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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사랑의 찬가 Eloge de l’Amour

월드시네마|스위스·프랑스|장 뤽 고다르|2001년|98분 거의 반세기가량을 ‘숨가쁘게’ 달려온 노장의 새 영화는 제목과 달리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고다르의 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가 구성해내는 기억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근심이다.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강력한 매체는 스스로의 표현수단을 지니지 못한 인민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진정한 전투는 바로 이 기억의 장에서 벌어진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미셸 푸코이다. 고다르와 더불어 미셸 푸코의 이러한 전언에 대한 충실한 영화적 주석가라 할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총체적 기억은 마취된 기억이며, 하나의 집단적 기억 뒤에는 천개의 개인적 기억들이 존재한다고(또한 성서는 영화와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의 총체적 기억이다, 라고). 크리스 마르케가 꿈꾸었던,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현재로 날아온 인물이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SF영화라는 프로젝트는 <사랑의 찬가>에서 실현되었다. 고다르는 흑백으로 촬영된 현재와 컬러로 촬영된 과거를 대비시키면서 유례없이 명료하게 영화를 전개시킨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관한 노트>에서부터 존 포드 영화의 대사에 이르기까지 예의 인용과 오마주 또한 어김없이 등장한다. 레지스탕스 활동 중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 노부부의 이야기에 대한 판권을 사서 그럴싸한 역사멜로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 그들에겐 자신들만의 기억이 없지…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과거를 사는 거야. 특별히 저항했던 이들의 과거를. 혹은 그들은 말하는 이미지를 팔기도 해.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그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고.”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근심으로 빚어낸 이 역설적인 <사랑의 찬가>는 우리로 하여금 한 진정한 예술가의 육체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원망하게 만든다.

픽션과 진실의 결혼을 꿈꾸다

이사온지 얼마 안되는 이 도시는 폭동에 휩싸여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시위가 진압 경찰과 병력을 만나 유혈극으로 변한 국가 폭력의 현장. 하스켈 웩슬러의 헨드헬드 카메라는 어머니 역을 맡은 여배우 베르나 블룸의 시선과 발길을 바짝 쫓아 헤맨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는 시카고. 그곳은 맥루헌이 ‘쿨 미디엄’이라고 불렀던 텔레비전의 속성과 현대정치에 관한 예리한 성찰을 보여준 극영화 <미디엄 쿨>의 촬영장이기도 했다. “웩슬러, 이건 실제상황이야!” 스탭 하나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고 난 직후, 경찰의 최루탄이 발사됐다. 극본, 감독, 촬영의 1인3역을 한 웩슬러가 “픽션과 시네마 베리테의 결혼”이라고 부르는 이 영화의 상영과 배급은 폭동의 복판으로 게릴라처럼 뛰어든 촬영과정 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미국 정부가 한동안 상영을 금지했고, 할리우드는 냉담했다. 대신, “거대한 시각적 충격, 영화로 만든 <게르니카>”,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영화”라는 평단의 평가가 <미디엄 쿨>의 훈장으로 남았다. 이때, 웩슬러는 이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로 이미 오스카상을 수상한 할리우드의 ‘유명촬영감독’이었다. 동시에 틈만 나면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했다. 물론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은 아니었다. 1922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그는 버클리 수학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지만, 일년만에 낙제한다. 그뒤 2차 대전 중 상선의 선원으로 복무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데플렌의 무기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영화 제작의 꿈을 펼치려한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그에게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이를 거울삼아 카메라조수로 다시 시작한 그는 교육과 산업에 관한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된다. <후드럼 프리스트>(1961), <엔젤 베이비>(1961) 같은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를 촬영하던 그는 63년 이민자의 실상을 그린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 아메리카>에 이르러 할리우드의 주류에 본격 합류한다. 강렬한 흑백화면이 인상적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66년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고, 67년 노만 주이슨의 <밤의 열기속으로>를 통해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두 번째 아카데미의 영광을 안겨준 할 애쉬비의 <바운드 포 글로리>(1976)는 차분한 색조의 아름다운 묘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할과는 <귀향>(1978)에서도 함께 작업한다. 조지 루카스 감독의 <아메리칸 그래피티>(1973)에서는 비쥬얼 컨설턴트로 독특한 영상을 그리는데 일조한다. 하스켈 웩슬러를 주목할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인터뷰 위드 마이 라이 베테란>, <인드로덕션 투 더 에너미>, <언더그라운드> 등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적 쟁점들을 이끌어냈다. 그의 렌즈는 때로는 핵확산을 반대하고, 때로는 억울한 자의 정당함을 입증하려하며, 때로는 도주하는 CIA요원을 비추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단지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스켈 웩슬러의 이상은 여전히 ‘픽션과 진실의 결혼’이다. “다큐멘터리는 좋든 나쁘든 실제 삶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잘 만들어진 극영화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진실이 담겨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우리 목전에 닥친 거짓되게 그려진 사회에 대적할 유일한 길이다.” “극영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며, 그 외의 일들은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것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다큐멘터리나 광고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나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명과 배치를 조절하는데 자유롭지 못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경험은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극영화의 공간과 프레임을 구성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치며,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은 극영화 속에 사실성 있는 화면을 그려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미술작품”이라는 찬탄을 유발하는 그런 화면들. 최근 우디 앨런과의 작업이 취소돼, 어떤 작품으로 다시 그를 만나게 될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진실에 기반한 신념에 차있는 웩슬러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필모그래피 촬영 (61, 2001)(TV) 빌리 크리스털 감독 <더 맨 온 링컨스 노즈>(The Man on Lincoln’s Nose, 2000) 다니엘 라임 감독 <굿 커드 배드 커드>(Good Kurds, Bad Kurds, 2000) 케빈 맥키어넌 감독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하스켈 웩슬러 감독 <림보>(Limbo, 1999) 존 세일즈 감독 <머홀랜드 폴스>(Mulholland Falls, 1996) 리 타마호리 감독 <진실과 탐욕>(The Rich Man’s Wife, 1996) 에이미 홀든 존스 감독 <캐나다 베이컨>(Canadian Bacon, 1995) 마이클 무어 감독 <론 이니쉬의 비밀>(The Secret of Roan Inish, 1994) 존 세일즈 감독 <베이브>(The Babe, 1992) 아서 힐러 감독 <타인의 돈>(Other People’s Money, 1991) 노먼 주이슨 감독 <폴 뉴먼의 블레이즈>(Blaze, 1989) 론 셸톤 감독 (Three Fugitives, 1989) 프랜시스 베버 감독 <범죄와의 전쟁>(Colors, 1988) 데니스 호퍼 감독 <엉클 밋>(Uncle Meat, 1987) 프랭크 자파 감독 <메이트원>(Matewan, 1987) 존 세일즈 감독 <사랑도박>(The Man Who Loved Women, 1983)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라스베가스의 도박사들>(Lookin’ to Get Out, 1982) 할 애쉬비 감독 <귀향>(Coming Home, 1978) 할 애슈비 감독 <바운드 포 글로리>(Bound for Glory, 1976) 할 애슈비 감독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76) 하스켈 웩슬러 감독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밀로스 포먼 감독 <적과의 대면>(Introduction to the Enemy, 1974) 하스켈 웩슬러 감독 <트라이얼 오브 카톤스빌 나인>(Trial of the Catonsville Nine, 1972) 고든 데이빗슨 감독 <인터뷰 위드 마이 라이 베테랑>(Interviews with My Lai Veterans, 1970) 하스켈 웩슬러 감독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하스켈 웩슬러 감독 <화려한 패배자>(The Thomas Crown Affair, 1968) 노먼 주이슨 감독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 노먼 주이슨 감독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1966) 마이크 니콜스 감독 <버스>(The Bus, 1965) 하스켈 웩슬러 감독 <러브드 원>(The Loved One, 1965) 토니 리처드슨 감독 <베스트 맨>(The Best Man, 1964) 프랭클린 스카프너 감독 <아메리카 아메리카>(America, America, 1963) 엘리아 카잔 감독 <페이스 인더 레인>(Face in the Rain, 1963) 어빙 커슈너 감독 <로니>(Lonnie, 1963) 윌리엄 할레 감독 <후들럼 프리스트>(Hoodlum Priest, 1961) 어빙 커슈너 감독 <엔젤 베이비>(Angel Baby, 1961) 폴 웬드코스 감독 <사베지 아이>(The Savage Eye, 1960) 벤 메도우 감독 <스터드 로니간>(Studs Lonigan, 1960) 어빙 레네 감독 <파이브 볼드 우먼>(Five Bold Women, 1959) 조제 로페즈 포르틸로 감독 <스테이크 아웃 온 도프 스트리트>(Stakeout on Dope Street, 1958) (uncredited) 어빙 커슈너 감독 제작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러브드 원>(The Loved One, 1965) 각본 <정글의 반란>(Latino, 1985)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버스>(The Bus, 1965) 감독 <버스 노동조합>(Bus Rider’s Union, 1999) <정글의 반란>(Latino, 1985) <버스II>(Bus II, 1983)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76) <적과의 대면>(Introduction to the Enemy, 1974) <브라질:고문에 관한 보고>(Brazil: A Report on Torture, 1971) <미디엄 쿨>(Medium Cool, 1969) <버스>(The Bus, 1965)

소녀, 달의 정복자

오늘, 달을 보았다. 달은 가장 커다랗게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걸쳐 있었다. 인간이 달을 바라볼 때부터, 달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우리는 달을 보며 인간이 지닐 수 없는 에너지를 떠올렸고, 우주의 스펙터클을 디자인했다. 만월이 뜨면 나타나는 괴물이나 달에 세워진 식민지나 달에서 온 괴물이라는 소재는 판타지와 SF에 친숙하게 사용되던 것이다. <러브머신>과 <요동의 뱀파이어>를 통해 섹슈얼리티와 폭력이라는 두개의 키워드를 SF와 판타지의 상상력에 유려하게 실어낸 이유정은 <아시안> <가물치전>을 통해 SF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안타깝게도 데뷔 초기에 보여준 기대에 비해 후속작에서는 상업적 성공이나 비평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유정의 은 달에서 시작된다. 달의 미개척지 탐사선에 근무하던 미나는 범죄자들에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한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미나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 자란 지타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친구(미유키, 루니)와 함께 폭력서클 핑크클럽을 만들어 조직을 와해시키는 여고생이다. 지구는 정체불명의 거대 로봇에 공격을 받는다. 거대 로봇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살육한다. 인류는 달에 생존의 터를 잡았고, 달에 모인 인류의 지도자들(<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제레’ 같은)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영원의 아이 프로젝트를 시행한다(‘네르프’같은 조직에서). 지타는 영원의 아이를 위한 소모품으로 연구소 같은 조직에 들어온다.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달을 지배하게 될 영원의 아이라고 생각했던 지타는 폭주, 양아버지의 죽음, 자신을 피하는 친구들에게 상처받고 결국 자신이 소모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타의 내면은 철저히 파괴된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던 지타는 달의 아이 중 한명인 케이와 싸우다가 엘을 위한 화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자아가 죽어버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텔레파시로 늙어버린(<아키라>의 ‘실험체’ 같은), 그래서 대용품인 지타를 필요로 하는 엘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일어난다. 생명체를 못 죽이는 엘은 자신이 흡수해야 할 지타에게 흡수되어버린다. 여기까지가 단행본 2권과 인터넷 사이트 연재분 31회까지의 이야기다. 힘의 섹슈얼리티 이유정이 보여주는 섹슈얼리티는 그가 집착하는 세라복, 짧은 치마에 긴 다리, 루즈삭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여주인공, 하얀 팬티라는 몇 가지 요소에 집약된다. 언뜻 매우 전형적인 섹슈얼리티의 관습으로 보이지만, 미소녀 캐릭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소녀 캐릭터는 귀여운 얼굴에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를 특징으로 한다. 일본의 18금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디자인된 미소녀 캐릭터는 지금은 꽤 많은 만화를 통해 익숙해져 있는데, 가슴이나 엉덩이가 비정상적으로 강조된 이들 캐릭터는 원시시대에서부터 존재했던 다산을 상징하던 여성상에 근접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눈에 귀여운 얼굴과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는 남성들의 보호본능과 동시에 정복욕을 자극한다. 그걸로 끝이다. 반면, 이유정의 캐릭터는 복잡하다. 거대한 가슴이나 엉덩이도 없고, 얼굴은 어려보이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관음의 시선이 허락되는 건, 담임이 웃옷을 벗겨버릴 때 드러나는 루니의 가슴, 어린 왕자가 그린 루니의 누드, 식물원의 주인이 훔쳐보는 지타의 팬티, 어린 왕자가 바라본 루니의 팬티를 훔쳐볼 때 정도이다. ‘세라복’이라는 일본식 섹슈얼리티의 기표에 가둬진 그녀들의 육체보다 강렬한 것은 힘이다. 지타, 루니, 미유키는 힘으로 근처의 조직을 격파하며 달의 지배자가 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특히 주인공 지타는 수백 대 일의 대결에서도 승리하는 폭주의 힘까지 지니고 있다. 루니를 납치해 나체로 묶어 놓은 55블럭의 조직 전체를 지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한다. 관음의 시선은 어느새 여성의 공격에 대한 남성의 공포로 이어지고, 지타의 힘에 으깨어지는 남성들을 보며 마조히즘적 환상을 충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 섹슈얼리티에 동요가 없는 건 아니다.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여신들’ 중 한명을 남성이 조종한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핑크클럽의 3인조 중 한명인 미유키는 지구의 전장에서 하평을 부상입게 한 남자친구 때문에 새로 부임한 선생 하평의 노예가 된다. 달과 지구에서 전개되는 SF의 변주들 은 이유정 특유의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달과 지구에서 각각 특색있는 SF의 양상을 변주해낸다. 친구를 지구로 보냈다는(실은 지구가 아닌 달의 연구조직으로 잡혀간) 자책감에 범죄자들과 무차별 살육의 외계인들이 우글거리는 지구로 내려간 미유키의 이야기는 마치 밀리터리 SF를 보는 느낌이며, 제레와 네르프 그리고 <아키라>의 실험체를 연상시키는 지타의 이야기는 사이버펑크를 보는 느낌이다. 이 두 가지 SF의 변주가 각각 흥미롭게 진행되면서 을 만들어간다. SF에 관한 한 이유정은 우리나라에서 자기 색을 가진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전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지 못한, 미완의 기대주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새로운 또 새로운… 발견은 계속된다

한상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신상옥 회고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7개월 전인 지난 4월의 일이었다. 원래 이 회고전은 지난 해 제 5회 부산영화제를 위해서 기획되었지만, 몇 가지 사정에 의해‘춘향전 회고전'으로 변경되었었다. 나는 일단 이용관 전프로그래머에 의해 작년에 준비된 자료들을 토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지난 해 영상자료원 상영 시에 녹화한 테이프들로라도 가능한 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깜박거림이 심해 영화를 보는 도중 종종 회의주의자로 변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내시> <로맨스 빠빠> <벙어리 삼룡이> <상록수> 등 전에 본 작품들도 다시 보았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 <동심초> <자매의 화원> <지옥화> <젊은 그들> <로맨스 그레이> <쌀> 등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처음 만난 것도 4월 경이었다. 일단 올해 회고전을 열기로 한 사실을 전달하고, 구체적인 상영작의 결정은 협의해서 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신상옥 감독을 만났을 때 나는 70여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 가운데 5, 6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했다. 신상옥 감독은 이에 대해 북한에서 만든 작품과 90년대 작품 <증발>에 관해서 애정을 보이면서 이번 상영에 꼭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증발>의 상영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보이는 몇몇 장면들은 인상적이었지만, 좀 낯설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신상옥 감독에게 정중하게 거절하려는 의도에서, 비디오숍에서 이 영화를 다시 빌려 보았다. 그러나 신상옥감독의 여러 영화를 거친 이 시점에서 <증발>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즉 60년대 기간 동안 대형 사극을 연출한 뒤, 현실 문제를 중시하는 북한 시절의 영화를 거친 후에 나온 귀결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또 다시 두 번을 보고 이틀 간 고민한 뒤 <증발>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신상옥 감독의 전체 필모그래피 안에서 지니는 중요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월 말 경에 <증발>과 <탈출기>를 포함해 8편을 결정했다. 물론 여러 번 교체 과정을 거친 후였다. 이미 영문 자막이 있는 프린트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내시> <이조여인 잔혹사> <증발>을 정했고, 새로 영문 자막을 첨가할 작품으로 <지옥화> <연산군> <천년호> 그리고 <탈출기>를 결정해 녹취 작업과 대사의 영어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회고전에 관련된 영문 서적도 만들어야 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세계를 조망하는 글을 내가 쓰기로 했고, 몇몇 테마를 골라 필자들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신상옥 감독의 작품 세계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선정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도 계속 보아야 했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통해 <꿈> <무영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등의 영화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9월 초에 발견한 영화가 <다정불심>이었다. 출시된지 오래 된, 그래서 안좋은 화질에 화면도 텔레비전 비율로 바뀐 비디오였는데도, 솔직히 아주 매력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는 특히 시각적 탁월성, 그리고 히치콕의 <현기증>을 생각나게 하는 현대적 테마가 놀라웠다. 다음 날 영상자료원에 문의해 프린트를 볼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프린트는 없이 네가 필름만 보존되어 있다는 답이 왔다. 필름으로 작품의 온전한 가치를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비디오로 한 번 다시 본 뒤 모험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프로그램팀에서 실무를 진행하는 양정화씨에게 <다정불심>을 추가하자고 말했다. 그 동안 몇 차례 같은 상황을 겪은 양정화씨는 이번에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회고전은 매 단계마다 업무가 매우 많다.) 나는 회고전을 성사시킨 뒤의 보람을 생각하면서 좀더 고생하자고 했고, 양정화씨는 다른 말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무척 고마웠다. 이렇게 <다정불심>이 추가되고, 다시 9월 하순 <탈출기>가 <소금>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쳐 아예 두 편을 다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모두 10편으로 최종 결정된 것이다. (솔직히, 준비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20편 정도를 골라 다시 신상옥 회고전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회고전 개막을 눈앞에 둔 지금 안타까운 것은 비용 부족으로 새 프린트에 영문 자막을 새기지 못하고, 원래 계획과 달리 레이저 영문 자막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신상옥 회고전은 벌써 내년 2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며, 프랑스 도빌에서도 <다정불심> 등 몇 작품으로 회고전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영문 자막이 없는 프린트들은 실제로 해외 상영이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지금 신상옥 감독 개인이 새 프린트들에 영문 자막을 넣기 위해 애쓰고 있다. 좀 더 많은 예산이 영상자료원에 묻힌 뛰어난 작품들의 영문 자막 프린트를 위해 배정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포커스] 사랑의 찬가

프랑스, 스위스, 2001년, 97분 France, Switzerland 2001, 97 min 감독 장 뤽 고다르 오전 11시 대영2관거의 반세기 가량을 ‘숨가쁘게’ 달려온 노장의 새 영화는 제목과는 달리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고다르의 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가 구성해내는 기억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근심이다.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강력한 매체는 스스로의 표현수단을 지니지 못한 인민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진정한 전투는 바로 이 기억의 장에서 벌어진다고 말한 이는 다름 아닌 미셀 푸코. 미셀 푸코의 이러한 전언에 대한 충실한 영화적 주석가라 할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에서 ‘총체적 기억은 마취된 기억이며, 하나의 집단적 기억 뒤에는 천 개의 개인적 기억들이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크리스 마르케가 꿈꾸었던,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현재로 날아온 인물이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SF 영화라는 프로젝트는 <사랑의 찬가>에서 실현되었다. <사랑의 찬가>에서 고다르는 현재의 파리를 다시 한 번 알파빌처럼 바라본다. 이야기가 끝나고 의미가 떠오르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도래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세 시기(청년/ 장년/ 노년)를 통해 이야기가 아닌 역사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주인공 에드가의 노력이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상하게도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은 기억(과거)으로만 남은 젊음과 현재의 지친 노년뿐. 저항과 혁명에 대한 기억, 혹은 그에 대한 후일담. 그럼에도 고다르는 기어이 우리가 여전히 성인이 되지 못했으며 아직 아무 것도 말해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고다르는 흑백으로 촬영된 현재와 컬러로 촬영된 과거를 대비시키면서 유례없이 명료하게 영화를 전개시킨다. 여기엔 현재를 성찰하고 과거를 우리 앞에 환하게 불러 세우고 싶어하는 고다르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 <사랑의 찬가>는 회고조의 역사영화들에 관해 영화로 쓴 비평이기도 하다. 레지스탕스 활동 중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 노부부의 이야기에 대한 판권을 사서 그럴싸한 역사멜로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 그들에겐 자신들만의 기억이 없지…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과거를 사는 거야. 특별히 저항했던 이들의 과거를. 혹은 그들은 말하는 이미지를 팔기도 해.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결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아. 그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구.”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근심으로 빚어낸 역설적인 <사랑의 찬가>는 우리로 하여금 한 진정한 예술가의 육체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원망하게 만든다. 유운성

<칸다하르>를 보니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탈레반 정권이 맨 먼저 수행한 일의 하나는 텔레비전 사형이다. 압수한 티브이 수상기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탱크로 깔아뭉개는 ‘참살형’도 있었고 수상기들을 노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다는 ‘교수형’도 집행되었다고 한다(이 상징적 교수형 끝에 수상기들은 다시 끌어내려져 박살형에 처해진다). 음악은 금지되고,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들도 텔레비전과 운명을 같이한다. ‘이미지’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영상 이미지는 사람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순수 이슬람 국가’를 향한 탈레반의 열정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그리고 서구풍 대중문화나 서구 영향을 받았다고 판정되는 문화형식들에 대한 탈레반의 혐오가 얼마나 강도 높은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서구적인 것들만 수난당한 것은 아니다. 탈레반이 지난 봄 바미안 계곡의 7세기 석불들을 폭파한 것도 그들의 눈에는 석불이 ‘이슬람에 어긋나는’ 우상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금지된 그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들어가 그 땅의 현실을 이미지로 잡아낸 영화 한편이 지금 세계적 화제가 되고 있다. 이란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작품 <칸다하르>(Kandahar)가 그것이다. 마흐말바프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이란영화의 물결’을 일으킨 두 거장 중 하나이다. 그는 영화감독이면서 소설가, 대본작가, 극작가이고 그의 가족은 부인, 딸, 아들이 모두 감독인 ‘마흐말바프 영화인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가 <칸다하르>를 완성한 것은 지난 2월이고, 이 작품이 유명해진 것은 9월11일의 뉴욕 참사 이후이다. 완성 이후 일곱달 동안 이렇다 할 주목도 받지 못하고 “별 중요성 없는 소재”를 다룬 영화로 먼지 속에 묻힐 뻔했던 작품이 졸지에 화제작이 된 것이다. 더구나 ‘칸다하르’는 탈레반 정권 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의 출신 지명이기도 하다. 감독이 테러사건을 예견했을 수는 없다. 그는 무엇 때문에, 무슨 동기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도 영화적 소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나라에 목숨 걸고 숨어들어 렌즈를 들이댄 것인가?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마흐말바프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탈레반은 ‘무지의 군대’이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재난의 정권’이다. 탈레반 집권 이후 5년간 60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난민 신세가 되어 나라 밖으로 탈출했고 국민 대다수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부르카’(burka, 장옷)로 가려야 하는 여자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당한다. ‘어머니’와 ‘아내’만이 여성의 기능이다. 사내아이들도 80%가 학교엘 다니지 못한다. 마흐말바프가 <칸다하르>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 ‘진실’은 그가 무지의 군대라 부른 탈레반의 압제와 그 압제로 고통받는 아프간의 참상이다. 영화를 만들기 전 1년 동안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치밀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이 관찰과 분석도 그의 인터넷 사이트(www.makhmalbaf.com)의 ‘영화’ 메뉴 <칸다하르> 방에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다. ‘작은 지식의 불꽃’으로 ‘인간 무지의 깊은 바다’를 비춰보려 했다는 것이 말하자면 그의 <칸다하르> 제작 동기이다. 극적 구성과 다큐멘터리를 섞은 <칸다하르>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시적 영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마흐말바프 사이트의 <칸다하르> 포토 갤러리에 떠 있는 첫 번째 이미지는 쿠란 경전(?)을 펴든 검정 부르카 차림의 두 여자와 그들 뒤로 푸른색, 갈색 부르카를 입고 서 있는 여자들을 보여주는데, 이 화면의 색조와 구성은 숨막히게 심미적이다. 부르카에 갇혀 숨막히는 아프간 여자들의 영화적 이미지가 이처럼 숨막히게 아름답다니, 에고, 이건 무슨 조화인고? 아프간의 비참한 현실을 기록했다는 <칸다하르>의 장면장면 이미지들은 어찌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가? 목발 군상의 장면까지도? 이런 숨막힘은 탈레반의 현실과 탈레반의 저항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분열의 진실이기도 하다. 남의 것 훔치면 손목을 잘라버리기 때문에 길에 빵을 내다놓아도 누구 하나 집어가지 않는다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이런 나라에서 ‘이슬람의 법’은 정신의 차원으로부터 그저 가혹하고 무서운 ‘형법’의 차원으로 주저앉는다. 우리가 탈레반의, 또는 이슬람의 저항을 이해하는 일과 탈레반의 원리주의적 황폐를 지적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

모순의 땅, 핍박의 대지에 서서

99년 칸영화제 시사회장, 경쟁부문에 오른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 <카도쉬, 성스러움>의 상영을 기다리는 자리였다. 주요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은 물론 영화 저널의 편집장들, 신문사 기자들, 영화 관계자들이 서로에게 조용한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스라엘영화가 경쟁부문에 오른 것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칸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수십편의 다큐멘터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극도로 예민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어온 아모스 기타이 감독의 극영화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관심을 받을 만하다. 그때 칸영화제의 상영을 두고 아모스 기타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에서 <카도쉬…>가 상영될 때 매우 상징적인 두번의 순간이 있었다. 유세프 샤히닌(이집트 감독)이 그의 <타자>(역시 그해 칸에서 상영)라는 영화의 캐스트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 문제를 다루어온 그 용감한 사람을 관객 속에서 발견한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서 2500명의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 다른 약속 때문에 뛰어나가기 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짧은 침묵에 큰 의미를 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리고 망명 <카도쉬…> 이후 2000년에는 <키푸르> 그리고 올해의 <이든>으로 아모스 기타이는 칸에서 3회 연속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1972년 빛에 관한 실험영화인 <흑백>이라는 슈퍼8mm 실험영화로부터 시작한 40여년 가까운 영화감독의 삶을 여전히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아트하우스 극장과 유럽 방송사에서 그의 영화들이 집중적으로 보여지면서 대중적 관심 또한 높아가고 있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 그의 최근작 <이든>이 보여지며, 1회 전주영화제에서 <카도쉬…>와 다큐멘터리 <필드 다이어리>가 상영된 적이 있다. 그리고 11월 도쿄에서 아모스 기타이 회고전이 열린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세계적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을 때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들이 세계 영화지도 위에 중요한 지점으로 부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지금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 작업하지만 아모스 기타이는 이스라엘 군부 지도자들과 유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건축학 박사 아모스 기타이는 1950년 10월11일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생으로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베를린에서 일했다. 이후 그는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뒤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아모스 기타이는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슈퍼8mm로 실험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삶에서 원형적인 상처로 남는 사건은 1973 욤 키푸르 전쟁 당시에 일어났다. 그는 다른 이스라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징집되었고 주어진 임무는 헬리콥터로 부상자를 수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수송기가 폭격을 당했고 자신의 동료의 머리가 부서져 기내에 구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모스 기타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이 참혹한 경험은 <이후> (Ahare)(1974), <전쟁의 기억들> (War Memories)(1994), <키푸르> (Kippur)(2000)와 같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영화들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키푸르>에서 죽은 동료를 부둥켜안은 채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병사의 모습은 73년 전쟁의 그 사고현장과 중첩된다. 아모스 기타이는 1976년 버클리대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학자인 레오 로웬탈 등과 같은 진보적 철학자들로부터 사사했고 1977년 도시 공동체들에 대한 논문으로 건축박사 학위를 받았다. 77년 이스라엘 텔레비전에서 일했으나 <집>이라는 작품이 친팔레스타인적 내용 때문에 방영이 금지되었고 키부츠 등에서의 개별 상영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기타이는 이후 영화 제작을 더욱더 심각하기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건축을 전공하면서 몇개의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쟁 일지>(1982.3)로 레바논 침공 몇 개월 전에 완성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처음 만든 <전쟁 일지>는 유럽 전역에 방영되고 영화제들에서 상영되었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영화의 반-군사적 성격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상영되지 못했다. 세계 전역에서 다큐멘타리들을 만든 뒤 그는 1985년에 <에스더>라는 첫 번째 픽션을 만들었고 <베를린-예루살렘>과 <골렘-망명의 혼> 등을 만들었다. 1985년 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아모스 기타이 회고전이 열렸고, 유럽, 시드니(1986) 그리고 미국(1986)에서도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1992년 <유대인 전쟁>(기독교 시대의 첫세기)이라는 서사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이것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개막작으로 다시 공연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기타이는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던 시점에 장편을 찍었고 반-유대 범죄가 일어난 뒤 독일 부버탈에서 다큐멘터리 <부퍼탈 계곡에서>를 찍었다(변영주 감독은 이 작품을 자신의 다큐멘터리 베스트 10에 뽑곤 한다). 유럽에서 다시 파시즘이 발흥하는 것을 기록한 두편의 다큐멘터리는 브레히트가 경고했듯이 ‘야수’가 여전히 수태한 채 유럽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총통의 이름으로> <퀸 메리 제니비에>) 1993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1994년 도시 삼부작을 시작했는데 샤바티의 소설 <데바림>에 등장하는 텔아비브가 무대다. 그뒤 <욤욤>(1995) 그리고 <카도쉬…>(예루살렘)를 만들었다. <카도쉬…>가 칸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뒤 광범위하게 상업적으로 배급되었고, <키푸르>을 연출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한편으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또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기억이라는 역사적 시간-공간의 교차는 그의 작품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코미디영화인 <비술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in Vesoul)에는 팔레스타인 필름메이커인 엘리아 슐레이만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의 기억들>라는 일련의 프로젝트는 <키푸르>에서 완성된다. 1999년 그는 바르셀로나의 건축 전시 초청을 받아 <매스 퍼블릭 하우징>이라고 이름붙여진 10개의 비디오 모니터 설치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해체를 통한 확장 요리스 이벤스와 프레드릭 와이즈만 그리고 샹탈 액커만 그리고 크리스 마커의 다큐멘타리들이 그렇듯 아모스 기타이의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은 기존 다큐의 안과 밖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그 장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강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침묵과 동작 그리고 시선이다. 이렇게 비다큐멘터리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좌파로서의 아모스 기타이는 필름압수, 상영금지, 망명 등을 거치면서도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또 유대인 내부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이 그의 작품 속에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서 서유럽과 미국계 유대인들이 동유럽이나 아프리카계 유대인들을 2류 시민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든지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이 그것이다. 아모스 기타이는 유대사회의 전통과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사회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말하자면 종교와 그 모순을. 세속적인 국가와 근본주의자들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종교 그룹들은 시민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주적인 정신을 견지하면서 중동에 대한 좀더 이성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내가 유대의 전통에 충실한 방식은 그에 대해 비판적인 위치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 전통에 대한 존경이 바로 나로 하여금 비판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유대교는 무정부주의적이고 탈중심적인 것으로 종교적인 국가와 정반대의 것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제도에 종속되지 않고 바로 비판적으로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유대의 전통에 충실할 수 있다는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작업은 대단히 헌신적인 지식인-예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바우하우스의 계승자이며 아모스 기타이 역시 건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력이 보여주듯 그의 영화에서 집, 땅, 공간, 공동체는 핵심적인 재료다. 그리고 이것은 땅을 둘러싼 분쟁으로 점철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집>(BAITm, 51분)이라는 1980년 작품에서 그는 이스라엘에 집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그 집에 대한 기억과 집착, 권리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집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필드 다이어리>에서도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무성한 땅의 상실을 애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온다. 또 1979년 팔레스타인들이 살던 지역에 이주한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의 폭동을 다룬 <와디 살립 폭동> (MEORAOT WADI SALIB)을 만들었고 또 1991년 <와디(1981∼91)-10년 후>라는 하이파의 와디 루시미아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외에도 그는 도시 삼부작이라는 시리즈물을 만드는데 하이파, 텔아비브 그리고 예루살렘, 그 세 도시를 차례로 찾아간다. <카도쉬…>는 바로 기타이의 도시 삼부작의 세 번째 작품으로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다. 종교적으로 강요된 가부장적 압제와 여성들의 그에 따른 수난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촬영된 곳은 오소독스한 종교 공동체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른 아침에만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가편집본을 보고 나서 이스라엘의 ‘좋은 영화 장려 기금’은 “우리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바로 예술적인 이유로 이 영화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칸 경쟁부문에 선정되었을 때 그 결정은 물론 전적으로 취소되어야만 했다. <이든>(EDEN, 이스라엘 2001)은 아서 밀러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1939년과 오늘날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을 아서 밀러의 동의를 얻어(그는 샘의 아버지 역으로 직접 출연한다), 1940년과 46년 영국령 아래의 팔레스타인으로 옮긴다. 영화는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시온주의의 신봉자이자 코뮤니스트 건축가 도브가 짓고 있는 건물에 벽돌들이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상주의자인 그는 유대계만이 아니라 아랍계 노동자들에게도 건축 기술을 가르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꿈에 부풀어 있다. 한편 그의 부인인 샘(사만다)은 그런 운동에 동참하면서도 남편이 자신을 등한시하는 것이 불만이다. 그녀는 비엔나에서 온 유대인 칼코프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한편 칼코프스키의 아내는 그 당시 점령군인 영국에 대항해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체포된다. 그뒤 자신의 부모들이 나치 수용소에 감금된 사실을 알게 된 칼코프스키는 목매달아 자살한다. 전쟁에 징집되어 갔다가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돌아온 코뮤니스트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한 샘은 칼코프스키의 시신을 본 뒤 충격에 빠진 채 거리를 배회한다. 팔레스타인 건설의 현장에서 유토피아적 시선으로 단정하고 희망차게 출발한 영화는 차츰 나치와 전쟁이라는 역사의 악몽 그리고 사적 관계의 헌신성의 문제와 얽혀들면서 비극적으로 끝난다. 아모스 기타이 영화의 특징은 바로 가장 미니멀하게 출발해 그것을 역사적, 정치적, 성적 차이의 힘들이 작용하는 복잡한 장치로 폭발시키는 데 있다. <카도쉬…>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은 이 장치의 모순들을 읽고 끌어내는 가장 예리한 관찰자이며 피해자다. (아모스 기타이의 이력에 관한 부분은 2002년 파리에서 간행될 <아모스 기타이>, 세르지 투비아나, 폴 윌먼 편, Amos Gitai, edited by Serge Toubiana and Paul Willemen, Editions de l’Etoile, Paris 2002>의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얻어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필자) 아모스 기타이(Amos Gitai) 필모그래피 1974년 <이후>(Ahare) 1977년 <집>(Bayit) 1979년 <와디 살립 폭동>(Meoraot Wadi Salib) 1985년 <에스터>(Esther) 1989년 <베를린- 예루살렘>(Belin- Yerushalaim) 1991년 <와디(1981∼91)- 10년 후>(Wadi 1981-1991) 1992년 <골렘- 망명의 혼>(Golem, the Spirit od Exile) 1993년 <부버탈 계곡에서>(In the Valley of Wupper) 1994년 <총통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Duce) <퀸 메리 제니비에>(The Queen Mary) 1995년 <욤욤>(Yom Yom) 1997년 <비술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Vesoul) 1994년 <전쟁의 기억들>(War Memories) 1999년 <카도쉬, 성스러움>(Kodosh) 2000년 <키푸르>(Kippur) 2001년 <이든>(Eden) 김소영/ 영상원 교수

이효인이 만난 `허우샤오시엔` 대만감독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에 온 대만 감독 허우샤오셴(54)은 세계 평단에서 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작가로 꼽힌다. 지금까지 한국을 찾은 감독 가운데 최고의 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85년 <동년왕사>(베를린영화제 비평가상), 89년 <비정성시>(베니스〃 그랑프리), 93년 <희몽인생>(칸 심사위원상) 등 그의 영화들은 개인사에 가족사와 대만 현대사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끌어냈고, 멀리서 길게 찍는 유장한 화면은 아시아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번 부산영화제에 들고온 <밀레니엄 맘보>는 대만의 젊은이들을 다루는 3부작의 첫번째 영화로, 카메라 이동이 잦아지고 테크노 음악이 깔리는 등 새로운 변화를 선보인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지난 12일 부산 서라벌 호텔에서 허우샤오셴을 만났다. =-=-=-=-=-=-=-=-=-=-=-=-=-=-=-=-=-=-=-=-=-=-=-=-=-=-=-=-=-=-=-=-=-=- 이효인 내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나는 언제나 <비정성시>를 꼽아왔다. 이 영화는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무척 중요한 영화라고 본다. 만나서 영광이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 영화의 특징인 `롱숏'(멀리 찍기)에 대해 배우들이 연기를 못해서 사용했다고 말한 걸 봤다. 정말 그런지 믿기 힘들다. 허유샤오시엔 내 영화의 연기자는 실제 연기자가 아닌 주변 친구들이나 작가가 많다. 카메라를 가까이 대면 긴장한다. 멀리서 찍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간의 문제다. 내 영화는 과거사를 다룬다. 누구나 과거를 생각하면 안정되고 침착해지고, 또 아름답고 즐거운 면을 기억한다. 그래서 조금 멀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이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는데, 고향에는 가보았는지. 허우 광둥에서 태어나 4개월 만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96년에 영화 촬영장소 헌팅하러 한번 가봤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말은 물론 통하고, 음식도 어머니가 해준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달라져 있었다. 15살 가량의 소녀가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짐이 흐트려져 쏟아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혼자 무척 고생하는데 옆에 있는 청소년들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서 짐을 다시 추려 줬더니 소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 커녕,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가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최근작 <밀레니엄 맘보>에서는 주제나 카메라 이동에 변화가 보인다. 그 변화의 저력이 놀랍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주제 면에서 <비정성시> 같은 시대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아시아 영화의 유산 가운데 정말 자랑할 수 있는 건 당신과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둘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우 나는 내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남들이 지겹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지겨워한다. 하나를 찍고나면 지겹다. 신선하고 색다름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같은 성격과 주제로 영화를 찍는 건 어렵다. 이전에는 과거를 찍어왔는데 이제는 현대를 찍어보자, 그게 <밀레니엄 맘보>이다. 이 98년작 <해상화>는 프랑스에서는 40만명이 봤는데, 대만에서는 관람객이 4만명도 안 됐다고 들었다. 작가주의 영화에 대해 자국의 관객들이 외면하고 외국에서 되레 반기는 현상은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타개책이 있을까. 허우 그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야기 전달방식이 세밀하고 심화될수록 일반관객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현대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보면서 간단한 줄거리와 그걸 알기 쉽게 말해주는 영화에 너무 익숙해졌다. 조금만 복잡해지면 피한다. 나는 빙산의 일각만 노출시켜서 전체를 이해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일반관객들은 지겨워 한다. 프랑스인들은 그런 지겨움에 무척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이 90년대 아시아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았는데 지금은 시들해지고 있다. 아시아 영화의 선풍이 단지 서구 영화제들이 만든 하나의 유행인지, 아니면 세계영화의 한 유산으로 이어질 것인지 어떻게 보는가. 허우 서구에서 동아시아, 이란, 인도영화들이 환영받는다. 문화가 달라서 신선함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서구영화는 지나치게 개발이 많이 됐다. 그 상황에서 아시아 영화의 표현이나 주제 같은 게 신선했을 것이고, 신선하다는 느낌이 떨어지자 이제는 이란과 인도 영화에서 그걸 찾는 것 같다. 마치 소련이 무너진 뒤 동구권 영화가 유럽에서 크게 환영받다가 시들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이 대만의 에드워드 양이나 중국의 장이무, 홍콩의 왕자웨이의 영화를 어떻게 보는지. 또 그들과 연대감 같은 걸 느끼는가. 허우 다 같은 중국인이라고 해서 연대감을 느낄 만큼 감성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이성적이다. 다만 감독들이 살아온 배경이 다른 만큼 영화도 다른 것 같다. 왕자웨이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상하이는 식민지였고 산업이 발달했다. 장사꾼 기질이 많이 발달했는데, 그건 현대적인 것과 통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도시적이다. 장이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또 그곳은 러시아 문화의 전통이 강하다. 대만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면이 강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가 또 다르다. 나더러 장이무나 왕자웨이 같은 영화를 찍으라면 죽어도 안된다. 전에 장이무 감독의 <홍등>의 제작을 내가 맡았을 때 장이무가 시나리오를 들고 와 토론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이무가 보는 각도가 있을 것이고, 내가 보는 각도가 있을 것이다. 두 각도가 부딪치면 이도저도 안된다. 그러니 당신 방식대로 찍으라고 했다. <홍등>은 상당히 정치적이면서 무대적인 연출을 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안 맞는다. 이 같은 대만에서도 차이밍량의 표현방식은 또 다르다. 대만 영화가 세대별로 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그 속에서 어떤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건가. 허우 차이밍량은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으로 대학 때 대만으로 왔다. 그가 타이페이를 보는 각도는 당연히 일반 대만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만든, 가족간의 동성애를 다룬 <하류> 같은 영화의 깊이와 심오함을 나는 담을 수가 없다. 나는 대만의 남부 시골에서 자랐다. 에드워드 양은 타이페이에서 자라서 영화도 상당히 도시화돼 있다.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감독은 자신의 성장배경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거다. 이 프랑스 사람들이 당신의 영화세계를 담아 만든 다큐멘타리를 봤는데 거기에서 당신은 “우리 사회에는 남자가 없다”는 말을 했다. 어떤 의미인가. 허우 남성성의 문제다. 남성성이 점점 중성화하고 있다. 특히 요즘 세대들은 더하다. 수컷의 본능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늙어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약해지고 여자가 강해져서 남자들이 설 땅이 줄어들고 있다. 그에 대한 한탄이었다. 특히 가장 기분나쁜 건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남자들이 툭하면 울고, 정치인들도 거기 나와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울 시간 있으면 가서 일하라고 말하고 싶다. 부산/정리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4]

장르의 섭렵 -<악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옥화>와 유사한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사회물이지. 일제시대에는 <임자없는 나룻배> 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해방 뒤 작품으로는 처음이었을 거야. 원작은 이런 거야. 어떤 작가가 술먹고 가다가 지프차에 치었는데, 자기가 과외하던 여학생이 나중에 보니 양갈보고. <백민>이라는 소설잡지가 해방 뒤에 있었어. 33인의 신예작가들 단편모음이 거기서 나왔는데, 거기 실려 있었거든. 줄거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그때 사회상을 다 집어넣었지. 타협을 안 했어. 오히려 <지옥화>에선 타협을 했지만. 오락성을 겸하고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악야>는 최 여사(영화배우 겸 부인 최은희 여사 지칭) 만나기 전인데, 나중에 들어보니 최 여사는 <악야>를 보고 혹평했다더구만. 35mm 아니면 영화가 아닌 줄 알던 때인데다 <새로운 맹서> <마음의 고향> 이후에 콧대가 높아진 최 여사가 보기에 이제 막 데뷔한 무명감독이 뭐 눈에 차기나 했겠어? 이 참에 해둘 말이 있는데, 과거 작품들에 대해서 거짓말들을 많이 하더구만. 보지도 않고 줄거리를 쓰기도 하고. <열녀문>의 경우에 평자들은 유교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소재에 불과하고 내 입장은 도리어 유교 찬미야. 인간 해방, 여성 해방의 기조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60년대 잡지에 실린 감독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봤습니다. 이 세상 여성들 중에 한국 여인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여인들을 사랑하시다 보니까 그들을 괴롭히는 제도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도 동시에 묻어났던 것 아닐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이조여인잔혹사>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보면, 마지막에 여자 꼬마아이가 엉터리 열녀문을 째려보는 장면이 있죠. =그 영화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색깔이 달라. 여하간에 나는 인내의 미덕이라는 게 좋다고 생각해.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여자들이 떼를 지어 강간했던 남자를 죽이는데, 요즘 어떤 사극도 그렇게 여성들의 발칙한 도발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그 영화가 국제사회에서 평가받기에 결점이 있다면, 일본의 <무사도 잔혹이야기>에 비해 한발 늦게 나왔다는 거야. 국제무대에선 아무리 좋아도 독창성이 없으면 좋은 얘기 안 하니까. -<지옥화>는 그때 사회상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으면서 장르적인 숙련성이 초기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한 영화라고 봅니다. =<지옥화>를 50년 만에 독일에서 처음 봤는데 나도 좀 놀랐다. 되게 열심히 찍었더라고. 그거 찍을 때 카메라가 잘 안 돌아가니까 연필로 돌리면서 찍었는데. 반짝반짝 신호하는 것도 조명 없으니까 미러로 하고. 근데 프린트가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원판 없어져서 듀프에서 딴 거라 그래.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연출 수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욕심이지. 죽기 전에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만 실제와 공부는 달라. 소질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난 천재가 아니야, 무척 노력을 하는 타입이지. 최 여사가 질렸다구, 그런 거에. 최 여사는 책도 한번 정독하면 다시 안 보거든. 난 오래 보진 않지만 20∼30번은 반복해서 봐. -고 이영일 선생님은 신 감독님이 워낙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한에서 영화 못 찍게 했으면 제발로 북한 갔을 사람이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갔겠지. 동구라파만 됐어도 안 올 거였어. 우상숭배만 없었으면. 사회주의라는 것이 당시 우리의 이상이었으니까. 근데 거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야. 나야 1년에 300만달러씩 쓰고 잘살았지만. 3인의 영화스승 -연출 수업 할 때 외국영화를 많이 보셨나요. =프레드 진네만, 윌리엄 와일러 걸 많이 봤지. 중학교 때는 구라파영화들 볼 수 있는 건 다 봤어. 내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채플린하고 나운규. 두 사람을 스승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아. 내가 태어난 해가 나운규 <아리랑>이 나온 해거든. 어떻게 <아리랑>을 보느냐고? 우리 집 앞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극장이 있었거든. 거기서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니 하는 걸 다 봤어. 내 영화 <벙어리 삼룡이>에 나오는 손장면은 나운규 영화에서 따온 거야. 나운규 영화는 불나는 장면을 필름에 착색한 거였어. 나운규 정신이랄까, 그런 작가정신이 나한테 상당히 영향을 줬지. 또 그 당시엔 채플린 영화인지 뭔지 모르고 봤는데, 이게 <골드러쉬>고, 이게 <모던타임스>고, 나중에 다 알았지. <모던타임스>에서 물에 들어갔는데 물이 여기까지밖에 안 오는 거나 깃발 들고 가다가 시위대 만나고 그런 거를 그땐 그냥 웃으며 봤는데, 다 사회성 있는 거더라고. (웃음) 그리피스도 봤고, 기술적인 면으로는 최인규 감독한테 많이 배웠지. 기술적인 면을 해결한 감독이야. -나운규 감독이나 최인규 감독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저 전설처럼 들리는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로 잘 만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 생각) 말할 수 있어요. 다만 최인규 감독은 테크니션이야. 그 사람은 시나리오가 좋으면 틀림없이 좋은 거 만드는 사람이야, 테크니션으로는 확실하지. 한형모 감독 <자유부인>도 봐봐, 테크닉 확실하잖아. 근데 원작이 나쁘면 죽을 쑤니까, 좋은 거 만들다가도 죽을 쑤고 그랬지. 좋은 책 주면 좋은 영화 나오고 나쁜 책 주면 나쁜 영화 나오지. <집없는 천사>는 일본에 프린트가 몇개 남아 있을걸? -얼마 전에 TV에서 <무숙자>(1968)를 보았는데, 서부극 장르를 한국에 토착화시키려면 어떤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실험한 영화라 흥미로웠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가족 멜로드라마로 접근하던데요. =그렇지. 근데 그거 평야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찍은 거요. 안양촬영소가 있으니까 가능했지. 말 달리는 장면에서 자막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사라진 상태라 답답하더구만. <연산군>도 그래. 그 영화에서 처음으로 데이 포 나잇을 시도했는데 노출을 투 스텝 낮추고 역광으로 찍어야 하거든. 근데 요새는 전부 낮 신으로 방영해버리더구만. <무숙자>에서도 밤 신이 다 하얗게 나와. 증인이 없으니까 아무도 몰라서 그렇게 된 거야. -요즈음 들어서야 본격적인 액션영화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하나씩하나씩 장르를 넓혀가는 시기라고나 할까요. 60년대에 감독님이 그토록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뭘까요. =첫째는 예술가로서의 얄팍한 야심이고, 둘째는 블록 부킹 때문이야. 영화법상 회사를 유지하려면 한달에 두편씩 일년에 스물여덟편을 찍어야 하는데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먹고살려고 한 거지, 다. 세 번째라면 내 딴에는 테크닉이 확실하다, 뭐든지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하는 동안에는 열심히 했어. 뭐든지. 자본주의에는 스타시스템이란 게 있는 것처럼, 내 영화가 히트하니까 배급업자들이 자꾸 내거만 가져가려고 했어. 내 회사를 가지고 마음대로 했으니 좋았겠다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연출에 나서는 건 늘 회사 부도 막느라고 목까지 차올라서 힘들 때 했지. <빨간 마후라>도 아주 힘들게 만든 영화야. 박정희와 반공법 -신필림의 위력에서 최은희 선생님을 비롯한 스타시스템의 위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요. =다른 데서도 많이 했어. 그렇지만 많은 중요한 배우들이 전속이었지. 한꺼번에 네 작품씩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스타성 말씀을 하셨는데,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 가운데 누가 더 인기 요인이었을까요. 최 선생님이 출연하는 거와 신 감독님이 연출하는 거와 어떤 게 더 스타성이 있었을까요. =(잠시 망설임) 모르지. 여자들이야 최 여사 나오는 걸 더 좋아했겠지. 현모양처로 나왔으니까. 현실은 현모악처지만. (웃음) -옛날 잡지 기사를 보니까 최 선생님이 신 감독님의 창작적 동반자로 신필림의 많은 연출 아이디어 가운데 상당부분이 최 선생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비주얼에 강하고, 최 여사는 연극을 해서 드라마에 강한 건 있었지. 그래서 내가 드라마 공부한 감독들 많이 기용했다고. 근데 비주얼도 중요하지. 연기자한테 연출시키면 감정선만 따라가고, 시나리오 작가한테 시키면 책 쓰듯이 찍고 그런다고. 지금 TV <명성황후> 잘 찍긴 하는데, 그 사람 보고 영화하라면 힘들 거야. 늘어놓기만 해서. 압축을 해야 하거든. -<연산군> 프린트는 왜 없애라구 하신 건가요. =저예산으로 엉터리로 찍었으니까. 지금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연산군>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면, 전편 찍고나서 후편을 한달반 사이에 찍었거든. 각본도 없어서, 내일 뭘 찍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밤늦게 시나리오 내일치가 나오면 복사기도 없어서 먹지대고 다 써가지고, 아침 6시 되면 나오는 사람들한테 그거 주고. 소도구와 의상은 아예 비원에 맡겨놨어. 그래서 한 얘기 또 하고 그런 게 많고, 템포니 뭐니 다 처져. 이북에서 내가 감옥에서 죽겠다 싶을 때, 이럴 바에 없애고 싶은 거나 없애고 죽자 해서 편지에 그거 태우라고 썼지. 근데 프랑스 놈들은 그게 또 제일 좋다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 좋아하신 것 때문에 박 정권이 만들어낸 영화법도 주도적으로 만드셨을 거라는 평판이 있습니다. =빈농의 아들이니까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봤지. 공무원들 복지부동하는 것만 보다가 박정희를 보고는 최소한 필요악은 된다고 생각했지. 그때 시대론 그랬던 건데. 박정희 두둔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니까. 영화법이란 건 나는 잘 모르고, 내가 커지니까 내가 관여했냐고 그러는데, 그건 아니다. -신필림을 할리우드의 메이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영화산업에서 전무후무한 사례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살아서 영화에 대해 이해가 있는 편이었다구. 이 대통령이 안양촬영소 상량식할 때 나와서 ‘영화인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축사한 게 있지. 근데 잘못한 게, 시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시설은 만들었는데 머리는 따라오지 못했지. 결국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어. 나중엔 풀이 우거지고 소가 왔다갔다 하는 지경이었으니까. 기계란 기계는 다 도둑질당하구. 근데 내가 신필림을 세울 때 콜럼비아를 따서 만들었거든. 그래서 안양촬영소를 인수했지. 스튜디오가 400평짜리, 200평짜리가 있었고 현상소도 있었고, 녹음기도 제일 좋은 거로 들여놓았지. 지금 양수리 종합촬영소 가보면 꼭 텔레비전 촬영소 같아. 물건 갖다놓을 데도 없고, 오픈 세트는 산중에 있어서 산불위험도 있어. 안양촬영소 인수한 거는 은행에서 빌려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지탱할 수가 없었어. -결정적으로 힘들어진 이유는 뭐였나요. =검열 때문이야. 미칠 지경이었지. 정치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미풍양속이란 것 때문에. 키스나 정사장면도 외국사람들 건 그냥 들어오는데 우리 영화는 그게 절대 안 되고. 전기료만 그때 돈으로 400만원이 기본요금이었는데,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 영화법도 피해를 줬어. 제작쿼터를 1년에 4개씩 줬는데 그걸로는 못 먹고 살았지. 200평짜리 스튜디오가 있으면 영화사 등록을 할 수 있었거든. 우리는 600평을 가지고 있으니까 영화사를 3개 만들어서 제작쿼터를 더 땄다구. 그때 정치적으로 내가 움직였으면 훨씬 발전했을지 모르지. 정주영도 완전히 국가차관으로 한 거였으니까. -반공법에 한번 걸린 적도 있으시죠.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을 했었거든, 내가. <민비>가 작품상을 땄을 때야. 그 영화제 출품작 중에 <일본 도둑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공산당이란 건 알았는데, 상영했지. 그게 반공법에 걸린 거야. 그래서 공안부 끌려가서 한바탕했지. <내시> 가지고도 유죄판결 받았잖아. 음란죄라고. 많은 대중 앞에서 음란행위했다는 건데, 거기서 말하는 대중이라는 게 스탭들이거든. 근데 윤정희라는 애가 어디 벗을 애야? 브래지어도 하고 핫팬츠도 입었는데, 음란에 걸렸지. 관례에 따라서.