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UPCOIN24문상세탁btc현금화문상세탁btc현금화'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억척스런 네여자의 곗돈 되찾기 소동극 <걸스카우트> 공개

일시 5월 26일(월) 오후 2시 장소 명동 롯데 애비뉴엘 이 영화 아이들 학원 봉고차를 몰면서 살아가는 미경(김선아), 동네마트에서 일하며 백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만(나문희), 아들 둘 뒷바라지하느라 인형 눈 붙이기부터 돈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봉순(이경실), 프로골퍼의 꿈을 접고 골프장 캐디로 일하고 있지만 제법 빚이 있는 은지(고준희)는 한 동네에 사는 네 여자들이다. 힘들지만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미용실 원장(임지은)이 피 같은 곗돈을 들고 달아난 것. 혼란에 빠져있던 그들은 미경의 제안으로 원장이 자주 들락거렸던 미사리 물안개 까페에 무작정 잠복하기로 한다. 모두가 적지 않은 그 곗돈이 다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다투고 화해하면서 잠복하던 그들은 몹쓸 용의자를 발견하고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은 단순히 아줌마들 곗돈 정도가 아니었다. 22억 원 상당을 둘러싸고 보다 큰 배후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 것. 게다가 그들에게 잡힌 원장은 봉순에게 맡긴 돈의 5배를 주겠다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단순히 맡긴 곗돈만 찾겠다고 결심했던 그들은 그렇게 더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말말말 “지금껏 호흡이 가장 좋았던 영화 같다. 여자들 사이의 디테일이 많은 것도 좋았다. 많이 맞고 쫓겨 촬영 때는 몰랐다가 점점 인대가 아파오더라.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나문희 선배와 세 번이나 호흡을 맞춘 것도 영광이다.” -김선아 “그런데 사실 김선아씨는 덩치가 좋아서 맞을 때 별로 불쌍해보이지 않더라. 그래서 감독님이 캐스팅한 것도 같기도 하고.(웃음) 나 역시 지금도 떼인 돈을 생각하면 갈증이 날 정도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먹고 살 정도는 되겠지 라며 돈을 빌려가선 안 갚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돈을 빌려가 종적을 감춘 경우가 다반사라 이젠 아예 안 빌려주고 있다.(웃음)" -이경실 “와이어 액션이란 걸 난생 처음 해봤다. 집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하고 준비운동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촬영 당일에는 괜찮더니 이틀 지나니 죽을 것같이 아프더라. 그러다가 얼마 전에 뉴욕에서 뮤지컬을 봤는데 남자 배우가 탭 댄스를 하면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와이어 액션을 소화하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내가 좀더 젊었으면 저런 것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나문희 100자평 핸드볼이 아닌 떼인 곗돈으로 똘똘 뭉친 또 다른 <우생순>이라고 할까. 아니면 한국 아줌마들의 ‘무대뽀’ 정신이 할리우드 강탈영화 장르를 만났다고 할까. 각자 생활에 허덕이던 네 여자가 합심해 곗돈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꽤 자유로운 일탈의 기회도 제공한다. 그래서 인상적인 대사는 원장을 잡으러 나서 올림픽대로로 미사리를 향해 질주하면서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좋다”는 말이다. 네 여배우들의 호흡도 좋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넉넉한 여운을 남긴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다양한 크레딧으로 활동하던 김상만에게 영화감독이라는 직함도 당당하게 만들어줄만하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도둑 소탕 작전엔 여러 가지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걸 스카우트>는 그 돈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 사람들의 모여 엉킨 엉망진창 소동극이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 건설회사 채권을 떼먹은 사원, 이 남자와 짜고 붙은 곗돈 도둑녀, 채권을 되찾아 와야 하는 용역업체 해결사, 해결사에게 사채 빚을 진 여자. 돈 가방과 채권가방은 이들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강탈영화의 형식을 옅게 빌려온 <걸 스카우트>는 대사나 몸 개그보다도 상황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코미디영화다. 이 상황들이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심각했다면 최동훈 감독의 두 편의 영화와 비교되었을 법도 한데, <걸스카우트>는 (주인공들이 여성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훨씬 유한 느낌을 가졌다. 마지막까지 치밀하다고 할 순 없고 썰렁한 순간들이 없지 않지만 포스터 디자인, 음악, 미술 등 영화 분야에서 다재다능함을 발휘했던 김상만 감독의 데뷔작으로서는 흉잡을 구석이 별로 없다. 크고 작은 앞뒤 설정들 간의 개연성 덕에 영화는 아기자기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고, 들쭉날쭉한 배우 각각의 개성과 연기력도 캐릭터에 힘을 실은 연출력 덕분에 균형을 이룬 듯하다.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도 많았을 텐데, <걸스카우트>는 우리가 포스터 이미지와 예고편만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있는 영화다. 박혜명 <씨네21> 기자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자력구제 소동극을 그린 <걸스카우트>는 꽤 재미있는 영화이다. 첫째, '일하는 여성'(중산층 이하의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 '일하는 여성'이다)들의 애환이 서려있고, 둘째, 코미디적 감각도 나쁘지 않으며, 셋째, 사건의 규모도 적당한 편이다. 하지만 좋지도 않다. 그 이유는 첫째, 감정이입이 될 짬을 두지 않아서 인물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며, 둘째 사건의 흐름이 중간에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썩 매끄럽지가 못하고, 셋째, 상대편의 욕망을 무성의하게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어찌 해결사는-아무리 그의 목적이 거액의 채권회수였다 할지라도-‘현금을 보기를 돌같이’ 할 수 있는지? ‘도둑년’은-임기응변에만 강할 뿐-어떻게 채권을 현금화 할 계획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지?).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노련하지 못한 연출과 편집 탓에 결과는 좀 아쉽다. 특히 배우들의 고생이 눈에 훤히 보여 더욱 그러하다. 황진미/영화평론가

[김혜리가 만난 사람] 만화가 최규석

뿔도 없는 사슴이나 그리는 만화가. 어디선가 최규석이 스스로를 일컬은 표현이다.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그의 히트작 <습지생태보고서>(2005)에는 만화과 대학생들의 궁색한 자취방에 뻔뻔하게 얹혀사는 닳고 닳은 사슴 ‘녹용이’가 등장한다. 뿔 없는 사슴만 그린 게 아니다. 최규석의 상업지면 데뷔작인 <공룡 둘리>(2003년 <영점프> 게재.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수록)는 초록빛 아기공룡을 추레한 국방색 파충류로 만들어 파란을 일으켰다. 성년이 된 서울의 둘리는 벌써 팔자주름이 깊게 패고 프레스에 마법의 손가락까지 잘린 이주노동자다. 또치는 매춘부가 됐고 도우너는 끌려가 해부된다. 친구들은 더 가까운 이익과 다급한 필요 때문에 서로를 저버린다. 현실에서 판타지를 길어내는 능력이 상상력이라면 판타지를 현실의 자갈밭에 기어이 끌어다놓는 이 징한 능력은 뭐라 불러야 할까. 하지만 진저리의 끝에서 독자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는 이 도시에서 둘리와 친구들이 고길동 아저씨네 군식구로 나이 먹었다면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씨네21> 독자들의 감(感)을 위해 보태자면, 최규석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드러난 현실인식에 동의하며 이창동의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 데뷔 6년째인 최규석은 오세영, 박흥용, 이희재의 물줄기를 잇는 극화 작가로 꼽힌다. 동세대 만화가 중 발군이라는 평도 간혹 들린다. 2008년 4월 중고생을 위한 6월항쟁 교육만화 <100℃>를 완성한 그는, 오는 6월에 세 번째 단행본 <대한민국 원주민>(창비 펴냄)을 서점에 내놓는다. 2006년 4월부터 1년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대한민국 원주민>은 1977년 경상남도 진양군 명석면 오미리에서 2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작가가 부모형제를 인터뷰해 그린 비망록이다. 가족 인터뷰야말로 인터뷰의 궁극이라고 생각해온 기자로서는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규석 가족의 1980년대는 도시에서 자란 동년배들이 부모의 회고담에서나 들었을 법한 정경과 일화들로 빽빽하다. 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당연히 여겨지는 딸, 숨이 간당간당한 사슴 목에 빨대를 꽂아 피를 마시는 어른, 창문 너머로 구경하는 이웃집 안방의 텔레비전이 거기 있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구석진 시간대에 가족사라는 창을 통해 빛을 던진다. 덤으로 이 만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온 젊은 예술가들의 성장배경과 경험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비해 편중돼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가난한 대학생들의 자취 생활을 그린 <습지생태보고서>, 군대를 다룬 단편 <자살방조>와 <창> 역시 30년 남짓한 인생에서 잘도 이야기를 채굴하는 최규석의 밝은 눈과 여문 손끝을 보여준다. “누가 고민을 토로하면 그 슬픔이 전해질까봐 무서웠어.” “나도 내 꿈만 바라보며 살기에 벅찬데 왜 다들 나에게만 나타나는 걸까?” <습지생태보고서>의 대사를 빌린 작가의 독백이다. 최규석은 약한 사람과 일탈한 사람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우리의 못된 버릇을 선선히 보아 넘기지 못한다. 동네 바보형의 수난을 그린 단편 <콜라맨>, 군대 비품을 의인화한 우화 <자살방조>가 그 안테나에 딱 걸린 케이스다.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단편집 <아미띠에>에 묶인 최규석의 작품 <가짜 비둘기>에서 서울역 앞 노숙자들의 얼굴은 비둘기의 머리다. 명백히 작가 본인의 캐릭터인 <가짜 비둘기>의 극중 만화가는 서울역 앞 노숙 1박을 결심하고 취재에 나서지만 냉기와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귀가한다. 그처럼 최규석 만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미안하다’로 수렴된다. <대한민국 원주민>의 한 갈피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한 셋째누나의 적금을 헐어 미술학원에 등록한 작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박탈감보다 그 와중에 수혜를 받은 자의 죄책감이 그의 만화를 이끄는 힘이다. 최규석의 필살기 중 하나는 동물을 의인화하는 한편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연명하는 인간의 현실을 기회 닿는 대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데뷔 이래 우화적 비판의 만화를 생산해온 최규석은 최근, 죽 맞는 동지인 연상호 감독(애니메이션 <지옥> 연출)과 더불어 홈페이지에‘노골리즘’을 제창(?)했다. 미루어 이해하건대, 사회 모순이 빚어내는 슬픔과 무기력의 정서를 휘뚜루마뚜루 그린들 일생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나의 문제적 현상이라도 찍어서 선명히 발가벗기는 작품을 내놓겠다는 결의다. 만국의 노골리스트여. 단결까지는 무리라면, 주목하라. -‘모과’라는 호(號)를 쓰고 있는데요. 뜻이 뭐죠?(최규석 작가의 홈페이지는 www.mokwa.net이다.) =속담에도 있잖아요. 모과나무처럼 배배 꼬인 놈.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어 많이 쓰는 말인데? 모과나무는 꼬여서 목재로 못 쓴대요. 보통 한국사회에서는 사람을 보고 기둥이 되어라, 서까래가 되어라 이야기하고 아이들도 “어디 꼭 필요한 사람이 될 테야”라고 다짐하죠. 저는 어디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사는 건 참 짜증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도 날 쓸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좌중 웃음) 그런데 20대 초반 군대 휴가를 나와 보니 인터넷 세상으로 변해 모두들 닉네임을 갖고 있더라고요. 제대하면 홈페이지 만들어 그림을 올려야겠다 싶어서 닉네임으로 삼았어요.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작가인데도 작품을 보면 중장년 같습니다. 가족사를 그린 <대한민국 원주민> <습지생태보고서>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나 <100℃> 같은 회고적 소재를 자주 다뤄서일까요? =저는 젊은이였던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요. 동시대에 젊은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내가 합치된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도시 출신 친구들은 공통으로 착착 밟아온 비슷한 단계가 있어요. 이를테면 누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본 책과 영화, 들은 음악이 있죠. 그런데 나한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애어른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선생님조차 수업시간에 은행 심부름 보냈으니까. (웃음) -새로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면 동시대의 도시화된 지역과 아주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걸 알 수 있겠더군요. 다른 시대를 산 같은 세대라고 해야 할지, 같은 시대를 산 다른 세대랄지. =대학에 가고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야 그런 거리감을 확실히 느꼈어요. 이른바 386세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누나들과 비교가 되더군요. 그분들 데모할 그맘때 딱 누나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친구 아버님들과 얘기가 잘 통해요. 산에서 뜯어먹던 쑥범벅의 추억이라든가. (웃음) 한번은 여자친구가 보리밥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왜 쌀밥 두고 보리밥 먹어! 역사책을 보면 시대 구분이 마디마디 딱딱 나누어지잖아요? 중세 다음 근대, 그 다음 현대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가 비율만 오르내리면서 겹쳐져서 동시에 움직이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을 하면서 세상의 상식이 모든 구성원에게 고루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으니 자꾸 21세기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안 돼요. 어렸을 때 미래를 상상한 과학책 보면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자동차 타고 다녔잖아요. 그걸 보고 지금 사람들은 웃지만 사실 요새 자가용 비행기 타는 사람에겐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누군가에겐 옛날 사람이 말한 21세기가 이뤄졌지만 어떤 사람에겐 아닌 거죠. -우리가 사는 시간대가 균질하지는 않다는 거군요. <대한민국 원주민>은 100% 자전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처음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죠. 정작 제 경험은 많지 않지만요. 가만, 그럼 자전이 아닌가? 가족들이 제게 거짓말을 했다면 몰라도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물어 검증된 이야기만 그렸어요. 집에 자주 놀러오던 엄마, 아버지 친구분 이야기도 들었죠. 아버지는 별로 퍼줄 것은 없지만 친구를 잘 만드는 성격이라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경비원을 하는 아파트가 가까워 하굣길에 들르곤 했는데, 주민들이 술 드시는 아버지에게 타박은커녕 안주하라고 찌개를 끓여다줬어요. 돌아보면 예삿일은 아니에요. (웃음) 뭔가 매력이 있으니 우리 엄마도 여태 같이 살았겠죠. -제목을 직접 지으셨죠? 굳이 ‘원주민’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낙원구 행복동 생각도 언뜻 스쳤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균질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과도 연관이 될 듯합니다. 오래 묵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랄까. =구상할 때 ‘원주민’이란 말만 또렷이 떠올랐어요. 보통 철거 지역에서 쓰는 단어죠. 원주민은 자신들의 과거나 생활방식이 자연스러운 형태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아버지만 해도 다니던 길은 모두 수몰됐고 젊은 날의 추억은 어디 가도 볼 수 없죠. 살아 있는 사람이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박물관에 간다는 건… 좀 신기한 일이에요. 촌놈과 원주민은 다른 말이에요. 미국을 예로 들면 아메리카 인디언이 원주민이고 텍사스 사람은 촌놈이고. 하하. 한국에는 촌놈이 없는 것 같아요. -본인이 취재한 가족사에 대한민국이란 제목을 붙여 역사의 한 조각을 재구성한 셈인데요. 이런 기획이 해볼 만하다는 판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할 때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80년대 중반에야 도시로 이주한 아버지 같은 사람은 70년대 농촌을 나와 도시 빈민을 형성한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항거한 적도 없기에 역사책에 민중으로도 기재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엄마는 전쟁 때도 정규군은 퇴각할 때 한번밖에 못 봐서 전쟁을 인식하지도 못했대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싶었어요. 생활사 박물관에 가보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식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아저씨들이 있어요. 아이들은 듣기 싫어하죠. 안쓰러워요. 다시 그와 같은 경험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 아저씨의 부인도 도시 사람이라면 가족 안에서 절대 소통할 수 없는 기억을 안고 사는 거잖아요. 만화로 생각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해요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세상이 언제나 바르게 돌아가지는 않으며 때로는 심하게 왜곡돼 있다는 관찰입니다. 언제부터 세상의 허점을 인식했나요? =저는 피부에 직접 와닿지 않으면 생각을 잘 못하는 부류예요.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고 그 폭력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어요. 1학년 때는 정의의 사도가 돼서 약한 애들 괴롭히는 친구를 불러다놓고 때리기도 했어요. 저는 도덕을 늘 가슴에 품고 쓰레기 보이면 줍는 이상한 애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제게 맞던 친구가 참다 못해 덤벼드는데 싸움이 길어지니 못 이기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맞고 나서야 폭력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안 건가요? (웃음) =아뇨. 맞는 게 아픈 거구나라는 걸 알았죠. 집에서는 맞은 적이 없었거든요. 한번은 존경하는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는데 엄마가 봉투를 마련하는 거예요. 우리 선생님을 뭘로 보냐고 난리를 쳐서 말렸죠. 그런데 합창대회에서 ‘듣보잡’인 애가 지휘자로 뽑혔어요. 학급위원 애들이 그 애 엄마가 한턱 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잘하는 편이니까 집단에서 강자 입장이었는데 중학교 가면서 공부를 하는 습관이 없으니 처지면서 위치가 달라졌어요. 상위계급에 있다가 갑자기 하층민이 되니까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최초로 본 만화가 이상무 선생 작품이고 아다치 미쓰루 작품에 감동받아 만화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화를 파고들어 찾아 읽은 편이었나요? =처음 접한 만화도 도시 아이들이 시골 애들 돕는다고 보내준 만화잡지였어요. 잡지란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두꺼운 책인데 그림이 다 다르구나 했죠. 연재라는 형식의 개념도 없었고요. 손에 들어오는 대로 봤죠. 그 점이 제가 처음으로 느낀 도시 출신 아이들과의 차이였어요. 그 애들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찾아다니고 욕망을 해요. 하지만 제겐 그런 욕망이 없었어요. 가난하게 사는 데는 욕구가 없는 것이 도움이 돼요. 저희 가족이 벌이가 없는데도 빚지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없으면 아예 안 쓰는 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만화를 하고 싶었나요? 아니면 반대로 만화가 좋아서 만화로 할 이야기를 찾은 경우인가요? =이야기라는 건 머릿속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형태로 떠오르잖아요. 제 경우는 그게 만화예요. 굉장히 짧은 연출의 서너칸이 연결된 형식으로, 이야기의 장면이 그려지죠. -콘티를 짜나가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때로는 콘티가 그대로 원고가 되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작업방식에 이유가 있었군요. 다시 말해 만화로 생각한다고 치면 되겠네요. =만화에 감동을 받은 거죠. 텔레비전이 집에 없었던 이유도 있을 거예요. 친구네 집 책들을 몽땅 읽었는데 더이상 갈 친구 집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아는 동생들 집으로 범위를 넓혔죠. 그래서 독서가 계통이 없어요. 아동문학전집을 본 다음 다섯살짜리를 위한 디즈니 그림책을 봤다거나 하는 식이죠. -초기 단편 중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솔잎> <콜라맨>을 보면 거짓에 의해 세상이 지탱되고 있다는사실을 독자에게 각성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노골적입니다. 표현이나 묘사보다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욕구가 두드러져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취향이라는 것이 늦게 형성돼서 그런가? 물론 제 취향에 몰두하고 싶을 때도 있고 전달력을 강화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습지생태보고서>가 제 취향에 제일 충실한 작품이죠. 개그도 치면서 일상을 뒤집어보는 만화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재미있는 이야기니까요. 앞으로는 취향보다 전달에 치중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말인가요? =예. 지금은 전달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해요. 6월항쟁을 그린 교육만화 <100℃>는 물론 전달이 목적인 작품이었는데 문제는 전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죠. 그냥 뭔가 잘못됐다는 분위기만 전하는 거와 사회의 어떤 문제점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전하는 건 달라요. 예를 들어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사랑도 하고 액션도 하지만 보고나면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하나는 확실히 보여주잖아요. 제 단편 <사랑은 단백질>도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었는데 비유를 하니까, 독자들이 보고 나서 “채식을 해야지” 하고 이해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유니 은유니 이런 거 다 황이구나 싶었어요. (웃음) -만화가 전달에 있어서 다른 매체보다 유능하다고 보나요? =제약이 덜하죠. 제작비도 적지만 만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란 인식이 있어서 웬만큼 그려도 상업적인 만화로 포장만 할 수 있다면 태클이 없어요. 드라마에서 검사나 의사를 이상하게 다루면 마구 항의가 들어오는데 말이죠. 일본 만화도 보면 기업운동, NGO운동을 다루는 만화들이 껍데기는 일본 장르 만화 형식을 쓰고 나와요. 리얼리즘이라고 입체적인 주인공이 고뇌하고 작가는 그를 비웃고 이러는 것보다 차라리 통속적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우정,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한 분야가 눈에 딱 보이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쩐의 전쟁>도 그런 예죠. 보통 사회의식 있는 작품은 사람들의 고통을 뭉뚱그려 보여주지만 인물만 입체적이고 그를 둘러싼 세상은 사실적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주인공은 단순해도 세상은 잘 보이는 만화를 한번쯤 그리고 싶어요. -제가 접한 대다수 예술가들의 관점과는 반대네요. 대개는 개인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특기라고 믿잖아요? 효과를 기준으로 생각하시네요. (웃음) =이명박 정권의 실용정책에 부응하는 건가요? (웃음) <100℃>를 하면서도 긴 리뷰보다 짧은 리뷰를 많이 받고 중고생들이 변화를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긴 리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사실 그 작품 안 봐도 돼요. 원래 자기 안에 있던 얘기를 작품을 빌려 끄집어낼 뿐이죠. 반면 두세 글자로 쓰는 평은 아무리 촌스럽고 단순해도 내 만화를 안 봤으면 못 느껴봤을 감정일 테니까요. 인권영화제 가서 느끼는 갑갑함이 그런 거죠. 작품들은 너무 좋은데 그런 작품 안 봐도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어느 정도 상식이 잡혀 있는 세상이라면 작가가 이런 고민까지 안 해도 되겠죠. <식코>가 한국에서 나왔다면 그렇게까지 반응이 있었을까? 안 될 것 같아요. 노조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 <심슨가족>처럼 노조를 비꼬고 희화화하는 만화를 그리기 힘든 거죠. -최근 창작의 원칙으로 ‘노골리즘’을 홈페이지에서 주창하셨지요? 지금까지 우화적 사회비판은 할 만큼 했다는 인식에서 나온 아이디어인가요? =할 일이 훨씬 많은데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연상호 감독이 TV인터뷰에서 언급했다고 하더군요. 먹물이 한명 붙어서 선언문도 쓰고 해야 하는데. (웃음) 현실은 김기덕 영화 속 세계와 같다고 생각해요 -출판사 길찾기에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첫 책으로 내셨습니다. 다른 기획으로 접촉해온 출판사쪽에 먼저 단편집 내달라고 요구했다면서요. 당돌한 요구였을 텐데요. =설득한 건 아니고 “그냥 내봐요! 난 책 진짜 안 사는데 나 같으면 이런 책 사겠다!” 그랬죠. (웃음) 정말 대학 다닐 때부터 분명 이런 만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장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 그 이후 <공룡 둘리>가 떴죠. -<공룡 둘리>도 그렇지만 작품에서 의인화 기법을 즐겨 쓰십니다. <사랑은 단백질>에는 닭이 치킨집 주인으로 나오고 <자상발조>에서는 의자가 목을 매죠. 저도 평소 치킨집 간판에 닭이 앞치마 두르고 있거나 참치 캔 광고에 다른 ‘먹거리’들이 나와 질투하는 모습에 질겁해온 터라 재미있게 봤습니다. 작가님은 무생물이나 동물을 즐겨 의인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어쩔 수 없이 “남의 살 먹고 사는” 포식자, 즉 동물의 한종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단편 <사랑은 단백질>의 치킨가게는 이름도 ‘내다리 치킨’이에요. 길 가다 가끔 ‘장기 대출’이라는 플래카드 보고 놀라곤 해요. “뭐? 장기를 대출해?” (웃음) 현실은 기본적으로 김기덕 영화 속 세계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쉽게 <나쁜 남자>의 주인공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어요. 이른바 사회의 상식과 문화는 살짝 덮여 있는 한 꺼풀일 뿐이고 인간은 쉽게 그것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거꾸로 상식과 문화를 지킬 수 있죠. 김기덕 영화에 대한 비난을 보면 짜증도 나요. 아마도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자랐을 그 사람들은 단정하고 고운 심성을 인간의 당연한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김기덕의 주인공들을 사람이 아닌 타락한 존재처럼 보잖아요. -서울역 앞 노숙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둘기떼를 대하는 그것에 비유한 단편 <가짜 비둘기>가 생각나네요. 독자 입장에서는 무크지 <파마헤드>에 실린 단편 <자살방조>가 제일 어려웠어요. 군대 비품인 의자가 실연으로 목을 매고, 자살을 만류하던 말단 군인은 의자의 시신을 별 문제없이 잘 쓴다는 스토리인데요. =군대있을 때 받은 느낌이 모티브였어요. 군대에서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딱 그래요. 휴가 나갔다 온 군인들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오기도 하고 집의 걱정을 떠안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군에서는 점호해서 인원수만 맞으면 끝이거든요. 상담도 소용없어요. 바깥 문제를 안에 붙잡아놓고 상담하면 뭐해요. 군대에 있는 동안 사람이 몇번씩이나 죽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쟤는 이런 면이 이제 죽었구나, 그리고 몇달이 지나면 또 다른 면이 죽은 게 보이고요. 하지만 위에서 볼 땐 잘 돌아가니까 아무 문제없죠. 그 관찰을 한 단계 떨어뜨려 말단 병사와 비품인 의자의 이야기로 풀었어요. -군대도 배경으로 자주 쓰는데요. 예술가 지망생에게 군대가 끼치는 영향은 뭐라고 보세요? =만화가는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후반 사이가 재능을 폭발시키는 기간인데 그때 딱 갇혀 있는 거죠. 물론 작가로서 한국 남자 대부분의 공통 기억을 갖게 되는 건 좋은 점이겠죠. 문명화된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인간의 바닥을 볼 수 있다는 점도요. 저는 군대에서 내가 그렇게 내 윤리를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어요. 강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려면 근엄한 표정을 더이상 지을 수 없으니 <습지생태보고서>와 같은 유머감각이 생겼고요. 서글프기도 했어요. 내려다보는 포즈의 맛도 있는 법인데. (웃음) -<습지생태보고서>에서 인상 깊게 본 에피소드가 몇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성형수술한 여자가, 부모 돈으로 수술한 여자들한테 우월감을 느낀 일화가 하나였고요. 가난한 주인공이 연애할 때 멋진 모습을 한 자아와 초라한 자아가 분열돼서 후자가 전자에게 “오늘 얼마 썼냐”고 추궁하는 에피소드도 감명 깊었습니다. 본인의 분열하는 자아를 항상 관찰하는 편인가요? =예전만큼 예민하지는 않아요. 가령 물건을 사러갈 때나 연애하며 여자와 대화를 할 때 분열하죠. 나도 이 물건 살 만큼 번다고 말하는 나와, 정말 필요하냐고 되묻는 내가 갈라지죠. (파란 새 운동화를 보여주며) 이건 정말 갖고 싶어서 샀어요. 내가 가진 전부를 갖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가장 거기 가까운 상대가 <사랑은 단백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감독 연상호예요. 전 스펙터클을 두려워하나봐요 -<경향신문>에 연재 뒤 단행본으로 5쇄를 찍은 <습지생태보고서>는 스페인어판과 프랑스어판도 출간됐습니다. 유럽에서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나요? =보통 잡지에 연재된 형식의 만화는 그냥 ‘망가’로 나간다고 해요. 그쪽이 친숙하니까요. 일본 만화인지 한국 만화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대량소비되는 거죠. 제 작품은 출판사의 레이블 자체가 ‘한국’이라는 로고 아래 묶여 있어서 ‘만화’로 소개됐어요. 그나저나 동양 만화는 칸의 소모가 너무 많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도시로 전학 간 가난한 소년이 모눈 공책을 아끼느라 글을 다 붙여쓰고, 띄어쓰기는 체크로 표시했다가 혼난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웃음) =하하. 휙휙 넘어가면 독자 입장에서 아깝지 않을까요. 앞엣것 때문에 뒤엣것이 달라 보이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점점 두터워지는 느낌이 있어야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칸을 확 늘린다거나 한 페이지를 털어 그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것도 지면을 꽉꽉 채우려는 마음 때문인가요? =꽉꽉 채우고 싶어서라기보다 변화가 무서운 거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그런 스타일이에요. 마쓰모토 다이요(<핑퐁>)도 칸을 절대 밖으로 안 빼고 오토모 가쓰히로도 그렇죠. 이희재 선생님도 대개 지면을 빽빽이 채워넣으시고요. 전 스펙터클을 두려워하나봐요. -데뷔작 <솔잎>에는 스크린톤을 사용했지만 작품들이 대체로 손으로 그은 연필선의 느낌을 선호하는 스타일입니다. =재료를 잘 못 쓰기도 했지만, 대학 시절에는 만화과 학생으로서 만화하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안하려는 의도가 컸어요. 동양에서 극화만화를 하면 스타일이 굉장히 한정되거든요. 한명이 그려도 열명이 협업하는 공장에서 나온 대량생산 스타일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드니 실험의 여지도 없죠. 그래서 시원시원하게 빨리 빠지는 동양 극화의 영화적 연출과 유럽 극화의 실험적 연출을 종합하는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결과가 <콜라맨>과 <공룡 둘리에…>죠. -또 효율성이네요. (웃음) 본인의 그림체가 정착했다고 보세요? 어찌보면 극히 모범적인 데생이라 기발한 표현을 하고 싶을 때 갑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머리로 그림을 배운 타입이죠. 이미 대학 때 자학을 했고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 같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어요. 색감도 구리다는 말 많이 들었고요. 대신 장점도 있어요. 스타일리시한 그림은 구린 걸 그려도 폼나는데 전 딱 구려요. 앞으로 점점 능숙한 그림을 그릴 순 있겟지만 스타일을 잡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이상도 없고 작품마다 많이 바뀌니까요. -상업적 약점이고 어떻게 보면 미학적으로도 약점일 수 있는데, 최규석 작가의 만화는 작품의 온도가 애매해요. 비극이라기엔 쓴맛이 강하지 않고 웃기에는 찜찜하거든요. =제가 감정기복이 별로 없어요. 감정이 먼저 터져나오는 게 아니라, 기뻐할 일이라고 판단하고 나서야 기뻐해요. 재수없다는 말도 들었어요. “야 너 상받았댄다”라고 친구가 희소식을 전해주면 “아, 그렇구나…. 얼마지?(상금이)”하거든요. 전체적으로 봐서 이것이 기뻐해야 할 일인지, 심사위원의 성향이며 응모작 수준 등등 변수가 다 눈에 들어와요. 강유원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연애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사실 스무살까지는 연애도 안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는 즐거움 이상의 가치를 구할 근거가 없는 행위인데 내가 즐거움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니까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죠. -에세이툰이 인기를 끌면서 극화 만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체감하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다시 사정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과거 만화잡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포탈에 극화 만화가 워낙 많아서요. 잡지로 데뷔했는데 잡지는 망하고 웹으로 이동이 지체된 세대가 제일 힘들어요. 저도 그 세대 끝자락이고요. 그러나 활동할 영역이 특별히 좁다는 생각은 안 해요. 한국에 태어났는데 주어진 것 안에서 해야죠. 그리고 뭐 만화 없다고 세상이 망하나요? -히트작 만화를 보면 성공의 원인을 이해하나요? =대충은 알지만 그 작품만큼 괜찮은 작품들도 있는데 왜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통속성이라는 공통점은 있죠. 원태연 시인의 시, <광수생각>, 발라드 가요, 강도영 형 만화를 보면, 모두 착한 사람, 착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이 있어요. 싸이월드 사진 밑에 붙어 있는 몇줄의 문구들을 봐도 공통분모가 있어요. 십년째 촉망만 받고 있어요 -한국 진보진영이 선거나 정당 활동에 있어 유머와 위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저는 혼자서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을 뿐 실제로 그런 정치활동을 누가 하는지는 몰랐어요. 학교 운동권 선배들은 촌스럽고 폭력에 대한 예민함이 없어 보였고요. 싫다는 술을 강권했죠. 좌파도 폭력적인 사람은 싫어요. 존경하는 논객 중에도 “한번 붙을까? 너 정도는 이길 수 있어” 하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과는 견해가 비슷해도 친해지긴 힘들겠죠. -본인한테는 그런 점이 없을까요? =저한테도 있겠죠. 굉장히 조심해야죠. 인권에 대해서 의식한다는 사람들도 정작 제 자신은 모를 때가 있어요. 무시하면 욕먹는다고 정해져 있는 대상이 있잖아요. 장애인, 여성, 또 어느 자리에서는 누구.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범위 바깥의 사람들한테도 조심하느냐 여부예요. 군대를 소재로 한 단편 <창>의 주제가 그것이었죠. -2005년 <한겨레>가 선정한 차세대 문화 주자의 한명으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세대’라는 말을 싫어하신다고요. =십년째 촉망만 받고 있어요. (웃음) 차세대라는 말에 대한 불만은 신인 취급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 위치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데뷔했을 때 어느 기자가 한국 만화를 부흥시킬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서 강도영 형이 있지 않느냐고 답했더니 놀라는 거예요. 작가 선생님들도 강도영의 그림은 훅 불면 날아갈 듯하다고 비판했죠. 하지만 저는 왜 데생 잘하고 진중한 연출하는 작가한테서 희망을 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의 흐름을 바꾸는 건 당연히 강도영 같은 작가죠. 한국 만화를 바꾼 사람은 ‘착한 만화’라는 장르를 만든 박광수, 네페이지 개그만화에 불을 지핀 양영순이에요. 저 같은 작가가 없었던 시대가 어디 있어요? -지난 몇년의 작업에 부끄러움이 있고 올해 초부터는 작가다운 작업을 할 거라고 확신한다고 홈페이지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일단 <100℃>를 단행본으로 내기 위해 6월항쟁에 참여한 인물들의 20년 뒤 다양한 모습을 그리려고 해요. 6월항쟁만 좋게 그리고 끝내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보잘것없어지는 것 같아요. 20년 전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왜 지금도 우리는 힘들까, 민주주의가 되건 안 되건 상관없구나, 역시 경제를 살려야 겠구나 라고 느끼게 되잖아요. -<한겨레21> 연재 당시 담당한 구둘래 기자에 따르면 마감이 늦은 적이 거의 없다더군요.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시는 걸로 알아요. 만화가 하면 떠오르는 은둔형과는 거리가 먼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같은 자기 관리인가요? 아니면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는 게 즐겁기 때문인가요? =일을 위한 이유도 있죠. 몸에 근육이 있으면 오래 앉아 있어도 통증과 피로감을 덜 느끼니까요. 나머지 반은 자기 만족이죠. 헬스는 10년 했고 지지난해부터 권투로 바꿨어요. 헬스할 때는 달리기를 안 해서 불안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도망칠 수 있어야 하는데…. (웃음) -자신을 규율하는 일이 쉬운가요? =시간을 규율하기가 어렵지 고통 속에 나를 넣어두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追伸 인터뷰를 준비하며 최규석 작가가 쓴 글도 제법 읽었다. 훈련받은 기자나 작가도 아닌데, 두세 차례 퇴고한 것처럼 단정한 그의 문장을 읽으며 글 써서 밥벌이하는 주제가 면구스러웠다. 낭비를 싫어하는 습성과 자신의 사고를 검산하는 꼬장꼬장한 연산의 뼈대가 보이는 글이었다. <습지생태보고서>를 펴낸 만화전문 출판사 거북이북스 강인선 대표는 만화가 특강 의뢰가 들어오면 최규석을 1순위로 추천한다고 귀띔했다. 인권만화 단편집 <사이시옷>과 <대한민국 원주민>을 펴낸 창비의 박영신 편집자는 “오탈자와 틀린 띄어쓰기가 거의 없어 편집자 작업을 덜어주는 작가”라고 보탰다. 문장이 좋다는 분명 익숙할 법한 칭찬에 최규석 작가는 멋쩍어했다. 아무래도 만화가에게 글 잘 쓴다는 찬사는, 칼국숫집에서 깍두기 칭찬만 하는 격인가보다. 그나저나 슬쩍 당황해 눈을 치뜨는 품이 영락없는 강백호다. 덩크슛을 꽂기엔 역시 조금 수줍어 보였지만.

[전영객잔] 미국 시민권을 지닌 영화의 지극히 글로벌한 유통

<위 오운 더 나잇>은 5월29일에 개봉한다. 그러나 이제 극장 개봉의 의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목을 빼고 극장 개봉을 기다리던 관행은 이제 특별히 극장의 영화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이 영화 리뷰로 들어가기 전에 현재 우리가 영화를 향유하게 된 수상한 방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를 보게 되는 경로가 P2P로 다운로드한 파일을 포함하게 되면서 영화의 언더그라운드 혹은 온라인 유통에 있어 다양한 버전의 글로벌한 비동시성과 동시성들이 한꺼번에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서의 영화, 필름 베이스의 극장 상영이나 VHS, DVD를 통한 관람 양태를 급격히 바꾸고 있다. 온라인 서점이었다가 이젠 책 이외에도 많은 것을 팔고 있는 아마존에서 2007년에 개봉된 <위 오운 더 나잇>을 온라인상의 클릭 한번으로 빌리거나 사서 바로 볼 수 있다. 대여는 3.99달러 그리고 구매는 14.99달러다. 미국 시민권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 영토 밖에서는 다운로드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다운로드된 파일이 P2P사이트나 메신저들을 통해 글로벌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영토화된 판매지를 한번만 우회하면 탈영토화는 시간문제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옹. 프랑스 더빙으로 먼저 만난 <위 오운 더 나잇> 이 와중에 파일 리뷰를 읽어본 뒤 다운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세한 내용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할리우드영화 <위 오운 더 나잇>을 보게 되는 일도 생긴다. Quoi(What의 프랑스어에 해당?) 사실 나도 <위 오운 더 나잇> 프랑스 더빙 버전을 먼저 보았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영화는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길들을 우회해 우리에게 온다. <위 오운 더 나잇>의 아마도 <대부>에 바치는 색감의 경배- 흐릿한 황금색과 갈색- 가 위와 같은 파일 유통의 경로 속에서 어떠한 색채를 띠게 되는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색채 변이의 예측 불가능은 디지털 시대, 매체 융합의 어떤 은유가 된다. 필름 베이스의 아날로그 시네마가 디지털 세계로 융합되면서 우리는 ‘영화의 죽음’이라는 경고를 10여년 전부터 들었고, 이제 그 경고는 현실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려진 대로 디지털의 ‘digit’는 라틴어 ‘digitus’다. 손가락이란 뜻으로 숫자를 세는 손이다. 디지투스, 손가락 그중 둘째, 집게손가락은 영어로는 인덱스(index), 색인, 지표 손가락을 가리킨다. 현실 세계의 정보를 이진법으로 컨버전스하는 디지털 시스템은 영화와 비디오를 구성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아날로그 세계를 이진법으로 변환한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투스, 디지털 시그널은 아날로그가 기반하고 있는 기호의 인덱스 기능을 지우면서, 미디어 문화, 그 기상도의 변화를 가리킨다. 필름 베이스의 영화가 가진 영화적 특이성은 이제 디지털적 가변성, 융합성, 복합성으로 바뀐다. 미디어 융합의 시대, 필름이나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물질적 베이스의 구분 대신 이제 포털들은 이미지와 동영상이라는 분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네마나 TV라는 매체 분류 대신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일반화된다.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가 구성해낸 것이 바로 필름과 디지털을 망라하는 이러한 동영상 문화다. 디지털카메라, 캠코더의 보급은 동영상 시청만이 아니라 제작을 일상화한다. 이러한 동영상이 뜨는 공간인 컴퓨터 스크린은 초음파 스크린 등과 더불어 텔레비주얼하며 레이더와 같은 군사 기술과 기원을 같이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스크린 등은 점점 더 이미지화되고 그 이미지가 스크린상으로 나타나는 스크린 중심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 칸영화제 60주년을 맞이하여 구스 반 산트, 왕가위, 차이밍량 등 35명이 참가해 만든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영화, 영화관에 대한 향수어린 경배다. 80년대 후반의 미국 사회를 향한 진혼곡 상황은 이렇고 난 <위 오운 더 나잇> 극장 개봉에 맞춰 리뷰를 쓰고 있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에 위치시키기는 매우 쉽고도 어렵다. 우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와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 <디파티드>, 그리고 최근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등 노장, 명장들의 뉴욕 갱에 바친 연대기가 할리우드 영화창고에 적재된 중에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무슨 생각으로 ‘정통 범죄액션 드라마’인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감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경찰관의 장례식 사진의 비통한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는 부분은 그토록 많은 뉴욕의 갱들을 다룬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영화를 새삼스레 만들었는지를 추론하게 해준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영화의 절정은 비오는 날 추격신 뒤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의 죽음장면에서 온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본> 시리즈 이후 스트리트 액션의 연출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는데, 자동차의 와이퍼를 이용한 스위시팬 효과와 어떠한 CG 효과도 내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총격 장면- 숏건의 긴 총구가 추격 중인 차창 밖으로 나오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힌다― 에 따른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비통한 아들들과 동료들이 참석하는 장례식은 이 영화가 필름누아르, 갱 장르의 어법으로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는 내리고 아들을 지키려던 아버지는 그 빗속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다. 아들 바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빗속에서 거의 숭고하고 신성하게 클로즈업되고 멈춘다. 즉 이 영화는 애도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버지, 예컨대 아들을 지키다가 희생하는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다. 아니,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이라기보다는 그 죽음 앞에 애도할 수 있는 아들, 그 애도를 통한 아들들의 갱신, 각성한 형제들의 연맹에 관한 향수로 지극하다. 프로이트는 널리 알려진 에세이 <애도와 우울증>에서 사랑하는 대상이나 조국 상실에 대한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 두 양태로 분류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치러내지 못하면 그것이 일종의 병리적 상태, 우울증의 상태로 변이해가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2001년 9월11일 이전,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나 가족, 즉 시민들의 애도 작업이 불가능하지 않았던 그리고 향락과 향유가 가능해 보였던 미국의 80년대 후반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복기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나쁜 놈들’이 러시아계 미국인 갱들로 구성된 것은 기존의 <대부>나 <디파티드>의 이탈리안계나 아일랜드계 미국인 갱들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 이민자들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듯도 하고, 기존의 갱영화들의 인종적 설정과 차이 만들기로도 보인다. 즉 80년대 후반만 해도 러시아 이민자와 그들의 친척들 몇명만 없애면 법질서의 회복은 가능해 보였다는 것이다. 영화는 1988년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디스코의 시대 ‘엘 카리브’라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인 바비(와킨 피닉스)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아마다(에바 멘데스)와의 충분히 관능적일 수 있었던 정사신은 급작스런 방해를 받는다. 이런 엉거주춤한 중단은 영화 다이제시스 안에서 앞으로 바비가 겪을 고난을 전조한다. 이에 앞선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스틸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틸 사진들은 현재 NY PD 경찰들의 모습을 총이나 총탄을 페티시화하고 강조해 보여주지만 마치 1920년대 금주령 시대의 재연인 양 흑백이고 재즈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스틸 사진의 슬라이드 쇼에 이상하게도 감독 제임스 그레이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도록 추동시켰다는, 동료를 잃고 마음을 다친 경찰들을 담은 바로 그 사진은 부재한다. 파토스적이고 정감어린 사진 대신 도입부의 사진들은 한편으로는 총을 찬 경찰들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고, 시체 안치실에서 끝난다. 그 문제의 사진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 모여든 경찰관 동료들, 가족들의 애통어린 모습으로 사진이 아닌 하나의 시퀀스로 재연된다. 이 영화의 한편에는 애도할 만한 시민, 희생자로서의 경찰관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있고 그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이름 그루진스키 대신 앵글로 색슨계처럼 들리는 어머니의 성, 그린을 자신의 성으로 하면서 범죄 조직과 연결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아들이 경찰로, 적법한 시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나이트클럽의 매니저로 일하던 당시 아버지 역할을 했던 러시아 이민자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뒤 감옥으로 보내진다. <위 오운 더 나잇>은 역설적이게도 밤의 지배를 선언하는 제목과 달리 사실 누가 미국의 낮을 지배하는가라는 ‘시민권’ 주장을 그 정치적 무의식으로 하고 있다. 카바레를 경영하는 러시아 이민자들 외에 아마다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바비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해한다. <호모 사케르>의 저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개인과 시민의 차이는 주권 그리고 국민국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뉘른베르크 법령 이후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그들의 국적을 완전히 박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권의 행사는 주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시민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밤의 지배자들인 나쁜 이민자들은 축출되고 죽은 시민이 된 아버지의 희생은 애도된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형제들의 혈연 동맹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시작, 사랑은 아마다와 바비의 것이었으나 영화의 끝, 바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형 그루진스키다. 이 영화는 그래도 시민이 적을 색출할 수 있는 미국의 80년대를 향수하나,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의 유통은 글로벌해 프랑스, 스페인어판 <위 오운 더 나잇>이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닌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던 영화의 이러한 유통, 변형이 흥미롭다.

[영화읽기] 1억5천만달러 영화를 혼자 보다니…

-Dear 래리 & 앤디 “사진은 사실에 가까운 매체이지 사실 자체는 아니다. 사실에 가깝다는 이유가 사실을 가장 완벽하게 왜곡할 수 있다.” -김아타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입니다.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죠. 각종 미디어와 영상매체, 인터넷의 사이버 세계는 이미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성형수술이 유행하고, 몸에 걸친 브랜드가 그 몸 자체보다 중요해지고, 광고를 보고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상품을 보고 광고를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세계의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 진짜 돈을 쓰고, 심지어 살인까지 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일찍이 우리 한국의 선조들은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뱉어야 맛이라고 진짜 느낌의 중요성을 설파하셨습니다. 프랑스의 한 현대 철학자는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현상을 시뮬라시옹이라 이름지으며 경고했고, 우리나라의 한 가수는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라고 노래하며 이에 화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신들은 <매트릭스>라는 영화로 이를 멋지게 영상 언어로 표현해냈죠. 와우!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디지털 신호로 이루어진 가짜이며 우린 그것을 진짜처럼 믿고 잠들어 있는 동안 시스템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는 배터리에 불과하다라는 영화 내용은 장자의 <호접몽>의 비극적 버전을 연상시키며, 시뮬라시옹의 허깨비 세상에서 버둥대고 있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들었습니다. 해체주의라는 어려운 철학을 몰라도 우리의 머릿속에 촘촘히 들어선 매트릭스는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물론 네오의 애크러배틱 총격 액션은 만화 같긴 했지만 어차피 매트릭스, 짝퉁 세계에선 뭘 뭣해하는 깨달음과 함께 오히려 통렬한 쾌감이 작렬하게 했죠.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음이 있다면 손가락 하나로 저 산을 옮길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역설적으로 바로 접수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죠. 현실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는 믿음, 그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힘듭니다.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죠. 그래서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발을 쳐다보고 두려움을 느낀 순간 바다에 풍덩 빠져버립니다. 개인적으로 <매트릭스>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면. 그것은 360도 스틸컷을 이어붙인 네오의 멋진 총격신이 아니었습니다. 네오의 동료가 네오를 배신한 뒤,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와 멋진 레스토랑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입니다. 짝퉁 세상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 한 조각의 분홍빛 연어 살코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행복에 눈물겨워하죠. 비록 가짜이긴 해도 매트릭스 밖의 진짜 세상에서 먹던 꿀꿀이죽 같은 음식보단 100배 나았던 겁니다. 그만큼 매트릭스는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 유혹입니다. 텔레비전, 인터넷을 끄고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평생 꿀꿀이죽을 먹을지언정 시스템의 배터리가 되어 노예처럼 사는 것을 과감히 거부하며 마침내 네오와 친구들이 멋지게 점프할 때 우리 심장은 터져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짝퉁의 매트릭스 세계를 과감히 거부하며 (해체하며) 진실을 세상에 알린 그들은 체 게바라였고, 데리다였고, 갈릴레오였고, 예수였습니다. 영웅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요! 이렇게 심오한 얘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당신들에게 어린아이들부터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엄지를 치켜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당신 나라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졌습니다.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더군요. 정말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 혼미해졌습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서민적인 대통령을 뽑았더니 그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시스템을 강화하자고 부르짖더군요. 기타를 퉁기는 가짜 이미지를 진짜처럼 믿게 했던 매트릭스의 책략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죠.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보다 더 충격적인 대반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좌우간 당신들은 이제 모두가 기다리던 새로운 영화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었고 드디어 난 어제 그것을 보았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할 수 있기에 마음의 평정심을 잡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놀라움이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컬러로 질주하는 그 엄청난 속도감은 제 눈을 압도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영화인가?’ 하는 경이로움과 형언할 수 없는 기술력에 모골이 다 송연해지더군요. 그러나 더 깜짝 놀랐던 것이 뭔 줄 아십니까? 극장에 관객이 저 혼자뿐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엔 사실 한쌍의 남녀가 제 뒤에 앉아 있었는데 보다가 중간에 나가버리더군요. 결국 그 이후 러닝타임 절반을 저 혼자서 극장을 독차지한 채 1억5천만달러짜리 영화를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이게 꿈인가 생신가, 기뻐해야 할 일인지 황당해야 할 일인지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습니다. 전깃값도 안 나올 짓을 하고 있는 극장쪽에 민망하고 죄송했습니다. 늘 한국영화를 멋대로 교차 상영하고 조기 종영하는 극장들을 미워했는데 처음으로 동정심도 들더군요. 물론, 마지막 타임의 영화였지만 압구정동이라는, 서울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에 있는 훌륭한 극장에서, 개봉 2주차밖에 안 된 당신들의 블록버스터영화를 왜 난 혼자서 봐야 했을까요? 듣자하니 미국에서도 흥행성적이 좋지 않더군요. 아니 1억달러 이상 쏟아부은 마케팅비와 당신들의 명성, 영화의 제작비에 비해 속된 말로 참패였습니다. 흥행이 안 되었을 때의 감독의 처참한 심정을 잘 알기에 어제 극장에서 팔자에 없는 단독 관람을 하면서 당신들 걱정에 영화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물론 <스피드 레이서>의 4분 분량에 해당되는 돈(1억5천만달러를 러닝타임 135분으로 나누니 1분당 11억원가량 되더군요.)을 평균제작비로 쓰는 나라의 영화감독으로서 주제 넘은 걱정인지도 모르겠지만, 극장에서 블록버스터영화를 혼자 보는 평생에 몇번 없을 기회를 베풀어준 당신들의 호의에 이런 식으로나마 답을 하지 않으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든 것입니다. <스피드 레이서>는 알다시피 40년 전에 만들어진 재패니메이션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실패했고, 만화적 상상력을 현실적인 영화매체에 옮긴다는 것은 본전을 못 찾는 행위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슈퍼맨>이나 <스파이더 맨>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물들이 영화로 만들어져 성공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만화와는 다른 전략을 취했죠. 철저히 SF영화적인, 다시 말해 특수효과가 들어갔지만 매우 사실적인 리얼리티를 만드는 데 고심을 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배짱을 보여주더군요. 아예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 원작에 얼마나 철저히 충실했는지를 한번 보여주겠어라고 작심한 듯 화면들은 온통 물감을 발라놓은 듯한 총천연색의 컬러로 칠해졌고, 앞과 뒤에 있는 물체의 초점이 차이 나는 영화 렌즈의 특성(피사계 심도)을 무시하고 아예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캐릭터들을 2차원 세계 속 애니메이션 인물들처럼 만들려고 했더군요. 이 모든 게 컴퓨터그래픽으로 이루어졌을 텐데 남들은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비싼 돈 들여 쓰는 컴퓨터그래픽을 당신들은 거꾸로 가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썼더군요. 심지어 차가 달릴 때의 배경화면과 도시의 모습은 아예 대놓고 만화영화의 화면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안 되어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명 컨셉을 그렇게 가져간 결과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GOGOGO>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였고, 자신감이었으며,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통섭’을 시도한 혁신적 영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을 넘어 게임의 영역까지 들어가더군요. 레이싱 장면은 마치 카트라이더나 플레이스테이션의 카레이스 게임의 그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얼굴만이 오려붙여진 디지털 화면들이 만들어내는 무한 자유의 세계. 영화이자 애니메이션인 동시에 게임이기도 한 삼위일체의 통섭된 비주얼 스타일을 당신들이 구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그 천재성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했던 <씬 시티>나 <300> 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당신들 영화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그 영화들은 스타일의 일관성을 지키느라 무진 애를 썼지만 당신들은 일찌감치 그딴 건 이제 중요치 않다고 집어던진 뒤 광란의 질주를 뻔뻔하게 벌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영화라고 주장하기도 하더군요. 이 말이 맞든 안 맞든 <스피드 레이서>가 제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이것은 비주얼 콜라주임과 동시에 입체파 화가의 그림이며 오락실과 비디오 아트를 오가는 영상 혁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앞서간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을까요? 왜 많은 관객은 당신들 영화의 멋진 그래픽과 찬란한 영상적 실험을 외면한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스토리가 너무 유치하다고, 아이들 영화 같다고. 하지만 이 영화가 만화영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으며, 또 비록 스토리가 유치하더라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만 700만명을 동원한 <트랜스포머>야말로 그런 대표적인 예 아닐까요? 하지만 당신들의 영화 <스피드 레이서>와 <트랜스포머>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데 모든 총력을 기울여 정말 로봇이 진짜처럼 보였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이 쇳덩이들은 진짜다’라고 최면을 걸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가 지닌 숙명인 ‘환상성’을 깨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야말로 가짜를 진짜처럼 포장하는 대표적인 매체이자 그 자체가 시뮬라시옹이며 매트릭스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것이고, 많은 영화작가들은 그 기계장치가 만들어낸 환상을 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가짜 꿈을 꾸는 것은 이제 그만두자고 주장한 것일까요? 매트릭스를 깨기 위해 떨쳐 일어섰던 원조답게 말입니까? 당신들은 나아가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실사+애니메이션+게임’이 짬뽕된 (고상한 말로 ‘통섭’된)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하며, 이제 더이상 진짜라고 뻥치는 가짜에 속지 말고 아예 오리지널 가짜를 즐기자, 그것이 더 솔직하고 순수한 영화 아닌가? 하고 놀라운 질문을 던지더군요. 그 철옹성 같은 시뮬라시옹을 타파하는 것은 아예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가짜를 만드는 것뿐!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이번에는 매트릭스를 깨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들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진짜 가짜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에 우리를 과감히 초대했습니다. 빨간 약을 먹을래, 파란 약을 먹을래?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흥 종교의 교주처럼, 당신들은 새로운 100% 짝퉁 월드를 만들어 우리를 불러모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용기와 선견지명은 정말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관객이 그 새로운 경험을 신나게 즐겼고, 돈 아깝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관객이 당신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가짜 이미지들 때문에 영화를 보며 하품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영화나 실험영화라면 몰라도 1억5천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에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죠. 왜 그들은 가짜를 가짜로 그냥 즐기지 못했을까요? 왜 그것을 감정의 낭비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메리카는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파생실재(hyper-real)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미 성취된 것처럼 행세해온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파생실재이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지만 그것은 모두 꿈의 재료이기도 하다.” -보드리야르 당신들은 가능한 꿈의 재료들을 총동원해 디즈니랜드를 만들듯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아름답고, 컬러풀하고, 정의롭고, 스피디한 파생실재, 즉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죠. 그러나 9·11 이후의 미국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의 나라가 안전한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서브프라임 사태로 무너지기 시작한 경제는 그 실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도록 현실감있는 것인지 피부에 와닿게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지구 반대쪽의 한국은 인터넷의 힘으로 뽑은 대통령이 결국 미디어가 만들어낸 헛된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깨닫고, 오로지 믿을 건 내 주머니의 돈뿐이라 여기는 씁쓸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10년 전 당신들의 영화가 예견했듯,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죠.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공간이 어딘지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꿈이 깼고, 연어 스테이크 대신 눈앞에 꿀꿀이죽이 놓여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감이 들었고, 슬펐고,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매트릭스를 더 촘촘히 그리고 강력하게 짜나가고 있었고, 이제 그 누구도 그 안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집값이 폭락하면 한국의 주식이 떨어지고, 중국에 지진이 나면 전세계의 주식이 폭락하는 이 시스템은 모든 것이 연동되게 하였고, 더이상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것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나온 당신들의 역작 <스피드 레이서>는 갑자기 새로운 매트릭스의 환상 속으로 관객을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디서 날아온 외계인들이 만든 영화마냥, 오리지널 가짜들로 이루어진 인공 세계의 디즈니랜드로 초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꿀꿀이죽을 떠먹고 있던 사람들이 난감해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토리라는 ‘엔진’과 캐릭터라는 ‘연료’는 40년 전 만화와 똑같고, 겉모습은 이게 영화인지 게임인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최첨단 카본 차체로 무장한 레이싱카를 만든 겁니다. 내용은 20세기, 스타일은 21세기라는 속과 겉의 불일치는 마치 후진 기어를 넣으면서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액셀을 밟아대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일으켰죠. 결과적으로 두 시간이 넘는 레이싱쇼를 즐기려고 세월이 좋지 않아 가뜩이나 얄팍해진 지갑을 열 관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국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지 않으려 해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를 둘러싼 주변의 정세가 그 영화의 존망을 좌우하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재벌 2세도 아닌 내가 당신들의 영화를 극장에서 혼자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어야 할 이 땅의 고등학생들이 엉뚱하게도 청계천 광장에 모여 당신들 나라의 소를 수입하지 말라고 함성을 지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움에 대한 시도, 미래의 영화에 대한 실험은 모든 감독들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스피드 레이서>처럼 배우는 스튜디오의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만 하고, 나머지 배경은 모두 컴퓨터가 합성해주는 영화가 미래의 영화가 될까요? 어쩜 앞으론 배우마저 필요없을 수도 있겠죠. <파이널 환타지>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 등은 그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만달레이>, 피터 왓킨스의 <파리코뮌>처럼 배경을 무시하고 배우의 연기와 스토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실험을 한 영화들도 있습니다. 똑같이 스튜디오 내에서 간단한 세트를 짓고 촬영하지만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에 훨씬 적은 예산으로 완성되죠.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다보면 배경이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더군요. ‘스토리’와 ‘캐릭터’가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환상이란 결국 머릿속에서 합성되는 것이지 결코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죠.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를 관리하는 영역에서 주로 확대된다.” -노르베르트 보비오 10년 전, 당신들은 ‘해체’라는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끌어와 <매트릭스>라는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가공할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스스로를 부정하듯이 <스피드 레이서>라는 가상현실을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현재의 화두가 무엇이든 불행히도 그것은 관객과 소통되지 못했습니다. 가짜임을 속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내가 바로 진짜 짜가야! 라고 외친 그 용기는 대단하지만 왠지 속세를 떠나 은둔자의 길로 가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안 그런 척하는 짜가가 너무 많고 그 짜가는 스미스 요원들처럼 스스로를 복제하며 점점 교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철저히 숨기면서, 세계를 단일한 매트릭스로 묶기 위해 서로서로 뭉치고 있습니다. ‘통섭’ 이전에 ‘소통’이 먼저라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아무쪼록 당신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불가사리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매트릭스와 시스템의 괴물들을 해체시키고, 그들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합쳐져 오히려 단절되어 있는 다른 문화와 다른 생각, 다른 진실, 다른 성이 서로 소통하는, 그래서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accept)하는 쾌감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레이스 결과는 모두 조작되었다! 라고 외치며 시스템에 저항하던 영화 속 주인공 스피드가 생각나는군요. 당신들이 조만간 힘찬 엔진 소리와 함께 귀환하길 진심으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흥행 실패는 넘 걱정 마세요. 투자한 스튜디오는 1억5천만달러를 날렸지만 그 결과 회사의 주식이 떨어져 싼값에 누군가가 주식을 왕창 살 것이고, 다음에 다른 영화가 대박을 내면서 그 주식이 올라 그 누군가는 떼돈을 벌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당신들이 만든 영화 속에서처럼 말입니다. 근데 그 누군가가 혹시 당신들 자신은 아니겠죠 래리 & 앤디? with LOVE+HOPE 2007. 5. 20 서울에서, 번개호를 떠올리며, 정윤철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60년대 동명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영화화한 <겟 스마트>는 5월 마지막 날 첫 기자 시사회를 할리우드의 차이니즈 만 극장에서 가졌다. 다음날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2부로 나뉘어서 진행되었다. 스티브 카렐은 영화에서의 모습이나 기자회견장에서 느껴지는 모습에 별반 차이가 없는 배우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너무나 진지해서 엉뚱하고, 그런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난감해한다. 아래는 스티브 카렐과 앤 헤서웨이, 피터 시겔 감독이 참석한 기자회견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스티브, 프로듀서 말이 회의를 하자고 불렀더니 (당신 같은 스타가) 다소곳이 프로필 사진이랑 이력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라고 하더라. 사실인가. =(스티브 카렐) 그렇다. 워너브러더스에서 전화가 와서 미팅이 잡혔다. 그래서 내 딴에 나름대로 프로필 사진이랑 이력서를 준비해서 찾아갔다. 맥스웰 스마트 역을 따내려는 다른 배우들로 가득 찬 오디션을 예상하면서 잔뜩 긴장해서 도착했더니 넓은 회의실에 프로듀서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이미 캐스팅이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그냥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물론 행복해서다. 뭐랄까, 믿겨지지가 않았다. -원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스티브 카렐) 엄청난 팬이었다. 아마 이 작품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았나 싶은데. 이 작품은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피터, 앤 헤서웨이를 캐스팅하게 된 계기는. =(피터 시걸) 알다시피 배우간의 호흡이 중요하지 않나. 사실 앤은 굳이 와서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지만, 원작의 팬으로서 본인이 와서 스티브와 리딩을 하겠다고 우겼다. 호기심이 생기더라. 두 사람을 함께 두고 보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티브가 대본에 없는 대사로 계속 이어나가는데 앤이 그 호흡을 계속 따라가면서 받아치더라. 그때 이 두 사람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대사가 실제 영화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앤,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녀야 했는데, 어땠나. =(앤 헤서웨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하이힐 훈련은 워낙에 지독하게 한지라(웃음)…. 사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육체적으로 더 힘들었다. 이 작품에서는 스턴트팀, 무술 전문가팀들이 언제나 곁에서 대기하면서 우리 동작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지, 진짜 첩보원처럼 보일지 세심하게 다듬어주었다. 덕분에 할리우드에서 액션하고는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두 배우가 영화에서는 제법 액션 태가 나온다. 물론 우리 둘은 찍다가도 서로 킥킥댔지만. -편집실에서 어떤 컷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피터 시걸) 고민스럽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촬영장에서도 꽤 괜찮은 장면을 잡아냈다 싶어도 혹시 모르니까 작가들에게 백업 조크들을 따로 만들어놓도록 요구하는 편이다. 계속 테스트 스크리닝을 하면서 나이트 비전 카메라로 끊임없이 관객의 표정 등의 세세한 반응을 확인하면서 더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본드걸과 에이전트 99와의 차이가 있다면. =(앤 헤서웨이) 내가 더 재미있다는 점? 아, 그리고 비키니를 입지 않는다는 점도. 내 캐릭터는 본드 걸의 최신 버전이라고 할까. 에이전트 99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그려진 그녀는 다소 독선적이고, 부드러운 내면은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맥스와 티격태격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지켜오던 균형이 조금씩 깨지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 역시 그런 자신의 변화를 좋아하게 되고. 나 역시 어떤 계기를 통해 스스로 몰랐던 새로운 나 자신을 깨닫곤 한다는 점에서 이 캐릭터가 겪는 변화에 충분히 공감한다. -스티브, 명실공히 당신은 할리우드에서 성공신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스티브 카렐) (정색한 표정으로) 하나도 놀랍지 않다. 성공할 줄 알고 있었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지자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이 성공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기회를 행복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너무 빠지지는 않으려고 한다. -앤, 코미디 연기하는 것이 어떤가. =(앤 헤서웨이) 전작에서도 그렇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도 천재들에 둘러싸여 많이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통해서는 코미디를 대놓고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웃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배웠고, 이번 작품에서는 실패를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배웠다.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는 점.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스티브, 드웨인 존슨과 키스한 소감이 어떤가. =(스티브 카렐) 상상해보고 꿈꾸어왔던 모든 것의 결정체다. (좌중 폭소. 그러나 본인은 웃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세 가지 면에서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먼저 매일매일 제공된 훌륭한 촬영장 음식. 다음으로 멋진 캐스팅. 그리고 드웨인과 키스할 수 있었던 것. 드웨인은 정말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옆에서 감독이 부드러운 피부라고 속삭이자 결국 피식거리며)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다. 금방 막 구워낸 과자같이 말이다. (웃음)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창가에 발돋움해 옆집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 미더덕을 만원 넘게 팔았다며 도둑질한 것처럼 가슴 떨려하는 어머니, 동생들의 끼니를 위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큰누나. 이 일화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책 앞장으로 달려가 작가의 나이를 재차 확인하고 싶어진다. 1977년생의 만화가 최규석(<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이 자신의 가족들을 인터뷰해 그린 자전적 이야기 <대한민국 원주민>은 1980~90년대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렸을 적엔…”이라며 운을 떼는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나 존재할 법한 세계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말하는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근대적인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현대사의 페이지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 최규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한푼의 과장없이 진솔하게 펼쳐나간다. 개발과 변화의 급물살이 제치고 지나간 자리에 가만히 남아 있는 삶이, 인간의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다.

[전영객잔] 강철중이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강우석의 열여섯 번째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1-1>(이하 <강철중>)을 보았다. 남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제목의 뒤에다가 ‘1-1’이라는 일련번호로 셈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아니, 꼭 처음은 아니다. 무성영화시대에 실험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적은 있다. 혹은 미술 인스톨레이션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마치 논문을 쓸 때처럼 1번에 관련된 보충 설명을 할 때 그 아래에 ‘1-1’이라는 번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목을 정했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에 ‘빼기’로 읽었다). 영화를 본 다음에야 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우석에게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은 두개의 판본이 있는데, 혹은 ‘동명이인’ 강철중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세 번째 영화는 검사 강철중이 아니라 강동서 강력반 형사 강철중의 판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동서 강철중의 다음 영화가 또 나오면 <공공의 적1-3>이 될까? 혹은 검사 강철중이 나온다면 <공공의 적2-1>이 될까? 그러면 강철중이 나오지 않는 <공공의 적>은 어떻게 셈을 해야 하나? 나는 쓸데없는 데 걱정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두 종류의 원형이판본의 형태로 진행되는 중이다. 그런데 강우석은 항상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영화를 밀고 나간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지루하게 동일한 영화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고 그 안에서 다시 두개의 긴장을 변주한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은 단지 상투적인 매너리즘의 재생산이 아니라 강우석의 예술적 행동이자 정치적 입장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강우석을 설명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 불편할지 모른다. 그 자신도 오로지 대중적인 성공만을 노리는 것처럼 대답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의 전부)일까? 잠시만 돌아보자. 강우석은 ‘자살하는 학교’에 관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를 만들어서 성공한 다음 두개의 다른 버전인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1991)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1992)를 만들었다. 현실과의 대면. 그런 다음 대면의 해피엔드 버전 혹은 대면을 회피하는 방법. 그러니까 3부작을 선택하는 대신 그려낸 대한민국 ‘하이틴’에 관한 삼각형의 초상화. 그런 다음 대한민국 부부에 관한 보고서 3부작 <미스터 맘마>(1992)와 <마누라 죽이기>(1994),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은 서로 다른 수위에서 ‘하여튼’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부부간의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아니, 차라리 남편의 위상학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3부작. 육아를 누가 할 것인가, 가부장제는 어디로, 이혼이라는 문제 혹은 아내의 성의 권리. 그리고 물론 세편의 <투캅스>(그런데 세 번째 ‘여자’ 파트너 버전은 제작만 했다). 그런 다음 세편의 <공공의 적>. 상투적인 표현. 그는 하나의 영화가 성공하면 재빨리 그것을 재생산한다. 끝.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강우석이 그렇게 단순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단순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의 반복적인 ‘예술적’ 행위마저 그렇게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강우석의 영화를 내내 보면서 그가 대중영화의 자장 안에서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사회적인 토픽, 정치적인 테마, 다소 우스꽝스럽긴 해도 역사적인 문제들을 건드려왔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적은 없으며 항상 우회하였다(<실미도>). 때로 지나치게 우회하는 바람에 길을 잃기도 하였다(<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혹은 가혹하게 다듬은 이론적 무기를 들고 그를 비판하는 일은 너무 쉽다(<한반도>). 아니, 단지 강우석의 곁에 (거의 동시에 충무로에 데뷔한 동기들인) 장선우나 박광수의 영화를 들이대서 대차대조표를 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첫 번째 영화를 찍은 다음 지금 제도 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강우석과 이명세뿐이다(그런 다음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등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강우석은 대중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친화성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하여튼’ 활동하면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관심있는 것은 반복의 친화성이라는 질문이다. 물론 강우석을 끌어들여서 설명하려 들 때 자칫하면 모든 문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의 영화들은 종종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선을 그은 적이 없으며, 그 모든 실수를 만회할 만한 걸작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석은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리가 즐기게 만들고 있다. 그건 한국 대중영화 안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방법으로 대중을 유인하는 전술이다. 대중을 유인하는 강우석만의 전술-반복 먼저 반복이라는 문제. 왜 사람들은 시리즈물을 보는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표현. 왜 사람들은 같은 아이디어, 같은 줄거리, 같은 주인공을 반복해서 보는 것일까? 약간의 우회. 롤랑 바르트는 영화 대신 소설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반복해서 다시 읽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상업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습관과 반대되는 행동이다(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새로운 것을 더 빨리 소비해야 하니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본의 회전을 멈추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다소 단순하게 말하면 반복해서 보는 행위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학습된 우리의 습관은 일단 한번 ‘삼켜버리면’ 그 다음에는 내버린다. 그런 다음 재빨리 우리는 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을 산다. 다만 ‘다시 읽는’ 행위는 어린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학교 안의 교수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행위는 지금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단지 시네필이나 컬트영화라 아니라도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은 오늘날 대중영화의 새로운 관람 습관이다. 꼭 그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단지 그 영화의 몇 장면이 주었던 ‘짜릿한’ 흥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극장에 다시 가는 ‘일반’ 관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시네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다시 보는’ 행위를 통해 거기서 새로운 의미나 재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첫 번째 관람행위의 즐거움을 ‘재현’하고 싶어서이다. 그 둘 중 누가 더 훌륭한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 둘 사이의 ‘다시 보기’는 서로의 목표가 다른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가 500만명을 넘기는 순간부터 이러한 관람행위가 ‘눈에 보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영화의 1천만 관객영화는 ‘재(再)관람’이라는 행위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숫자라는 뜻이다. 당신이 두번 보건 세번 보건 박스오피스는 항상 새로운 관객으로 셈한다. 행위의 수량화. 의미의 무효화.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행동양식을 자본의 쪽에서 재빨리 제도화화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관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는 이미 ‘경험’한 관객을 다시 끌어들이는 편이 한결 손쉽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며, 더군다나 그렇게 새로운 영화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종종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방법은 간단하다. 성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이야기, 성공적인 주인공, 성공적인 약속들. 물론 이것은 장르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모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서 단지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이 등장했을 때(이를테면 올 여름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그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1930년대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크게 성공했지만 그 속편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은 그 박스오피스의 기록을 새롭게 쓴 <사운드 오브 뮤직>이 성공했지만 그 속편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2년 <대부>는 그 속편을 만들었다(약간 사태가 우스꽝스러워지긴 했지만 3편도 만들었다). <엑소시스트>는 속편을 만든 다음 전편을 만들고 번외편도 만들었다. 그런 다음 1978년 <스타워즈>는 아예 처음부터 연작을 내걸고 제작을 시작하였다(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첫 번째 영화인 에피소드 4편이 실패했다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슈퍼맨>은 연작 대신 시리즈물을 내걸고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속편과 연작, 리메이크는 영화들 사이의 (거의 인류학적) 친족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 공포영화들,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는 B급 연작물의 ‘막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항상 나쁜 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리언>은 감독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그런 다음 1990년대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시리즈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몇몇 시리즈는 살아남아서 21세기로 넘어왔다. 이를테면 <배트맨>. 물론 그 사이에 긴 세월을 버틴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 ‘제임스 본드’를 설명하면서 움베르토 에코는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라는 멋지고 간결한 정의를 제공한다(물론 좀더 학문적으로 블라디미르 프로프를 제안해볼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일반적인 도식과 계속해서 끼어드는 부차적인 에피소드가 배열되고 그 안에서 서로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대수학처럼 반복적으로 작성된다. 매번 다른 악당이 등장하긴 하지만 하여튼 그들이 나타나야만 이야기가 작동되기 시작하고, 매번 다른 본드걸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항상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본드는 이 악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여자를 만나 에로틱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녀를 과거로부터 해방시켜주지만 이러한 관계는 악당에게 생포되어 고문당하는 바람에 깨지게 된다. 하지만 본드가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 그러하여 이제 본드는 온갖 노고 끝에 여자의 품 안에 쉬게 되나 그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는 이 간결한 설명을 읽은 다음 <공공의 적>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하지만 <공공의 적>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강철중에게는 ‘강철중의 여자’가 없다(심지어 아내도 없다. ‘첫 번째’ 그 대신 늙은 노모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다). ‘두 번째’ 그 대신 그의 곁에는 강동서 강력반 형사들이 있다(그리고 <공공의 적2>에는 그나마 없다). 제임스 본드의 버전을 변형하면 이렇다. “(강철중은) 흉측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온갖 노고 끝에 악당을 물리쳐 이 악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그런데 악당이 결국 죽은 건지 죽도록 맞은 건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이 공식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자문자답. 먼저 질문. 에코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게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쓰면서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한계가 이렇게 분명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풀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에코의 대답. 제임스 본드 시리즈물은 그것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보를 양산해내는 메커니즘에 가깝다고 부른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스파이들의 세계를 파헤치면서 세상에 대한 어떤 각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독자들의 게으른 상상력과 부주의한 독서에도 아무 지장을 받지 않고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악당들에 관한 불변의 구조를 그저 되풀이해서 읽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좀더 멋진 비유. 말하자면 이건 이미 등에 붙은 번호판을 통해서 그 선수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럽 명문 축구팀이 동네 축구팀과 맞붙어 싸우는 경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있고,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플레이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등장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사실상 경기로서는 따분한 시합.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게으름이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반론이 함께 공존한다. 여기에는 (반복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는 이 기대의 지평을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을 퇴행의 메커니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완강한 저항의 심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우석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반복의 행위도 바로 여기로 복귀하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그런 다음 마치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궁리하는 조건화된 왕복달리기이다. 다시! 그런 다음 또다시! 강우석은 마치 명령을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유머도 없이 건조하게 되풀이한다(이를테면 ‘놀이의 상황’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원래의 시작을 거의 잊어버린 <여고괴담>과 비교해보라). 물론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된 보수주의이며, 대중적으로 안전한 방어선 안에서 이미 실현된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환상에 대한 도식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유한 결론을 내세워서 새롭게 드러난 모순을 단지 낡은 문제틀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스크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구조로 바뀌는 어떤 난처한 교환 관계에 놓인다. 말하자면 <공공의 적>이 보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다음 그것을 이미 해결된 문제의 구조 안으로 집어던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말 그대로 이중의 문제. 여기서 말장난처럼 보이는 두개의 ‘문제’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더 간단한 설명.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폐쇄회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아무리 새롭게 문제를 제기해도 자꾸만 이전의 틀과 겹쳐져서 종종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 문제를 제기하기도 전에 이미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전도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은 플롯이 아닌 ‘강철중’ 물론 이러한 양식을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텔레비전 시트콤이다. 매주 같은 등장인물, 같은 상황, 다른 친구, (전체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의) 새로운 말썽. 사실상 시리즈물을 찾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예전 이야기에 충실한가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이다. 그래서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이 가장 분개하는 것은 최신편이 정말(!) 새로워질 때이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들이 지금도 숀 코너리 흉내를 내는 것은 웃겨 보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숀 코너리보다 더 숀 코너리처럼 대사를 하고, 연애를 즐기고, 위기를 탈출하고, 미식을 음미하고, 다음 회를 준비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때 시리즈물을 보는 관객의 고정점이 플롯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공공의 적>은 결국 강철중에 관한 시리즈이다. 반문. 강철중은 반복해서 ‘다시’ 보고 싶은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인가?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건 취향의 문제이다(혹은 설경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강철중은 제임스 본드인가? 노! 강철중은 인디아나 존스인가? 노! 강철중은 배트맨인가? 노! 왜 대답은 아니요, 로 일관되는가? 강철중은 현실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서 동화적인 판타지를 떠맡을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에서 시도하는 강우석의 반복의 프로그램이 놀이상황과 게임으로서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는 것은 그가 아무리 장르의 유머에 가까이 다가가도 현실이라는 경계를 명확하게 한정해놓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뛰어넘어가면서까지 현실을 잊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철중>의 시나리오를 쓴 장진의 <킬러들의 수다>와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현실은 강우석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여기서 강우석이 반복을 통해서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기 이야기의 복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 이야기를 현실과 동등하게 다루려는 방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이때 강우석의 반복의 행위는 정치적인 입장이 된다. 물론 그것이 매우 비유적이고 때로 너무 단순해 보여서 종종 핑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공공의 적>을 비판할 때 내 동료들은 강우석에게 그냥 ‘척하지 말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나 노력을 기울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이를테면 <강철중>에 관한 <씨네21> ‘개봉영화 20자평’에 실려 있는 촌철살인들을 보라. 물론 나는 여기서 그 별점의 개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충고 속에서 강우석을 위해 변명하고 싶어진다. 내 생각은 반대이다. 하지만 강우석이 정치적인 자신의 행위를 좀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대중적인 재미를 포기하라, 는 메시지로 읽는다면 그건 내 생각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공공의 적>이 더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좀 복잡한 논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강우석이 자기의 정치적 제스처를 더 밀고 나갈 때 우리는 그가 우파 보수주의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강우석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사회의 헤게모니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모서리까지 다가간 다음 재빨리 되돌아온다. 종종 그의 영화가 첫 장면을 보여준 다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혹은 영화 시작 이전으로까지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때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영화 전체의 과정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근심한다. 정치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어떤 것으로부터 배제시켜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강우석에게서 보게 된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정치적이라고! 강우석은 반문한다. 아니, 나는 그 행동을 어떻게 하면 안 해도 되는가를 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야! 그러니까 강우석은 봉준호의 반대말이다. 이를테면 정반대의 두 영화, <한반도>와 <괴물>(물론 내가 여기서 우파 보수주의라는 말을 쓸 때 2MB와 강부자, 고소영, 조·중·동, 뉴라이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는 강우석이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항상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 안에 정치적인 태도가 잠복해 있으면서도 종종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주장들이 지나치게 파토스에 기대면서 이성적인 반론을 제기하거나 혹은 정면으로 비판하려는 태도를 모두 부적절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그는 매번 자기의 토픽을 정치적이거나 최소한 사회적인 영역 안으로 끌고들어간다. 그러나 정작 그가 문제를 제기할 때는 재미있으면 된 거잖아, 이봐 자네 충분히 즐겼잖아, 라는 식으로 핵심적인 질문을 피해간다. 여기서 구태여 강우석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재미들이 거의 예외없이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때 강우석의 파토스는 항상 주인공이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언제나 인물이며, 그중에서도 주인공이다.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강우석의 연출이 가끔씩 멈칫거리는 대목들은 예외없이 주인공의 일상생활의 습관과 터무니없는 유머, 종종 지루할 정도로 고전적인 성격묘사, 무언가 돋보일 만한 특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만화 속의 인물들처럼 단지 캐리커처에 가깝게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오로지 강철중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세부적인 사실들까지 잘 알게 된다. 그가 늘 하는 반복적인 말투, 어떤 때 입술을 삐죽거리는지, 그 순간 강철중은 어떤 심리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런 다음 그가 어떤 액션을 보여줄지, 우리는 강철중의 행동 패턴과 사회적 반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안에서 강철중은 우리에게 숨겨진 사생활이 없는 사람이다. 이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강철중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사기를 당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이다. 잘 알려진 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강우석은 강철중을 다루면서 그가 마치 속이 투명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본다. 그게 투명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강철중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니, 차라리 항상 행동이 생각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강철중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약간 희극적이다. 그는 생각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단지 행동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 대신 강철중을 위해서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강철중의 생각의 자리에 있고, 강철중은 우리의 행동을 대신한다. 이때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였던 강철중은 사실상 우리의 거울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것이 그저 희미한 까닭은 생각과 행동의 분리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하게 강철중이 우리에게 떠넘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채무관계를 물어보는 것이 <공공의 적> 연작이 다루는 반복, 그리고 <강철중>의 차이에 대한 질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우메 발라구에로] “호러물의 플롯과 TV 리얼리티쇼의 영상언어를 결합시키고 싶었다”

하우메 발라구에로의 <네임리스>(1999)는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의 <야수의 날>(1995)과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떼시스>(1996)를 잇는 새로운 스페인 호러영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발라구에로는 안나 파킨, 레나 올린 같은 국제적 배우들과 <다크니스>(2002)를 만들었고, 칼리스타 플록하트 주연의 <프래절>(Fragiles)(2005)을 감독했다. 두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냥 그랬다. 발라구에로는 장르를 잘 이해하는 연출자지만 스페인의 친우들처럼 타고난 재능은 좀 부족한 듯했다. 2인자의 자리에서 고만고만한 영화만 만들다가 잊혀질 운명이었달까. 지금은 좀 다르다. 오는 7월1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호러영화 (2007)는 발라구에로의 대표작이자 재기작이다. 비평적, 흥행적 성공을 등에 업고 스페인에서 속편 작업에 한창인 하우메 발라구에로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했다. 동문서답도 간간이 있지만 그냥 실었다. -어떻게 페이크 다큐멘터리 호러영화 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가. =우리는 아주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플롯과 실시간 리얼리티 TV 방송의 영상언어를 결합시킨 싸구려 호러영화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이런 아이디어가 나온 게 아닌가 싶다. -P.O.V 핸드헬드 스타일이라는 기술적, 예술적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건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텐데. =우리는 이 영화를 오로지 P.O.V로 찍어낸 다큐멘터리처럼 작업했다. 촬영 전에는 리허설을 굉장히 많이 했고 카메라의 위치도 가장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TV 리얼리티 쇼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 것이다. 영화 속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캐릭터들의 리액션이 어떨까를 늘 염두에 두고서 가장 현실적으로 담는 것에 중점을 뒀다.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느낌을 잘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신은 이 영화를 <로마산타>(Romasanta, 2004)의 감독 파코 플라자와 공동으로 연출했다.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나눈 것인가. =둘이 사전에 합의를 봤다. 만약 둘 중 한명이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건 아예 영화에서 배제하기로 말이다. 이런 합의가 공동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그에 따라 모든 사항을 함께 결정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리얼하다. 그들에게 정해진 대본을 준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장면에서의 리액션을 뽑아내기 위해 다른 일들을 꾸몄나. =이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버전으로 이야기를 해온 터라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시나리오와 매우 흡사하지만 가장 리얼하게 찍기 위해서 현장에서 많은 작업을 했다. 사실 다른 영화들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고 말하겠다. -<클로버필드> <다이어리 오브 데드> 등 지난해와 올해 와 똑같은 형식을 차용한 장르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예술가로서 이 부분에 어떤 공통적인 잠재의식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정말 놀랍다(shocking). 하지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크니스>와 , 그리고 전작들을 보면 당신의 장기는 어둠에 대한 관객의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걸 장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당신만의 전략은 뭔가. =어둠은 시각을 차단한다. 바로 앞에 존재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드는 거다. 이 부분이 그런 상황을 도발적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는 좀비영화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일종의 오컬트영화로까지 변환한다. 그리고 당신 영화에는 언제나 조금씩의 오컬트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혹시 이건 당신이 가톨릭 사회에서 자라난 스페인 감독이라서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흥미롭게도 스페인 내에서는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데 스페인 바깥에서는 늘 이 질문을 듣는다. 글쎄.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닐 땐 매일매일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가 벽에 걸려 있는 걸 봐야만 했다. 그리고 스페인 문화는 지난 천년 동안 미술 등 수많은 부분에서 아주 엄격하게 종교적이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스페인 호러 감독들이 전세계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당신들을 다른 유럽 호러 감독들과 구분하는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다. 나는 <버려진 아이들>(The Abandoned)의 나초 세르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의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타임크라임>(Timecrimes)의 나초 비갈론도 등과 잘 알고 지낸다. 우리의 공통점이라면 비디오 클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에릭 로메르를 조지 로메로만큼 좋아한다는 거다. -는 미국에서 리메이크 중이다. 얼마나 관여했나. =벌써 완성돼서 유튜브에도 예고편이 올라와 있더라. 그런데 미국에서 리메이크한다는 사실을 나도 인터넷으로 보고 알았다. 우리는 리메이크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오픈칼럼] 유감천지

1. 제45회 대종상 작품상은 <추격자>가 받았다.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역시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과 배우 김윤석이 받았다. <추격자>가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상의 영화는 아니지만 시사회 때 손에 땀을 쥐고 보았던 걸 생각하면(예전에는 요르그 뷰트게라이트의 영화를 보면서 야참도 먹었는데 요즘은 날이 갈수록 무서운 장면을 못 본다), 나홍진은 실력있는 감독이며 김윤석은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된 뛰어난 배우다. 하지만 올해도 대종상은 역시나 어딘가 이상하며 허전하다. 홍상수의 <밤과 낮>을 ‘<씨네21> 창간 13주년 기념 특집 베스트 설문’에서 1995년 이래 지금까지 나온 전세계의 모든 영화를 통털어 베스트 1위로 꼽은 나로서는 허전할 수밖에 없다. 수상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올해 대종상 작품상 후보는 <밀양> <세븐데이즈> <추격자> <행복> <즐거운 인생>(영화제 사이트에 올라 있는 순서)이었으며, 나는 <밀양> <행복> <추격자> <세븐데이즈> 순으로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즐거운 인생>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밤과 낮>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유감이다. 2. 배우 유인촌은 나의 유년 시절에 영화와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심어준 사람이다.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영화 한편을 소개해주었다. 어린애가 볼 만한 프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내가 본 모양이다. 그때 그가 소개해준 영화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가 아니었던가 싶다(물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크 타티를 소개한 건 틀림없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이 영화가 참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걸 소개해준 멋있는 배우가 기억에 오롯이 남았다. 그 뒤로 그 영화를 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고 나니 즐거웠다. 자크 타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듯 유인촌이라는 이름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 습관처럼 됐다. <전원일기>는 잘 보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 그의 연기를 보고 더욱 좋아하게 됐다. 가련하지만 광기로 가득 찬 연산을 그는 연극세상에서 다져진 품위 넘치는 연기로 보여주었다. 그가 이명박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됐다. ‘좌파적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얼마 전에는 촛불집회 참여자 중 일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에 오물을 투척한 것을 계기로 조선일보를 위문 방문하면서 이례적으로 장관이 한쪽 언론만 편드는 게 아니냐는 구설수에 또 오르내린다. 내가 사랑하던 배우가 내가 힘겨워하는 시대의 장관이다. 유감이다. 3. 휴가는 잘 보냈느냐고, 어딘가 다녀왔느냐고,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그런 거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오픈칼럼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좋은 곳에 다녀왔다고 해도 애초에 나는 그곳의 추억에 대해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가 가장 성실하게 한 건 평소와 다르게 <9시 뉴스>를 챙겨보는 일이었고,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건 저녁 7시에 드는 햇볕이 하루 중 가장 노랗더라는 것 정도다(방금 편집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오픈칼럼을 쓰는 게 먼저라는 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전영객잔보다… 그걸 어찌 잊을까…).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휴가 뒤끝에 오픈칼럼을 쓰는 것이 어느새 <씨네21>의 전통 아닌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유감이다. (그 밖에도 유감이 많은 요즘이지만 되도록이면 영화(계)와 영상 담론,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잡문을 쓰는 것이 내가 오픈칼럼을 쓸 때 정해둔 나름의 규칙이라 세 가지만 적었다. 지금은, 유감천지다.)

[오마이이슈] 그들은 사익의 날개로 난다

공원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두돌배기 애 손에 들려 있는 과자를 빼앗아 먹으려고 덤볐다. 애는 울부짖고 다른 비둘기들은 그 와중에도 애 발밑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달려들었다. 21세기가 지나기 전 호러무비의 새 주인공은 분명 조류독감도 피해간다는 이 시커멓고 탐욕스러운 비둘기떼일 것이다. 대체 누가 비둘기를 평화의 새라고 했던가. YTN이 비밀 텍을 짜서 주총장을 바꿔가며 엠비맨 구본홍씨를 결국 사장으로 선임했다. 40초 만의 날치기 처리였다. 회사에서 동원한 덩치들이 반대하는 직원들을 밀어내고 단상을 겹겹으로 막은 장면을 보니 며칠 전 애 손의 과자에 달려들던 비둘기떼가 생각났다. 비둘기는 덥고 굶주려 잠깐 정신이 나간 듯했지만, 자신의 이권을 위해 체면도 염치도 벗어던진 이 시커멓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무리들은 뭐란 말인가. 인터넷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IPTV 사업자 중 한곳인 LG데이콤(myLGtv)은 최근 몇몇 시사 프로그램을 삭제하거나 제외한 채 내보냈다. 쇠고기, 촛불, 광고불매운동 등 현안을 다룬 방송분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해명도 석연치 않다. 소송 중인 프로그램이라서 그랬댔다가, 후발업체로서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민감한 정국을 다룬 콘텐츠는 서비스할 수 없댔다가, 정치적 편향이 있거나 품질이 낮은 프로그램은 뺄 수도 있다는 둥. 주문형 유료서비스 사업자가 가입자와 프로그램 제공자의 동의없이 제멋대로 콘텐츠를 편성·편집할 수는 없다. 특정 내용만 지속적으로 뺀 것이야말로 민감하고도 정치적인 행위이다. 누가 봐도 올 하반기 실시간 방송 서비스를 앞두고 사업자 선정권한이 있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눈치를 본 것이다. 이미 포화상태인 휴대폰과 인터넷만으로는 더이상 시장 확장을 하기 어려운 기업들이 눈을 돌린 새로운 노다지가 인터넷TV다. 기업 프랜들리한 정권 아래에서, 어쩜 이렇게 하는 짓이 눈물겹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21세기 리퍼블릭 어브 코리아는 사익의 날갯짓 소리만 요란하다. 자본과 정권이라는 두 날개로 뭉친 이들 사익동맹은 체면도 염치도 없다. 어느 네티즌은 MBC 드라마에 언뜻 비친 경찰청장 어청수의 벽걸이용 말씀 ‘선진 일류경찰로 도약-보다 신속하게 더욱 친절하게 가장 공정하게’를 보고 “나나나 울컥했다규~” 말했다. 역시 ‘감동’먹은 댓글들이 달렸다. “신속 친절 공정하게 때린다규~.” 보다 신속하게 낙하산 타고 접수하고, 더욱 친절하게 회장님의 경영권 불법승계는 무죄방면시켜드리고, 가장 공정하게 온갖 입에 재갈 물리는 세상, 나나나, 정말 울컥한다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