 엄마가 상황을 알고 전학을 시켜줬어요. 새 학교 친구들은 제가 아빠 없는 아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때 “아, 나를 놀린 그 애한테 내가 아빠 없는 아이 표시를 낸 게 화근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까불고 명랑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약간의 성격 개조였다고나 할까? -시장 골목이 중요한 추억의 장소겠네요. =정말 그래요. 지금도 친아버지 사진이 한장도 없어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데 그때 시장에 뻥튀기 파는 아저씨가 돌아가신 아버지랑 너무 닮아 종일 쫓아다닌 적이 있어요. 혹시 우리 아버지가 살아서 왔나 하는 어린 마음에. -김미화씨는 지금도 맏딸 기질이 강해 보여요. 뭔가 사달라고 조르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알고 나아가 여차하면 엄마를 내가 보호하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딸 있잖아요. 어머니는 맏딸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나요? =지금 생각하면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죠. 너무 일찍 혼자가 된 엄마는 심한 고생을 했어요. 동네 개들에게 쫓기며 보따리 행상을 할 때는 “옷 사세요” 소리칠 용기가 안 나 10원짜리 크림빵 대신 막걸리 10원어치를 마시고 기운과 용기를 내서 호객을 했대요. 손님들이 모두 간 뒤, 자식 붙들고 그런 눈물어린 하소연을 하실 때면 엄마한테 정말 잘해야지 가슴이 무너졌어요. 저는 정말 속을 안 썩였어요. 3km 등하굣길을 걸어다니며 차비 100원을 모아 천원, 만원 만들어 갖다드렸죠. 일찍 일어나 시장에 가서 배추 시래기를 마대에 얻어서는 갈래 머리 위에 이고 엄마 해장국집 재료로 갖다드리고 등교했고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공사판에서 하던 함바집에 라면을 끓여 날라준 다음 남은 라면을 먹었어요. 엄마는 지금도 제 말이라면 서방님 말보다 더 솔깃하고 다투다가도 한마디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요. 그런데 엄마가 가여우면서도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죠. -어쩌면 그래서, 첫 결혼을 일찍 스물셋에 한 걸 수도 있겠네요. 어서 내 가정을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 잘해보고 싶어서요. =나중에 엄마를 원망한 적도 있죠. 엄마한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하면서요. -어렵게 유년을 보내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인터뷰에서 “당시엔 집이 어려우면 고아원에 보내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고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 걸 보고 실감했습니다. =사실 저를 외국에 입양 보내려 한 적이 있대요. 주인집 할머니가 색시 너무 고생한다며 입 하나 덜라고 소개를 해준 거죠. 외국인 군인 두명이 집에 왔는데 팔뚝의 노란 털이 선명히 기억나요. 근데 엄마가 마음을 바꾸셨죠. 커서 왜 그때 미국 안 보냈냐고 따지기도 했어요. “갔으면 오프라 윈프리 저리 가라였을 텐데” 하면서. 하하. -포옹하는 걸 좋아하시죠? 웬만한 남자연예인하고 나란히 서면 겨드랑이 밑으로 쏙 들어가요. =그래서 만든 아이디어가 서세원씨와 했던 KBS <코미디 세상만사>의 ‘밤이면 밤마다’였어요. SBS 전속기간을 끝내고 프리랜서 선언하면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죠. 잠옷을 입고 날마다 남편을 바꾸는 스토리라 공영방송에서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덤덤한 반응이더라고요. (웃음) 예쁜 연예인이 했다면 너무 선정적이라고 했을 텐데. 나중에 세어보니 제가 이백몇십명 남편을 바꿔가며 안아보고 누워보고 했어요. 출연자들에게 부인이 뭐라 안 하더냐 물었는데 “김미화씨랑 하는 거라면 전혀 상관없다”고 했대요. 기분 나쁘죠. (웃음) -지금이야 스탠딩 코미디나 버라이어티가 주류가 되면서 연기 도중 코미디언 자신이 웃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김미화씨는 <쇼 비디오자키> 때부터 웃음이 많으셨어요. =웃음이 많아서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한 컨셉이에요. 당시 여자 코미디언은 꽃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맞장구만 치는 예쁜 여자들을 보면서 왜 저럴까 고민했어요. 그 이면엔 제가 꽃이 될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 꽃으로서는 결코 선택될 수 없다는 점도 있었죠. 그럼 내가 살길은 뭘까, 성 구별없이 함께 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된다고 느꼈어요. KBS 2기 개그맨으로 김한국, 이봉원, 이경애, 조금산, 임미숙 등이 있었는데 그중 대장인 김한국씨와 제가 아이디어 놓고 많이 싸웠죠. 뭘 하더라도 김한국하고는 절대 안 한다고 이를 갈았는데 ‘쓰리랑 부부’ 콤비가 됐어요. (웃음) 싸우면서도 저 사람은 프로다 느낀 거죠. 그 무렵에는 연기하다 웃으면 NG였어요. 연기자가 웃으면 방청객과 시청자는 어디서 웃으라는 거냐며 혼났죠.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했어요. 편집할 때 코미디 프로그램에 가짜 웃음을 깔잖아요. 따라 웃게 하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부적절한 강도로 들어가면 설거지하다가도 굉장히 귀에 거슬려요. 그래서 전 아예 틀을 깨고 그냥 내가 웃자고 생각한 거예요. -1999년 출범한 <개그 콘서트>의 산파 역을 하셨죠? 선후배가 새로운 양식 안에서 같이 연기하는 건 놀랍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후배를 더 돋보이게 하는 연기를 기꺼이 선배가 하는 태도가 신선했습니다. =산파가 아니고 제가 낳았다고 할까. (웃음)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연극식으로 관객을 모으면 재밌겠다 싶었고 백재현씨는 그런 연극을 이미 하고 있었어요. PD가 관객이 안 오면 어쩌나 겁을 내서, 첫회는 컬투 삼총사가 나온다는 걸 부각하고 신인개그맨도 함께한다는 내용을 뒤에 붙였죠. 컬투가 대학로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 그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다면 방청객에게 메리트가 생기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 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 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장면을 수십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켜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저는 모든 사회 부문이 여러 개의 탄탄한 층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요즘은 자칫 잘못하면 선배만 있고 후배는 없거나, 선배는 없고 후배만 있는 코미디가 될까봐 걱정이 돼요. 그맘때 저는 서세원씨와 방송사에서 7년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시청률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언니는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지만 너무 어른들을 위한 코미디만 하는 거 아냐? 고루해 보여”하는 거예요.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 제가 정해놓은 묘비명이 “웃기고 자빠졌네”예요 -김미화씨는 여러 문제를 그런 식으로 확장해서 사고하시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개그 콘서트>는 맞아떨어졌어요. 그러나 약간의 오산이 있었죠. <개그 콘서트>를 기획했을 때 저는 <젊음의 행진>의 ‘짝궁들’처럼 1, 2, 3, 4기를 배출하고 그중에 스타를 만들어 다른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형태를 생각했어요. 그때 KBS 코미디 프로그램이 세개였는데 예컨대 심현섭, 김영철이 개콘 1기의 스타로 배출된다면 그들을 선배 프로그램으로 보내 기운을 불어넣고 개콘은 2기를 뽑는 거죠. 그러면 세 프로그램이 다 살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방송은 제 생각보다 더 상업적이었어요. 개콘이 잘되니 출연자들에게 다른 프로를 못하게 했고 오히려 다른 프로그램이 폐지된 거예요. 개콘이 제작비 대비 효과가 컸으니까요. 신인은 출연료가 저렴한데다 원래 제가 요구한 컨셉이 빈 무대에 조명만 때리는 거라서 세트도 없었거든요. -동세대 코미디언들에게는 어쩌면 김미화씨가 원망을 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요. 미안한 부분이에요. 전 그저 가수 팬클럽이 찾아와 “누구 짱” 하듯 개그맨도 환호받는 풍경을 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어요. 발전적 방향으로 간 건 맞는데 기성 코미디언 설 자리가 없어진 건 실수였다 싶어요. -그런 오차도 경험했으니 본인 이름을 건 코미디 프로덕션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던 ‘쓰리랑 부부’ 시절 경험이 있어서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직 현장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정해놓은 묘비명이 “웃기고 자빠졌네”예요. (좌중 웃음) 저는 나이 들어도 방송사에 아이디어를 들고 갈 수 있고 후배들이 코미디를 잘하면 나 좀 키워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든 스며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호호 할머니 컨셉으로 젊은이들 버라이어티 쇼 나가서 막 나무라고 웃기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충분히!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시사 프로그램 진행은 궁극적으로 더 좋은 코미디언이 되기 위한 것이고, 방송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건 세상에 도움을 줄 힘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씀해오셨어요. 목표의 위계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 사실 계획없이 살아요. 저희는 영원히 비정규직이잖아요. 며칠 전에 저, 낮 프로그램(SBSTV <김미화의 U>) 잘렸어요. 한 2년6개월 했나봐요. 그렇게 계획없이 살지만 우주의 힘은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남편과 재혼하고 처음 싸웠는데 제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 원인이었어요. 낮밤으로 일일방송을 하니 새벽에 나가 별 보고 들어가잖아요. 하루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놓았는데 몸이 힘들어 내려가보지도 않은 거예요. 밥을 차렸는데 눈도 안 떠보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서 힘들다니까, 몸 아픈 건 당신 일 욕심 탓이지 내가 보필을 제대로 못해서냐고 반문하더라고요. 하하. 정색하고 일 줄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PD가 “프로그램 잘립니다” 하는 거예요. “아, 네에” 하고 돌아왔어요. (웃음) 그럴 때 서럽긴 해요. 이번엔 안 그랬지만 PD들은 프로그램 지장 생길까봐 MC에게 잘리는 날 알려주거든요. 비정규직의 설움이죠. 암튼 상심해서 “여보 내가 잘린대요” 했더니 경사났대요. 그래서 “서방님은 말대로 되니까 좀 말을 조심해주세요” 했죠. (웃음) -사실 <김미화의 U>가 처음 출범했을 때 제가 받은 인상은 김미화씨가 그냥 인기있는 MC로 기용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김미화씨가 시민운동 참여와 후배 양성을 통해 축적한 네트워크와 정보를 추수하는 기획이라는 느낌마저 있었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겠죠. 저는 자극이 생기면 그걸 심연으로 끌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박차고 올라가는 기질이 있어요. 물론 팀원들과 프로덕션은 섭섭해하고 일거리 걱정도 되지만요. -<김미화의 U>는 그런데 회를 거듭하면서 사회적 이슈보다 육아나 살림, 개인의 입지전쪽으로 소재가 흐르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약간은요. 그런 색깔은 CP에 따라 달라지는데 평상시에는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면서 가끔 큰 건을 하나씩 턱턱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셨고 수십개의 시민단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미화씨의 자세를 보면 연예인으로서 사회복지에 도움을 준다는 입장이 아니라, 사회복지사업 입장에서 거꾸로 연예인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있어요. =워낙 오래해서 그런가봐요. 사회 참여는 누구한테 보여주거나 인기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기에 보탬이 된다고 봐요. 제가 이만큼 오래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봉사하는 모습을 통해 김미화가 하는 한마디는 진실일 것 같다는 한 자락 믿음을 대중의 마음 저변에 깔았기 때문 아닐까요? 어떤 토크쇼를 하건 코미디를 하건 남을 돕는 이의 연기를 보는 것과 돕지 않는 사람의 연기를 보는 건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인 시절에는 프로그램에서 잘리는 것이 큰 아픔이었지만 지금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굳이 특정 프로 안에서 저를 못 보여줘도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제가 원하는 대로 끌어갈 수 있는 중량감을 축적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이 드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그렇죠? 2002년 데뷔 20주년 기념 <김미화의 코미디 스쿨>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노래 실력도 뛰어나고 후배들과 어우러져서 보여주는 코너들이 다 훌륭했어요. 4개월 준비했다면서요. =오래 준비한 쇼였는데 AD가 실수를 해서 방청객을 다른 날짜에 모집했어요. 관객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공연이어서 부득이 돈을 주고 방청객을 불렀죠. 녹화 보이콧을 하면 방송사의 피해도 컸고요. 진짜 많이 울고 무대에 올랐어요. -그때 무대 오프닝에서 “날 봐 비밀은 전혀 없어”라고 노래하셨죠. 지금은 헤어진 전남편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요. 오랫동안 힘든 결혼생활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 그 모습을 다시 보니 기분이 복잡해졌어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니, 때에 따라선 환경에 따라 아픔을 잊을 수도 있고 관계란 것이 꾸준히 나쁜 건 아니겠죠. 예전 남편이 다른 건 몰라도 제 활동에는 많은 지지를 보내준 편이었어요. -힘들 때 운다고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2005년 초에 이혼으로 사생활에 큰 매듭을 지었는데 바로 그해에 많은 일에 뛰어드셨어요. 진행을 시작했고 <김미화의 U>도 그해 출발했죠. =제가 일을 벌이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일은 줘야 하죠. 방송사 PD들에게 너무 고맙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이유가 그때 경험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연일 제 이혼을 대서특필하는 와중에 PD들이 저를 하차시키지 않고 외려 새 일거리들을 줬어요. PD도 방송사 뒷문으로 다니고 있는 저한테 와서 섭외를 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저 지금 복잡해요” 했더니 그거랑 상관없이 해달라고 하셨어요. <세계는 그리고 지금은> PD도 어쩔 거냐는 기자들 질문에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일은 일인데 김미화씨 일 잘하고 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느냐. 아무 계획없다”고 대답해줘서 저를 편견에서 꺼내줬어요. 그런 기사가 나가면 타 방송사의 생각도 영향을 받죠. 헛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이혼한 여자가 뭐 할 말이 있어 방송에 나오느냐”고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저 역시 그게 무서워서, 내 일을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져 아이들한테 불행한 엄마의 모습을 보일까봐 오랫동안 망설였던 거고요. 온 동네 도로포장을 뜯는 운동을 해볼까 해요 -모든 연예인이 그렇지만 속으로 우는 일이 익숙하실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예전 제 삶이 참 슬퍼요. 어느 날인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어,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이 퍼뜩 들었어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서 더 잃는다 한들 뭘 잃을까 하는 각성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요. 배추장사든 풀빵장사든 하자, 리어카 끌고 눈썹에 테이프 붙이고 ‘순악질 풀빵’, ‘일자눈썹 풀빵’이라고 팔면 사람들이 길에서 많이 사줄 거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좌중 눈물 글썽이다 폭소) 그날로 결심하고 PD에게 먼저 “이런 소송을 할 건데 저를 자르세요” 했죠. 음, 그래서 더 부담되어 못 잘랐나? (웃음) 재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여태 살아온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건데. -를 함께 진행한 장정일 작가께 들었습니다. 때로는 게스트조차 불성실한 패널일 경우 정독을 안 하고 오는데 김미화씨는 바쁜 와중에도 한권은 반드시 완독하고 방송에 임해서 놀라웠다고 하시더군요. =그 프로그램 하면서 간이 나빠졌어요. 밤중까지 일하고 다시 새벽까지 책을 봐야 하니까. 흥미있는 분야 책은 빨리 읽히는데 때로는 그 뭐냐 우주의 탄생에 관한 책도 읽어야 하니까, 쩝. 그래도 읽어보고 가는 것과 안 읽고 가는 건 달라요. 당시에는 한회에 네댓권씩 소화해야 했어요. 그런데 공짜로 책을 주는 게 너무나 기뻐서 “와 이거 좋은 프로그램이다” 신이 났죠. (웃음)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죠.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고 코미디가 발전해야 나중에 돌아갈 곳이 있을 거란 말도 하셨고요. 그런 말씀을 들으며 <친절한 지주님>이라는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소작인들에게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지주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돼요. 순진한 그녀는 자기를 대하는 모습만 보고 남편이 아주 선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만 믿다가 딸 하나를 남기고 숨졌어요. 엄마를 닮은 딸은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동네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운 이웃들을 “우리 아빠가 도와줄 거야”라며 집으로 데려오죠. 지주는 “이건 내가 아닌데” 하면서도 딸의 믿음대로 재산을 마을 곳곳에 퍼주고 결국 빈털터리로 죽습니다. 하지만 한푼 없이 남겨진 그의 딸을 이웃은 마을 전체의 아이로 소중하게 키웁니다. 마을 전체를 딸에게 남겨준 셈이 된 거죠. 장황해졌는데 내 가족의 부를 축적하기보다 나를 둘러싼 사람과 세상에 부조해서 나를 확장하고 내 가족을 확장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어요. 오래된 것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노인들이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두레가 살아 있고 유기농 음식을 먹던 외국의 한 시골 마을이 있었어요. 그러던 마을이 산업화되고 젊은 애들이 돈 벌러 외지로 나가면서 황폐해지죠. <친절한 지주님> 이야기처럼 동네 어른들이 아이를 키워주고 지혜롭게 해주는 것이 젊은 엄마들의 일을 크게 덜어주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모든 게 개인적이잖아요. 제가 지금 사는 시골로 이사한 이유도 그런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라서예요. 얼마 전 한 TV다큐멘터리를 보니 영국 한 마을에서 포장을 뜯어내고 있더라고요. 우리 동네도 도로가 비포장이라 집에 들어가면 진흙구덩이에요. 그런데 길섶에 풀이 돋아나고 내린 빗물이 땅 밑으로 빠져 자연이 순환하는 걸 보면서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삶이구나 절감해요. 지열이 괴면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잖아요. 지금은 이장님이 길을 깔아주신대도 사양하고, 도리어 온 동네 포장을 뜯는 운동을 해볼까 싶기도 해요. 한 마을에서 뜻을 모아 오래된 것으로 돌아가는 거죠.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들었지만 정부가 기본적인 예산 운영 방침을 얼마 전 발표했는데 사회복지예산을 최소화하고 개발연구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했더군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힘이 빠지지 않으셨나요? =힘빠지죠. 사실 지금 책정된 복지예산도 많지 않고 골고루 돌아가지도 않아요. 사회가 정말 잘되려면 진심을 담아 복지를 해야 해요. 시민들이 당당히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등록금 걱정 없도록 나라에서 해주면 아이들이 나라를 위해 반드시 봉사하고 그 투자가 돌아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대출의 이율도 높고, 도와주는 듯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사람 입장에 입각해 돕는 정책은 매우 부족해요. 개인적으로는 복지예산을 늘리면서도 다른 분야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정치를 안 해봐서 모르고 거기도 나름 아픔이 있겠지만요. 건강보험 민영화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모양이라 다행이에요. 제가 배울 때도 그렇게 가면 안 된다고 배웠거든요. 그래서는 정말 안 되는데…. 追伸 “방송에 달통한 그를 초심자가 파트너로 얻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김미화와 인터뷰를 나누는 동안 그녀와 를 나란히 진행했던 장정일 작가의 전언을 체감했다. “팰 데가 없는 게 아니라 빈틈이 없는 것이제!”라는 순악질 여사의 호언장담도 새삼 떠올랐다. 그녀가 노를 젓는 배에 무임승차한 기분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한 일이 없다는 자격지심에 곧이어 시작될 생방송 견학을 청했다. 방송 20분 전. 그녀는 대본에 띄어읽기를 표시하고 신문 더미에 고개를 묻었다. “쇠고기 협상은 전 정권의 설거지”라는 주장을 읽으면서는 “설거지를 하려면 깨끗이 해야 하는데”라는 네 아이의 엄마다운 혼잣말을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라디오국의 여러 동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포옹을 나누고 갔다. 생방송 스튜디오는 연날리기를 하는 현장과 비슷했다. 작가, 스탭, 패널, 프로듀서 모두 따로 조용히 움직이면서도 한결같이 연이 땅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목표로 팽팽히 긴장해 있었다. 조금 아까 자신을 비정규직이라고 표현했던 김미화에게 작가들은 노동절 생방송을 여는 말로 적절하게도, 닷새 황금연휴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비정규직/외국인 노동자들을 기억하자는 멘트를 써주었다. 라이브 공연까지 수용하는 큼직한 생방송 스튜디오 안에 홀로 앉은 자그마한 체격의 여인은 아주 외로워 보였다, 라고 취재수첩에 쓰는 순간 김미화는 ‘뒤통수퀴즈’ 코너의 효과음을 위해 자신의 뒤통수를 아낌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전영객잔] 애장의 욕망이 일으킨 일대 사건

유년 시절의 영화관람 추억을 마침내 막강한 자본에 힘입어 한편의 작품으로 복원해내는 것이 근래 할리우드 재주꾼들의 추세 중 하나다. 그런 일련의 출현에 관해 개인적으로는 ‘애장(愛藏)의 영화’라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 부르고 있다. 내게는 <스피드 레이서>도 그중 하나의 결과물로 보이며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말하는 애장이란 우리가 애장품이라고 말할 때의 사전적 의미 ‘소중히 간직함’ 그대로이며, 애장의 영화란 유년의 시절을 사로잡은 대상을 평생 소중히 간직해오다 성인이 되어서 혹은 더 나아가 영화감독이 되어서 마침내 작품으로 실현하고 마는 소유와 보존과 복원의 프로젝트들을 말한다. <스피드 레이서>의 워쇼스키 형제를 비롯하여 재주와 기회를 겸비한 총아들 사이에서 이런 실현의 욕망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영화를 애장하는 몇가지 방법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동시대에 가장 전위적이며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가 자신의 애장하는 것들만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것은 오래됐고 우리도 그의 영화의 특성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타란티노가 그의 성향에 버금가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뭉쳐 각각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를 만들어 ‘그라인드 하우스’(선정적이고 질 낮은 B급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심야 상영관)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옴니버스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추가되는 특징이 있다.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가 애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지만, 이 때 타란티노는 그 장르의 성격 자체를 넘어 그걸 즐기는 관람의 상태를 더 애장한다. 예컨대 그는 그 시절에 소년 타란티노가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영화를 보며 느꼈을 법한 흥분을 지금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여 선택된 전략은 필름의 상태를 조악하고 훼손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건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가 원래적으로 주는 내용과 형식의 퇴폐적 자질과는 무관하다. 스크래치 가득한 질 나쁜 화면, 툭툭 끊기는 릴의 불안정한 상태 등을 연출하여 ‘지금 당신은 그라인드 하우스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유혹한다. 타란티노의 목적은 우리의 관람을 퇴행시키는 것이며 그 퇴행의 목적은 자신이 겪었던 관람 경험의 순결한 복원에 있다.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될 만한 피터 잭슨은 어린 날 본 <킹콩>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반지의 제왕> 삼부작이라는 거대 에픽이 끝나자 <킹콩>을 차기 프로젝트로 택했다. 원작과 차이가 있다면 혹은 그동안 수차례 시도된 다른 연출자들과 달랐던 건 거대한 물량과 에너지 그리고 묘사력으로 어떤 영화와도 비교되지 않을 완성도 면에서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태도였다. 피터 잭슨은 <킹콩>을 어느 영화관에서 어떤 팝콘을 먹으며 보았는지 애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킹콩>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애장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애장품인 <킹콩>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신이 시도한 이후 누구도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한다. 타란티노가 자신의 관람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그 소유의 순결성을 과시할 때 피터 잭슨은 텍스트의 높은 완성도에 공을 들여 소유권의 완성을 마무리하려 한다.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미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영원한 소유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 등의 몇몇 영화를‘오마주영화’라고 쉽게 부를 수 없는 이유 또는 스필버그-루카스 세대와의 차이는 스필버그-루카스가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영화에서 무언가를‘배웠다’고 생각하는 대신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은 그것들에서 무언가를‘가졌다’(소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 바치는 헌사라면, 오마주 영화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늘 어떤 존경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소유권의 주장이 더 강하게 느껴지며 그리고 그 소유권이 주장될 때 공통적으로 놀아보는 것, 유희의 확장 가능성도 항시 크게 부각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B급 장르에, 피터 잭슨이 판타지 장르에 좀더 심취해 있다면 애장의 영화 계열 작가로서 빼놓지 말아야 할 워쇼스키 형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에 놓고 홍콩 갱스터영화와 쿵후영화의 기호들을 자력처럼 모아 유희한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매트릭스>라는 영화이며 이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마치고 <킹콩>을 만든 것처럼 <매트릭스> 삼부작을 끝내자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었다. 1967년 일본에서 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방영됐을 때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큰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스피드 레이서>에 대한 기억을 워쇼스키 형제도 잊지 않고 되살려낸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 모아지는 기대는 적지 않았고 과연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워쇼스키 형제가 거대한 애장품을 선사할 것이며 흥행에도 성공할 것인가, 모두들 기대했다. 촌스럽고 유아적인 것이 전부인가? <스피드 레이서>에 관한 본격적인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제기된다. 그리고 질문을 끌어낸 결정적인 계기는 예상치 못한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이다. 영화광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문화권에서 애장의 영화나 오마주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스피드 레이서>의 경우는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의 오랜만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좀더 선전이 기대됐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예상보다 못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전국 300개 이상의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아이언 맨>에 밀리며 선전한다고 말하기 힘든 정도다. 왜 그럴까?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을 막는 어떤 거부감 또는 어떤 저항선이 있는 걸까. 그건 무엇일까. 흥행의 성공 유무를 산업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 흥행 전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스피드 레이서>의 진실에 대해 좀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본 관객은 제 각각의 이유를 말한다. 부정적인 반응은 대략 몇 가지로 추려진다. 이야기가 없다. 너무 현란하기만 하다. 혹은 너무 촌스럽고 유아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의견들이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을 설명하는 온전한 이유가 될 것인가. 과연 이 표현들은 맞는 것일까. 이야기가 없는데 큰 흥행을 한 영화를 알고 있다. <디 워>는 지난해 국내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으며, <스피드 레이서>는 <디 워>의 전체 관람가와 유사한 수준의 12세 이상 관람가다. 서사가 단순하다는 건 그러니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스피드 레이서>의 CGI 기술은 <디 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로 놀랍다. 만약 CGI의 놀라운 기술력이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무기라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많은 관객을 모아야 할 것이다. 현란하기만 해서 싫다는 반응도 의아하다. 부분적으로는 <스피드 레이서> 못지않게 현란했던 <트랜스포머>는 500만 관객을 넘었으며 이 영화를 본 호사가들 중 일부는 이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며 감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의아한 건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촌스럽다, 유아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스피드 레이서>는 촌스러우며 유아적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반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만 말하고 나면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는다. 예컨대 <스피드 레이서>는 정말 촌스러운가 혹은 유아적인가. 그보다는 혹시 낯설고 불편하고 어렵고 모호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 낯섦, 불편함, 어려움, 모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이들은 자기들의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다가 <매트릭스>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워쇼스키 형제가 우리를 실망시켰다며 씁쓸해한다. 누군가는 의심할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워쇼스키 형제 그들은 아이도, 어른도, SF의 마니아들도 심지어는 철학자와 미학자들까지 매료시킨 대중문화의 네오가 아니던가, 라고.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 1편을 만들었을 때 대개 저돌적인 철학적 모험가이지만 때로는 철학계의 약장수인 슬라보예 지젝은“매트릭스는 일종의 로르샤흐 검사의 구실을 하는 영화이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며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에 부합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 영화의 함의에 철학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뛰어든 수많은 논평자들과 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라캉주의자들과 푸랑크푸르트학파와 뉴에이지 운동그룹, 혹은 플라톤 주의자들이 제각각 자기의 철학적 명제에 기대어 이 영화를 로르샤흐 검사지 삼고 있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매트릭스>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카피처럼 영화가 무엇을 보여줬던 그 이상의 철학적 개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지젝도 2003년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 이미 2002년에 출간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원제는 <매트릭스와 철학>)에 실린 바로 그 글 안에서 “<매트릭스>의 속편들에서 우리는 아마도 ‘진실의 사막’ 역시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의 예지력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 속에서 모피어스가 “자넨 꿈나라에서 살았었네. 이게 오늘날의 세계야. 진실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하네”라고 말할 때 그건 가상의 프로그램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실의 사막이란 자신들의 육체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 바깥의 세계를 가리키는 비유다. 매트릭스의 세계와 그 바깥은 연결되어 있지만 지젝이 예고한 것처럼 그 바깥조차 매트릭스는 아니었다. 그럼 지젝의 실수를 지금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한 가지가 될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성이 대철학자조차 호들갑 떨게 할 만큼 충분히 상상의 여지를 주었다는 걸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워쇼스키 형제는 신나게 유희했을 뿐 철학은 그걸 본 철학자들이 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러므로 여전히 유희의 연장에 있다. 유희는 말한 것처럼 애장의 영화감독들의 사명이며 그것만이 그들의 진실의 사막이다. <매트릭스>의 창작자들이 어떻게 <스피드 레이서>처럼 이런 유치찬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목소리들이 높은데 개인적으로는 이상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 마침내 <매트릭스3 레볼루션>을 본 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먼은 “오랜 세월 인간의 실제 행위를 기록해온 카메라 촬영술과 새롭게 떠오른 컴퓨터그래픽 이미지, 실제 배우들과 그들의 스턴트 대역들, 그리고 실제 로케이션 장면들과 스튜디오 세트장면들을 결합해내기 위해 워쇼스키 형제가 감내해야 했을 복잡다단함을 생각해본다면, 영웅 해커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컴퓨터에 의해 구현된 가상의 현실을 상대로 펼치는 이 무용담은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건 지젝의 예상보다 훨씬 더 유효할 뿐 아니라 <스피드 레이서>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예고했던 문장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길목에서 동선을 살짝 전환하여 유년 시절 그들을 사로잡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버리지 않으면서. 애니메이션에 더 근접하기 위해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섞는 방법이 <스피드 레이서>에서 특징적이며 그 점이 <스피드 레이서>를 말할 때 어떤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건 이미 <매트릭스>의 연장일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더 직접적으로 근접해간 그들의 애장과 유희의 방식이다. 그들의 애장품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순결의식을 지키는 방식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유희의 연장으로 선택한 자동차와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 소중히 간직해온 것을 대하는 그 순결 의식의 행태에 대해서는 이미 쿠엔틴 타란티노나 피터 잭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한 바 있으니 여기서 피터 잭슨이 <킹콩>에서 대상을 다루었던 방식과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관람의 경험을 다루었던 방식을 다시 상기해달라고 제안하고 싶다. 두 감독이 각자 집중했던 문제가 <스피드 레이서>에는 모두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드 레이서>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무엇’을 애장하는가와 ‘어떻게’ 애장하는가.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의 부진도 실은 워쇼스키 형제가 다루는 이 애장의 두 가지 방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스피드 레이서>가 애장하는 무엇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에서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GoGoGo!>다. 그리고 <마하 GoGoGo!>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복 및 헤어스타일과 <007> 시리즈의 자동차에서 이식받아 태어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것이다. 미국에서 생겨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추종자들을 만든 60년대 문화 혼종성의 일례. 이때 주요한 대상이 되는 것이 자동차다. 자동차는 영화사에서 때때로 유의미한 기호이며 특히 미국 대중 영화 속에서 장르와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절대적인 문화 기호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양의 소년들이 성인으로서 등록받기 위해 유년기에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 하는 상징물(<트랜스포머>의 자동차)이자, 성인의 세계에서도 여성을 유혹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남성의 성적 유인물(<데쓰 프루프>의 자동차)이자, 때로는 한 시대의 연애감과 미스테리를 상징하는 공간(<조디악>의 노란 자동차)이다. 단적으로 자동차는 사회학자 존 오르의 주장처럼 모더니티의 “상품화된 악마들”이라는 자격을 얻을 만큼 중요했으니, <마하 GoGoGo!>라는 원작이 태동한 196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감안할 때 이 영화의 자동차들이 동 서양의 모더니티를 우회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단지 <스피드 레이서>의 작품 결정성 또는 흥행성의 가치를 두고 말할 때 이 중요한 기호가 의외로 핵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자동차는 몇 가지 더 화려한 상상적 기술과 금속적인 느낌, 그리고 경주 장면에서 제작진 스스로 카-푸(자동차 쿵푸)라고 부를 만큼(하지만 사실은 카-레, 즉 자동차 레슬링의 태그 매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시아 격투기 같은 상상력을 넣어 다시 혼종성이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자동차로 대변되는 모더니티는 그 이상으로 크게 격상되지 않고 있다. 자동차를 둘러싼 나머지가 더 부각된다. 두 번째 애장의 방식, 즉 어떻게 애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때 자동차라는 대상 자체보다 중요해지며 이 영화의 핵심과 직결된다. 자동차가 달린 적 없는데 그 휘황찬란한 속도감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CGI의 수혜를 말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CGI로 재현된 이 속도감이 정작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람의 경험을 결정짓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 워쇼스키 형제가 추구한 건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노렸던 효과와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에만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더 질문할 수 있다. 원작의 매체성과 가까워지려는 <스피드 레이서>가 <베오 울프>와는 공유하지 않되 <300>과는 공유하는 점이다. 하지만 원작의 세계에 순결함을 바침과 동시에 독창적일 수는 없는가. 워쇼스키 형제가 선택하는 방식은 단순히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그냥 섞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생전 처음 만난 것처럼 모조화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취하는‘어떻게’의 모든 방식은 모조화이며, 더 모조화이다. 모조화를 강화하는 두 가지 매우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팝하게 모조화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이키델릭하게 모조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드 레이서>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표현을 잊지 않고 한다. “영화가 아주 팝해”, “영화가 사이키델릭하더군”. 하지만 멋진 그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까지는 아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각종 매체의 기사까지 이 말들이 모두 사용되는 걸 보면 제작진 스스로가 제작 단계에서 이런 개념들을 공유해왔고 유포해온 것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영상이 팝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사이키델릭하다는 건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똑같이 대중적이며 현란한 영화인데 왜 <베오울프>와 <300>과 <트랜스포머>에 대해서 팝하다고 말하지 않는 대신, <스피드 레이서>에 관해서는 팝하고, 사이키델릭하다는 논평을 내는 걸까. <스피드 레이서>는 팝한 세계와 사이키델릭한 세계가 마치 매트릭스와 매트릭스 바깥으로 구획되듯 구체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는 뭉뚱그려져 있지 않고 정확히 구획된다. 경주 트랙 바깥의 세계는 팝하지만, 경주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먼저 트랙 바깥 팝한 세계. 여기는 종이 인형들을 오려 붙인 것처럼 인물과 풍경이 콜라주식으로 오려 붙여져 있고(흔히 말하듯 원근법적 파괴는 그다지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캐릭터는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봄직한 과장된 표정으로 일관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일명 캔디 랜드라고 불릴 만큼 알록달록하다. 그 모든 것이 형광도료를 통째로 뿌려 놓은 것 같은 상태다. 이 의도적으로 키취적인 세계를 접했을 때 우리가 팝 아트 미술과의 연관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트랙 바깥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거의 팝 아트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인물과 동네로 유별나게 채색하고 콜라주 해놓았다. 짐 호버만은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단 뒤 케니 샤프, 제프 쿤, 무라카미 다카시, 케네스 놀란드 등등 팝 아트 미술가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이 이 영화의 미장센에 관여했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추론하는데, 나는 실제 그들이 참여했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말할 입장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참여 유무가 중요하다 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손길이 닿았건 그렇지 않았건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 바깥의 세계는 확실히 팝 아트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트랙 바깥의 세계가 팝한 것인가.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동차에 타고 경주를 벌일 때 그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특히 주인공 스피드가 형의 환영과 경주하는 영화의 초반부 경주 장면과 마지막 트랙 경주 장면에서 이 사이키델릭함은 두드러진다. 우리가 <스피드 레이서>를 보며 사이키델릭하다고 감탄할 때는 대체로 자동차의 경주가 벌어지는 이 때 트랙 안 세계의 속도감과 재현성을 상기해낼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이키델릭한가. 빛의 속도, 광속으로 달린다고 말하고 싶어질 만큼 아찔한 자동차의 움직임. 그 차의 속도감을 표현해내는 조작된 기술은 자동차가 아니라 그 주변으로 흐르는 빛의 채색이며 동시에 아찔한 빛의 플래쉬들이다. 속도감은 붓 칠해 놓은 곡선과 일직선의 형형색색의 선들로서 표현된다. 혹은 그 안은 꼭 빙빙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어지럽다. 그 선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 겹겹이 흐르고 겹치는 도안이 될 때 우리는 멈춘 스튜디오 안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느낀다. 만화경, 그것의 도안, 그것의 효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사이키델릭하다는 것이 환각의 상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인상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판단을 가르는 것은 약(drug)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LSD의 문화적 상징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그것의 유포된 비주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과 자동차의 경주, 즉 사이키델릭한 비주얼이란 실은 환각의 비주얼이다.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낯설음과 그로 인한 역효과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의 기원이 1950, 60년대로 소급된다는 사실에 더해 자동차의 모더니티라는 점까지 합일시켜보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의식적 관람 경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른바 <스피드 레이서>는 ‘디지털 시대에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재현을 당신은 과연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바뀐다. 그건 워쇼스키 형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질문일 것이다. 트랙 바깥의 콜라주 된 팝한 세계로, 또 하나는 트랙 안의 금속적이며 디지털적이며 사이키델릭한 세계로 비주얼이 처리될 때, <스피드 레이서>를 접한 관객은 혹은 그 예고편을 구경한 관객은 이 영화에서 오는 어떤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부담감이란 사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유처럼 촌스럽거나 현란하거나 서사가 없다는 표현에 걸맞는 것이 아니다. 팝과 사이키델릭이 가져온 모조화된 모더니티가 낯설다는 토로다. 예상외로 그 부담이 <스피드 레이서>를 보는 관객 사이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워쇼스키 형제가 자신들의 유년 시절에 기원하는 모조화된 모더니티를 팝과 사이키델릭이라는 구체적인 비주얼의 양분을 통해 재현해내면서 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며 희희낙락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도 이 점이 어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역효과? 맞다. 그 역효과가 사실은 이 영화의 흥행적 수치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전 세계적으로 <스피드 레이서>와 같은 시기에 개봉한 뒤 놀랍게도 <스피드 레이서>를 크게 물리치고 흥행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아이언맨>은 지금까지 출현한 각종 맨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후진적이며 직접적이다. 주인공이 무기 공학자라는 점을 근거 삼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아이언맨은 한눈에 ‘인간 미사일’과 ‘인간 화염 방사기’의 비유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언맨, 즉 철갑맨은 덜 미래지향적이고 덜 복잡하며 더 군사적이어서 액션영화의 관객을 손쉽게 자극한다. 지금 전 세계는 팝과 사이키델릭으로 칠해져 모조화된 모더니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품을 구경할 것인가, 아니면 몸에 화염과 미사일을 장착한 군사주의적 로봇을 구경할 것인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있는 형국이다. <스피드 레이서>를 본 당신은 전시장에 가서 팝 아트를 쉽게 이해할 만큼 지적인가(내게 팝 아트는 언제나 어렵다). 아니면 당신은 사이키델릭 아트의 근본적인 환각성에 관해 자신 만만하게 과감한가(생각해 보니 나는 약을 해 본 적이 없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적 선택은 방어선을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역효과를 낸다. 대중영화 선호의 관객이 예술로서의 영화를 찾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는 것에 저항감을 갖게 된 셈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확실히 지지의 미아가 됐으며 애장과 순결과 유희라는 입장에서 원본보다 더 나아가는 독창성을 발휘하고자 했으나 의도치 않은 역효과에 붙들려 괴상한 예술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애장의 영화가 일으킨 거대한 오해의 사건이 된 셈이다. <매트릭스>에 환호를 보냈던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스피드 레이서>에 다시 찬사를 보낼지는 미지수이며 <매트릭스>의 S. F 지지자들이 보기에 <스피드 레이서>는 형광도료의 유치한 난장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건 타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워쇼스키 형제를 영화의 네오라고 생각했던 건 실은 언제나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며 그들 스스로는 오로지 영화의 레이서라고 여겨 왔을 뿐이니까.“내가 만드는 영화가 뭘 추구하고 있는가는, 단순히 대단한 그림을 만들었다, 신난다! 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영화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지만, 그런 것이 워쇼스키 형제에겐 없다고나 할까.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을 비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오시이 마모루가 옳다.

[듀나의 배우스케치] 한고은

한동안 <천하일색 박정금>을 봤죠. 꾸준히 본 건 아니고 그냥 중간부터 몇주 동안 봤던 겁니다. 원래 전 주말연속극은 꾸준히 못 봐요. 인내심이 부족하고 적당히 에피소드를 건너뛰며 볼 만큼 느긋한 성격도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잡고 앉아 그 연속극을 봤던 건 연속극 고정 시청자에겐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으니…. 이런 거였습니다. 전 우연히 소녀시대 멤버 윤아가 연기한 캐릭터가 살인죄로 체포되는 걸 봤어요. 아무래도 진범은 아닌 것 같았고요. 근데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진범이 안 잡히는 겁니다. 제 성격에 이런 건 못 참죠. 범인이 잡힐 때까지 봐야 해요. 어떻게 되었냐고요? 잡히긴 잡히더군요.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서 실망했지만. 교훈 얻었어요. 주말연속극에 섞여 들어간 살인 이야기에서 전문 수사극의 치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살인범을 기다리느라 참고 있는 동안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이 시리즈의 팜므파탈 사공유라(도대체 무슨 이름이 이래요?)를 연기한 한고은에게 놀랄 만큼 관대해졌다는 것이죠. 전엔 그 덜컹거리는 발성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을 보는 동안 전 그걸 당연한 개인적 스타일로, 그것도 꽤 매력적인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캐릭터 때문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캐릭터라면 <경성스캔들>의 차송주가 훨씬 매력적이에요. 사공유라는 딱하고 진부하고 한심합니다. 동정할 수는 있어도 견디긴 힘들죠. 순전히 드라마의 방해물로 태어난 캐릭터입니다. 전생에 작가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렇다면 그동안 제가 한고은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걸까요? 아뇨, 그 정도로 한고은의 경력을 치밀하게 따라간 적은 없어요. 특히 <사랑과 야망>은 거의 보지 못했지요. 강지환 열성팬과 같은 집에 살고 있어서 <경성스캔들>의 차송주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지만요. 그냥 감만 믿고 대충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전 <경성스캔들>과 <천하일색 박정금>을 비교해봤습니다. 다시 보니 <천하일색 박정금>의 테크닉, 특히 발성 테크닉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긴 해요. 여전히 연기 스타일은 양식화되어 있고 영어 억양이 지워지지 않은 대사 톤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노련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쌓은 경험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대극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군요. <경성스캔들>과 같은 시대극에선 과장된 연기가 용납되기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과 억양을 고수할 수 있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이나 <꽃보다 아름다워>와 같은 앙상블 위주의 현대 배경의 연속극에서는 자신을 주변 환경과 맞추어야 하죠.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고 있었던 건 드라마의 스토리와 별개로 진행되는 한 배우의 투쟁인 겁니다. 어떻게 텔레비전 세계에서 정착하고 호평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의 테크닉에 완전한 확신이 없는 한 배우가 쟁쟁한 전문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깨보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완전히 성공한다면 배종옥의 노련한 연기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한고은은 여전히 두 세계 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채 방황하고 있고 저에겐 그게 정말로 흥미진진해요. 심지어 캐릭터와 드라마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론 이건 보편적인 매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한고은의 발성에 신경이 쓰여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배우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니 좋은 연기라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배우를 보는 재미가 꼭 연기 테크닉과 비례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고딩, 헤딩

귀싸대기 한방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80년대 초반, 어느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특수반 신설과 관련된 학교쪽의 방침에 반발하며 2학년 한반 학생 60여명이 들고일어난다. 반장의 주도 아래 그들은 각자의 의자를 들고 운동장의 조회대 앞에 집결해 앉는다. 수업을 거부하고 비장한 침묵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잠시 뒤, 소식을 접한 교감이 교련 선생과 함께 달려온다. 주동자인 반장과의 말없는 눈싸움 5분여. 교감은 갑자기 육두문자와 함께 반장의 귀싸대기를 후려친다. 풀썩, 주저앉는 반장. 이어지는 교감의 발길질. 잔뜩 독을 품었던 학생 군중의 시위는 어이없이 썰렁하게 진압된다. 그리고 오리걸음… 매타작…. 1980년대 초반은 고등학생 운동의 암흑기로 기억된다. 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과 60년 4·19 학생의거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지만,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그들은 애 취급을 당하며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일차적으로는 패션 탄압이었다. 바리깡으로 박박 밀어버린 머리와 시커먼 교복, 바짝 조여야 하는 후크. 대학가는 시위로 시끄러웠지만, 고등학교 주변은 숨죽였다. 감히 개갰다가는 교사들로부터 거의 개처럼 맞았다. ‘귀싸대기’는 일제시대 일본 순사의 채찍을 계승했다. 그것은 꼰대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금기어는 ‘말대꾸’였다. 훈계하면 잠자코 들어야 했다. 말대꾸하면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시대는 변했다. 고등학생, 아니 고딩들은 더이상 꼰대를 참아주지 않는다. 거지 같은 훈계엔 말대꾸를 넘어 아예 마이크를 잡는다. 귀싸대기를 맞는다면 손목을 물어뜯거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복수할 것이다.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는 미국산 쇠고기 개방 반대 촛불 집회장에서 자신의 논리와 권리를 밝히는 그들을 보며 든 생각이다. 조·중·동은 꼰대를 닮았다. 80년대 초반 제자들의 소박한 침묵시위를 귀싸대기 폭력으로 잠재우던 교감을 연상시킨다. 첫째, 10대를 무작정 철없는 어린애로 치부한다. 그들이 똑똑한 어른들 밑에서 자랐고, 논술이라는 이름의 고급 논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둘째, 이해관계가 있다. 교감은 교장으로 승진해야 한다. 승진의 장애 요소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 조·중·동은 방송 겸업 따야 한다. 이명박 정권에 잘 보여야 한다. 그 결과는 수입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누가누가 더 멋지게 떠벌리면서 보도하느냐 하는 경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학생운동의 순수함은 현실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에서 나온다. 취직 걱정에 찌든 대학생이 점점 더 자유로움을 잃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롭지 못하면 미래의 공기를 호흡하지 못한다. 현실과 타협한다. 이제 순수한 학생운동의 중심이 고딩에게로 이동한다고 하면 너무 섣부른 예측일까. 물론 섣부른 예측이다. 취직 걱정은 이르지만 입시 걱정이 압도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뭔가에 집중할 때 고딩이 대학생보다 열광적인 건 분명하다. 얼마 전 고딩들의 광고 효과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무가지 한장이 교실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높은 회독률을 보인다고 한다. 휴대폰이나 MP3 등 전자기기의 광고주들은 주요 광고 타깃을 아예 대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낮추기까지 했다는 거다. 심지어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같은 전자제품까지 예외가 아니란다. 가족 단위에서의 소비와 관련된 발언권과 결정권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탓이다. 87년 6월 항쟁 때 대학생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군부독재 타도하여 부모님께 효도하자.” 이제 그 자녀들이 자라 고딩이 되어 이렇게 외친다. “미친 소 막아내어 부모님께 효도하자.” 고딩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세상,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시카 알바] “관객이 비명을 지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각막 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게 된 바이올리니스트 시드니(제시카 알바)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현실 세계와 자신의 눈에만 어렴풋이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들로 인해 수술 뒤에 오히려 주위와 고립되어 간다. 홍콩의 동명 공포영화를 리메이크한 <디 아이>의 주연을 맡은 제시카 알바는 임신한 티가 꽤 역력해 보였는데 <허니> <굿 럭 척> 등의 가벼운 코미디물이나 <판타스틱4> 같은 앙상블 액션영화와 달리 혼자서 1시간40분을 이끌어나가야 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에 특히 애착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제시카 알바와의 인터뷰는 지난 1월22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제작노트에 보면 감독이 당신이 작품에 이 정도까지 열의를 다할 줄 몰랐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당신에 대해 흔히들 가지고 있는 편견에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별로. 자주 마주치는 반응이다. 같이 작업했던 대부분의 감독들이 다 그런 말들을 하더라. (웃음) 프로젝트에 일단 합류하면 감독에게 매일 시간날 때마다 전화해서 시나리오랑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크 엔젤> 할 때, 제임스 카메론 감독한테 그렇게 배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작업한다는 것이 사실 어느 정도 희생을 요구하지 않나. 가족이라든가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니까. 그런 만큼 영화를 할 때에는 100%를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희생의 의미가 없다. 그래서 촬영 때만큼은 일이 곧 생활 그 자체라고 받아들이고 임한다. -이번 작품은 공포물인데, 개인적으로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 사람들이 와 있는 것. -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었나. =아니다. 그냥 공포영화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 것 같다. 아래층에 누가 있어… 등등의 상상 말이다. 공포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공포영화가 있다면. =딱히 하나를 들기는 어려운데…. 맨 처음 나온 <13일의 금요일>이 내가 처음으로 본 공포영화였다. 그 영화 때문에 어렸을 때 한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싸이코>도 무서웠고, <새>도 그랬고, <악마의 씨>도 무서웠다. -예로 드는 영화들이 다 심리스릴러쪽인 것 같다. =그런가. 확실히 고어쪽은 아니다. <헬라이저>나 <쏘우>처럼 누군가가 육체적으로 끔찍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힘들다. -이번 영화 속의 캐릭터는 어떠한가. =시드니는 내면이 무척 복잡한 인물이다. 비명을 질러대며 누군가에게 쫓기는 인물이 아니라, 내면의 심리적인 공포를 천천히 경험하는 인물이다. 캐릭터 연구를 위해 시각 장애 경험을 해보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해보고 몇 개월간 바이올린 레슨을 혹독하게 받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요소가 주는 공포감이 분명히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방향감각을 잃고, 각기 다른 표면 위를 걸어간다는 것. 약간의 돌출부분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드니라는 인물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실제의 나를 넘어서 그녀를 연기하기 위해서 한번 더 생각하고, 해석해야 했다. -영화에서처럼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문득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나. =글쎄. 없는 것 같다. 그 눈의 실제 주인 역을 맡았던 배우와 같이 촬영할 때 감독이 당시에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연기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내 동작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하게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왠지 오싹했다. 꿈에도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임신 중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가. 힘들지는 않나.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내 몸을 장악해버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내 몸의 모든 변화에 그냥 순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를테면, 별것도 아닌 일에 화가 순식간에 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배가 고프다든지. 뭐 이런 일들에 말이다. -앞으로 계획이 어떤가. 출산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활동은 접을 계획인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작가파업 때문에 시나리오를 접할 기회가 확실히 줄었는데다가, 임신한 캐릭터가 나오는 시나리오가 흔치 않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브로드웨이 쇼에 출연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랬다. (웃음) 그런데 쇼가 시작될 즈음이 만삭일 때라 힘들 것 같다. -브로드웨이 쇼는 여러모로 많이 힘들다고들 하는데, 그쪽에 관심이 있나. =그렇다. 브로드웨이 쇼도 만만치 않지만 1시간짜리 텔레비전 액션드라마는 정말 힘들었다. <다크 엔젤>할 때, 매일 찍고 토요일 새벽 6시에 촬영이 끝나서는 월요일 새벽 6시에 촬영장에 나가야 했다. 주말에는 인터뷰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모든 장면에 내가 나와 쉴 틈이 없었다. 액션 분량을 담당하는 추가 촬영도 해야 했으니까. -시나리오가 계속 들어올 텐데, 임신이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가. =특별히 임신 때문이라기보다 나이가 들면서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십대 때에는 들어오는 역을 하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무엇인가 내면이 복잡하고 색다른 캐릭터를 찾게 되는 것 같다. -평론가들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주관적이고, 정치적이기도 하고, 그외에도 복잡한 요소들이 많은 것 같다. 내게는 관객이 어떻게 봐주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관객이 와주고, 극장에서 무서워하고 비명을 지르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